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37

궁예(태조 왕건)/평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궁예(태조 왕건)
파일:태조 왕건 로고.png
파일:태조 왕건 주인공 아이콘(궁예).png
극중 행적 · 어록 · 평가 · 패러디 · 여담

1. 개요2. 무력3. 비타협적 독선4. 감정 결핍과 이기주의5. 학정6. 막장 가족사7. 판단력8. 경제관념9. 궁예의 북벌10. 작중 인물들의 평가

[clearfix]

1. 개요

드라마 <태조 왕건> 주인공 궁예의 평가를 다룬 문서.

초반의 궁예는 생불과 같은 인품에 임금로서 갖춰야 할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그야말로 완전체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한계점 역시 너무나 뚜렷했다. 주변에 종간, 은부, 왕건 같은 충신들과 유능한 신하들이 보좌해주고 궁예도 그들의 간언을 받아들였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간신 아지태를 총애하게 되면서 그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암살 미수사건 이후로 인간 불신과 더불어 정신병이 겹쳐지면서, 궁예는 살인과 처벌만을 통치수단으로 여기고 민생과 현실을 도외시한 북벌에만 집착하는 광인으로 타락해버린다. 때문에 왕건, 견훤과 달리 작중 궁예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

2. 무력

양길, 견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중 무력 최강자 반열.

설정상 세달사에서 무술 훈련[1]을 받았다고 하며, 덕분에 봉술에 능한 모습을 보인다. 도적 여러명은 그냥 석장으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 무력화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2]

왕륭, 왕건 부자와 같이 서라벌로 가는 도중에 산적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궁예는 왕건의 장군이었던 마사부, 장수장, 자신의 참모였던 종간과 더불어 산적과 싸웠다. 이중에 특히 궁예와 종간, 특히 궁예는 신들렸다는 이야기가 맞을 정도로 뛰어난 무예 솜씨로 지팡이인 석장 하나로 산적들을 제압해 나갔고, 얼마 후 위홍의 명령을 받은 견훤의 군대가 도착해 산적들을 완전히 제압했을 때 궁예의 무예를 본 견훤은 궁예의 무예 솜씨에 매우 놀랐다. 궁예 역시 견훤의 무예 솜씨를 보고 매우 인상깊게 여겼다. 산적들을 완전히 제압한 후 견훤은 궁예에 대해서 석장을 휘두르는 솜씨가 마치 손오공이 여의봉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이후 궁예는 자신의 숙부인 위홍을 찾아가 자신의 어머니의 행방을 묻고 위홍이 자신을 죽일려고 한 것에 앞장을 선 것에 따지기 위해 위홍의 집에 들어갈려다 위홍의 집을 숙위하고 있던 견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데, 견훤과 비등한 무위를 보인다.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견훤은 수백근 청동 화로를 냅다 들어 던지고, 말 두 마리로 끌고 가던 통나무를 맨손으로 뺏어선 추격해 오던 왕건의 병사들을 쳐죽이는 모습을 보여 무력 면에선 양길과 더불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젋은 시절 궁예가 얼마나 육체적으로 강한지 알 수 있다. 이때 궁예와 견훤이 서로 싸웠을때도 서라벌로 가는 길에서 산적들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견훤이 궁예의 무예에 충격을 받은 반면, 궁예는 견훤의 무예에 대해 매우 인상깊다는 표정만 지음으로서 궁예를 매우 좋아했던 드라마 제작진들이 은근히 궁예의 무예가 견훤보다 낫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뉘앙스가 풍기는 면이 있다. 아니면 궁예나 견훤의 무예 솜씨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인데, 단지 궁예가 견훤보다 담력이 더 뛰어나서 궁예가 견훤보다 담담한 표정을 지었을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견훤은 무인이므로 싸움을 잘하는게 당연하지만 무술훈련을 했다고 해도 승려가 저렇게까지 강한게 더욱 놀랍기 때문에 더 충격받은 것일 수도 있다.[3]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둘의 싸움은 무승부였다.

그 밖에도 극초반부에 '弓裔' 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활을 아주 잘 다룬다'라고도 언급된다. 세달사에 제례를 올리기 위해 찾아갔던 어린 왕건이 무술 수련을 받기 위해 봉을 들고 달려가는 승려들을 보며 '무술 수련도 하십니까?'라고 묻자 종간이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 스님은 그 중에서도 활을 아주 잘 쏘십니다'라 답하는 장면이 있으며, 서라벌에서 왕륭, 궁예 일행을 습격한 도적을 물리친 견훤이 궁예와 통성명을 하면서 궁예라는 이름을 듣자 '활을 아주 잘 다룬다는 의미로군요'라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다만 실제로 궁예가 활을 당기는 장면은 1화 철원성 전투 외에는 안 나온다는 건 아이러니한 점이다. 그리고 궁예의 비범하기 그지없는 완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경문왕의 초상화를 보고 격분하여 초상화에 칼을 꽂은 장면이다. 어찌나 세게 꽂았는지 스님 2명이 나섰지만 꿈쩍도 안했으며, 결국 세계관 최강자 중 한명인 왕건이 나서자 그제서야 바로 뽑혔다.[4][5]

하지만 그런 고강한 무예실력을 지닌 것이 무색하게도 궁예 본인이 직접 무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상기된 장면 두 개가 전부다. 게다가 직접 싸우는 장면 이외에도 드라마상에서 본인이 직접 전투를 지휘한 전투는 철원성 공략전 딱 한번 뿐이다. 기훤 밑에 있을 때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고, 양길 휘하에 있던 시절에도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서 무혈입성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전투가 없다. 양길에게서 독립하고 패서지역을 손에 넣어 왕건을 영입한 후부터는 모든 주요 전투를 왕건이 전부 다 지휘하고 이게 역성혁명까지 쭉 이어지기 때문에, 드라마 설정상 궁예의 무력은 최강의 반열에 들어가지만 이게 발휘되는 일이 거의 없다.

3. 비타협적 독선

타락 이전부터 궁예가 가지고 있던 단점 중 하나였다. 궁예는 처음부터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고, 광인이 되기 전에도 궁예의 목표는 여전히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다[6]. 문제는 그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극 초반에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으나, 아지태를 만나고부턴 대제국의 건설만이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라 여기게 되었다. 내실을 튼튼히 다지며 천천히 확장을 진행했다면 문제는 아니었겠는데, 문제는 전쟁[7]을 하느라 재정이 약해진 상황에서 무리한 천도를 하는 등,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계획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많은 이들이 현실을 감안해달라 간언했으나, 궁예는 이러한 간언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아지태의 감언이설만 받아들였다. 오히려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거라며 협박할 정도. 궁예는 제딴에 이 힘든 시기를 참고 견디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그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희생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궁예는 이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고, 남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게 광인이 되기 전 멀쩡하던 시절부터 그런 것이다. 그나마 이때야 아직 정신이 멀쩡하던 시절이라 이른바 극락이라는 목표가 이성과 냉정을 유지시켜 줬지만 광인이 되고 나서는 그 꿈꾸던 극락이 변질됨은 물론 리미터가 해체되었다.

나중엔 최측근인 종간마저 간언을 포기해 버렸고, 박유나 염상이 간언하는 걸 말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종간도 궁예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신인 만큼 보다 못해 여러 차례 간언을 했으나, 궁예는 이를 다 씹었다. 종간이 단순한 신하 A도 아니고, 궁예가 승려 시절부터 따라다닌 최측근이자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다른 사람이 간언해봤자 궁예가 받아들일 리가 없음은 자명했다.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국고가 바닥난 걸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 양반이, 종간이 북벌을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닌 좀만 늦추자는 얘기였음에도 무시하고 무리하게 북벌계획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간언이 아예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궁예의 이런 독선적인 성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간언을 물리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간언하는 자들을 협박하더니, 급기야 자신이 진짜 미륵이며, 석가모니는 가짜 미륵임과 동시에 궁예 자신의 자리를 훔친 도적임을 공표하면서 아예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포장한다.

철원으로 천도한 뒤, 즉 궁예가 미치광이가 된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궁예에게 간언할 엄두조차 못냈으며, 궁예 역시 아무런 상의도 없이 무작정 북벌 계획을 밀어붙인다. 그나마 궁예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던 왕건만이 목숨을 걸고 북벌의 비현실성을 간언할 수 있었으나, 궁예는 이조차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2차 나주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궁예에게 북벌 이전에 궁예 자신의 건강부터 챙기란 간언을 올리지만, 궁예는 만약 왕건이 의형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라는 살벌한 반응만 보인다. 이후 북벌 계획이 진전은 커녕, 예산이 없어서 훈련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임에도 어느 누구도 북벌 계획의 현실을 간언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4. 감정 결핍과 이기주의

(제20화 중, 명주성을 넘길 재목인지 확인하기 위해 궁예와 단 둘이 술을 마시던 중의 허월)
허월 : 그 가슴 깊숙한 곳에 뭘 숨겼는가?
궁예 : 내겐 숨긴 것이 없사옵니다.
허월 : 있어. 그건 욕망과 분노야. 애꾸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어린 날의 그 억울함과 분노. 왕실에서 태어나 왕관과 옥좌를 빼앗겼던 분노. 내 눈은 속이지 못하네. 자네는 다 버리고 다 던졌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불지펴진 욕망과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어. 피끓는 분노 말일세. 아닌가?[8][9]

이 작품 내에서 궁예는 왕건이나 견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매우 불우하고 처절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왕건은 송악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왕륭의 아들로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라났고, 견훤은 이 작품 내에서 유년기가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상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아자개의 아들이었던만큼 적어도 궁핍함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10] 반면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유리걸식하는 매우 불우한 삶을 살다가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궁예에게는 인간적인 감정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후 미륵을 자처하게 되면서 더욱 인간적인 감정을 불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종간이나 왕건을 형제처럼 두면서 심히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냉정한 궁예가 스스로 미륵으로서 인간적인 정을 버리려 하였음에도 결국에는 정을 갈구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캐릭터성을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는 후술하다시피 궁예가 이후 타락하면서 성격이 뒤틀리는 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초반부만 하더라도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과 고통을 같이 인내하는 등 말 그대로 성자와 같은 모습을 보였으나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심기가 악화되고 자신의 야망을 최우선시하고 독선적으로 변해가며 타인의 고통을 고작 어린아이들이 부리는 투정 쯤으로 여기게 된다. 자신을 따라주지 않는 백성, 그리고 자신에게 악담을 퍼부은 강비 등에게 궁예는 "나는 남들에게 잘해줬는데, 남들은 나를 버렸다"는 식으로 전형적인 피해망상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철원으로 도읍을 옳기기 시작한 때부터 궁예의 요구는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인데다 그 목표마저도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신하들조차 궁예를 포기해버렸고 백성들은 폭군을 증오했다. 이러한 사이코패스 같은 면모는 강장자를 하옥할 때나 처형했을 때 따지러 온 강비의 분노를 진짜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옥좌에 앉은 후로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타인이 분노하는 모습을 본 게 그 때가 거의 처음이다시피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부모가 화를 당한 자식의 분노'를 보고 그 분노 자체를 납득을 못해서 저게 왜 저래?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사이코패스를 넘어서 광기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런 광기는 관심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침내는 강비가 셋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 강비와 두 아들을 처형해 버렸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야말로 인간을 초월하려다 인간 이하로 떨어져 버린 역설적인 케이스.[11]

5. 학정

중생들이어, 극락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그대들이 나 미륵에게 동참하여 북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은 성전이다. 성스러운 싸움이다 극락으로 가기 위한 마군이들과의 싸움이다!
저 중원을 우리 미륵의 땅으로 만들 것이니라. 그리하여 세세토록 영원한 부귀와 영화를 그대들에게 상급으로 줄 것이니라.
모두 일어나라! 모두 칼을 들어라! 자신들의 것을 모두 내어 놓아 이 미륵에게 주어라! 나는 그것으로 극락을 만들 것이니라.
들어라, 중생들이어! 먼 길을 가려면 고단한 법이다. 그러나 가야 한다! 내것만 아끼고 지키려고 하면 결국은 그것을 훔치려는 도둑이 생기는 것이다.
너희들의 것을 다 내어 놓고 너희들의 목숨도 다 나에게 맡겨라!
내가... 극락으로 인도 할 것이다....
우린 북으로 간다!!
이 삼한을 통일하고 저 끝없는 대륙에 미륵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미륵의 세계를 말이다!!
태조왕건 83화 궁예의 법회에서의 연설

얼른 보기에는 멋진 연설이지만 차근차근 살펴보면 결국엔 군국주의와 그에 따른 군자금 확보를 목표로 한 증세, 그에 반발하는 백성은 미래를 못 보는 어리석은 이로 규정하는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연설이었다. 전형적인 독재자나 사이비 교주의 모습이다. 결국 참다못한 석총이 나서서 그를 엄하게 꾸짖었지만 궁예는 완고했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철퇴씬으로 처형당하고 만다.

애초에 처음의 궁예는 백성과 같이 평등하게 생활하기도 했고 술과 고기를 멀리 하였으며 항상 마음가짐이 정결했던 정말 살아있는 생불이었다. 그러나 아지태에 의해 그간 억눌렀던 욕심이 눈을 떴고 과거에 따른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목표인 무모한 북벌을 이루기 위해 더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속이고 착취하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궁예가 초반에 불쌍히 여기던 백성들이다. 군자금에 들어가는 세금의 세원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전쟁에 참가하느라 농사 시기를 놓쳐버려 굶주리는 것도 전부 백성이다.

맨 처음 생불이었던 궁예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무리한 전쟁을 자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저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태조 왕건 1화에서 처음 봉기할때 살생은 불행한 것이라며 신라군에게 사신을 보내 다시금 항복을 권하던 어진 모습도[12], 이제는 신라를 멸도의 무리라고 칭하여 신라인이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죽이는 모습으로 변질되었다.[13] 당시 시대에는 사람이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다. 역사에만 보더라도 멸망한 유민들을 받아들인 나라는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멸망한 유민들도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도 매우 귀중한 인적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자신의 과거의 분노에 사로잡혀 잡힌 신라 포로들을 모두 말살하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다. 반면에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멸망한 발해의 왕자인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이 일부가 망명해오자 그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줬고, 수십년 후에는 신라가 사직을 바치자 그대로 고려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왕건이 신라에 적대적인 노선을 타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궁예도 사리분별력이 있었다면 항복한 신라인들을 받아주는 실리와 명분 모두 챙길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는 과거에 대한 피끓는 분노에 사로잡힌 탓에 무조건 없애버려할 존재들로 여긴답시고 오히려 그걸 날려먹는 그야말로 어리석은 판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어불성설인 것이 궁예 본인은 물론 신하백성모두가 애초부터 신라인들이다. 당시에 궁예가 창업을 한 지 불과 십여년에 불과해서 세대가 바뀐 것도 아니고, 후삼국시대 자체부터가 내전이며 실시간으로 전선이 변화하는 와중에 출신 운운하는 것은 정신나간 히스테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준다.

6. 막장 가족사

(제113화 중,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직전의 연화)
연화 : 폐하는 불쌍하신 분이십니다.
궁예 : (꿈틀) 불쌍하다고...내가...?
연화 : 폐하께서는 평생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여인의 지극한 정이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십니다. 오로지 야망만 갖고 살아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불쌍하다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옛날 죽은 북원부인의 일을 기억하옵니다. 그 가엾은 여인은 어찌 죽었습니까? 그 북원부인이 죽을 때 신첩도 그때 이미 제명에 죽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부친에게 버림받은 후로 궁예는 오랜 기간 쫓기는 삶을 살아 왔으며, 이후 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가족의 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을 베푸는 방법을 모르는 궁예는 강비나 미향 같은 부인들에게도 무정한 태도를 보였으며, 오히려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인 승려 시절의 사형 종간이나 의제 왕건을 가까운 가족처럼 대할 정도였다. 자식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서, 쌍둥이 아들이 태어나자 엘리트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하에 바로 강비에게서 자식들을 떼어놓은 다음 어른들조차 견디기 힘든 상당히 엄격한 교육을 시켰는데[14], 태자들의 교육을 담당한 박유[15]조차도 이건 너무 이른 거 아니냐며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쌍둥이 아들이 돌을 넘겼을 때 궁예는 후계자를 최고로 키워야 한다면서 마지막에 그러다 안 되면 버리는 것이고라는 말을 붙이기까지 해서 주변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지게 했다. 그렇다고 자식에 대한 태도가 일관적인 것도 아닌 게 아무리 궁예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해도 궁예는 두 태자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커녕 마치 길가의 개뼈다귀처럼 우습게 여겼으며, 태자들도 부친 궁예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궁예가 태자들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을 때는 궁예가 '이 녀석들이 내 자식이 맞나?'라는 의심을 가졌을 때였다. 오락가락하는, 그리고 후사를 제대로 신경쓰지 않는 태도는 전근대 전제왕조에서 결코 좋은 영향이 끼쳐질 리가 없다.

부인이 많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왕건의 가족사[16], 가족간의 애증과 갈등이 부각된 견훤의 콩가루 가족사와 달리,[17] 궁예의 가족사는 철저하게 비극, 광기, 살인과 엽기 행각, 정신붕괴, 원하지 않는 임신, 아동 학대,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오만 안 좋은 요소들이 판을 치는 개막장 전개를 보여준다. 위에 언급된 대로 주역 궁예가 가족이나 친족들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받은 적도 보인 적도 거의 없는 데다가 독화살 사건 이후론 궁예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 또한 가족 구성원 중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경문왕, 위홍, 양길, 강 장자 등)이 여럿 있다는 점도 막장 가족사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렇다 보니 가족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고 또한 친족과 일족 중에서도 궁예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생모와 유모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궁예 주변 인물들 중에서 제대로 된 가족 역할을 한 인물들은 의제 왕건과 사형 종간,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끝까지 궁예에 대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인 은부와 금대, 그리고 궁예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스승 범교 스님이었다.[18]

7. 판단력

태봉국을 건국할때만 해도, 분명 궁예는 살아있는 부처, 즉 '생불'로 불린만한 면모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지태를 총애하기 시작하고서 부터는 그 총명했던 생불의 면모는 대체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판단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궁예는 지출과 영토확장만 생각할 뿐 나머지에 대해선 하나도 생각 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거칠고 성미 급해보이는 견훤만 해도 무작정 영토 확장만 주장하는 게 아닌, 민생을 챙기고 내실을 다져야 국력이 향상된다는 언급을 종종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궁예의 태봉이 무리한 북벌 계획과 사치로 국력이 피폐해 진 것과 다르게, 견훤의 후백제는 초반 나주 전투 직전에 전쟁준비와 궁궐 건축으로 나주 일대 호족을 쥐어짰던 때와 황실 내부의 갈등을 제외하곤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졌단 이야기가 없다. 고창과 운주에서 대패하였음에도 오히려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과 대등한 전력을 이끌고 나올 정도였다. 또한 외교적인 감각에서도 '어차피 다 우리가 정복할 땅'이라며 고립주의를 고수했던 궁예보다 한 수 위였다[25].

아니, 사실 아지태를 만난 초기에도 그 뛰어난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철원 천도를 위한 공사 작업장에서 종간과 은부가 아지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궁예도 약간 위험할 뻔했고, 주변 신료들인 "백제나 신라의 첩자가 시도한 짓 아니냐"고 의심할 때, 궁예는 "나를 포함하여 고위 대신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경계가 철저한 이곳에 백제나 신라의 첩자가 이렇게 깊숙히 침투한다는 것도 어렵고, 또 정말 첩자라 하더라도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나를 노리는게 맞는데 아지태를 노린 것도 부자연스럽다. 이건 틀림없는 내부의 공작이다"란 정확한 결론을 순식간에 도출해낸다. 이 추리력은 KBS의 유튜브 스트리밍 때도 시청자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는데.. 이 판단력이 정말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도인의 약을 마시고 심통이 나은 뒤로도 흐려진 판단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돌보아야 할 국정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도 종간의 말마따나 아지태와 황후 일만 생각하며, 시중 왕건이 민생 안정을 우선적으로 하는 정책을 준비한 것과 대조적으로, 신라와의 전쟁만 생각한다. 아무래도 도인의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한 부작용 때문인 듯. 이러는 와중에도 평양을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왕건의 계획에 동의하며 아지태를 비판하는 등 총명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나, 법을 엄히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강비를 처형하기도 하고 삼한 통일을 먼저 이룬 뒤 북벌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농번기에. 그것도 박술희가 공을 들여 우호적인 지역으로 만들어둔 상주를 점령하고 신라를 공격할 것이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게 상당한 무리수였는데, 백성들이 당장 먹고 살 식량은 물론 군량미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그 시기에 일할 일손을 줄이는 것이며, 상주는 박술희 덕분에 우호적이었지만 만약 침공을 받을 시 살기 위해서 내키지 않더라도 견훤후백제와 협조적으로 가게 되어 자칫 상주를 후백제에게 넘겨주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설령 견훤과 아자개가 협력을 하지 않더라도 태봉의 군사만으로 상주에 주둔하는 후백제와 아자개의 사병, 눈치를 보던 신라까지 삼면전선으로 상대하는 부담이 생긴다. 당시의 국력으론 감당하기 어려운데, 궁예는 후백제와 신라를 길가에 개뼈다귀처럼 우습게 봤다. 그 와중에 철원으로 무리해서 도읍을 옮겨 국력이 피폐한 상태인데 여력은 생각도 않고 평양으로 천도[26]를 한다는건 도저히 현실성이 없는 판단이다[27]. 더군다나 왕건이 쿠테타를 일으키기 직전에는 "전 백성을 군대로 만들겠다."라고 하는데, 이는 여러 전략전술적 문제는 물론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겠다던 초창기의 이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 무렵의 궁예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능력은 있었으나 그 생각과 판단이 보통 사람들과 지극히 다른 광인이 되어 있었다. 궁예에게 누구보다도 충성을 바쳐온 종간조차 강비 처형 직후 은부에게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네...폐하께서는 실성하셨어."라며 한탄할 정도였다.

8. 경제관념

견훤과 왕건은 검소함을 추구하진 않았지만, 반대로 사치나 무리한 토목공사 등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견훤이 공출로 인해 서남해 호족들에게 반감을 사긴 했지만, 이는 신라 침공을 위한 군비 확충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이 둘과 달리 극단적인 경제관념을 보여주었다.

개국 당시 궁예는 검소함을 크게 강조하였다. 한 예로 38화에서 궁예가 순시를 갔을 때 관리가 화려한 수라를 올리자 크게 분노하며 상을 엎어버리고 남은 음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4첩 이상의 음식을 금하고 다시 차려오라고 했다. 오죽하면 3회에선 종간이 군주의 위엄을 위해서 일부러 사치를 부릴 필요도 있다고 간언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종간이 제시한 사치도 '그럴듯한 궁궐도 세우고 환관과 궁녀도 두시고..' 정도로 당시에는 군주라면 당연히 할 법한 행위였다.

하지만 아지태를 만나고 북벌을 추구하게 되면서, 궁예는 규모의 거대함, 화려함만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의 진행에 있어 국력에 무리가 가는지,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지, 장기적으로 진행이 가능한지는 전혀 생각치 않고 오직 남을 쥐어짜서 자금을 마련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다. 극 중 궁예의 안대가 황금색 안대로 변한 시점부터가 궁예의 타락이 본격화된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9. 궁예의 북벌

북벌을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사람(견훤, 종간 등)들은 궁예나 아지태 외에도 있었으나, 이는 후삼국 통일 이후에 있을 미래를 막연하게 생각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지태를 만난 이후로 궁예는 북벌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 북벌을 국가의 제 1순위 계획으로 정하고, 또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고 심지어 사람들까지 학살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궁예는 야율아보기는 분명 자신과 비슷한 사람일 테고, 언젠가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니 우리가 먼저 밀어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북벌 계획이라는 것은 지극히 허술했으며,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군대 규모만 키우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다 못해 먼저 삼국을 통일하고 기반을 다진 뒤 한반도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것도 아닌, 수많은 전함과 육군을 이용해 북방에 상륙한 다음, 점령한 영토를 약탈해 그 것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한다는 방식이었다. 그걸 계획한 아지태도 체계적인 인물이 아니다 보니 북벌 계획이 정상적인 의미에서 구체적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북벌 계획을 하는데 있어 발해와 같은[28] 다른 집단들과 제대로 연계를 하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궁예가 망상하는 북벌의 규모와 방향성도 괴상했으니, 궁예는 옛 고구려의 영토이자 발해의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아예 중원 정복 자체를 주장했다. 왕건의 역성혁명이 벌어지기 직전에는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는지, 궁예는 장안을 점령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는 망상까지 하는 걸 보아, 더 심해졌다면 아예 칭기즈 칸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여 로마로 수도로 삼는 망상을 하도 남았을 것이다.

참고로 궁예의 재위기간은 당말기부터 오대십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난세로, 중국에 강력한 왕조가 없는 시절이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백제도 압도하지 못하는 군사력과 한반도 일부만 차지한 국가가 중원까지 진출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얘기다. 본토에서 원정 온다고 치면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지며, 설령 중원의 일부를 지배했다고 치더라도 콧대높은 한(漢)족들이 그때까지 오랑캐 취급하던 한(韓)족들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으니 말도 문화도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고 태봉이 몽골 수준의 군사력을 갖고 있던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지엄한 미륵이 이끄는 군대는 그 어느 오랑캐를 상대로도 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만 북벌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시중이 된 왕건이 권력 공백 상태인 평양 지역을 정벌하는데도[29] 태평과 태봉국 네임드 장수들과 토의를 하여 사전에 계획을 짜고, 병부와 여러 호족들에게 계획을 소개하는 동시에 의견을 묻기도 하며, 평양 지역에서 어찌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고 준비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 궁예의 북벌 계획은 제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역성혁명이 안일어나고 발해가 멸망한 이후 궁예의 뜻대로 북벌을 그대로 진행했다면 거란의 야율아보기한테 대패해 병자호란 수준은 충분히 일어났을거고 태봉의 국방이 문제가 아니라 거란에 침략으로 태봉국이 멸망한 이후에 후백제나 신라를 제외한 한반도 중북부의 한민족이 남아있을지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약 20년 후 베이징에서 2천km 넘게 떨어져 있는 베트남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10. 작중 인물들의 평가

미륵은 미륵이되, 세상을 잘못 만났구나. 때가 아닌 때에 이르렀으니 이를 어이할꼬....?
도선대사 16화
네 이놈! 냉큼 그 간악한 가면을 벗지 못할까!?
허월, 24화
폐하께선 정말로 미륵이시옵니까? 제후국을 순행하신다고요? 그러자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옵니까? 도대체 어떤 미륵이시길래 그토록 피를 좋아하시옵니까?
가면을 벗으시옵소서! 폐하께선 미륵이 아니시옵니다! 미륵이시라면 이렇게 몰염치하진 않사옵니다!
장인이 쌓아놓은 자리를 빼앗고 의리와 인륜을 저버리는 미륵도 있사옵니까!
미향(북원부인) 39화
소첩이 죽기전에 폐하를 깨우쳐 주고 싶었사옵니다. 폐하께선 미륵이 아니라 사람이란 것을 말이옵니다. 폐하께선 사람이길 거부하시는 것일뿐이옵니다. 광인이시옵니다.
미향(북원부인) 40화[30]
너는 네 장인인 양길을 죽이고 네 또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 또한 지하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느리라. 그 피의 대가가 무엇이란 말이냐?
경문왕, 44화
그 자는 미륵이 아니야! 나도 알아! 그 자는 대제국 건설에 미쳐있는 광인일 뿐이야!
석총, 64화
이제야 가면을 벗은 게야. 궁예는 미륵이 아니야. 사악한 요승일 뿐이야.
석총, 67화
나는 궁예 황제를 볼 수록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안타깝네.. 정말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석총, 69화[31]
백성을 구하고 중생을 구하기 위한 처음의 뜻은 분명 백성들이 생각하는 미륵의 현신이었사옵니다. 허나 이미 그 뜻은 바랬고 처음의 생각은 변질되었으며 지금은 오로지 권력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고 있사옵니다. 이 어찌 미륵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석총, 70화
소승은 어려서 불문에 입문하여 이 나이가 되도록 미륵만 배워왔사오나, 폐하와 같은 미륵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처음엔 미륵이셨사오나 지금은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왔소이다. 폐하께서는 부처가 아니라 인간이시오이다!
거짓 미륵이시어! 그대의 세상은...... 이미 끝났소이다! 이미 새로운 미륵이 나타나서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 미륵이시어! 저주를 받을 것이오! 하늘의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석총, 83화
그분은 분명 이 암울한 현실을 구하실 미륵이셨사옵니다. 하오나, 욕심이 그분의 앞길을 막았고, 눈을 흐리게 하였으며, 몸을 병들게 하였사옵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앓고 계시는 병을 잘 아옵니다. 이루실 꿈은 크고 많은데, 혼자서 가실 길이 답답하여 생기신 병이옵니다. 그 병이 후유증을 낳아 피를 보시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을 고통과 죽음 속에 몰아 넣기 시작했사옵니다.
박유, 85화에서 궁을 떠나며 종간에게 남긴 편지 중에서.
아....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아니, 궁예왕 그 자가, 미......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달이를..... 그렇게 참혹하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미 마진국의 궁예왕이 이성을 잃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하옵니다. 자신의 신하들도 관심법인가 뭔가로 짐승처럼 때려죽이는 정신이상자이옵니다.
견훤최승우, 94화
지금의 황제는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다. 혼백이 꺼져가고 있으면서도 그 사이사이로 아직도 그 번뜩이는 총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어.
아지태, 96화
이제 때가 됐어! 오래 끌 것도 없고. 황제는 이미 미쳤어! 그것을 우리가 갈아치워버리는 것이야! 이 나라를 위해서 말이야!
아지태, 98화
나라? 나라가 어디있어! 황제미쳐있고 저희들 배불리기에 급급한데 나라가 어디있어!
가짜 미륵 놈이 황제랍시고 이 에 올 때부터 그랬소이다. 지옥이나 떨어져 죽을 놈 같으니라고..... 그 놈은 저주를 받을 놈이오, 저주 말이오! 빌어먹을 황제놈 같으니라고, 제 놈이 미륵이라니..... 허허, 참!
철원의 어느 늙은 백성, 100화
미치광이 황제야! 너는 미쳤다. 그래, 이제 바른 말을 하마. 내가 모종의 사건을 꾀했다. 왜냐? 네놈이 미쳤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은 나는 북으로 갈 수 있었고, 너와 함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불쌍하구나, 황제여. 이제 넌 이미 미쳤다. 제국을 끌어나갈 힘도 없다. 결국은 왕건에게 다 내주게 될 것이다. 이 미련하고 불쌍한 황제여.....
아지태, 102화
고정이라니!? 내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질 않느냐! 미치광이다! 폐하가 아니라 미치광이야! 장인도 부모가 아니냐? 어떻게 제 아내의 아비를 죽일 수가 있단 말이냐! 미치광이다! 폐하가 아니라 미치광이야! 내가 저 미치광이의 얼굴을 봐야겠다!
연화, 108화[32]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가 어찌 그것을 알겠사옵니까?
악마다! 황제가 아니라 악마야! 악마!!!!!
연화, 113화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폐하께서는 실성하셨네. 병이 나으신 것이 아니야. 더해지셨어.
종간, 116화[33]
이제 더는 아니되겠소이다. 공들도 보셨겠지만, 낮에 있었던 국문은 국문이 아니라 들의 광란의 장이었소이다. 황제희망이 없소이다...
복지겸, 116화[34]
궁예왕이 뭐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사람이 되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제 처자식을 때려죽인단 말인가!
견훤, 117화
야말로 까막눈이로구나.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너만 몰라. 그 동안 폐주실성을 했어. 그 놈의 관심법 때문에 사람을 하루에 100명씩 죽였다. 황후의 음부를 태워죽인 사람이다! 자신의 아들들도 때려죽였어! 그 사람사람이 맞느냐? 과연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냐 이 말이다, 이 미련한 것아!
허월, 123화[35]
폐주 궁예왕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사옵니다. 그리고 차마 인륜으로써 해서는 아니 되는 일들을 너무도 많이 한 사람이옵니다.
폐주의 잘못을 조급함으로 변명하기에는 너무도 죄가 크고 분명하옵니다.
서경 순행에 왕건을 따라온 김행선태자 무, 175화

[1] 과거 시대에서는 절이 산적에 의해 습격받는 일이 빈번했다. 따라서 스님들은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무술을 익히곤 했는데 그것에 따른 설정이다.[2] 여타 창작물과 다르게 석장은 전투에 능한 물건이 아니다. 칼은 든 상대라면 말할것도 없고 여럿이 달려든다면 어중간하게 때리다가는 타격하는 자신이 지칠수 있으니 급소를 정확히 쳐 무력화시켜야 하는데 살생보다도 더 어려운게 무력화시키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더 대단하다는 뜻이다.[3] 그냥 성격 차이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견훤은 그야말로 호탕한 상남자로, 감정이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지만 이 시점에서 궁예는 선하면서도 상당히 냉정하고 침착해서 감정을 잘 티내지 않는 인물이었다.[4] 하지만 이것은 궁예의 엄청난 완력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궁예가 경문왕의 초상화를 보고 극도로 격분해 칼을 경문왕의 초상에 꽂자 초상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이후 궁예는 칼을 뽑을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꽂은 칼을 더 내리칠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칼을 움직일려고 했는데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칼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았고 결국 궁예는 칼의 손잡이에서 손을 빼어 자신이 이 칼을 다룰려는 것을 포기했고, 이후 이 초상화는 불에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돌아섰다.[5]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칼이 초상화에 꽂혔기 때문에 스님 2명이 칼을 뽑을려고 나섰지만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고, 왕건은 하늘의 선택, 즉 천명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별 힘도 안 들이고 초상화에 박힌 칼을 단번에 쉽게 뽑았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실제로 당시 KBS에서 방송을 했을 때 드라마상의 왕건의 이 일화를 보고 한 시청자가 영국의 아서 왕이 하늘의 능력을 받아 아무도 뽑지 못한 엑스칼리버 검을 바위에서 뽑은 것이 연상이 되며, 이걸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 패러디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시청자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었다.[6] 68회 마지막에 궁예가 독백한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나는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 꿈은 이미 이루었다. 그럼... 앞으로 뭘 하면 되는 거지?" 여기에 아지태가 "그럼 대동방국을 만드시면 됩니다" 하고 쏘삭거렸고, "앞으로 뭘 하면 되는 거지?" 상태였던 궁예가 홀라당 넘어가버린 것이다.[7] 천도 얘기가 나올때 왕건은 나주 상륙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8] 후에 석총대사가 허월 자네가 명주성을 내어주지 말았어야 했다며 한탄했을 때 허월은 이미 알고 있었다며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기까지 누군가는 예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9] 또, 얼마 뒤에 궁예가 부석사를 방문했다가 경문왕의 초상화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 초상화를 향해 칼을 깊이 꽂음으로써, 정말 궁예에게 피끓는 분노가 있었음을 제대로 보여주었다.[10] 다만, 아버지와는 갈등하는 모습이 작중 꾸준히 나왔고, 계모와도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로 묘사된 점과 14살에 이름을 바꾸고 서라벌에 가 밑바닥부터 올라섰다는 행적에서 궁예처럼 정처없이 도망치며 떠돌다 절에 들어가 살지 않았지 그 역시 썩 화목한 가정에서 지내지는 않았을 거다.[11] 강비와 태자들을 처형하던 같은 시각 허월과 만난 형미는 궁궐에서 마구니 한마리가 제 처자식을 죽이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다분히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해버린 궁예를 언급하는 걸 알 수 있다.[12] 당시 궁예를 따르던 휘하 지휘관들은 보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었다. 하지만 궁예는 그럼에도 보내 보자며 사신을 보냈고, 이후 이 사신이 죽어서 돌아오자 수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성스러운 죽음이라며 짧게나마 직접 기도까지 해 준다.[13] 42화의 마지막 부분 및 43화 첫 부분에서 궁예는 부석사에 있는 경문왕의 초상화를 칼로 찔러버린 뒤, 그 자리에서 신라를 멸도라고 칭하며 반드시 없애버려야될 나라라고 선포했다.[14] 작중 궁예의 대사를 빌리자면 사찰에서 승려들이 고행을 하는 바로 그 방식이었다.[15] 박유는 이전에 종간과의 대화에서 아이에게 일찍부터 올바른 교육을 하여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런 박유가 보기에도 궁예의 자식 교육 방법은 너무나 과하고 가혹하고 비인간적이고 아니라고 본 것이다.[16] 물론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는 왕건 사후에는 그야말로 용들의 춤에 버금가는 왕위 쟁탈전과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벌어지긴 했었지만, 적어도 왕건의 생전에는 그런 갈등이 터지지도 않았고 그럴 일도 없었다. 공산 전투에서 만약 왕건이 전사했다면 고려는 후백제에게 오히려 먼저 무너졌을 것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할 정도다.[17] 견훤과 아자개는 아자개가 보낸 서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화해했으며, 견훤과 신검에 경우 소설판에서는 견훤이 죽기 전 신검이 환영으로 나타나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자 후회하여 뉘우침으로 마찬가지로 간접적 화해를 했다.[18] 장르는 다르지만 작중 궁예와 유사한 가족사와 이로 인한 상처로 망가져버린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원피스에이스. 에이스와 궁예 둘 다 남들과 차원이 다른 가족사가 크나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 때문에 자신의 버지를 평생 혐오했고 이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이 상처를 평생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상처를 이해해준 인물들이 동료들형제 뿐이었다. 오히려 작중 궁예의 행보를 보면 에이스가 가족에 대한 상처들을 숨기려고 꿈과 목표를 가졌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19] 미향이 죽기 직전에 그래도 한 번은 만나게 해 주자는 왕건과 허월의 뜻을 받아들인 김순식이 미향의 아들을 불러왔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미향이 연기에 질식해 숨진 뒤였다. 이 때 궁예는 자신의 아들이 생모의 시신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이 장면이 그나마 궁예가 아들에게 마음을 쓴 유일한 대목이었다. 이 때 외에는 미향의 아들이 이후로는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궁금해하는 장면은커녕 언급하는 장면 자체가 없었다.[20] 물론 아지태를 죽인 후 강 장자를 처형시킨 것은 아니고 처음엔 3년간 근신이라는 처벌을 내리며 그래도 장인이라고 나름 선처해줬다. 하지만 왕건과 강비의 정혼사실을 알게 된 궁예가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다며 강 장자를 재호출해 법봉을 꺼내 왕건과의 정혼 사실을 물은 뒤 강 장자를 재수감시켰다. 이 사실을 안 종간과 은부는 궁예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 도인이 지어낸 영초탕을 지어 올리고 궁예도 이를 마시고 잠들지만, 다시 깨어난 뒤 오히려 정신병만 더 심해졌고, 결국 궁예는 강 장자를 다시 국문하여 처형시킨다.[21] 아예 법봉을 불에 뜨겁게 달군 뒤 그대로 강비의 음부를 지져서 처형했다.[22] 강비를 처형한 직후에 망연자실해하는 두 태자에게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은'이라는 말을 하며 분명 궁예도 억지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걸 시인했다.[23] 연화가 궁예의 황후가 되기 이전에 왕건과 정혼했던 관계였다는 점과 궁예가 연화를 처형하기 직전 그녀에게 자신이 아닌 외간 남자와의 외도 여부를 추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궁예가 두 태자에 대해 알고 보니 연화가 궁예의 의제 왕건과 사통해 낳은 자식들로 의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작중 묘사를 보자면 신광과 청광이 왕건의 자식들일 가능성은 제로다. 참고로 철원 지방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궁예가 강비를 왕건과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전승 또는 강비가 궁예 몰래 왕건과 사통했다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24] 광산 이씨순천 김씨가 궁예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광산 이씨는 장남 신광, 순천 김씨는 차남 청광의 후손이 되지만, 둘은 강비와 같은 날에 한꺼번에 처형당해서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기 때문에 둘 대신 삼남 순백이 광산 이씨와 순천 김씨의 시조라는 설이 돌았다. 그렇지만 순백은 사서상에는 기록이 하나도 없고 본 드라마에서만 나온 가상 인물이다.[25] 간단히 훑고 지나가는 정도이긴 하지만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내레이션으로 언급되고, 후백제가 중국에 보내던 사신을 붙잡은 태봉국 지휘관들이 "얘네는 이렇게 외교도 하고 하는데 우리는 허구한 날 비현실적인 북벌이나 외쳐대고 있으니 이게 될 일이냐" 라며 허탈해하는 장면도 있다.[26] 실제 고구려 멸망 이후 평양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가 고려 초에야 재건되었다. 물론 개발만 되면 입지 면에서는 평양이 철원보다 더 좋지만, 이미 국력이 피폐한 상태에서 미개발지역이나 다름없는 평양에 천도를 다시 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27] 궁예의 지시를 은부에게 전하는, 궁예의 최측근인 종간마저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오르라고 하신다" 라며 한탄했다. 은부는 오르지 못할 건 또 뭐냐며 해 보자고 하지만, 종간은 백성들이 너무 지쳐서 더는 무리라고 시인한다.[28] 궁예는 발해 역시 무너뜨려야할 존재로 보았다.[29] 태봉국은 큰 충돌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평양을 접수하였고, 왕건의 계획도 이를 예상하고 세운 것이었다. 궁예도 평양을 합병하고 돌아온 제장들을 칭찬하면서 아지태처럼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하는 북벌을 비판하고 왕건의 계획을 다시금 평가하는데, 전후 행적으로 보면 반역을 일으킨 아지태를 폄하하여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30] 이 대사를 하며 미향은 스스로 궁예를 미워할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죽음으로 궁예를 바꿔놓겠다고, 수백번을 죽어서라도 궁예를 바꾸겠다고 말한다. 미향의 죽음은 궁예를 바꾸지 못했으나, 바로 얼마 뒤 경문왕의 초상화 칼침 사건을 기점으로 궁예는 타락하기 시작한다.[31] 석총 또한 궁예의 과거를 회상하며 마냥 썩어빠진 인물은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참된 고승이라는 암시를 준다.[32] 궁예가 강 장자를 처형시켰다는 소식을 접한 연화는 그 직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궁예에 대해 온갖 독설과 저주를 주저없이 퍼부었다. 그러니까 강 장자가 처형되는 그 순간부터 궁예의 부부 사이는 완전히 파탄나버린 것이다.[33]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궁예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던 종간이 한 말이다. 그만큼 궁예가 강비 및 두 아들을 처형한 것은 엄청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34] 궁예가 강비 및 두 아들을 처형했던 그 사건이 결국 이를 참다못한 4 왕건 추대 및 역성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쉽게 말해 처, 자식까지 때려죽이는 사람이 신하들의 목숨인들 신경이나 쓰겠냐는 뜻이다.[35] 왕건을 공격하러 출병 준비를 마친 김순식에게 그의 아버지인 허월이 궁예가 실성한 군주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김순식의 그 무모한 출병을 꾸짖는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082
, 4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08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