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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6:07:51

2007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がばい[ruby(旋風, ruby=せんぷう)][1]
파일:external/blogimg.goo.ne.jp/77052467f2079d23c9c9a1b0de4e0bda.jpg
일본 고교야구 제일의 기적으로 평가받은 사가키타의 고시엔 제패가 결정된 순간
만화보다 더욱 만화같은 스토리로 우승기를 거머쥔 이들의 이야기는 고교야구 팬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고시엔 구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2007년은 꿈이 이루어진 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샤다라빠, 레진코믹스 고시엔으로 go! [2]
1. 개요2.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다3. 본선에서의 파란4. 결승전
4.1. 경기 내용
5. 사카키타 고교 야구부는 최약체 야구부였다?6. 여담7. 관련 문서

1. 개요

2007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의 사가키타 고교의 기적적인 우승을 다루는 문서.

일본 고교야구에서 고시엔 우승을 노리는 명문 강팀들은 대부분 사립고등학교들이며 공립고등학교들 중에서는 고시엔 진출까지는 몰라도 우승을 노릴만한 강팀들은 매우 드물다. 고교야구 명문으로 유명한 PL학원고등학교[3] 등의 일부 사립학교들은 뛰어난 중학 유망주들을 장학생으로 스카웃하고 명장이라 불리는 감독들을 고용하며 전용 그라운드와 기숙사를 운영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으로 막강한 팀을 꾸린다. [4][5][6]

반면 상당수의 공립 고등학교들은 야구장학생은 없고 운동장도 다른 체육부와 공유하며 연습시간도 수업 전과 방과후의 몇 시간으로 규제되는 등 말 그대로 야구 동호회 수준의 야구부를 보유한 곳이 대부분이다.[7] 사카키타 고교는 이들과 다르게 당시 b급학교로 평가받으며 공립학교 중 지원이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명문 사립학교들을 꺽고 고시엔 우승을 차지하며 사가키타의 기적 이라는 고시엔 역사상 남을만한 사건을 일으켰다.

2.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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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사가현에 위치한 사가현립 사가키타고등학교(佐賀県立佐賀北高等学校, 약칭 사가키타)의 야구부가 돌연 돌풍을 일으키며 제89회 고시엔 사가현 예선을 돌파해 개교 이래 2번째로[8][9]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2007년 사가키타 고등학교가 고시엔에서 첫 승리를 넘어 우승까지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3. 본선에서의 파란

공립학교 팀이 고시엔에 올라와서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1회전, 그것도 대회 개막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주장이었던 포수 이치마루 다이스케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업적. 2승은 기대 안 해."라고 공개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가키타 고교는 이후에도 프로 지망생들로 점철된 명문 사립고교들을 연파하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8강전 테이쿄 고교[10]와의 13회 연장 혈투는 고시엔 역사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명승부. 여기서 사가키타의 투수 쿠보 타카히로는 연장전에서 테이쿄의 스퀴즈 번트를 2번이나 글러브 토스로 막아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테이쿄 고교는 동도쿄 최고의 야구 명문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2006년 대회에서 치벤 와카야마에게 역사적인 역전패를 당한 데 이어 이번엔 동아리 수준의 사가키타에게까지 끝내기 안타를 맞고 분패하며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이하는 사가키타 고교의 결승까지의 전적이다.
경기 상대 고교 도도부현 결과 비고
1차전 후쿠이 상고 후쿠이 2:0 승 개막전
2차전 우치야마다 상고 미에 연장 15회 4:4 무승부 고시엔 역대 5번째 연장 15회 무승부
9:1 승
16강 마에바시 상고 군마 5:2 승 재시합
8강 테이쿄 고교 동도쿄 연장 13회 4:3 승 끝내기 안타로 승리
4강 나가사키 니치다이 고교 나가사키 3:0 승
고시엔에서 결승에 오를 정도의 강팀이라면 1,2회전 정도는 압승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가키타 고교에게 쉬웠던 시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강했던 엘리트 고등학교들을 상대로 매번 접전에 연장전을 거듭하며 기적적으로 이겨나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결승에 진출했다. 4강 모든 자리가 공립교였고 기적의 백홈까지 나온 1996년 이후, 11년 만에 이뤄진 공립고교의 결승 진출이었다.[11]

4. 결승전

내로라 하는 야구 명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결승에 도달한 사가키타 고교를 기다리고 있던 팀은 춘계 고시엔 2회 우승을 거둔 바 있는 히로시마의 초명문 코료(広陵) 고등학교로 한신 타이거즈의 간판이었던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 수많은 유명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한 명문 고교이자 고시엔의 단골 손님으로 꼽히던 강호였다.

여기에, 이들의 결승전 선발 투수는 노무라 유스케[12], 주전 포수는 고바야시 세이지[13]였다. 배터리부터 후일 프로에서 주전으로 활약할[14] 선수들이 나왔을 만큼 야구가 좋아서 모였던 사가키타의 선수들과는 차원 자체가 다른 급이었다.

4.1. 경기 내용

1회전부터 4강까지 총 64이닝을 소화하며 지칠대로 지친 사가키타 고교는 경기가 시작하자 내내 노무라에게 7회까지 1안타로 압살당하며 0-4로 끌려가게 되었다.[15]

경기는 코료 쪽으로 기울고, 마침내 맞이한 8회말. 이 경기를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을 기다린 것은 고시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경기 하이라이트. 8회 소에지마의 만루홈런 장면은 영상 시간 10:00부터 보면 된다.
선두 타자 에가시라 에이지(江頭英治)가 풀카운트 승부 끝에 6구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1사, 8번 타자이자 에이스 투수 쿠보 타카히로(久保貴大)가 이때까지 12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던 상황 속에서 1볼 카운트에서 바깥으로 빠지는 변화구를 3루수-유격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타로 만들며 자신의 대회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어서 9번 타순에서 대타로 나선 니카와 카츠마사(新川勝政)가 1스트라이크에서 변화구를 공략해내어 우전 안타를 만들었고,[16] 1번 타자 츠지 타카토(辻尭人)는 풀 카운트 승부 끝에 7구 볼넷을 골라내 1사 만루를 만들며 7회까지 사가키타 타선을 1안타로 압살하던 노무라를 흔들었다.

여기서 2번 타자 이데 카즈마(井手和馬)가 나섰고,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하게 들어온 5번째 공을 주심이 볼로 판정하면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3루 주자였던 쿠보가 홈을 밟으며 사가키타가 1점을 얻게 되었다.[17] 노무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포수인 코바야시 역시 말도 안된다는 듯 미트를 꼈던 손으로 그라운드를 치며 항의했으나 주심은 판정을 바꾸지 않았다.

사가키타 고교가 1점을 득점한 후 여전히 1사 만루, 1:4로 뒤지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는 팀의 주포였으나 이 경기에선 이때까지 안타 없이 볼넷-2타석 연속 삼진으로 침묵하던[18] 3번 타자-3루수 소에지마 히로시(副島浩史)였다. 소에지마는 1볼 1스트라이크에서 노무라가 3구째로 던진 슬라이더를 풀스윙으로 쳐내었고, 타구는 펜스를 넘어가 좌측 스탠드에 내리꽂히며 사가키타가 단박에 5:4로 역전했다. 고시엔 역사상 최초의 결승전 3점차 역전 만루포 기록[19]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역전포를 얻어맞은 노무라는 4번 이치마루 다이스케(市丸大介)를 3루 땅볼로 잡고 5번 오쿠시 료헤이(大串亮平)에게 우전안타[20]를 얻어맞은 뒤 6번 타나카 료(田中亮)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추가 실점 없이 8말을 마치기는 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사가키타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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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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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말 극적인 역전 만루홈런을 터뜨리고 환호하는 소에지마와 사가키타 고교 선수들

9회초, 코료 고교의 선두타자로 들어선 6번 하야시 류키(林竜希)는 쿠보를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 끝에 6구째를 3루수-유격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좌전 안타[22]로 만들며 1루로 나갔다. 동점까지 단 1점만이 필요했던 코료는 후속 타자였던 7번 오카다 쥰키(岡田淳希)에게 보내기 번트를 준비시켰고, 오카다는 3구째에서 쿠보의 몸 쪽으로 향하는 높은 직구를 1루 방향 번트 타구로 쳐내며 하야시는 여유롭게 2루로 보내는 데 성공하며 코료가 1사 2루 찬스를 만드는 줄 알았으나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투구 직전부터 사가키타의 3루수 소에지마 히로시는 오카다가 번트를 대는 순간에 홈 바로 앞까지 달려와 있었고, 1루수 츠지 타카토가 공을 잡는 걸 보고 3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2루로 간 하야시가 3루 베이스가 비어있다고 판단하여 3루까지 노리며 내달린 것. 이게 오카다를 태그한 츠지의 눈에 딱 걸렸고, 전력으로 달려 3루 커버를 들어간 소에지마에게 정확하게 송구되면서 하야시는 3루에서 태그 아웃되었다. 이렇게 1사 2루 찬스를 만들어야 했을 보내기 번트가 주자의 판단 실수로 인해 순식간에 주자 없는 2아웃 상황이 되었다.

위기를 넘긴 사가키타의 에이스 쿠보 타카히로는 마지막 타자였던 8번 겸 에이스 투수 노무라 유스케를 변화구로 삼진 아웃시키면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사가키타 고교 야구부가 결승전에서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제89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우승팀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돌풍(がばい旋風)'으로 불리는 고시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승이자 사가키타의 기적이라는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 이 경기를 중계하던 아사히 방송 캐스터는 우승콜을 다음과 같이 외쳤다.
三振!! 佐賀北高校が、甲子園球場で、奇跡を起こしました!
삼진!! 사가키타 고교가 고시엔 구장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2007
甲子園
제8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第89回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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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8.25, 13:00, 고시엔 구장 45,000명(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코료 고교 노무라 유스케 0 2 0 0 0 0 2 0 0 4 13 0 6
사가키타 고교 바바 마사후미 0 0 0 0 0 0 0 5 X 5 5 0 4
상세 기록

샤다라빠레진코믹스에 연재한 고시엔 만화에서 2007년 결승전을 "고시엔에 모인 모든 야구팬의 꿈을 이뤄준 기적"이라고 찬양했다. 아다치 미츠루가 그런 걸 그렸어도 욕먹었을 것

5. 사카키타 고교 야구부는 최약체 야구부였다?

한 블로거의 지나친 과장으로 동호회 수준인 최약체 야구부가 전국대회를 우승한 것으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해서 보면,

공립학교가 고시엔에서 강호 사립학교들을 물리치고 우승한 건 폄하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과거 서술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지역 내 약체 학교는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학교에서 고시엔 진출을 이뤄낸 건 일본 제일의 하극상 참조.

6. 여담

파일:23dDPav.jpg
사가키타의 기적의 주역 투수 2인
쿠보 타카히로(좌), 바바 마사후미(우)

7. 관련 문서


[1] 엄청난 돌풍이라는 의미로, とても(매우)의 하카타벤인 がばい와 旋風(선풍, 돌풍)을 합친 단어. 일본에서는 사가키타의 기적보다는 がばい旋風(가바이 센푸)로 더 많이 부른다. 고시엔 역사관에도 がばい旋風(가바이 센푸)라고 되어 있다.[2] 하지만 이 만화에 사가키타편은 후술된 한 블로거의 글을 그대로 써서 허황된 정보가 대부분 이다.[3] 2016년 고시엔 참가를 끝으로 해체. 야구부내 폭력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고시엔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와 더불어 학원 자체적으로 야구신입부원을 받지 않았다.[4] 때문에 다른 지역의 유망주들을 대거 모집하는 명문고, 이른바 "외인부대"가 과연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교육의 연장선상이어야 할 고교야구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등의 논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2006년 이후 고교야구 연맹은 특기생 모집, 장학생 지급, 일반 학생과와 분류된 체육과 운영 등에 대대적인 규제를 가하며 이러한 사립고의 엘리트중심 야구는 일반 학생들도 참여하는 개방 노선으로 전환되는 추세이다.[5] 고시엔 출전을 위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타지역 강팀으로 떠나는 경우도 매우 많은데 2005년 연맹에서는 1996~2005년, 즉 10년 사이에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 중 다른 현에서 온 경우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다른 현에서 와서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는 10년 간 916명에 달했고 특히 오사카부 출신이 457명에 달했다. 이는 오사카부가 PL학원, 오사카토인 등 수많은 강팀이 몰려 있기 때문에 A급 선수라도 고시엔 출장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NPB 정상급 투수 중 하나였던 마에다 켄타는 2004년 1학년 때는 여름 예선 결승에서 츠지우치 타카노부와 히라타 료스케가 이끌던 오사카토인을 잡고 본선에 진출했으나 그 다음해에는 다시 준준결승에서 오사카토인에게 패배, 고3 때는 준준결승에서 히가시오사카대학카시와고교에게 패퇴하며 고1 이후 여름 고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한 지역을 떠나 상대적으로 경쟁이 약한 지역의 강팀에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2012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카가와니시 고교의 경우 카가와현 출신은 커녕 시코쿠 4개현 출신조차 없었고 대신 오사카부 10명, 효고현 5명 등 벤치에 들어가는 18명 전원이 다른 현에서 온 선수였다. 특대생 문제와 더불어 고교야구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렇다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2015년 여름 고시엔에도 역시나 오사카 출신 선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6] 오사카, 효고 지역에서 타 지역으로 진학한 선수는 다르빗슈 유(미야기현, 도호쿠고교)와 다나카 마사히로(홋카이도, 코마다이도마코마이고교)가 있다. 선망하던 PL학원고의 입학에 실패한 니시오카 츠요시고치현의 야구명문교 메이토쿠기주쿠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PL과 대결하기 위해 같은 오사카부의 야구 강호 오사카토인 고교 진학을 택했다.[7] 물론 전국 우승도 거두는 초명문 공립고교들도 일부 있지만, 이 공립고들은 동문의 지원과 육성 측면에서는 명문 사립고들과도 막상막하인 어디까지나 일부의 케이스이다.[8] 2000년 82회 대회에 첫 출전했으며 이 때는 첫 경기(2차전)에서 카나가와현의 야구 강호 요코하마 고등학교에 1-12로 대패하며 바로 짐을 싸야 했다.[9] 참고로 사가 키타(北)고의 전신인 현립 사가고가 1958년까지 고시엔에 총 7회 진출한 적이 있으나, 1963년에 사가고가 동, 서, 북 3개 교로 분리되면서 사가고의 역사는 사가 니시(西)고가 가져가서 사가 키타고와는 관계가 없게 되었다. 참고로 사가 니시고는 1963년 이후 한 번도 고시엔에 진출한 적이 없으나, 일본 전체에서 유일하게 유니폼에 학교명/지명 이외의 다른 이름인 에이조(栄城)를 쓰는 특례를 허락받은 학교로 유명하다.[10] 모리모토 히초리, 야마사키 야스아키, 마츠모토 고 등 수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한 야구 명문고로, 하계 고시엔 도쿄 예선이 동/서부 2개 지역으로 분리된 이래 동도쿄 지역 고등학교로썬 유일하게 하계 고시엔 우승을 달성한 학교다.[11] 그 후 공립고교의 결승행은 꼬박 1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학교는 100회 대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로 요시다 코세이의 가나아시 농업고교(아키타).[12] 메이지 대학교를 거쳐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1지명으로 입단. 201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2016년 센트럴리그 다승왕에 오른다.[13] 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지명으로 입단한 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14] 다만 코바야시는 프로 데뷔 후엔 수비력에선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심각하게 낮은 공격력이 발목을 잡으며 2019년 이후론 오시로 타쿠미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고 백업으로 밀려났다.[15] 노무라는 7회 초에 쿠보를 상대로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때려내며 2타점까지 기록했다.[16] 직후 니카와는 대주자 마츠오 타카요시(松尾孝嘉)로 교체되었다.[17] 포수 미트에 들어온 위치는 확실히 스트라이크지만 타자의 몸 쪽으로 온 데다 백도어성 볼로 들어온지라 존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 듯하다.[18] 준결승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21타수 7안타 2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은 각각 첫 경기인 후쿠이 상고전, 8강 테이쿄전에서 쳐냈다.[19] 1994년 여름 대회 결승전에서 같은 현의 사가 상고(佐賀商業)가 가고시마현 대표 쇼난 고교(樟南)를 상대로 7회까지 3-4로 뒤지다가 8회 초에 4-4 동점을 만든 다음 9회 초 2사 만루에서 여름 고시엔 사상 최초의 역전 만루포를 작렬하며 8-4로 승부를 뒤집고 사가현 최초의 고시엔 우승팀이 되었다. 소에지마의 홈런이 3점차를 역전한 만루포임을 명시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0] 워낙에 잘 맞아서 코료 고교의 우익수 오카다 쥰키(岡田淳希)가 슬라이딩으로 이 타구를 끊지 못했으면 2루타가 될 수도 있었다.[21] 당연하지만 7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건재하던 노무라가 대거 5실점을 하면서 무너진데다 사실상 다음 9회 초가 코료에게 마지막 찬스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코료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사가키타는 5득점으로 리드 중인 상황에서 마지막 이닝인 9회만 막아내면 되니까.[22] 결승전 4타수 3안타 1볼넷 기록[23] 상술했던 만루홈런을 친 타자이다.[24] 실제 다른 교사에 비해 수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25] 샤다라빠는 고시엔으로 GO!에서 "누구도 프로나 대학에서 지명받지 못했지만..."이라고 표현했지만 프로 레벨에 진출한 선수가 없을 뿐이지 대학야구부에는 많이 갔다. 게다가 일본 대학야구도 그 수준이 매우 높은데다 숫자도 많아 대회도 많은 터라 굳이 프로에 가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할 수 있는 구조다.[26] 실제로 쿠보 타카히로의 경우 츠쿠바 대학 시절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로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졸업 후에는 고교야구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27] 일본 고시엔의 구조자체가 프로데뷔를 위한 장이 아니라 고등학교의 마지막 청춘을 불사르는 곳이다.생각보다 고시엔을 진출하고도 프로 지망하는 선수가 그닥 많지 않고 프로데뷔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걸 모욕으로까지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청춘은 청춘으로 두자는 뜻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28] 나카무라 아키라(도쿄 테이쿄(帝京) 고등학교, 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나카 켄지로(토키와학원, 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사토 요시노리(센다이 이쿠에이(育英) 고등학교, 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이 포함되었고 운명의 상대인 노무라도 함께 뽑혔다.[29] 4학년이었던 2011년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때 2회전에서 강호 토요대학을 만나 탈락하는데 당시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였던 후지오카(현 치바 롯데 마린즈)를 상대로 마지막 타석에서 대형 파울 홈런을 날리기도 했지만 4삼진으로 침묵. 이 경기 이후 지금까지 해왔던 야구를 포기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이치마루가 이 경기를 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30] 그만큼 이 경기의 역사적인 가치가 높았다는 점의 반증이다.[31] 2012년, 2014년, 2019년[32] 이 때의 감독이 바로 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