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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3 02:34:44

김대우(1900)

파일:옛 경상북도 도기.svg
경상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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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대우
金大羽 | Kim Dae-woo
파일:김대우.png
출생 1900년 7월 10일
평안남도 강동군
사망 1976년 4월 22일 (향년 75세)
본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가족 동생 김호우
장남 김광연
며느리 이영희
차남 김광순
딸 김숙연
학력 강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신과 / 졸업)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채광학과 / 졸업)
주요
경력
평안북도 박천군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전라북도지사
경상북도지사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2.2. 친일 행적2.3. 해방 이후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1930년대 말 민족 말살 통치기에 만들어진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900년 7월 10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1913년 3월 평안남도 강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에 입학했으며, 1919년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에 형집행정지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

1921년 3월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규슈제국대학 공학부 채광학과에 입학했고, 1925년 3월 졸업했다. 이후 같은 해 조선총독부 관리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2. 친일 행적

1926년 2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서기로써 관직을 시작하여 내무국 지방과 속을 겸임했다. 1928년 2월 군수로 승진해 평안북도 박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쇼와 덴노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2월 평안북도 이사관으로 승진했고, 3월부터 평안북도청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근무했다.

1932년 2월 경상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이때 물산진열관장을 겸임하다가 10월부터 산업장려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곡물상조합연합회 경상남도협찬부 부회장이 되었고, 11월에는 경상남도 농촌지도위원회 간사를 지냈다. 1934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사회과장으로 재직했으며, 이때 중추원 통역관과 서기관을 겸임했다. 같은 해 2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간사를 지내기도 했다. 1934년 8월 최린천도교 신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일단체 시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35년 12월에는 유만겸, 이승길, 김동원 등과 함께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1936년 5월 학무국 사회과 사무관 자격으로 명륜학원 학감 사무취급과 제생원 서무과장 사무취급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고적조사위원회 위원 및 간사, 조선간이생명보험심사회 위원,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및 간사에 위촉되었고, 과학지식보급회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임시재해대책조사위원회 간사에도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직책이 변경됨과 동시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민화 정책의 첨병이었던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이 직위를 재직할 당시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퇴근도 미룬 채 매일 밤 10시까지 시국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획 수립에 열중했다고 한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할 목적으로 전국에 조선인 유력자를 파견하는 시국강연회를 계획하고 실시한 것이 그 계획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황국신민서사
[ 내용 보기 ]
其ノ一
첫 번째

[ruby(一, ruby=イチ)]、[ruby(私, ruby=ワタクシ)][ruby(共, ruby=ドモ)]ハ[ruby(大, ruby=ダイ)][ruby(日, ruby=ニツ)][ruby(本, ruby=ポン)][ruby(帝, ruby=テイ)][ruby(國, ruby=コク)]ノ[ruby(臣, ruby=シン)][ruby(民, ruby=ミン)]デアリマス。
하나,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이치, 와타쿠시도모와, 다이닛폰테이코쿠노 신민데 아리마스

[ruby(二, ruby=ニ)]、[ruby(私, ruby=ワタクシ)][ruby(共, ruby=ドモ)]ハ[ruby(心, ruby=コヽロ)]ヲ[ruby(合, ruby=アハ)]セテ[ruby(天, ruby=テン)][ruby(皇, ruby=ヌワウ)][ruby(陛, ruby=ヘイ)][ruby(下, ruby=カ)]ニ[ruby(忠, ruby=チウ)][ruby(義, ruby=ギ)]ヲ[ruby(盡, ruby=ツ)]クシマス。
둘,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니, 와타쿠시도모와, 코코로오 아와세테, 텐노-헤이카니 츄-기오 츠쿠시마스

[ruby(三, ruby=サン)]、[ruby(私, ruby=ワタクシ)][ruby(共, ruby=ドモ)]ハ[ruby(忍, ruby=ニン)][ruby(苦, ruby=ク)][ruby(鍛, ruby=タン)][ruby(鍊, ruby=レン)]シテ[ruby(立, ruby=リツ)][ruby(派, ruby=パ)]ナ[ruby(強, ruby=ツヨ)]イ[ruby(國, ruby=コク)][ruby(民, ruby=ミン)]トナリマス。
셋, 우리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산, 와타쿠시도모와, 닌쿠탄렌시테, 릿파나 츠요이 코쿠민토 나리마스
其ノ二
두 번째

[ruby(一, ruby=ヒト)]ツ、[ruby(我, ruby=ワレ)][ruby(等, ruby=ラ)]ハ[ruby(皇, ruby=クワウ)][ruby(國, ruby=コク)][ruby(臣, ruby=シン)][ruby(民, ruby=ミン)]ナリ[ruby(忠, ruby=チユウ)][ruby(誠, ruby=セイ)][ruby(以, ruby=モツ)]テ[ruby(君, ruby=クン)][ruby(國, ruby=コク)]ニ[ruby(報, ruby=ハウ)]ゼン。
하나, 우리는 황국신민이니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리라.
히토츠, 와레라와 코-코쿠신민나리, 츄-세이못테 쿤코쿠니 호-젠

[ruby(二, ruby=フタ)]ツ、[ruby(我, ruby=ワレ)][ruby(等, ruby=ラ)][ruby(皇, ruby=クワウ)][ruby(國, ruby=コク)][ruby(臣, ruby=シン)][ruby(民, ruby=ミン)]ハ[ruby(互, ruby=タガヒ)]ニ[ruby(信, ruby=シン)][ruby(愛, ruby=アイ)][ruby(協, ruby=ケフ)][ruby(力, ruby=リヨク)]シ[ruby(以, ruby=モツ)]テ[ruby(團, ruby=ダン)][ruby(結, ruby=ケツ)]ヲ[ruby(固, ruby=カタ)]クセン。
둘,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함으로써 단결을 굳게 하리라.
후타츠, 와레라 코-코쿠신민와, 탕아이니 신아이쿄-료쿠시, 못테 단케츠오 카타쿠센

[ruby(三, ruby=ミツ)]ツ、[ruby(我, ruby=ワレ)][ruby(等, ruby=ラ)][ruby(皇, ruby=クワウ)][ruby(國, ruby=コク)][ruby(臣, ruby=シン)][ruby(民, ruby=ミン)]ハ[ruby(忍, ruby=ニン)][ruby(苦, ruby=ク)][ruby(鍛, ruby=タン)][ruby(鍊, ruby=レン)][ruby(力, ruby=チカラ)]ヲ[ruby(養, ruby=ヤシナ)]ヒ[ruby(以, ruby=モツ)]テ[ruby(皇, ruby=クワウ)][ruby(道, ruby=ダウ)]ヲ[ruby(宣, ruby=セン)][ruby(揚, ruby=ヤウ)]セン。
셋,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기름으로써 황도를 선양하리라.
밋츠, 와레라 코-코쿠신민와, 닌쿠탄렌 치카라오 야시나히, 못테 코-도-오 센요-센

같은 해 10월에 그는 그 유명한 <황국신민서사>를 탄생시키게 된다. 당시 학무국 촉탁 이각종에게 문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이후 김대우가 실무를 담당해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하면서 끝내 문안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낸 <황국신민서사>를 각급 학교 등에서 암기, 제창하도록 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했다. 같은 해 11월 『매일신보』에 「국민정신작흥주간실시에 당하야」라는 제목의 친일 논설을 3회에 걸쳐 기고했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박물관건설위원회 간사에, 6월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 간사에, 7월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에, 조선총독부자원위원회 간사에, 그리고 1938년 2월 시국대책준비위원회 간사에, 4월 저축장려위원회 간사에, 5월 제17회 조선미술심사위원회 간사 등에 위촉되었다.

1938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제1회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전문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조선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39년 3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 내무부장으로 전임되었고, 이후 전라남도농촌진흥위원회 위원과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전라남도지부 감리관, 전라남도 방공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같은 해 5월부터 1940년 10월까지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을 지냈고, 10월에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0년 1월에는 전라남도 임금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 내무부장 재직 시절에 중일전쟁 지원과 관련된 업무를 적극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같은 해 9월 경상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전임되었으며, 같은 시기 경상남도 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경상남도 농회 회장, 경상남도 황민연성도장 장장, 경상남도 임금위원회 위원 등에 발촉되었다. 이후 11월에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일제로부터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2월 국민총력 경상남도연맹 경제부 부장에, 3월 경상남도 방공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3년 8월 전라북도지사로 승진했으며, 9월 전라북도 농회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일제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 시가지계획위원회 임시위원에, 9월 징용을 관장하는 단체 조선근로동원원호회 전라북도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국민총력 전라북도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8.15 광복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경상북도지사로 전임되었고, 7월에 경상북도 소득심사위원회 회장, 조선군의용대 경상북도 총사령에도 임명되었다.

그의 빠른 승진 비결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같은 친일 관료 출신이항녕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경상남도 하동군수로 있을 때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대우가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 할당한 것은 물론, 보고된 재고량을 못 믿겠다며 할당량을 터무니 없이 늘려 수탈을 조장한 바 있다고 한다.

2.3. 해방 이후

해방 당시 그는일본 천황패전방송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경상북도 도청의 직원들을 모두 집합 호출 시켜 부른 뒤, 연단에 올라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발표하고, 그 후 발표가 끝나자마자 전 직원들과 함께 엄숙하게 신사참배를 올렸다. 그러고나서 도청 직원들에게 "조선의 참된 독립은 어렵다. 오늘 이후 일본과 조선은 손을 맞잡고 동양은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면서 훈시를 했다. 이후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 절차를 위한 송진우, 안재홍 등 조선인들과의 협상에 참가했고, 경상북도지사에 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2일 이후 미군정이 조선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10월 19일까지 경상북도지사로 근무하다가 도지사의 고문직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