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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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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인물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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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료국(興遼國) 또는 흥료제국(興遼帝國)이라고 부른다. 흥요국이라고도 하는데 두음법칙상 틀린 이름이다.[1]

발해 왕족의 후손인 대연림(大延琳)이 요나라의 제 2도시인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2]에 세운, 발해부흥운동으로 탄생한 국가이다.

2. 역사

926년 발해에게 멸망한 이후 각지의 발해유민들은 요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는데, 여기서 세워진 가장 유명한 나라가 다름아닌 정안국이다. 이런 발해 부흥 운동은 정안국이 망하면서 일단락된다.

의 대외원정과 재정적 문제로 이 지역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발해인과 거란인들의 갈등이 빚어진다. 마침 연 지역에 기근이 일어나 요의 호부사 한소훈, 호부부사 왕가 등이 백성들을 수탈하자 요 조정을 향한 발해 유민들의 원망은 커져만 갔다.

이때 대조영의 7대손 동경사리군 상온(東京舍利軍 詳隱) 대연림이 이 틈을 타 두 사람과 사첩군 도지휘사(四捷軍 都指揮使) 소파득 등 호부 관원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은 통쾌해했고 많은 백성들이 대연림을 따르기 시작했다.

천경(天慶)[3] 원년인 1029년 8월 3일, 그가 천경이라 건원하고 흥료(興遼)를 세우자 많은 백성들 뿐만 아니라 동, 북의 여진도 그를 따랐다. 나라의 이름을 풀이하면 요동/요하(遼)에서 일어난다/일으키다(興)라는 뜻이다.

건국하고 한달 뒤인 9월, 고려 현종에게 대부승 고길덕(高吉德)을 사신으로 보내 흥료국의 건국을 고하는 한편 군사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참지정사 곽원이 수많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강행했지만 큰 성과 없이 고려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4]

한편 대연림과 같이 반란을 모의했던 동경부유수 왕도평(王道平)은 흥료국을 배반하고 탈출에 성공, 요성종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는 각 주에서 군사들을 모아 국구상온(國舅詳穩) 소필적(蕭匹敵)[5]에게 요충지를 차지해 대연림이 서진하는 것을 막게 했다.

이때 보주를 지키던 발해태보 하행미((夏行美))에게 대연림이 몰래 사람을 보내 통수 아율포고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하행미가 도리어 그를 잡아 야율포고에게 보내고 이어 흥료국에 가담한 무리 100명을 유인하여 모두 죽여버렸으며 상황 보고를 받은 야율포고도 마찬가지로 보주의 발해 병사 800명을 죽이고 동쪽 길을 끊어버린다.

황룡부의 황편(黃翩)도 보주의 하행미와 마찬가지로 협조하지 않자 대연림은 마침내 군사를 나누어 심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자 절도부사 장걸은 대연림에게 거짓으로 귀순한 뒤 자꾸만 시간을 끌어 방어 태세를 만들었고, 흥료군이 요양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1029년 10월, 요성종은 남경유수(南京 留守) 연왕(燕王) 소효목(蕭孝穆)을 도통으로, 소필적을 부통으로, 해육부대왕(奚六部大王) 소포노(蕭蒲奴)를 도감으로 삼아 요양성을 포위하게 한뒤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 보를 쌓고 망루를 세웠다. 1029년 12월, 태사 대연정(大延定)은 도통 소효목의 공격을 맞서기 위해 동, 북여진 종족들을 끌어모아 항쟁하는 한편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거부했다.[6]

천경 2년인 1030년 1월, 다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무의미했다. 3월, 요나라는 긴 울타리를 쌓아 성을 감싸 감시한다. 이로써 흥료국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졌다. 5개월을 버티며 7월에 또 고려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지만 고려는 다시 무시했다. 7월에 사신으로 보낸 유충정(劉忠正)은 20여년 전 목종의 총애를 받았던[7] 발해 유민 출신 고려인과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데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동일인이라면 고려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인연으로 호소해 보려고 했던 듯하다. 하지만 1009년에 강조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에도 있기 때문에 동일인이 아니며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현종과 인연이 있었던 인물과 이름이 같은 사람을 내세웠던 것일 수도 있다.

결국 8월, 흥료국의 장군 양상세(楊祥世)가 요군과 내통해 동경성의 대문을 열었다. 결국 대연림은 체포되었고 반요투쟁은 1년만에 끝난다. 8월에서 9월 사이, 흥료국은 또 고려에 사신 이광록(李匡祿)을 보냈지만 고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흥료국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아예 고려로 귀순하였다.

후에 후산(吼山)에서 흥료국의 병사들이 부흥운동을 하였으나 궤멸되었고 1031년 남해성(南海城, 현 랴오닝성 안산시(중국) 하이청시)이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요나라는 전성기였음에도 이 일로 동부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발해인들을 윤주, 내주, 습주, 천주 등으로 분산하여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발해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했고, 동경유수 소효목은 흥료국 유민들을 관대하게 대해주는 등 유화정책이 실시된다.

3. 인물

4. 같이보기


[1] 하지만 여러 영상이나 언급에서는 흥요국이라 언급한다.[2] 동경 요양부는 옛 고구려요동성이 있던 곳에 설치된 도시이다.[3] 요사 기록. 고려사는 천흥(天興)이라고 기록했다.[4] 곽원의 출병이 흥료국에 대한 고려의 지원은 아니었다. 그저 대연림의 반란으로 인해 만주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압록강 동쪽에 있는 요나라의 성채를 빼앗고자 공격한 것이다. 고려가 흥료국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긴 하였으나 당시 현종과 재상들이 깊게 상의한 것으로 보아 흥료국 지원에 대해 고민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5] 소손녕의 아들.[6]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은 고려가 산발적인 요와의 전쟁을 막 끝낸 후 국력을 회복해가던 시기라 흥료국의 구원 요청을 껄끄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주대첩이 일어난 지 10년만의 일이라 구원병을 파견할 만큼의 국력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던 만큼 출병을 단념하게 된다.[7] 유충정은 목종의 동성애 상대 2명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 명인 유행간은 동성애 상대가 확실하게 맞지만 유충정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거나 유행간과 세트로 언급되는 기록은 많지만 동성애 상대라고 직접 명시되진 않았다. 유충정은 사전에 김치양의 음모를 고자질하고 태조의 혈통이 끊이는 걸 걱정하여 대량원군(후의 현종)을 후사로 삼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강조의 정변 무렵인 1009년 목종 충성파였기에 목종의 폐위와 더불어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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