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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2:19:29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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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1. 개요2. 목록
2.1. 조선
2.1.1. 종교2.1.2. 지역2.1.3. 소수민족2.1.4. 군사2.1.5. 식생활2.1.6. 의학2.1.7. 학문2.1.8. 경제2.1.9. 정치2.1.10. 외교2.1.11. 사회 · 문화2.1.12. 문학2.1.13. 주요 사건
2.2. 명2.3. 일본2.4. 유구국2.5. 대유주2.6. 여진2.7. 북원2.8. 와라부2.9. 안남, 섬라2.10. 아모국2.11. 회회국2.12. 천축국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2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2. 목록

2.1. 조선

조선
朝鮮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파일:조선 어기.svg
국기 어기
위치 한반도,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유귀,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1] 남미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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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무자호란 1588년
경인왜란 1590년
을미동정 1595년
수도 한성부(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서반아인, 내달인, 체코인,
불랑국인, 잉글국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중세 한국어 ~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대왕(大王)(제후)
국성 전주 이씨(李)
통화 저화
원 역사와 비교할 때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물류의 발달과 상업의 진흥 덕에 귀금속의 부재에도 어설프게나마 화폐제도가 유지되고 있고, 전시를 이용한 수취제도 혁신 및 전지정리 덕에 원 역사의 8배에 달하는 조세를 거두는 등 재정규모도 정부 역할에 맞게 증대되었으며, 저 모든 개혁은 민생을 악화시키지 않았다.[2] 또한 보와 저수지 축조 확대 덕에 기근 피해도 줄고 장기간의 기근도 수월히 버틸 수 있게 된 데다, 대외 교역 확대를 통해 상인들의 자본이 증대되고 제도혁신도 거두면서 외연확장과 질적 성장 또한 이루는 등[3] 인구부양력 및 경제력에서도 큰 발달을 이루기도 했다.

군사 부문에서 거둔 성취 역시 독보적이었다. 특히 군제개혁을 추진해 고립병 제도를 정착시키고, 외국 고문을 받아들여 군사적 혁신 및 발전에 뒤쳐지지 않도록 하며, 국민개병의 기초를 다지는 등 제도상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그 성과는 실전[4]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물론 실전경험은 허구한 날 전쟁만 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강국들에 비해 딸리긴 하지만, 저들과 비교할만한 수준에 이른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외교 면에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직 조공 - 책봉 체제 하에 있어 명의 허가 하에 조공국과 통교하거나 그 체계 밖의 국가들과 교류할 때도 보고해야 했고 새로운 '무주지'를 개척할 때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 외교 관계에서의 범위 및 의식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몽골 제부족들과의 무역, 견서사로 시작된 유럽과의 관계 시작과 세계관 확장,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지속, 유구에 대한 패권주의적 행보 등은 원 역사 조선의 폐쇄적인 외교관계와 대비되는 측면이다. 서양에서도 조선을 야만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급의 국제법을 지키는 정상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서로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또한 집현전의 유지 및 청요직 임관만을 통한 승진을 억제한 덕에 관학파가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 재정규모의 팽창 덕에 더 큰 정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 지방행정의 분권화를 통해 효율성을 제고한 것, 부역제도의 개선 덕에 쉬워진 정부사업 등등은 내정에서의 효율을 증진시키기도 하였다.

2.1.1. 종교

본래 조선은 숭유억불을 하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도 탄압했지만, 재석은 자신은 특정 종교를 믿을 마음이 없지만 불교든 천주교든 개인이 믿는 건 상관하지 않고 문화재 보호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불교는 승병 등을 활용하고 천주교는 유럽과의 접촉 통로로 쓴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재석은 종교 탄압은 안하지만 군주인 자신은 그 어떤 유신론계열 종교의 신자도 되지 않기로 하고, 이 방침은 후대 왕들에게로도 이어진다.

2.1.2. 지역


본토의 경우에는 8도로 행정구역을 설정되었다. 그러다 경인왜란을 계기로 새로운 병력확보와 양전과 호적 문제 등 소실된 체계와 문서들의 복구 등을 이유로 광무개혁에 시행된 13도로의 행정개편이 이루어진다. 23부제는 작가 본인과 고증팀 스스로가 헛갈려서 안했다고. 이에 따라 관찰사의 직책이 7개 더 생기는 등 관직의 수가 늘어나면서 양반들의 반발도 적을 수 있었다. 외부영토는 도가 아닌 주로 분류되어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대남주, 구주의 5주로 구성된다. 즉 조선의 전체 영토는 13도 5주가 되었다.

2.1.3. 소수민족

2.1.4. 군사

2.1.5. 식생활

2.1.6. 의학

2.1.7. 학문

2.1.8. 경제

2.1.9. 정치

2.1.10. 외교

2.1.11. 사회 · 문화

2.1.12. 문학

2.1.13. 주요 사건

연도별 정리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2.2.

만력제가 장거정의 부정부패를 눈치를 챈 것이 재석의 고발로 조금 앞당겨졌으며 이를 통해 종계변무 문제를 더 일찍 해결해주었고 조선에서 요청한 벽돌공과 정크선 조선공 등의 기술자도 파견한다. 또 니탕개의 난 당시 조선에 비협조적으로 군 이성량에 대한 보복으로 재석이 이성량의 비리를 고발하여 역사보다 일찍 이성량이 탄핵되는데, 이 덤터기를 조선이 덮어썼다(...) 원 역사에서 이성량은 야인들의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고 이를 진압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것이 소설에서는 좀 더 훗날인 무자년에 대규모로 벌어졌고, 야인들의 공격 대상도 명나라 요동부가 아닌 조선의 부여주가 되었다.

무자호란 이후 조선이 부여주와 연해주를 맡은 뒤 80여 년간 무난하게 관리해온 것을 높게 평하며 또한 조선의 명 고관들에 대한 뇌물 공세로 조선에게 속말주를 추가로 양도하게 된다. 조선으로부터 일본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였으며, 이에 따라 추가로 사신을 파견한 조선에 대해 지원을 약속한다.

조총 제조 기술에도 수십 년 만들다 보니 나름 노하우가 쌓여 이제 몇 발 쏘고 터질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황제 때문에 골치를 겪고 있으며[119] 일본, 건주여진, 유럽에게 노려지고 있는 막장 상태다. 가장 우호국인 조선도 재석의 개방정책의 영향으로 (심지어 사림조차) 조정 신료들이 왜란 발발에도 천병(명군) 지원을 거부하는 등 원 역사보다는 마냥 호의적이지 않으며 재석은 사냥게로 누르하치를 키워줘서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뉴르하치를 중원으로 보내고 대신 만주를 취할 계획인데 현재 국력으로는, 스페인과 함께 세계 최강임에도 만력제 때문에 난감한 상태다.

참고로 조선의 견서사가 알려주기 전까지 유럽인들에게는 병력 2만이면 정복할 수 있는 나라로 취급받았다.[120]

하지만 경인왜란이 별 피해 없이 끝나버렸고[121][122], 요동 지방 기병들도 꽤 남아서 원 역사보단 양호하다.[123] 더군다나 명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북원도 조선이 무자호란 중에 꽤 두들겨서 힘이 빠졌고, 무엇보다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병력과 돈이 줄줄 세는 만주 지방도 조선과 누르하치가 나눠서 태세를 정비했기에 이쪽 세계의 명나라는 충분히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누르하치가 원 역사보다 훨씬 힘을 일찍 키웠다지만 현재 이쪽 세계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을 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124][125]

하지만 만력제가 조선의 일본 보복 원정인 을미동정 때에도 많은 은을 지원해주고, 조선에서 보내는 전쟁 보고서가 재미있다며 매일 조선에 배를 띄워 일일보고를 받으라고 하는 등 막장 짓을 벌이면서 재정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에는 만력제가 조선에서 바친 축소형 판옥선, 왜선들을 호수에 띄우고 조선이 바친 왜병 포로들을 그 왜선에 태운 후 실제 사격을 가해 격침시키는 막장 해전 놀음에 빠져버리고 자신이 죽은 뒤 묻힐 황릉을 조성하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재정이 점차 파탄 나고, 월급을 체불당한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건주위로 망명하고 각지에서 농민 반란의 조짐이 보이는 등 결국 원 역사처럼 멸망할 운명을 향해 가고 있다. [126]

조선이 을미동정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만력제는 자신도 조선처럼 무리한 북원 원정을 추진했다가 10만 원정군의 절반이 전사하고 이여송도 전사하는 등 완벽히 실패하며 몰락의 신호탄이 터졌다. 결국 양응룡의 난도 스스로 진압을 못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으며, 그 대가로 주산군도를 조선에 할양하고 조선군이 잡은 포로는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한다. 만력제의 막장 짓과 명나라의 허약함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들이 숭명 사상을 버리게 된 것은 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력제가 조선이 '북원 원정에 군대를 보낼 수 있게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으로 건주위를 칠 뜻을 내비치면서 사실상 멸망의 낭떠러지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고 있다.[127] 건주위와의 전쟁에서 그야말로 처절하게 발리고[128] 이 전쟁에서 명나라군의 주력은 사실상 소멸했으며[129] 북원 원정, 양응룡의 난, 건주 원정으로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누르하치를 만주 국왕으로 책봉하고 요동을 할양하면서 요동 방어선이 무너졌고, 원래 역사에서 태창제가 되는 황태자 주상락이 독살당하고 인간쓰레기인 복왕 주상순이 황태자에 책봉되며, 책봉식에만 은 1000만 냥[130]을 써버리는 등 계속되는 엄청난 지출과 증세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현실의 명나라보다 약 40여 년 빨리 국가 막장 테크를 하이패스로 타는 중이다.

사실 재석은 장거정의 부패를 알리고 만력제가 원 역사보다 더 빨리 정치에 손을 떼면 건주와 협력하여 손쉽게 명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명색이 통일 중화 왕조라고 재석이 죽을 때까지 버티기는 했다.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만력제 사후 주상순이 태창제로 즉위해 신나게 말아먹다가 재석의 손자인 선조 대에 고영상의 반란군에 의해 나라가 멸망, 태창제는 조선으로 도망치려다 붙잡혀 원 역사와 똑같이 고깃국 신세가 되었으며, 전국의 주씨 일족은 조선으로 망명한 주상학의 아들 주유교 일가를 제외하면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모조리 멸족, 원 역사보다 더 일찍, 더 비참하게 멸망하였다.

2.3. 일본

원 역사와 다르게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했다. 그러나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조선을 공격했다가 자멸하고 다음에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도 반조선 정책을 펼치다가 보복전쟁으로 자멸. 현재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도쿠가와의 천하가 되었다. 잇따른 전쟁 참패로 영토가 축소되고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해 국가의 역량 자체는 원 역사보다 확연하게 뒤떨어졌으나, 세력 집권 자체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이루어져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은 도쿠가와의 천하 아래 나름 조선과는 무난하게 보내는 시기가 될 듯하다. 단, 아직 확실하게 도쿠가와가 일본을 통일한 것은 아니며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시카가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의 승인 아래 세력을 조금 남겨두었으니 차후 불씨는 남아있다.

원나라 침공 때와 달리 신주 불침의 원칙이 깨졌으니 그로 인한 쇼크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일본인들은 66개의 주로 구성된 일본 열도를 신주라 하여 하나의 천하이자 신이 천황에게 하사한 땅으로 여겼는데, 그 신주를 외국의 군주가 전쟁으로 뜯어갔으니 일반인들이나 무사들의 충격이 클 것이다.

2.4. 유구국

경인왜란 도중 오다가 무력시위로 조선 침공에 협조할 것을 협박하고 여기에 굴복해서 오다에게 군량을 일부 상납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본의 참패로 끝나자 조선이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저자세를 취한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조선의 힘을 목도한 유구 왕국이 조선에 화친을 청하자 재석은 유구 수도에 조선 상관을 세우고, 일본의 유구 침략을 사전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유구에 조선 수군 갈레온을 상시 주둔시켜 사실상 유구를 조선의 보호국으로 만든다. 명나라에도 명나라가 나설 필요 없이 조선이 일본을 단단히 막아드리겠다고 하여 명나라의 허락도 받는다.

2.5. 대유주[134]

유럽은 대유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조선이 직접 예수회에 요청해 선교사 세스페데스를 초청했고 세스페데스가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는 보고를 유럽에 보내며 조선은 유럽의 관심을 받게 된다. 스페인과 교황청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선물로 여러 산업 분야의 기술자와 각종 작물 및 가축의 종자들을 보낸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조선에서도 대규모 사신단 견서사를 파견하며 스페인 제국·신성 로마 제국·베네치아 공화국·교황청 등을 방문하고 인삼·모피·도자기 등 다양한 조선산 무역품의 샘플을 선물로 보낸다. 이에 조선과 조선에서 나는 진귀한 약초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널리 퍼지고 조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신단은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조선인 천주교도들에게 제사를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한다. 교황은 허가해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나 확실히 못박기 위해 이에 관련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한다. 세계사에 중대한 변화가 될 수 있는 부분으로, 천주교도의 제사가 허용된다면 조선뿐 아니라 유교 문화권 전체에 천주교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 사신단의 방문 덕분에 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넓어졌다. 실제로 16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은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몰랐고,[주의] 차이나와 키타이를 별개의 국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세계에서는 중국 정복=포교의 망상에 젖어 있는 유럽인들이 한심하게 보였거나 스페인과의 우호를 위해서인지 사신단이 중국, 조선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와 특징 등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했다.[136] 거기다, 이 세계에서는 개방적인 군주가 다스리는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 무기, 초석 장사와 용병 등으로 유럽인들이 중간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다. 신임 마닐라 총독은 경인왜란 때 조선을 지원해 이익을 얻어낼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조선에 간 유럽인들에 의해 천리경[137]이나, 열기구·수학 지식·종두 같은 물건이나 기술들이 유출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파견된 스페인 고문단의 임무 중 하나가 조선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38][139]

펠리페 2세와 식스투스 5세 등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군주들이 최고급 인삼을 대량으로 받았기에 이들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3부에서 스페인과 가톨릭권이 쇠락하지 않고 유럽의 판도가 변하는 나비효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별로 가능성이 높진 않다. 스페인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140]은 명군 한두 명이 몇 년 더 산다고 뒤집어지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 게다가 펠리페 2세와 식스투스 5세는 원래 역사에서도 각각 71세, 68세로 살만큼 살았다. 둘 다 결국 원 역사와 같은 시기에 죽었다.

유럽에 간 견서사가 현지에서 만난 유대인 상인들에게 꽤 시달렸던 건지, 매정하고 깐깐하게 구는 서양 상인을 보곤 '저놈은 유대인이 틀림없다!'며 욕을 하기도. 유럽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조선에도 퍼질지 모를 일이다.

조선의 제사 문제를 조사하러 온 코르나로 추기경이 돌아가는 길에 광해군을 대표로 한 제2차 견서사를 유럽에 보냈고, 스페인과의 관계가 나빠질 경우를 대비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교류를 맺고 있다.

스페인에 새 왕 펠리페 3세가 등극하면서 조선 왕이 왜 천주교로 개종해 펠리페 2세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사절을 보낸 것 때문에 스페인과의 관계가 깨질 뻔했으나, 조선 천회사 이기빈이 아랍에서 약탈로 깽판을 친 것이 스페인에 메카까지 불태웠다고 와전되면서 펠리페 3세가 사과하고 우호관계가 유지된다.

2.6. 여진

1부와 2부에 걸쳐 연해주, 부여주, 속말주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고 해서여진은 완전히 멸망하는 등 외형상은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조선의 발전으로 인한 콩고물을 받아먹으며 동시기 원 역사의 누르하치에 비해 훨씬 인구가 많고 내실을 다졌다. 하지만 조선의 막강한 군사력 강화와 막장 군주로 만주지역을 조선에 일부 넘겨서 소비부담이 덜어지고, 왜란을 가볍게 끝내서 원 역사보다는 군병 소모가 덜한 명나라로 인해 현재로써 원 역사대로의 청나라 건국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애당초 이것보다 조건이 더 좋았던 원 역사에서도 천운이 따라줘서 가능했다.[150] 한데 을미동정에서 조선군을 지원하러 참전했던 슈르하치가 건주위가 가장 필요로 했던 철광석 제련 기술자조총 제조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려오며 미래의 군사력이 올라갔다.[151]

국력만은 원 역사 건주위를 앞질렀지만 누르하치는 조선은 건드리면 반드시 멸망하는 강대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고[152] 명은 요동군 자체는 허접하지만 전쟁을 시작했다간 끝없는 영토에서 나오는 인간의 파도에 깔려 죽게 될 나라로 인식하고 있기에 조선이나 명을 공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명이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자멸할 때 이득을 취하거나 북원 쪽으로 확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 건주위가 현재 살아있는 건 재석의 대중원 분열 전략과 혹시 모를 명나라와의 전쟁 위험에 대한 안전지대 역할을 위해서다. 만력제 사후 중원이 분열되었을 때 중원의 혼란과 분열에 개입해 최소 남북조 체제를 이뤄주고 그 틈에 자신들이 안전하게 비어있는 요동[153] 및 다른 북방을 접수한다는 게 재석의 전략이다.[154] 세자 이성도 누르하치의 아들 다이샨과 이 전략에 대해 상호 지원해주기로 밀약을 맺은 만큼 재석이 죽은 후에 이 전략이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해지는 부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한 뒤, 인구가 무려 120만까지 늘어났으며 요동까지 할양받아 정식으로 왕국이 된다. 이후 요동지방을 안정시키는 한편, 삼정승 육조 등등 조선식 정치제도를 도입해 나날히 발전하고 있다.

2.7. 북원

원 역사에선 조선과 엮일 일이 없었지만, 무자호란이 끝날쯤에 조선의 영토확장에 불안을 느껴 조선과 전투를 벌인다. 무종 시절 명이 수입해 쓰는 조총을 명군에게서 노획하여 총기병을 쓸 수 있게 됐고, [158] 그 당시 북원은 다얀 칸의 치세였으며, 정덕제 이후 명이 북방에 관심이 적어져 위세를 회복했다. 몽골의 대칸 자사그트 칸은 조선을 얕보고 어서 돌아가라고 사신을 보내 으름장을 놓지만, 누르하치에게 얻은 정보로 많은 군세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재석은 조소로 답한다.

결국 전쟁에 코르친 부 10만 기병(총기병+철갑기병 포함)이 동원됐지만, 종국에는 신립과 오도리 부족의 퀴레시안 기병들에게 대패한다. 후에 누르하치를 길잡이로 내세운 신립에게 역으로 침공당해 1만이 넘게 죽은 데다, 포로와 가축·물품도 많이 뺏겼다고 한다.

조선과 건주위에게 큰 피해를 입어 한동안 이를 갈았으나, 어차피 이길 힘도 없고 그냥 조선과 교역을 하는 게 더 이득이 되기에 은근슬쩍 다시 교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몰락하는 듯했으나 조선의 을미동정에 감명 받은 만력제의 명령으로 명군이 무리해서 10만 병력으로 카라코룸 원정을 갔다가 북원의 게릴라전에 당해 병력 반 이상을 잃고 이여송도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이 원정을 막아내면서 대량의 화약무기를 노획하는 등 국력을 회복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와라부가 조선과 밀무역을 개시한다.

그러나 결국 3부에서 몽골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건주와 와라부가 몽골을 협공하면서 멸망한다.

2.8. 와라부

북원이 명의 원정을 막아낸 후 다시 강대해지자 조선에서 왜조총을 밀수해 이들의 통수를 칠 계획을 세운다. 대금은 한혈마와 낙타로 치를 계획. 결국 한혈마 5백 여필, 쌍봉낙타 천 여필, 서역 융단 2천 여필, 그리고 무려 2천근에 달하는 청금석을 대금으로 지불하고 수많은 화기를 구입한다.

2.9. 안남, 섬라

원래 고려 시대 이후로 조선 초를 제외하면 거의 교류가 없었으나 송상 신호영이 쌀을 매입하기 위해 동남아 지역까지 내려오면서 교류가 재개되었다. 철이 부족한 안남에는 철을 넘기고 쌀을 받아올 것으로 보이며 버마와 전쟁 중이라 병사가 부족한 섬라에는 왜군 포로들 중 아시가루 3만 여명을 노예로 넘기고 쌀을 받아오기로 한다. 노예병 외에 일본도일본 갑옷도 직접 사용할 수량만 남기고 모조리 동남아에 팔아치울 계획.

섬라는 마침 명군 나레수안 대왕의 치세기이니만큼 교류가 잘 이어질 경우 이후 동남아 역사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 나레수안 대왕은 조선과 외교를 맺은 것을 크게 기뻐하며 조선에 태국 요리사까지 보내주었다. 섬라에서는 물소를 대량으로 구매해 대남도에서 키우기로 하면서 조선의 물소뿔 자체 공급이 가능해졌다. 섬라에 팔려간 왜군 노예병들은 미얀마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워 섬라에서 왜군 노예병 추가 구매 의사를 전했으며 소문을 들은 안남에서도 왜군 노예병 구입 의사를 밝히는 등 왜군 노예병이 큰 인기를 끈다.

안남에서는 막씨 정권에 맞서 완(응우옌)씨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재석이 긴가민가하지만 20세기의 베트남 왕조가 응우옌 왕조였으니 아마도 완씨가 이기는 것이리라고 추측하여 명에서 책봉받은 막씨 대신 완씨 쪽과 거래하도록 지시한다.(원 역사에서 막씨 왕조는 고작 2년 후인 1593년 멸망하고 베트남 전역을 지배하는 통일 응우옌 왕조는 200여 년 후인 1802년에야 세워진다)

2.10. 아모국

홋카이도는 한동안 북해도라고 불리다가 오다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동안에는 일본의 눈치를 봐서 일본식 명칭인 에조치라고 불렸으며 이후 일본과 전쟁이 난 뒤 아이누인들이 직접 부르는 호칭인 아이누모시르에서 앞 글자를 따 아모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가미군의 에조치 정벌로 많은 아이누인들이 사망했으나 석탈왜(아이누어식으로 아푸카스카무이)가 아이누인들의 수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조선에서 받아온 왜조총 300정을 포함한 물자들로 조선의 일본 원정에 맞춰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큰 피해를 입힌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조선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역으로 인정되었고 조선과 일본 모두 아이누와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의 적인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자 통합되는 듯 했던 아이누 부족들은 다시 흩어진다. 석탈왜는 이 상황에서 세습 전제군주제 도입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성 로마 제국 식의 선거군주제 연맹국가로 아이누를 재편할 계획을 세운다.

2.11. 회회국

최초의 등장은 1차 견서사가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인 것이지만 본격적인 접촉은 1604년 천회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슬람권의 맹주 오스만 제국을 조선인들은 옛 돌궐의 후예라고 여겨 역사상의 돌궐과 구분하기 위해 '현돌궐'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룬 정철의 책 '로마제도 낙성기'가 사대부들에게 유행하며 동로마와 오스만의 관계가 애산 전투 당시의 송나라와 원나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서 사대부들 사이에서 현돌궐에 대해 원나라와 같은 야만적인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한편 스페인 교관들에게 훈련받은 무관들은 스페인인들이 가진 오스만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주입받았고, 조선에 퍼지기 시작한 천주교 신자들 또한 선교사들을 통해 회회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던 차에 1604년 이기빈이 지휘하는 천회사가 모카를 방문하며 첫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이기빈의 커피콩 밀수 시도가 적발되었고 무능하고 오만한 모카 베이가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국왕 친서를 찢어버리면서 처음부터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천회사가 모카, 아덴, 소코트라를 모두 기습으로 불태우고 약탈하게 되어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당시 파디샤인 아흐메트 1세는 조선이 무슨 나라인지 몰랐지만 모카 사건 이후 유럽인들을 통해 조선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한편 유럽에는 조선군이 모카, 아덴, 소코트라 뿐만 아니라 메카까지 불태웠다고 와전되어 가톨릭 세계에서 조선의 이미지가 크게 좋아진다.

2.12. 천축국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가 콜카타에 상관을 열기 위해 무굴 제국과 접촉했으나 무굴 측에서 처음에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빈이 아랍 항구들을 털고 돌아가다가 만나 토벌한 해적들 소굴에 마침 메카 순례를 가다가 해적에게 잡혀있던 무굴 귀족들이 있어 그들을 인도에 돌려보내주자 무굴 측에서도 황태자 미르자 살림이 직접 이기빈과 만나 의기투합하고 조선이 콜카타에 상관을 개설하고 정기 무역을 시행하는 것을 합의한다. 거기에 각종 재보와 인도산 전투코끼리 3마리와 운영병력까지 보내주는데 기존의 동남아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한다.


[1]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2] 화폐제도는 억지로 유지하고 있지만 조세 역시 화폐로 수취해 민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았고, 대동세를 거둬 전세부담을 높였지만 대신 공납을 폐지했다.[3] 은행 설립 준비, 동아시아 물류업 참여, 조면기 등 기술혁신 등에서 이러한 발전상이 묘사된다.[4] 양응룡의 난 당시 파병된 조명군과 반란군의 교환비는 무려 수십 대 일로, 근대 열강의 군대와 전근대의 군대간의 교환비에 가까운 수준이다.[5] 하지만 그렇다고 불탄 사찰을 나라에서 딱히 복구해 주진 않는다.[6] 원 역사에서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1784년 혹은 1779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있으므로 공식 전파가 빨라졌을 뿐 최초의 신자가 생긴 시점은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7] 세스페데스 신부가 프로이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귀족들은 그리스 철학자 같은 마인드로 사후세계 따위 인정 안 하는 데다, 학문으로 보는 경우가 가장 우호적인 시선, 그나마 천주교를 믿는 하층민 신자들도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이해하질 못해서 예수석가모니, 성모 마리아관세음보살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등 유사 불교로 착각하고 있다"고 푸념한다.[8] 사실 2번째 성당은 재석의 허가 없이 은근슬쩍 만든 뒤 허가받은 것이다.[9] 더구나 이 노예병 출신 신자들도 밤마다 주점에 드나드는(이슬람교는 일체의 음주를 금한다) 나이롱 신자들이다. 제례에 술이 필수인 유교 특성상 술을 터부시하는 이슬람 교리와 궁합도 좋지 않다.[10] 그런데 재석이 회회교도들을 국내에 들임으로써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회회교의 극락에까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11] 大我州. 우리가 사는 땅이라는 뜻.[12] 유자광이 관례대로 일가족을 노비로 삼지 않고 식솔과 노비까지 유배지(그것도 나름 비옥한 동네)에 같이 보내주는 것은 너무 편안한 벌이 아니냐며 이유를 묻자, 자기는 원래 무릉도에 사민을 할 생각이 있었으며 사대부가 인생 최대 목표인 과거도 못 보고 언제 왜구가 공격할지 모르는 외딴 섬에 갇히니 큰 벌 아니냐고 했다. 실제 이유는 울릉도에 사람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왜적이 침범하기 힘들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일가족, 특히 죄 없는 여자들을 노비로 만들어 예전에 같이 관리 생활하던 동료들의 노리개로 나눠주는 관습에 환멸을 느껴서기도 했다.[13]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천인들과 피를 섞을 수 없다'고 노총각으로 늙어죽을 기세로 혼인을 않고 버티던 양반들이 있었고, 후에 사면령이 내렸을 때 섬을 나온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재석은 참 멍청하고 고집불통들인 사람들이라 까내린다.[14] 이순신은 여기선 무릉도 출신인 홍가신이 사돈 맺자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홍가신의 아들이 한번 결혼했다가 사별 후 이순신의 딸과 재혼하여 장모인 방씨의 눈총을 받았는데, 이 세계에선 바로 이순신의 딸과 결혼할 것 같다. 여기선 초혼이지만 대신 무릉도 출신이라고 장모가 싫어할 것 같다[15] 물론 조세 혜택은 원 거주자에게만 주어지며 외부인은 바로 체포 후 전가사변이다.[16] 원 역사에선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약탈 행위는 일절 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백성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했다.[17] 사실 위기가 있었는데, 재석의 암살범이 종성순인 것이 밝혀졌다면 대마도 주민들은 분노로 눈 돌아간 조선군에게 대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왕실 위신의 추락을 막고자 사실을 숨긴 신수근이 여러 사람 살린 셈.[18] 종성장은 외할아버지인 정호찬의 집, 즉 한양에서 자랐다. 종성장에게 고향은 한양이었던 셈이고 실제로 정호찬은 외손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은근히 향수를 자극하는 문구를 넣는 공작을 했다고 언급된다.[19] 일기도 쪽이 훨씬 기름지고 농사짓기 좋기도 하다.[20] 주력함 90여 척과 등선군 6,000명을 비롯하여 병력 1만 8,000명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였다.[21]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24명과 부상 186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군은 주둔군 사령관이자 오다의 사위였던 나카가와 히데마스를 비롯해 2,000명이 전사하고 1,000여 명이 포로가 된다.[22] 화약만도 경상 우수군의 1년치 사용량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보급은 적에게 취하는 거다! 원래는 전부 파괴할 예정이었으나 모든 보급품이 선박에 실려 있었기에 철수에 쓸 선박도 확보할 겸 노획했다.[23] 초기에는 토착 여진족들처럼 그냥 산 곳도 있었지만 해서여진들이 그렇게 목책 없는 곳만 골라서 턴다는 것을 안 뒤로는 모든 고을이 방벽을 두르게 되었다고 한다.[24] 다테 마사무네가 해삼위 이북 약 600km 지역에 상륙했을 때에는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조선인은커녕 야인 하나 보이지 않는 황야 그 자체였다.[25] 이 때 황성평의 새 명칭을 정하는 과정은 독자 참여 이벤트로 진행되었는데 고길동, 분당 같은 개그성 이름도 많이 제출되었다.[26] 빙산도, 빙조도라는 이름은, 팬덤에서 1부 재석을 빙산, 2부 재석을 빙조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한 작가의 말장난으로 보인다.[27] 大美州.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28]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줄인 말이다.[29] 왜인여진이 어째서 조선에 충성하는가를 고찰해 보자면, 일본 전국시대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힌 포로의 대우가 어땠는지를 보면 짐작 가능하다. 전국시대 때 포로라 하면 인신매매상의 좋은 자금 공급원,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상품 취급받는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다. 당장 1부의 규슈 정벌 파트에서도 조선군이 규슈에서 쇼니 군을 개박살낸 이후, 일본 현지의 상인들이 조선군에게 쇼니 군 포로들도 다 사겠다고 제안했으나, 조선군은 재석의 어명 때문에 노획한 갑옷과 무기만 팔아치우고 포로는 부상이 심해 바다를 건너기 힘들어 보이는 자들만 팔았다는 묘사가 있다. 그런데 이때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된 쇼니 군 포로들은 자기 나라에서 포로들이 받는 대우가 으레 그렇듯 누군가의 노예로 팔려가 고달프게 살긴커녕, 오히려 좀 추운 지방이지만 살 땅도 주고 가정을 이루고 정착할 수 있게 여진족 과부들까지 줬다. 당시 쇼니 군 포로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포로인데도 이런 특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고, 조선에 정착한 뒤 본인의 자식들이나 손주들에게도 조선이 어떤 은혜를 내려주었는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머리에 심었다고 한다면, 왜인여진이 어째서 조선에 충성하는 민족이 되었는지 대충 이해가 된다.[30] 더군다나 왜인여진은 부계가 일본이니 봉건제 사회에서 오래 살아왔을 것이고, 이 쇼니 군 포로들은 중앙에서 일일이 지방관을 파견하는 조선식 관료제에 익숙하지 않았을 테니 자기 위로 사또-감사-그 외 고위관리-왕 등이 줄줄이 있는 체제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공산이 높다. 영주가 대대로 다스리는 지방에서 영주에게만 충성하며 평생 살다가 몇 년 주기로 지방관을 갈아치우는 동네로 이사 왔으니 뭐... 게다가 오랫동안 통일국가였으며 중앙집권이 잘 된 나라에서 살던 조선인들과 달리, 이들은 수백 년간 지방별로 쪼개진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로 국가에 충성한다는 개념이 희박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익숙하다. 아버지인 왜인들도 이런데 어머니들은 아예 부족사회 출신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부모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데다 수백 년 동안 조선 땅에 사는 외국인 취급을 받아 조선 체제에 섞여들기보다 외인부대로 대접받았으니 중앙집권 체계 하의 조선식 사고가 익숙지 않을 만도 하다. 따라서 알기 쉽게 대충 '영주님 대신 제일 높으신 나으리'에게 충성하면 되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조선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1] 왜군들이 회의 중에 조선 수군에 도왜와 다른 투항자들이 있음이 언급되었다. 또 이순신은 포로로 잡힌 왜선의 수부들은 전후 석방과 귀국을 약속하며 노군으로 부리고 있다.[32] 그 중 하나가 왜노로 위장한 원균.[33] 부친은 야인(여진족) 오도리 부족의 귀족이고 모친은 조선인인 혼혈인. 오도리 부족 내에서도 세력이 큰 귀족이며 조선에 충성하는 친 조선파 야인(여진족)의 대표 격인 실존 인물이다. 원 역사에서는 중종반정 때 능지처참을 당해 죽었다.[34] 이 때 재석이 '왜 오도리에게 총을 주냐고? 내가 이들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라는 독백이 있다.[35] 서림과 임꺽정이 출세한 건 그냥 본인들의 재능이 워낙 뛰어난 덕.[36] 참고로 이 시점에서 여진족 출신 경군 군사들은 혈통만 여진족이지 조선 사람이 다 되었기 때문에, 빡친 사천병들에게 공격을 받으면 맞서 싸우는 대신 군기대를 부르는 것으로 대응했다. 조선인화 이전이었으면 진작에 사천병들한테 주먹 날라갔다 조선군에 복무하는 여진인 전체수는 사천병보다 많지만 이들은 각기 다른 부족끼리 섞인 터라 같은 여진인이 구타 당해도 부족이 다르면 남 보듯 넘어가는 통에 맞싸움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37] 사실 조선에 흑인이 들어왔던 기록은 태조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금방 잊힌 것.[38] 사실 현대의 이슬람교도도 대부분 이렇다. 음주가 위법인 나라에 살면서도 옆나라 가서 술마시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39] 발해는 내부적으로는 고구려 혹은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썼다.[40] 세금으론 가죽과 어포를 받는다고 하는데, 조선이 연해주 전체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세금 안 내고 그냥저냥 사는 부락들도 꽤 많을 것이다.[41] 다만 재석이 빙의하기 이전의 경성군 시기에는 원 역사대로 약화되고 있었고 이에 재석이 신립을 불러들여 오위군 훈련을 지시해 다시금 정예화 시키는데 성공한다.[42] 도감군 한 명의 월급이 평범한 농가의 일 년 수입과 맞먹는다.[43] 사나다 부자는 남만인들에게 실력에서 밀려버렸다며 자존심이 상했다.[44] 사도진 상륙 때도 임꺽정이 그것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도왜병을 실수로 죽이거나 먼저 공격받았다고 조선병을 죽이지도 말라"며 유감은 칼로 푸는 게 아니라 술로 푸는 거라고 타이르기도 했다.[45] 재석은 이 중 100만 정도를 전력으로 보고 있다.[46] 飛虎軍. 즉 하늘을 나는 호랑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재석이 윙드 후사르로 개편된 족친위에게 호랑이 가죽 옷을 입히고, 등에 깃털을 달아 마치 하늘을 나는 호랑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족친위는 이 멋진 부대 이름을 듣고 사기가 올라간다고.[47] 다른 왜장들과 달리 오다의 시신은 가짜다. 오다가 폭사해서 시신조차 남지 않았기에 적당히 아무 시신이나 가져다가 오다의 시신이라고 선언했다.[48] 사실은 원균의 카게무샤였던 슌스케의 시신. 하지만 오다와 달리 조선에서도 가짜인 줄 모른다.[49] 다만 작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 걸 보면 독소전쟁 중후반의 정치장교에 가까워 보이는데, 작 중 언급이 없지만 작가도 이를 의식하고 설정을 짠 것으로 보인다.[50] 자침은 됐다. 박홍섭이 자침시킨 3척, 실수로 뻘에 올라앉아 자침한 이억기 휘하 10척으로 13척.[51] 이 때 배 위에서 불을 피워 알릴 수 없기에, 사후선으로 선원들은 모두 탈출하고 배 자체에 불을 지른다.[52] 갈래선과 비류선. 말갈에서 온 배라는 뜻과 버들잎처럼 빠른 배라는 뜻이다.[53] 뻥카다. 수십 톤이 넘는 물건이라 황소 수백 마리는 필요하다.[54] 단가만큼이나 무게가 무거워 질 가능성도 많지만, 대물저격총처럼 거치해서 쏘는 용도라면 큰 문제는 안 된다.[55] 히데요시 왈, 전주가 뜨니 적의 화포가 더 아군에게 더 정확히 퍼부어지는군.[56] 작중 묘사를 보면 사실상 미사일이나 로켓포 수준이나 다름없다.[57] 옥수수는 그대로 옥수수로 썼는데 고구마는 일본어라서 이름을 새로 붙인다.[58] 펠라그라병. 나이아신 부족으로 생기는 병이며 옥수수만 주식으로 하는 경우 걸릴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옥수수 항목 참조.[59] 뿐만 아니라 땅콩은 기름을 짜서 등불이나 윤활유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60] 설고라는 이름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일본을 통해 카스텔라를 접했던 당시 조선인들이 카스텔라를 부른 이름이다. 혹은 단순 음차해서 가수저라라고도 불렀다.[61] 실제로도 벌꿀카스테라라는 이름으로 요즘 베이커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62] 실은 우여곡절 끝에 왕실 내 설탕을 다 써서 만든 걸 낼름 이순신 모친에게 줘버려서 다른 사람들이 먹을 게 없자 꿀을 사용해 만든 거다. 이 당시 설탕은 약용으로 소량만 수입되는 귀한 재료였다.[63] 의외로 원 역사에서는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그들의 신병을 확보한 지방관과 병사들에게 와인을 건네자 매우 즐겨서 병을 다 비웠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마시는 조선인 입맛에도 맞았던 듯. 와인에 대한 기록은 하멜 표류기에만 있고 실록에는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 여겼거나 아랫사람끼리만 다 마시고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64] 포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당도 높은 과일은 일조량이 많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실제로 이름난 와인 산지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칠레, 캘리포니아 등이며, 그나마 그 중에서도 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는 사실 양조용 포도 재배의 측면에선 북방한계선에 가깝다. 유독 프랑스 와인들이 빈티지에 따라 품질이 오락가락하는 이유도 서안 해양성 기후에 걸쳐 있어 비가 조금만 많이 왔다 하면 당도가 폭락하기 때문.[65] 현재 우리가 아는 배추김치용 통배추는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으로 만들어진 품종으로, 북한, 조선족, 고려인 등 남한에서 품종개량한 통배추가 등장하기 이전에 갈라져 나간 다른 한민족 문화권은 배추가 아니라 무를 이용해 만든 김치가 보편적이다.[66] 사실 원 역사에서도 빙수 비슷한 건 있었다. 얼음을 갈 방도가 없었기에 대충 썰어서 꿀과 과일에 넣고 먹었다. 이게 화채의 기원.[67] 기존의 녹차와 같은 차 종류는 불교 승려들이 주로 마시는 거라는 인식 때문이 양반들이 기피하였지만 커피는 왕실의 높으신 분들도 즐기는 음료라는 입소문도 있고, 외국에서는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검은 색도 조선 사람들 기준에서는 그냥 달인 약 색이기에 괴리감도 적었다.[68] 녹차 외에는 카페인 음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카페인에 대한 내성이 없다시피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커피는 녹차와 비교할 수도 없는 고카페인 함량의 음료였고, 당연히 강한 각성 효과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니 기력을 회복시키는 걸로 인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69] 현재의 카페보다는 16~17세기 유럽의 커피 하우스와 비슷한 분위기. 다방은 이미 궁궐에 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관청 명칭으로 존재하기에 다점이란 명칭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70] 여성인 상희가 카페로서 기획했기에 주류는 일절 팔지 않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방들을 개방식으로 설계하고 종업원들은 손님들과 동석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추가로 남녀칠세부동석인 조선시대 실정에 맞춰 여성전용 별실도 따로 마련해놨다.[71] 커피가 쌀 다섯 되 값이 될 정도로 비싸고 술을 안 파는데도 이렇게 몰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하는 유럽인 여성들을 보려는 사람들의 호기심도 작용했다.[72] 물론 재석의 의도는 "팔지 않으면 훔치거나 뇌물을 써라" 정도였지 "모카를 뒤집어서라도 가져와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기빈은 태수에게 받은 무례한 대접에 분노한 상태였고, 국서가 모욕당하고 부하들이 폭행당했으니 눈이 돌아가서 무력으로 커피를 확보하기로 한 것.[73] 그럼 그 의원들은 뭘 먹고사나 할 수 있는데, 진료는 무료지만 약이나 뜸은 돈을 받을 수 있다. 단 군현마다 내주는 수준이 달라서 문제라고.[74] 이렇게 의시라도 치려는 이유는 최소한 4대에 한 번 이상은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75] 2부에서 상희는 한의학 지식과 20년의 임상경험 덕에 신체나이 17세에 손쉽게 통과한다. 고작 17살에 의녀가 됐다고 주변 사람들은 천재 취급. 덕분에 견제도 꽤 많이 받았으며, 후궁까지 되자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고 있다.[76] 우두는 유럽, 특히 영국에서 자주 발병하는 병이다. 종두법이 영국에서 처음 나온 것도 이 때문.[77] 그래도 예방약이 있기 때문인지 두창이 퍼져도 금방 제압하고 있다.[78] 상희 말로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대로 된 처방이며, 한자를 직역해 이상하게 알려진 것뿐이지 말 그대로 눈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눈병약이라고 한다.[79] 실존인물로 임진왜란 때 시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80] 처음에는 여자에 후궁이라는 이유로 반발이 심했으나 재석배 수학대결에서 상희는 산관들을 탈탈 털어버리며 실력을 입증한다. 과외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역대 최악의 불수능으로 악명 높은 1997년 수능을 쳐도 5프로 안에 들 거라고 한다![81] 재밌는 건 피타고라스 학파가 무리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82]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동방의 고급 수학으로 미적분을 배워서 발전시키게 될 것으로 보이며 만일 지식의 전달이 늦어 원 역사처럼 원조논쟁이 벌어진다면 80년이나 앞선 원조를 놔두고 하는 특대형 뻘짓이 될 것이다.[83] 예의범절·음악·활쏘기·승마술 내지 마차몰기·서예·산술.[84] 2부에서 상희의 환생체 이수현의 업적은 인류 최고의 여성 과학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인 천연두의 백신을 개발했고, 동양 의학을 집대성한 의서 편찬에 참가했으며, 유럽에서 수많은 수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룬 업적을 혼자 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을 이뤘을 때 고작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85] 일상 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문자라는 것은 수학기호로 사용될 최적의 조건이다.[86] 사실 고작해야 1500년대 수준의 선교사 몇 명이 교양 수준으로 익혀 놓은 서양 철학을 성리학자들이 한 방에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걸 세자에게 가르치겠다고 하고 동의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마테오 리치는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를 배우는 데 2년, 그리고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3년 공부하는데 일단 플라톤은 잘 공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3년 익힌 철학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겨내고 세자를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이 세계의 조선이 개방적이래도 세자에게 가르칠 학문이라는 건 나라의 장래를 좌우할 중대사다. 그리고 어지간한 경제력 차이, 문화력 차이가 없는 이상 이질적인 사상은 그렇게 쉽게 전파될 수 없다. 불교가 중국 전파될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만 알아도 세자에게 한 방에 서양 철학을 가르치는 걸 조선인들이 받아들인다는 얘기는 못한다. 당장 플라톤 대표적인 대화편인 국가만 봐도 마지막은 천국을 방불케 하는 저승에 올라가서 얻을 영광과 함께 그리스 신들을 칭송하면서 끝난다. 게다가 혼의 윤회니 상기설이니 착하게 살면 신의 세상에서 태어나니 이딴 얘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결국 불교가 온갖 잡신 섬기듯 얘네는 갖은 그리스 잡신 섬기는 거냐는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논리학도 이미 중국의 명가·묵가·일부 도가·순자 계열이 좀 파고들었지만 결국 주류 유교에게 백마가 말인지 아닌지 그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냐고 논파당한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경우 아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거나 제 1실체가 현실에 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한지 공감해 줄 가능성 자체가 없고 끽해야 그래서 제 1실체라고 할 수 있는 너네 신이 최고라는 거냐?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윤리학은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 위주인데 딱히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넘어설 만한 구석이 없다. 현지 엘리트가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 레벨이 고작해야 3년 공부로 조선 성리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논쟁에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쪽 철학도 그쪽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수준이라면 조선 성리학자들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교사들의 공부가 깊지 않다면 그 만큼 세자에게 가르칠 만한 것도 적기에 유학 공부에 방해될 것도 없을 테고.[87] 내용을 본 사람들은 알지만 이거 야설이다. 잘 하면 조선의 출판업이 어둠의 루트로 탄력을 받을지도 모를 일. 실제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에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야설이 히트를 치면서 출판업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한국도 2000년대 무렵에 초고속 인터넷과 IT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X양 비디오'를 꼽는다.[88] 실제 조선 후기에도 실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서양 서적 번역본들이 수입되었고, 궁궐의 서고에도 수 백 여권 비치 될 정도였다.[89] 중간에 재석이 빙의하기 전 경성군이 얼치기로 익힌 성리학을 논리로 상공업을 억누르며 농업을 장려해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재석이 빙의하며 다시 상공업에 숨이 트일 수 있었다.[90] 다만 "인식이 바뀌었다"는 설정은 다소 고증오류에 가깝다. 명도 무역에 뜨뜻미지근했고 채굴이 적어 금은이 부족했던 역사를 감안하면, 원 역사 조선도 쌀값 등 상공업에 관여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은 거리낌없이 관여한 편이다. 태종 대의 쌀값 관련 논의 기사.[91] 정작 금보다 훨씬 흔하고 실용적인 철광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 서부에는 철광석이 희한하리만치 적다.[92] 예외로 김명원은 서인이지만 병조판서로서 능력이 좋다 보니 여기에 연루시키지 말라고 재석이 언질을 줘서 무사했다.[93] 실제로 전가사변 갔다가 공을 세워 돌아온 윤두수는 바로 호조판서 자리까지 올라간다.[94] 여기에 이항복과 이덕형은 왕실의 일원도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관직도 없는 이들이 징집을 피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며 속오군에 대한 향반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노림수도 섞여 있다고 평가한다.[95] 일본에서 건너온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왜별기에서는 족친위를 공경군(公卿軍)이라고 부른다. 명문대가와 얽혀있지만 실질적인 전력은 못 되는 게 마치 일본의 공경(쿠교)들을 생각나게 한다고...[96] 단 당시 테르시오는 파이크가 주고 머스킷이 보조였지만 조선군은 강선조총이 주다. 일본식 장창술의 대응으로 로델레로 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로델레로 검보병들이 장창병을 대응하는 정식 전술로, 돌격대 검보병들이 장창병의 다리를 공격하여 쓰러뜨리고 장창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이다. 장창병이 이에 대응하려면 장창을 버리고 검을 빼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결국 장창 대열이 무너지게 된다. 파이크만큼 긴 창으로 후려치는 일본군 방진에는 불가능한 전술이라고 하지만, 일본군 장창병들이 후려칠 상대는 조선군 장창병이지 검보병이 아니다. 조선군 장창병을 후려치려다간 잽싸게 파고드는 검보병을 놓치고, 검보병을 막으려다간 조선군 장창병에게 찔린다. 찔리는 걸 감수하고 검보병을 공격하는 것도 힘든 게, 투창으로도 쓸 수 있는 단창이 아닌 이상 창은 조준사격하듯 찔러야 하는데 신속하게 지향하고 조준하는 것도 일인데다 명중률도 그리 좋진 않다. 특히 그 대상이 장창인 경우에는 더더욱. 휘두르고 싶어도 방진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도 문제인 게 검을 든 상대도 창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이기는지 알고 있다. 그야말로 딜레마. 괜히 테르시오 시절에 검보병을 쥐새끼라고 폄하하거나 골치 아프게 여긴 게 아니다. 다만 검 특성상 양성이 오래 걸리고 전업으로 칼질을 하는 것보다는 머스킷질하다가 칼질하는 게 효과적이라 초창기 테르시오에서 가장 먼저 사장된 병과다. 다음으로 사장된 건 마찬가지 이유로 사장된 아퀘버스.[97] 금속활자 만드는 방식은 동양과 서양이 완전히 다르고 규격 역시 다르다.[98] 음식을 나르고 술을 따르는 건 내관과 궁녀들이 담당한다. 궁녀는 왕의 여자이지 기생이 아니기 때문.[99] 이 견서사는 원 역사에서 다테 마사무네가 유럽에 파견한 사절단과 꽤 흡사한 면이 있다. 다테의 사절단에도 귀국하지 않고 유럽에 남은 이가 있으며, 현재도 그 후손이 스페인에 살고 있다고 한다.[100] 조선 사절단과의 연회 자리에 이 인물이 있었고, 조선인들이 우호를 위해 동아시아의 정보를 알려줘서 일본을 도와 중국을 치는건 불가능하며 조선이 특성상 일본보다 선교 등 이익을 얻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전임 총독은 아시아에 대해 잘 모르고 친일성향이 강해 2만 군사로 일본과 합세해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놈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잘못했으면 일본군에 스페인군까지 상대하게 될 뻔했다.[101] 재석은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고려천자 드립을 친 적도 있으며(...), 을미동정 전에는 무려 천자의 국서를 위조해서 이간계를 쓰자는 제안이 조정에서 나오기까지 한다. 원 역사 같으면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바로 삭탈관직당하고 귀양 갈 주장이 나오는데 단 한 명만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의 의견만 제시하며, 그마저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좀 더 신중하게 하자"이다. 재석은 이걸 보면서 조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내심 감탄한다.[102] 물론 만력제가 사리분별을 못해서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한번 조사해 보고 결론 내려도 될 일을 '조선에서 그렇다고 했으니 그런 줄 알아라!'라고 황명을 홀랑 내려버려서 명 조정은 더 이상 사실을 추궁할 수 없게 되었다.[103] 조선 내부적으로는 명나라를 돕는 제1번국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유럽에 대해서는 세상의 빛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104] 덕분에 임숭재의 무희들은 외모가 그닥 별로라는 소문이 돌았다.[105] 중국은 풍만한 여성도 좋아하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가녀리고 나붓한 여성을 높게 쳤다.[106] 거기다 원 역사만 봐도 성리학이나 궁중 법도에서 따지는 미인상과 당대 남성들이 좋아하던 미인상은 차이가 있다. 실제 영조의 경우 모친을 닮아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고 하지만, 성리학 기준에서는 좋지 않은 외모였다고 한다.[107] 차차가 예쁘기도 하지만 돈도 많아서 그랬다. 재석이 무종일 때 대가 지나면 종친들의 재산을 회수하도록 법을 제정해놨기 때문에 자식 또는 손자 대에 땅 뺏기는 종친들이 많다. 그전에 돈을 벌어 놔야 하는 판국에 돈 왕창 가진 차차가 떨어진 것. 아무튼 지원자가 많긴 많아서 재석은 내심 이렇게 바뀔 정도라니 하며 혀를 내둘렀다.[108] 전가사변 갔을 적에 서녀와 김충선이 눈이 맞자 서녀라도 이 추운 동네에서 해방시켜 남쪽으로 보내줄 핑계가 생겼다는 생각에 콜 한 거 아닌가 재석은 추측했다. 사실 나중에는 전가사변도 풀려 일가족이 한양으로 돌아오고 윤두수도 호조판서까지 올라가니 그냥 입 싹 닦고 더 좋은 혼처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서녀라도 저 정도 집안이면 혼사 치르자고 할 데가 널렸다고.), 윤두수는 김충선의 인물됨을 보고 전가사변이 풀린 뒤에도 혼약을 깨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서 결혼하자고 한 것도 있고.[109] 재석도 그걸 보고 저런 식으로 알아서 귀화하는 놈들이 나올 거라 봤다. 한편으로 용병들이 강선조총이나 미니에 탄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비밀이 새지 않게 적당히 황금을 찔러주고 귀화시켜 눌러앉힐까 생각도 하는 중.[110] 소설에 언급은 안 돼 있지만, 작가가 조선 사절단이 유럽 가서 창관에서 회포를 풀었다(...)고 한 걸 보아 귀국할 때 몇몇은 서양인 처나 첩을 데려올지도 모른다.(...)[111] 이후, 상희의 딸이 다이샨에게 시집가면서 다이샨이 조선의 부마가 된다.[112] 실제로 세팍타크로 경기에 사용되는 공은 등나무로 만든다.[줄거리] 홍 판서의 외동딸 홍춘심은 스페인인 교관 알바레스와 하룻밤 관계하여 아들을 갖는다. 그러나 후작 가문 삼남인 알바레스는 두 형이 모두 사망했으니 영지를 계승하러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스페인으로 떠난다. 이 아들 홍희동(서반아판에서는 디에고)은 홍 판서가 자신의 서자로 위장해 키우게 된다. 아버지와 누나가 실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였다는 충격적 출생의 비밀을 안 홍희동은 부친을 찾이 스페인으로 떠나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인 산도발, 조선인 말동이, 일본인 사스케, 아프리카인 흑손이 등의 동료들을 얻으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 스페인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버지 비얄바 후작 알바레스는 상속권 문제 때문에 홍희동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허균은 원래 홍희동의 이복자매와 홍희동이 사랑에 빠지는 전개로 가려고 했으나 그 또한 조선 선비였던지라 차마 근친물은 쓰지 못해 포기한다), 그러자 홍희동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스페인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이단자라고 영국 사략선을 마구잡이로 처단하는 스페인군의 모습에도 회의를 느끼고 결국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자 포기하고 미주로 떠나 모든 인종과 종교가 평등하게 사는 자신만의 나라를 세운다.[114] 허균의 허락 없이 홍희동전을 개작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했기에 이는 저작권법을 위반한 해적판이다. 허균은 유럽에서 저작권 개념을 배우긴 했지만 상대가 중전이라 찍소리도 못 냈고, 이후 재석이 중전에게 저작권 개념을 설명해줘서 허균은 늦게나마 로열티를 받았다.[115] 작중에서는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내용이 소설에서 묘사된 원균의 행적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위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116] 계갑대기근의 경우 날씨의 문제보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전란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일 것이라는 추측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년으로 묘사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긴 하다.[117] 조선에서 노역 중이었던 왜노병들과 규슈에서 모집한 의용병들로 구성. 아이러니하게도 오다의 대륙 출병 꿈을 그의 사후 10년 만에 조선이 이뤄주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원 역사에서 중일전쟁때도 밟아보지 못 한 사천 지방까지 가게 되었다.[118] 그런데 매질한 건 안 팔겠다고 거부한 커피 묘목을 밀수하려던, 즉 산업스파이 짓을 하다 현행범으로 잡혀서다. 그냥 목을 따버리고 "그런 사람 몰라"해도 되는 일인데 굳이 매질하고 친서를 찢어버려서 일이 커졌다.[119] 사실 장거정의 부패가 알려지면서 만력제가 정치에 진절머리가 난 것도 있다.[120] 그런데 유럽인들은 멋도 모르고 그렇게 판단했지만, 실제 명나라 군대는 문제가 많다. 명나라 항목의 군대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동시대 조선과 다를 거 없는 동원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기로 가면 갈수록 재정 악화로 그나마 있는 병사들의 급료도 지불하지 못해 기강은 바닥에 떨어졌고, 전쟁이 났을 때도 상비군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였고, 이 문제는 실제 명나라 멸망에 치명타가 되었다.[121] 사실 총체적인 지출은 큰 차이가 없을 듯하다. 원 역사와 비교하면 군사 파견비용을 대신하여 대략 은화만 1,400만 냥(첫 지원 300만 냥 + 종전 지원 300만 냥 + 보고 지원 300만 냥 + 5년간 100만 냥)이 나가고 그 대가로 포로와 몇 가지 물품들 정도나 받았다. 그리고 무자호란 발발로 은 300만 냥 어치의 지원(절반은 미곡)도 있었다. 즉, 지금까지만 쳐도 1,700만 냥에 달하는 거액을 퍼준 셈이다.[122] 물론 원 역사 임진왜란처럼 명나라가 직접 피를 흘린 것도 아니고 돈만으로 일본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으니 이득이라 볼 수도 있지만, 국고 소모로 인한 군병들에 대한 월급 지체가 더 심화될 것을 감안한다면 '별 피해 없다'치부할 상황은 아니다.[123] 하지만 이성량 실각 이후 요동도사가 바뀌고 나서 2년 만에 요동군 규모가 절반으로 준 것을 보아 미래는 밝지 않다.[124] 이것보다 조건이 나았던 원 역사에서도 청 건국까지는 기적 같은 천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25] 하지만 이 만력 시대의 평화는 상서들이 우려하듯 전적으로 조선의 강성함에 의존하는 데다 국방력 약화가 진행 중인지라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126] 그럼에도 재석은 만력제가 죽은 뒤에 정신 차리는 황제가 나올 수도 있고 중간에 누군가 찬탈할지도 모른다며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127] 조선은 건주위와 우호적이고, 명나라와는 갈수록 사이가 나빠지고 있고, 재석 입장에서도 현실보다 몇 배는 빨리 망해가는 명나라와, 원 역사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국력을 지닌 건주위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특히 재석의 계략(건주위와 명나라가 싸운다면, 그 틈에 다칭유전이 있는 요동을 확보하는 것)에 따라 건주위를 지원할 것이 확실하다.[128] 허투알라로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는 대신 양호의 건의로 사로병진을 전개했다가 일방적으로 각개 격파당한다.[129] 새로 징집한 병사들 중 1선급과 상비군들 중 정예부대, 척가군, 사천 장창병, 요동군 등 거의 명군 전체를 동원했으나 일반병들은 전멸, 사천병 5천은 겨우 조선으로 도주했으며 요동군 2만은 지휘관을 프래깅 한 뒤 단체로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지휘관급만 하더라도 형개, 마천승, 이여백 등등 주요 장수진들이 전사, 처형되었고 진양옥과 유정은 조선으로 망명했다.[130] 참고로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때 조선에게 지원해준 돈 총액이 1700만 냥이다.[131] 사실 원 역사에서 일본 수군이 포를 많이 쓰지 못한 건 첨저형 디자인과 그놈의 삼나무 재질 때문이라서, 물리학적으로 포를 쓸 수 없는 저주를 받아(...) 배를 암만 크게 만들어봐야 의미없다.[132] 그래서 이 시기 동안은 본의 아니게 노동력이 남아돌아서 잉여 노동력을 산성이나 대성당 등을 쌓는 토목공사에 돌렸다.[133] 여담으로, 실제 온돌은 한 번 공기를 데운 다음 그 공기로 다시 바닥을 데우는 것이라 열 효율 자체는 화로보다 나쁜 난방방식이다. 온돌의 장점은 요리할 때 쓰는 폐열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난방에 전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난방효율이 나쁘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산림이 빠르게 파괴된 걸 보면, 아마 일본도 빨리 석탄 테크로 넘어가지 못하면 땔감 부족으로 고생깨나 할 것이다.[134] 大遺州. 조상이 남긴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땅.[주의] 절대로 중국이 큰 나라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설마 프랑스 인구의 10배에 육박하는 거대제국일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덩치가 크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136] 소설에서도 마닐라 총독이 스페인군 2만+왜군의 전력으로 중국을 침략할 망상에 부풀어 있었는데, 신임 총독이 조선 사신단에게 들은 정보를 들먹이며 핀잔을 주는 장면이 있다.[137] 이 당시엔 아직 유럽에서도 망원경이 개발되지 않았다.[138] 일부 독자들이 강선 조총과 미니에 탄의 유출을 크게 걱정하는데, 사실 이건 별 문제가 안 된다. 유럽에서도 강선을 파면 명중률이나 사거리가 높아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작 단가가 비싸지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어 19세기까지도 군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군대의 제식 소총보다 '캔터키 라이플'처럼 민간의 엽총이 강선식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니에 탄의 경우도 강선 총신이 아니면 탄이 엉뚱하게 회전하며 위력이나 명중률이 형편없어진다.[139] 증기기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에 헤론이 발명해서 신전 문을 '신기하게' 여는 정도 용도지만 아무튼 쓰이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외국 사절에게 보여주는 신기한 물건 정도로 사용되었고,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에도 일부에서 실험적인 과학 도구로 제작되긴 했지만 실제 산업적 용도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노예의 노동력이 증기기관 제작비나 연료비보다 훨씬 쌌고, 산업혁명을 할만큼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140] 카알 5세 때부터 펠리페 2세 때까지 누적된 후로(스페인 국채) 총액은 1억(!) 두카트에 이른다. 1두카트는 순금 3.5g 금화이니 모두 녹여서 금괴를 만들면 자그마치 350톤이나 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141] 말린 고기나 염장 고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다행히 바다 생선은 먹었지만 그만한 양을 잡아대느라 고생했다고.[142] 이 시점에 조선에서 잡아둔 살아있는 호랑이는 총 3마리였는데 재석은 빨리 2마리를 더 잡아서 5마리를 보내자고 하나, 정곤수가 1마리도 관리하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5마리를 보내겠냐고 해서 결국 3마리로 타협했다. 원래 4마리를 로마 법왕, 신성로마제국 카이저, 프랑스 국왕, 잉글랜드 여왕에게 보내고 예비용 한 마리까지 총 5마리를 보낼 생각이었다. 관리상의 문제로 새끼 호랑이를 보낼까도 했는데 코로나르 추기경 일행은 귀국 준비를 마친 마당에 호랑이가 새끼 낳을 철까지 기다리자니 시간이 너무 걸렸다.[143] 실제로 원 역사에서 1700년대 중반에 오렌지, 라임 등이 괴혈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비용 문제로 도입되지 않았다. 이런 과일의 효능이 밝혀지기 이전에는 날고기를 먹어서 치료했는데 당연히 이건 훨씬 더 비쌌다.[144] 비타민C가 고온에서는 파괴되기 때문. 재석은 당대 수준에 맞는 한의학적 해석을 끼워맞춰 말한다.[145] 그동안 보내준 인삼이나 호랑이 정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많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만한 지식의 전파다.[146] 조선에 피해가 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종두법이 살릴 수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놔둔다는 것은 매우 비인도적인 발상이고 조선의 국력 우위는 정치와 외교로 유지하라는 말. 상희가 본래 의료인이었고 현대에서 뿐 아니라 조선에서 천민으로 지낼 때나 후궁이 되었을 때나 상당히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연재 당시 이로 인한 논란이 좀 있었다.[147] 대표적으로 천연두로 요절한 메리 2세가 장수한다던가. 메리 2세가 요절하고 살아남은 자손이 없었기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이 끊겼지만 메리 2세가 생존해서 장성한 자손을 남긴다면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이 유지될 수도 있다.[148] "Sir Heo's bean cheese"[149] 강릉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으로 알려져 있다. 초당은 허엽의 호.[150] 지금 조선의 군사력이면 북방군 중 일부만 투입해도 건주위 따위는 순삭이다.[151] 나중에 이는 조선의 묵인이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는 게 밝혀진다.[152] 올바른 인식이다. 건주위가 아무리 국력이 강해져도 지금의 조선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작금의 조선은 상비군만 15만 이상이고 그 대다수가 실전 경험이 빵빵하고 최신식 무기와 전술로 단련된 정예들이다. 게다가 북방은 속오군도 모조리 강병이라서 건주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원 역사보다 강해진 것도 조선이 실 역사보다 훨씬 강해진 것 때문에 붉은 여왕 효과 덕을 본 정도뿐이다.[153] 특히 미래에 유용하게 쓸 다칭유전 지역[154] 현재 재석의 이 대전략은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다. 전략 자체는 좋은데 전개 과정에서 개연성에 문제가 생길 만큼 억지로 청나라 만들어서 억지 병자호란 만드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 부분.[155] 당장에는 화약도 없고 고작 10명의 대장장이에 불과하며 대량생산 체제로 가기에는 무리가 많지만 장기적으로는 상당히 유용하다.[156] 물론 그래 봐야 조선이랑은 화력이 넘사벽 차이다. 그리고 왜조총 자체가 활강조총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157] 재석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와 조선이 같은 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158] 1부에 나오는 이여송의 선조 이춘미도 부친을 몽골군 총에 잃었다고 나온다. 덕분에 이춘미는 조선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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