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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이븐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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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후세인의 머리4. 평가

1. 개요

ٱلْحُسَيْن ٱبْن عَلِيّ ٱبْن أَبِي طَالِب
알후세인 이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생몰: 622년 ~ 680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파티마의 차남으로, 즉 무함마드의 외손자였다.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으로 회귀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기득권 세력[1]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로, 지금도 시아파 무슬림들의 정체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어렸을 땐 외할아버지인 무함마드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이후 아버지인 알리가 우마이야 가문과 전쟁(1차 피트나)을 벌이다 피살당해 위기에 처했으나, 형인 하산 이븐 알리가 우마이야 군대와 전투를 벌여 무승부는 거두었기 때문에 이후 성지인 메카메디나에서 상당기간 거주했다.

형 하산이 죽은 이후로는 우마이야 칼리파조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 후세인은 아직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세력이 강했던 것을 절실히 느꼈던지라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고 메카에 은신했다. 그러다 680년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하자 시아파가 많았던 쿠파 주민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쿠파로 갔는데 이 와중에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제4대 라시둔 칼리파 알리를 따르던 시아파들이 후세인을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그를 초대했고, 이에 후세인은 자신의 일가족만 데리고 쿠파로 이동했다. 그런데 우마이야 조는 그걸 미리 알고 쿠파에 군대를 파견해서 시아파를 굴복시켰고, 쿠파 앞 카르발라라는 평원에서 후세인을 회유하려 했으나 후세인은 이를 거부하고 싸움에 임했다.

허나 애초에 100명도 안 되는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쿠파로 갔기 때문에 중과부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학살에 가까운 형태로 전투가 마무리되어, 후세인 자신도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채 머리가 잘리고 말았다. 후대의 복수를 우려한 우마이야 병사들이 동시에 공격하여 후세인을 두동강냈다고 전해진다. 전투가 끝난 이후 후세인의 아내와 추종자들은 수도 다마스쿠스의 감옥으로 이감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은 굶어 죽었다. 후세인의 수급 역시 다마스쿠스에 있었던 야지드 1세에게 보내졌고, 다시는 《쿠란》을 낭송하지 못하게 한답시고 막대기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굴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들이 감옥에서 자신을 면회하러 온 면회객들에게 카르발라 참극의 전말과 후세인의 인품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동정론이 일게 되었고, 예언자의 직계 후손을 죽여버린 야지드 1세에 대한 전 이슬람 세계의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자 야지드도 더 어찌하지 못하고 이들을 석방했다.

3. 후세인의 머리

파일:다마스쿠스 후세인.jpg
우마이야 대사원에 후세인의 머리가 전시되어 있었던 곳을 기리는 벽감

한편 카르발라 현지에 묻힌 후세인의 몸통과 달리 그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사원 벽에 약 200년간 매몰되어 있었다. 시아 전승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인 제4대 이맘 알리가 부친의 머리를 아슈라의 40일째 되는 날에 카르발라의 몸통과 합쳐 놓았다고 했으며, 열두이맘파에선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론 카르발라 전투 이후 약 2세기에 걸쳐 다마스쿠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순례가 계속되었고, 독실한 순니파였던 압바스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는 순례를 막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수급을 비밀리에 팔레스타인 해안의 아슈켈론으로 비밀리에 이장시키게 하였다. 다만 70여년 후 이집트를 장악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아지즈는 바그다드의 당대인의 진술을 토대로 985년 이를 확인하였고, 11세기 후반 재상 바드르 알 자말리마슈하드(성지) 건물과 모스크를 세웠다.

12세기 십자군이 당도해 이집트의 관문 아슈켈론을 줄기차게 공격했는데, 남쪽의 가자가 함락되어 포위되었음에도 반세기 가량 이를 막아낸 것의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성유물을 지키려는 시아파 주민들의 의지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153년, 마침내 십자군이 대군을 모아 재차 도시를 포위하자 후세인의 수급은 안전을 위해 이집트의 카이로로 옮겨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곳의 후세인 모스크에 안치되어 있는데, 시아파 무슬림의 순례지 중 하나이다. 한편 세월이 흐르며 아슈켈론 성지의 건물은 없어지고 후세인의 수급이 250여년간 묻혀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둥만 서 있었는데, 1950년 이스라엘군이 일대를 폭파시켜버렸다. 이후 2000년 경 인도의 이스마일파 측에서 대리석으로 기념 장소를 조성하였다. 어쨌든 위와 같은 사연으로 후세인의 성지는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이집트에 남아있다.

4. 평가

파일:external/fc04.deviantart.net/imam_hossein_wallpaper_by_mohammadfire-d5m3ldu.jpg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라고 웬만하면 성인 공경이나 초상을 금지하지만, 시아파가 많은 이란에서는 이맘 후세인의 페르시아어 발음인 '에멈 호세인' 이라고 부르며 매년 '아슈러'라는[2] 축제를 할 때 그의 초상이 여기저기 내걸리기도 한다.

사실 굳이 시아파가 아니더라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 고손자가 겪은 비극적인 죽음 때문에 수니파 등 타 종파에 속한 무슬림들 중에서도 그를 존경하거나 혹은 동정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다[3]. 후세인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이후의 칼리프들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시아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시아들은 최후의 심판이 오면 예수와 함께 에멈 호세인이 나타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또한 어슈러(아슈라 축제) 행사 때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는 것은 고통 받는 이를 위한 희생으로, 그의 최후를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은 지옥의 불을 끄기 위한 선행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하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자해는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는 선에서 마무리하고[4] 다 같이 헌혈을 하는 건전한 의식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것도 정확히는 이란아제르바이잔 한정이며, 다른 시아파 문화권에서는 구시대적 아슈라 축제를 고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 유독 이란에서 시아파의 세력이 강한 이유를 들자면 역사가 깊은 페르시아인의 아랍인에 대한 반감도 있겠지만 후세인의 결혼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후세인의 부인은 이란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산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야즈데게르드 3세 샤흐바르누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 결국 이 결혼이 페르시아 혈통과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의 혈통을 합치게 하여 지금의 이란인들이 이슬람이 아닌 '이교'를 믿었던 페르시아의 영광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강경 무슬림 국가인 이란의 애매한 정체성을 세워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이에 따라서 후세인의 손자이자 5대 이맘인 바키르 이후 이어지는 혈통에 이란 무슬림들이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래서 샤흐바르누는 이란의 시아파 신자들에게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8세기 전반 압바스 혁명 시에도 이란의 시아파 세력이 협조하였고 9세기에는 이란 북부 타바리스탄에 시아파 국가인 알라비 왕조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압바스 칼리파 알 마문은 이란에 머물 당시 8대 이맘 알리(레자 샤)를 초빙하였고, 그가 사망한 마슈하드는 시아파의 가장 큰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10세기에는 12이맘파인 부와이 왕조가 흥기하여 이란과 이라크를 다스리며 수니파 출신인 아바스 칼리파를 좌지우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란에서 본격적으로 시아파가 다수가 된 것은 16세기 사파비 제국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페르시아인들도 대부분 수니파였다. 알 가잘리, 니잠 알 물크 등 수니 교리를 구체화 시킨 이들이 페르시아 계통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페르시아화된 아랍인들 중에 시아파 기조가 더 강하였다. 어쨌거나 시아파 무슬림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1] 제2대 칼리파 우마르와 제3대 칼리파 우스만 때부터 총독직들을 움켜쥐며 세력을 키웠고, 이후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주축이 되는, 무아위야 1세를 필두로 한 쿠라이시 부족 세력.[2] 후세인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고, 우미아야 왕조에 굴복해서 후세인을 구하지 못한 자신들을 반성하는 취지의 행사라고 한다. 그러나 자해를 하는 것이 시대 착오적인 하람이고 악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피를 보려거든 손가락을 바늘로 찌른다던가 하는 수준에서 미무리하거나 가슴을 때리고 기도를 하는 선에서 자해는 마무리하고 다 같이 헌혈을 하는 건전한 의식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3]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탄생하기까지 4명의 정통 칼리파(라시둔 칼리파) 중 알리만을 정통이라고 보는 시아파보다는 덜하지만, 수니파의 입장에서도 알리는 정통 칼리파이자 최초의 남성 무슬림이자 이슬람 창건기의 최대 공신 중 하나이자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서 명백한 존경의 대상 중 하나이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세습 및 그 후의 업적과 과오를 모두 '인정' 하는 것이 수니파의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가 칼리파 세습왕조화를 꼭 바람직하게 보는 것은 아니고, 종교 지도자이기도 한 칼리파는 (정통 갈리파 시대처럼) 무슬림 공동체의 총의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고 보는 이들도 많으며, 이러한 이들 중에는 '알리의 후손만이 종교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시아파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세습은 정통성이 없는 것이 맞고, 이에 반대해 초기 이슬람의 종교적 순수성으로 회귀를 주장한 후세인쪽이 더 존경받을 만 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우마이야 왕조 지지자를 찾아보기가 더 힘들 것이다.) 말하자면 수니파 무슬림 입장에서도 후세인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종교적 위인의 자손'이며 '본인 역시 나름 가치있는 주장을 하다 권력에 의해 탄압받은' 인물로 보고 존경하거나 공감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는 것. 다르게 말하자면 수니파가 '시아파를 싫어하는 것'과, '시아파가 존경하는 인물을 싫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4] 그냥 답답할때 가슴을 치는 정도에서 조금 세게 때리는 수준이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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