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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라마 <태조 왕건> 주인공 궁예에 대한 여담을 다룬 문서.2. 여담
이 배역을 위해서 김영철은 실제로 삭발을 했다. 공주시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에서 삭발식까지 가졌다. 관련 영상.젊은 시절, 각간 김위홍[1]에게 "이보시오, 김위홍 각간 나으리. 나는 당신 같은 숙부는 없소이다."라고 딱 잘라 말할 때와 이후 강 장자를 "잔 받으란 말이오!!" 하면서 일갈하는 장면은 그의 매력적인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종간에게는 유일무이하게 황제가 되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내원이라고 호칭할 때는 사적으로 사형이라고 부르는 자리에서든 존댓말을 쓴다. 그러면서도 종간과 은부까지 물고 늘어지는 왕건은 종간이나 은부 못지 않게 신뢰하는 인간미도 보여준다. 여러모로 봤을 때 종간이나 왕건과는 애증이 많은 관계라 볼 수 있다. 극 중에서 궁예는 종간과 사이 좋게 지내길 바랬고, 종간은 궁예에게 끝까지 왕건을 제거하게끔 간언했는데, 궁예는 황후 처형 이후 왕건에게 관심법을 쓰면서도 끝까지 그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이 황제를 '미치광이', '광인'이라고 신랄히 비판하며, 반란을 도모하기 시작하고, 왕건을 새로운 군주로 추대하고 염상과 원극유까지 포섭하면서 조직적으로 도모하는 식으로 반란이 진행된다. 그와중에도 종간과 은부는 왕건을 제거하기 위해 고경참문을 이용해 왕건을 제거하려 했지만 궁예의 명을 받고 고경참문의 뜻을 해석해오라던 학자들은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짓으로 보고하면서 왕건을 제거할 최후의 기회 조차 놓치고 만다. 게다가 반란은 꽤나 치밀하게 진행돼서[2] 종간과 은부가 손을 쓰지도 못하게 되고, 궁예가 왕건을 시중으로 재임명하고 함께 술을 마신 뒤 왕건은 홍유 등의 추대를 받아 진짜로 황궁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119화에서 보게 되면 왕건이 술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습니다, 형님 폐하,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있겠습니까..."라며 독백하는 것과 궁예가 왕건의 반란을 보고 받고 나서도 믿지 못하며 "이보게, 은부장.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겐가? 그 아우가 왜 반란을 해! 왜...!" 이러면서 절규하는 것도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처음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자기 부인과 자식들까지 죽이는 와중에도 왕건에게는 처음부터 항상 너그러웠고 그를 정말로 친형제처럼 여길 정도로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다. "내 곁에 누가 있겠는가. 아우밖에 없어"(118화)라고 토로할 정도로 때로는 평생을 함께 해 온 사형 종간보다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정도다. 심지어 사실상의 후계자로서 생각한다는 의견조차 기탄없이 드러낸 적도 많았으며, 37화에서는 의형제 관계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인 본인이 먼저 왕건에게 자신의 잔을 건네주어 술을 내리고, 왕건이 대취하여 갑옷이 술에 젖자 본인의 용포를 직접 입혀서는 황제의 침전으로 데려와 자신의 침상에 눕혀 재우기까지 했다[3] 물론 후반에 들어 왕건과 마찰을 빚기도 하고 기록에서와 같이 관심법을 쓰기도 하나, 단 한 번도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 든 적도, 총애와 애정을 거둔 적도 없었다. 죽기 직전에 말하길 아우가 자신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왕건을 매우 신뢰했으며, 관심법을 쓰던 그 때도 실제로는 왕건을 죽일 마음이 없었을 뿐더러 왕건이 반역에 연루되지도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왕건으로 하여금 스스로 모반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재확인하고자 왕건에게도 관심법을 쓴 것이다. 왕건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잘 따라 주자 곧바로 모반을 용서한다고 공표한 뒤 왕건을 흐뭇하게 바라본 이유이기도 하다. 118화에서 왕건과 단둘이 술을 마시면서 '처음부터 아우를 어찌해보려는 생각은 없었네'라고 말하거나[4] 120화에 죽기 전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었다 하면서도 그러지 않았다며 이런 점을 재확인 시켜줬다.
김영철의 신들린 듯한 열연으로 인하여 미화된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작중 궁예의 중반부 이후 묘사는 최후를 맞이하는 부분을 빼면 미화와는 거리가 완전히 멀다. 후반부 궁예를 요약하자면, 국력 비축과 민생 안정에 대한 개념은 하나도 없이 무조건 대규모 지출과 군사 정벌과 화려함만 추구하며, 신라와 후백제를 그저 쉽게 멸망시킬 수 있는 호구로 보고 있으며,[5] 무작정 군사만 이끌고 나가면 북벌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보급, 전략 계획도 전혀 없고, 자신은 무조건 옳고 신하들과 백성들을 무조건 폭력과 엄벌, 공포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사람 생명을 파리 죽이듯이 너무나 가볍게 여기며, 간언을 듣기는 커녕 오히려 간언을 하는 사람을 협박하거나 때려 죽이며,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살인으로 처리하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묘사된다. 즉, 미화된 캐릭터이기는커녕 오히려 빨리 왕좌에서 쫓겨나 죽어 주는게 도움이 되는 미치광이 살인마 폭군으로 묘사될 뿐이다. 또한 궁예의 폭정에 대해 내레이션은 '비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큼 과장이 있겠으나, 분명 궁예가 변한 것은 확실하다'고 표현했다. 즉, 기록상 표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궁예가 초심을 잃어버린건 맞다는 것이다. 작중에서도 최응이 왕건에 의한 역성혁명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에 종간에게 초심을 잃은 폐하는 군주로서 부적절해졌다고 일침을 놓는 바 있다. 또한 훗날 최응은 병으로 죽기 직전 글로서 유언을 남기는데, 여기서도 궁예가 과욕을 부리다 결국 있던 것도 지키지 못했음을 언급하였다.
궁예는 초창기 및 타락 이전에는 야망과 이성과 꿈이 적개심과 분노와 욕망[6] 억누르고 있는 만큼, 도움이 된다면 신라계 출신도 받아들였지만,[7] 타락하여 이성이 날아갔을 땐 그 적개심이 우선으로 발현이 되었는지 신라에서 투항한 사람들을 무작정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실 타락하기 이전에도 그 트라우마가 엄청나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긴 한데, 가령 42화 및 43화에 궁예가 부석사에서 경문왕의 초상화를 보고는 "대왕은 무슨 대왕!"이라고 분노하며 초상화에 칼빵을 놓고 신라를 멸도라 칭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궁예의 성격 변화처럼 문서 맨 위의 사진처럼 안대와 승복의 재질도 바뀌는데, 처음에는 낡은 삼베로 감은 가죽 안대와 낡은 승복 차림이었는데, 27화에서 정식으로 고려국을 선포할 때 종간의 권유에 따라 깨끗한 가죽 안대와 검은 승복으로[8] 바뀌었다. 이후 77화에서 철원 천도를 마쳤을 때 아지태의 귄유에 따라 금을 씌운 안대와 금색 승복으로 바뀐다. 삼베 안대는 흰색과 갈색 두 종류를 번갈아가며 썼다.[9] 원래 삼베 안대도 기획 단계에서는 가죽 안대였는데, 처음 소품을 받아본 김영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낡은 헝겊을 감아 만들었다고 한다. 김영철에 따르면 안대를 바꿀때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또, 김영철은 연기를 위해 안대를 쓰고 있는 시간이 굉장히 길어져서 결국 안대를 차지 않은 한 쪽 눈의 시력이 2.0에서 무려 0.2까지 떨어지는 부동시를 겪었다고 한다. 한 번 떨어지면 회복이 매우 어려운 시력 특성상 현재 시점까지 회복되지 않은 모양. 그나마 0.2에서 0.5로 미약하게나마 회복된 듯. 한편 촬영 당시에도 중년의 나이였기 때문에 본래 시력이 굉장히 좋았던 듯 하다.
작중 궁예의 마지막 남은 혈육이 된 갓난 아기 순백은 강비를 모시던 궁녀가 몰래 숨겨 돌봤지만 열병에 걸려서 결국 그 존재가 드러난다. 복지겸은 평소 부드러운 성격과 달리 냉정하게 후환을 끊자고 진언하나 왕건은 아기를 살려주고, 궁녀에게는 계속 순백을 돌봐주라고 한다.[10] 훗날 성장한 순백은 고려의 관리로 일한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의 강렬한 연기 덕분에 김영철은 야인시대에서 장년 김두한 역할로 캐스팅되어 이환경 작가와의 인연을 한번 더 이어가게 된다. 야인시대 마지막회 막바지에 말년의 김두한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불상 앞에서 지난날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불공을 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석가모니를 자신의 자리를 훔친 도둑이라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묘한 장면이다.
김영철은 이 배역을 통해서 2000년에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17년 후인 2017년에 아버지가 이상해의 변한수[11] 역으로 한 번 더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12]
김영철은 2019년에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 이성계를 맡으면서 궁예가 이성계로 환생해서 자신을 죽인 왕건의 고려를 멸망시켰다는 배우개그가 성사됐다. 이후 태종 이방원에서도 이성계를 맡았다.[13] 사실 태조 이전에 대왕 세종과 장영실에서 이방원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이방원도 고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지분이 있는 인물이다.
애초에 궁예는 태조 왕건 전 156화 중에서 80화까지 출연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궁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궁예의 출연 분량이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80화에서 100화로 연장되더니 이후에도 110화, 120화까지 늘어났다. 김영철의 당시 인터뷰를 보면 궁예의 최후가 가까워진 시점에서 김영철 본인도 110화까지 출연하고 궁예가 최후를 맞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에 KBS가 편집 신공을 발휘하여 궁예의 생명을 120화까지 늘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미뤄보대 촬영은 110화까지만 찍었지만 분량을 어거지로 늘려 120화까지 나오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연료는 당연히 120화 분량만큼 받은 듯. 당시에는 130회까지 가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
원래 김영철의 출연료는 최수종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KBS 본부는 궁예의 출연 분량을 100화까지 늘리기로 결정했고, 이에 김영철은 대신 출연료를 좀 올려달라고 요구하여 30% 정도 출연료가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궁예의 출연 분량은 계속 늘어 120화까지 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최수종과 같은 수준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2020년 2월 라디오 스타.
김영철은 자신의 이름을 딴 다큐인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 궁예가 어린 시절에 머물며 무예를 연마했다는 경기도 안성시의 칠장사를 직접 방문해 벽화를 본 적이 있고, 나레이션에서도 '짐은 미륵이니라'를 시전했다. 이 에피소드를 본 사람들은 전생 추적이라는 평을 남겼다.
2000년 KBS 연기대상을 수상한 당일(2000년 12월 31일)에도 태조 왕건(80회)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도 이 화에서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가 등장했다.
3. 궁예와 미륵신앙
궁예 파트 중, 후반부에 잔혹하면서도 똘기어린 장면들이 워낙 많다 보니 궁예가 주장하는 생미륵 = 자신이 '참미륵'이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성격파탄자이자,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최악의 미치광이 마구니라는 후반부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궁예의 미륵신앙에 대한 인식 및 활용방식, 그리고 '미륵'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의미는 작중 전개에 따라서 많은 변천을 겪었다. 크게는 궁예가 '미륵'을 수단으로 이용하던 초기와, 스스로를 미륵과 동일시 하던 후기로 나뉜다.3.1. 출사~기훤 휘하 시절
출사 당시 궁예는 범교에게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칭하긴 했으나, 맥락상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기 보단, '세상과 백성들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할 영웅호걸이 되겠다.'에 가깝다. 궁예가 부처들은 세상을 구하려 하지 않고 절간이나 산중에 숨어있다고 언급하는 부분에서, '미륵 부처'는 세상을 구할 능력이 있는 영웅호걸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후 궁예는 기훤 휘하에서는 선행을 베풀어서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생미륵이라고 칭송받긴 했으나, 오히려 궁예는 이를 과찬이라고 겸손을 표했다.[14] 이때 궁예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더 나아가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야망과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에 가까웠고, 이는 이후에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자칭 '참미륵과'는 거리가 멀었다.3.2. 양길 휘하 시절~김순식의 귀순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기 시작했으나, 이 때 미륵신앙은 그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세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궁예의 그릇을 평가하던 허월이 이를 대놓고 지적하자, 궁예는 변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게 나쁜 행동이냐며 당당하게 밝혔다. 그 직후 허월이 궁예 스스로 미륵이라 생각하냐고 묻자, 궁예는 세상을 구할 수 있으면 누구나 미륵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드라마 전반부의 왕건이 갖고 있는 미륵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석총이 미륵의 증표인 간자를 건네주었을 때, 군사 태평은 그것이 반역으로 비칠 수 있음을 우려하였으나 왕건은 '참미륵'이라는 칭호를 그저 난세와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보편타당한 조언으로 해석했다.다만 그 시점에서 궁예의 미륵론은 위에서 설명된 '세상을 구제할 영웅'에서 '유일무이한 절대권력의 신'으로 변질되어 있었기에 왕건은 태평에게 설명하면서 "폐하와 내가 생각하는 미륵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
3.3. 철원성 함락~비뇌성 전투
종간에 의해 신격화가 진행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 궁예는 미륵의 이름을 쓰는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에서 '나는 미륵이요.'라고 칭하는 정도. 오히려 법회 때는 호족들에게 미륵을 곧 만민이 평등한 세계라고 칭하는 등 미륵을 이상향의 의미로 쓰는 모습도 보였다. 사실 궁예가 미륵 신앙을 이용할 일이 별로 없던 것이 이 때는 국왕으로서의 권력과 위상만으로도 백성과 호족들을 통치할 수 있었고, 또한 호족들도 국가 정책을 잘 따라주는 편이었다. 굳이 신격화까지 끌어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3.4. 비뇌성 전투~미향의 죽음
양길이 처형당한 이후엔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의 현생으로 믿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미향의 죽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등, 미륵의 초월적인 모습과 인간의 모습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고, 궁예 스스로도 자신을 '인간의 육신을 가진 미륵'이라고 평가했다.3.5. 경문왕의 초상화 사건 ~궁예 암살 미수 사건
부석사의 경문왕의 초상화 사건으로 궁예는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고 뒤이어 아지태를 만나 그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궁예는 북벌을 망상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궁예가 표방하는 미륵도 엇나가기 시작한다. 자애로우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는 미륵이 아닌, 굳건한 권력을 가지고, 잘잘못을 철저하게 가리며, 관심법 같은 초능력을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윽고 궁예는 '나는 미륵이기 때문에, 필멸자들은 무조건 나의 명령을 따라야한다'는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또한 선정을 펼치고 모범을 보였기에 백성들이 미륵이라 칭송했던 것을 잊고, 자신은 도를 깨달았기에 미륵이 되었다고 망상하게 된다. 과도한 전쟁과 수도 이전으로 인해 불만이 이 곳 저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억누르고자 미륵신앙이 본격적으로 이용된다.3.6. 철원천도~태봉국 멸망
궁예 파트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와 조소의 대상이 된 부분으로, 똘기어린 네타성 장면으로 유명한 부분이다. 독화살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맛이 간 궁예는, 자신이 미륵이라는 것과, 북벌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스스로 도를 깨우쳐 '미륵'이 된 사람이 겨우 질병 하나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독주를 퍼마시던 궁예는 자신을 거짓 미륵이라 비웃는 석총의 환영을 보기까지 한다. 이 때의 궁예는 자신이 참미륵이라는 망상에 빠진 정신이상자이자 사람을 철퇴로 다스리는 살인마에 불과했다. 궁예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제정상이 아니다보니 자기의 합리화 및 일종의 발광의 의미로 "나는 미륵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여담으로 궁예가 양길과 미향에게 계속적으로 동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종간은 궁예가 미륵을 벗어나 자꾸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려고 한다며 우려한 적이 있었다. 종간이 바라던 미륵은 '선정을 펼치는 명군이되, 사사로운 동정심이나 인간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대업을 중시하는 굳건한 임금'이라고 볼 수 있다. 독화살 사건 이후 궁예는 동정심이나 이해심, 감정이입 같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거짓 미륵이 되었고,[15] 자비와 인간의 감정이 없는 거짓 미륵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마구니가 되었다.
[1] 이때 김위홍 역할은 김주영이 연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8년 뒤 대왕 세종에선 김영철이 연기한 태종의 의제 이숙번으로 나온다.[2] 실제로 내군에 있었던 염상이 내군의 장일까지 포섭해서 군의 이동 상태까지 감춘다.[3] 왕권이 약하건 크건 이 정도의 대우는 거의 받은 적이 없거나, 있어도 기록에 적힐만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총애한다는 증거 그 자체다.[4] 궁예가 털어놓은 속내에 따르면 이는 서열을 재확인한다기보다는 왕건을 의심하는 신료들과 내외세력들에게 더는 이 사람을 걸고 넘어지며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고 선언한다는 의미가 컸다. 이미 한번 모반하려다가 들켰으니 왕건이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엄두도 못 낼 것이고, 왕건을 향한 자신의 신뢰 또한 그걸 용서할 정도로 강하니 허튼 수작 말라는 대외적 인증이었던 셈.[5] 후백제의 견훤은 왕건도 몇 차례 완패할만큼 뛰어난 지휘관인데다 한때는 고려를 상대로 주도권을 쥘 정도였다. 신라는 비록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그 견훤이 세 차례 시도 끝에 대야성을 간신히 점령할만큼 백제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등 마냥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왕에 올라 무기력하게 있다 항복한 걸로 인식이 강한 경순왕도 이전 경애왕보다 더 없는 살림에 필사적으로 백제에 저항하였다. 게다가 '천년의 역사' 때문에 신라에게 우호적인 호족들도 적지 않이 있는 데다 경순왕이 결코 만만한 허수아비라고 볼 수 없음을 깨달은 왕건이 신라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며 평화적으로 항복을 받아내고 흡수하는 유화책을 펼치면서도 혹시라도 강릉으로 신라가 진출할 여지를 대비하였다.[6] 20화에 이에 대한 복선이 나온다. 미친 땡중으로 가장한 허월이 궁예와 술을 마시는데, 이때 허월은 궁예의 숨겨진 분노와 욕망을 언급한다. 물론 당시 성인군자의 모습을 보이는 데다, 그릇도 넓었던 궁예를 마음에 들어한 허월은 명주 지역을 그대로 궁예에게 바쳤다.[7] 가령 극 초반부 에피소드인 13화에선 기훤이 괴산을 공격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고, 신라 출신 관원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나중에 궁예는 그 관원들을 그대로 자리에 놔뒀으면 지역을 통치 하는데 편했을 거라고 한탄한다.[8] 이건 황금 안대를 착용한 뒤에 100화에서 미행을 나갈 때 잠시 착용했다.[9] 방송이나 영화에서는 촬영장 조명과 자연광의 상태에 따라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소품을 여러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궁예가 착용한 황금 곤룡포도 명도와 채도를 달리 해서 12종이나 있었다고 한다.[10] 일단 복지겸이 역성혁명 주요인물 중 한명이고, 궁예 정권의 부흥을 구실로 삼을 반란 세력을 우려하여 이런 냉정한 진언을 내린 것이다. 다만 명령이 내려진 후 복지겸은 살짝 웃는데, 복지겸이 사이코패스도 아닌 이상 아기를 죽이는 짓을 달가워 하지 않았을 테니, 왕건이 자비를 베풀어 한편으로는 그가 잔인한 폭군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심한 모양이다.[11] 여기서는 궁예와는 정반대로 한평생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지만, 남모를 비밀을 간직한 가장 역할을 맡았다. 김영철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연기력이 뛰어난지 엿볼 수 있는 대목.[12] 황금빛 내 인생의 서태수 역을 맡은 천호진과 공동 수상. 참고로 이 수상을 통해 김영철은 종전에 유동근(2014년 KBS 연기대상 수상)이 가지고 있던 연기대상 최고령 수상자의 기록을 갱신했다.[13] 특히 이 드라마에서는 궁예와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패해 나라를 잃고 망국의 군주가 된 신검을 맡은 이광기가 이성계의 최측근 책사인 정도전 역할로 출연해 더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단순한 멸망이 아닌 잘 다루지 않았던 왕씨 몰살까지 직접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 정말로 왕씨에게 철저하게 복수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태조 왕건에서의 최후 장면에서 왕건에게 대업을 이루고 성군이 되라고 격려하는 장면과 대비된다.##[14] 14화에서 그런 묘사가 나온다. 신훤과 원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기훤을 살해하던 당시, 궁예가 종간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이를 듣고선 오히려 겸손해하는 장면이 나온다.[15] 그래서 석총이 궁예한테 처형당할 때, 궁예에게 "거짓 미륵이시어!"라는 저주를 날렸고, 처형 이후 환영으로 나타나 궁예를 향해 "이 거짓 미륵아!"라는 조롱을 수차례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