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 4부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동일인물이다.
2. 작중 행적
프랑스 대혁명이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유혈진압으로 인해 내전으로 확대되자 공화파에 가담해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혁명군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드러내었으며, 4년 간의 내전 끝에 공화파의 승리를 이끈 후 샤를 10세-마리아 카롤리나 부부를 체포, 처형하고 스스로 공화국 통령이 되어 프랑스의 권력을 잡는다. 이후에는 원 역사처럼 프랑스 제1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황제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으로 잠시나마 전 유럽을 발밑에 두었지만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몰락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대한의 미주 개척의 영향으로 원 역사보다 더 번영해진 루이지애나를 프랑스가 미국에게 팔지 않았기 때문에 워털루에서 패배한 직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홍경래)의 도움을 받아 루이지애나로 도주, 루이지애나에서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을 선포하고 누벨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원 역사에서는 워털루에서 패배한 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1821년에 사망했지만 유배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 몰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서인지 수명이 연장되었다.
이후 자신이 세운 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1823년에는 아구스틴 1세의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 정신을 더럽혔다며[1] 멕시코를 침공하여 2년만에 수도 멕시코시티와 유카탄 반도까지 정복하고 멕시코를 보호국으로 삼는다.
'전쟁의 신'이라고 할만한 군사적 천재성은 기술 발전이 빨라진 작중에서도 똑같아서 철도를 이용한 병력의 전략적 이동, 증기자동차를 이용한 야포 견인 등의 군사혁신으로 유럽을 제패했고,[2] 누벨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원정보다 더 긴 거리인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켰으며, 3부에서 대한도 통제에 애먹은 아파치 부족을 복속시켜 아파치로부터 전사추장으로 추앙받고 전사들까지 공급받는다. 나폴레옹 개인의 명망과 카리스마도 여전해서 부르봉 왕조가 파견한 진압군은 가는 족족 투항해서 훌륭한 병력 공급원이 될 뿐이었고, 몰락했던 나폴레옹이 누벨프랑스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소식을 접한 유럽의 옛 부하들과 추종자들이 누벨프랑스로 몰려들면서 빠르게 기반을 굳히는데 성공했다.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는 나폴레옹의 이름만 들어도 화를 내고, 황제가 아니라 번왕 취급을 하는 등 찬탈자라고 비난하지만[3], 대부분의 신료나 백성들에게는 프랑스 혁명이 내전으로 확대되어 수만 명의 국민이 죽는 등 원 역사보다 더 참혹해지자 국민을 지키기 위해 거병, 폭군을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웠으며,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잠시나마 유럽 전역을 발밑에 둔 성과로 인해 '불패자(佛覇者)', '유주무쌍' 등의 간지 나는 칭호로 불리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4] 실제로 나폴레옹이 신수도 누벨 아작시오를 건설하자 유방의 고향 패현의 이름에서 따온 신불패(새로운 프랑스의 패현)라 불를 정도니, 나폴레옹을 한때나마 천하통일을 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멕시코 원정 후 안보 환경이 더 불안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지 대한의 협상요청에 기꺼이 응하고 협상을 위해 누벨프랑스를 방문한 대한 사절단에게 성대한 의전을 베풀며 황태손이자 사절단 단장인 재석과 회동한다. 흥분하면 그의 특유의 코르시카 사투리가 더 심해지는 바람에 프랑스어가 가능한 재석도 못 알아들을 정도. 한때 유럽의 패자였던 이답게 오만한 면모를 숨기지 않고 자기가 한때 잘나갔던 시절의 자랑을 멈추지 않는 꼰대 투 머치 토커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사치에 무관심하고,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누벨프랑스에게 부족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과 협상을 통해 이를 보충하려고 하며, 수도 누벨 오를레앙을 미주의 교통 중심지로 만들 수 있는 대륙횡단철도 계획을 제시하는 등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또 오스트리아에 두고 온 아들과 비슷한 나이의 재석은 손주 대하듯 하며 재석의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어리기 때문에 피로하게 만들려고 여흥을 베푸며 협상을 지연시키는 노회한 모습도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괴팍해지긴 했지만 대륙횡단철도 부설과 대한과 합작해 텍사스 석유 개발에 힘을 쏟는 등 여전히 정력적으로 통치한다.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이나 오스트리아에 감금된 로마왕 라이히슈타트 공작을 그리워하며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의 군주들에게 인정을 내세워서 호소하고 구출 작전을 추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하며, 동생 루이가 제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자신의 아들인 샤를 루이를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하자 격노하며 쫓아낸다. 결국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엔 아예 존재를 숨기려고 하냐고 하다가 현실을 인정한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죽였다고 주장하며 나라 전역에서 위령미사를 올리게 했고,[5]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전 유럽의 왕실에 분노와 저주가 담긴 편지를 보낸다. 그 이후에는 나라의 힘이 부족해서 아들을 잃었다고 여겼는지 신수도 누벨 아작시오를 건설하는 등 제국 경영에 더 몰두한다.
1840년 재석이 정상회담을 위해 미주를 방문하자 본인이 직접 대한령 미주의 천사동까지 가며 크게 반가워한다. 노년이 되어서도 전략적인 식견은 여전하여, 아메리카 국가회의 회원국인 페루에서 생산하는 구아노를 이용해 유럽의 목줄을 잡고, 그 페루의 목줄은 텍사스의 석유를 통해 잡는다는 '자원의 무기화' 전략을 세우는가 하면 자신이 사망하면 후임 황제는 국민들이 선출하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으로 변경할 것임을 계획하는 등 혜안을 보여주어 재석이 크게 감탄한다.
이후로도 국정을 성실히 수행하던 중 1844년 여름 노환으로 누벨 아작시오 황궁에서 향년 75세로 자연사하고 유해는 누벨 아작시오에 세워진 영묘인 누벨 앵발리드에 안장된다. 사망 후 오스트리아가 화해의 표시로 아들의 유해를 누벨프랑스로 보내주면서 죽은 뒤에나마 아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3. 기타
본작의 역사개변으로 인한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으로, 유럽에서는 몰락했지만 1부에서부터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본작의 나비효과가 크게 중첩된 영향으로 신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다지면서 재기에 성공했으며 수명도 크게 늘었다.본작의 주요 비판 중 하나가 역사 개변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의 누벨프랑스 건국 에피소드는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 좋은 평을 들었다. 나폴레옹의 누벨프랑스 건국은 주인공 재석이 직접 개입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3기와 4기 사이에 주인공이 1기 시절부터 일으킨 나비효과들이 중첩되어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에 재석이 4부에서 나폴레옹이 누벨프랑스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놀라워했다.
여기서도 나폴레옹의 아들이 요절해서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대신 황제위를 공석으로 삼고 비혈연에게 집정관직을 물려주는 방식을 취해 프랑스 혁명의 연장선이었던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제1제국의 초심이 강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 때문에 말이 자유민주주의지 답이 없을 정도의 인종차별주의와 WASP우월주의에 찌들어있던 초기 미국 사회에 질린 많은 유럽 이주민들이 누벨프랑스 이주를 택할 정도.
재석 일행과 처음 만날 때 황태손비 권씨를 보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루도비카와의 신혼 시절을 떠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여러 정황을 보아 여기서도 원 역사처럼 헤어졌고 나폴레옹이 누벨프랑스 제국을 건국하며 재기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혼했지만 정식으로 이혼하지는 않은 애매한 상태 때문인지 누벨프랑스 시절에는 공식적인 황후가 없었고, 누벨프랑스는 나폴레옹 사후 황제위는 영구공석이 되면서 누벨프랑스 제국에는 황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나폴레옹 샤를 때문에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나폴레옹이 누벨프랑스 당시에 나이가 많아서 누벨프랑스에서 후궁들을 들였음에도 더 이상 자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 루도비카와 정식으로 이혼했다가 나폴레옹 샤를을 돌려받지 못할 명분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후가 비어있는 건 정처인 것과 황후 책봉은 별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단경왕후 신씨가 남편 중종이 즉위하고 자신이 폐출될 때까지 중종의 정실이기는 해도 왕비로 책봉되지 않아서 왕비였던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사적으로는 마리아 루도비카가 나이페르크 백작과 바람난 것에 대한 괘씸함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으면 마리아 루도비카가 슈탄데스헤어인 나이페르크 백작과 법적으로 재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리아 루도비카는 1847년에 사망했는데, 본작의 나폴레옹은 1844년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이페르크 백작과 아예 재혼하지 않았거나, 재혼했어도 기간이 매우 짧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생아들 때문에 서류상 재혼을 했을 수도 있고, 주위의 비난이 너무 심해서 사생아들도 버리고 재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원 역사와 달리 나폴레옹이 누벨프랑스에 재기해 나폴레옹의 많은 주변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누벨프랑스로 이주했고, 마리아 루도비카의 방치 때문에 본작의 나폴레옹 샤를이 원 역사보다 더 비참하게 요절했음을 고려하면 마리아 루도비카는 원 역사보다 더 욕을 먹으며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1] 물론 이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멕시코를 한탕 제대로 털어 늘 모자라는 누벨프랑스의 재정을 보충하고 루이 19세의 누벨프랑스 침공을 대비한다는 목적이 있었다.[2] 원 역사에서는 증기선이나 열기구 등의 신병기를 불신하며 채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철도나 증기자동차 등이 대한으로 인해 원 역사보다 일찍 개발, 상용화되었으므로 대대적으로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3] 그래도 나폴레옹이 능력이 뛰어난 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며 나폴레옹 밑에서 싸운 경력이 있는 프랑스인 장교들을 고문으로 고용해 그의 전술을 교육시키고 있다.[4] 작중 나폴레옹의 행보가 대한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과 비슷하기에 대한 입장에서는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5] 자살하면 교회법상 미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