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어 | 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 |
아랍어 | إلـٰهي إلـٰهي لِماذا تَرَكْتَني | |
히브리어 |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 |
그리스어 | ελωι ελωι λαμα σαβαχθαν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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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시편 22편 1절 (공동번역 성서)
시편 22편 1절 (공동번역 성서)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탄식이자, 이를 인용한 예수의 유언.
2. 상세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7장 46절(공동번역 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27장 46절(공동번역 성서)
세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15장 34절(공동번역 성서)
마르코의 복음서 15장 34절(공동번역 성서)
마태오 복음서 27장 46절, 마르코 복음서 15장 34절에 나오는 발언. 예수는 시편 22편을 인용하여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그 밖에 복음서마다 다른 말이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을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채로 한 말은 총 일곱가지다. 이 일곱가지 유언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하며, 본문은 제4언. 사이비 종교 및 이단과 반기독교, 그 외 몇몇 비기독교 종교에서 예수의 대속 실패설을 근거할 때 자주 내세우는 문장이기도 하다.
시편 22장에서는 '버리셨나이까'가 아람어 '사박다니'가 아니라 히브리어 '아자브타니'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시편은 히브리어로 쓰였으니까.
"버리다"는 동사의 어감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인지 기독교 신자가 아니거나 기독교 신자라 해도 시편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 하는 때, 신학에 기초해 독해하기에 앞서 "예수가 죽음 앞에 실패했다" 정도로 곧장 받아들이는 착각이 많아 대중을 중심으로 오해가 상당히 많다.
'하느님과 예수는 실제로는 같은 것이나 모습만 다른 것'이라는 양태론을 반박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하며 삼위일체론 교리도 이 구절로 말미암아 한동안 논쟁을 겪어야 했다.
2.1. 언어적 해설
마태오의 복음서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히브리어 음역이고 마르코의 복음서의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는 아람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는 "엘", 아람어로는 "엘라"이고, 여기에 1인칭 소유격 접미사 -이를 붙이면 히브리어는 "엘리", 아람어는 "엘라히"가 되는 것을 근거로 한다.하지만 뒤의 '사박다니'가 히브리어일 수가 없어서 이 문장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아람어 문장이다. '(שבק)šbq' 어근은 아람어에만 존재하며, 히브리어라면 '(עזב)'zb' 어근이 사용되어 '아자브타니(עֲזַבְתָּנִי)'가 되어야 한다. šabaqta는 2인칭 단수 남성 완료형으로 "(네가) 저 버렸다", 그 뒤의 -ni는 1인칭 단수 목적어 "나를"이 된다.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굳이 "나의 하느님"만 히브리어로 바꾼 것은 시편의 구절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아람어에서 히브리어 "엘"도 "엘라"만큼 많이 쓰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2.2. 종파별 해설
2.2.1. 가톨릭
(아람 말, 또는 히브리-아람 말로 된) 시편 22,2[1]를 인용하신 것이다. 이 외침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직접 하느님께 올리는 것이므로, 비통의 부르짖음이기는 하지만 절망의 절규는 아니다. 이 인용구는 우선 단말마의 고통과 소외를 절절히 드러내는 외침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22편의 첫머리만 직접 인용되기는 하지만, 이 시편 전체가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십자가 죽음의 배경을 이룬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시편에서는 바로 이어서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가 고백되고, 또 후반부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기도자의 정당성과 하느님의 구원이 노래된다. 그리하여 이 비통한 절규는 결국 신뢰의 외침, 현재의 지극한 고통에 상응하여 표현되는 확고부동한 신앙의 외침이 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0.
가톨릭에서는 해당 시편 구절의 성격을 비탄과 절망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감사, 특히 박해받는 올바른 이의 고통에 대한 호소와 밑바닥에 깔린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다.자세한 내용은 이 링크를 참고. 가톨릭교회 측에선 예수가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시편 기도를 드린 것으로 받아들인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0.
2.2.2. 정교회
2.2.3. 개신교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본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항상 성부에게 총애받으며 존재했으나,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추악함을 뒤집어쓰고 성부의 맹렬한 저주와 버림을 받는 고통 (육신의 고통이 아님) 의 목소리라고 해석한다. 예수는 처형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옮기소서" 라며 심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 "잔" 은 전능자의 분노와 파멸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용어였다. 따라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2] 십자가형의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인류를 지옥에서 멸망시킬 성부의 진노가, 골고다 언덕에 임한 3시간의 어둠 속에서 예수에게 대신 쏟아졌다고 말한다.제4언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후속되는 유언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어찌 나를 버리냐는 절규에 뒤이어 예수가 한 제5언은 요한복음 19장 28절에 따르면 ‘내가 목이 마르다.’이다. 고난으로부터의 고통은 쓰지만 그로 인해 성취하는 인류애의 사랑과 구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다음 유언해서 밝히는데, 제6언은 같은 책 같은 장 30절의 ‘다 이루었다.’이다.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희생 제물이 된 예수는 고통을 감내해 결국 구원의 문이 되었음을 십자가 앞에서 선언한다.
이어서 마지막 유언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 46절)를 통해 이생에서의 죽음을 수긍하는 내용으로 하는 기도를 재차 성부 하나님에게 올림과 더불어 고통과 구원 이후에 기다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관계가 회복된 인간은 부활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때에 부활하며, 예수에게로 다시 모였던 남은 제자들과 예수가 부활했노라고 증언한 자들과 같이 성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의 신학에 따르면, 성관계를 거치는 과정으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아담에서 내려오는 원죄에 속박되어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당대 사람들이 속죄를 위해 자기 대신 양이나 소 같은 짐승을 희생 제물로 도축하여 제사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죄성 있는 죽음을 기독교답게 표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이르는데 십자가에 예수가 못 박힌 이유 자체가 인류의 죄를 모두 뒤집어써 원죄 없이 태어난 자신이 대신 희생 제사를 치르는 예수는 죄 없는 참된 인간이며 동시에 참된 신(하나님)인 존재이다. 그야말로 희생 중의 희생으로 제4언인 본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인간으로서는 최대의 시련인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장 잘 드러내는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로마서 10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예수를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에 이르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을 두고 예정론과 알미니안주의가 격한 대립이 있었다. 웨슬리의 신인합일까지 소개하지 않더라도,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거나 불교의 선문답 유사한 깨달음으로 내가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은 예수가 이미 다 이룬 나의 구원을 확신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2.3. 역사적 예수론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선 다양한 해석이 있다.알버트 슈바이처나 게자 버메스(Geza Vermes)는 '자신이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줄 알았다가 그 소망이 물거품이 되자 토로한 인간다운 절망의 표현' 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예수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자신이 결국 세속 권력의 손에 죽임당할 줄을 알고 있었고 원문인 시편 구절의 의미처럼 지금 내 몸은 죽어도 하느님께서 결국 나를 구하시리라는 희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참조
반면 예수의 죽음 자체를 제자들은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묘사한 예수의 유언의 역사성 자체를 의심하는 해석도 존재한다.[3]
3. 기타
-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하기도 했고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오의 복음서 27장 47절(공동번역 성서)
또 엘리야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주나 보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마태오의 복음서 27장 49절(공동번역 성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단말마를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했다. 엘리가 엘리야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 듯한데, 실제로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이 '나의 하느님은 야훼(주님))이시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면 '엘리'가 하느님을 뜻하는 줄 몰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슬라보예 지젝은 예수의 형상을 취한 하느님조차도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잃고 절망했으며, 부당함, 배신, 고통, 죽음으로 이어지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서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면 하느님마저도 신념을 잃을 수 있다는 방증으로 본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그가 처음이 아니며, 초창기 기독교 시절부터 영지주의 등 여러 이단들은 예수(의 신)와 유대교의 신을 구분하는 데미우르고스적 근거로 삼았다.
4. 매체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요한의 펜 상태의 인덱스가 이노켄티우스를 파훼하는 데 사용한 주문으로 나온다.
- 렛미인에서 자살이 실패한 호칸이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병원에 실러왔을 때, 이엘리를 불렀는데, 출동한 경찰은 동료 경찰과 대화하면서 호칸이 말한 엘리를 문서에 있는 성경 구절로 해석했다.
- 사일런스에서는 홀로 배교한 키치지로가 보는 가운데 가족들이 모두 화형에 처해질 때 키치지로의 어머니로 보이는 나이 든 여성이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라는 비명소리를 반복하며 죽어간다.
-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예수의 클론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대사를 한다.
- 영국의 소설가 마이클 무어콕이 쓴 반기독교 대체역사소설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예수가 중증 지적장애인이고, 성서에 나온 예수의 행적은 20세기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간 현대인 주인공이 예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나오는데[4], 성서대로 이뤄지기 위해 십자가형을 당하는 주인공이 자기 예상보다 더 심한 십자가형의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제발 날 내려달라'고 꼴사납게 소리치다 결국 'It's a lie.' 를 반복하며 숨을 거두는데 그게 듣는 사람들에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잘못 들렸다고 비아냥거리는 서술을 하고 있다.
- 문호 스트레이 독스에서 표도르가 한 대사 중 하나.
[1]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팀 켈러 등 개신교 신학을 따라가는 사람들.[3]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는 말은 요한 복음서의 자칭 저자를 요한으로 보는 전통적 해석인데, 역사적 예수 신학에서는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다.[4] 단 예수의 기적은 플라시보 효과거나 백성들이 소문을 과장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