조선의 왕자에 대한 내용은 회안대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FFBE0D><colcolor=#670000> 고려 신종의 부마 회안공 왕정 | 淮安公 王侹 | |
작위 | 시흥백(始興伯) 시흥후(始興侯) 회안공(淮安公) |
본관 | 개성 왕씨 |
휘 | 정(侹) |
부모 | 부친 영인후 왕진 모친 연희궁주 왕씨[1] |
형제자매 | |
배우자 | 경녕궁주(敬寧宮主) 왕씨[2] |
자녀 | 3남 장남 - 계양후(桂陽侯) 왕연(王挻) 차남 - 신양공(新陽公) 왕전(王瑼[3] 또는 王㻇[4]) 삼남 - 수사도(守司徒) 왕시(王諟) |
생몰연도 | ? ~ 1234년(고종 21년) 9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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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족.이름은 왕정(王侹), 작위는 회안공(淮安公)이다.
2. 생애
2.1. 무신정권기
영인후 왕진과 명종의 장녀 연희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종 4년인 1201년 왕의 딸인 경녕궁주(敬寧宮主)와 혼인하여 시흥백(始興伯)으로 봉해졌다. 이후 후작[5]을 거쳐 회안공(淮安公)으로 진봉됐다.2.2. 몽골의 침입
고종 18년인 1231년 몽골 제국의 살리타이가 저고여 피살 사건을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이르렀다. 12월이 되자 개경이 포위되고 흥왕사가 공격을 받기도 했다. 왕은 민희(閔曦) 등을 살리타이에게 보내 화친을 제안했고, 또 강화를 맺기 위해 종친인 회안공 왕정에게 고려 토산물을 가지고 살리타이의 군영을 방문하도록 했다. 회안공 왕정이 처음 살리타이를 만나보고 계하(階下, 섬돌·계단 아래)에서 머리숙여 요배(遙拜)했는데 살리타이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이내 회안공 왕정이 술과 안주를 준비해 접대하자 살리타이는 회안공 왕정에게 동락(湩酪)을 권했다. 권한 음식을 회안공 왕정이 잘 받아먹으니 살리타이가 크게 기뻐했다. 회안공 왕정을 수행했던 송국첨 역시 안색과 말투가 엄정했기에 살리타이가 감탄했다고 『고려사』에 전한다.고종 19년인 1232년 1월 철군하는 몽골군을 전송하고 2월에 몽골에서 온 사신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 사신 편에 북쪽으로 돌아가는 살리타이가 회안공 왕정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그 내용은 고려에서 사람을 뽑아 개주관(開州館) 선성산(宣城山)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고려에서는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회군하던 살리타이는 9월 귀주성을 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귀주성 전투) 살리타이는 성을 항복시키고자 회안공 왕정에게 귀주성으로 편지를 쓰게 한다. 회안공 왕정은 고려와 몽골은 강화를 맺었으니 항전을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귀주성의 박서와 자주성[6]의 최춘명은 저항을 계속했다. 자주성에서는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대집성에게 들려 보냈는데, 최춘명은 "성중의 사람들은 회안공을 모른다."[7]라며 대집성에게 활까지 쏘며 쫓아냈다.
12월의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이는 전사했고, 몽골의 2차 침입이 끝을 맺었다. 회안공 왕정은 고종 21년인 1234년 9월 1일에 죽었다.
3. 가족 관계
- 배우자: 경녕궁주(敬寧宮主) 왕씨[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