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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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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 입문 전3. 정치 입문 이후
3.1. 경선비리 의혹3.2. 의원직 상실 이후3.3. 제20대 대통령 선거3.4. 3기 당직 선거 출마3.5. 진보당 제3기 상임대표

1. 개요

김재연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2. 정치 입문 전

1980년 11월 27일 경상북도 경산시 출생으로 유년기부터 중학교때까지 대구에서 성장하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 # 1999년 대일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양어대학 노어과에 입학했다.

2001년 매향리사격장 폐쇄운동의 몇 달 전인 2000년 11월 서양어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듬해 한국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2002년 한총련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총련과 한총련 의장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1] # #2 학생운동시절 경기동부 그룹의 지도를 받던 "노동자학생연대선봉대"(약칭 노선대)[2]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이적단체 한총련 대의원 활동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구성죄 위반 혐의로 수배 생활을 하다가, 2004년 11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국회 기습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가 이후 사면복권 되었다.

3. 정치 입문 이후

2006년부터는 민주노동당부대변인, 학생위원회 조직국장 등을 맡았다.[3]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서울 강남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5위의 성적으로 낙선했다.

2011년에는 7기 한대련의 집행위원장,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을 만드는 데 나름 일조를 한 듯하다. 한대련 집행위원장으로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000인 원탁회의' 기획하였으며, 사회를 맡아서 진행했다. 전에는 한대련 산하조직인 서울지역대학생연합(서대련)의 집행간부로 지냈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로 당선됐다. 통합진보당은 자체 모집한 10만 명의 20·30세대 선거인단이 온라인 투표를 통해 청년비례대표 후보 1명을 선출하도록 했는데, 제주해군기지 반대로 얼굴이 알려진 ‘고대녀’ 김지윤 씨[4]를 가볍게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12년 5월 30일. 당시 31세[5]로,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통합진보당의 상징색인 보라색미니스커트하이힐을 신고서 국회에 걸어 들어와 19대 국회 첫 일정을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입고 온 ‘보라색 미니스커트’를 보고서 인터넷과 케이블방송 패션 프로 등에선 “패셔니스타”(fashionista)란 반응이 나왔다.
파일:external/archivenew.vop.co.kr/31023824_y.jpg 파일:external/static.news.zum.com/bbuheng201205302118020.jpg 파일:external/disk.blackboxclub.co.kr/0a0a2d7c8e0a4c3d7a9d8e2c6e6d6c.jpg

그러다가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래서 당분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 독재정권이 저의 의원직은 빼앗아가도, (제) 가슴 속 진보정치의 꿈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김 전 의원은 2016년 총선에 출마해 정치적 재기(再起)를 노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3.1. 경선비리 의혹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와 경쟁했던 청년비례대표 후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대리 투표 의혹이 있다”, “경선 투표 첫날 김재연 후보를 찍으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에 대한 중복 투표와 대리 투표 의혹 등 부정 경선에 대한 내부 증언이 계속 터져나오자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그녀와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해 수차례 비례대표 사퇴를 요구했다. 진보·좌파 인사로 분류되는 공지영, 진중권 씨도 “한숨이 나온다”며 김 전 의원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때마다 김재연·이석기 전 의원은 “소명 기회가 충분치 않다” “우리가 물러나도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며 사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 등이 주축이 된 구당권파와 진보신당·국민참여당 출신 등으로 구성된 신당권파의 갈등이 격화됐고, 분당(分黨) 사태로 이어졌다. 김재연·이석기 등이 소속된 구당권파는 통진당을 접수했고, 신당권파 인사들은 2012년 10월 탈당해 지금의 진보정의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재연은 비리경선 사태에 대해서 "자신은 찬반투표였기 때문에 아무 관련 없고, 다 해명됐다." 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자세한 사항은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 문서를 참고.

3.2. 의원직 상실 이후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이후 2015년 8월경부터 아프리카TV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이후 딱 1년이 지난 2015년 12월 19일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효임골룸바이다.

민중연합당에 입당한 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정부시 을에 출마했으나 3,810표(3.76%)를 얻어 당선되지는 못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

현재 의정부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 서점인 '인생서점'을 열고 운영 중이다. ##,# 이후 민중당 대변인을 맡다가, 제1차 당직선거를 통해 의정부시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0대 총선에서도 의정부에 출마한 걸 보면 이곳을 자신의 지역구로 삼으려는 듯하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또다시 낙선하였다. 2020년 6월 이상규의 뒤를 이어 진보당 상임대표에 취임하였다.

3.3. 제20대 대통령 선거

파일:진보당 아이콘.png 김재연 후보 몰아보기
당신의 땀이 빛나도록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혁명
제20대 대통령 선거 슬로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재연/20대 대선 공약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0대 평등공약
토지공개념-1가구 3주택이상 금지[6]
임금삭감 없는 주 4일제
최저시급 1만 5천원-월급 300만원 시대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전국민노동법
대학까지 무상교육, 유아교육 국가책임제
자영업자100% 손실보상 및 부채탕감
N번방 방지법, 파트너폭력 방지법 제정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한 생활동반자법 제정
20평 1억대 건설원가아파트 연간 10만호 공급
상위 0.1% 슈퍼리치 부유세 신설

2021년 8월 5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 선언 했다. 결과는 37,366표(0.11%)를 얻어 5위로 낙선.(원외정당 후보 중 2위)

3.4. 3기 당직 선거 출마

2024년 5월 27일, 제7공화국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진보당의 상임대표로 다시 출마하였다.# 이번 당직선거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정태흥 공동대표가 함께 출마해 양자간 경선을 진행하였고 개표결과 69.04%를 득표해 승리하면서 다시한번 진보당 상임대표로 선출되었다.

3.5. 진보당 제3기 상임대표


[1] 당시 일명 자주단결 그룹이 한총련 중앙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한총련개혁을 주장하던 여러 정파들의 물밑 합의로 추대된 비주류 단일 후보였지만 대의원 대회에서 참패하였다.[2] 당시 운동권에선 NL온건파 사람사랑 계열로 분류되었다.[3] 이 때는 2004년 전당대회에서 범NL그룹이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싹쓸이한 다음이다.[4] 노동자연대에서 활동하는 클리프주의자이다. 어찌보면 경기동부연합과는 정반대 성향인데, 이는 노동자연대(구 다함께)가 원래 민주노동당 내부의 '열린 주장과 대안'이라는 정파에서 출발했고,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때까지 계속 민노당-통진당 소속이었기 때문이다.[5] 당시 6공화국 내 최연소 국회의원은 17대 국회에서의 김희정 전 의원으로, 34세에 지역구에 입성했다. 이후 20대 총선에서는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31세의 나이로 비례대표 입성, 21대 총선에서는 류호정29세의 나이로 역시 비례대표로 입성했다.[6] 공교롭게도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한 홍준표 또한 동일한 공약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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