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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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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발 배경3. 스탈린의 관심4. 개발 스타트!5. 국산 직렬 수랭식 엔진6. 냉각기 배치7. 무장 설치8. 항력과의 싸움9. 시험 비행10. 가치있는 실패

1. 개요

파일:i21.jpg
"조국의 항공 산업에 혁신이 가해진지 첫 5년 동안 만들어진 I-4, I-5, I-7의 평균적인 비행속도가 250에서 290km/h에 머물고 있는 동안, 외국에서는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이미 시속 4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과급기가 달린 피스톤 엔진을 장착한 외국의 군용기들은 속도와 전투상승고도를 크게 높여 놓았고, 상승률 또한 우리 비행기를 훨씬 웃돌고 있다. 같은 시기 우리가 만든 고고도용 엔진은 믿을 수 없고 불안정하며, 고작해야 테스트 단계일 뿐이다." - 세르게이 일류신

일류신 I-21(Ильюшин И-21 : 일류신 21번 전투기)은 나날이 커져만 가는 나치의 위협을 심상치 않게 여기던 당의 요구에 응해 소련 공군의 근대화 계획이 발표되고 난 후, 일류신 설계국이 1935년부터 개발에 나선 단발 단좌 전투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전투기는 2대의 시제기만 남긴 채 양산 계획이 취소되고 말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항공산업 발달사, 특히 수랭식 엔진 군용기 분야에서 대단히 독보적이면서도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종이었다.

2. 개발 배경

1935년 11월 26일에 TsAGI의 대리인인 미하일 레온티예프(Михаил Леонтьев)가 소련 공군 사령관 야코프 알크스니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이 편지에는 "N39 공장에서 M-34FRN 엔진을 장착하여 제작중인 새 전투기의 도면을 보냅니다. 이 기종은 이례적으로 높은 성능을 보일 가능성이 높고 곧바로 제작이 가능하니 빠른 시일안에 설계안에 대한 심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씌여있다.

레온티예프는 나흘 후, "기본적으로 이 기종의 속도에 대한 기술 요구는 합리적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같은 속도에서 항속거리가 600 km로 판단되어 부족한 수준이니 개선할 것. 신형 엔진을 장비한 단발 단좌 전투기의 설계안을 승인하며 시제기는 신속히 전투형으로 전환시킬 것. 이 기종의 설계는 일류신 설계국에서 진행하라"는 내용의 답신을 공군측으로부터 받게 된다.
그밖에 이 문건에 기록된 기타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전투에 적합한 무장과 의장을 갖춘 시제기를 제작할 것.
2. 270 km/h의 저속 경제순항으로는 1,000 km, 순항속도는 480 km/h 수준을 요구하며 이 속도로 766 km를 비행할 수 있어야만 할 것.
3. 조종자는 항공기의 상태를 항상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도록 제작할 것.

3. 스탈린의 관심

소련 공군은 이 계획에 앞서 등장한 폴리카르포프 I-17과 마찬가지로 동체와 표면 모두 금속으로 만들라고 주문했으며, 일류신 설계국은 당시 새로이 유행하던 보편적인 단발 전투기 설계 흐름에 맞추어 밀폐식 캐노피와 인입식 랜딩기어를 갖춘 저익 단엽기로 설계하였다. 시속 600 km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제안서를 접하게 되자 공군 사령부는 이 프로젝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35년 5월, 모스크바의 흐룬제 공항에서는 스탈린 이하 당 고위 간부와 붉은 군대의 장성들과 여러 항공 설계국의 수석 설계자들, 기타 항공산업 관계자의 요인들이 모인 가운데 신예 군용기들의 참관이 실시되었다. 그 중에는 중앙 설계국장과 N39 공장의 책임자이기도 한 세르게이 일류신도 함께 있었다. 검열 후에 일류신은 I-21의 스케치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게 된다.
"1935년 5월 2일 흐룬제 공군 비행장에서 치른 항공기 설계에 관한 지도자 동지의 검열에서 년내에 시속 600 km의 속도를 요구받았음.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고 무장을 갖춘 양산기에서도 같은 수준의 성능을 구현해야 하며, 신형 단좌 전투기에는 4정의 ShKAS 기관총, 혹은 2문의 ShVAK 기관포를 장착할 것"
일류신은 또한 이 항공기가 속도기록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투용 항공기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속기를 제작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였기에 그를 무척이나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I-21의 인상적인 속도성능이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고, 지도자 동지는 실용성보다는 속도기록을 세워 위대한 공산주의의 승리와 면모를 일신한 소비에트의 공업기술력을 세계 항공업계에 과시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스탈린은 이보다 앞선 1934년 10월 1일에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기도 했었다.
"생산중인 I-16 전투기의 엔진을 N39 공장에서 조립한 새 엔진[1]으로 교체할 것. 이 엔진이면 3,000 m에서 430 km/h의 속력을 낼 수있는 최초의 전투기가 될 것이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스탈린의 탐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기술고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롤료프 동지! 세계 속도 기록은 시속 430에서 500 km로 높아져만 가고 있고 이건 영국 아니면 프랑스의 차지가 되고 있소. 이 기록은 반드시 우리 조국 소련이 달성해야만 하는 위업이오."라고 일갈하는 스탈린이었다.
실무자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기가 막히더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도자 동지의 엄명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lyushinlogo.jpg

4. 개발 스타트!

1935년은 세르게이 일류신이 M. R. 멘진스키를 제치고 설계국장으로 지명된 첫 해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이미 1931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중앙 설계국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항공산업을 이끌 막중한 책무가 지워진 그의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일류신은 반문하였다. 과연 지금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시제기와 엔진들은 1932년 7월에 당 중앙 노동협의회와 방공위원회가 세운 기준에 크게 못미치고 있고, 항공산업계의 전반적인 수준 또한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소련 공산당 혁명군사위원회가 1933년 7월에 내놓은 보고서의 평가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과 큰 기술 격차를 불러와 소련 공군이 운용중인 항공기가 (특히) 재료 부분에 있어서 잠재적인 적국의 그것에 비해 뒤쳐져 있다는 것이 일류신의 냉철한 평가였다. 그는 이밖에 다음과 같은 비밀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명료하지 못하고 중대한 오류가 반복되는 설계도면과, 조업태만이기 일쑤인 일선 공장에서는 덜 완성된 부품들을 내놓고 있으며, 이들에게 공급되는 저질 자재 또한 항공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우리 개발진들 역시 수준낮은 연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항공기 자재들이 제 때에 충분하고 활발한 실제 테스트를 거치는데 인색하다."

일류신은 이 신형기의 요구조건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속도를 두었다. 설계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따라붙은 항력 감소라는 숙제를 풀기 위하여 일류신 설계국은 끊임없이 새로운 신기술을 도입하여 풀어나가야만 했다. 보다 개선된 공기역학적인 기체 형상을 다듬기 위해 그는 기존의 인입식 랜딩기어와 밀폐식 조종석, 플랩 등의 알려진 기술은 물론 여러가지 형태의 엔진 카울링을 만들어 바꾸어가며 실험했고 혁신적인 냉각장치 등을 부단하게 연구했다. 또 아직 복엽기가 흔하던 당시에 지지대가 없는 한장의 날개가 전투 기동에 견디도록 견고하게 만드는 일 또한 풀어야만 하는 과제였다. 21번 전투기 계획은 소련의 항공업계가 초기 단엽 전투기인 투폴레프 I-14, 폴리카르포프 I-16, 그리고로비치 FE-1을 개발하며 이룩한 많은 기술적 도약에 의존하여 하나 하나, 느리지만 점차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5. 국산 직렬 수랭식 엔진

필요한 파워를 제공할 엔진 또한 일류신을 애먹인 과제였다.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공랭식 엔진을 선호하던 소비에트 엔지니어들도 단면적이 작아 동일 출력으로 더 고속비행이 가능한 수랭식 엔진이 미래의 하늘을 지배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I-21이 설계되던 때 소련 자국산 수랭식 엔진으로 가장 최신형은 1,200마력의 출력을 보여준 미쿨린 M-34F였는데 AM-34의 출력강화형인 이 시제품은 아직 실용단계가 아니었다. 실용화된 것으로는 프랑스제 이스파노-수이자 12Y을 국산화시킨 860마력짜리 클리모프 M-100 엔진이 그나마 쓸만한 것이었는데, 직경이 작은 이 엔진은 소련의 엔진 설계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며 폴리카르포프 I-17 같은 시제 전투기가 시속 500km를 돌파하게끔 해주었던 것이다.

개발진은 이 항공기의 속도를 시속 600km에 도달하게 해줄 엔진으로는 현재 개발중인 M-34FRN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엔진은 배기량을 1275리터로 증대시켰고, 감속 치차를 제거했지만 거대한 과급기가 달려있어 길이가 길었다. 일류신은 모든 요소를 비행방향 일직선상에 길게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랭크 케이스를 엔진 뒤쪽으로 15cm 밀어넣고, 발전기도 엔진 뒤쪽으로 재배치했다. 냉각팬과 그것을 연동시켜 줄 베벨 기어 또한 일직선상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I-21은 기수가 대단히 길게 튀어나온 특이한 형상을 갖게 된다. 날개에 넓게 배치된 냉각기로 물을 순환시켜 줄 파이프는 주익 스파를 통과시켜 엔진으로 연결했다. 일류신 설계국은 21번 전투기를 개발하면서 직경이 기존의 것보다 500mm가 큰 금속제 3엽 프로펠러의 제작법 또한 익힐 수 있었다.

이처럼, 엔진이 제 자리를 찾는 데까지 거의 1년 반을 소비하여 날짜는 1936년 9월 1일이 되어 이미 기약한 인도일을 초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M-34 엔진을 개량하고 강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비에트 항공업계는 고출력 항공엔진의 튜닝 기술을 습득하는 매우 중요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고출력 엔진의 기술 요소들을 정립하는 것은 전투기뿐만 아니라 군용기 설계의 설계 자유도를 높여주는데 기여했고 동력을 해외에 의존하던 소비에트 항공산업계가 자립하는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2]

6. 냉각기 배치

1935년 3월에는 프로토타입 엔진에 부착될 냉각 계통도 별도로 개발 작업을 진행하여 5달 후에는 윤곽이 드러나 실험이 개시되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소련 정부에서 정한 법령에서는 수랭식 엔진에는 에틸렌-글리콜 냉각액을 쓰도록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었다. I-21에서 시도한 증기 냉각시스템은 지상시험에서 뛰어난 효율을 보이고 있었지만 냉각액으로는 비등점이 낮은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관계 법령대로라면 일류신 설계국은 위법을 저지른 꼴이 된다. 이것을 불식시키자면 새 시스템이 가진 이득을 당국에 충분히 인식시킬 수밖에 없었다. 라디에이터가 항력계수를 높여 고속비행을 방해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때만해도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일류신은 원형기 2대에 제각기 다른 냉각시스템을 탑재하여 시험하게 된다. 21번 전투기의 원형 1번기는 날개에 새로운 '표면 증기냉각기'를 장비하여 저항을 감소시켜 고속을 노리도록 개발되었다. 이 방식은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수제자이자 소련에 귀화한 이탈리아 출신 항공 설계자인 로베르토 바티니(Roberto Barini)가 1933년에 제작하여 속도 기록을 세운 레이싱기 Stal-6에서 사용된 바 있었다.

2번기는 좀 더 보수적인 설계로, 기존의 에틸렌과 글리콜 냉각액을 순환시키는 냉각기를 장착했지만, 특이하게도 인입식으로 장비하여 조금이라도 공기저항을 낮추려 시도한 점이 이목을 끈다. 그러나 표면 증기냉각기는 높은 G가 걸리면 냉각수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엔진을 자주 과열시켰고, 이는 고기동 비행을 해야만 하는 전투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점이었다. 이 문제는 같은 방식의 냉각기를 장비한 독일He 100에서도 일어났지만 하인켈 사의 개발진은 동체와 날개 곳곳에 순환용 소형 모터 펌프를 달아 해결하였다. 21번 전투기에는 익근부에 2개의 모터가 내장된 것 외에는 냉각수를 강제로 순환시키는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일류신의 개발진들이 다소 번거로운 이 방법을 검토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또, 러시아의 추운 대기는 I-21의 날개에 물방울이 응축되어 비행 할 때 긴 증기 꼬리(!)를 달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공중전에서 치명적일 수도 있는 단점이었다. 어떤 장교는 날개에 넓게 배치된 냉각수 재킷에 총탄 한발만 맞아도 줄줄 새어 못쓰게 되어버린다며 전투피해에 무방비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7. 무장 설치

세르게이 일류신이 이끄는 개발진은 CDB-32라는 설계국 명칭이 붙여진 21번 고속전투기를 완성하기 위해 주말 휴일까지 반납한채 근무하고 있었다. 개발이 중반까지 진전되자, 일류신은 신형기에 필요한 속도와 무장이라는 두가지의 완성도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시제기가 2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쓸데없는 것은 모두 버려 설계속도를 실현해내야하며, 동시에 실전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무장의 연구도 함께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관총 4정을 장비한 형식과 기관포 2문을 장비한 형식을 구분해서 시험을 병행하며 개발하는 길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10px-Diagram_of_the_ShKAS_feed_system_operation_-_en.svg.png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I-21의 무장은 충분히 강력한 것이었다.시제 1번기는 주익 외측에 7.62mm ShKAS 기관총을 2정씩 내장했고, 탄창에는 각기 500발씩 장전하게 되어있어 모두 합쳐 기총 4정에 2,000발을 탑재하여 일제히 사격하면 16초간 사격을 지속할 수 있는 분량이다. 개발진은 I-21의 주익 아래에 작은 파일런을 각기 2개씩 달아 25kg급의 소형 폭탄을 4개 실을 수 있게 만들려고 했다. 두번째 시제기의 무장은 같은 위치에 20mm ShVAK 기관포를 1문씩 합계 2문을 장비하여 좀 더 위력적이었지만, 장탄수는 125발이어서 화력의 지속 시간은 짧았다. 주익 내부의 배치를 다시 해도 150발 탄창을 넣는 것이 한계였다.

8. 항력과의 싸움

일류신 설계국은 21번 전투기의 주익 설계에 새로운 형상을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후퇴각을 가진 날개 앞전에서 트레일링 엣지까지 부드럽게 얇아지다가 날카로운 끝을 이루도록 다듬었고, 전체적으로 후퇴각을 준 테이퍼익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 날개는 유체 저항을 감소시키는데 상당한 잇점이 있음이 밝혀졌고, 특별히 강화되고 출력전달 기어를 재구성한 특제 미쿨린 12기통 수랭식 엔진, 그리고 신형 냉각 시스템과 합쳐진 21번 전투기는 파괴적인 스피드를 낼 잠재력을 가지게 되었다. 훗날 이 날개의 상면 형상을 본 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용기 중 하나로 손꼽아지는 일류신 IL-2 슈투르모빅이 탄생하였다.

개발진이 이 기종의 공기저항을 낮추려고 도입한 새로운 시도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원형 2번기에서는 고쳐지지만, 처음 제작된 시제기는 꼬리바퀴가 아예 없었다. 대신 동체 후미에는 좌우로 조향이 가능한 작은 핀 끝에 썰매를 달아 기체를 지지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장치는 비행시에 보조 방향타 역할도 겸하는 대단히 유니크한 시도였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해준다면 수직 미익의 면적을 줄여 여분의 중량과 항력을 얼마간이라도 감소시켜줄 것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또한, I-21의 콕핏은 마치 레이싱기의 그것을 연상케하는 극도로 작은 크기로 줄여져 도설과 이어지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I-21의 스피드를 더욱 끌어올리는데 기여했지만, 실제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위험한 시도인 것이 밝혀졌다. 길다란 기수와 함께 시야를 극도로 제한하는 방풍창은 비행시 파일럿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했으며, 후방 시야는 제로에 가까왔고 장비된 망원 조준경으로 목표를 조준하는 것은 몹시 비능률적이었던 것이다. 꼬리의 스키드는 저속 활주에서는 아예 조향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지상에서는 차량으로 끌고 다니며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9. 시험 비행

전술한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뚫고 시제기는 1936년과 37년 사이에 완성되었고, 36년 8월 21일에는 지상시험을 위해 카가노비치 비행장으로 옮겨졌다. 불행히도, 러시아의 항공역사가들은 I-21의 처녀비행 날짜에 관해 기록된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현재 전해지는 출판물들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원형기가 1936년 말에 처음 하늘에 날아올랐다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듬해 3월에 실시된 시험비행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시속 600킬로미터를 초과하거나 약간 미달되거나 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때의 비행이 수평비행이었는지, 고도는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역시 불분명하다. 일류신 설계국의 기록으로는 1937년 4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 M-34FRN 엔진을 탑재한 시제기의 1단계 비행 테스트는 종료되었다고 하며, 22개의 세계 기록을 수립한 탁월한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블라디미르 K. 코킨나키(1904~1985)도 자신이 I-21을 몬 것은 1937년 초엽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10. 가치있는 실패

1번기의 초기 비행시험에서 밝혀진 결점은 역시 새롭게 설계된 증기 냉각 시스템이었는데, 비행 중에는 상온에서도 엔진이 과열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처럼 엄청난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류신 설계국은 표면 증기냉각기를 실용화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I-21을 설계하고 개발하면서 이룩한 기술적인 진보는 이루 말할 나위 없이 컸으며, 후대의 항공기를 개발하는 작업에서 많은 해결책을 내놓는 모범 답안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I-21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서 만들어낸 항공기 중에 표면 증기 냉각장치를 채용한 기종은 상업용과 군사용을 통틀어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 항공 심사국(GUAP)은 이 시제기에 기대되는 어떤 전투기도 달성하지 못한 엄청난 속도와 기존 전투기의 두배에 달하는 놀라운 상승성능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했고, 1939년부터는 더욱 개량을 가하여 파쉬닌 I-21(Pashinin I-21)이라는 신형 전투기를 실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항공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의 세번째 단계에 접어들자 마침내 고도 6,000 m에서 600에서 650 km/h의 속도로 비행하는 단좌 전투기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1] 미국제 라이트 사이클론의 소련 면허생산형[2] 이 시제기에 쓰인 엔진을 생산에 알맞도록 개량한 것이 미쿨린 AM-35이며 그 유명한 클리모프 M-105 역시 기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