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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00:50:13

김동철(야구선수)

김동철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29번
팀 창단 김동철
(1982)
김우근
(1983.6.30.~1985)
}}} ||
김동철
金東喆 | Kim Dong-cheol
출생 1960년 6월 5일
경기도 인천시 (현 인천광역시)
사망 1983년 4월 1일 (향년 22세)
인천직할시 남구 숭의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동산고 - 인하대 (중퇴)[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멤버
소속팀 삼미 슈퍼스타즈 (1982)

1. 개요2. 선수 경력3. 방출 이후 갑작스런 사망4. 연도별 성적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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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여러모로 KBO 역대 최악의 비극적인 선수라고 할 정도로 안타까운 인생의 주인공. 한국 프로야구 원년 최악의 약체 팀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 멤버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2] 빛을 못 본 채 불과 입단 1년만에 팀에서 방출된 후 이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인물. 그러나 이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많아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동산고 졸업 후 인하대로 진학하여 선수로 활동하던 중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인천 연고 팀으로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는데, 당시 삼미는 고질적인 투수난에 시달리고 있던 탓에 쓸 만한 투수를 끌어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일반인들을 상대로 공개 테스트를 통해 전력을 보강하려고 했었고, 삼미특수강 직원으로 근무하던 좌완투수 감사용[3]이 테스트에 합격하여 삼미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당시 인하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동철은 삼미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학교를 중퇴한 채 프로에 발을 들였다.

당시 프로야구는 알다시피 선발이나 중간, 마무리 같은 개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4] 하물며 허약하기 짝이 없는 마운드를 자랑하는 삼미로서는 가용 인원 전부 보직 그런 거 가릴 것 없이 돌려야만 경기를 그럭저럭 꾸려나갈 상황이었다. 물론 김동철도 예외는 없었고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던지며 1982년 한 해 동안 총 32경기 등판에 15번을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며 93이닝 투구로 규정이닝(80이닝)을 넘겼지만, 1승 9패 1세이브, 평균자책 7.06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이 김동철의 프로 통산 성적이다. 특히 이 해 김동철의 평균자책 기록은 아직도 역대 한 시즌 규정 이닝 진입 투수 중 최악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참고로 2009년 한화 이글스김혁민7.87의 평균자책을 기록했으나 116⅔이닝으로 규정이닝 133이닝을 채우지 못하여 기록 갱신에는 실패했다. 5년 뒤였던 2014년에 두산 베어스 소속이였던 노경은이 이를 넘어 9.03을 찍었지만 109⅔이닝 110자책으로 역시 규정이닝 미달이였다. 다만 이쪽은 더 이상의 자책점 없이 규정이닝인 128이닝을 채웠어도 평균자책점은 7.73으로 김동철의 7.06보다 더 높다. 그럼에도 비공식 최악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지만.

아무튼 성적은 안 좋았을지언정 마당쇠처럼 열심히 던진 김동철이었지만, 원년 시즌 후 삼미에서 대대적인 선수단 정리가 있었고, 김동철도 방출 선수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 그렇게 김동철은 불과 1년만에 허무하게 프로 무대를 떠나야 했다.

김동철의 1982년 시즌 유일한 1승, 그리고 프로 통산 첫 승이자 마지막 승리는 그 해 5월 5일 춘천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따낸 것이다. 이 날 선발로 등판한 김동철은 6이닝 동안 5실점으로 롯데 타선에 두들겨 맞았으나 삼미 타자들이 뜬금없이 안타 22개로 무려 16득점을 뽑아낸 덕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통산 1세이브는 바로 감사용의 승리를 구원하면서 기록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세이브도 롯데전에서 기록하였다. 또한 이는 감사용의 프로 통산 유일한 승리 기록이기도 하다.

3. 방출 이후 갑작스런 사망

삼미에서 퇴단당한 김동철은 이후 현역병으로 입대했으나, 1983년 시즌 개막 전날인 4월 1일 인천 숭의야구장 부근의 경인선 철로에 투신하여[5]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22세. 자살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세상을 비관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네이버에서 아무리 검색해 봐도 프로필조차 나오지 않고 삼미 선수들의 대규모 방출기사만 존재할 뿐 그가 자살했다는 기사조차 전무하다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로 자살한 선수였지만 세상을 떠나서도 전혀 관심조차 받지 못한 야구인이었다. 3년 뒤인 1986년, OB 베어스 소속이던 김영신은 팀내 주전 경쟁에서 밀린 것을 비관하여 김동철과 같은 운명을 선택했지만 그의 등번호였던 54번은 KBO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면서 그나마 대접받게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6][7]

4. 연도별 성적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삼미 32 93 1 9 1 0.100 7.06 125 15 58 19 84 73 1.90
KBO 통산
(1시즌)
32 93 1 9 1 0.100 7.06 125 15 58 19 84 73 1.90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미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KBO 통산
(1시즌)
1 1 .000 0 0 0 0 0 0 0 0 .000 .000

5. 관련 문서


[1] 3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에 입문했다.[2] 1982년 시즌 평균자책점 7.06을 기록하여 현재까지도 규정이닝 기준 역대 최악의 평균자책점을 보유 중이다.[3] 일반인이라 해도 대학 시절까지 선수로 뛰었고 사내 야구팀 에이스로 활약했었다.[4] 원년의 슈퍼스타 박철순도 선발과 마무리를 겸직할 정도였다.[5] 당시에는 도원역이 개통은 커녕 착공되기도 전이었다. 도원역은 1994년에 개통했다.[6] 이 때 김영신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된다.[7]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김동철은 원년에만 뛴 선수라 상대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이고, 김영신은 그래도 프로야구 4번째 시즌부터 뛴 선수에다 국가대표를 역임했었다. 또한 김동철은 방출되고 병사 신분에서 자살해서 삼미 구단이 거의 개입하지 않았지만 김영신은 현역 선수 신분에서 자살한지라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