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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3 10:42:01

가톨릭신학

1. 개요2. 이론신학
2.1. 성서신학2.2. 역사신학
2.2.1. 교회사2.2.2. 교부학
2.3. 조직신학
2.3.1. 기초신학2.3.2. 교의신학2.3.3. 영성신학2.3.4. 윤리신학
3. 실천신학
3.1. 사목학3.2. 전례학3.3. 설교학3.4. 교리교수법3.5. 교회법3.6. 선교학3.7. 종교사회학
4. 외국어 공부5.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6. 관련 문서

1. 개요

이 문서는 가톨릭의 관점에서 서술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정교회개신교의 신학과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2. 이론신학

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야로 교회의 교리와 제도, 역사 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분야이다. 각종 성서와 교부 문헌, 전승과 교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하느님, 교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한다. 때문에 문학, 철학, 역사학, 윤리학 등 웬만한 인문학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들이 모두 녹아들어가 있으며 이를 공부할 때도 위에서 언급한 분야들을 제대로 숙지하면 공부를 하기도 훨씬 편하다. 특히 각 학문 분야들 중 고대, 중세 분야에 능통하면 더욱 쉬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 중세사를 공부하는데 그리스도교가 거의 역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중세사를 배워보면 알겠지만 그리스도교를 빼면 거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대시대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정립되는 데 필요한 그리스철학이 아주 중요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2.1. 성서신학

신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며, 가히 알파요 오메가인 분야이다. 말 그대로 성서의 내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서신학은 성서의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문헌학적 비평(성서비평학)까지도 포함[1]한다. 성서신학이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교 교리상 이것이 경전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각 성서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한다던가, 성서가 사용하는 문학적 수사[2], 성서가 쓰인 배경과 저자와의 상관성, 교회 전승과 성서, 성서 해석간의 관계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이 곧 하느님의 말씀과 교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만큼 그 1차 원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성서신학의 중요성은 신학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소홀이 된 적이 없다.

2.2. 역사신학

역사 속에서 교회와 신학이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교회의 역사적 위상과 역할을 제고하고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행적들을 알아본다.

2.2.1. 교회사

말 그대로 교회의 역사를 배운다. 일반 역사연구가 그렇듯이 고대교회에서부터 근현대교회까지 배우며, 더불어 한국교회사에 대해서도 배운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어떠한 발자취를 겪었는지, 교회가 성립될 때부터 지금의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의 과정을 고찰하여 실제적인 '교회'의 모습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2.2.2. 교부학

1세기부터 8세기까지 활약했던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Pater Ecclesiae)'들에 대한 연구 분야이다. 즉, 초기 교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회가 정립된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정립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던 교부들의 사상과 교회 제도에 기여한 역할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교부들의 저술들이나 문헌들이 성서 해석과 교리 형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역시 굉장히 중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역사적, 가시적 사도계승권과 성전(聖傳: 거룩한 전승)을 중시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과목이다.

2.3. 조직신학

상당히 추상적인 분야이지만, 신학의 원형이며 처음 신학이 형성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교의학 내지 교부신학이라고 불리며 교의, 기도, 윤리 등 가톨릭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정립시키는 신학이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지날수록 그 요구가 방대해졌기에 단순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 수많은 연구와 해석들로 신앙의 의미들을 체계화시키게 되어 조직 신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철학과 윤리학에 대한 지식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2.3.1. 기초신학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신학의 기초는 성경이며, 성경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계시'와 사람의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없이는 모든 신학의 기초는 있을 수 없고, 신학의 완성점 또한 무의미할뿐이다.

기존에 그렇게 크게 다뤄지지 않던 이 신학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회칙 중에 하나인 하느님 말씀(Dei Verbum, 약칭 DV)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면서 그 가치가 재정립되었다.

기초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의 계시라는 원초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느님의 계시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영역에서의 재정립을 이루는 신학이 바로 기초신학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교회쪽의 신학교에서 칼 라너의 영향으로 신학적 인간학을 본질적인 신학의 완성점으로 보는 반면에, 기초신학은 모든 교의의 가장 기초로서 다루어지지만, 독일교회쪽의 신학교에서 기초신학은 모든 신학의 완성점으로서 다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질문은 이 신학을 통해서 다시금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질문, 계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 교리, 믿음, 구원 등 신학에서 쓰이는 각종 용어들,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논리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

2.3.2. 교의신학

신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분야이자, 신학의 기원이 되는 분야이다. 이 분야는 직접적으로 교리를 연구하는 분야로 그야말로 모든 신학분야들을 총집합하여 신앙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고중세교회에서는 가장 중요시되었던 연구분야였으며 그 시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최대의 논쟁점들을 양산했던 신학의 분야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이단이 쏟아져나오는 판국에 교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대항이 불가능하다. 당시 신생종교나 다름없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발달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 성령론, 마리아론, 은총론, 원죄론, 교회론, 창조론, 종말론, 성사론 등의 분야로 나뉘며 교회가 세상에 제시하는 기준, 하느님관(觀), 인간관(觀), 사후세계 등 신비의 영역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초신학과 더불어 철학과의 상관성이 높은 영역인데 특히나 가톨릭교회의 일명 '긍정신학'[3]에 따라 많은 것들이 철학적 개념들의 도입을 통해 교리화가 되었다.

2.3.3. 영성신학

영성신학은 교리지식적인 차원을 넘어서 실제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것들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 분야이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며 연구대상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소통로라고 할 수 있는 '기도'나 '영적독서'의 방법들 혹은 하느님을 인식하는 다양한 사상과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교의신학이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신비 영역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데 반해서 여기는 신비영역들을 느끼는 방법들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2.3.4. 윤리신학

인간과 하느님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맺는 윤리적 관계를 신앙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학문으로 이 분야는 이론신학 분야와 실천신학 분야의 경계에 서있는 학문이다. 이론신학의 측면에서의 윤리신학은 대신(對神) 윤리나 대인(對人) 윤리처럼 신앙 안에서 어떤 윤리적 관계가 맺어져야 하는 그 근본적인 물음을 탐구한다. 이는 '기초윤리신학'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한편 생명윤리나 가정윤리, 사회윤리 등 인간 사회의 여러가지 윤리현상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구체적인 사례들을 탐구하여 교회가 어떻게 현상들을 바라보고 대처해야하는가하는 신학적 결론을 내리는 실천신학의 측면을 강하게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윤리학과 연관되는 분야이다.

3. 실천신학

3.1. 사목학

신학을 배우는 주체가 대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역시나 당연히 배워야 하는 부분이다. 즉, 신학을 배우는 이들이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는 예비 성직자임을 감안한다면 위에서 배운 여러가지 신학지식들을 기반으로 실제 신자들을 이끄는 역할들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목회학'이라고 주로 표현하는 '사목학'이 바로 신자들과 교회에 직접적인 봉사를 위해 배우는 실제적인 지식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도적, 행정적인 신자들의 관리에서부터 특정 연령층이나 사회집단, 혹은 개개인별로 어떻게 신자들을 가르칠 것인가를 연구하기 때문에 심리학이나 상담학, 사회학, 행정학과 같은 분야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

3.2. 전례학

성직자의 기본적인 역할 중 하나는 신자들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드릴 예배를 집전하는 것이다. 전례학은 미사(혹은 성찬예배)를 비롯한 다양한 예배 방식들의 특징과 그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경신례의 지식, 실제적인 방법들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신학교 후반부에 주로 배우는데 대개 6학년이 되면 지식적인 전례학 외에도 '전례실습'을 통해 실제 사목현장에서의 전례 집전방법들을 체험하게 된다.

3.3. 설교학

예배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기본적인 기능인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주요한 수단인 설교(강론)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들을 연구한다. 문학적 수사나 예화 등의 활용, 성서에 나타난 의미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들을 그 연구의 예로 파악할 수 있다. 문학이나 교육학과 유관되는 분야이다.

3.4. 교리교수법

어떤 종교에 입문하려면 그 종교에 헌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지식들을 배워야지만 그 종교에서 인정을 받고 활동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교리교수법은 바로 예비신자들이 처음 교회에 입문했을때 신앙생활과 공동체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식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로 다양한 교수법의 개발, 교재 및 콘텐츠 제작 등을 연구한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교육학과 연관되는 분야이며,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 교리교사 양성을 위해 다방면으로 교육시키는 분야 중 하나이다.

3.5. 교회법

교회는 하나의 신비체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모이는 인간적 조직이자 물리적 제도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규칙이 바로 교회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교회법은 단순한 교회의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 뜻을 반영하고 있는 만큼 신학적으로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일치된 교회조직이 발전한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신앙적인 문제에서부터 행정적인 문제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특히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혼인법에 대한 부분인데 이는 양 교회가 모두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신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 혼인법이 강조가 된다.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경우 '교회법정'을 두고 있으며, 상당수 올라오는 사건들이 바로 이 혼인법에 관한 부분이다. 물론 '교회법정'은 단순히 혼인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이단에 관한 문제나 교회 내 분쟁 등의 사건을 맡는 역할도 한다.

보다시피 법학과의 유관분야인데, 재밌는 것은 이미 신학이 깊이 뿌리내린 유럽의 경우에서는 일반 법학에서도 교회법이 많이 연구가 되고 있다. 유럽 문화권에서 역사가 오래된 보편적인 법이라는 점과 문화권 내 사람들이 대다수가 믿는 종교의 법이다보니 연구가 되는 것이다.

3.6. 선교학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칠려면 당연히 신자가 있어야 하고 그 신자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당연히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는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이 필요하다. 선교학은 바로 비신자들에 대한 접근 방식, 특정 지역의 문화적 특성과 그리스도교 특성의 접목,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 등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활동영역과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하는 학문이다. 지역학이나 심리학, 사회학과 연관이 있는 분야이다.

3.7. 종교사회학

사회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의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한 사회 안에 속한 내부집단이기도 하다. 때문에 교회와 그 신자들 역시 다른 종교나 사회집단, 그 안에 속한 각기 다른 개인들과의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나 그 위상, 타 종교와의 관계, 교회 안의 여러가지 사회적 관계와 내부현상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 종교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나 사회학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며, 덧붙이면 사이비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야이다. 일단 사이비 종교 자체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만큼 그 발생과 현상, 대책 등을 논하기에는 종교사회학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외국어 공부

신학은 그 자체로도 수많은 인문사회과학과의 유관되어 있기 때문에 배워야 할 양이 상당히 많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기 참으로 골때리는 것은 언어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세부전공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다른 인문학, 사회과학도 외국어를 잘해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에서 사용하는 외국어들은 한국에서 인기가 없거나 배우기 어려운 외국어, 또는 일상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고어라는 점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현대 신학문헌과 유학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으로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4], 러시아어 간혹 히브리어[5] 등을 들 수 있다. 후자에 속하는 것은 본격적인 신학 원전들을 읽기 위해서 배우는 데 성서신학 분야에서는 히브리어와 고전 그리스어를 베이스로 여기에 아람어, 아카드어 등 일부 중근동 고전어가 곁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교의신학이나 교부학 공부를 위해서는 라틴어와 고전 그리스어, 교회 슬라브어 등을 배우는데 이 중 라틴어는 교황청의 공식언어인 만큼 각종 교회문헌을 읽는 데 꼭 필요한 언어이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낭설에 불과하다. 물론, 각 세부 전공을 심화할 학자형 성직자의 경우에는 원어 해독 능력이 필수로 요구된다. 그러나 학부 및 석사과정의 경우까지는 각 해당언어의 기초적인 지식만을 요구한다. 희랍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아니라 입문지식을 갖춘 뒤에 신약을 전공할 것이라면 중급과정을 선택하는 식이다. 당장 본당 신부님에게 꼬이네 첫 장만 발음만이라도 해 보라고 하면 혀가 꼬이는 신부님들 많을 것이다. 사실, 성서 전공 아닌 이상에는 박사과정생 신부들도 유학국가의 현대어 이외에는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한다.

라틴어의 경우도 어디까지나 20세기 중반까지 반드시 라틴어로 강의를 해야 했던 때에나 있었던 이야기이다. 현재 라틴어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와 유럽에서도 라틴어 능통자는 거의 없다. 오죽하면 베네딕토16세가 추기경 시절 지금 유럽 신학생들이 라틴어를 너무 모른다고 한탄했을까. 교황청 문헌도 이제는 이탈리아어를 기반으로 나오고 있는 추세이며, 이탈리아어가 교회 내에서는 기존의 라틴어의 위치를 대체해 가고 있는 중이다. 굳이 이탈리아어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학의 전통이 깊은 현대어들(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은 교황청 주요 문헌에 대해서 쉽게 번역을 찾을 수 있으므로 교양 수준의 신학만 팔 거라면 이들 중 하나만 알아도 충분하다.

물론 깊숙이 파고들고자 한다면 분야에 따른 고대어[6]는 물론이고, 현대어 중 독일어, 영어가 중요하다. 특히 21세기 들어서 미국이 인문학 투자를 감행하고 신학 분야의 세계적 학자들도 자국대학에 초빙하는 등 신학 분야에서 영어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독일의 유명 신학교수들도 미국에 초빙되어 가거나 영어논문 발표 등을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성서학 분야에서 영어권의 저작은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세기 후반을 장악했던 독일 신학자들의 저술도 거의 대부분 영어로 번역이 되어 가고 있으며, 영어만 해도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이 점차 어렵지 않게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영어의 부상 때문에 예전만큼의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진 않고 있지만, 그래도 가톨릭 신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현대어가 독일어이다. 특히 20세기 후반까지 가톨릭 신자가 사회적으로 아웃사이더 취급을 당한 영국, 미국과 달리 독일어권에선 상대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잘 보존되었고,[7] 그러면서도 개신교 신학 및 대륙철학과의 교류 및 경쟁을 하며 학문적 성숙함을 갖추었기에 독일어는 가톨릭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신학자의 외국어에 대한 환상이 생긴 이유는 사실 김수환 추기경의 언어능력이 워낙 출중해 생긴 오해다. 김수환 추기경을 보고 다른 성직자들도 7개 국어를 하는 줄 아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단순히 어렵고 안 배우는 언어라고 해서 어렵다고 하기에는 불교학 역시 동일한 약점을 안고 있다. 불교학 역시 제대로 하려면 한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어를 포함해서, 한국에서 생소한 인도계 언어를 해야 한다. 오히려 가톨릭 신학에서 써먹는 독어, 불어, 이태리어는 이런 언어에 비해 한국에서 수요가 있는 편이라 접근성이 차라리 낫다.

5.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

가톨릭 스콜라학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검토한다.

물론 러셀 등 후대 학자들에게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는 논리를 찾아내어 옹호한다며 까이기는 했다만, 윤리학자들이 '건전하다고 사회에서 여겨지는 윤리'를 미리 결론 내려놓고 철학적 무기들로 옹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대전 제1부 제2문(신론-하느님이 존재하는가)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제1절: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가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행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중략)
2. (중략)
3. (중략)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중략)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이런 명제는,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지고 그 본성을 따라서는 덜 명백하게 알려진 것을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즉 결과를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중략)

제2절: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증될 수 있는가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증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중략)
2. (중략)
3. (중략)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중략)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중략)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자명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결과를 통해 논증될 수 있다. (중략)

제3절: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중략)
2. (중략)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중략)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중략)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길로 논증될 수 있다.[8] 첫째이며 더 명백한 길은 운동변화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중략) 둘째 길은 능동인(能動因)의 이유에서다. (중략) 셋째 길은 가능과 필연에서 취해진 것이다. (중략) 넷째 길은 사물계에서 발견되는 단계에서 취해진다.(중략) 다섯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 취해진다. (중략)
생략되지 않은 텍스트는 여기에서 영역본을 참조할 것.[9]

즉 토마스는 하느님 존재 문제에 대해서
  1.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에게 자명한가? 아니다.
  2. 논증은 가능한가? 그렇다.
  3. 논증해보니 어떠한가? 존재한다.

라는 세 단계에 걸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논증한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토마스의 논증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논증이다. 따라서 그 하느님이 그리스도교에서 고백하는 이런저런 특성을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점은 다른 문제에서 논증한다.

물론 토마스의 하느님 존재 논증은 당대에 저명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용하여 논증했기에, 토마스 사후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무너지자 덩달아서 공격 받기는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 과학에서 비판받을지언정,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는 과학적 입증이 불가능한 학문의 특성상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가톨릭 신학계에 토마스 아퀴나스급의 후배가 재탄생하지 않고 있어서 아직까지 하느님 존재 논증은 토마스주의에 기반해있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현역이듯 토마스주의 역시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역이라 할 수 있다.

6. 관련 문서



[1] 여기서 '역사'의 의미란 텍스트의 역사를 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사건'이므로 성서텍스트 또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성서고증과 문헌학적 비평이란 성서의 각 파트별로 창작시기,연대, 출현 당시 당대의 사회상 등을 분석해 존재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며 미학적 비평 등과는 관계가 없다.[2] 당장에 성서 중에는 아예 문학작품으로 씌여진 것이 있다. 시편아가. 그에 대해 비평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여타의 성서 전반을 통으로 문예작품으로 간주하고 수사학적 기교를 분석하여 성서를 소설작품으로 만드려는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은 성서 안에 담긴 갖가지 상징과 은유표현으로 전달된 메세지에 대해, 그 안에 담긴 서브텍스트 구조를 해석하는 것이다.[3]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긍정적 진술들을 통해 하느님의 속성을 규정짓는 신학의 방법론.[4] 고전 그리스어와는 다르게 현대 그리스어이다.[5] 성서 히브리어와 다른 현대 히브리어이다.[6] 구약성서학을 연구한다면 단연 히브리어, 신약성서학을 연구한다면 희랍어, 교부학을 연구한다면 희랍어+라틴어, 스콜라학을 연구한다면 라틴어는 기본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건 '기본'이라는 의미이지, 이것만 안다고 고대어 공부가 끝나는 건 아니다.[7] 현대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세가 1대1이고, 독일제국 시절에도 개신교보다 교세가 밀릴지언정 국민의 35%는 가톨릭 신자였다. 여기에 오스트리아를 더하면 독일어권의 가톨릭 신자 비율은 더 올라간다.[8]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존재 논증을 '다섯 길'로 논증한다. 즉 첫째는 운동에서이고, 둘째는 능동인에서이고, 셋째는 우연유(偶然有, ens contingens)에서이고, 넷째는 완전성의 단계에서이고, 다섯째는 질서에서이다. 그러나 이런 '다섯 길'은 서로 다른 다섯의 논증이라기보다는 단일한 논증의 다섯 면모라고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9] 인용한 부분은 국역본에서 발췌했으나 모두 쓰자면 너무 길어 저작권을 중대하게 침범할 여지가 있으므로, 공개되어있는 영역본으로 대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