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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8:35:48

곡성(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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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일람2. 전체 내용 분석3. 관점에 따른 해석4. 의문과 논란5. 성경과 유사점6. 침묵하는 신이란 주제

1. 사건 일람

2. 전체 내용 분석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곡성이라는 영화는 두 가지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스릴러 장르, 다른 하나는 오컬트 장르다. 스릴러를 구축하는 드라마적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만 오컬트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다.

이 영화에서 오컬트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건 그리 중요치 않다. 애당초 감독은 모호함을 관객에게 주기 위해 영화를 제작한 것이므로,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는 식의 해석은 의미가 없다.[1] 때문에, 후술할 내용들은 '이것이 정답이다' 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석 할 수 있지 않을까?' 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래 내용들은 감독과의 대화에서 나온 정보와 그 해석 & 독자연구가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공인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주인공 곽도원은 시나리오를 3번 읽어보고 나서야 줄거리를 이해했다고 한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 루카 복음서 24:37-39

영화 시작 전에 루카 복음서(누가복음) 24장 37-39절이 나온다. 초반에 낚시바늘을 끼우는 외지인의 모습이 보이고, 일광이 '놈은 미끼를 던졌다'는 느낌의 대사를 하는데 영화 속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보이는 증거물이나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은 죄다 미끼라고 생각하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심하게 꼬여 있다.[2]

3. 관점에 따른 해석

감독과의 대화를 비롯 여러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이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의 편집이나 전개를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어,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감독판을 통해 삭제된 씬들을 확인해보면, 최종편집 전에 비해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얼마나 커졌는지 체감할 수 있다. 단적으로, 외지인이 동네여자를 겁간하려들며 시작한 삭제버전 오프닝이나, 외지인이 일광의 차를 타고 곡성을 떠나는 것을 무명이 바라보는 삭제버전 엔딩같은 경우 인물의 성향을 더 단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씬들을 삭제 및 교체하면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물론 일반적으로 봤을 때 또는 감독의 생각에 가까운 영화 전개는 외지인과 일광이 악이라는 관점이다. 실제로 그의 각종 언급이나 영화상 전개를 보면 이 노선을 선택하고 영화를 찍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를 두었기 때문에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마지막 상황에서 일광과 무명이 종구에게 요구하는 바 때문에 이런 관점이 성립한다. 마지막에 일광은 무명이 진짜 귀신이니 당장 집에 돌아가서 딸을 확인하라고 하며, 무명은 닭이 세번 울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돌아가지 않으면 일가족이 몰살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황을 따져보면 양쪽의 말이 다 들어맞는데, 종구가 일광의 말을 듣고 곧장 집에 가서 딸을 확인했다면 딸이 아내와 장모를 살해하는 걸 막거나, 내지는 아내와 장모와 함께 딸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일광은 종구가 빨리 돌아가서 딸을 막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이 한 말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만약 종구가 딸이 아내와 장모를 죽이려는 도중에 들이닥쳤다면 종구 역시 살해당했을 수 있고, 딸 역시 다른 생존했던 빙의자들처럼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종구는 닭이 두번 운 후에 돌아간 탓에 아내와 장모가 살해당한 이후에 집에 도착했고, 따라서 딸과 충돌하지 않았다. 종구의 아내와 장모를 죽인 딸도 종구는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는데, 이는 무명이 종구만큼은 죽이고 싶지 않아 했다는 말이 된다.

이 경우 무명의 목적은 무명이 종구에게 했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무명과의 조우 장면에서 '내 딸 어디있어?' 라고 묻는 종구에게 효진이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어림에 손을 펼치며 '요만한 여자애?' 라고 되물으며 또한 자신의 딸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절규하는 종구에게 무명은 '그 아이의 아비가 지은 죄'를 논한다. 종구가 자신의 딸을 '내 딸'로 지칭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이 '네가 지은 죄'라고 하지 않고 '그 아이의 아비가 지은 죄'라고 말함은 무명이 종구를 효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종구의 집안에 종구가 모르는 부정이 있었으며, 무명은 이 부정을 징벌하기 위해 효진을 빙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효진이 종구의 친딸이 아니라면 부정의 주체는 종구의 아내이며, 무명은 종구의 아내를 벌하려 한 것이다. 무명은 분명 곡성의 수호신 격인 존재이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곡성 땅의 부정을 용납하지 못하고 멸하려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종구가 닭 세 번 울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게 붙드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빙의된 효진으로 종구의 아내는 죽이더라도 종구까지 휘말려서 죽이기는 싫었던 것이다.

무명이 이런 흑막일 경우, 자연스럽게 일본인과 일광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퇴마사로 볼 수 있으며, 희생자의 사진을 모으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희생자들의 사진에 남은 귀기를 쫓아서 무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일본인의 경우 중간에 좀비로 등장하는 박춘배를 조종한다기보다는 추적하는 쪽이다. 마지막에 자신에게 찾아온 이삼에게 '날 이미 악마로 보고 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곡성을 수호하는 귀신 무명의 환각이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익히 알기 때문에 읊는 대사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인의 형상이 마지막에 괴물같이 변하는 것도 무명의 힘이 발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일광이 마지막에 종구의 사진을 찍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명은 아직도 퇴치되지 않았고, 일광과 일본인은 종구의 모습에 남은 무명의 귀기를 단서로 다시 무명을 추적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관점의 경우, 곡성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모두 어떠한 부정에 연관된 이들이며, 이들의 집 앞에 있는 금어초는 부정을 저질러 죽어야 하는 이에 대해 곡성의 수호신이 남기는 죽음의 표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종구가 무명의 말을 듣던 말던 비극을 피하지 못했으리라는 감독의 발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애초에 무명은 종구가 아닌 종구의 아내의 부정을 징벌하기 위해 효진을 빙의시켰으니만큼, 종구가 어떻게 행동하든 파멸을 피할 수 없었던 것. 영화 마지막에 금어초가 삭아들어가는 장면은, 무명이 멸하고자 했던 부정이 씻겨나간 후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종구가 마지막에 겪은 상황을 두고 일광과 무명의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나온 가설이며, 해당 정황을 놓고 봤을 때 그럭저럭 아귀가 맞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다. 다만 무명이 흑막일 경우는 선역(수호신이자 부정을 단죄하는 존재)이면서 살인을 하므로 명분과 개연성이 필요하지만 악마의 경우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 불리며 원래 성품부터 악을 좋아하므로 더 자연스럽기는 하다. 낚시할 때 누가 걸릴지 알고 던지냐는 대사와도 통하는 부분.

또한 이러한 가정이라면 외지인도 사람을 구하기 위한 선역 퇴마사라는 소리인데 '내가 어떻게 말하든 소용없겠지' 까지는 제정신으로 본 것이고 직후 사진 찍으면서 즐거워한 부분은 환각인가? 하는 점에서 설득력이 모자라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작중에 뭐라고 명시되지도 않고, 복선이 딱히 있지도 않다. 종구의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네 어쩌네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가설은 무명을 악역이라고 단정지어놓고 나서 사건들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가깝다.
다음으로 독버섯 관련 해석은 영화 초반 살인사건의 원인으로 독버섯이 지목되다보니 이것을 사건의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주로 생긴다. 허나 이 영화상에서 독버섯은 맥거핀에 가깝다고 볼 수 없다. 독버섯 해석론자들은 독버섯으로 인한 환각이 아니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하지만 영화 내내 인물들이 버섯을 먹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집에서 밥이나 과자, 음료, 정육점 육회 등을 먹지만 버섯을 먹는 장면은 없을 지라도 버섯 포자에 감염된 인물과 접촉을 통한 감염도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27]

이에 대해 반박으로 마을사람 모두 버섯을 먹고 환각증세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종구의 집 뒤에 할머니가 버섯을 말리고 있었다. 효진에게도 먹이는 장면이 있음 (초반 '이것도 무라'하면서 반찬 집어주는장면) 영화 막바지에 양이삼 부제가 병원에 있는 화면에서 뉴스로 독버섯을 정제하여 건강식품을 만들던 공장을 경찰이 수색하는 장면이 있고, 오성복 형사도 피해자라는 언급은 독버섯 중독설과 관련된 맥락의 대사로 등장한다.[28] 다만 버섯에 감염된 사람의 연령과 성별에 따라 증상이 발현되는 속도가 다르고, 각기 다른 환각을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본다면 독버섯으로 중독으로 인한 집단 환각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오히려 감독이 이러한 결론에 다다른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해 일부러 버섯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장면을 삽입하였을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외지인이 악한 존재라는 징표는 영화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지인의 맞수로 제시된 무명이 선한 존재라는 근거도 없어서 결국 주인공인 종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표되는 무명과 악으로 대표되는 외지인 사이에서 끼어서 희생당한 희생양이라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즉 외지인은 악이라서 악행을 저질렀지만, 무명은 종구를 지키기 위해서 그를 도운게 아니라 마을서 외지인을 몰아내려고 그가 외지인의 미끼가 되는걸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칸 영화제 공식 회견에서 나홍진 감독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3번 닭이 우는 장면 당시 무명의 명을 따르지 않아서 가족이 몰살당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적 한계상, 무명의 명을 따랐어도 비극은 동일했으리라는 것. 그렇다면 정작 자기 말을 따르라고 지시한 무명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으므로 결국 종구 가족이야 어떻게 되든 그저 그들을 미끼 삼아 외지인만 옭아 매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종구의 딸을 지키려고 이런다고 하는 것도 그냥 종구가 자신의 덫을 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탕발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종구가 자기 명을 어기고 집으로 뛰어들어갔을 때 절규한 것도 효진이 때문이 아니라 자기 덫이 망가져 외지인에게 패배하자 울부짖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감독이 말한대로 일광과 외지인이 명확히 한패였다면, 결국 일광의 굿이 외지인에게 역살로 날아갔을 때 이를 중간에서 조작한 것은 무명일 수 밖에 없다. 정황을 모르는 일광의 굿을 이용해 차도살인 계를 시전한 셈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효진이는 극도로 괴로워 하며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튼다. 그것도 그냥 아프다고 난리 치는 걸 넘어서 몸에서 뼈가 우드득거리는 소리(!)까지 날 지경으로. 그런데 영화의 이전 장면에서 관객들은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환자가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29] 똑똑히 보았다. 만약 종구가 개입하지 않고 굿이 계속되었을 경우, 유사한 증상을 보이던 효진이가 무사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즉, 무명은 일광을 이용해 외지인을 제거하려 하면서 정작 자기가 지켜려고 한다던 효진의 목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장기말로 쓴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리하자면 이 싸움에 애초부터 절대적인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며 자기 텃밭에서 지배권을 지키려는 무속신 무명과 그 텃밭을 점거하려는 외부의 악신 외지인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애꿎은 마을 사람들만 희생된 비극이 바로 곡성이라는 가설인 셈이다.

반박을 하자면 영화 초반부에 무명은 외지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몇 번하기도 한다. 이 일에 종구가 적극적으로 발을 들이기 전 미리 경고한 셈이다. 하지만 종구는 그 말을 무시하고 끼어들었다. 즉 무명이 절대적인 선까진 아니어도 종구를 미끼로 던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본인은 희생자를 최대한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그 싸움에 종구가 끼어들어서 그와 가족들이 피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외지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는 실제 경고가 아니라 오히려 종구를 이 일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언질을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딸이 엮인 이상 종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에서 발을 뺄 턱이 없고 마을의 수호신 격으로 사람들을 다 지켜 보았을 무명이 이걸 모를 리도 없다. 그러므로 무명은 종구를 자신의 패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정보를 흘리고 자극을 준 것이다. 자기 딸이 얽혔으므로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일 사람인데다가 힘이 세고 팔랑귀에 경찰이기까지 하므로 외지인을 견제하고 몰아내는 데 적합한 용도였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30]

마을 사람들이 죽은 후 광인으로 일어나 좀비물을 찍는 건 언뜻 보면 당연히 외지인의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지인은 박춘배의 사체가 사라졌을 때 명백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31] 게다가 이후에도 광인으로 되살아난 박춘배를 조종한다기 보다는 추적하고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죽인 것은 외지인이지만 오히려 광인으로 만들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건 무명일 수도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외지인을 쫓아내기 위해 자기가 광인을 만들고는 외지인이 그런 거라고 몰아 가면서 경각심을 주어 종구와 그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

그러나 이 부분에서 광인에 대한 것은, 저주와 같은 주술들이 실패했을 시 본인에게 돌아가는 오컬트적인 효과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 여러 맥락에서 박춘배 또한 외지인과 일광에게 당한 가족들 중 하나로 볼수 있고, 외지인이 애초에 박춘배의 시체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박춘배는 일가족 몰살 후에도 외지인의 조종당하는 시체로 남아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다 외지인이 주술을 하다 무명의 힘으로 인해 방해받고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와 박춘배의 타겟이 본인이 된것이다. 때문에 외지인은 그 즉시 시체가 있던 위치로 찾아가서 확인하려고 했으며, 벌벌떨며 도망간것이라고 볼수있다. 해당 장면의 카메라를 초점을 보면 박춘배는 도중 방해되던 종구일행과 투닥이게 됐을뿐 외지인 만을 찾고있으며, 외지인은 찾아온 종구 일행을 경계하는게 아니라 풀숲에 숨어서 박춘배만을 보고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명이 조종했다기엔 무명은 시체위치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찾아온종구 일행에게 난폭하게 굴면서 외지인의 이미지를 나쁘게 할바에야 외지인을 죽이는게 더 손쉬울것이다. 되려 조종이 풀린 분노한 박춘배의 영혼이 폭주해서 외지인에게 복수하려고 외지인의 집을 찾아갔다가, 때마침 마주해 방해하는 종구일행에게 화가 미쳤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기엔 상식적으로 바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왜 무명은 그냥 바로 일본인이나 일광을 죽여버리지 않았는지, 아래에서도 나오다시피 왜 서로간의 여론전은 벌이지 않았는지 등이 그 예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는 아마 초월자마다 행동원리가 다르기도 하고 초월자 본인이 지켜야 할 터부와 동시에 각 초월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관장영역-물리적, 영적-에 들어야지만 해당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명의 입장에서는 싸우되 수호신이기 때문에 어겨서는 안될 금기같은 것들이 있을 텐데, 예를 들면 아무리 악인 일본인이라 해도 함부로 살인하고 유기하지는 못하는 것, 외지인을 섬기는 무당을 협박하면서도 바로 죽이지는 않은 점 등을 보면 선동또한 일종의 죄악이기에 본인이 웬만하면 하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예 법칙으로서 주변 당사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지 못하는 일종의 터부인 행동일 수도 있다.

외지인의 입장에서도 수호신의 텃밭에서 깽판을 치다 보니 모종의 오컬트적 제약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예 타신의 영역에서 인간에게 위해를 끼치려면 먼저 그 인간이 해당 신의 금기를 거슬러야지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저주를 내리는게 가능했던 것도 정황상 첫번째는 여인 본인이 기혼자임에도 일본인에게 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그의 추파를 거부하지 않았기에, 즉 죄악을 저지르면서 수호신의 보호를 벗어났기 때문에 저주를 걸 수 있었고, 종구도 일본인의 집을 부수고 개를 먼저 죽인데다 그를 실수라지만 살해후 유기하며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 종구의 딸이 아내의 부정으로 인한 산물이었고 따라서 무명의 보호를 벗어났기 때문에 일가에게 일본인과 일광이 저주를 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을사람들의 수호신인 무명을 직접적으로 깎아내리는 행동을 하려면 일단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토착신이 눈을 부라리고 자신을 찾아 내려는 상황에서[32] 그러기는 어렵고 게다가 작중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토착신의 존재 자체를 사람들이 거의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상대로 선동해봤자 별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이들도 일본인이 죽기 전엔 직접 무명을 보지 않았으니 그녀를 묘사할 방법이 딱히 없어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걸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신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 창작물에서 항상 드는 생각-왜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나, 왜 이런 식으로 행동했나가 얼추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 두번째 세번째 살인사건의 경우에도 정황상자신을 뿌리치고 가는 종구를 그 강한 신이 강제로라도 잡아두지 못한 걸 보면 자기주민을 상대로는 설득과 암시만이 가능하지 강제로 조종하진 못하는 듯 하니 막지 못했고 종구의 경우처럼 덫을 치는 생각까지는 못했거나 잡으려 해도 아직 외지인의 특성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덫을 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정 어종을 잡으려면 이에 맞는 루어, 미끼 등이 필요한데 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술적 덫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종구일가의 경우에는 정황상 종구의 부인이 불륜을 저질렀고 그 산물이 종구의 딸이었기에 해당인물들은 토착신의 보호를 벗어나는 죄를 지었고 이를 외지인이 포착했기에 사실 이미 종구의 딸이 일본인과 접촉한 시점에서 무명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덫을 놓는다는 간접적인 방식말고는 없었을 수도 있다. 굿을 벌일 때 이미 일가 전체가 일본인의 관장영역으로 넘어가서 무명이 결국 이렇게 될 거면 그냥 이들을 미끼로 역으로 일본인을 잡자는 계획을 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째서 종구를 제외한 더 많은 인물들을 암시하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명은 종구나 일광과 달리 마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지 않는다. 종구에게 "굿을 안하겠다 했지만 억지로 했다가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라고 말하며 일광에 대한 암시를 넣었지만 구체적으로 외지인과 일광, 두 사람에 대한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명은 곧장 외지인과 일광을 적으로 몰아붙이는 선동을 하지 않았고, 반대로 외지인과 일광 또한 무명을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나. 외지인과 무명이 서로가 적대하기만 하는 관계라면 그럴 이유는 전혀 없지만, 이것이 양측간의 룰이라면 설명이 가능하다.

양측이 합의한 룰은 다음과 같다고 가정하자

1. 외지인이 타겟을 정하면 무명이 훼방을 놓기
2.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자는 접촉하지 못할 것.

이렇다면 외지인이 희생자의 생전 사진과 사후 사진을 찍는 이유가 어느정도 설명된다. 생전 사진은 이 자가 타겟이라는 것이고, 사후 사진은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는 뜻. 또한 외지인과 무명 모두 종구와 접촉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함께 등장하진 않는다. 만약 무명이 외지인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쉽사리 낭떠러지에 떨어진 외지인을 붙잡았겠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게임의 룰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관점에 따르면 결말이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종구가 무명의 말을 어기고,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택으로 돌아왔는데, 자택에 도착하자마자 닭의 세 번째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종구가 자택에 들어서고 비명소리가 전혀 울리지않은걸 보면 이미 일은 벌어져있었다고 추측된다. 즉, 종구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택에 복귀했다 하더라도 맞닥뜨린 참상이 변하진 않았으리라는 점. 외지인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동안 무명에 의해 구원받은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없다는 점도 이상한 점이다. 즉, 누구를 따르든간에 일가족 몰살이라는 결말은 변치않으리라는 점이다.

4. 의문과 논란

관객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의문과 논란[33]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34]
또 다른 해석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임"을 말하려는 데 있다고도 본다. 예를 들어 이삼은 외지인을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너가 악마가 아니라면 난 그냥 가겠다"는 말을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종구 역시 무명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있는 게 그것이다. 이걸 보면 인간은 선과 악이 눈 앞에 있는데도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존재 또는 눈앞에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데도 의심하는 존재라고 말하려는 게 목적일 수도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보았을 때는 악마가 인간을 현혹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저 악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다는, 그러니까 초월적이고 존재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동진 평론가는 라이브톡에서 작중 등장하는 성직자의 이름이 양이삼이라는 점에서 요한묵시록 2장 23절[35]이 답이 아닐까 해석했다. 또 다른 해석은 무명이 신이라고 가정 했을 때 종구가 신을 의심하고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재앙이 왔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는 예외없이 재앙을 받았다.
다른 해석으로는 실제로 외지인이 악마였지만, 외지인을 의심하고 죽인 행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악'으로서, 외지인을 죽인 시점에 종구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운명이 결정지어졌다는 해석도 할 수 있다. 영화는 종구가 외지인의 시체를 유기하는 순간, 일광이 하늘을 보면서 "버럭지같은 놈이 미끼를 삼켜버렸구만"이라 말하는 것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는 외지인에게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외지인 그 자신이 미끼였던 것이다. 또한 외지인에게는 마을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하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것 자체가 그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외지인이 자꾸 눈에 보이는 게, 피를 말려 죽이려고(신경이 곤두서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무명의 말과도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외지인에 대한 소문과 의심은 마을 사람들이 일광을 불러 굿을 하게 하고, 종구가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감독의 말과 연관지어 보면, 이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세상(선)의 부조리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많은 추측 중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건 외지인에게 겁탈당하고 저주를 받았다는 설이다. 여기서 겁탈은 물론 정신적인 겁탈일 수도 있다. 공책의 야수화된 외지인 그림과 초반 딸이 악몽에서 깨어 울면서 하는 대사가 그 근거이다. (외지인의 실체를 본 종구의 동료 경찰과 양이삼 부제의 상태를 떠올려보라.)
외지인의 본성이 악에 가까움을 알리는 복선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을 자기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변태적으로 해소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혹은 이 장면을 보고 효진이가 외지인한테 강간 당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감독 인터뷰를 보면 효진이의 그림은 효진이의 2차 성징을 나타내는 그림이라고 한다. 실제로 효진이 어머니가 효진이가 드디어 생리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씌인 게 풀린 다음에도 여전히 다른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면, 효진, 박춘배 기타 두드러기 환자들에게 씌였던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일 수 있다. 혹은 무명에게 씌였던 영향으로 정신이 나가서 다들 살인사건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다. 무명이 일본 노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자신의 현실 개입을 위한 도구였던 강령자들을 미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혹은 악에게 유린당하는 선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피해자와 연관시켰을 수도 있다. 감독의 말에도 웅크리고 있는 (무력한) 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 나온다.[38]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이 오히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기독교 교리로 해석되는 예수와 유사하다고 추정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참 하느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39]이라 한다. 성경에서도 아파하거나 슬퍼서 울거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하며 나약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인성을 가진 것이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이야기인데, 일본인 캐릭터 자체가 그런 캐릭터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
사실 외지인이 도망치며 두려워 서럽게 울기까지 하는 이유는 종구 일행의 추격 때문이 아니라 종구+무명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절벽에서 떨어진 후에 외지인과 무명이 마주친 후 그 다음 장면에서 무명이 도망치고 외지인이 무명을 추격하는 듯한 묘사가 있는데, 사실 이 장면은 완전히 반대 상황으로 외지인이 무명에게 추격 당하는 장면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무명과 외지인이 한 쇼트에 잡힌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명이 달리면서 잠깐 뒤를 돌아보는 장면에서의 시선 처리를 볼 때 무명이 쫓기는 장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일광이 누군가(무명?)에게 살을 날리던 도중 종구의 방해로 외지인이 역살을 맞게 되어 힘이 약해진 상태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외지인도 처음에는 일광과 마찬가지로 그저 악령을 섬기는 인간 무당이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종구 일당과 무명의 추격으로 인하여 사망한 후 그 원한 + 악령을 섬기던 사악한 무당이라는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무명과는 달리 현실세계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악령이 그 몸 안으로 들어와 육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딸을 구하려던 종구의 행동이 오히려 악령의 힘을 강화시켜버리고 말았다 = 제대로 낚여버렸다' 따위의 생각도 가능해진다. 이는 상술했던,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것 자체가 외지인의 의도였다는 분석, 그리고 일광의 "미끼를 삼켜버렸다"는 발언과도 연관된다.
다만 여기서 다른 의문이 나올 수 있다. 굿 자체가 상당히 소란스럽고 각종 물건 등 준비도 많이 필요하며, 굿을 할 경우 주변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구가 일광을 모를 수 있었을까? 장모 또한 주변 사람의 소개를 받아 일광을 부른 것인데, 그렇다면 이전에 굿을 했는데도 대량 살인 사건이 발생했거늘, 예전에 굿을 했던 일광을 또 부르는 것은 이상하다는 의심도 해볼 만 하다.
더군다나 일광을 소개시켜줬던 사람은 이후 굿을 한 집안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일광은 수사조차 받지 않는다. 더욱이 장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다른 피해자들에게까지 여러차례 굿을 해 왔다면, 일광은 용의자나 참고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정작 경찰인 주인공조차 그런 부분을 알지 못한다. 아예 탐문수사까지 하면서도 피해자들이 굿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정도이다.[41] 그렇다면 아예 일광을 소개시켜 주는 제3자가 일광과 한패라서 굿을 소개시켜 준 후 관련 내용을 은폐한다거나, 외지인과의 연관성이 눈치채이지 않도록 계속 무당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굿을 하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경우라도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면 굿을 한 후 오래 지나지 않았을 텐데도, 왜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가 굿을 했던 사실에 대해서 함구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추가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종구가 불에 탄 집을 둘러보던 도중 무명을 만나고, 뒷문에서 동물의 사체를 먹고 있는 외지인을 맞닥뜨린다. 거기서 외지인은 종구를 덮치고, 종구는 기겁을 하며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는데 목격자를 놓쳤다고 시말서를 쓰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무명과의 대화에서도 무명이 "그거 꿈 아니여"라고 종구에게 말한다. 마을 보호신인 무명은 인간에게 닥친 비극을 꿈으로 전환하는 어떠한 초능력(?)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신적인 존재인 만큼 그런 능력이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고로 닭이 3번 울었다면 이 모든 사건들이 꿈이 되어 어떠한 비극도 마주하지 않은 채 가족들이 전부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닭이 3번 울기 전 그 약속을 깼기 때문에 결국 꿈으로 처리될 악몽은 현실의 비극으로 머무르게 된 것.[42]
또 다른 의견으로는 종구가 무명을 보고 "너는 인간이냐 귀신이냐"고 묻자 무명이 "니 딸을 구하려는 한 여자" 라고 대답하는데 여기서 구한다는게 정신적인 의미로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의미로 생각해본다면, 중간에 외지인이 굴러떨어진 후 잠시나마 효진이 정신차리는 듯한 묘사가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함정은 효진이 가족을 살해하는 것은 못 막더라도 닭이 세번 우는 순간 귀신이 함정에 잡히고 효진은 늦게나마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외지인이 차에 치여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았고, 무명 역시 종구와의 대화에서 외지인이 그렇게 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외지인이 여러 차례 약해진 상황속에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않았냐는 것.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외지인을 추격했다는 건, 약해진 외지인에 대한 무슨 수가 있었다는 것일텐데 외지인이 사령을 소환하는 의식을 통해 진이 빠졌을 때와, 차에 치였을 때 등 약화 상태를 겪었을 때 무명과 맞닥뜨렸지만, 무명은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 여러 번 언급됐듯 무명이 곡성 일대를 지키는 토지신이라는 것을 전제를 놓고 보면, 이 때의 무명은 누군가의 육신에 빙의된 상태가 아닌 영적인 본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43] 사람들 눈엔 보이지도 않고 사람이 인지할 수도 없는 상태라 소리를 질러봐야 무의미하고, 일본인은 악마이기 때문에 무명의 영적인 본체를 볼 수 있던 것이며, 다리가 부러지는 등 매우 취약한 상태였던 탓에 그 땅을 다스리는 토지신 무명과 맞서기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취약해진 자신을 노리는 무명을 피해 일본인은 달아날 수 밖에 없었고, 무명은 그런 그를 종구의 트럭에 치일 수 있도록 몰아가며 유도한 것이다.[44] 무명은 그것으로 일본인이 힘을 잃어서 더 이상 곡성에 해를 가하지 못 하리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일본인이 죽지 않자 최대한 힘이 닿는 데로 나서려 한 것인데, 어디까지나 제약이 많은 신으로서 일본인을 완전히 끝내는 데까진 힘을 발휘하지 못 한 거라 볼 수 있다.[45]

영화에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많기에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의 발언을 보면 이러한 모호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연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모호성을 염두에 둔 연출 자체의 결함이다. '어떤 관점으로든 보는 게 가능한 연출'이란, 어떻게 보면 '어떤 관점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연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상술된 여러 가지 시각에서 영화를 해석하는 관점들 역시, 어떤 관점으로 봐도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있다.

'기존의 영화들이 상징이나 특정 것들을 통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원하는 지점에 다다르는 것과 다르게 영화를 만들었다. (중간 생략) 곡성이란 공간의 시간과 날씨의 변화를 보여주며 분위기를 쌓다가 무명(천우희)과 디졸브를 시키면 그녀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이 영화를 좌우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 원인을 모르리라.'

각종 의문에 대해선 본문의 감독과의 대화 문단을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5. 성경과 유사점

효진이는 못 먹던 생선을 갑자기 먹기 시작하고 외지인은 생선을 낚기 위해 미끼를 꿴다. 생선기독교적 심볼[46]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기독교적 색채를 느끼는 해석도 있다. 다만 못 먹던 음식을 갑자기 폭식하는건 전통적으로 귀신 들림 증상으로 알려져 왔던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약간 다르게 해석했는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가 육체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나서 대접한 것이 생선이고, 예수가 그것을 먹는데,[47] 먹는다는 뜻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 영화에서 생선이라는 것은 초월적 존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실과 관련이 있고, 성경에 있는 레퍼런스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효진이 생선을 먹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기독교적인 상징물인 생선'을 먹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선을 먹는 행동' 자체가 루카 복음서에 레퍼런스를 둔 것이고 그것에 주안점을 두고 해석한 것. (또는 영화의 첫장면에서 외지인이 미끼를 끼우는 모습을 생각하면 효진(생선)이 미끼를 물었다라는 상징적인 의미일수도 있다.)

반면 '새'는 악마적인 이미지나 제물로 활용된다. 처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새 둥지 모양의 제단, 종구네 집의 장독대에서 발견된 까마귀 사체, 일광이 무명을 만난 후 겁에 질려 거처로 복귀했을 때 안으로 던져진 까마귀 등. 종구가 양이삼 부제와 이방인을 찾아갔을 때 이방인의 식사 그릇을 보면 닭발인지 뭔지 모를 새의 발이 수북하게 담겨 있다. 일광의 굿판에서는 일광의 손에 들린 흰 닭과 이방인에 손에 들린 까만 닭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2.
토마스 모티브는 나중에 CG로 추가한 것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선명한 존재를 관객이 다중적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그를 보고 가톨릭 부제가 "주여"라고 할 때,
"주여"를 과연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관객이 더욱 극명하게 느끼도록 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늘에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앞에 있는 대상인지,
보는 그대로 일수도 있고, 아니면 다를 수도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 더 차이가 나도록 하게 하고 싶었다.
-나홍진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48]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4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복음서 20장 24~29절

사도 토마스 앞에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자 토마스는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 상처를 만지게 해 달라고 그래야 믿겠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가 손과 발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게 허락하고 나서야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외지인은 자신의 손과 발을 보라고 하며 자신을 만지라고 하는데 외지인의 손에는 구멍이 난 듯한 상처가 있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
마르코 복음서 : 14장 72절

닭이 3번 울면 귀신이 함정에 걸린다고 하는 장면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욥기 1:7

종구가 외지인에게 곡성에 온 이유가 뭐냐라고 묻자 한 번은 '여행'이라고 대꾸하고 나중에는 대답을 해줘도 너는 믿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질병과 죽음을 창궐하게 만드는 게 악마의 목표이다.
종구의 이야기와 이삼의 이야기는 사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삼은 이삼대로 자신에게 혼란을 주는 어떤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종착지에서 만난 그 인물이 특정 형상으로 변하면서 메시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조린다'
마치 악마가 예수의 흉내를 내며 예수의 제자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이삼이 '주여'라고 읊조리지 않나. 이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를 진짜 악마로 보고 주를 찾는 것, 아니면 예수가 악의 형상을 한 것 뿐이라고 믿고 경배하는 것,
관객도 함께 의심한다. 관객에게 선택권을 줬다
-나홍진

6. 침묵하는 신이란 주제

곡성에서 왜 일가족이 몰살 당해야 했는가, 닭이 3번 울든 아니든 왜 그런 비극으로 가야 했는가에 대한 단서를 감독의 인터뷰가 제공한다.
또한 이 주제를 둘러싼 맥락에 대해서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참조할 수 있다.
도대체 당신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존재는 하시는 겁니까? 존재하신다면 왜 방관만 하십니까?를 물어보고 싶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쭈그려 앉은 무명의 초라함, 외로움의 느낌이 그런 느낌이었다. 그게 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더 필요한 게 신이 아닐까 싶었다. 신이 있다면 좀 더 인간미 넘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홍진
가까운 가족이 죽었다.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죽었다. 당시 '황해'가 끝나고 난 뒤였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선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니깐. 장례식에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서 확장하고 확장했다. 그렇게 찾은 이유를, 시선을 부감으로 와이드해서 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홍진 감독이 제작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나홍진 감독이 제작을 결심한 이유는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가까운 가족의 죽음이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그는 신을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사람을 데려간다면 당신은 정말 선한 신입니까?" "왜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방관할 뿐입니까?" "당신이 존재하는 것은 맞습니까?" 과 같은 질문들은 그가 가족의 죽음에서 느낀 신앙의 갈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고민은 곡성이란 영화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한 신이지만 방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명. 주인공을 유혹해 생명을 죽이려는 일본인과 무당. 그들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한채 의심하는 주인공. 감독은 의도적인 해석의 모호함을 이용해 관객들이 주인공의 입장을 체험하게 만든다. 급박하고 간절한 상황에서 관객들은 도대체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 모른채 흔들리게 되고 이것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신앙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렇게 결국 믿음을 저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자신의 겪은 신앙의 고뇌를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신앙을 가졌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갈등을 겪은 사람이라면 감독의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도 공감할지도 모른다.
[1] 정확히 말하면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2] 하지만 반대로 증거가 없는 말로 이어지는 증언들(외지인의 정체에 대한 증언)이나 종구의 시선이 닿지 않는 부분(훈도시 등) 혹은 종구의 꿈(외지인이 나오는 꿈)으로 영화를 보면서 이어나가면 의외로 얘기가 쉽게 풀려나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의 양이삼 부제와 외지인의 대화를 유심히 보면 외지인은 "이미 넌 내가 악마라고 확신했고, 그에 대한 증거를 보러 온 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양이삼 부제는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외지인이 성흔을 보여주자 쉽게 흔들려버리고 마는 모습을, 무명이 지니고 있는 물건에 흔들리는 종구와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초반의 루카 복음서와 낚시의 미끼 등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바대로 볼 수 있는 사실과 믿음과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포스터에서도 현혹되지 말라고 보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놓긴 했다[3] 엑소시즘을 다룬 미디어에서 구마하는 과정 중 악령에 씌인 대상이 괴로워하며 구토를 하는 연출이 많은데, 뒤에 밝혀지는 일광과 외지인의 관계 그리고 감독이 밝힌 무명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해보면 일종의 복선이다. 연출상으로는 일광이 종구를 구해주려다 무명에게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광을 선한 쪽으로 생각하기, 즉 현혹되기 쉽다.[4] 떠나지 않으면 너도 이렇게 만들겠다는 무명의 협박성 경고.[5] 커다란 나방 수천 마리. 엑소시즘 영화에서 악령이 자주 소환하는 잔잔한 아이템.[6] 막상 당황한 일광이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는 차와 차 주변에 나방들의 시체가 전혀 없다. 다시 종구의 집으로 향하던 중에도 차는 깨끗하다. 환영이라는 증거.[7]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이 처음부터 한패라고 밝혔다.[8] 금어초가 주는 상징성과 이미지도 상당하다. 금어초는 살아있을때는 단아하고 예쁜 모습을 자랑하지만, 시들고 말랐을 때는 마치 해골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종구의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선이 패배하고 악이 승리했음을 암시하는 모습이다.[9] 이에 대해 더욱 재미있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창세기에서 최초의 여자인 이브(하와)가 타락할 때 사탄의 현신인 뱀이 나와서 선악과에 대해 물어본다. 뱀과 대화한 후에 이브가 그 열매를 보니 이전과 다르게 보기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10] 또는 피해자들을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행위(의식)로써 피해자들의 소품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종구가 오해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11] 영화 검은 사제들에 굿을 하던 무당이 하혈하는 장면이 나온다.[12] 이삼이 집까지 찾아가 본 정황은 따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뭔가 예감한 듯 싶다. 왜냐하면 외지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복 역시 미쳐서 집주인 아주머니를 살해했다고 동료 경찰들이 이삼에게 알렸기 때문. 미친 삼촌을 보며 복수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13] '내가 누군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닌, 바로 네가 그렇게 말했다' 이 두 문장 모두, 당연히 그렇게 섬뜩한 의미로 쓰인 건 아니지만 예수의 대표적인 말들 중 하나다. 성흔, 루카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인 이삼을 농락하고 조롱하고 흔들리게 만드는 것.[14] 이때 읊는 대사는 모두 루카 복음서 24장 38~39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개역개정판)으로, 오프닝에 나온 구절에서 예수가 하는 말들이다.[15] 일본 영화에 나오는 오니 같은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16] 딸과 같이 놀이기구를 타는 장면을 회상하며 '효진아, 괜찮어. 아빠 경찰이니께 다 해결해줄겨' 라고 중얼거리는데, 이 문구는 사실 공식 포스터에서 종구라는 캐릭터의 대사로 찍혀 나와 있었던 대사다. 정확히는 감독판에서 삭제된 씬(부정 / 父情, phatos)을 확인할 수 있는데, 종구의 딸이 밤에 각종 욕설을 내뱉은 다음날 다소 진정되었을때 '나 이상한데 어떻게 좀 해 달라' 라고 애원하고, 그런 딸을 안은 채 종구가 읊조리는 말이다.[17] 딸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었는데, 초반에 등장해서 살인을 저질렀던 피투성이가 된 남자도 이런 상태로 경찰들에게 발견되었다.[18] 둥지 모양의 형상 가운데 종구의 딸을 놓고 굿판을 벌인다.[19] 첫 번째 피해자의 집에서도 새 둥지 모양이 발견된다. 2번째 피해자인 미쳐버린 젊은 며느리도 시어머니의 강권으로 동일한 굿을 했을 것이다. 이는 무명(천우희)의 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굿을 하기 싫어했는데, 할매가 하자고 해서 했는데, 다 죽어버렸어. 할매가 대들다가 제일 잔인하게 죽었지. 대갈빡이 뿌셔져서…' 또한 외지인의 주술실에서와 흡사한 새끼줄 쳐 놓은 모습이 효진을 위한 굿 장면에도 나온다. 이 양식을 벗어난 곳은 다른 무당이 굿을 한 걸로 추정되는 박춘배 집이다. 그리고 이 때 굿을 했던 무당의 시체가 우물에서 건져진다. 즉 다른 희생자들과는 다르게, 일광이 아닌 다른 한국 무당이 굿을 한 것이다. 박춘배만 외지인이 따로 주술을 거는 듯 나오는 것도 혹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20] 괜히 장승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써둔 게 아니다. 도교에서 장군의 힘을 빌어 액을 막고자 한 것. 자세한 것은 장승 문서나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장승' 문서 참고.[21]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라면 둠 2: 헬 온 어스아이콘 오브 신.[22] 참고로 일본, 영국, 뉴질랜드 등 이 왼쪽 차선을 이용한다. 외지인의 국적을 생각해보면 역시 하나의 복선.[23] 장모 역시 귀신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보아도 내용상 별 무리없이 이어진다. 이것 역시 감독의 의도일 수도.[24] 시작부에 종구가 밥을 먹는 씬에 효진이 '누가 죽었디야?'라고 물으며 앉는데 이때 종구의 장모가 고개를 끄덕이고 효진은 할머니를 바라본다.[25] 또한 결말 부분에서 일광이 종구 가족의 시체를 찍을 때, 아내와 종구, 합해서 두번의 사진만 찍는다. 다만, 아내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아내 옆에 장모도 죽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두 명을 찍었다고 볼 수도 있다.[26] 근데 이건 이럴 위험이 예상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줄거리의 핵심 분기점이기 때문에 결말이 어떻게 난다는 복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말이 실패하는 쪽으로 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정도.[27] 하지만 번개 맞은 건강원 남자의 아내가 '평소 남편이 건강식품을 많이 먹었다' 고 하는 장면이나, 종구의 딸이 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에 왔을 때 약 같은 액체를 마시는 장면이 있다. 버섯 달인 물일지도. 그 후 증세는 더욱 악화된다.[28] 이 설을 따르게 된다면 과거에 개봉한 극락도 살인사건과 비슷한 플롯이 된다.[29] 효진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몸을 꼬고 틀다가, 뼈가 부서져 몸을 뚫고 나오며 죽었다.[30] 일광은 외지인이 내세우는 하나의 패라고 볼 수 있으므로 무명도 맞패로 종구를 내세운 것이다.[31] 본인이 광인들을 부린 것이라면 당황할 필요가 없다. 어디로 갔는지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32] 신들이 서로간에 직접적인 공격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살을 날리는 굿을 서로 주고받기도 하고 무명도 손수 일본인을 족치려고 두번이나 움직였으니. 추가로 무명이 일종의 덫을 만들고 일본인을 찾자마자, 아마 종구가 찾아간 날부터 알아채고-이것도 일본인이 친 은신주술을 풀려면 자신의 권속격인 곡성인이 그가 있는 곳을 방문해야만 풀리는 오컬트적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족치려고 벼르고 있었을수도 있다만, 바로 추격하는 것을 보면 일본인이 스스로를 숨기기 위한 모종의 주술을 행하고 있을 개연성 또한 높다[33] 사실 출처가 불분명한 논란이나 의문점도 포함하고 있으나,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거나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문제들이다. 재미를 위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34] 자의적인 문제점 제기와 그에 대한 해석, 반박, 재반박 등이 이뤄지고 있으니, 편집 시 출처를 명확히 밝힐 것[35]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겠다. 그리하여 내가 사람의 속과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모든 교회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한 일에 따라 각자에게 갚아 주겠다." (가톨릭 성경)[36] 작중에서 일본인 방에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화 된 신토 신앙이나 도교 또는 밀교를 믿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면 불교에 등장하는 야차나 그에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일본의 오니를 떠올릴 수도 있다.[37] 외지인은 무명과 격투 후(작중에선 편집 됨) 도주하다가 종구의 차에 치여 잠시 사망했다.[38] 그러나 신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무명이 씌였던 인물들인 박춘배씨와 효진이 일가족의 비극을 일으키는 걸 막지 못 한 한국 토속신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직접적인 가해 장면이 없었던 일본 노인이 오히려 한국에 방문한 일본 토속신임에도 지역 주민들의 편견과 텃세 때문에 고생하느라 무력했던 거란 추정도 할 수 있다. 일본 노인이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목적의 일본 토속신이 맞다면 영화엔 정체가 나오지 않은 제 3의 악한 존재가 있어서 사건들을 일으켰는데 무명은 그 사건들을 막지 못 했고 일본 노인은 그 존재를 쫓아 다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39]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갖춘, 둘을 분리할 수 없는.[40] 극 중에서 고라니를 뜯어먹는 악귀의 모습을 한 일본인을 마주친 것은 건강원 아저씨와 종구 2명 뿐인데, 실제로 고라니 시체가 발견된 것과 영화 말미에 무명이 종구에게 '그게 꿈인 줄 알았냐'는 대사를 던지는 걸로 보았을 때, 2번 다 무명이 나타나서 일본인을 쫒아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이것도 실제로 외지인의 모습을 보았다기 보다는 일종의 예지몽을 꾼 것일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41] 무명이 살짝 언급만 하는 정도이다.[42] 일개 무속신 수준에서 가능할 리가 없는 힘이긴 하다.[43] 잘 보면 무명을 본 일반인은 종구와 병규 밖에 없다. 그 둘이 같이 있을 때 본 무명이 실은 무명에게 빙의된 박춘배라면, 무명의 본모습은 일반인 눈엔 절대 보이지 않고, 일광과 일본인은 무당 및 악마이기에 무명의 본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44] 감독이 의도했듯이 무명은 무력한 신으로, 곡성 일대를 다스리는 수호신일지언정 사람의 몸에 빙의해야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등 어디까지나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현세에 물리적인 간섭은 빙의 없인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대신,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그저 꿈꾼 것으로 바꾸는 등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구어낼 수 있는 힘이 무명의 가장 크면서도 유일한 무기다. 그러나 이러한 힘은 발휘되려면 이에 부합하는 조건이 맞아들어가야 하고, 그 조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그 힘을 발휘하려는 데에 연관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종구에게 '딸을 살리고 싶으면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한다'고 당부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45] 아니면 정말로 일본인이 한동안 숨을 거뒀다가 악마의 힘으로 다시 되살아 난 것이고, 그 때까지 무명은 그 악마가 그만큼 강한 건지를 알지 못 했던 걸 수 있다.[46] 익투스, 오병이어의 기적[47] 이는 곡성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오는 루카 복음서 24장 39절 직후인 24장 42~43절에 서술되는 내용이다.[48] 사도 토마스의 의심에서 유래한 영어 표현이 a doubting Thomas이다.[49] 라틴어로 Dominus meus et Deus meus라고 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구절을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