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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09:40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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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남미올해의선수.png
2008 · 2009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베스트팀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파일:European_Sports_Media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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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파일:juan-sebastian-veron.jpg
<colbgcolor=#e40b12> 이름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Juan Sebastián Verón
출생 1975년 3월 9일 ([age(1975-03-09)]세)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6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40b12> 선수 에스투디안테스 (1994~1996)
CA 보카 주니어스 (1996)
UC 삼프도리아 (1996~1998)
AC 파르마 (1998~1999)
SS 라치오 (1999~200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1~2003)
첼시 FC (2003~2007)
인테르나치오날레 (2004~2006 / 임대)
에스투디안테스 (2006~2007 / 임대)
에스투디안테스 (2007~2014)
에스투디안테스 (2016~2017)
경영 에스투디안테스 (2014~ / 회장)
국가대표 72경기 9골 (아르헨티나 / 1996~2010)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기타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축구 선수 출신 축구 경영인. 현재 에스투디안테스의 회장을 맡고 있다. 현역 시절에는 넓은 시야를 활용한 장거리 킬패스로 유명했다.

2. 클럽 경력

2.1. 경력 초기

1993년 아르헨티나 에스투디안테스 유스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95년 에스투디안테스 성인팀으로 계약한 베론은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데 기여하고 1996년 아르헨티나 명문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여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뛰면서 17경기 동안 3골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2.2. UC 삼프도리아

그렇게 시즌이 끝난 이후 베론은 세리에 A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어 삼프도리아와 계약을 하여 유럽무대를 밟게 되었다.

1996/97 시즌: 34경기(선발 34경기) 5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32 0 5 2
코파 이탈리아 2 2 0 0 0
합계 34 34 0 5 2

1997/98 시즌: 34경기(선발 33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9 29 0 2 0
유로파 리그 2 2 0 0 0
코파 이탈리아 3 2 1 0 0
합계 34 33 1 2 0

2.3. AC 파르마

UC 삼프도리아에서 2시즌 동안 61경기를 뛰고 1998년 1,500만 파운드에 AC 파르마로 이적하였다.

당시 파르마는 전시즌 준우승팀으로 파비오 칸나바로, 릴리앙 튀랑, 에르난 크레스포, 지안루이지 부폰, 엔리코 키에사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베론은 파르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컵 우승에 기여하지만 팀의 리그 성적은 6위에 머물렀다.

1998/99 시즌: 42경기(선발 42경기) 4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6 26 0 1 5
유로파 리그 10 10 0 0 2
코파 이탈리아 6 6 0 3 0
합계 42 42 0 4 7

2.4. SS 라치오

이듬해 베론은 2,600만 파운드의 이적료와 함께 SS 라치오로 이적하였다. 그시절 라치오는 베론을 비롯하여 파벨 네드베드, 디에고 시메오네, 알레산드로 네스타, 에르난 크레스포, 데얀 스탄코비치, 로베르토 만치니 등을 보유했던 원조 부자구단. 라치오는 1999-00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고 코파 이탈리아UEFA 슈퍼컵까지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였고 팀의 에이스였던 베론은 8골을 기록하며 그의 축구 인생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1999/00 시즌: 47경기(선발 45경기) 10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1 31 0 8 3
챔피언스 리그 11 9 2 2 0
코파 이탈리아 4 4 0 0 1
슈퍼컵 1 1 0 0 0
합계 47 45 2 10 4

하지만 그의 선수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non-EU quota(비유럽권 선수제한)을 피하기 위해 위조여권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은것. 알바로 레코바, 디다 등이 자격정지 등의 징계를 먹은 것과 달리 베론은 이탈리아 여권 위조 수사에서 무혐의로 드러났으나, 이후 여권을 만들기 위한 서류가 가짜였다는 루머가 또다시 떠돌아 이탈리아 국뽕 언론들의 먹잇감으로 물어뜯기는 신세가 되었고, 이에 베론은 세리에 A에서의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2000/01 시즌: 32경기(선발 45경기) 4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2 22 0 3 3
챔피언스 리그 7 7 0 1 0
코파 이탈리아 2 2 0 0 0
수페르코파 1 1 0 0 0
합계 32 32 0 4 3

2.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그러던 차에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라치오의 사정과 맞물려 베론은 이적을 감행. 2,800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당시 기준 프리미어리그 사상 최고의 이적료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

많은 기대를 받으며 맨유에 입단한 베론은 시즌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2001년 9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를 수상하기도 했으나 조금씩 팀에서 겉돌기 시작한다. 베론이 가장 자신있는 포지션인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폴 스콜스가 선점하고 있었고 베론은 그 뒤에서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러한 팀 전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여러 잔부상으로 컨디션마저 떨어지고 팀원들과의 불화설에 시달리게 된다. 2003-04 시즌 프리시즌에서 맹활약을 하며 알렉스 퍼거슨으로부터 "베론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하겠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상황은 결국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다만, 애초에 베론이 수비형 미드필더가 아닌데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중앙 미드필더로 포진시킨 게 패착이었다. 악명 높은 태클로 유명한 스콜스와 마찬가지로 베론 역시 수비 테크닉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선수였다.

2001/02 시즌: 40경기(선발 38경기) 5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6 24 2 5 1
챔피언스 리그 13 13 0 0 5
FA컵 1 1 0 0 0
합계 40 38 2 5 6

2002/03 시즌: 42경기(선발 37경기) 6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5 21 4 2 3
챔피언스 리그 9 9 0 4 4
FA컵 1 1 0 0 1
EFL컵 5 4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42 37 5 6 8

2.6. 첼시 FC

맨유에서 적응하지 못하던 베론은 로만 인수 이후 한참 선수 수집을 열을 올리던 첼시로 옮겨가게 된다.[2]

하지만 베론은 첼시에서는 맨유 시절보다도 더욱 부상에 시달리며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세계 최고 리그이던 세리에 A를 4~5년간 호령하던 베론은 잉글랜드에서 먹튀로 전락하였고 베론의 실패는 안드리 셰브첸코의 실패와 함께 프리미어리그가 거액의 투자자들을 영입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에 열을 올리던 시기와 맞물려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프리미어리그>세리에 A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3/04 시즌: 14경기(선발 11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7 5 2 1 0
챔피언스 리그 5 4 1 0 0
EFL컵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0 0
합계 14 11 3 1 0

2.6.1. 인테르나치오날레 (임대)

2004년 첼시를 떠난 베론은 인테르에 임대되어 세리에 A로 복귀하였다. 예전만큼 엄청난 화려함은 없었지만 이제는 완연한 중미로 변신해서 당시 이탈리아 주요 사이트 평점 1위에 오르는 등 완벽한 부활에 성공했다[3] 천부적 재능과 풍부한 경험을 살려 데얀 스탄코비치,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중원을 형성하며 인테르의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등 7년이 넘은 무관 탈출에 기여하였다.[4]

2004/05 시즌: 39경기(선발 36경기) 3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23 1 3 1
챔피언스 리그 8 8 0 0 2
코파 이탈리아 5 3 2 0 1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39 36 3 3 4

2005/06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1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5 24 1 0 6
챔피언스 리그 7 7 0 0 1
수페르코파 1 1 0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35 34 1 1 7

2.6.2. 에스투디안테스 (임대)

2006년 고향팀인 에스투디안테스로 임대되어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7. 에스투디안테스

2009년에는 다시 한번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200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마저 제패하며 MVP를 차지하였다. 이후 FIFA 클럽 월드컵에 출전, 결승까지 올라가 후배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석패하고 실버볼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2008, 2009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하며 그간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2012년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였으나[5] 에스투디안테스 구단의 간곡한 설득으로 은퇴를 번복하고 2013년 한시즌을 더 뛰고 은퇴하였다.

그런데 팀이 201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확보한 뒤, 팬들에게 "시즌 티켓 65% 이상 구매시 현역으로 복귀하겠다"라는 공약을 내걸었고, 목표를 달성하자 2년 만에 현역 복귀하여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본인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팀인 에스투디안테스에서 1년 6개월 동안 무급으로 뛸 예정이다.

3. 국가대표 경력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장하여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전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하며 MOTM을 받았으나 조별 리그 탈락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엔트리에서 제외[6], 2010 남아공 월드컵 엔트리에는 포함은 되었으나 팀은 리오넬 메시, 곤살로 이과인, 앙헬 디 마리아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이래저래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 선수였다. 사실 2010년 월드컵 엔트리에 들어간 것도 후안 베론과 베론의 아버지조차 무리수라고 생각했으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독단으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베론은 마라도나가 구상한 기이한 포메이션의 허리를 담당하는 위치였다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그 병맛같은 포메이션 위치상 허리와 동시에 수비때 우측 측면을 맡아야 하는 위치였다.[7] 아무리 베론이 우수한 선수여도 이미 만 35세, 선수로서 은퇴를 앞뒀는데 가장 왕성한 활동력이 필요한 자리에 넣어뒀으니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가진 전력대비 엄청난 삽질을 했고, 베론은 월드컵 조별 리그 1차전에서 부상당해서 크게 빛을 보지도 못했다.[8]

베론으로썬 최전성기였던 02월드컵때가 마침 맨유로 이적한 후 폼이 떨어진 시즌이었단 점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 전성기였던 만 31세 독일월드컵에선 소린과의 불화와 페케르만의 전술적 선택으로 스쿼드에서 제외된 점도 베론이나 아르헨 국가대표팀 모두에게 불행으로 남았다. 결과론적으로 베론이 가장 국가대표에서 크게 각광받고 활약했던 시기는 02년 월드컵 지역예선전이 됐다. 비록 본선에선 예선탈락하고 말았지만 아르헨티나는 02년 월드컵 남미예선때 압도적인 1위 가도를 달리면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혔었는데, 이 때 베론이 명실상부한 팀의 에이스였다. 만약 04년 비엘사 감독이 코파 2004, 04 올림픽 이후 물러나지 않았다면 06월드컵때 베론이 대표팀에서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지네딘 지단, 프란체스코 토티, 후이 코스타와 견줄만한 넓은 시야를 지녔다. 거기다 주무기인 킬패스는 팀 동료도 예측 못한 타이밍에 역회전을 걸어 보내버리는 엄청난 능력을 지녔으며 장거리 킬패스만으론 당대 어떠한 미드필더도 범접하기 힘든 테크닉을 지니고 있었다.[9] 때문에 CA 보카 주니어스 시절에 마라도나로부터 능력에 대해 칭찬을 받은 적도 있으며, 중거리슛, 볼컨트롤과 개인기[10] 또한 명실상부 월드클래스였다. 직접 박스쪽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도 일품이었으며, 후방에서 조율하며 플레이메이커까지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삼프도리아~라치오 시절 전성기때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하였으나, 인테르 시절부터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은퇴하기 전까진 중앙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하였다. 애초에 공격형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186cm의 큰 키와 균형잡힌 바디밸런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롤도 잘 소화해내었다. 아예 선수생활 중후반부터는 사실상 전문 중앙미드필더였고 투볼란테 전술이긴 해도 수비형미드필더로도 많이 뛰었다. 즉 맨유시절에 중앙 미드필더로 실패한건 단지 PL과의 궁합이 안맞았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특히 빠른 공격가담의 침투를 귀찮아하는 듯한 본인의 스타일처럼 굉장히 빠른 역습상황에서는 자기진영에서 상대진영 박스쪽까지 드리블 하지 않고 대놓고 장거리 킬패스를 정확히 발사해버리는 대범함을 자주 보여주기도 했다.

베론에 대해 얘기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프리미어리그에서의 부진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연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세리에로 진출하여 잠재력을 발산하고 전성기를 구가할때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8번 스타일의 미드필더이자 빠른 템포의 축구를 특이할 정도로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반해, 당시 프리미어리그는 굉장히 빠른 킥&러쉬 롱볼축구를 선호했고 역습시에는 지체하지 않고 굉장히 빠른 공격전개를 강요하였기 때문에 베론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11]

당시 퍼거슨 감독은 앤디 콜과 드와이트 요크를 대체하고자 공격진의 리빌딩을 진행중이었는데, 반 니스텔로이는 앤디 콜의 직접적인 대체자였고, 트레블 당시 드와이트 요크나 테디 셰링엄 같은 섀도 스트라이커 대체 자원을 마땅히 구하지 못 한 상황에서, 당시 스페인 라 리가를 중심으로 떠오르던 새로운 전술적 유행인 4-2-3-1과 세리에의 4-3-1-2를 적극적으로 들여 와 수용할 결심을 했다.[12] 결국 원래부터 공격수로도 뛸 수 있었던 폴 스콜스를 주전 섀도 스트라이커로 기용하고, 스콜스가 올라가서 빈 중원엔 스콜스만큼 창의적이고 스콜스보다 더 피지컬이 뛰어나 수비적으로도 기대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인 베론을 데려왔다.

이론상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었지만, 베론의 문제점은 플레이에 에고가 너무 많이 깃들어 있었다는 부분이다. 베론은 남미와 이탈리아 같은 속도가 느리거나 경기 내용이 타이트하지 않은 리그에서 뛰면서 스타일을 키워왔는데,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선 중앙 미드필더가 패스를 평균적으로 0.5초 안에 처리해야 할 정도로 압박이 심한 리그였다. 뛰어난 선수들은 어느 리그를 가던 리그의 특징을 금방 파악하고 리그의 색깔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변주해서 적응을 하는데, 베론은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리그에 적응하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면서 플레이하려다 보니 리그는 커녕 팀 동료들과도 손 발이 안 맞았다.

패스를 바로바로 처리하지 않으니 1초만에 사방에서 달려드는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드리블을 시도하거나 개인기를 펼쳐야 하는 상황이 많았고, 기술이 뛰어난 선수답게 자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본인도 자신이 늘 하고 싶어하던 스루 패스 타이밍을 놓치기 일수였다. 또한 무리하게 공격수를 향한 스루 패스를 계속 시도하지만 전부 패스 미스에 턴 오버를 반복해서 일으키는 경기들이 많았다. 시야는 넓지만 패스의 질이 좋지 않고, 지나치게 대범한 패스들이 경기 내내 반복되고는 했다. 이래서는 폴 스콜스를 공격수로 올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었고, 원래 수비를 못 하던 폴 스콜스의 대체자였음에도 폴 스콜스보다 수비에서조차 나은 부분도 없었다.

그 불같던 로이 킨도 베론의 클래스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기에 인내심을 갖고 그의 패스 실수를 커버하며 조율을 도맡았으나, 베론의 독불장군 같은 경기 스타일은 결국 경기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고 애초에 베론은 당시 맨유라는 팀과는 전혀 맞지 않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리미어리그는 베론의 스타일로 뛰기에는 경기 내적으로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는 리그였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알렉스 퍼거슨의 베론을 기용하는 방법이 애초에 잘못됐다는 의견도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PL에서의 베론의 부진 이후로 남미 선수들은 세리에 A, 라리가, 분데스리가외는 다르게 프리미어 리그의 빠른 축구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많이 심어지기도 했다.[13] 물론 사라지긴 했다.[14]

결국 베론이 자기 마음대로 플레이하는 성향이 강했던 것이 맨유에서 실패한 궁극적인 원인인 셈이다. 누군가 알렉스 퍼거슨에게 포백 앞 홀딩 미드필더로 써 보는 것이 어떠냐 라고 묻자 어떤 위치에 두어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놈이라 똑같을 거라며 한마리의 자유로운 새라고 표현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기타

아버지 후안 라몬 베론 역시 축구 선수였으며 에스투디안테스와 그리스 파나티나이코스 등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선수시절 별명은 '마녀'. 그래서 베론의 별명은 '작은 마녀'가 되었다고.

그의 삼촌도 축구 선수 출신인데 잉글랜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뛰었었다. 어린 시절 베론은 삼촌을 따라 셰필드에서 뛰기를 희망했었는데 맨유에 입단한 후 한 말이 '나는 셰필드에서 뛰고 싶었는데 맨체스터로 왔네요.'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과 더불어 4대 미드필더로 불렸다.[17] 거기에 베론은 전성기가 지난 30대 중반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물론 1차전인 나이지리아 전에서 부상으로 인해 팀의 탈락에 크게 일조해버렸지만.[18] 본래 인테르 시절 준수한 활약으로 완전 이적이 기정 확실시 되었지만 역사상 최고의 멘탈쓰레기인 아드리아누와의 불화[19]로 인해 사실상 이적은 무산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게 된다. PL에서의 실패와 인테르에서의 활약 후 아르헨티나 리턴, 2006 독일 월드컵 국대 미발탁 등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또한 노안으로 인해 2000년 전후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또한 하나의 원인이다.[20]

한창 그가 맨유에서 부진할 때, 언론에서 그를 마구 물어뜯자 퍼거슨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를 변호하며 기자들에게 “이 멍청한 XX들아! 베론은 위대한 선수야!”라는 희대의 명언을 날렸다.

한준희의 말로는 세비야의 스티븐 은존지가 베론과 플레이 스타일이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은존지가 수비적으로 좀 더 기여도가 높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축구해설자인 한준희 역시도 오래된 아르헨팬들에게 일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베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베론만 편집해서 영상을 만들거나 봤던 팬들의 주장으로는 피를로 같은 딥라인 플레이 메이커로 활약했다면 아주 뛰어났을거라고 한다. 지단, 리켈메같은 키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드리블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반면 빠른 두뇌회전과 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킥을 통해서 거의 전방위 원터치 패스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베론의 수비력은 잘했던건 아니지만 오히려 선수 후반기때 보면 괜찮은 활동량을 통해 꽤 수비기여도를 많이 높이긴 했다. 하지만 드리블 키핑등의 온더볼 능력은 개인기 문제였기 때문에 끝까지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고 그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원터치 플레이스타일과 아르헨선수치곤 괜찮은 피지컬등을 통해 이를 최소화 했을 뿐이다.

7. 같이 보기

1 로아 · 2 아얄라 · 3 샤모트 · 4 피네다 · 5 알메이다 · 6 센시니 · 7 로페스 · 8 시메오네 ⓒ · 9 바티스투타
10 오르테가 · 11 베론 · 12 부르고스 · 13 파스 · 14 비바스 · 15 아스트라다 · 16 베르티 · 17 카바예로
18 발보 · 19 크레스포 · 20 가야르도 · 21 델가도 · 22 사네티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다니엘 파사레야

1 포소 · 2 데미첼리스 · 3 C. 로드리게스 · 4 부르디소 · 5 볼라티 · 6 에인세 · 7 디 마리아 · 8 베론 · 9 이과인
10 메시 · 11 테베스 · 12 가르세 · 13 사무엘 · 14 마스체라노 ⓒ · 15 오타멘디 · 16 쿤 아구에로 · 17 구티에레스
18 팔레르모 · 19 밀리토 · 20 M. 로드리게스 · 21 안두하르 · 22 로메로 · 23 파스토레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디에고 마라도나


[1]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도 많이 보았었다.[2] 사실 초창기까지 베론의 크로스나 패스 능력 자체는 여전히 뛰어났고 활약상도 그리 심하게 나쁘진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니 많은 팬들이 기대하던 것처럼 제 폼이 안 나온다.[3] 하지만 EPL 위주인 한국에서는 이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한준희 해설위원등이 맹활약했던 사커라인 사이트같은 곳에서도 이 부분이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4] 사실은 당시엔 우승이 아니었다. 칼초폴리 승부조작으로 유벤투스와 밀란이 밀려나면서 3위였던 인테르 밀란이 05-06시즌 우승팀으로 남게 됐다.[5] 정확히는 프로 생활 은퇴. 2012년 아마추어 구단인 브란드센에서 한시즌을 뛴 전력이 있다.[6] 2002 월드컵 이후 사이가 나빠진 후안 소린이 자신과 베론 둘중 한명만 택하라고 경고하여 당시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결국 소린을 선택한다.당시 페케르만호에선 계속 베론이 배제되고 소린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05-06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상대팀으로 만나서 서로 거친 몸싸움을 주고 받으면서 베론의 06년 월드컵 참가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7] 마라도나의 포메이션을 보면 우측 허리가 아예 없는 기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수비때 우측 공격수만 따돌리면 우측 수비수까지 직선으로 길이 열리는 구조였다. 따라서 중간 미드필더인 베론과 수비형 미드필더인 마스체라노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함과 동시에 필요할때 전력으로 우측을 커버해야 하는 막중하다못해 과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8] 그나마 코너킥 상황에서 가브리엘 에인세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하기는 했다.[9] 당시 세리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르네상스였으며 지단의 조율과 토티의 힐패스, 후이 코스타의 스루패스 등 개성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의 집합소였다.[10] 키가 컸지만 그닥 빠른 편도 아니면서 유려한 드리블에 능했다. 아르헨티나 스타일의 미세한 볼 컨트롤 플레이라기보다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어다니면서 타이밍을 잘 골라 들어가는 편이었고, 드리블 중에도 2대1 패스 등으로 동료와 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하지만 한국에 존재하는 몇 안되는 오래된 아르헨팬들 증언으론 베론이 거의 드리블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빠른 두뇌회전과 정확한 킥력으로 원터치 패스를 통해 상대의 압박을 탈압박할 뿐 실제로 압박하는 상대를 벗겨낼 수 있는 드리블이나 키핑력은 많이 부족했다[11] 역습을 못 한다거나 지단, 리켈메처럼 볼을 오래 끌고 다니는 스타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앙 공미라는 것을 생각하면 베론은 드리블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만 짧은 패스든 긴 패스든 공격 시 반드시 베론을 거쳐갔던 세리에 시절과 달리, 프리미어리그는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개념을 활용하지 않았던 것.[12] 베론이 영입된 시기만큼 맨유가 다양한 전술을 시도하던 때도 드물다. 베론이 있던 시즌엔 공교롭게도 중앙 미드필더 성향의 베컴도 함께 뛰던 시절이었고, 라이언 긱스를 제외하면 마땅히 발 빠른 윙어도 없었기 때문에 비대칭 4-3-3을 사용하거나 긱스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놓고 베론과 베컴을 메짤라로 놓는 다이아몬드 시스템도 자주 사용하였다. 퍼거슨으로선 자신이 보유한 선수들을 최대한 이리 굴려 보고 저리 굴려보며 돌파구를 찾던 시기였지만 오히려 베컴 방출 이후로 유망주들이 성장할 때까진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13] 절친이자 대표팀 동료였던 에르난 크레스포와 베론의 후임격으로 맨유로 입단한 조세 클레베르송, 동시기 맨유의 동료였던 디에고 포를란, 이후 맨시티로 이적한 브라질의 호비뉴가 대표적인 예이다.[14] 애초에 베론의 이전 시기나 동시기, 이후 시기에 PL에서 활약하는 남미 국적 선수들은 많았다. 베론과 비슷한 시기의 지우베르투 시우바는 아예 아스날의 주전으로서 2003-04 시즌 무패우승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으면서 주전 멤버로 활약하였고, 그보다 더 이른시기에 미들즈브러에서 돌풍을 보여준 주니뉴 파울리스타 같은 선수도 있었다. 거기에 파울리스타는 남미 국적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기까지 하였다. 그 이후에도 포지션 가릴거 없이 카를로스 테베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세르히오 아궤로, 파블로 사발레타와 같은 대표팀 후배들과 하미레스, 루이스 수아레스, 다비드 루이스, 윌리안, 페르난지뉴, 알리송 베케르, 에데르송 등의 타 남미 국적 선수들은 PL에서 좋은 활약을 구가하면서 그런 고정관념을 깨진지 오래다.[15] 1994~1996, 2006~2007, 2007~2012, 2013~2014, 2016~2017[16] Apertura (아페르투라)[17] 이 때 파벨 네드베드가 뽑혀야 된다는 의견이 많았었지만 애초에 저 4대 미드필더는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국가에 한정해서 선정된 것이다. 당시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은 본선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후 네드베드는 2003년 발롱도르 수상, 체코는 유로 2004 4강 진출,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18] 이건 마라도나의 삽질. 34살의 노장을 가장 중요한 허리에 배치한 것도 모잘라 공격전개까지 맡겨놨는데 부상으로 인해 공백이 생기자 그것을 메꿔줄 선수가 전무했다. 후안 로만 리켈메라도 있었다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이미 마라도나와의 트러블로 국대에서 은퇴한 상황이였다.[19] 2005-06 시즌까지 아드리아누는 명실상부한 인테르의 에이스로 수많은 활약을 선보였다. 또한 구단주였던 마시모 모라티가 열렬한 아드리아누 빠돌이로 멘탈이 터졌을때도 계속 그를 옹호했으며 심지어 프로의식 없는 선수 싫어하기로 정평난 주제 무리뉴까지 모라티의 간곡한 부탁으로 갱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베론 역시 아드리아누와의 불화로 인해 아르헨티나로 쫓겨나듯 복귀했다.[20] 이 때 당시 비교된 미드필더들의 나이를 보면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파벨 네드베드가 1972년생으로 베론보다 3살 많지만. 사진으로만 보면 베론이 제일 노장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