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布都御魂일본 신화에 나오는 영험한 검. 기기신화, 즉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언급된다. 후츠노미타마츠루기(布都御魂剣), 사지후츠노카미(佐士布都神), 미카후츠노카미(甕布都神)라고도 한다. 이러한 이름들에 공통되는 '후츠'란 칼로 벨 때 나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그만큼 잘 썰린다는 뜻.
2. 설명
흔히들 일본에선 후츠노미타마가 기기신화에 두 번 나온다고 설명한다. 첫 등장은 타케미카즈치(武甕槌神)가 하늘에서 이즈모로 내려가 나라를 천손(니니기)께 바치라고 오오쿠니누시를 협박할 때이다. 기기(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타케미카즈치 신이 토츠카노츠루기를 바닷물 위에 꽂고 그 위에 앉아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토츠카노츠루기'가 '후츠노미타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기의 문헌상으로는 '토츠카노츠루기'라고 썼을 뿐 '후츠노미타마'라고 명시하진 않았다.'후츠노미타마'라는 이름이 명확히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기기신화에서 조금 더 후대이다. 초대 천황 진무가 일본을 평정할 적 일이다. 진무가 이끄는 군대가 구마노의 산 속에서 행군하는데 토지신이 곰의 형상으로 나타나 독기를 내뿜자 모두 땅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때 천상에서 타케미카즈치가 후츠노미타마를 땅으로 내려보냈는데, 진무는 후츠노미타마를 받자 바로 정신을 차렸고 구마노의 신은 저절로 베여 쓰러졌으며 군대도 힘을 차리곤 다시 일어섰다고 한다.
이후 진무가 신유년(기원전 660?)에 나라를 건국한 뒤 궁중에서 후츠노미타마를 모셨는데, 10대 천황 스진 재위 7년(기원전 91?) 스진이 모노노베(物部)의 선조 이카가시코(伊香色雄)에게 명하여 (오늘날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터에 모시게 했다고 한다.
오카야마현 아카이와시(赤磐市) 이시카미(石上)에 있는 이소노카미후츠미타마 신사(石上布都魂神社)는 스사노오가 천상계 타카마가하라에서 쫓겨난 뒤 머리 8개 달린 거대한 이무기 야마타노오로치를 벨 적에도 후츠노미타마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기기의 문헌상에선 그냥 토츠카노츠루기로 베었다고만 서술했고, 현대 일본에서도 보통은 스사노오가 사용한 칼은 후츠노미타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사노오가 사용한 토츠카노츠루기를 따로 아메노하바키리라고도 부른다. 스사노오가 후츠노미타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기기신화를 따르지 않은, 해당 신사의 고유한 전승인 듯하다.
3. 실존하는 후츠노미타마
오늘날 일본 나라현 텐리시 후루초(布留町)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배전의 뒤쪽(북쪽) 금족지(禁足地)에 후츠노미타마가 묻혔다는 전승이 있었다. 신령한 칼이 묻혔다 하여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신궁의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일본 신토에서는 신령이 깃들어 사람에게 경배를 받는 물체를 신체(神体)[1]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본전에 신체를 안치하고 그 앞에 배전(拜殿)을 세워 참배자들이 거기서 본전 쪽을 향해 참배하고 기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소노카미 신궁은 오랜 세월 본전 건물이 없이, 단지 후츠노미타마가 묻혔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금족지 자체를 본전으로 삼고, 그 앞에 배전을 세워 사람들이 금족지를 향해 기도하도록 하였다.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사회가 급변하던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는 각 신사의 신직 세습을 금지하고 궁사(신사의 최고 책임자)를 임명했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대궁사(大宮司)로 임명되어 부임한 미토의 국학자 스가 마사토모(菅政友 1824-1897)는 도굴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의 허락을 얻어 1874년에 금족지를 발굴했다. 전승대로 후츠노미타마와 기타 장식품 등을 찾아내자 금족지의 한 쪽, 발굴된 자리 근처에 본전을 세워 봉안하고 신체로서 경배받도록 했다. 중국의 초나라 무덤에서 월왕구천검이 나왔고 병마용에서도 무기가 발견되었듯이, 고대의 칼이 꽤 멀쩡히 발견됨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당시 후츠노미타마가 발견된 위치는 오늘날 이소노카미 신궁의 본전과 배전 사이인데, 지금은 그 자리에 자갈을 깔아 표시해두었다고....
오늘날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직들은 스가 마사토모가 메이지 유신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평가한다. 만약 스가가 신실한 신토 종교인이었다면 감히 땅을 파헤쳐 신령한 검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가는 신토의 신직(성직자)이라기보다는 학구열 넘치는 학자였다.
신궁에선 칼에 깃든 신령을 후츠노미타마노오카미(布都御魂大神)라고 부른다.
기록과 사진에 따르면 발굴된 후츠노미타마는 길이 약 85 cm. 통상적인 일본도는 칼등 쪽으로 살짝 휜 데 반해, 스가가 발굴한 칼은 거꾸로 칼날 쪽으로 휘었다. 손잡이 끝에도 환두대도처럼 고리가 있는데, 오랜 세월의 무게 때문에 삭아서 고리의 한쪽이 끊어졌다. 아마도 나무로 만들었을 손잡이 부분은 삭아서 없어졌고 녹이 슨 금속 부분만 남았다.
칼이 칼날 쪽으로 휜 것은 2세기 중국 칼의 형상인데, 일본에서도 2-3세기 무렵에는 이런 도를 사용하였다. 이후 4-9세기에는 직도로 변하였다가, 11-12세기 무렵에 비로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도의 모습대로 칼이 칼등 쪽으로 휘는 형태가 되었다. 비록 후츠노미타마 원본을 현대적으로 조사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형상으로 미루어보건대 2-3세기에 제작된 중국제 환두대도, 또는 일본에서 중국 칼을 모방해 만든 환두대도라고 추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활동하던 도검장 갓산 사다카즈(月山貞一 1836-1918)가 후츠노미타마를 복제한 칼 2자루를 제작하여 이소노카미 신궁에 바쳤다. 복제품이긴 하지만 신토에서는 원본의 신성함을 나누어 받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역시 신성하게 여기어 원본과 함께 본전에 신체(神体)로서 봉안되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도검장 미야모토 카네노리(宮本包則 1830-1926)가 1912년 궁내성의 요구에 따라 후츠노미타마의 복제품을 한 자루 더 제작했다. 그해에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기 때문에 새 천황에게 헌상하기 위해서였는데, 길이는 69.8 cm로 원본보다 약간 짧다. 복제품을 만든 갓산이나 미야모토나 모두 당대 일본의 이름난 도검장이었다.
1878년에도 금족지에서 또다른 칼이 발견되었는데, 전승에 따라 스사노오가 썼다는 아메노하바키리의 원본이라고 판단했다. 현재 금족지 안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본전에는 후츠노미타마, 후츠노미타마의 복제 2자루, 아마노히바키리까지 칼 4자루를 봉안하여 모셨다고 한다.
한편으로 카시마(鹿島) 신궁에도 유래를 알 수 없는 '후츠노미타마'라는 칼이 전한다. 카시마 신궁은 후츠노미타마를 지상으로 내려보냈다는 타케미카즈치를 모시는 곳이다. 일본에서도 대부분은 이소노카미 신궁의 칼이 진짜, 카시마 신궁의 칼은 복제품이라고 여기지만, 카시마 신궁 쪽은 자기네 칼이 후츠노미타마 원본이라고 주장한다. 복제라고 하기엔 두 칼의 길이나 형상도 너무 다르니.... 카시마 신궁에서는 한자로 잡령검(韴霊剣)이라 쓰고 '후츠노미타마노츠루기'라고 부른다.
카시마 신궁의 칼은 나라 시대 말기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의 작품인 듯하다. 칼집 포함 전체 길이 2.71 m, 날 길이만 2.24 m인 거대한 직도. 조사 결과 이만한 길이로 만들기 위해 도신에 총 4군데를 이어 붙였다고 한다. 일본 국보 공예품 제175호로 지정되었다. 직도(直刀) 쿠로우루시효우몬타치고시라에(黒漆平文大刀拵)라는 명칭도 있는데, 일본 정부에서 붙인 문화재명이다. 명칭이 길고 복잡해 보이지만, 해석하면 '검게 옻칠 하고 금박으로 장식한 긴 칼'이라는 뜻일 따름이다.
후츠노미타마 칼을 발굴한 스가 마사토모는 다른 유명한 유물과도 관련이 깊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신고(神庫)에서 칠지도를 확인한 사람 역시 스가였다. 스가가 신고 안 녹슨 기물에 글씨가 새겨진 듯해서 녹을 떼어보았더니 명문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현대적 보존기술이 없던 시절에 그냥 녹을 떼었기 때문에 명문 일부가 판독불능이 되었다. 그리고 칠지도 명문의 해석을 두고 한일 역사학계는 지리한 논쟁을 벌인다.
4. 같이 보기
[1] 일본 신토에서 신령이 깃들었다 하여 신사에 모시고 참배자들의 숭경대상이 되는 물건이다. 신체가 되는 것으로는 거울이 제일 흔하지만 다른 인공물 또는 산(山)이나 폭포, 바위 같은 자연물인 경우도 제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