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키와 | 암키와 |
1. 개요
기와\(瓦)[1]는 주로 건축물 지붕에 올려 지붕을 덮는 데 쓰이는 건축 재료이다. 기와를 올린 집을 기와집이라고 한다. ⌒ 이렇게 생긴 수키와를 이음새로 사용해 ⌣ 이렇게 생긴 암기와를 연결하는 구조를 지녔다.2. 어원
기와는 중세 한국어 때 '디새'로 처음 나타났다. 디새는 '딜'(질그릇을 만드는 흙) + '새'(볏과의 풀)가 합쳐진 '*딜새'에서 ㄹ이 탈락한 형태다. ㄹ이 남아잇던 일부 방언에서 새가 유성음화되어, '*딜ᅀᅢ'가 되었고, 이 단어가 17세기 경 서울로 올라오며 반치음이 탈락한 '디애'가 나타났다. 이는 또 18세기 구개음화에 의해 '*지애'로 되었을 것이다. 허나 이 시기 남부 방언에서 나타난 ㄱ 구개음화를 보고 과도교정하고,[2] '애'가 한자음 와(瓦)에 이끌려 지금의 기와가 나타났다. 다른 설들로는 맨 위에 덮는 기와를 뜻하는 개와(蓋瓦)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스크리트어로 'kapala(머리)'의 음역어라는 설등이 있다. 오늘날 일본어로 기와를 부르는 카와라(かわら) 역시 'kapala'의 차용이라는 주장이다.[3]3. 역사
전세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건축 재료로 가장 빠른 시기로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서양에선 고대 그리스 초기 헬라딕 2기(기원전 2650 ~2200년)에 타일과 천장기와들과 함께 고고학적 유물이 대거로 발견된지 오래다.[4] 인더스 문명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동아시아의 경우 그리스에 비해 최소 1100년[5]~2000년 후 주나라 시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진한 시대 무렵에는 매우 성행하게 된다. 한국사에선 고조선 때 이미 기와 유물이 출토된 것을 봐서 이때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 늦게 시작된 기와 문화는 흥미롭게도 그리스 천장기와 건축양식과 같다. 인쇄술, 화약 등과는 반대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인더스 불교같이 건축 방법도 전파된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은 초가나 너와 지붕을 얹은 움집이나 귀틀집(통나무를 井자 모양으로 쌓아 만든 오두막), 혹은 고상식 가옥(원두막에 문과 벽을 단 형태)에서 살았고 마한의 경우 토실(땅굴을 파고 출입구 쪽으로만 움집을 지어 비바람을 막은 집)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평양 지역은 낙랑을 통해 들여온 기와 제작양식을 사용하여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각국의 특색을 지닌 기와들을 사용하였고 신라의 얼굴무늬 수막새나 백제의 연화무늬 기와, 귀면와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근대 이전 기와의 용도는 지붕을 덮어 눈과 비가 실내에 유입되는 것을 막고, 이전에 사용되던 초가집의 풀더미나 너와집의 나무껍질 등이 지붕이 몇 년이면 썩어버려 자주 갈아줘야 했던 것을 반영구적인 기와로 대체하는 실용적 용도였다. 물론 기와의 수명도 당시 다른 건축 재료에 비하면 길지만 어쨌든 건축물 본체보다는 훨씬 짧기 때문에 종종 교체해줘야 했고, 대량으로 제작되고 대량으로 쓰였으며, 대량으로 매몰되어 발견되기 때문에 한 시대의 양식을 민감하게 반영하고 광범위하게 지층을 이루며 발견된다. 따라서 출토되는 옛 기와 유물은 건축물의 역사를 알아볼 때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후 건축술이 발달하면서 실용적 용도를 넘어 건물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용도로도 쓰여 다양한 형태의 기와가 발달한다. 또 기와 하면 A4용지만한 크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고대에는 귀족 문화와 불교 문화로 인해 건축물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던 만큼 기와도 굉장히 큰 유물이 많았다. 예를 들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황룡사의 거대한 망새 기와가 있으며[6]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발견한 같은 신라시대 대형 숫키와같은 경우 길이 63cm, 두께 6cm, 무게 17.8kg까지 나가는 것도 있는데 내구력 테스트에서 550kg를 버텼다.
고려 시대엔 청자로 기와를 만들거나 구리로 기와를 올리는 등 사치스러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고려가 무너지고 이후 조선 시대 중기로 들어서 검소함을 강조하는 왕조의 기풍이 자리잡은 이유로 인해 점차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전에 비해 장식기와와 막새기와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은 물론이고 궁궐이나 서원, 사찰 같은[7] 나름 고급건물에 올리는 것들조차 크기도 작아지고 장식도 간소화되었다.[8]
그래도 현대 건축 기술의 발달과 보급으로 하층민이라도 벽돌집에 썩지 않는 지붕을 올릴 수 있게 되기 이전까지는 지푸라기나 띠, 강가에 우거진 억새를 두껍게 이어 샛집을 올리거나, 나무를 켜고 나온 널판지 껍데기로 만든 너와집 같은 부산물들로 만든 소재들에 비하면 일일이 손으로 만들고 수명 또한 깨지지 않는 이상 썩지 않고 오래도록 유지되는 특성상 고급 건축 재료로 꼽혔다. 또 이 기와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건물의 골조와 기단을 상당히 견고히 지어야 했었던지라, 이러한 견고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던 남도나 섬 같은 지역에서는 집이 기와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던 관계로 돈이 있어도 기와집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4. 형태
일반적으로 기와 지붕은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 기와)로 이어 덮은 후, 처마 끝을 막새나 와당이라는 기와를 사용하여 마무리한다. 이때 암키와의 마무리는 암막새, 수키와의 마무리는 수막새라고 부른다. 물론 경우에 따라 막새 등은 생략되는 경우도 있으며 조선시대 일반 주택의 경우 막새를 생략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 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흙이나 시멘트 따위를 구워 만든 재료가 주로 쓰이나 돌로 만든 기와와 금속제 기와도 있으며, 유약을 바른 도자기 기와[9]도 있다. 그리스 신전에는 대리석 기와가 사용되었다. 그 외에 나무 널판이나 얇은 점판암을 기와로 사용한 너와집/돌너와집, 나무의 껍질을 기와처럼 사용한 굴피집도 있다.
현대의 한국에선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 복합 주택이 증가함에 따라 사용도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사용되는 건축재료로 주로 수제 기와보단 공장제 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문화재 수리에도 적용되어서 2010년에 새로 복원한 광화문의 경우도 기계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올렸다. 2000년대 들어선 기존의 광물질 기와를 대신한 가벼운 플라스틱이나 금속제 기와가 많이 보급되어 민간주택에 사용되고 있다. 한편 수제 기와는 공장제 기와가 성행하면서 쇠퇴했으나, 수제 기와의 가벼움이나 색채, 튼튼함 등이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고 무형문화재로도 지정되었다. 숭례문 복원 당시 수제 기와를 올렸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일부 아파트 및 다세대 주택에선 지붕의 마감재 겸 장식재로 기와를 사용하기도 한다.
태권도 등 무술에서 격파에 주로 쓰이는 물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적당히 납작하고 깨지기도 쉽지만, 몇장이 겹쳐지면서 단숨에 격파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
플라스틱으로 두 파트를 끼워서 쓰는 대체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문화재 건축에선 기와에 흰색 회칠을 하여 고정시키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회칠 마감이다.[10] 이렇게 용마루나 막새 등에 흰 회반죽을 칠하면 단순히 기와를 쌓아 만드는 것보다 바람에 더 강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사람에 따라 지저분하게 보일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지붕의 마감은 취향의 영역이기도 해서 오늘날에는 흰 회칠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일일이 기와 쌓는 것보다 편한 것도 있고. 물론 찾아보면 회칠 마감을 하지 않은 건축물들도 꽤 찾아볼 수 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기와를 덮는 집들이 많이 있다. 이 기와는 현지 점토에 산화철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빨간색을 띄며, 기와를 덮는 방식은 한국에 비해 단순한 편으로 한국에서 암키와라고 부르는 평기와만 덮는데, 아랫단은 볼록한 부분이 아랫쪽을 향하게 덮고 윗단은 볼록한 부분이 위쪽을 향하게 하고 덮으며 막새는 쓰지 않는다.[11]
기와를 깐 튀르키예식 아파트의 모습 (앙카라)
전근대 일본의 동와(銅瓦)*
너와집에 덮는 너와 모습도 있다.*
일본의 경우 근세시대부터 구리로 된 기와도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겨울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흙기와가 물을 흡수하여 동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다만 현대 금속기와처럼 금속으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에 올리는 간편하고 가벼운 게 아니라, 나무로 지붕을 만든 뒤 최대한 빈틈없이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구리판으로 감싼 것이었다. 보덕암의 구리를 씌운 기둥과 비슷하다.
때문에 품이 많이 들고 복잡한데다, 구리는 귀한 금속이라 당시 재산이 풍족한 절이나 권력자들이 주로 사용했다. 참고로 일본에서 이걸 처음 쓴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한다.[12]
5. 종류
- 기와 명칭 중 '여와', '부와'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기와제조공장에서 쓰이는 용어일뿐, 실제 학계에서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여와는 '암키와', 부와는 '수키와'로 명명되며, '여막새', '부막새' 또한 '암막새', '수막새'로 불린다. 또한 '작고'(그림 2번째줄 3번째)가 아니라 '착고'(着高)이며, '망악'(그림 2번째줄/4번째 줄 4번째)이 아니라 '망와'(望瓦)이다. 물론 망와라는 기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 암막새가 지붕마루 끝에 위치하면 망와라고 칭한다. '초장', '도툼' 또한 학계 용어가 아니다.
- 귀면와
- 청기와(청자기와)
- 치미
- 얼굴무늬 수막새
- 적기와: 고구려에서 자주 쓰였다.
- 황금기와: 황금으로 만든 기와. 신라에서 주로 쓰였고 이런 기와를 올린 건물을 금입택이라고 불렀다.
- 녹유와: 당나라, 신라, 일본에서 썼던 기와. 녹색 유약을 바르고 구웠기 때문에 기와에 초록색 유리를 입힌 기와라고 보면 된다. 아직도 제조법은 남아있으나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고 내구성이 영 좋지 않아 안타깝게도 청자기와를 올린 건물이 몇 채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녹유와를 올린 건물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 황유와: 중국 자금성의 기와.
[1] 瓦는 '기와 와'라는 한자인데, 정작 '기와'는 순우리말이어서 이 단어에 瓦를 쓰지 않는다.[2] 이는 김치에서도 나타난 현상으로 보고있다.[3] 일본어에서 일어난 순음 퇴화에 따라 모음 사이 /p/가 [ɸ > β > w\]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다.[4] House of the Tiles.[5] 중국 정부가 시행하는 고대 중국 역사인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에 대한 역사공정으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해 자국에서도 연도 논란이 있는 주나라 건국년도를 그대로 믿어준다 치고, 건국하자마자 기와를 바로 사용했다 치더라도 1100년 정도 느리다.[6] 심지어 고구려 안학궁 망새는 더욱 크다.[7] 고려는 사실 불교국가라 아이러니하게도 사찰이 궁궐보다 더 사치스런 경우도 있었다. 조선 유학자들이 그렇게 까던 불교의 타락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시 사찰이 궁궐을 넘어선 일종의 공공기관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8] 물론 화성행행도 병풍이나 평안감사향연도 등에서 보이듯 그 나름의 멋은 있다.[9] 고려의 청자기와 등이 이에 속한다.[10] 회반죽도 넓은 의미에서의 시멘트로 들어가긴 한다. 석회가루와 물, 고운 흙, 느릅나무 접착제, 잘게 찢은 한지 등을 섞어 만드는데 석회와 석고가루를 주성분으로 만든 초기 이집트 시멘트랑 비슷하다.[11] 다만 이러한 붉은색 기와를 올린 가옥은 터키나 그리스말고도 유럽의 상당수 지역에도 있는 편으로 대체로 중부유럽과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남부유럽에서도 제법 많은 편이다.[12] 참고 사이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