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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30 12:48:07

AMC 그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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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mc_gremlin.jpg
Gremlin

1. 개요2. 상세
2.1. 배경2.2. 출시 및 판매
3. 미디어에서4. 기타5. 둘러보기


AMC Gremlin

1. 개요

The New American Car.[1]
- 1970년 런칭 광고##
Why is it when the other car companies come out with sporty little cars, the cars come out looking the same?
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스포티한 소형차를 선보일 때마다,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요?
- 1971년 그렘린 X 출시 당시 지면광고#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이하 AMC)이 1970년부터 1978년까지 생산한 소형차이다.

2. 상세

2.1. 배경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에서는 폭스바겐 비틀을 필두로 하는 수입산 소형차들이 파이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AMC에서는 조지 W. 롬니[2]의 후임으로 1962년에 취임한 로이 애버네시(Roy Abernethy) 회장이 소형차 중심의 회사였던 AMC를 경영하면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빅 3을 따라서 대형차급을 라인업에 무리하게 추가하고 디자인도 매년 변경하다가 회사를 적자에 빠뜨리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는 동시에 수입산 소형차에 대한 방어구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임 회장 로이 채핀 주니어(Roy D. Chapin Jr.)가 애버네시의 후임으로 들어온 1967년 이후에도 미국 3사가 1971년 출시를 목표로 폭스바겐 비틀, 토요타 코롤라[3]같은 차들과 맞붙을 소형차를 준비하고 있어서 이를 빠르게 견재할 필요가 생겼다.

AMC는 기존의 컴팩트카 라인업인 램블러 아메리칸(Rambler American)의 후속 모델로 이에 기반한 신차 호넷(Hornet)[4]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AMC의 수석디자이너였던 리처드 티그(Richard A. Teague)는 동료 디자이너 밥 닉슨(Bob Nixon)[5]과 함께 1966년부터 호넷의 전장을 줄여 만든 소형차를 기획했다. 마침 AMC에서는 작은 규모 대비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위해 부품 공용화를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고, 로이 애버네시가 AMC 회장일 시절인 1966년 말에 1,264만 8천 달러의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회사 사정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AMC에서는 처음부터 신차를 만들 여건이 되지 못했다.
파일:AMC AMX-GT.jpg
그렘린의 디자인적 모티브가 된 AMC AMX-GT
이에 따라, 리처드 티그가 비행기에서 멀미 봉투에 스케치한 디자인 안을 토대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리처드 티그가 제안한 디자인 큐가 상품기획팀장 게리 메이어스(Gerry Meyers)의 승인을 받은 뒤,[6] 밥 닉슨 등으로 구성된 디자인 팀에서는 이 디자인을 다듬어나가며 이를 선보일 시험장으로서 재블린 기반의 컨셉트카 AMX-GT를 만들어 1968년 뉴욕 모터쇼에 출품했으며, AMX-GT에서 연구한 디자인을 호넷에 적용함으로서 경쟁사들보다 6개월 이상 빠른 시점에 그렘린을 출시할 수 있었다. 밥 닉슨을 비롯한 개발진들은 호넷의 휠베이스를 2,743mm에서 2,438mm까지 줄여 폭스바겐 비틀보다 살짝 긴 정도로 전장을 줄였고, 호넷의 전면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AMX-GT의 각진 2박스 세단 스타일을 적용했다.#

이렇게 완성된 그렘린의 2박스 세단 스타일은 후미부가 아주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해치백다운 실루엣을 갖추었으며, AMC의 수석디자이너 리처드 티그도 경쟁사들의 소형차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적인 디자인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7] 리처드 티그에 따르면 그렘린과 함께 AMC의 소형차 프로젝트로 호넷의 휠베이스를 그대로 줄여 만든 2도어 세단 "와스프(Wasp)"도 같이 준비했으나, 실내공간도 별로 안 나고 스타일링도 별로였기 때문에 2박스 스타일의 그렘린을 채택했다고 한다.# 또한 이 2박스 스타일링은 전통적으로 자동차 업계에서 공기역학을 개선하기 위해 적용한 캄백(Kammback) 스타일에 기반하여 연비에도 보탬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렘린은 호넷의 엔진과 변속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서스펜션이나 브레이크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4륜 드럼브레이크, 호넷의 후륜 가로배치 리프 스프링을 변형한 서스펜션을 적용했다. 대신 AMC에서는 바디를 최대한 견고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으며, 개발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해치백형 트렁크를 넣는 대신 뒷창문만이 해치게이트 형태로 열리도록 조치했다.[8][9] 또한 호넷이 기존의 준중형 라인 아메리칸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구식 설계라는 한계점을 갖는 대신에 차후 경쟁차로서 각종 품질문제에 시달린 포드 핀토, 쉐보레 베가와 대비하여 그렘린이 내구도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기존 차량의 메커니즘과 각종 부속을 최대한 공용하며 만들어진 덕에, 양산 결정부터 출시까지 총 20개월이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짧은 개발기간, 포드 핀토의 절반 수준인 1200만 달러의 개발비로 개발이 완료되었다.#[10]

2.2. 출시 및 판매

파일:IMG_1077-1.jpg파일:IMG_1085-1.jpg
1971년식 AMC 그렘린 1973년식 AMC 그렘린 X
1970년 4월 1일에 1970½년식으로 출시된 그렘린은 2박스 해치백 형상의 2도어 세단으로 출시되었다. 출시 당시에는 2인승에 해치게이트 대용의 뒷창문도 고정식으로 만든 1,879달러짜리 기본형 라인,[11] 접이식 뒷좌석과 함께 뒷유리 해치게이트를 더한 1,959달러[12]짜리 4인승 라인을 출시했다. 경쟁사인 GM, 포드가 자사 소형차를 기초부터 완전히 새로 설계한 것과 달리 기존 차량의 설계를 최대한 활용하며 개발한 덕분에 그렘린은 경쟁사들이 준비하던 쉐보레 베가폰티악 아스트레, 포드 핀토, 플리머스 크리켓 등보다 6개월 더 빠르게 신차를 내면서 개발비, 생산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4기통 엔진만 존재했던 경쟁차들과 달리 그렘린은 호넷의 파워트레인을 공용할 수 있다는 이점까지 생겨 128마력(hp 기준)을 내는 3,258cc와 145마력을 내는 3,801cc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13]을 준비했다. 변속기는 보그워너제 3단 자동과 3단 수동[14]이 제공되었다. 여기에 당대 AMC의 가격정책에 맞춰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핸들링 패키지, 리미티드 슬립 디퍼런셜, 에어컨, 버킷시트, 틴팅 유리창, 루프랙, 전동 와이퍼[15]와 각종 실내외 트림 패키지를 비롯한 40가지 이상의 옵션을 제공해 선택지를 넓히고 수익성도 키우고자 했다. 마케팅은 빠른 출시기간을 살려 "미국 최초의 서브컴팩트 카(Subcompact car, 소형차급)"[16]로 홍보하고, 동시에 그렘린 특유의 개성적인 2박스 세단 스타일을 어필하여 1970년 전후의 젊은 층들을 고객으로 겨냥해 60% 이상의 고객이 35세 이하라는 유의미한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렘린은 폭스바겐 비틀 등과 경쟁하는 소형차 모델로서 기본형 모델이 96km/h까지 가속하는 데 12초, 최고시속은 160km/h 전후를 기록하여 성능에서 우위를 가져갔고,[17] 비틀보다 훨씬 무거우면서도[18] 공인연비도 23MPG[19]로 미국차로서는 비틀의 26MPG[20]에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AMC에서는 그렘린의 가성비에도 신경을 썼으며, 대용량의 연료탱크와 함께 회전반경도 비틀보다 작았다. 다만 호넷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장을 줄인 탓에 무게배분이 앞으로 쏠리면서 코너링 성능도 나빠지며 핸들링도 느려지는 단점이 있었고,[21] 중앙의 구동축이 실내공간을 잡아먹는 구성인 앞 엔진 후륜구동 레이아웃이면서 휠베이스까지 크게 줄인 탓에 2열 뒷좌석이 매우 좁았다.#

1970년 한 해동안, AMC에서는 25,300대의 그렘린을 판매했으며, 1년간의 모델이어를 처음으로 채운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꾸준한 판매량 성장을 기록했다.
파일:1974 AMC 그렘린 X 전면.jpg파일:1974 AMC 그렘린 X 후면.jpg
1974년식 AMC 그렘린 X
파일:1976 AMC 그렘린 전면.jpg파일:1976 AMC 그렘린 후면.jpg
1976년식 AMC 그렘린
파일:1977 AMC 그렘린 X 전면.jpg파일:1977 AMC 그렘린 X 후면.jpg
1977년식 AMC 그렘린 X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671,475대의 그렘린이 만들어졌으며, 주로 AMC의 주력 공장이 위치한 미국 위스콘신 주 커노사(Kenosha)에서 만들어졌다.이외에도 캐나다 온타리오 주 브램턴(Brampton)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도 그렘린의 현지생산이 이루어졌으며, 그렘린을 고급화하고 좀 더 보편적인 스타일로 다듬은 스피릿이 후속모델로 도입되었다.

3. 미디어에서

포르자 호라이즌 4에 등장하는 1973년식 AMC 그렘린 X

4. 기타

파일:Hurst Rescue System One(1).jpg 파일:Hurst Rescue System One(2).jpg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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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카피의 "American"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미국 업체에서 만든 첫 서브컴팩트급 차량이라는 뜻, 그리고 아메리칸 모터스의 신차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2] 아들인 미트 롬니가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하고 있다. 정계 입계를 위해 1962년에 퇴임할 때까지 AMC 창립 전후로 1950년대 내내 소형차 생산과 개발에 집중했으며, 1958년 미국 경제 불황 속에서 미국 자동차 회사들 중 유일하게 매출 상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램블러 아메리칸을 비롯한 소형차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당대 미국 자동차 회사에서 자주 단행하던 리스타일링에도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운전자들의 마실차"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후임인 로이 애버네시가 미국 3사의 컴팩트카 시장 진출로 인한 시장의 레드오션화를 계기로 이를 갈아엎고자 미국 3사를 모방하려고 하는 계기가 된다.[3] 단, 당시 미국에서 일본차를 비롯한 일본 제품은 21세기의 중국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따라서 폭스바겐이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소형 수입차 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기에 닷선 510이나 코롤라같은 차들이 호평을 쌓아가기 시작하는 등으로 일본차들의 성장 속도도 매우 빨랐기 때문에 AMC를 비롯한 미국 업계들이 일본 소형차를 경계할 이유가 여전히 존재했다.#[4] 이 차의 1974년식 해치백 모델이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활약했다.[5] 2019년 2월에 86세로 타계. 크라이슬러에 입사해 테크니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닷지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다가 1959년에 AMC에 입사, 1960년대부터 수석디자이너 리처드 티그의 신임을 얻어 AMC의 소형차 디자인을 지휘하거나 1974년식 마타도어 쿠페,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디자인을 이끄는 등, AMC가 르노크라이슬러로 인수되는 과정을 모두 겪으며 1992년까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6] 금형값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7] 리처드 티그는 경쟁사들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라면 아무도 AMC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렘린의 스타일링을 옹호했으며, 모터트렌드 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디자인 상을 딸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색다른 이미지의 개성있는 차이며, 우스꽝스럽게 생긴 세단이 아닌 우리가 의도한데로 제역할을 할 모습의 작고 귀여운 왜건"이라고 답변했다.[8] 리처드 티그는 해치게이트의 부재에 대해 묻는 모터트렌드 지의 질문에 내구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치게이트를 제외했다고 설명했으며, AMC에서 개발한 차들 중 가장 튼튼한 차량이라는 반응을 얻었다고 해명했다. 대신 AMC에서는 1973년식 AMC 호넷에 2도어 패스트백 쿠페 스타일의 해치백 라인업을 추가했고, 1971년식 호넷 역시 1피스 해치게이트가 부착된 왜건 라인업인 스포츠어바웃(Sportabout)을 제공했다.[9] 참고로 해치백은 단순히 트렁크를 줄이고 해치게이트를 다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치게이트가 추가로 들어가는 만큼 보강이 필요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노고가 생각보다 큰 편이다. 해치게이트를 뚫으면서 이를 지지하는 골격의 면적이 좁아지는만큼 서포트가 약해지고, 약해진 만큼의 보강이 추가로 들어가야 한다.[10] 단, 실제 제조단가는 준중형급 호넷과 별 차이가 없어서 가격까지 훨씬 싼 그렘린의 마진폭이 좁은 편이었다고 한다.[11] 1972년에 단종될 때까지 18개월동안 총 3,017대가 판매되었다.[12] 2020년 환율로 13,055달러. 이후 그렘린의 경쟁차로 등장한 쉐보레 베가는 1971년식 기준 2,090달러였으며, 베가가 출시되기 전 호넷의 경쟁차종이자 쉐보레의 준중형 라인으로 판매되던 노바는 1970년형 기본 트림 기준 2,335달러였다. 참고로 그렘린이 출시되었을 당시 먼저 출시된 AMC 호넷의 기본 트림은 1,994달러, 그렘린의 주요 경쟁차종인 비틀은 1,874달러였다.[13] 둘 다 1배럴 카뷰레터가 적용되었다.[14] 1단 싱크로메시가 없는 칼럼식 수동변속기이다. 플로어 시프트식은 옵션.[15] 기본 와이퍼는 진공식이었다.[16] 단, AMC의 전신인 내시에서 출시한 오스틴 기반의 2인승차 내시 메트로폴리탄, 그리고 미국의 경자동차 전문업체 크로슬리(Crosley)가 출시한 경차 라인업이 그렘린보다 먼저 나온 바 있다.[17] 카앤드라이버 지가 시승한 3,801cc 수동변속기 사양은 1971년 1월 시승기 기준 96km/h까지 10.5초를 기록했다.[18] 약 800파운드(약 362.9kg)가 더 나갔다. AMC에서는 오히려 무거운 공차중량을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승차감, 그리고 안전에서 유리하다고 역으로 강조했다.#[19] 약 9.8km/l.[20] 약 11.1km/l.[21] 카앤드라이버 지의 시승기에 따르면 노파워 스티어링 사양의 록투록이 6.25바퀴었다고 한다.#[22] 흰색 텍스트가 들어가는 타이어가 선택 사항으로 제공되었다. 일반 그렘린은 화이트월 타이어 적용.[23] 이때 엔진의 압축비가 8.5:1에서 8:1로 낮춰져 3,801cc 엔진의 최고출력이 145마력에서 135마력으로 내려갔다.[24] 이후 추가된 그렘린 V8 사양은 X 한정으로 들어가는 "5-litre V8."[25] AMC에서의 공식 명칭은 바이어 프로텍션 플랜(Buyer Protection Plan). 파워트레인만 보증수리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범퍼에서 범퍼까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타이어를 제외한 모든 문제사항을 보증수리했으며 정비시간이 길어질 때를 대비한 예비차량 무료제공, AMC 측으로 연결 가능한 수신자 부담번호를 제공했다.[26] 진짜 데님은 화제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사용해지 못했다.#[27] 각각 속도(5마일과 2.5마일, 즉 8km/h와 4km/h)에서 찌그러지지 않는 고강성 범퍼.[28] AMC 그렘린 관련 정보 웹페이지인 gremlinx.com에 따르면 프레스토라이트 점화장치에 신뢰성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29] 기능이 작동될 시에는 56km/h 이상의 속도에서 동작, 51km/h 이하의 속도에서 동작이 중단된다. 600~700대 정도가 이 전자식 오버드라이브를 적용했다고 한다.[30] 기존 그렘린 대비 뒷창문의 면적이 23% 커졌다.[31] 라이선스비가 들어가는데다가 AMC 페이서가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중~대형차 라인도 단종되어가는 등, 1970년대 말의 AMC는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4기통 엔진을 기본사양으로 넣을 여유가 없었다.[32] 약 94.6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