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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1:59:58

Tu-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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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104
Туполев Ту-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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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핏

1. 개요2. 설명3. 제원4. 사고
4.1. 1981년 푸쉬킨 추락사고
5. 매체6. 여담7. 관련 문서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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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upolev Tu-104 Camel
Туполев Ту-104
투폴레프 Tu-104 카멜

소련 투폴레프 설계국이 개발한 중거리 제트 여객기. 나토 코드명은 '카멜(Camel)'.

2. 설명

소련은 당시 방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이 영토를 거처갈 민항기가 존재하질 않았다. 서방에선 보잉 377 같은 거대한 여객기가 날아가고 있을때 소련의 여객기라곤 DC-3를 면허 생산한 Li-2An-2, Il-12, Il-14 같은 조그마한 쌍발 피스톤 프로펠러 항공기밖에 존재하질 않았다. 이 항공기들은 인원수도 적었지만, 프로펠러기라 엄청난 소음과 더불어 더 높이 올라가지도 못했고 또 빠르지도 못했다. 따라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경우 경유를 적어도 6번을 해야 했었고 무려 수십시간을 비행해야 했으며, 소련 항공기 특유의 낮은 신뢰성 때문에 이 시간은 충분히 더 늘어날 수 있었다.

소련은 처음에 항공 여객은 서방의 사치같은 것이라 여겨 별 관심은 없었지만, 서방에서 세계 최초 제트 여객기인 코밋이 비행에 성공하자 우리도 질 수 없음을 시전, 투폴레프 설계국에게 중거리 제트 여객기 개발 명령을 내린다.

투폴레프는 3년 내에 제트 여객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고, 이는 코멧 개발 기간이 거의 10년이나 걸렸던 걸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였지만, 나름 생각이 있었던 게 자사의 폭격기Tu-16의 날개와 랜딩기어 같은 여러 부품들을 재활용하면 나름 빠른 시간내로 개발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들어 맞아서, 이후 Tu-16 기반으로 만들어진 Tu-104는 1955년 6월 17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1956년 9월 15일부터 아에로플로트에 인도가 시작되었으며 러시아 최초의 제트 여객기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또,세계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DH-106 코멧 이후 세계에서 4번째로 개발된 제트 여객기 타이틀을 획득한다.[1]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상당히 준수한 성능의 기체로 이 녀석이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 취항했을 때 서방측 항공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충격의 향연이였다. 당시 서방측은 소련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코멧이 계속되는 사고들의 이유로 비행금지당해 땅에 묶여 있었을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은 배가 되었었다.[2]

러시아 특유의 설계방식이 깃든 기체인데 주요 특징들을 살펴보면 보통 측면에 달려있는 창문과 달리 일부 창문들은 위를 향하게 되어 있었고, 기수의 항법석[3], 높은 랜딩 기어[4], 감속 낙하산[5] 등이 있는데 골때리는 점이 하나 있다면 그 동안 소련이 여객기를 제작을 안 해봤다는 점도 있고 군용기를 기반으로 하는 점 있지만, 일단 민항기라면 기본적으로 달아있을 엔진 역추진 장치는 물론 에어 브레이크가 없었고 랜딩기어의 브레이크도 너무 약했다. 설상가상으로 무게가 너무 무거운데다가 날개의 후퇴각이 너무 커서 실속 속도가 너무 높아 착륙 속도마저 빨라 활주로에서 제때 멈추지 못하고 이탈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본래는 폭격기인걸 억지로 민항기로 만들어 놓은 샘이라 민항기 치곤 날개나 여러 장비들은 폭격기의 맞춰 설계되어 있는지라 날개나 랜딩기어 같은 장비들이 민항기치곤 엄청나게 튼튼하다는 점도 있지만 그만큼 항공기의 무게를 지나치게 무겁게 하여 저속에선 상당히 조종하기가 힘들었고 따라서 파일럿들은 착륙이나 이륙시에 실속이라도 할까봐 항상 긴장해야 됐었다. 만약에 저고도에서 실속 한다면 사실상 항공기를 다시 회복하기 어려웠다.

사실 Tu-104는 코멧과 비슷하게 결함이 있는 항공기였다. 원래는 무거운 폭탄을 달고 다닐 폭격기로 설계된 항공기를 억지로 민항기로 만들어 놓은 것이고 거기에 맞춰서 무게 배분이 되어 있는지라 후방에 더 무거워 기수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는 결함이 있었다. 따라서 특정 경우에 따라 기수가 급격하게 들리는 문제가 있었고, 또 엔진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악천후에 갑자기 양쪽 엔진이 꺼진다던지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항공기가 급상승하여 한계고도까지 올라가 조종이 불가능했다가 실속 후 간신히 회복했다던지 하는 여러 사고들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 항공기를 계속 취역시켰으며 그 당시 소련이 그랬듯이 이러한 단점과 불평들은 깔끔하게 무시되었다. 다만 소련과 투폴레프 측에서도 아에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고 이를 막기 위해 엘레베이터 트림 각을 제한하고 특정 고도 제한과 후방 적재물 무게 제한 같은 걸 두긴 했었지만, 계속되는 사고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소련이 그랬듯이 대부분은 그냥 사소한 사고로 처리되거나 묵살되었다.

1960년 생산라인이 정지될 때까지 총 200대가 생산되어 아에로플로트체코항공(CSA)에서 굴렸고 1979년 민항 여객 서비스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소련 공군에서는 계속 사용, 1986년 마지막 기체가 퇴역한다.

비록 결함기여서 영 좋지는 못했지만, 소련은 이 기체가 나온 시점으로 많은 자국 공항을 현대식으로 재정비하였고 투폴레프는 이 항공기의 결함과 결점을 고친 Tu-124를 내놓게 된다.

항공사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인 에어타이쿤 시리즈은 시대 배경상 1960년 1월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초반에 뽑을 수 있는 항공기 중 가장 저렴한 이 녀석이 1963년 단종될 때까지 엄청나게 생산된다.[6]

3. 제원

(Tu-104B 기준)
운항 승무원7명
탑승객50~100명
전장40.05m (131피트 5인치)
전폭34.54m (133피트 4인치)
높이11.90m (39피트)
익면적184제곱미터 (1,975제곱피트)
공허중량41,600kg (91,710파운드)
최대 이륙중량76,000kg (167,550파운드)
엔진2x Mikulin AM-3M-500 터보젯, 기당 추력 21,400파운드 (95.1kN)
최대속도950km/h (512노트, 590mph)
항속거리2,650km (1,430nm, 1,650마일)
실용 상승한도11,500m (37,730피트)
상승률10m/s (분당 2,000피트)

4. 사고

많은 사고를 겪었으며 프로토타입 때도 사고를 겪었고 그 후 양산형에서도 사고가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게 배분 문제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고가 있었고 거의 생산기체의 5분의 1에 달하는 기체가 손실되었지만, 대부분은 다 파일럿 탓으로 돌리거나 사소한 사고로 축소 발표가 되었다. 그중 가장 메이저한 사건이 1981년 터졌으니...

4.1. 1981년 푸쉬킨 추락사고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 1981년 2월 7일
유형 화물 적재작업 요원과 탑승객 강요(과실)[7]에 의한 조종사 과실로 실속
발생 위치 소련 레닌그라드, 푸쉬킨 공항내
기종 투폴레프 Tu-104
운영사 소련 해군
기체 등록번호 CCCP-42332
출발지 레닌그라드 푸쉬킨 공항
도착지 하바롭스크 공항
탑승인원 승객: 44명
승무원: 6명
사망자 승객과 승무원 50명 전원 사망
1981년 2월 7일, 푸쉬킨 공항에서 갓 이륙한 Tu-104가 50미터 고도에서 실속해 우측으로 기울다 추락하며 탑승객이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당시 회의를 위해 하바롭스크로 가던 소련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 에밀 스피리도노프를 포함한 장성 열여섯에 사령관의 아내인 발렌티나 스피리도노바, 장성 열여섯 전원의 참모진(태평양함대 사령관 에밀 스피리도노프의 참모 포함)까지 44명이 모조리 사망했으며, 승무원도 몰살당했다. 이때 탑승원 중 한 명은 재수 없게도 밖으로 튕겨나가 활주로 인근 눈밭에 처박혔는데, 병원으로 가던 길에 사망했다.

당시 블랙박스 기록을 보면 실제 이륙속도보다 낮은 속도에서 이륙을 시작해 급격한 각도로 기수가 들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조사에서 물품 공급 사정이 좋지 않던 소련 극동의 상황에서[8] 장성들이 레닌그라드에 온 기회를 타서 대량의 물건들을 구매했고, 승무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무거운 물건을 실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각종 생필품에 가구와 1톤에 달하는 종이뭉치까지 실었다. 시간이 없다며 제대로 무게중심을 맞춰 화물을 정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이륙할 것을 강요하였다. 하필이면 Tu-104는 기본적으로 항공기 자체가 무게 배분의 문제가 있었던 항공기였다. 결국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뒤쪽에 무게가 너무 실렸던 비행기는 급격히 기수가 들리며 너무 빨리 이륙해버렸고 실속해 추락하고 말았던 것. 한마디로 위계(位階)에 의한 강요, 즉 갑질이 불러온 끔찍한 결과를 제대로 보여주는 참사다.

결국 원인이 규명되자 창피했던 소련군 수뇌부는 이 결과를 은폐했고, 장성들 외에 죽은 하급 장교들과 사병들은 언급조차 없었다. 결국은 1997~98년에 이들은 순직이 인정되었다.

2024년 10월 20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다.

5. 매체

6. 여담

파일:external/cdn-www.airliners.net/0956485.jpg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No.1 : DH-106 코멧, No.2 : C102 제트라이너, No.3 : SE210 카라벨[2] 이는 약 1년 후에 그대로 이어질 일데자뷔 현상.[3] 후에 등장하는 Tu-114, Tu-124를 거쳐 Tu-134에도 그대로 이어진다.[4] 지상에서 표면 이물질 흡입 방지[5] 드레그 슈트(drag chute)라고 한다. 착륙 활주거리 감소용. 덕분에 착륙거리가 400m 수준이다. 하지만, 일단 한번 피면 정리도 귀찮고, 기체에 무리를 주고, 공중에서 피면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요즘은 일부 군용기에서만 사용한다.[6] 다만 상기했듯 이 기종이 실제로 생산이 중단된 건 1960년으로 엄밀히 말하면 게임상에서 1963년까지 뽑을 수 있는 건 재현 오류라고 할 수 있지만, 1960년 1월에 시작하는 게임 시스템 상 시작하자마자 단종시킬 수는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7] 탑승객이 당시 소련 태평양 함대 사령관 등 장성 16명, 참모진들과 전술한 함대사령관의 아내였다. 한마디로 계급에서도 짬에서도 소련 사회에서의 지위에서도 밀리는 승무원들이 말릴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8] 당시 소련의 물자 상황은 도시별로 편차가 심각했다. 대도시나 주요 도시, 지역 중심지 같은곳은 물자가 풍족했지만, 시베리아 등 극동 변방으로 갈수록 물자 보급상황이 좋지 못했다. 당장 이 자들도 목적지가 극동중에서도 아주 먼 축에 속하는 하바롭스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들로써는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9] 잘 보면 알리탈리아라는 이름이 2번이나 새겨져 있다.(...)[10] 알리탈리아투폴레프제 항공기를 운용한 적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