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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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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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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대성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 이야기거리를 별도의 문서로 분리하였다.

2. 내용

구대성이 평가하는 한/미/일 야구
* 다만 처음에만 쉬웠고, 타자들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똑같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image3.inews24.com/1459853051867_1_194510.jpg

[1] 구대성은 고등학생때 연세대와 고려대 야구부를 제외하고는 경남대 야구부 정도만 알았다고 한다. 친형이 경남대 야구부였기 때문.[2] 사실 막 프로에 발을 붙인 신인치고 이정도면 나름 괜찮은 성적이지만 쌍방울 구단은 창단 초부터 해체까지 늘 재정악화가 심해서 정말 필요한 선수만 남기고는 쳐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3] 게다가 구대성은 폭력을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으로, 학번만 선배지 본인보다 늦게 태어난 정민태가 한양대학교 야구부의 폭력을 근절했다는 이유로 '형'이라고 부를 정도다.[4] 실제로 이순철은 1961년생이지만 고교 시절 1년 유급한 전력이 있어 빠른 1963년생인 선동열과 친구 사이다. 반대로 양상문은 1년 조기입학해서 1960년생들과 동기.[5] 실제로 박진만은 1976년생이지만 인천고 시절 부상으로 1년 유급해 1977년생들과 같이 졸업했는데, 정상적으로 졸업한 1976년생 이승엽과 말을 놓고 지낸다.[6] 그들의 고등학교 때는 다른 야구부와 달리 나이 군기를 잡는 야구부라 유급해도 동갑에게 존대말을 강요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만수가 부상으로 1년 유급한 케이스.[7] 스톡킹에 나온 이야기로는 신일고와의 연습 경기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감독이 직접 올라와서 물어봤다고.[8] 발언지는 엠스플에서 자체제작한 엠스플 텔레비전.[9] 스톡킹에 나와서 해명한 영상을 보면 기본적인 데이터는 투수들도 다 보고 들어가는데 어제 직구가 좋았다고 오늘도 좋으라는 법도 없고, 본인의 컨디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면이 더 큰 듯 하다.(상대방이 직구에 강하다고 해도 오늘 내가 직구가 더 공이 좋다면 직구 위주로 간다는 소리)[10] 마찬가지로 스톡킹에서 해명한 영상을 보면, 여름에 파카를 입고 몸을 푼 이유는 구대성이 중무리라서(...) 급하면 6회부터 애니콜로 실전투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몸을 빨리 풀기 위해서였고, 겨울에 반팔을 입은 건 원래 더위를 잘 타서.[11] 강병철 감독은 본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이동수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한방이 있었던 선수였다고 언급하면서, 바로 승부붙었다가 홈런을 얻어맞았다고 술회하였다.[12] 이후 2002년 사직구장에서 롯데 김응국이 삼성 김진웅을 상대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후 KBO에서 20**년 현재까지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은 이 사례들이 유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13] 오랫동안 1만엔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21년 스톡킹에 출연한 봉중근의 후일담에 따르면 10배 높은 10만엔으로 밝혀졌다. 봉중근이 자신이 하겠다고 했는데 구대성이 125km는 맞아도 아프지도 않다고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봉중근은 구위가 떨어져서 그날 경기에 불펜 투수로 나와서 니시오카 츠요시한테 큰 타구를 맞았으나 이진영의 다이빙캐치로 기사회생하였다. 그런데 똑같이 스톡킹에 출연한 구대성 본인은 1만엔이라고 밝히고 있다.[14] 이치로의 ‘30년 망언’ 사건(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그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몸에 맞는 공을 세 번이나 맞은 것(조인성, 이종범*2)과 관련된 일인데, 결국 배영수가 이치로에게 빈볼을 꽂아버렸다. 배영수가 '선배님,(승부도 박빙인데) 맞히면 어찌합니까'라고 하니 구대성은 '뒷처리는 내가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영상을 보면 맞추고 내려오는 배영수, 투수 교체를 위해 올라오는 선동열 투수코치, 교체되어 올라오는 구대성도 웃고 있다. 한일전에서 지고 있는데도 빈볼을 맞추고 웃고 있는 세 사람의 비범한 멘탈을 느낄 수 있다.[15] 이는 후에 본인이 빈볼지시를 내렸었다고 고백했다. 왜 빈볼 지시를 내렸냐면 전 타석에서 사인 훔치기가 의심된데다 김동수가 한양대 시절 꼬장꼬장한 선배라 얄미워서 그랬다고 한다. 정작 구대성은 안영명이 초구에 맞힐 줄 알았는데 그 공이 뒤로 빠지고, 또 다시 공이 빠지자 안 맞히겠지 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난리가 나자 후배를 보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시키고, 그후로 늦게 그라운드에 나왔다.[16] 이때 안영명은 김동수로부터 바로 그 전설의 싸다구를 맞았다. 이게 어느 정도로 임팩트가 컸냐면 해외 용병들도 한화 입단하기 전부터 안영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이 영상을 봤었다고.[17] 양준혁은 진행자가 정민태를 묻자 "마 정민태는 내한테 밥이었지"라고 자신있게 웃으며 말했다.[18] 유튜브방송 스톡킹, 박재홍의 빵카페 등에서 언급했다.[19] 구대성이 2021년 발간한 본인의 자서전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참고로 두 선수는 프로입단 후 줄곧 다른 팀에서 뛰었지만, 대학시절에는 국가대표팀에서 함께 활약했었다.[20] 한국시리즈 연장전인데 고의로 힛바이피치를 던졌다고 보긴 어렵고, 포수의 위치를 봐서는 몸쪽 공이 미스가 난 걸로 보인다.[21] 스톡킹에서 나온 이야기에 의하면 저장된 번호가 10개 남짓이라고 한다.[22] 좋은 멤버를 갖추고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던 한양대가 구대성이 입학하자마자 대학야구 최강팀이 되었다. 실제로 유튜브에 업로드된 구대성의 한양대 1학년(1989년) 시절 투구영상을 보면, 이 말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23] 당시 선수협에 기부한 선수는 회장인 송진우, 부회장인 양준혁과 일본에 진출한 구대성, 정민철, 미국에 있던 이상훈 뿐이었다.[24] 6경기 모두 선발등판 없이 구원으로만 등판.[25] 11월 5일.[26] 반테린 돔 나고야.[27] 1차전 당시 일본타선은 이종범니시 토시히사에토 아키라마쓰이 히데키오가타 고이치나카무라 노리히로이시이 타쿠로마쓰이 가즈오 등으로 구성된 정예타선이었다.[28] 단, 이 경기는 한국시리즈 종료(10월 29일) 단 8일 후에 펼쳐진 경기였는데, 당시 구대성은 우승 기념행사나 방송출연 등으로 피로 누적+훈련 부족이 겹친 상태에서 등판했음을 감안해야 한다.[29] 영상에서는 1995년 한일 슈퍼게임이라고 표시되었지만, 잘못된 정보이다. 1999년 한일 슈퍼게임 1차전 당시 일본팀 덕아웃에 있었던 선동열도 일본팀 코칭스태프가 구대성의 투구 버릇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직접 들었고, 후일 선동열 본인이 (2003년에 일본 현지 코치연수하는 과정에서) 1999년 당시 일화를 국내 스포츠지에 회상 형식으로 게재한 적이 있다.[30] 그리고 2019년 1월 19일, 질롱 코리아의 경기 중 3회에 등판해서 진짜 50세 넘어서도 현역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1] 빚맞거나 선상으로 빠진 타구도 아니고, 정확한 타이밍에, 배트의 스위스스폿에 맞춰서 풀스윙으로 갈겼고, 중견수 뒤쪽 펜스까지 공이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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