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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3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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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A5034> 대한민국 국군 (1991~현재)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大韓民國 國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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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첨자C: 노획 차량
※ 윗첨자X: 시범운용, 연구 목적 도입 차량
취소선: 계획되었으나 취소된 차량
※ {중괄호}: 도입 예정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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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300/301
1. 개요2. 제원3. 상세4. 개발사5. 미디어6. 둘러보기7.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민수용 트럭 기반이자 공식 국산 군용차량이다.[1] 등장 배경은 다음과 같은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투예비군의 창설이후 병력과 화물수송량이 기존에 비해 대폭 증가하고 군에서 기존에 보유하던 낡은 1¼톤 트럭[2]이 퇴역하면서 남는 트럭들만으로는 증가한 병력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자, 이 트럭들의 빈 자리를 적절히 때울만한 트럭을 찾게 된다.

2. 제원

K-300/301

3. 상세

당시 마쓰다 복사의 라이센스 차량인 기아 복사를 생산하던 기아산업기아 복사에서 이륜구동인 기존의 차량을 4WD으로 개수하고, 지상고를 높인 후, 군에서도 이를 채택하고 1975년에 배치됐으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K300의 한계[3]로 인해 차츰차츰 다른차량으로 교체되면서 동시에 M715를 재도입하고[4] 이후 1980년 아시아자동차에서 카이저 M715를 면허생산한 K-311을 도입한 이후 퇴역의 길을 걷다가 결국 1985년이 되자 K300은 도입 10년만에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최초의 국산 군용차라는 의의가 있어서인지 통신 샵밴 형태의 K300 한대가 대전국립과학관에 보존되어 있다.

성능 면에서 약했던 것에 약간 변명이 될 만한 일화가 있는데, 오원철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국 대외정책전환으로 개도국 무상원조가 차관으로 바뀌어간 이래 군용 트럭도 공여받는 게 아니라 제값주고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국내생산할 겸 K-300은 예비군용으로 보급하려고 했다. 연구원이 주차한 군트럭 주변을 얼씬대며 치수를 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진을 멋지게 끝내고 나니 현역부대에서 이 새차를 달라고 요구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K-300이지만 기본이 민수형 카고트럭인데 그렇게 가져가서 군용트럭처럼 운용했다.

전술트럭으로는 영 좋지 않았던 K300이었지만 1980년에 도입돼 경찰과 군에서 나름 요긴하게 사용된 가까운 친척 쯤 되는 K301이라는 트럭도 있다. 둘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자면, K300은 기아 복사를 군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약간의 개수라도 받았던 반면에 이 K301의 경우 100% 민수용 차량에 제식명을 달고 도입시킨 차량이란 것이다. K300이 전술차량으로서의 효력을 얻지 못하고 단명한 반면 K301은 전술차량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로 경찰과 군대에서 경찰용 수송트럭을 비롯하여 군용 부식차, 위생차, 물자조달트럭 등 다방면에서 이용되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퇴역했다.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군대에 큰 영향을 준 트럭으로 보인다. 이 차량의 영향으로 트럭을 포함한 각종 군용차량의 국산화[5]가 시작됐고 상당수의 민수용 차량이 군용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군용 차량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상당수의 민수용 차량들이 군용 전술차량의 빈 자리를 대신해 운용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4. 개발사

1970년대, 미국으로부터 군용차량들을 공여받는 것보다 우리 손으로 직접 군용차를 만들자는 계획이 시작됐는데, 이 계획의 시점은 국산 사이드카 개발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서는 1976년 초부터 12월까지 30대의 사이드카를 생산했는데, 그 중 혼다의 제품을 라이센스 생산한 CB250은 평지용으로 만들어져 실제 군대에서도 사용되기도 했으나 군용 목적으로는 지프차에 따라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

이 때문에 상술했던 국산 군용차 개발이 개시됐으며, 76년부터는 사이드카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형 지프차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미군이나 국군이 쓰고 있는 군용트럭인 1¼톤 트럭2½톤 트럭과 유사한 형태의 차종을 민간기업들이 생산하고 있었다.

1¼톤 트럭의 경우 기아 복사가, 2½톤 트럭은 현대 D750, 아시아자동차 P9, GM 코리아 TSD40가 낙점됐으며, 군용트럭 개발을 위해 우선 이러한 형태의 민수용차를 야지와 험로에서의 기동력과 모래위에서의 가동력 및 기동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민수용 2½톤 트럭의 경우는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M602(6x6)에 비해 현저하게 가동 및 기동력이 떨어져 군용으로 적합하지 않았으나 1¼톤 트럭에 해당하는 복사만큼은 프런트 액슬과 타이어 크기만 개조하면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판정이 나왔다.

곧 예비군용으로 1¼톤 트럭을 개발하기로 했으나 국산 군용차의 개발은 순탄치 않았는데, ADD의 기동장비실장을 담당했던 이한백 전 기아 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월이었습니다. ADD의 딴 연구실에서는 병기개발을 하느라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뛰고 있었습니다. 기동장비실에서도 무엇인가 해야 체면이 서겠다고 느껴 국내 자동차업계의 실태조사라도 할 작정이었지요. JUSMAK (Joint United States of Military Assistant Group-Korea.주한미군 자문단)를 통해서 TACOM(Tank Automotive Command.미국 기갑 및 군용 차량 개발 사령부)의 전문가 6명을 초청했습니다.

TACOM에서 전문가가 오게된 이유는 6.25 전쟁 후 모든 군용차량을 미국이 공급해 주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할 것인가를 조사키 위한 것이었지요. 한국의 자동차공업 정도를 알아보고 가능하면 미국 원조를 줄이고 한국에서 자체조달코자 했던 것입니다.

자동차 조립공장뿐 아니라 부품공장들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조사결과 "조건부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더군요. 시설을 대폭 보완치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앞으로 3~5년은 걸릴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국 측에서 군용차량을 자체 공급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자동차공업 수준으로 봐서 그렇게 결론을 내릴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ADD 요원들은 TACOM 사람들이 시찰도중 고생을 많이 하다보니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지않아 그런 견해가 나온것이 아니겠느냐 라고도 했어요. 그 때만 해도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호텔은 몇 개 없었어요. 식당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찰도중 먹는것, 자는것, 화장실에 가는것 모두 고생을 한것이지요. 이런 기본설비도 없는 나라에서 군용 차량을 만들겠다고 하니 회의를 느낀것이지요.

이 시찰 계획을 막 실시하려고 할 때[6] 청와대에서 군용차량 연구개발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국방부에서는 군용차량 연구개발을 "황소작전"이라 칭하고 기술분과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를 "황소위원회"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보안 때문에 암호명이 필요했습니다.

위원장은 당연직으로 국방부 방산국장, 위원은 상공부 차량과장, 국방부군수국 장비과장, 국방부 방산국 담당과장, 육군 군수국 담당과장과 기타 필요시 약간 명 간사는 국방과학연구소 기동장비실장[7]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민수차량 군용화 사업 및 군 표준차량 개발사업을 위한 모든 사항은 황소위원회에서 협의하고 난 후 국방부와 청와대의 결정을 받아 집행했지만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이 이 사업에 참여할 의욕이 전혀 없는거예요. ADD의 다른 연구 개발실에서는 민간업체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해서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동차 4사는 이를 기피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한백 전 기아자동차 부사장의 회고.

이러한 부분에서는 상공부 소속의 윤승식도 유사한 회고를 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당시 민수용 차량 문제 만으로도 힘이 벅찼습니다. 더구나 군용차량을 미국군사원조(MAP)로 무상공급받고 있는 판인데 정부가 무슨 예산이 있다고 국산차를 사줄 것이냐 하는 것이었죠. 군용차량을 생산하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군에서 조차 "군용 차량이라는 것은 민수용 차량과 다르다." "검사규격이 엄격하다." "이런 차량을 국내에서 생산하려면 시기상조다." "나약한 민수용 차를 좀 개량해서 군작전용으로 쓴다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자연히 자동차 4사는 수지도 맞지않고 사업전망도 없는 군용차량 개발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 상공부 소속 자동차공업 담당 윤승식 씨의 회고.

다시 이한백의 회고담으로 넘어가보자면,
나는 청와대의 힘을 등에 업고 협조를 구해보기도 하고 좀 강압적인 언사도 써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어떤 자동차 회사 부사장은 군용차량 개발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정식으로 거절 의사를 밝힌 후 "바쁜데 더 이상 귀찮게 굴지말라" 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아자동차 공장에 갔습니다. 이 회사는 소하리에 공장을 한창 건설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하리공장 건설본부장겸 기아자동차(주)의 공장장이던 김선홍 이사[8]를 만났습니다. 나는 "현 여건 상 군용차량을 개발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많겠으나 언제 어느때 북한의 도발이 야기될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국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개발한다면 훗날 큰 의의를 가질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시장성에 있어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기아자동차(주)가 못하겠다면 더이상 부탁할 곳도 없었어요. 승낙을 못 받으면 열번이라도 찾아가야할 급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선홍 공장장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척 힘든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서로 힘을 모아서 힘껏 해봅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김공장장의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맙다는 말 밖에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주는 쪽이고 기아자동차(주)는 일감을 받는 쪽인데 아무도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고 나는 책임을 완수해야 할 입장이니 김공장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내가 김공장장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존경하게 된 것이 이 때부터 입니다.
이렇게 되어 기아자동차(주)에서 군용트럭을 개발하게 됐다.

황소작전의 민수용 차량의 군용화 개발은 2단계로 잡았으며, 첫단계는 최소한도의 개조만해서 예비군 무장화에 이바지하자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완전 군용차량화 하자는 것이었다.

완전 군용화한다는 것은 전륜구동 장치를 장착하는 것과, 타이어 크기를 키우는 작업[9]이며, 첫 단계에서 실시해야 될 개량작업은 등화관제용 조명등 설치[10]와, 전후 범퍼보강[11], 짐칸에 병력을 수용가능한 의자 부착과, 견인장치[12] 기관총 부착용 마운트 설치, 그리고 육군식 삼색무늬 위장도색 등의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이런 일마저 해결하는데 무척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ADD에서 이를 담당하던 안인 전 대우중공업 이사의 회고에 따르면,
견인장치를 만들때 일입니다. 이 견인고리는 5만 파운드(약 20t)무게를 들어 올려도 이상이 없는 강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군용차의 규격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제작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육군사관학교의 기계공작 시험실에 가서 5만 파운드에서 끊어지는 시제품을 몇 개 만들었습니다. 모양은 "8"자형으로 양쪽에 있는 구멍에 고리를 걸게 되었습니다. 5만파운드의 힘으로 잡아당길 때 "8"자 모양의 중앙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들의 협조를 얻었지요.

시험하기 위해 일선지구인 전곡으로 갔습니다. 앞차는 시험하려는 견인고리가 붙은 차입니다. 이 차를 굵은 나무에 와이어 로프로 동여매었습니다. 그리고 윈치가 달린 차를 뒤에다 놓고 이 차도 나무에 고정시켰지요. 견인 고리에 "8"자 모양의 시험편의 한쪽을 연결하고 나머지 한쪽을 윈치고리에 연결했지요. 일직선으로 말입니다.

즉 견인고리가 먼저 끊어지나 시험편이 먼저 끊어지나 시험하는 것이지요. 시험편이 끊어지고 견인고리에 이상이 없으면 견인고리는 합격이고'시험편보다 먼저 견인고리에 이상이 생기면 불합격 입니다.

윈치를 감기 시작했어요. 와이어 로프가 팽팽해졌어요. 윈치감는 엔진소리가 힘에 겨운듯 드르릉 드르릉 했어요. 그런데 이때 "딱"하고 소리가 나더니'반조각이 난 시험편을 매단 와이어 로프가 뒤로 튕기더니 시험편이 운전석을 넘어가서 적재함에 깊숙히 꽂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꼭 고무총을 쏘았을 때 고무줄이 뒤로 튕겨 날아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는 그 때 와이어 로프가 꼭 고무줄과 같이 신축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보고 정신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운전기사는 와이어로프가 뒤로 튕겨 날아오니 무의식중에 엎드려 일단 사고는 면했으나 화가 치밀었나 봅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나의 멱살을 잡고는 마구 쥐어박는 것이 아니겠어요. 겨우 진정시켰습니다. 어쨌든 시험편만 두 동강이 나고 연결고리는 이상이 없어 합격은 했습니다.

각종 주행시험은 천안에 있는 고속도로상에 있는 "입장" 비상활주로에서 했습니다. 시험장비는 스톱워치(stop watch)5개 정도 뿐이었어요. 거리를 재는데 줄자만 가지고는 긴 거리를 측정할수 없기 때문에 자전거 바퀴를 이용했습니다. 자전거 바퀴가 한 바퀴 돌면 몇 가 되는지를 정확히 재고 나머지는 자전거 바퀴에 회전기를 부착해서 회전수로 거리를 계산하는 방식을 사용했죠. 특히 군에서 요구하는 8만 키로미터의 내구주행 시험은 전곡 일원의 야지에서 실시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고생을 어떻게 해냈느냐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때는 모두 그렇게 열심히 일했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 없다고 격려를 합니다.
- 전 대우자동차 이사 안인 씨의 회고.

개발이 진행되던 1973년 1월 31일, K-300의 시제품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별관 회의실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 이한백 실장에게 K-300을 즉시 갖고 오라고 전했다.[13]

박정희 대통령은 K-300으로 다가서더니 상세히 살펴보고 난후 "값은 얼마야?"하고 물었다. 이한백 실장이 "민수용 차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이 끝나면 사주어야 계속 발전할 것 아니야."하며 구매 지시를 했으며, 곧 K-300(4x2) 7대가 군에 납품됐고, 이것이 국산 군용차의 첫 납품으로 그해 국군의 날 행사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14]

5. 미디어

5.1. 투캅스

파일:기아복사트럭.jpg
투캅스에서 등장한 경찰특공대 소속 K-300
경찰특공대 수송차량으로 등장했는데 원본인 K301이 민수용인 것처럼 이것도 민수용 기아 복사 그대로 나온다.

5.2. 배달의 기수

가끔가다 운 좋게 K300이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발칸포를 끌고가는 민수용 트럭이 보인다면 K300이다.[15] 물론 군사 다큐멘터리 특성상 이런 차량들이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타 전술차량들이 등장하는 데에 비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6. 둘러보기

기갑차량 둘러보기
대전기(1914~1945) 냉전기(1945~1991) 현대전(1991~)


7. 관련 문서


[1] 인도군에서도 이런 맥락과 유사하게 운용하고 있다. 물론 인도군 이외에도 여러 개발도상국 국가 등에서도 민수용 차량이나 군용 차량을 기반으로 운용하는 사례는 충분히 많다. 심지어는 정규군 이외에도 민병대 등에서도 군용 차량은 아니지만 민수용 차량을 개조하여 운용하는 경우도 있다.[2]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공여됐던 낡은 닷지들이다.[3] 4톤 기아 복사 트럭을 기반으로 생산된 군용트럭이었기에 1¼톤 트럭이었지만 수송 면에서는 2½트럭의 역할도 겸할 수 있었고 민수용 기반이라서 그런지 승차감은 타 차량에 비해 월등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 트럭의 섀시나 엔진 등은 개수하지 않고 제작한 차량이었기 때문에 군용차량으로 사용하기에는 내구성에 문제가 상당했다. 차체부식 문제도 심각해서 2~3년 사용한 트럭이 부식이 심각하게 진행될 정도였다.[4] 1970년대 초반에 주한미군이 부분철수하면서 국군에 공여됐다.[5] 물론 K-111은 주한미군의 M151A1 4륜구동 군용차를 참고해 K-300과 K-301이 배치되기 이전에 아시아자동차가 생산하면서 국산화에 성공했으며 K-111보다 먼저 국산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M38A1을 국산화한 신진자동차K-100이다.[6] 당시 시기는 1971년 1월 초였다.[7] 이한백 본인이 맡았다고 한다.[8] 현재 기아그룹 회장이며, 이후에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죽어가던 기아를 봉고 신화로 다시 살려낸 "한국의 아이아코카"라는 별명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9] 전륜구동과 큰 타이어는 비포장도로에서도 원활히 주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0] 전시 상황에서는 야간에 적에게 노출되므로 등화관제등만 켜고 천천히 운행해야 한다.[11] 험로를 달릴때나 장애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12] 견인 고리를 부착해서 트레일러(화포, 밥차같은 것)나 고장난 차를 견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13] 당시 제작된 시제품은 육군 삼색 위장무늬로 도장되었는데 나름 그럴싸하게 도장됐다.[14] 출처 1993/11/22) 산업전략군단사 (170) 오원철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에서 발췌 및 수정함.[15] 사실 발칸포 이런 부분을 떠나 차대가 껑충하게 높으면(4WD이므로) 이 차량이다. 당연하지만 발칸포를 끌고가는 용도로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