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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1:18:22

광무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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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초기
1.1. 유년기1.2. 거병 전
2. 신나라 멸망
2.1. 왕망의 폭정2.2. 용릉에서 기의하다2.3. 경시제 유현 옹립2.4. 곤양대전2.5. 유연의 죽음2.6. 왕망의 패망
3. 하북 평정
3.1. 왕랑의 난3.2. 동마적 토벌3.3. 상서령 사궁 제거3.4. 하북을 평정하다
4. 천하통일
4.1. 황제 즉위4.2. 현한의 멸망4.3. 군웅할거의 대혼란기4.4. 농과 촉을 평정하다
5. 천하통일 이후
5.1. 문치로의 전환5.2. 업적 - 광무중흥(건무성세)5.3. 사망

1. 생애 초기

1.1. 유년기

아버지 유흠은 본래 전한의 방계 황족으로, 정확히는 전한 제6대 경제 유계의 7남이자, 전한 제7대 무제 유철의 이복형이었던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1]의 4대손이다. 기원전 6년 음력 12월 6일[2], 유수는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제양현(濟陽縣)에서 제양현령 유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붉은 빛이 방 전체를 감쌌다고 한다. 유흠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공조 충란(充蘭)을 보내 점쟁이에게 이 일을 알아보게 하였다. 충란은 사졸 소영(蘇永)과 함께 이름난 점쟁이 왕장손(王長孫)의 거처로 찾아갔다. 왕장손은 점괘를 맞추고는 말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길조로다."
또,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유흠의 방 앞에 관상용으로 심어둔 꿩의비름이 세 그루나 자랐는데, 한 그루마다 줄기에 9개나 되는 이삭이 있었고 그 이삭의 길이도 일반의 것과 달리 1~2척은 족히 되었다. 유흠은 이 모든 현상을 길하다 여기고 마침 꿩의비름이 품질이 빼어난 것에서 착안해 아들의 이름을 "빼어날 수(秀)"로 지었다.

기원후 3년, 아버지 유흠은 남돈현령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9세의 어린 유수를 놔두고 사망하였다. 유수에게는 큰형 유연(劉縯), 작은형 유중(劉仲)과 큰 누나 유황(劉黃), 작은 누나 유원(劉元), 여동생 유백희(劉伯姬)가 있었으나 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에 있던 숙부 유량(劉良)의 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외딴 환경에 놓이게 된 유수는 형 유연을 부모처럼 따르며 크게 의지했고 유연 또한 그런 유수를 챙겨주어 두 형제의 우애는 무척 깊었다. 그리고 이런 어린 나이에도 행동이 신중하고 격이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원문에서는 그의 생김새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身長七尺三寸, 美須眉, 大口, 隆準, 日角。
키가 7척 3촌이며[3]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크며 코가 우뚝하고 이마가 튀어나왔다.[4]

후한서》 <광무제 본기> 권1

관련된 전설에는 춘추전국시대진나라 시황제의 조상 양공이 잡지 못한 장끼(숫꿩)가 달아나다가 유수가 거병한 장소인 남양군() 근처에 앉았고, 그대로 돌이 되어 그 돌꿩을 일대의 사람들이 사당에 모셨는데 그 덕분에 그 동네에서 태어난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5]

광무제가 속한 전한 용릉절후 가문의 적통 후손은 광무제 휘하의 유지(劉祉)[6]였고, 현한의 경시제 유현도 지파지만 광무제 가문보다 적통에 더 가까웠다.

1.2. 거병 전

장성한 유수는 성정이 부지런하여 그의 형 유연과 더불어 농사를 열심히 지어 살림을 도왔다. 동네 사람들은 두 형제가 밭농사를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한고조 유방과 그 형 유희(劉喜)에 빗대었다. 얼마 후, 왕망이 마침내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봉(天鳳)으로 개원하자, 유수는 그동안 농사를 하며 힘들게 모은 재물을 들고 장안(長安)으로 유학갔다. 그는 태학에 들어가 《상서(尚書)》를 공부해 대의에 통달하였고, 이때 등우, 주우 등의 호걸들과 교류하며 친분도 쌓았다.

그 후, 장안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가족들과 함께 한가로이 생활했다. 어느 날, 큰형 유연과 작은 누나 유원의 남편 등신, 그리고 채소공(蔡少公)과 함께 완(宛)에서 연회를 즐기는데, 도참을 배운 채소공이 장차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전한 시절 《칠략(七略)》 편찬으로 이름을 떨치고 왕망의 총애를 받아 신나라에서도 출세했던 국사공 유수가 있었다. 누가 “국사공 유수 말입니까?”라고 하자 광무제는 “제가 아니란 법은 없잖습니까?”라고 했고, 연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사실 국사공 유수의 원래 이름은 유흠(劉歆)으로, 그도 비슷한 도참을 듣고 스스로 천자가 될 꿈을 품고 개명한 건데, 국사공은 나중에 왕망 제거 계획에 함께했다가 들통나서 자살했고 황제가 된 건 광무제였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도 국사공을 유흠이라고 하지 유수라고는 잘 안 부른다.[7] 공교롭게도 유수의 아버지 유흠(劉欽)과 이름이 비슷해서 유수가 이 인물의 아들이라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2. 신나라 멸망

2.1. 왕망의 폭정

왕망의 개혁은 "옛 것에 의거해 제도를 뜯어고친다"는 급진적인 탁고개제(託古改制)의 형식으로, 현실과 맞지 않아 경제 개혁, 화폐 개혁, 토지 개혁이 연달아 실패하며 큰 혼란을 불러왔다. 또, 토예장군 엄우(장우)의 간언을 무시하고 흉노 원정에 막대한 예산을 쏟는가 하면, 거대한 토목공사도 벌여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다. 조정 내의 정치 상황도 무척이나 혼란하였다. 비록 대사마 왕망을 지지하긴 했으나 그가 정말로 찬탈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경시장군 진풍(甄豊), 국사공 유수(유흠), 태사 왕순(王舜) 등의 측근들은 왕망을 배반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조정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였다. 심지어 왕망은 신선과 귀신을 신봉하여 방술사 소락(蘇樂)의 말을 듣고 황금 1만 근을 들여 팔풍대(八風臺)를 지었으며, 대궐 안에는 값비싼 오량화(五粱禾)를 심었다.

변방의 관리들은 군대에 의지해 방종하고, 나라 안으로는 징집당할 것을 걱정하니, 백성들 유랑하기를 택하며 도적이 되었다. 특히, 흉노와 맞닿아 있는 병주, 유주는 그 고통이 어마어마했는데,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한 지 수 년만에 변방은 텅 비고 들판에는 뼈가 나뒹굴 정도로 피해 상황이 처참하였다. 당시 유수가 있던 형주에서도 기근이 들어 들판에 나가 부자(鳧茈)를 캐먹던 백성 무리들이 서로의 것을 빼앗으며 싸우다가 이를 중재한 왕광(王匡)과 왕봉(王鳳)을 우두머리로 삼아 신시병(新市兵)으로 거병했다. 신시병은 이향취(離鄉聚)를 공격하고 녹림산(綠林山)에 숨어 그 세력을 불리고 훗날 녹림군(綠林軍)으로 거듭났다. 연주 거현(莒縣)에서도 번숭(樊崇)이 무리 100여 명을 모아 거병하여 태산(泰山)으로 들어가니, 백성들은 번숭의 용맹함을 듣고 태산에 모여 그 무리가 1만여 명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번숭의 무리는 훗날 눈썹을 붉게 칠해 적미군(赤眉軍)이 된다.

2.2. 용릉에서 기의하다

지황 3년(22년), 기근으로 인해 형 유연의 빈객들이 모두 도적이 되어 사람들의 물건을 강탈하였다. 이에 유수는 가족들을 데리고 채양을 떠나 신야에 있는 매형 등신의 집으로 피신해 완(宛)을 오가며 곡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완 사람 이통(李通)과 그 동생 이일(李軼)은 곡물을 팔기 위해 완성에 들른 유수를 불러 "유씨(劉氏)가 일어나면 이씨(李氏)가 보필할 것이다."라는 도참으로 그에게 거병하자 설득했다. 유수 또한 마침 거병할 뜻이 있어 그들과 작전을 짜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형 유연도 그들의 계획에 동참해 뜻을 함께할 사람을 은밀히 모았다. 그 해 11월, 유수는 한나라의 회복을 명분으로 하여 유연, 이일 등과 함께 용릉(舂陵)에서 거병했다. 유연이 자제들을 모을 때만 해도 "유연이 나를 죽이려 한다."며 도망칠 생각만 하였는데, 침착한 행동으로 명망이 높았던 유수가 나서자 사람들이 신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8] 이때 유수는 말이 없어 를 타고 다니다가 신야현위를 죽이고 나서야 말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완성에서 내응하기로 약속했던 이통은 계획이 발각되어 완성을 빠져나와 유연, 유수의 무리와 합류했고, 전수대부[9] 견부(甄阜)는 이통의 가족들을 붙잡아 그의 아버지 이수(李守) 포함해 64명을 전부 처형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연과 유수는 기존의 계획을 변경하여 녹림군 소속인 왕봉(王鳳)의 신시병, 진목(陳牧)의 평림병과 연합하고, 서쪽으로 진격해 장취(長聚)와 당자향(唐子鄕)을 점령한 뒤, 호양까지 나아가 그곳의 현위를 죽였다.호양현을 차치한 이후, 유연군 내부에서 전리품 분배로 원망하는 무리들이 발생했다. 급기야 반란의 조짐까지 드러내니, 유수는 지금까지 모아둔 집안의 재물들을 남김없이 나누어주어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진격하여 극양현을 점령하자 매형 등신도 집안의 가족들을 거느리고 유수와 합류했다.

유수와 유연의 용릉군은 남양을 파죽지세로 접수하는 듯 보였으나, 전수대부 견부와 속정 양구사(梁丘賜)에게 소장안(小長安)[10]에서 대패하였다. 유수는 단기로 도주하다가 혼전 속에서 길을 헤메는 여동생 유백희를 만나 그녀를 뒤에 태우고 전장을 빠져나왔다. 작은형 유중, 작은 누나 유원과 그녀의 세 딸[11] 등 수많은 일족들이 살해되었다. 소장안 전투에서 대패하고 극양으로 되돌아오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기세가 꺾여 이만 해산하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타이밍이 좋게도 녹림군의 또다른 일파인 하강병(下江兵)의 왕상이 5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의추(宜秋)로 왔다. 유연은 왕상에게 유세하여 언변으로 하강병의 지원까지 얻으니, 떠나가려던 신시와 평림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신나라군과 맞서기로 다집하였다. 유연과 유수는 3일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휴식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군대를 6개의 부대로 나눠 재편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남향(藍鄉)을 기습해 신나라군의 쌓아둔 치중을 전부 약탈하였다.

2.3. 경시제 유현 옹립

지황 4년(23년) 정월, 하강병까지 얻은 유수와 유연은 진격하여 비수(沘水) 서쪽에서 견부, 양구사와 다시 한번 싸워 저들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육양(淯陽)으로 나아가 납언장군 엄우(嚴尤)[12]와 질종장군 진무(陳茂)의 군대마저 쳐부수고 완(宛)을 포위했다. 신나라 군대를 연이어 격파한 녹림군의 위세는 온 남양을 진동시켜, 신나라에 염증이 난 많은 남양인들이 녹림군에 자원하였다. 어느덧 그 무리가 10여 만으로 불어난 녹림군 각 일파의 수장들은 모여서 한나라 재건의 기치에 알맞게 유씨들 중 옹립할 인물을 의논하였다. 후보는 유연과 유현으로 좁혀졌는데, 왕상과 유수가 유연의 옹립을 주장했으나 왕봉과 진목이 이를 묵살하고 선수를 쳐 유현을 옹립하였다. 그 해 2월, 녹림군은 육수(淯水)에 모여 모래사장 위에 제단을 쌓고 유현을 황제에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경시제 유현이다. 황위에 오른 경시제는 유연을 대사도로 삼고, 유수를 태상에 임명하여 편장군을 겸하게 하였다.

경시 원년 (23년) 3월, 유수는 성국상공 왕봉과 함께 곤양(昆陽), 정릉(定陵), 언(郾) 등 영천군 산하의 현들을 차례대로 공략해 나갔다. 형 유연은 경시제의 명령을 받아 완성을 그대로 포위하고 있었는데, 유수는 영천군에서 노획한 소와 말을 비롯한 수많은 재물과 곡식들을 유연에게 보내 완 공략을 응원했다. 녹림군의 경시제 옹립과 그들이 내건 한나라 부흥의 기치는 전 대륙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채준, 왕패 등의 인재들이 유수 휘하에 들어온 것도 이때 즈음이었다. 이들의 존재가 무척 위협적이라는 것을 직감한 왕망은 그동안 다른 반란군이나 흉노 등의 토벌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의 전투를 준비하며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2.4. 곤양대전

경시 원년(23년) 5월, 왕망은 대사공 왕읍(王邑), 대사도 왕심(王尋)으로 하여금 각지에서 모은 정예 대군[13] 거느리게 하고, 병법 63가(家)에 밝은 자들을 전부 징집해 군리(軍吏)로 삼아 참모 역할을 다하게 하였다. 또, 동해(東海)의 장사(長士) 거무패(巨毋覇)를 누위(壘尉)로 삼아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 등 맹수부대를 동원해 이들을 전부 영천으로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고 완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왕읍의 군대는 영천군 경계에 이르러 엄우, 진무의 패잔병들과 합세하면서 수가 더욱 불어난 반면, 곤양성을 지키던 유수와 왕봉의 군사는 9천 명에 불과하였다.

왕망의 부대가 멀리서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유수와 장수들은 얼른 군대를 돌려 곤양성으로 들어갔다. 장수들은 저마다 두려워 곤양을 포기하고 각자 흩어져서 성을 지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유수는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의 병사와 곡식은 적고 외부의 도적이 강대하긴 하나, 힘을 합쳐 싸운다면 어찌 승리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이대로 흩어져 돌아간다면 각개격파당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완성이 아직 뽑히지 않은 상황에서 곤양을 버린다면 우리 군의 모든 부대가 전멸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설마 모두 한마음으로 싸워 공명(功名)을 세우기보단 배반하여 처자식과 재물을 지키려 하시는 것입니까?"
유수의 말을 듣고 장수들은 모두 발끈하여 소리쳤다.
"유 장군은 어찌 그리도 심한 말을 하는가!"
장수들의 반응을 확인한 유수가 빙그레 웃으니, 장수들은 그제서야 유수의 뜻을 깨닫고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유수는 왕봉과 연정대장군 왕상을 남겨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하고, 자신은 표기대장군 종조(宗佻), 오위장군 이일 등을 포함해 13기만 이끌고 밤을 틈타 성의 남문으로 나갔다. 왕읍군의 선봉 10만이 벌써 성 앞까지 도착해 있었으나, 유수와 장수들은 힘껏 싸워 포위망을 뚫어버리고 곤양에서 탈출하였다. 유수가 정릉현과 언현으로 각 장수들을 보내 병사를 모으게 했지만, 장수들은 그새 성 안에서의 결의를 망각하고 자신의 재물을 풀어 병사를 모으길 꺼렸다. 이를 본 유수가 장수들을 다그쳤다.
"만약 적을 무찌르면 진귀한 보배가 지금의 만 배에 이를 수 있다. 어찌 큰 공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이와 같이 행동하다가 나중에 패해서 목이 날아가면 당장 재물을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수들은 유수의 호령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병사를 징발하였다.

한편, 곤양에서는 유수가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읍의 주력도 성 앞까지 당도했다. 왕읍은 자신의 대군이 강대함을 믿고 성 아래에 이르러 왕봉과 왕상을 향해 성을 함락시키고 전부 도륙내버리겠다 선언한 뒤, 병사들을 시켜 곤양성 안으로 연결되는 땅굴을 파도록 지시하고 운거(雲車)를 세우게 하였다. 그렇게 성을 칠 준비를 어느정도 마쳤을 무렵, 엄우가 왕읍에게 건의했다.
"곤양성은 비록 작으나 수비가 굳건합니다. 그러니 지금 완(宛)에 있는 아군의 병력이 유연군을 격파하고 저희와 합류하러 온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후, 포위망을 일부러 조금 열어둔다면 곤양성의 적들은 필시 도망갈 것입니다. 이리하면 저희 군대는 곤양과 완 모두 구할 수 있습니다."
왕읍이 대답했다.
"나는 지난 날 호아장군 적의(翟義)를 포위했을 때, 반란은 진압했으나 그를 사로잡지 못하고 놓친 일이 있어 폐하로부터 심히 책망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백만 대군으로 작은 성 하나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게 대체 무슨 망신인가?"
왕읍은 엄우의 제안을 내치고는 곤양성의 포위를 수십 겹으로 하였으며, 병영 수백여 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곤양성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을 것을 명하니, 운거 수십여 대가 성벽 앞으로 드리워지고 충차가 성문을 마구 찍었다. 신나라의 깃발이 온 들판을 뒤덮었으며, 먼지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북소리가 수백 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그 위세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뒤이어 왕읍의 명령에 따라 쇠뇌병들이 성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곤양성 안은 크게 위태로워졌다. 왕봉 등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 의사를 전달했으나 왕읍이 불허하였다. 오히려 왕읍과 왕심은 곤양성이 곧 떨어지리라 여겨 더욱 맹렬하게 몰아붙였으나, 물러날 곳이 없어진 곤양성 안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곤양성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와중 밤마다 왕읍군 진영에서 유성을 관측하고, 낮마다 구름이 산처럼 뭉쳐 있으니, 군영의 병사들이 모두 불길하게 여겼다.

6월 1일, 병사를 모두 징발한 유수는 군을 갖추어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곤양을 구원하러 달려갔다. 유수는 친히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으로 선봉에 서서 신나라군 진영으로부터 4 ~ 5리 지점에 진을 쳤다. 왕읍과 왕심은 유수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가벼이 여겨 병력 수천 명을 보내 제압하게 하였다. 유수가 선두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직접 적병 수십 명을 베었다. 다른 병사들도 사기가 올라 왕읍군의 별동대를 격파하였고 적군 1천 여 명을 사살하고 돌아왔다. 장수들이 이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유 장군께서는 평소에 작은 적을 겁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 큰 적 앞에서 용감한 걸 보니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 듭니다. 다시 선봉에 서게 된다면 저희도 돕고 싶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유수의 군대는 진격하면서 왕읍과 왕심이 보내는 부대들을 모두 무찌르고 수백,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광무제는 성 외곽에 주둔해 있는 본진을 앞에 두고 맞섰다. 이때 유수는 사람을 시켜 "완성을 함락시킨 아군이 구원하러 오고 있다."라는 서신을 쏘아올려 성 안과 밖에 각각 떨어뜨렸다.[14] 편지를 읽은 왕심과 왕읍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곤양성 내의 군사들은 희망을 얻어 더욱 힘을 내 성을 수비했다.

군대의 정비를 마친 유수는 5천의 병력으로 1만의 지휘부에 돌진을 시도했고, 성 안의 8~9천 병력은 이에 호응했다. 이들은 놀랍게도 신나라군을 곤양성의 서쪽 곤수(昆水)에서부터 중앙까지 뚫었으며, 왕읍의 본영을 향해 돌격해왔다. 광무제를 얕잡아 보던 왕읍은 스스로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각 진영을 돌아보면서 부대는 자리를 지킨 상태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논형에 따르면 각 부대가 왕읍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로 비바람을 제시하고 있어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명령, 혹은 자연재해로 인해 고립된 왕읍의 군사들은 이내 유수의 맹공에 밀려 궁지에 몰렸고, 왕심이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도 각 군영은 그 자리를 지키며 구원하지 않았다. 이 마당에 곤양의 수비군까지 북을 크게 울리며 출성하여 적군을 공격하니 대기만 하던 왕읍의 군대는 당황하여 도망을 치다가,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빠져죽은 자가 10,000명이 넘었다. 결국 왕읍은 겨우 수천 명만을 데리고 겨우 낙양으로 도망쳤다. 한편, 이 싸움에서 승리한 유수는 왕망군이 진중에 가지고 있던 엄청난 양의 보물과 물자를 얻었다. 얼마나 많았는지 달을 이어서 날라도 끝나지 않자 남은 것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왕부지는 후에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 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1936년 《중국 혁명의 전략 문제》 및 1938년 《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대전을 언급했다.

2.5. 유연의 죽음

곤양대전의 패배로 인해 신나라 전역은 크게 휘청거렸다. 각지의 호걸들은 신나라의 지방관을 살해하고 장군을 칭하며 현한의 명령을 기다렸다. 유수는 이 틈에 나아가 영양(穎陽)에서 왕망군을 또 격파하면서 영천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부성(父城)에 머물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곤양대전 이후 유수와 유연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키자, 경시제에게 유연 형제를 제거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참언이 쇄도하였다. 경시제 또한 유수와 유연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사건이 하나가 터진다. 유연의 부장 유직(劉稷)은 용맹하여 공을 여러 차례 세웠기 때문에, 경시제 그의 공을 치하하며 항위장군에 임명했으나 유직이 경시제가 내리는 관직을 사양한 것이다. 분노한 경시제는 장수들에게 수천 병력을 이끌고 유직을 체포해 죽이라 하니, 대사도 유연이 나서서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자 대사마 주유(朱鮪)와 오위장군 이일은 곁에서 경시제를 부추겨 유직과 유연 모두 붙잡아 참수하게 하였다.

형이 처형되었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은 유수는 부하 장수에게 부성을 맡기고 자신은 완성으로 들어가 경시제를 알현해 사죄를 청했다. 유수는 형이 죽었어도 형 유연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았고, 평소와 같이 늘 먹고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 하지 않았다. 간혹 죽은 유연의 부하들인 대사도부 관리들이 유수를 조문하러 찾아왔지만, 유수는 그들과 속삭임조차 섞는 걸 삼가고, 경시제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 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경시제를 원망하였다. 부하 풍이는 유수의 이불에 눈물 자국이 남은 것을 보고 자못 속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유수는 오히려 풍이를 나무라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였다. 결국,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경시제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그를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했다.

2.6. 왕망의 패망

경시 원년(23년) 8월, 경시제는 정국상공 왕광을 보내 낙양을 공략케 하고, 서병대장군 신도건(申屠建)과 승상부사 이송(李松)을 보내 무관(武關)을 치자 삼보 지역이 진동하였다. 무관 동쪽 석(析)에서 등엽(鄧曄)과 우광(于匡)이 현한에 호응하여 신나라의 무관도위 주맹(朱萌)을 붙잡아 항복시키고, 북진하여 우대대부 송강(宋綱)을 살해하고 호(湖)까지 함락시켰다. 왕망은 더욱 근심하여 남교(南郊)에서 제사지내면서 백성들을 불러다가 아주 슬프게 우는 자들 5천여 명을 뽑아 낭관에 삼았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왕망은 아홉 명의 용맹한 장수를 뽑아 9호(九虎)장군으로 임명하고 밀려오는 현한군에 저항도 해보았지만 모두 격파당했다.

장안성이 함락되고 신도건이 왕망의 목을 얻어 경시제에게 보내니, 경시제는 그의 목을 완성 시장바닥에 효시하였다. 정국상공 왕광도 낙양을 함락시키고 신나라의 태사 왕광(王匡)[15]과 국장공 애장(哀章)을 붙잡아 참수했다. 경시제는 낙양을 도읍으로 삼고 싶어하여 유수에게 행사예교위를 겸하게 하여 낙양으로 가 궁궐과 관부를 모두 수리하도록 했다. 유수가 임무를 마치고 경시제에게 보고하자 경시제는 낙양성에 들어가 그곳을 현한의 도읍으로 삼으니, 신나라에 지친 삼보의 백성들은 모두 한나라의 재건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3. 하북 평정

3.1. 왕랑의 난

낙양에 입성한 경시제는 대륙 각 군현에 사신을 파견하여 투항을 권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지역의 지방관을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역들은 표면상으로만 항복했을 뿐, 앉아서 정세를 관망하며 진심을 다해 현한 정권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또, 동쪽으로는 번숭의 적미군이 날마다 세력이 커지고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외효, 서남쪽 익주로는 공손술이 각자 지역을 점거한 채 할거하고 있었고, 하북에는 동마적, 우래적, 오교적, 단향적, 대창적 등 수십 개의 도적떼들이 약탈을 일삼았다. 대사도 유사(劉賜)가 경시제에게 하북 평정의 적임자로 유수를 추천하니, 대사마 주유를 비롯한 경시제의 측근들이 모두 반발하였다. 주유 등은 유수의 능력이 너무 출중하여 그를 하북으로 보내면 위협이 될 것이라 진언하자 경시제는 유수를 하북으로 보내되 지원을 적게 하여 알아서 적지에서 말라 죽게 만드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경시제는 측근들을 모두 납득시키고는 유수를 불러 지절을 하사한 후, 하북의 각 주군(州郡)들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위로하라 명했다. 유수는 지절을 받아들고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향했다. 지원이 매우 미미한 것을 보고 경시제의 의중을 파악한 빈객들은 충성심이 강한 몇몇을 제외하고 전부 유수를 떠나갔지만 유수는 이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유수는 지나가면서 각 현에 이를 때마다 무능한 관리들을 쫓아냈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바로 잡아 풀어주고, 왕망 때의 가혹한 정치를 없앴다. 이에 관리와 백성들은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앞 다투어 유수를 따르려 하면서 소를 잡고 술을 내어 힘을 보탰다. 유수가 조국(趙國)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도 풍이와 요기를 각 군현에 파견해 위무하도록 하고, 자신을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으려는 자를 파악해 명단을 적어 제출하게 하였다. 유수가 한단에서 업무를 볼 당시, 전한의 조유왕(趙繆王)의 아들인 유림(劉林)이 그를 찾아와 유세했다.
"적미군이 지금 강 동쪽에 머물고 있으니, 물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면 이들 백만의 무리는 물고기의 밥이 될 것입니다."
유수는 사상자와 피해가 너무 클 것이라 생각해 기각하고 진정국(真定國)으로 떠났다. 유림은 유수를 유약하다 생각해 크게 실망하고는 점쟁이 왕랑(王郎)과 반란을 공모하였다.

경시 원년(23년) 12월, 왕랑은 자신이 실종됐던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며 천자를 자칭하고 한단에서 거병하였다. 왕랑은 하북의 각 군현에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종용하면서 자신의 가장 큰 걸림돌인 유수를 잡아오는 자는 10만 호의 후작에 봉하겠다는 격문을 돌렸다. 당시 유수는 계(薊)를 순시하던 중이었는데, 왕랑의 격문이 계에도 도착하였다. 유수는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패를 보내 계 시장바닥에서 왕랑을 진압하러 갈 병사들을 모으게 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계의 백성들의 야유 뿐이었다. 왕패가 시무룩해져 돌아오니, 유수는 그제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계를 빠져나가려 마음 먹었다. 하지만 유수의 현상금을 탐한 전한 시절 광양왕의 아들인 유접(劉接)이 유수를 배반하고 그를 사로잡아 왕랑에게 바치려 하였다. 유수와 부하들은 계의 성문 잠금장치를 깨부수고 겨우 탈출하여 왕랑의 군사를 피해 동남쪽으로 도망쳤다.

경시 2년(24년) 정월, 유수 일행이 요양(饒陽)에 이르자 식량이 모두 떨어져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수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을 한단에서 온 왕랑군의 사자라 칭하며 객관의 관리를 속여 부하들과 함께 무사히 배를 채우고 재빨리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는 잠깐의 굶주림만 겨우 해결했을 뿐, 식량이 부족했던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얼마 못가 무루정(無蔞亭)에서 또 굶주리니, 장수 풍이가 인근 들판에서 버려진 콩 따위를 긁어모아 콩죽을 대접했다. 또, 남궁(南宮)에서 다시 굶주리자 풍이가 이번에도 폐가를 돌아다니며 보리와 토견(菟肩)을 찾아 일행들을 먹였다. 그렇게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얼어있는 호타하(呼沱河)를 건너고 하박현(下博縣) 서쪽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왕랑의 추격군이 왔다는 소문을 믿고 허둥대다가 길을 잃었다. 이때 흰 옷을 입은 노인이 길가에 있다가 손가락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힘내게나! 이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신도군이 나오는데, 신도태수는 현재 왕랑을 거부한 채 그대들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다네."
유수가 그 방향으로 달려가니, 과연 신도성이 나왔고 신도태수 임광은 성문을 열어 유수 일행을 맞이하였다. 유수가 성에 입성하자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고 인근에서 임광과 마찬가지로 왕랑에게 투항하지 않던 화성태수 비동(邳彤)도 화성군(和成郡)[16]을 들고 유수에게 투항했다. 유수는 임광을 좌대장군, 이충을 우대장군, 비동을 후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셋을 전부 열후에 봉하고, 임광의 건의에 따라 인근 현에 보내어 군사 4천여 병력을 징집하고 먼저 거록군 당양(堂陽)을 쳤다.

일찍이 임광 등은 병력을 징집하면서 유수가 군사 백만을 모아 반격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거록군 전체에 퍼뜨렸다. 임광은 유수의 명령에 따라 기병들에게 각자 횃불을 들게 하여 연못 너머를 가득하게 메우니 불빛이 온 천지를 밝혔다. 당양의 사람들은 소문의 내용처럼 백만 대군이 집결한 줄로 알고 크게 놀라 항복하였다. 유수에게 백만 대군이 있다는 헛소문을 믿지 않던 다른 현들도 당양이 함락된 후, 10여 일만에 널리 퍼져 세현(貰縣) 등 투항해오는 거록의 현들이 나날이 늘었고, 덕분에 유수는 별다른 전투 없이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때 창성현(昌城縣)의 유식, 송자현(宋子縣)의 경순도 각각 일가 자제들을 이끌고 현과 읍을 점거한 뒤 이를 그대로 유수에게 갖다 받쳤다. 이어서 유수는 북쪽으로 진군해 하곡양현(下曲陽縣)을 쳐 항복을 받았으며, 무리들도 점차 모여들어 어느새 수 만명에 이르렀다.

계속 북진하여 중산국을 공격하고, 노노현(盧奴縣)를 쳐서 빼앗았다. 지나가는 곳마다 격문을 돌려 함께 한단성을 공격하도록 하자, 군현이 돌아와 다시 호응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가 왕랑을 후원하려던 전한 경제의 아들인 진정왕 유양(劉揚)을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유양의 생질 곽씨와 혼인하여 유양과 인척이 되었다. 진정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나아가 신시(新市), 원씨(元氏), 방자(防子) 등의 지방들을 모두 함락시킨 끝에 유수가 점령한 영토가 왕랑이 있는 한단 지역 경계에 이르렀다.

왕랑의 대장군 이육(李育)이 박인현(柏人縣)에 주둔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는 이를 알지 못하고 진군하다 이육에게 기습당해 선봉이었던 편장 주부(朱浮)와 등우(鄧禹)가 격파당했다. 후방에서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재빨리 주부와 등우의 패잔병들을 거두고 역공을 가해, 승리에 취해있던 이육의 왕랑군을 박인성 성문 앞까지 밀어붙여 탈탈 털어버린다. 이육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 방어태세를 취했고, 유수는 박인성을 쳤으나 함락시키는 데 실패한다. 공성에 실패한 유수는 군을 틀어 광아현(廣阿縣)을 빼앗았는데, 때마침 상곡태수 경황(耿況)과 어양태수 팽총(彭寵)이 오한], 구순, 경엄, 왕량 등으로 하여금 돌기병대를 이끌고 왕랑을 공략 중인 한나라군과 합류하게 했다. 유수는 상곡과 어양에서 온 장수들을 모두 편장군으로 삼고 유수는 크게 연회를 열어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경시제는 왕랑이 위기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상서령 사궁(謝躬)에게 수만 군사를 주어 왕랑을 토벌에 힘을 보태게 했다.

수가 크게 불어난 유수군은 동쪽으로 진격해 거록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왕랑의 장수 왕요(王饒)가 굳건하게 지키는 바람에 한 달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왕랑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장수 예굉(倪宏)과 유봉(劉奉)을 수만 군사와 함께 거록성에 보내 구원하게 했으나, 구원군의 존재를 간파한 유수가 장수 등만(鄧滿)을 거록에 남겨 왕요를 감시하게 하고, 자신은 주력군을 거느리고 남련(南䜌)에서 예굉과 유봉의 군대를 격파했다. 유수는 등만을 계속 거록에 남긴 채 우회하여 한단성을 쳤다. 한단을 공격한 지 20여일 만에 왕랑의 소부 이립(李立)이 성문을 열어 투항했고 성에 입성한 유수는 왕랑과 공모한 전한의 황족 유림을 잡아 주살하였다. 왕랑은 밤중에 도주하다가 유수가 보낸 추격병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한단을 점령한 유수는 왕랑이 지니고 있던 문서들을 거두어들였는데, 유수 휘하 관리와 백성들이 왕랑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그를 비방하고 헐뜯은 내용이 수천에 달했다. 유수는 이 문서들을 열어보지 않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문서를 전부 불태우면서 말했다.
"반측했던 자들은 이제 안심하도록 하라."

3.2. 동마적 토벌

왕랑을 정벌했다는 소식을 들은 경시제는 시어사 황당(黃黨)을 보내 유수를 소왕(蕭王)에 봉하고, 조서를 내려 거느리고 있는 모든 군대를 철폐하고 행재소[17]로 오라 명했다. 당연히 이를 들을 리 없던 유수는 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지만 유수가 이렇게 나와도 경시제는 그의 죄를 물어 정벌할 수도 없었다. 경시제의 정치가 문란하여 사방에서 현한 정권을 대상으로 사방에서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시제는 하는 수 없이 묘증(苗曾)을 유주목, 위순(韋順)을 상곡태수, 채충(蔡充)을 어양태수로 삼아 하북으로 보내고, 이런 때를 대비해 보내놓은 사궁에게도 유수를 감시케 하였다.

이때 동마적 수십만 무리가 청양(淸陽), 박평(博平)을 약탈하였다. 유수는 동마적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면서 오한을 대장군에 삼아 지절을 내려 북쪽 10개의 군(郡)에서 돌기병들을 더 징집해오라 명하고, 경엄에게도 상곡과 어양군의 병력을 더 징집해오게 하였다. 오한은 방해하려던 유주목 묘증을 거침없이 베어버렸고, 경엄도 위순과 채충을 붙잡아 참수하고 병력을 징발해 청양에서 유수와 합류했다. 유수는 군사를 나눠 청양의 동마적은 등우에게, 박평의 동마적은 요기에게 맡겨놓고, 본인은 교(鄡)로 이동해 또다른 동마적 무리와 싸워 격파했다. 등우도 청양의 동마적을 격파하고 그 대장을 사로잡아 유수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요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요기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박평성 아래에서 동마적과 크게 싸웠으나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다급해진 요기는 배수진을 쳐 장수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독려했지만 그럴 수록 점점 궁지에 몰렸고 죽거나 다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를 본 유수는 서둘러 요기를 구원하기 위해 박평으로 가 동마적과 대치했다. 유수군과 대치하게 된 동마적들은 수시로 싸움을 걸어왔지만, 유수는 군영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기만 하다가, 도적들이 부대를 보내 인근 지역을 노략질하려 하면 군대를 보내 노략질하는 자들의 뒤를 쳐 격파했다. 결국, 도적들은 약탈도, 제대로된 싸움도 못한 채 허송세월 시간만 허비하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야밤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유수는 요기를 구원하고 그와 군세를 합쳐 도망치는 동마를 추격했다. 동마적은 관도(館陶) 이르러 추격군을 떨쳐내려고 군대를 돌려 유수군과 맞섰지만, 이미 도망치기 시작한 이상 사기는 이전만도 못해 유수에게 대패했고 항복한 이들이 매우 많았다.

항복하기를 거부한 나머지 동마적들은 포양산(蒲陽山)으로 들어가 유수에게 저항하려 하였다. 때마침 또다른 하북의 도적떼 고호(高湖)와 중련(重連)이 동마를 도우러 내려와 세력을 합쳤다. 유수는 친히 경엄, 오한, 요기 등 여러 장수들을 지휘해 포양산을 점령해버리고, 동마 연합군을 격파해 그 거수(渠帥)들을 사로잡았다. 우두머리를 잃은 도적 무리는 곧바로 유수에게 항복을 하니, 그 무리가 무려 수십만이나 되었다. 유수는 항복한 거수들을 열후에 봉하고, 그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최대한 배려해주자 동마적 무리가 감격하며 진심으로 복종했다. 유수는 이들을 여러 부대로 나누고 휘하 제장들에게 배속시켜 이끌게 하였다. 이로 인해 관서 지방에서는 유수를 가리켜 동마제(銅馬帝)라고 불렀다.

뒤이어 유수는 서남쪽으로 내려가 하내군 사견(射犬)에서 노략질하던 청독(靑犢), 적미(赤眉)[18], 대동(大彤), 철경(鐵脛) 등 10만여 명의 도적떼 연합 무리를 공격해 처절한 접전 끝에 모두 전멸시켰다. 그리고 더 내려가 하내군을 순시하니, 현한의 하내태수 한흠(韓歆)이 하내군을 들어 항복했다. 유수는 한흠이 처음에 자신에게 저항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해 그를 처형하기 위해 중군(中軍)의 북 아래에 매달아 두었으나, 잠팽의 만류로 그를 살려주고 등우의 군사(軍師)로 배속시켰다.

3.3. 상서령 사궁 제거

유수와 상서령 사궁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한단에 있을 때도 서로 진영을 나누어 주둔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랑을 공격할 때도 번번이 이기지 못해 유수에게 큰 도움이 안되었다. 심지어 사궁의 비장은 자신의 상관만 믿고 지역을 약탈까지 한데다, 사궁 본인도 유수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유수는 사궁이 무척 못마땅해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유수는 사궁의 눈을 피해 사궁을 따라온 장수 마무를 은근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사궁과 만날 때마다 좋은 말로 그를 칭찬하니 사궁의 날선 경계심도 시간에 지남에 따라 점차 느슨해졌다. 사궁의 부인이 남편에게 이르길, "당신은 절대로 유수와 갈 수 없으니 주의하라" 일렀으나 사궁은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간이 지나면서 유수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진 사궁이 자신의 수만 대군을 이끌고 한단을 떠나 업(鄴)에 주둔하려 했다. 이때는 유수도 사견(射犬)에 주둔해 있는 도적 무리를 정벌하기 위해 한단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유수가 사궁에게 말했다.
"저는 사견에서 도적들을 쫓아 반드시 격파시키겠습니다. 그리하면 산양(山陽)에 머물고 있는 우래적(尤來賊)은 놀라 분명 도망칠 것입니다. 만약 군(君)의 위력으로 도망쳐오는 이들을 쳐 흩으려 버린다면, 필히 그 도적들을 사로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궁은 알았다 답하고는 업에 도착해 도적들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유수가 마침내 사견에서 청독적을 무찌르니, 과연 유수의 말대로 산양에 있던 우래가 유수를 피해서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척후로부터 보고를 받은 사궁은 대장군 유경(劉慶)과 위군태수 진강(陳康)을 남겨 업을 치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장수들과 도망치는 도적들을 융려산(隆慮山)까지 추격하였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도적들이 산을 끼고 필사적으로 항전하자 사궁은 끝내 대패해 병력 수 천을 잃었다.

하내에 주둔해 있던 유수는 사궁이 업을 비운 때를 노려 오한과 잠팽을 보내 업을 공격하도록 했다.오한은 말 잘하는 이를 뽑아 진강을 설득하게 하니, 진강은 사궁과 유경의 가족들을 전부 사로잡고 성을 들어 투항했다. 융려에서 막 패전한 사궁은 경황이 없어 진강의 배신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오한이 무방비하게 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궁의 목을 베어버리고 미리 숨겨놓은 복병을 일으키자 지휘관을 잃은 사궁의 병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유수는 내부에서 경시제의 세력을 전부 추축해버리고 아직 토벌되지 않은 도적들을 공격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3.4. 하북을 평정하다

등우에게 6명의 비장을 붙여 서쪽으로 가 관중으로 가게 하고, 풍이를 맹진(孟津)으로 보내 낙양성에 주둔해 있는 현한군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유수는 현한이 적미의 습격을 받아 하북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을 기회로 삼아 조(趙), 대(代), 연(燕) 땅을 확실히 정벌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당시 낙양에는 무음왕 이일, 대사마 주유, 백호공 진교(陳僑), 하남태수 무발(武勃) 등이 호왈 30만에 달하는 강대한 병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수는 자신이 주력을 거느리고 북진하면 낙양에서 현한군이 올라와 하내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관중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등우를 잠시 불러 하내를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 지 묻자, 등우는 편장군 구순을 적극 추천하였다. 유수는 등우의 말을 신뢰하여 구순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내군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주력을 거느리고 북으로 떠났다. 전장군 등우는 유수와 함께 가다가 하내군 야왕(野王)에서 정예병 2만을 이끌고 유수와 헤어져 관중으로 진격했다.

경시 3년(25년), 북쪽으로 올라간 유수는 도적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군하였다. 조(趙) 땅인 상산군 원씨(元氏)에서 우래, 대창, 오번을 차례대로 격파하였고,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하여 중산국 북평(北平)에서 그들과 다시 여러 번 싸워 크게 무찔렀다. 도적들이 도망치기를 멈추지 않자, 유수는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북쪽에서 적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연이은 추격 끝에 사지에 몰린 도적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고, 계속된 추격전에 지쳐있던 유수의 군사들은 처음으로 대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에 달했다. 도적들은 유수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쫓았다. 유수는 그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낭떠러지에 뛰어들었다가 구르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졌으나, 우연히 그 아래를 지나던 일반 기병 왕풍(王豐)이 그를 부축하고 자신의 말을 유수에게 주었다. 이후 대장군 경엄을 만나서 그의 호위 받은 덕에 적들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 도적들은 해가 질 때까지 추격하다가 날이 어두워져 돌아갔고, 겨우 도망친 유수는 범양(范陽)에서 패잔병을 수습하였다.

순수전투에서의 패배로 뭇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하자, 오한이 나서서 이들을 격려했다. 유수의 무리들은 진정하여 며칠 만에 유수는 기세를 회복하고 언제 졌냐는 듯 순식간에 군대를 재정비하여 다시 도적들을 추격해 들어갔다. 유수는 안차(安次)에서 도적들과 수 차례 교전하여 연속으로 격파하고 적병 3천여 명을 참수했다. 피폐해진 도적들은 노략질로 보급하고자 어양으로 들어갔다. 유수는 진준의 계책에 따라, 보루와 성벽이 있는 마을에는 명령을 내려 굳게 지키게 하고, 들에 있는 곡식들은 모두 거두어 들이도록 했다. 이윽고 취할 것이 없어진 도적들은 식량이 떨어졌고 제 풀에 지쳐 수많은 자들이 도적단을 빠져나와 해산하였다.

북동쪽으로 진군하여 계(薊)에 주둔한 유수는 오한을 대장으로 삼아 경엄, 마무, 진준 등 13명의 장수를 파견해 끝까지 항거하는 우래 등의 무리를 계속 추격하도록 명했다. 오한 등은 로수(潞水) 동쪽에서 평곡(平谷)까지 도적들을 몰아넣고 두 번의 전투를 벌여 1만 3천여 명을 참하였다. 그리고 도망가는 잔당들을 쫓아 무종(無終)과 토은(土垠)까지 추격하다가 다시 군사를 돌려 귀환하였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잔당들은 흉노, 오환,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몰살당하면서 소멸하였다.

4. 천하통일

4.1. 황제 즉위

경시 3년(25년), 구순과 풍이가 하내군 온현(溫縣)을 침공한 현한군을 크게 물리쳤다. 유수는 계에서 승전보를 받았는데, 제장들이 모두 이를 축하하며 유수에게 존호를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유수는 그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중산국으로 이동하였다. 유수의 군대가 중산국에 이르자 장수들이 다시 상주하였다.
"한나라가 왕망을 만나 종묘가 폐절되고 호걸들은 분노하여 억만 명의 사람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왕께서는 백승(伯升)[19]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셔서 경시(更始)를 제위에 앉혀 대통(大統)을 봉승하셨으나, 그 무리들로 인해 기강이 문란해지고 도적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처음 곤양을 정벌하자 왕망은 스스로 무너졌고 이후 한단을 뽑고 각궁을 들어 북주(北州)를 정벌하셨으니, 천하를 나누면 2개의 세력만 있고 주(州)를 가로질러 땅을 차지하면 병사만 백만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고, 문덕(文德)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들은 제왕이 오래 가서는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천명은 겸허히 거절한다고 하여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왕께서는 부디 사직과 만성(萬姓)의 마음을 헤아려주소서."
유수는 또 거절하고 남평자(南平棘)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들이 다시 존호를 사용할 것을 간곡히 청했다. 이에 유수가 대답했다.
"도적들이 아직 평정된 것도 아니고 사면이 적들로 가득하거늘, 내 어찌 존호를 탐해 제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제장들은 그만 포기하도록 하라."
경순이 말했다.
"천하의 사대부들이 자신의 친족과 토지를 버리고 오로지 대왕만을 바라보며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계략을 내어 용린을 따라 올라가고 봉황의 날개를 펼쳐 그 뜻을 이루는 데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그들의 공업(功業)이 결정되며 천하의 사람들도 마땅히 응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지금 대왕께서는 시간을 끌고 대중의 뜻을 거스르며 존호의 사용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순(純)은 사대부들의 바램이 좌절되어 대왕을 떠날까봐 두려운 마음에 스스로 매일같이 괴로워하고 있습입니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다시 결합시키란 무척 어렵습니다. 시간은 머무르지 않고,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임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경순의 말은 진실되어 유수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내 장차 생각해보겠네."

유수는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호현(鄗縣)에 도착했다. 강화(彊華)는 유수가 장안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와 같은 방을 썼던 인물인데, 그는 예언서 《적복부(赤伏符)》 를 쓰면서 그 내용 중 아래 문구를 추가했다.
"유수가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道)에 따르길 거부하니, 곧 용들이 내려와 들판을 두고 다툴 것이며 사칠(四七)이 지날 즈음에 온 천하가 불에 휩싸일 것이다."
군신들은 유수가 평소 도참을 좋아함을 알고 해당 예언서를 근거로 유수가 칭제를 권했다. 결국 유수도 칭제를 결심하고 사람을 시켜 호현 남쪽에 제단을 쌓은 후, 그 해 6월 22일에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하늘과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였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호현의 명칭을 고읍(高邑)현으로 개명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황제가 된 것이 만 30세 때였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창업군주가 이 나이에 제업을 이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같은 유씨 한나라를 봐도 고제 유방이 40대에 제위에 올랐고, 소열제 유비는 60세에 제위에 올랐으니,[20] 고대 사회에서도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21]

참고로 적미군도 같은 달에 전한의 성양경왕 유장의 후손 중 유분자를 찾아내 그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다.[22]

4.2. 현한의 멸망

유수가 황제에 오를 때, 관중을 향해 이동했던 전장군 등우는 하동군 안읍(安邑)을 5개월 동안 포위하고 있었다. 현한의 대장군 번참(樊參)이 대양(大陽)에서 황하를 건너 안읍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해오니, 등우는 별동대로 해(解) 남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번참을 잡아 참수하였다. 하지만 이내 현한의 왕광이 장수 성단(成旦), 유균(劉均)과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는 바람에 등우의 전세가 매우 불리해졌다. 왕광의 군대가 안읍에 도착하고 그 다음 날, 총사령관인 왕광과 군의 수뇌부들은 그 날이 하필 60갑자라 운세가 좋지 않다며 출병하지 않은 덕분에 등우는 군대를 신속히 정돈하고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을 때, 왕광 등은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쳐둔 등우가 왕광의 군대를 대파하고 추격해 유균과 현한의 하동태수 양보(楊寶)를 참수하였다. 대패한 왕광은 군대를 모두 잃고 장안으로 도주했다.

건무 원년(25년) 7월, 전장군 등우를 대사도, 야왕현령 왕량(王梁)을 대사공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장군 오한은 대사마, 대장군 경엄은 건위대장군, 편장군 갑연(蓋延)은 호아대장군, 편장군 주우(朱祐)는 건의대장군, 중견장군 두무는 대장군에 임명했다. 등우는 계속해서 진격해 아(衙)에서 현한의 좌보도위 공승흡(公乘歙)의 10만 대군을 대파하였다. 등우가 장안을 압박하는 사이, 광무제는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우선 낙양 동쪽 경(京), 밀(密)에서 염신장군(厭新將軍)을 자칭하며 10만여 무리를 거느리던 가까운 친족 유무(劉茂)를 공격했다. 표기대장군 경단, 건위대장군 경엄, 강노장군 진준이 공격해오자 유무는 바로 항복을 선언했고 광무제는 그를 중산왕에 봉했다. 이후 광무제는 회(懷)에 행차해 경엄과 진준을 오사진(五社津)에 주둔시키고, 대사마 오한을 대장으로 하여 주우, 잠팽, 가복 등 11명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낙양을 포위하도록 했다. 이에 현한의 늠구왕 전립(田立)이 낙양을 빠져나와 항복해왔다.

동년 9월, 낙양을 지키던 현한의 대사마 주유는 배신하려는 무음왕 이일을 처단하고 여러 장수들과 굳게 성을 지켰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병사들의 동요는 심해져만 갔고 성을 지키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옛 부하 잠팽이 투항을 권유했지만 주유는 예전에 광무제의 형 유연을 죽음으로 몰아간 일을 마음에 담아두며 거절했다. 잠팽이 광무제에게로 가 이 일을 보고하니, 광무제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하는 자는 작은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소. 만약 주유가 지금 투항한다면 벼슬과 작위를 내릴 것이거늘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마침 하수(河水)가 여기에 있으니, 하수에 두고 맹세하겠네. 나는 한번 약속한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주유는 날랜 기병들과 함께 잠팽의 안내를 받아 광무제의 진영으로 갔다. 광무제는 주유의 포박을 손수 풀어주고 다시 낙양성에 돌려보내자, 성 안에 대기하던 전 병력이 나와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주유는 약속대로 평적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주유가 낙양을 바치고 투항할 무렵, 적미군이 등우보다 먼저 장안성을 함락시키고, 유현은 사로잡았다. 유현은 유분자에게 인새와 인수를 바치니 현한은 3년도 안돼서 멸망하고 만다. 적미군은 폐제 유현을 그대로 죽이고자 했지만[23] 식후 유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장사왕에 책봉된다. 그러나 관중 지역의 민심이 적미가 아닌 유현에게 있는 것을 우려한 적미의 좌대사마 사록(謝祿)이 유현으로 하여금 목 매어 자살하게 했다.

4.3. 군웅할거의 대혼란기

10월 10일, 광무제는 낙양성 남궁(南宮)에 입궁하고 낙양을 한나라의 도읍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위 잠팽에게 군사를 주어 형주(荊州)의 군벌과 도적들을 정벌하도록 명했다.

동년 11월, 현한이 무너지고 경시제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대륙은 동, 서, 남쪽에 군벌들이 들고 일어났다. 예주 양국(梁國)을 점거하고 장수 교강(佼彊), 주건(周建)을 초빙해 세력을 기르던 현한의 양왕이었던 유영(劉永)이 천자를 자칭했다. 현한의 중랑장 조희(趙熹)는 경시제의 가족과 잔당을 데리고 현한의 완왕(宛王) 유사에게로 가니, 그 세력 또한 무시 못했다. 그외에도 파촉의 공손술이 황제를 칭했고, 이헌(李憲)과 진풍(秦豊)은 스스로 각각 회남왕, 초려왕을 자칭했으며, 외효도 양주(凉州)를 점거하고 서주(西州)상장군을 칭했다. 또, 이들보다 세력이 작으나 그렇다고 결코 얕볼 수 없는 낭야국의 장보(張步), 동해군의 동헌(董憲), 한중군의 연잠(延岑), 이릉현의 전융(田戎) 등이 모두 군벌이 되어 제각기 할거하고 있었다. 도적의 무리도 만만치 않았는데,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군은 물론, 오루(五樓), 획삭(獲索), 대동(大彤), 상강(上江), 오교(五校), 청독(淸犢), 오번(五幡), 단향(檀鄕) 등 신나라 말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도적 세력들이 아직 건재하였다. 어양태수 팽총처럼 오한과 갑연 등이 자신보다 출세했음에 분노해 연왕을 자칭하며 광무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세력도 있었다. 광무제는 이전처럼 스스로 나서기보단 제장들에게 군대를 주어 그들에게 토벌을 맡기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건무 2년(26년), 대사마 오한이 업 동쪽 장수(漳水)에서 단향적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10만여 명이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유현의 사망 소식을 접한 현한의 복한장군 등엽(鄧曄)과 보한장군 우광(于匡)도 자신들의 영지를 들어 한나라에 귀순했다. 그 와중에 장안을 차지한 적미군은 한나라 황릉을 도굴하고 불을 질러 초토화시킨 뒤, 장안을 버리고 서쪽으로 가 양주 등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유수는 대사도 등우를 장안으로 보내 전한 11황제의 신주를 받들어 모셨고, 경시제 유현의 시신을 수습하여 패릉(霸陵)에서 장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부인 곽 씨를 황후로 삼고,[24] 그 아들인 유강(劉彊)을 황태자로 삼은 뒤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 해 4월, 현한의 완왕 유사와 언왕 윤존(尹尊)이 완성, 언성을 들어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광무제는 유사와 윤존, 경시제의 자녀들을 모두 열후에 봉하고, 호아대장군 갑연에게 항복하지 않는 양국의 유영(劉永)을 치게 했다. 이때 주유와 함께 투항했던 현한의 장수 소무가 회양태수 반건을 죽이고 유영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25], 대략 4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갑연이 수양을 함락시겼다. 근거지를 잃은 유영은 초현(譙縣)으로 도주한 뒤, 부하들인 소무, 교강(佼彊), 주건(周建)의 3만 군과 합류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갑연에게 패현(沛縣)에서 또 패배하였다. 이에 유영, 교강, 주건은 호릉(湖陵)으로, 소무는 광낙으로 도주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광무제가 강세를 자랑하던 유영을 크게 격파하자, 장보[26]를 포함해 청주와 서주의 여러 도적들이 두려워하며 유수에게 항복했다.

동년 8월, 동흔(董訢)은 도향(堵鄕), 허한(許邯)은 행(杏)에서 거병하자, 광무제는 대사마 오한에게 군사를 주어 이들을 평정하도록 명했다. 오한은 열양(涅陽), 역(酈), 양(穰), 신야(新野)를 모두 함락시키며 반란군을 격파하나, 문제는 오한이 그가 지나는 곳마다 약탈을 하면서 발생했다. 파로장군 등봉(鄧奉)이 유수를 알현하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고향인 신야(新野)에 들렀다가 오한의 군대가 약탈하는 광경을 보고 극대노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등우는 곧바로 약탈 중이던 오한의 군대를 쳐부순 뒤, 물자를 빼앗고 육양을 점거한 뒤, 동흔을 비롯한 여러 반군과 힘을 합쳤다. 그 무렵, 광무제는 의양(羛陽)으로 친정하여 오교적을 대파하고 5만여 명을 항복시켰다.

11월, 수도로 돌아온 광무제는 때마침 허한 토벌을 마친 잠팽에게 등봉 토벌을 명하고 정남대장군에 임명했다. 등봉은 군을 이끌고 동흔의 병력과 합류해 토벌군과 맞섰는데 이들이 예상외로 정예라 잠팽은 벌써 수 개월째 난을 진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다. 더이상 잠팽에게만 맡길 수 없다 판단한 광무제는 친정에 나섰다. 광무제는 잠팽의 군대와 합류해 엽(葉)에서 길을 막고있던 동흔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마침내 도향(堵鄕)에 이르자, 등봉은 광무제가 친정했다는 소식만 듣고도 두려워 밤을 틈타 육양으로 도망쳤다. 도향에 홀로 남겨진 동흔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광무제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등봉은 다시 육양까지 버려가며 도망치지만, 광무제가 끈질기게 추격한 결과 소장안에서 따라잡혔다. 등봉은 죽기살기로 추격군을 떨쳐내기 위해 소장안에서 군사를 돌려 영격하려 했지만 광무제에게 격파당했다. 등봉을 사로잡은 유수는 그를 참수하고[27] 낙양으로 돌아가면서 잠팽에게 병사 3만을 주어 남군(南郡)의 군벌 진풍을 정벌하게 했다.

이후 광무제는 대사도 등우가 관중에서 적미군을 상대로 고전함을 알고 풍이를 서쪽으로 보내 등우를 돕게 하고, 태중대부 복륭(伏隆)은 동쪽으로 보내 청주와 서주 두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일전에 투항했던 청주의 장보를 불러들여 그를 동래태수로 삼아 가까이 두려 했다.[28]

건무 3년(27년), 적미는 관중과 장안을 약탈로 초토화하고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풍이가 이들과 화음(華陰)에서 마주쳐 60여일에 걸쳐 싸운 끝에 적미를 격파했다. 오랜만에 서쪽 방면의 승전보를 들은 유수는 기뻐하며 풍이를 정서대장군으로 삼자, 대사도 등우가 공로가 없음 부끄러워하며 풍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무리하게 몰아붙여 적미를 공격했다. 결국, 등우는 적미군의 책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기병 24기만 거느린 채 의양으로 도주, 풍이는 말이 지쳐 쓰러져 회계성(回溪城)까지 발로 뛰어가야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등우는 자청하여 패전의 책임을 모두 지고 우장군에 강등되었고, 등우 대신 서부전선을 전담하게 된 풍이는 적미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다가 효저(崤底)에서 크게 이겼다.

적미의 잔당들은 동쪽으로 도망쳐 의양으로 향하지만, 광무제는 이미 그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해 대군을 이끌고 그곳에 주둔해 있었다. 이를 본 적미군은 크게 좌절하여 식후 유공을 보내 항복의사를 밝힌다. 당시 적미의 잔당들은 자신들이 몰살당할 것이라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본인들이 장안에 들어서면서 광무제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전한의 황릉들을 도굴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상의 무덤이 털렸다는 것은 후손 입장에서는 대단한 치욕이었고 적미들 입장에서는 조상들의 무덤을 도굴한 자기들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대인배스럽게 이들의 간부급이었던 번숭 등을 죽이고, 옹립된 황제였던 유분자를 포함한 나머지 일당들은 모두 용서받았다.

양왕 유영을 토벌하던 갑연과 오한에게서도 승전보가 이어졌다. 비록 난이 일어나 수양성의 사람들이 유영을 영접하면서 수양은 다시 유영의 손에 넘어갔으나, 갑연이 달려가 금세 수양을 탈환하고 유영의 수급을 손에 넣었다. 오한도 유영의 장수 소무와 주건은 대파시켜 광낙을 차지하였다. 주건과 소무, 그리고 남은 잔당들은 유영의 아들 유우(劉紆)를 옹립해 동헌과 연합했다.

건무 4년(28년) 2월, 우장군 등우가 무당(武當)을 침공한 연잠을 무찔렀다.[29] 광무제는 업(鄴)에 행차하여 대사마 오한을 거록군 임평(臨平)으로 보내 도적단 오교를 패주시켰다. 그리고 정로장군 채준을 보내 팽총에게 호응한 탁군의 장풍을 토벌하게 한 후, 장풍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팽총은 흉노와 연합해 반격했지만 상곡태수 경황의 아들이자 건위대장군 경엄의 동생인 경서에게 패퇴하였다.

동년 7월, 갑연과 평적장군 방맹(龐萌)을 보내 동헌을 토벌하게 하였다. 갑연은 기(蘄)에서 소무, 주건을 격파하고, 나아가 유성(留城) 아래에서 해서왕 동헌과 교전해 승리하였다. 난릉(蘭陵)을 지키던 동헌의 장수 분휴(賁休)가 광무제에게 투항하고 동헌에게 반기를 들자, 동헌은 군대를 거느리고 난릉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갑연과 방맹에게 조서를 내려 동헌의 근거지인 담성(郯城)을 치면 난릉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라 했지만, 갑연은 조서를 무시하고 난릉성을 곧바로 구원하러 갔다가 되려 동헌에게 말려 패배하였다. 동헌은 난릉을 함락하고 분휴를 잡아 죽인 뒤, 담성으로 돌아갔다. 패배한 갑연은 적지인 팽성, 담, 비(邳)를 오가며 동헌의 장수들을 상대로 유격전만 펼쳤는데 이게 어느정도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광무제는 기뻐하지 않고 갑연이 적을 가벼이 여겨 함부로 드나든다 생각해 여러 번 조서를 내려 이를 경계하게끔 하였다. 갑연이 광무제로부터 받은 이런 조서의 내용들을 방맹과 일체 공유하지 않으니, 부장인 방맹은 갑연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건무 5년(29년) 정월, 잠팽은 그동안 진풍의 근거지인 여구(黎丘)를 포위하고 수 차례 교전해 전부 격파하였다. 광무제는 친히 여구로 행차해 잠팽의 포위망을 점검하고, 진풍의 힘이 미약해졌다 판단하여 주우로 하여금 잠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잠팽에게는 이릉으로 가 이릉의 군벌 전융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동년 2월, 어양에서 연왕을 자칭했던 팽총이 경엄에게 패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팽총은 아무도 믿지 못해 그가 거주하는 궁 안에는 일꾼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이에 노복 자밀(子密)을 비롯한 3명이 침실에서 자고 있는 팽총을 묶고 협박해 팽총의 처를 침실 안으로 부르게 하였다. 그들은 칼로 협박하면서 처로 하여금 금과 각종 패물을 모아오게 하고, 팽총에게는 광무제에게 편지를 쓰게 하였다. 이윽고 밤이 되자, 노복들은 팽총과 그 처의 목을 베고 수급과 함께 보물들을 챙겨 성을 빠져나와 광무제에게 진상했다. 팽총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니, 그 잔당들도 성문을 열고 경엄의 군대를 영접하였다. 광무제는 주인을 배반한 자밀을 불의후(不義侯)에 봉했다.

그 해 6월, 방맹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결국 초군태수 손맹(孫萌)을 죽이고는 동평왕(東平王)을 자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방맹은 갑연의 부대를 기습하여 그를 격파했고, 갑연은 사수(泗水)를 건너서야 겨우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후 방맹은 유우와 연합해 갑연에게 대항하였다. 갑연은 패잔병을 어떻게든 수습해 방맹과 맞서보았으나, 싸우는 족족 방맹에게 패하기만 했다. 광무제는 방맹의 반란에 크게 노하여 친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광무제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도성(桃城)에 들어갔는데, 방맹과 소무가 먼저 달려와 도성을 20여일 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뒤이어 광무제가 부른 오한, 마무 등의 군대가 도성에 도착했고 광무제가 성에서 나오면서 앞뒤로 적을 협공해 간단히 격파하니, 방맹과 소무 등은 동헌에게로 도망쳤다. 동헌은 대군을 일으켜 광무제와 맞섰으나, 건양(建陽)에서 광무제에게 3일 만에 패배해 근거지인 담성으로 도주했다. 광무제는 승세를 몰아 팽성(彭城)과 합비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오한을 따로 보내 담성도 함락시켰다. 동헌과 방맹은 구성(朐城)에 들어가 쫓아온 오한에게 항전하였다. 한편, 동헌이 패망한 후 어디로 도망쳐야할 지 갈팡질팡하던 유우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그 해 10월, 그동안의 조정의 부름에 핑계를 대며 미루기만 하던 장보가 아예 광무제가 보낸 복륭을 살해하고 제왕(齊王)을 자칭했다. 건위대장군 경엄이 진준과 함께 장보를 토벌하러 가고 있었으나, 이들 무리가 수십 만이나 된다는 보고를 들은 광무제는 걱정이 되어 친히 노국(魯國)으로 구원군을 거느리고 갔다. 하지만 광무제의 걱정이 무색하게 경엄은 장보의 대군을 깔끔하게 격파하니, 뒤늦게 임치에서 경엄과 만난 광무제는 그의 공을 크게 칭찬하였다. 유우가 죽고 나서도 무리를 거느리던 소무가 장보를 돕기 위해 1만여 군과 함께 왔으나 이미 투항을 결심한 장보는 소무의 목을 베어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광무제는 장보를 안구후로 봉하고 수도 낙양에 살게 하였다. 이 무렵 서쪽의 군벌 외효도 내흡마원의 권유로 자신의 장남을 인질로 보내고 귀순했다.[30]

건무 6년(30년) 정월, 광무제는 자신이 거병한 장소인 용릉향(舂陵鄉)을 장릉현(章陵縣)으로 격상시켜, 대대로 요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오한도 구성을 함락시키고 유우, 동헌, 방맹의 목과 함께 수도로 귀환하였고, 회남왕을 자칭하던 이헌은 광무제가 보낸 군대에게 서(舒) 땅을 빼앗기고 도주하다가 부하 백의에게 피살되며 세력이 소멸하였다. 건의대장군 주우 또한 여구를 점령하고 진풍을 수도로 압송하고 전융은 잠팽에게 패해 공손술에게 투항하면서 대륙에 정벌되지 않은 세력은 촉의 공손술, 농(隴)의 외효, 흉노가 세운 괴뢰황제 노방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신하들은 노방이 막강한 흉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당장 토벌이 어려웠으니 제쳐두고, 농과 촉 이 두 지방만이라도 하루 속히 토벌해야 한다고 간했으나, 광무제는 "중원은 이미 평정된 지 오래이니, 그들은 이제 문제시될 게 없소(度外視)"라며 느긋하게 대처하였다. '도외시(度外視)'는 이러한 광무제의 말에서 유래된 단어.[31]

4.4. 농과 촉을 평정하다

건무 6년(30년) 5월, 광무제는 재차 외효에게 공손술을 토벌하자 권유했지만 외효가 응하지 않았다. 이에 광무제는 군대를 장안에 집중시키고 농도(隴道)에 경엄 등 일곱 명의 장수를 배치시켰다. 외효는 광무제의 행동에 위협을 느껴 반란을 선포하고 장수 왕원(王元)을 보내 농도에 있는 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광무제는 경엄은 칠(漆), 채준은 견(汧), 서정대장군 풍이는 순읍(栒邑)에 배치시켜 각자의 위치를 지키게 한 뒤, 대사마 오한에게 패잔병과 나머지 장수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건무 9년(33년), 거듭된 투항 권유에도 끝까지 불복하며 광무제에게 맞섰던 외효는 2년간 중랑장 내흡과 풍이, 갑연 등의 거듭된 토벌 작전으로 자신의 세력 대부분을 잃고 기성(冀城)에 포위당했다. 외효는 먹을 쌀도 없어 구비(糗糒)[32]를 씹어 먹다가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분사하였다. 외효의 부하들은 그의 아들인 외순을 옹립해 끝까지 저항하나, 건무 10년(34년) 10월에 성문이 무너지고 외순은 광무제에게 항복한다. 외효의 세력이 없어지면서 서강족들이 난을 일으키지만 내흡, 갑연, 마원이 강족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농 지역을 안정시키니, 남은 세력은 촉 땅의 공손술 하나만 남게 된다.

건무 11년(35년), 지역에서 성나라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하고 있던 공손술을 격파하기 전에, 낙양의 후한 황궁에는 아직 황제의 집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광무제는 집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성도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촉 지역의 중심지[33]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으니 공손술을 격파하고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다. 이때 유수가 한 말이 득롱망촉(得隴望蜀). '농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라는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범인들에게나 해당될 뿐 정작 고사성어 장본인인 광무제는 바로 이듬해인 건무 12년(36년) 음력 11월 19일에 공손술이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실상 전사하고 오한이 성도를 점령하면서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34] 다만, 대사마 오한이 항복한 연잠 등 항장들을 죽이고 성도를 불태우며 터무니 없는 대학살극을 벌인 탓에 뒷수습을 해야되긴 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하남, 강회, 관중, 동해, 형초, 파촉 순으로 제패하여, 거병한지 10여 년 만에 각지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5. 천하통일 이후

5.1. 문치로의 전환

건무 13년(37년) 4월, 익주를 평정한 대사마 오한이 수도 낙양으로 개선하여 돌아왔다. 광무제는 공식적으로 천하가 통일되었음을 선포하고 낙양에서 축제를 크게 열었다. 또, 천하통일을 기념으로 공신 365명의 식읍을 늘려주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밀후 등우, 고시후 이통, 교동후 가복은 전쟁을 자제하며 문치로 전환하려는 광무제의 뜻을 눈치채고 각자 자신이 거느리던 부대를 해산시킨 후, 스스로 장군의 인수를 반납하였다. 광무제는 이들의 인수를 수거하였으나 정치적인 안건이 생길 때마다 조정으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광무제의 정책 방향은 공신들을 관직에 기용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천하통일 후에도 반란을 진압하고 다녔던 대사마 오한이나 북방 국경 지대에서 흉노와 싸우는 장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신들이 자신의 관직을 내려놓고 봉조청(奉朝請)이 되어 행사나 의례가 있을 때에만 조정에 참석하였다. 이리하여 공신들은 비리나 범죄를 저지르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토사구팽 당하는 일 없이 천수를 누리거나 병에 걸려 자연스럽게 사망하였다.

5.2. 업적 - 광무중흥(건무성세)

한나라를 재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전한과 후한의 사회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국가에서 민간에 할당하던 부역의 양도 크게 줄었고, 징병제이던 군사제도 역시 모병제로 바뀌었다.

광무제는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전한 말엽 이후 무너진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소에는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운용해,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다. 광무제는 조세를 기존의 1/3 수준으로 감면해 주었는데 이러한 감세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둔전 시행으로 병사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다. 또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 뒤, 건무 15년(39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국가통치와 재정 기반을 확립했다.

관료 체계 역시 여러 직책이 폐지되고 간소화되었다.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의 삼공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었다. 실무상에서는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尙書)가 중용되었으며 재정 기관의 재편성으로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키거나, 대사농 직속이었던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관인 염관(鹽官), 철관(鐵官)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

또 후한 사회는 전한 시기보다 유가적인 분위기가 강해진 모습도 보여준다. 당장 광무제부터가 본디 태학을 다니던 태학생이었기에 태학을 설치했고, 노비 해방령을 여러 차례 내리며, 노비를 함부로 살해하는 것을 금했고, 매인법과 약인법을 발표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기도 했다. 건무 11년(A.D 35년)에는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性、人爲貴)'는 문구로 시작하는 조칙을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했다. 또한 군국제를 채용하면서도 봉읍은 전한에 비해 줄어들었다.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을 후로 봉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도 몇 개 현만을 봉해줄 뿐이었다.

또 왕망이 화폐 제도를 혼란으로 밀어넣은 바람에 후한 초기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나, 건무 16년(A.D 40년)에는 과거 한무제 이후의 오수전 주조가 다시 시작되어 화폐 제도도 정비되었다.

동쪽으로는 낙랑군을 다시 한나라의 수중에 넣었고 서쪽으로는 마원을 시켜 강족을 제압하여 천수, 농서 지역에 정착하게 했다. 남쪽으로는 역시 마원을 시켜 교지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농업을 진흥시키며 현지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북으로는 당시 분열되던 흉노 중 남흉노의 귀순을 받아내고 이민족들의 복종을 받아 내어 사방을 안정시켰다. 또 왕망의 신나라가 고구려를 후로 낮추어서 충돌했었는데 광무제는 고구려대무신왕(서기 32년) 시기에 고구려에게 다시 왕호를 부여했다.

5.3. 사망

유수는 말년에 이르러 풍습과 현기증에 걸려 57년(건무중원 2년) 2월, 재위한 지 33년 만에 63세를 일기로 낙양 남궁(南宮) 전전(前殿)에서 붕어했다. 3월에 원릉(原陵,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철사촌 부근)에 안장됐다.


[1] 출생에 관련하여 경제 유계가 어느날 밤 황후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 했는데 하필 황후가 생리 기간이어서 당희라는 궁녀로 대신했다고 한다. 겨우 하룻밤인데 별일 없겠지 하고 정을 통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2] 양력으로 계산할 시, 기원전 5년 1월 15일에 해당.[3] 후한척이 당시 1척에 약 23.7cm였을 것으로 추정될 때 7척 3촌은 오늘날로 볼 때 약 173cm 정도이다.[4] 일각(日角)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관상학적으로 '일각'은 이마의 정중앙 즉 미간부터 이마의 중앙이 튀어올라온 형태를 의미한다.[5] 원래 까투리(암꿩)와 장끼가 한 쌍으로 있었고, 암꿩을 잡으면 천하의 패권을 잡고, 숫꿩을 잡으면 왕이나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양공이 암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니 나중에 양공의 후손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고, 남양 근처의 사람들이 숫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니 후에 그 지방의 황족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열국지》에도 잠시 나온다.[6] 전한의 마지막 용릉후인 강후 유창의 아들로, 전한이 안 망했다면 마땅히 용릉후가 될 인물이었다. 이후 현한에서 용릉후, 정도왕에 봉해졌으나, 독립적인 세력을 일군 적이 없이 내내 광무제 유수에게 충성했고, 현한 멸망 이후 광무제로부터 성양왕에 봉해졌다.[7] 다만 유흠도 듣보잡 인물은 아니다. '《설원》'이라는 책을 쓴 유향의 아들로, 《칠략(七略)》 편찬으로 도가 사상을 비판하여 학문적으로는 나름 업적을 남겼다.[8] 이때는 아직 지도자는 아니었고 형 유연의 부하였다.[9] 신나라는 여섯 개의 수(隊)를 설치하고 각 수마다 대부를 두었는데 한나라의 태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남양군에는 전수(前隊), 하내군에는 후수(後隊), 영천군에는 좌수(左隊), 홍농군에는 우수(右隊), 하동군에는 조수(兆隊), 형양군에는 기수(祈隊) 이렇게 총 여섯 개다.[10] 남양군 육양현에 위치해 있으며 소장안취라고도 불린다.[11] 다행히도 아들 등범은 화를 면했고 후한 창립 이후까지 살아남아 어머니의 제사를 지냈다.[12] 실제 성명은 장우(莊尤)이지만, 후한 명제의 휘 장(莊)을 피휘해 보통 이렇게 기록되었다.[13] 후한서 광무제기에서는 43만을 주장하지만, 후한 대의 저작들에서는 3만, 혹은 5,6만으로 차이가 굉장히 크다. 후대에 과장된 결과로 보인다.[14] 유수가 곤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완성을 수비하던 잠팽이 성을 들어 유연에게 항복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으나, 유수는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15] 공교롭게도 현한의 왕광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16] 전한 시절의 거록군 일부다. 왕망이 거록군의 일부를 쪼개서 화성군으로 만들었다.[17] 황제가 머무는 곳.[18] 번숭이 이끌던 적미 본군이 아니라 번숭이 하북을 약탈하라고 보낸 별수(別帥)다.[19] 유연의 자(字)[20] 애시당초 고제는 거병 당시의 나이 자체가 불혹 정도의 나이로 그 이전에는 그 나이까지 동네 말단 관직에 머무르던 양아치에 불과했으며 거병하고 나서 고작 3년만에 한왕, 7년만에 한나라의 황제 자리에 오른 경우였다. 소열제 유비는 유수와 비슷한 20대 젊은 시절에 황건적의 난이라는 난세를 기점으로 일어났지만 출신 자체가 변변치 않았기에 수십년을 생고생과 유랑으로 보내다가 인생 말년에서야 창업에 성공한다. 광무제는 소열제와 비슷한 나이대에 거병해 고제와 비슷한 시간 안에 통일제국의 황제가 된 셈이다.[21] 항우는 25세에 천하의 패자가 되기는 했으나 5년만에 망해버렸다. 이후 여러 창업군주들은 대부분 인생의 후반기에 천하를 얻는다. 비교적 젊은 축에 황제가 된 주원장도 40세에 황제에 등극했다.[22] 광무제를 의식한 것은 아니고 군내에 있던 한 무당이 황제를 옹립해야 한다 주장했는데, 이를 비웃던 자들이 병들어 죽으면서 군이 크게 동요하였다. 번숭은 이를 진정시키고자 전한의 식후 유맹의 아들들을 찾아 그 중 하나를 옹립한 것.[23] 언왕 윤준이나 원지왕 유흡과 같이 유현이 임명한 여러 현한의 제후와 장수들이 각 지역에서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상태라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유현의 제후들은 바로 다음 해에 모두 유수에게 투항하거나 각개격파 당한다.[24] 곽 황후의 외삼촌인 진정왕 유양은 자신이 제위에 오를 거라는 가짜 예언서를 짓고 반란을 모의하다 경순에게 죽임을 당한다. 상세 내용은 경순 문서 참고.[25] 소무가 항복하자 유영은 그에게 대사마 겸 회양왕 작위를 수여했다. 그리고 소무는 수양 동쪽에 위치한 광낙현(廣樂縣)을 점령하고 갑연군을 방해했다.[26] 낭야국에서 거병한 도적으로 유현의 임명을 받고 온 낭야태수 왕굉을 쫓아낸 뒤 자신이 청주(중국)를 집어삼켰다.[27] 애초에 오한의 잘못 역시 크고, 등봉 또한 초창기부터 자신을 따르던 공신이다보니 유수는 용서해주려 했으나, 잠팽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결국 참수한다.[28]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동마적, 청독적, 우래거 등 광무제에게 토벌되고 남은 잔당들이 손등(孫登)을 황제로 옹립했지만, 도적 무리 중 낙현(樂玄)이라는 자가 손등의 목을 벤 뒤 5만 명과 함께 유수에게 항복했다.[29] 등우에게 패한 연잠은 잔당을 이끌고 성가의 공손술에게 투항한다. 그의 최후에 관해서는 공손술 문서 참고.[30] 참고로 마원 이때 외효에게 청해 광무제 휘하로 들어갔다.[31] 참고로 2014년 11월 16일 도전 골든벨의 마지막 문제이기도 했다.[32] 콩, 잡곡과 쌀가루를 섞어서 말린 전투식량으로 고대 중국의 건빵이라 보면 된다.[33] 현재 쓰촨성청두로, 성도(省都)이기도 하다. 다만 공손술 치세 시기에는 파동 지역인 백제성 일대 역시 인근 형주 등 장강 이북-이남 지역과의 교류로 매우 중시되고 번영했다고 한다.[34] 이걸 실패한 예로는 한중을 얻고도 유엽사마의의 간언을 씹었다가 촉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재정비한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긴 조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