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 |
등장인물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2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2. 목록
2.1. 조선
조선 朝鮮 | ||
국기 | 어기 | |
위치 | 한반도,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유귀,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1] 남미주 등 | |
역사 | ||
수도 | 한성부(漢城府) | |
민족 |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서반아인, 내달인, 체코인, 불랑국인, 잉글국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등 | |
언어 | 중세 한국어 ~ 근대 한국어 | |
문자 | 한자, 국문 | |
종교 |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등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 |
국가원수 | 대왕(大王)(제후) | |
국성 | 전주 이씨(李) | |
통화 | 저화 |
군사 부문에서 거둔 성취 역시 독보적이었다. 특히 군제개혁을 추진해 고립병 제도를 정착시키고, 외국 고문을 받아들여 군사적 혁신 및 발전에 뒤쳐지지 않도록 하며, 국민개병의 기초를 다지는 등 제도상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그 성과는 실전[4]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물론 실전경험은 허구한 날 전쟁만 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강국들에 비해 딸리긴 하지만, 저들과 비교할만한 수준에 이른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외교 면에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직 조공 - 책봉 체제 하에 있어 명의 허가 하에 조공국과 통교하거나 그 체계 밖의 국가들과 교류할 때도 보고해야 했고 새로운 '무주지'를 개척할 때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 외교 관계에서의 범위 및 의식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몽골 제부족들과의 무역, 견서사로 시작된 유럽과의 관계 시작과 세계관 확장,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지속, 유구에 대한 패권주의적 행보 등은 원 역사 조선의 폐쇄적인 외교관계와 대비되는 측면이다. 서양에서도 조선을 야만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급의 국제법을 지키는 정상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서로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또한 집현전의 유지 및 청요직 임관만을 통한 승진을 억제한 덕에 관학파가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 재정규모의 팽창 덕에 더 큰 정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 지방행정의 분권화를 통해 효율성을 제고한 것, 부역제도의 개선 덕에 쉬워진 정부사업 등등은 내정에서의 효율을 증진시키기도 하였다.
2.1.1. 종교
본래 조선은 숭유억불을 하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도 탄압했지만, 재석은 자신은 특정 종교를 믿을 마음이 없지만 불교든 천주교든 개인이 믿는 건 상관하지 않고 문화재 보호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불교는 승병 등을 활용하고 천주교는 유럽과의 접촉 통로로 쓴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재석은 종교 탄압은 안하지만 군주인 자신은 그 어떤 유신론계열 종교의 신자도 되지 않기로 하고, 이 방침은 후대 왕들에게로도 이어진다.- 불교
1부 시점에서는 원 역사에서 연산군이 없애버린 원각사가 그대로 남아있다. 재석은 왕실 원찰이란 이유로 세금도 안 내는 원각사가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없애면 이게 불교 탄압의 시발점이 되어 원 역사에서의 불교 문화재 반달리즘이 시작될까 봐 남겨둔다. 하지만 인력이 필요할 때 원각사에서 빼내 쓰는 등 규모가 커지지는 않게 유지한다. 불교를 믿진 않지만 불교 문화 자체는 보존되기를 원한 재석이 불교를 은근히 감싸줬기에 실제 조선에서보다 불교의 교세가 훨씬 강하고 대접도 괜찮다. 가끔씩이지만 승과도 유지되고 있으며 과격한 선비들이 절에 방화하는 등 불교에 반달리즘을 하면 전가사변을 시킨다.[5] 경인왜란 발발 후 '일본에서는 중들의 취급이 좋다던데 일본에 협력하는 거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지만, 승려들이 더더욱 국란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신을 씻어냈다.
- 천주교
재석이 유성룡에게 시켜 일본에서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직접 초청하면서 원 역사보다 200년이나 일찍 조선에 전파되었다.[6]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한양 사대부들에게 선교를 시도했으나 성과는 처참했고[7] 천민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교세를 확장하고 있으며, 무자호란을 계기로 병사들 사이에서도 적게나마 교인이 나타나고 있다. 1590년 시점에서 신자의 수는 약 1만 명이고 대부분 내세에 천국에 가길 원하는 천민들이며, 개성에서는 남만 상인들과 자주 교류하던 중인, 사대부들 중에서도 신자가 생겼다. 도감군 내에도 1,000여 명의 신자가 있다. 교황청에서는 동방의 이교도 국왕이 직접 선교사를 초청한 첫 사례이기에 조선 선교에 크게 주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폐사찰 한 곳을 불하받아 최초의 남만사로 개장했고 이후 개성에도 성당 하나가 생겼다.[8] 일단 반달리즘을 싫어하는 재석 특성상 그나마 선교하는 지역 문화에 적응하려는 예수회만 들이고 나머지는 받지 않을 생각이며, 교황청도 이 방침에 조금 불만은 있지만 예수회만 보내고 있다. 재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유럽에 파견된 견서사에게 교황에게 직접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제사 지내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교황은 이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지만 공의회를 열어 확실하게 못 박고자 하며 만일 실제로 제사 허용이 이루어질 경우 동아시아 전역에 천주교의 확산이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왜란이 발발한 후 루이스 프로이스, 호세, 다 실바 등 남만인들이 오다에게 협력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이미지가 나빠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전란 소식을 듣자 팔라데스 신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동원하여 이탈리아식 요새를 건설하겠다고 했고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들에게 도감군 자진입대를 권유하는 등의 고군분투로 이미지 악화는 막았다. 2차 견서사에서 클레멘스 8세에게 추가적인 조치가 있기 전까지 신주를 모시는 것은 불가하나 위패를 모시는 것은 가능하며(위패는 유럽의 초상화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조정의 제사에 참가하면 고해성사를 하는 조건으로 제사 문제를 임시로 해결받는다. 제사 문제가 대충 해결되자 이전부터 천주교에 호감을 보이던 김류가 세례를 받고 조선 조정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된다. 1595년 기준 조선교구 소속 신부는 조선교구 주교 팔레데스를 포함하여 총 14명이다. 그 중 11명은 예수회 선교사이며 3명은 부안에 정착한 이주민들 중 포함된 평신부들. 그리고 제3차 견서사가 만난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유럽식 성당을 짓기 위한 건축 기술자 100명을 보내주어 유럽식 대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조선을 통해 중국인, 여진인, 몽골인 신자도 차츰 생기고 있다.
예수회 성직자들이 조선에 적응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사대부들과 한시를 지으며 성리학을 배우는 등 조선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며, 제사 문제를 가톨릭이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온건한 방향으로 선교했기에 원 역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선에 잘 뿌리내릴 수 있었다.
- 미륵신앙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탄압받는 신앙. 1부에서 미륵교 교주 배목인의 역모 미수 사건 이후로 미륵신앙은 미친놈들이나 믿는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는 인식이 퍼진 듯하다. 재석 본인도 당시의 트라우마가 남아 아직도 미륵 얘기만 들으면 이를 간다. 게다가 미륵신앙의 특성상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흥하는 법인데 조선 사회가 안정되어 있기도 하니 교세는 매우 미약할 듯. 더구나 구세주를 원하는 메시아 사상은 천주교에도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미륵신앙보다는 거의 공인된 거나 마찬가지인 천주교 쪽을 더 많이 믿을 것이다.
- 회회교
조선 내의 회교도는 천회사가 모카에서 데려온 동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이 전부. 회회교의 존재 자체는 확실히 알고 있는데, 모카 태수가 사고친 뒤로 회회국도 이들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9][10]
2.1.2. 지역
본토의 경우에는 8도로 행정구역을 설정되었다. 그러다 경인왜란을 계기로 새로운 병력확보와 양전과 호적 문제 등 소실된 체계와 문서들의 복구 등을 이유로 광무개혁에 시행된 13도로의 행정개편이 이루어진다. 23부제는 작가 본인과 고증팀 스스로가 헛갈려서 안했다고. 이에 따라 관찰사의 직책이 7개 더 생기는 등 관직의 수가 늘어나면서 양반들의 반발도 적을 수 있었다. 외부영토는 도가 아닌 주로 분류되어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대남주, 구주의 5주로 구성된다. 즉 조선의 전체 영토는 13도 5주가 되었다.
- 대아주[11]
- 무릉도
원 역사의 무릉도는 사실상 빈 섬이었으나 사림의 성지이자 반상의 구분이 없는 말 그대로 무릉도원 같은 곳이 되었다. 재석이 1부에서 무오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을 유배 보내 놓은 귀양지였는데 인종 시절 사면되면서 육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12] 하지만 기껏 사면을 받았음에도 대부분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30년의 세월이 지난 뒤라 유배를 간 당사자들은 대부분 늙어 죽었고 그 자손들은 섬에서 한번 완전히 세대교체가 되면서 섬 생활에 익숙해져서라고 한다. 당대 최고의 사림들이 모여 있던 곳이기에 성리학의 성지가 되었지만 유배 기간 동안 외부에서 혼처를 구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섬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필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근친혼을 할 수야 없으니 별 수 없이 천인들과 혼인하게 되면서 반상의 구분이 사라져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공부하는 문화가 되었다고 한다.[13] 덕분에 사림들은 무릉도에서 공부는 하더라도 무릉도 출신과 혼례는 올리지 않는(피를 섞지 않다가 육지로 나온 가문 출신은 예외) 불문율이 생겼다.[14] 매년 물개 100마리를 바치는 것 외에 조세가 없기에 이를 부러워하여 밀항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15] 재석이 서양인들과 무역을 시작하며 무릉도를 해삼위까지 가기 위한 기항장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했기에 곧 서양인들과도 접촉할 듯. 무릉도 선비들은 아침에 고기를 잡고 점심에 사냥을 하며 밤에 글을 읽는 먼치킨들이라, 이야기책에 흔히 나오는 지나가던 선비가 무릉도 선비들을 가르키는 용어가 될 것이란 말이 나왔다. - 거제도
아소유광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아소씨 계열 도왜들이 대규모로 망명하자 이들을 모두 거제도에 정착시킨다. 평범한 아시가루 따위까지 왜별기로 받을 이유는 없으니 일단 농사나 짓도록 한 것. 이들 중 정예한 이들은 사나다 부자와 시마즈 토시히사가 왜별기로 차출해 갔고 나머지 도왜들은 등선군으로 편성해 수전에 동원한다. 이 사실은 일본에도 알려져 소 요시토시도 도왜병들을 보자마자 '거제도 병사들'이라고 알아볼 정도다. 전쟁 이후 도왜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대마도에서 구출된 대마도 사람들도 전후에 많이 남게 되면 조선 땅임에도 일본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독특한 지역으로 남을 듯하다. 전쟁 중에는 이순신 함대가 붙잡은 포로들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전쟁 후에도 왜군 포로들과 대마도 난민들이 임시 수용된다. 재석은 후일 거제도의 별명이 왜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을미동정 이후 거제도에 살던 왜인들은 대부분 구주로 귀환하면서 거제도에 남은 왜인은 거의 없다고 한다. - 강릉
경인왜란 초기 우에스기 군 2만 명이 상륙하자 강릉부사 이응현이 전투 없이 항복하여 점령되었다. 그리고 서산대사가 우에스기 군과 휴전을 맺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로 교전하지 않는 대신 우에스기 군도 강릉 주민을 해치지 않고 전쟁이 끝나면 우에스기 군은 무사히 철수하도록 약속한다. 전쟁이 끝난 뒤 왜적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전라도, 경상도 주민들이 보기에는 강릉 주민들은 '우리가 죽어나갈 동안 왜적에게 협조해서 자기 목숨만 챙긴 부역자들'이라는 인식이 생겨 강릉이 부역자들의 고장이라는 불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 세자 이성이 부왕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강항을 보내서 인질 교환 협상을 시도하나 우에스기가 딱히 악행을 벌인 것도 없었기에[16] 강릉부사와 사대부 30여 명 외에는 강릉 백성들은 강릉을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며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강원도 출장 중 강릉에서 전쟁을 맞은 허성(허균의 형)이 도망가버린 부사와 향군장 대신 임시 향군장을 맡아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 강릉 백성들을 처벌한다면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질 각오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석은 강릉 백성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올라온 상소들을 묵살하는 한편, 이응현을 참수하고 강릉에서 도망친 사대부들을 전가사변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어 사태가 크게 악화되지는 않았다. 한편 인질 구출을 위해 간 강항은 우에스기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 경주
조선 시대에는 중요한 도시가 아니게 되었지만 경인왜란 때 고려 시기 동경으로 불렸고 신라의 천년도읍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하며 지켜야 한다고 훈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군이 원 역사보다 왜군을 훨씬 잘 막아내어서 불국사가 불타지 않는 수혜를 입었다. - 대마도
여전히 인구 대부분은 왜인이지만 조선 영토라는 인식이 상당히 확고해졌다.[17] 1부 막판에 대마도주가 된 종성가는 3년 만에 전사했고 뒤를 이어 8살짜리인 그의 아들 종성장이 허수아비 도주가 되었다. 일본어도 잘 못하던 그는 20세 나이에 향수병에 걸려[18] 도주 자리를 내려놓은 뒤 도성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사실상 조선 조정의 직접 통치를 받는다. 종성장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 뒤 형식상의 도주 자리는 일기도의 종우마 일가에게 넘겼으나, 일기도를 본거지로 하게 된 종씨 일가는 가문의 제사 때나 잠시 방문할 뿐,[19] 조선 관원들이 다스리고 있다. 재석은 전쟁이 끝나면 조선인들을 많이 전가사변 보내서 제대로 영토화할 생각이지만, 이미 대마도인들은 거의 80년 동안 세대도 바뀌고, 기근에 시달리면 조정에서 구휼도 해주면서 자신들을 조선 사람이라고 여기며 충성을 다하고 있다. 또한 종씨가 사실상 대마도를 떠나면서 종씨 이전에 대마도를 통치하던 아비루 씨가 아씨로 성을 바꾸고 다시 지역 유지가 된 듯. 실제 왜란이 발발한 후 조선에서 파견한 병력은 3백 명 정도지만, 대마도 토착 병사 1천여 명이나 다른 주민들은 왜군이 침입해 오자 일절 협조하지 않고 산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벌인다. 이후 일본 본토와 조선의 일본군 점령지를 이어주는 보급선의 중간기지 역할로 활동 중이었으나, 후방에 위치하며 군기가 느슨해진다. 거기에 100년간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지리와 항로를 조선 수군이 알고 있었기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20]이 주요 항구 3곳을 동시공격해 수월하게 일시 탈환한다.[21] 이후 조선 수군은 100척의 함선과 식량, 화약을 비롯한 막대한 일본군 보급물자[22]들을 비롯해 끌려온 조선 포로 12,000여 명과 대마도 주민 9,000여 명 및 일본군 포로 1,000여 명을 데리고 철수, 이후 일본군이 재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보급선 보호를 위해서 도쿠이 미치유키 지휘하의 2만의 일본군이 대마도에 상주해야 하는 등 일본군 전력이 약화되었으며, 이 패전의 책임으로 전사한 나카가와 히데마스와 생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모든 영지를 몰수당한다. 경인왜란 종결 시점에도 여전히 일본이 점령 중. 일단 당장 탈환하기에는 군사적, 정치적 문제가 많고 일부러 대마도를 일본이 점령하도록 놔두는 것이 후일 일본 역공의 명분을 강화시켜줄 것이기에 재석은 대마도 탈환을 몇 년 미루려고 한다. 경인왜란 종결 당시 대미도 수비병은 무려 4만이었으나 본토의 식량난으로 다음 해 1만 명으로 축소되었으며 그 수가 충분히 더 줄었을 때 조선이 역공을 갈 계획. 을미동정 이후 완전히 경상도에 소속된 조선 고유 영토로 확정되었다. - 일기도
대마도와 달리 종의지가 도주로서 직접 통치하고 있기에 여전히 조선보다는 일본에 가깝다. 조선군이나 관원이 상주하지도 않는 듯. 경인왜란 발발 시에도 종의지가 오다 편에 붙었기에 대마도와 달리 전투도 없이 일본에 빼앗겼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종씨 일가 숙청과 더불어 조선인들을 전가사변시켜 조선화할 가능성이 높다. 경인왜란 종결 시점에도 여전히 일본이 점령 중. 종의지를 포함한 종씨 일가 대부분이 경인왜란 도중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기에 왜장으로 완전히 전향한 원균이 종의지의 뒤를 이어 일기도주로 분봉된다. 도주가 된 원균은 제 본성을 못버리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며 해안 경비도 제대로 하지 않아 탈출하는 도민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다. 역시 을미동정 이후 완전히 경상도에 소속된 조선 고유 영토로 확정되었다. - 부여주
8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은 북평 이남의 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철의 난을 계기로 북평보다 북쪽에 새로 삼성이란 도시를 세웠으며 적극적으로 인구를 전가사변시켜 조금씩 개척해나가는 중. 인구 약 40만. 여진의 침공이 가장 잦았던 곳이다 보니 마을도 마을 전체를 목책으로 둘러친 서부극의 개척촌처럼 만들어졌다.[23] 석성이 아니라 목책인 이유는 석재는 찾기 어렵지만 아름드리나무는 지천에 널려서다. 급하게 세워야 하기도 했고. 거기에 흙을 쌓고, 겨울에는 물을 부어 얼음으로 보강했다는 곳도 많은 듯. 다행히 땅이 척박하지 않고 재석이 감자 같은 작물을 들이면서 연이은 가뭄에도 별 다른 식량난을 겪진 않은 듯하다. 을미동정 이후 인구 약 60(+50-@)만. - 연해주
80년간 이름만 존재할 뿐 별도의 병마사 임명도 없이 부여주에 묶여서 관리되다가 드디어 규모가 조금 성장하여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되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은 해삼위를 중심으로 대략 남부 1/3 정도. 부여주와 달리 난폭한 야인도 없고 국경지대도 아니어서 전가사변도 별로 없다. 경인왜란 초기 인구는 약 5만 명으로 야인 3만 명, 조선인 1만 명, 노역하는 죄수 1만 명 정도라고. 야인들은 대체로 내륙에 거주하며 사냥을 하고 조선인들은 주로 해안에 거주하며 어업에 종사하는데, 여름에는 북상해서 생선과 고래를 잡아 말리거나 염장을 하고 겨울에 남하해서 이를 판매한다. 조선의 전 영토 중 가장 미개발된 황량한 지역.[24] 다테 마사무네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북해도 쌀을 가져왔기에 추후 벼농사가 가능해지며 개발될 여지가 생겼다. 감자가 보급되고 경인왜란 이후 다테와의 밀무역이 번창하며 4년 만에 인구가 7만으로 늘어났다. 또한 이순원의 탐험대가 아직 미탐사 지대인 연해주 북쪽 시베리아까지 탐사한 결과, 사금 광맥과 수많은 모피를 획득하고 감자 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여 앞으로 조선의 자원 보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을미동정 이후 인구 약 10(+50-@)만. - 유귀국
이순원의 탐험대가 정계비를 세워놓고 귀환했다. - 속말주
무자호란으로 얻어낸 새로운 영토. 무자호란과 뒤이은 해서 4부 정벌전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북원 코르친 부까지 쳐부수자 명나라 조정에서도 차라리 조선이 해서부의 땅인 송화강 동쪽을 영유하며 여진과 몽골을 제압하게 놔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 조선에서 대사로 파견한 이산해와 교섭해 조선에게 영유를 허락한 지역. 부여주 설치 80년 만에 조선이 북방에 새로 얻은 땅이다. 속말주라는 이름은 그 지역이 옛 속말말갈의 땅이라는 뜻으로 재석이 지었으며, 옛 발해와의 연고권을 주장한다는 의미도 담긴 듯. 영역은 송화강 동쪽~목단강 서쪽이며, 현지에 전후 처리를 위해 주둔 중이던 훈련대장 유극량이 초대 속말주 관찰사로 임명되고 후임 훈련대장은 신각이 맡았다. 최대 거점은 친정을 간 재석이 머물렀던 신북성. 을미동정 이후 인구 약 30(+50-@)만. - 대남도
타이완 섬. 경인왜란 이후 새로 개척하기로 한 영토. 당시에 불리던 이름은 소유구. 천조 질서상 조공국 간의 충돌은 금기시되나 명의 영토도 아니며 조공도 바치지 않는 대만을 정벌하고 개척하는 것은 명나라에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서양 세력에게 대만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준다는 이점이 있어 명나라도 조선의 대남도 영유를 승인한다. 경인왜란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식량난을 줄이는 것, 남만인들과 편히 교역하는 것, 장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설탕을 얻어 돈벌이를 하는 것 등이 목적이다. 전가사변을 시켜도 섬이라 도망칠 수 없다는 장점이 있으며 거리가 멀지만 남만선 도입으로 그것도 해결되었다. 대선 5척, 중선 2척에 남자 1400명, 여자 600명으로 구성된 초대 대남도 개척선단이 1591년 출발했으며 초대 대남개척어사는 정일한이다. 일손이 모자라고 사망자가 대거 발생할 것도 확실하기에 초기 개척단에는 어린이, 노인은 한 명도 넣지 않고 남자를 더 많이 보냈다. 정일한은 강이 가깝고 적당히 살기 좋은 땅에 토성을 짓고 진남성이라 명명했다. 진남성의 위치는 현대의 타이베이시.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착지는 총 14개로 늘어났고 인구는 약 8,000명 정도 된다. 조선 소들은 대남도에 적응하지 못해서 섬라에서 사들인 물소들을 기르게 해 농우로 사용할 겸 각궁을 만들기 위한 물소뿔 생산을 노리고 있다. 쌀농사가 잘 안 돼서 감저, 콩, 좁쌀, 생선을 주식으로 삼고 있으며 서반아 돼지 종자를 받아 돼지도 사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토인들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고 2년이 지난 시점에도 계속된 습격으로 납치되고 살해당하는 인원들이 나오는 등 토인들과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안남에서 수입한 코끼리들을 대남도로 보내 군용 및 산업용으로 사용한다. 개척 3년이 지난 시점에 인구 약 1만명의 현지 부족 아타얄이 조선과 동맹을 맺는다. 다른 토인 부족 하나를 죽일 때마다 철제 단검 한 자루, 여자를 잡아올 때마다 물소 한 마리를 주는 것이 조건. 을미동정 후에 인구는 약 5만으로 조선인 3만, 토인 노비 1만, 왜인 노비 1만 정도이다. 정준석의 오만한 태도를 우려한 재석이 정일한을 불러들이고 권준에게 병력 3천을 주어 새 관찰사로 보낸다. 권준이 도착한 뒤 정준석은 권준 곁을 떠나기로 하여 대남도 중부 다두 왕국을 공략, 진남성에 이어 대남도의 두번째 도시인 대중성을 개척한다. 추운 북방에 비해서 식량 사정이 좋아서인지 2부 완결 시점에는 인구가 40만으로 증가했다. - 부안
2차 견서사가 데려온 278명의 네덜란드인과 86명의 보헤미아인이 정착한 지역. 이 곳을 중심으로 서양 문화와 기술이 퍼질 듯하다. 수적으로도 네덜란드인이 더 많고 보헤미아인은 대부분 광산기술자인 탓에 네덜란드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한다. 민간에 불하되는 판옥선과 조선에서 건조한 중선을 구매해서 어업과 해운업에 뛰어들고 영국인 앨런비의 뒤를 이어 은행업도 시작할 계획. 하지만 조선인들은 왜인 포로 노비들을 흑인노예 다루듯 채찍질하는 네덜란드인들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 을미동정 후 강경상인들과 협력해 간척과 농사와 포목사업에도 도전하고 있다. - 북구주
을미동정으로 히데요시를 패망시킨 조선이 노부나가의 진짜 유언장을 근거로 요구한 지역. 부젠, 치쿠젠, 히젠의 북규슈 3개국은 조선 직할령인 구주총관부가 되었다. 거주 중인 일본인들은 남김없이 추방되었고 조선인들을 전가사변시켜 채울 예정. 공식적으로는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이 다스릴 능력이 없어 조선이 대신 관리한다는 명목인데, 그 기한이 조선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가 존속할 때까지라 사실상 영구 할양. 추후 인구는 조선인으로 채워지겠지만 조약 내용상 조선이 관리하는 일본 영토라는 명목이라 근현대에 영토분쟁이 될 수도 있다. 분고, 치쿠고, 히고의 중규슈 3개국은 조선에 귀순한 사나다, 타치바나, 아소 가에게 분봉되어 조선의 간접 통치령이 되었다. 오직 남규슈만이 시마즈의 통치령으로 남아있다. 전후 1년간 조선인을 열심히 이주시킨 결과 인구가 30만 여명으로 증가했다. 조선인과 왜인의 비율은 2:1 정도. 5주 중 독보적으로 살기 좋은 곳이지만 왜인들의 땅이라는 거부감 때문에 자발적 이주자는 거의 없어서 대부분 강제이주로 인구를 늘리고 있다. 그러나 북방은 험한땅이고 대남도도 만만지않게 위험한대다가 가기 힘들어 자발적으로 구주로 가는 이들도 꽤 있다. - 주산군도
재석이 이전부터 후일 강남지역의 관문이 될 상하이 지역을 탐내고 있던 중 명나라에서 양응룡의 반란 진압군 지원 요청을 하자, 지원의 댓가로 상하이 앞바다에 있으며 해적의 소굴인 주산군도를 해적 소탕을 명목으로 조선이 영유하겠다고 명나라에 요청하고 명나라도 승인한다. 입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주산군도 해적들을 소탕하였으며, 상하이에는 조선이 직접 항구를 세울 수 없으니 대신 조선의 사업파트너인 오공충이 항구와 조선인 거류지를 세워 운영하기로 한다. - 영락군
국내성, 황성평. 건주 토벌전에서 조선군은 건주군에 대승했으나 명군은 건주군에게 대패하는 애매한 결과가 나온 후 조선이 명, 만주와 협상하여 얻어온 영토. 본래 조선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국내성인 것을 모르고 금나라 도읍으로만 생각해 황성평이라 불렀으며 광개토대왕릉비도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금나라 유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재석이 힌트를 주어 건주 토벌전 도중 광개토대왕릉비를 조선군이 찾아 이 비석의 내용을 해석한 뒤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이후 논의를 거쳐 명칭도 황성평에서 영락군으로 변경한다.[25] 국내성의 외성이었던 환도산성은 영복성으로 개명되고 보수작업에 들어간다. - 북해
오호츠크 해. - 아모열도
쿠릴 열도. - 연역주
캄차카 반도. - 웅연포
페트로파블롭스크. - 빙해
베링 해.
2.1.3. 소수민족
- 왜인여진족
1부에서 백두산 부근에 여진족 과부들을 아내로 얻고 정착한 8,300여 명의 일본 쇼니 군 포로들의 후예들. 즉 일반적인 여진족들과는 언어도 정체성도 아예 다른 혼혈 민족인데, 2부 시점에서는 그동안 인구가 더 늘었다. 2부 18장 3화에 언급된 것으로 보면 총인구 6만에 현시점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만 2만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식 검술과 여진식 기마술을 두루 갖춘, 충성심 높고[29][30] 싸움도 잘하는 최정예 기병으로서 2부에서 재석은 조선판 카자크라고 생각하고 그 오만한 신립조차 이들의 실력은 인정해 해서부 정벌전 후반에는 이들만 이끌고 공격할 정도다. 무자호란 때 장백여진 부족은 왜인여진이 나타나 위협만 해도 흩어져 달아나버릴 정도로 조선을 적대하는 부족들에겐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다. 일본어, 여진어, 조선어가 섞인 고유의 크레올어를 써서 통역 없이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전통을 잊으면 안 된다며 여전히 일본어 구사가 가능한 인원이 소수 남아있으며 권율은 교스케라는 일본어가 가능한 왜인여진인 병사를 일본으로 다시 귀순하려는 도왜로 위장시켜 일본군을 유인하기도 한다. 왜인여진족은 오도리 부족과 더불어 계속해서 전쟁에서 조선 측으로 큰 공을 세우고 있기에 앞으로도 조선과의 특별한 관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장비도 중구난방으로 물려받은 왜식 갑옷, 여진식 가죽 갑옷, 조선식 두정갑을 입은 인원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이들은 전사하더라도 조선인 병사들과 달리 유족에게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는 대신 약탈이 허용된다고 한다. - 도왜, 항왜, 신왜, 맹왜, 왜노
도왜는 경인왜란 이전에 일본에서 미리 건너와 조선에 귀순한 왜인들. 건너온 왜인이라 하여 도왜라고 부른다. 시초는 차차의 호위 명목으로 일본에서 추방된 사나다 마사유키(사마유), 사나다 노부시게(사노부) 부자와 200명의 병사들. 두 번째 집단은 오다에게 할복을 명령받았으나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시마즈 토시히사(남도사)와 가신들. 이후 사나다 부자와 시마즈 토시히사가 조선 왕의 신하가 되어 잘 나간다는 소문이 왜국에 퍼지자 히데요시의 규슈 정복 이후 아소 코레미츠, 스즈키 요시유키(김충선) 등 영지를 잃은 자들이 조선으로 대규모 망명해 그 수가 수천에 이른다. 사나다와 시마즈 일가까지는 왜별기로 편성했으나 이후 도왜들의 수가 급증하자 이들은 일단 거제도에 정착시켰고, 이들 중 정예한 이들은 왜별기로 옮기고 등선군 등으로도 편성하여 쏠쏠한 전력으로 써먹는다.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해짐에 따라 항왜 집단도 생겨나고 있는데[31], 항왜들은 전쟁 전부터 조선에 충성한 도왜보다 대우가 낮을 가능성이 높다. 전쟁 종결 후 집계한 포로의 숫자는 총 7만 5천여 명으로 그들 중 사무라이 계급의 5천여 명은 병력으로 편입할 계획.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에 닥친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건너오는 왜인들은 신왜라고 불리는데 8할은 일기도인, 1할은 구주인, 1할은 대마도 수비병이다. 이들과 구분하여 을미동정 때 조선과 동맹을 맺은 도쿠가와, 구로다, 호소카와 등등은 맹왜라고 불린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도왜 중 사나다, 아소, 시마즈 가문의 도왜들은 조선에게서 규슈에 영지를 받은 주군을 따라 다시 규슈로 돌아가 살면서 조선의 동쪽 방패가 되기로 한다. 을미동정 이후 조선에 강제로 끌려온 왜인들은 왜노(왜인 노비)가 되어 여러 사업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다. 너무 늙은 왜노들은 노인이라도 일손 하나가 아까운 대남도로 보내진다.[32] 특히 부안의 네덜란드계 상인들은 왜노를 흑인 노예 다루듯 채찍질하며 학대해 조선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양응룡의 난 정벌 당시 해방을 조건으로 자원병을 모집했는데 무려 7000명이나 자원한다.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끌고 온 왜병들은 보수로 최소 1인당 3명의 포로를 노예로 받고, 왜노로 자원해 참전한 자들은 자유인이 된다. 이들 말고도 전쟁 중 포로로 잡은 왜인들을 각국에 노예로 팔아치웠는데 명나라와 동남아는 물론 무굴제국까지 왜인 포로들이 흘러간다. 그곳에서도 전투 기술을 사용해 아주 쓸만한 병력 자원으로 평가받게 되고 좀 더 왜병을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볼 정도. - 오도리 부족
1부에서 동청례[33]가 원 역사처럼 중종반정으로 죽지 않음에 따라 원 역사와 달리 오도리 부족 역시 친조선 부족으로 남아 계속해서 조선군의 기병 전력으로 활약하게 된다. 재석은 오도리 부족을 일종의 조선판 카자크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초대 부여주 병마사로 임명된 동청례 사후에도 오도리 부족은 조선에 충성하며 조선군의 기병 전력의 상당수를 담당하고 있다. 오도리 기병들로 스페인 장인들이 만든 흉갑과 김지가 만든 플린트락 권총으로 무장한 퀴레시어를 편성해 전투에 투입할 정도. 물론 조선 조정도 오도리 부족은 그만큼 많이 챙겨주고 있다. 오도리 부족은 왜인여진과 더불어 조선에 충성스러운 부족인 데다 계속해서 전쟁에서 조선 측으로 큰 공을 세우고 있기에 앞으로도 특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부족들이 만주에서 힘들게 사는 동안 오도리 부족은 함경도에서 반 자치 형태로 세금만 바치고, 전쟁 나면 기병으로 싸우는 것만 빼면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여진족들은 오도리는 여진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있어도 절대 조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재석은 오도리족을 매우 신뢰하여 남만갑과 플린트락 권총을 나누어 주어 써먹는다.[34] 경인왜란에서도 전주성에서 방어군으로 활약하고, 식량을 찾으로 분산된 일본군 부대를 격파하는 등 활약한다. 일본군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자신들이 조총을 쏘기도 전에 백발백중으로 마상철포를 쏘며 달리는 오도리 기병을 '전주 기병'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한다. 논산대첩에서 최정예 기병으로 참전하여 왜군 섬멸에 큰 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을미동정, 사르후 전투 등에 계속 참전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이 조선에 충성함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르후 전투에서도 건주여진 병사들이 '저 조선의 개놈들이!'라고 했을정도. - 백정
1부에서 고다지, 김병천 등 백정들이 대활약해 관직에 오른 바도 있고 2부에서도 백정 출신인 임꺽정과 서림 등이 무관으로 크게 성공하는 등 원 역사보다는 취급이 좋아졌다. 그러나 1·2부 사이에 조선 전역이 개간되며 대부분의 백정들의 전투 능력이 이제 별 볼일 없어졌다.[35] 경성군은 백정 혈통인 중전을 두었음에도 아직도 정착하지 않고 약탈을 벌이는 일부 백정들을 골칫거리로 여겨서 죄다 북방으로 추방해버렸고 부여주에서 백정들은 여진족 부락들과 서로서로 약탈하면서 살게 된다. 재석은 속말주 개척과 함께 북방으로 추방된 백정들을 왜인여진, 오도리에 이어 3번째 조선판 카자크로 만들 계획. - 남만인
세스페데스를 비롯한 선교사들, 로드리고 대위를 비롯한 용병들, 펠리페 2세가 보내준 기술자들 등의 유럽인들이 조선에 왔으나 아직 극소수다. 재석은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이들이 조선에 눌러앉힐 생각으로 조선 중인 여자와 결혼을 주선하고 결혼할 시 급료도 올려주고 집도 제공하고 있다. 이에 용병들과 기술자들 중 태반이 조선 여자와 결혼해 정착했다고. 재석은 유럽은 사실 남쪽이 아닌 서쪽이므로 남만 대신 서양이라는 표현을 정착시키려 하나 남만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더 많이 쓰인다. 유럽 여성은 조선에 온 적이 없으나 이항복은 유럽 여성들이 성적으로 개방적이라는 말을 듣고 유럽 여인과의 관계에 흥미가 생긴 듯하며 견서사가 유럽 여인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더니 제2차 견서사로 유럽에 가게 되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 2차 견서사를 통해 네덜란드인들과 보헤미아인, 용병 및 기병 훈련교관으로서 기능할 윙드 후사르와 장다르메들이 조선에 넘어왔다. 이주민들을 재석의 명령으로 부안에 정착해서 부안을 중심으로 서양 문화와 기술이 퍼질 듯하다. 그 후 3차 견서사를 따라 프랑스인들과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들도 다수 조선에 이민 오며, 프랑스인들은 마포, 영국인들은 동래, 스코틀랜드인들은 내금위 용병으로 각각 거류지를 마련해 주기로 한다. 여기에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가 모카 항을 점령했을 때 모카항 노예시장의 노예로 있던 노예들 372명을 천회사 함대 승무원으로 현지 징발(소수의 여성 노예들도 데려가기로 결정)하면서 슬라브계 백인 노예 출신들도 조선에 눌러앉게 되며, 맥클로스키가 지휘하는 금군 숙호위 소속으로 편입된다. - 대국인
만력제가 보내준 당선, 탄광 관련 기술자들 등 명나라 사람들도 유입되었다. 재석은 이들도 눌러앉길 원해서 미혼인 자들은 조선 여인과 혼인시켜주고 기혼자들은 명에 연락해 기술자들이 외로워한다며 가족들을 데려오도록 한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후 유정 휘하 사천병 생존자 3천이 조선으로 넘어오는데, 명나라로 돌아가면 패전 책임을 물어 윗끝부터 아랫끝까지 싹 처형될 상황이라 결국 조선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일단 밥값이라도 하기 위해 왜란 때 큰 피해를 입은 대구 지역에 배치된다. 유정 본인은 조선에 감사함은 별도로 명나라 신하인만큼 죽어도 자신이 귀부할 순 없지만 부하들이나 자식들이 귀부하는 건 막지 않겠다고 한다. 한가지 문제는, 명나라 군대 이미지와 달리 지휘계통도 살아있는 정예인 사천병이라서 딱히 대민피해 끼치는 건 없지만, 건주위에게 당한 것도 있고 처지가 처지인지라 여진족만 보면 눈이 뒤집혀져 무조건 달려들어 싸움을 벌였다는 것. 도성에서 경군 소속으로 복무하는 여진족 군사들만 보면 빡이 돌아서 싸움(칼부림 포함)을 걸고 다닌 바람에, 사천병들이 대구로 이주하기 전 임시 주둔하던 용산의 사천병 병영 근처에 얼쩡거리는 여진족 출신 군사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36] - 묘노
양응룡의 난 토벌에 조선군이 파병될 때 그 대가로 포로로 잡은 반란군 중국인들을 조선에 데려오는 것이 받아들여져 추가로 쓰촨 지방 중국인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상국인 명나라 백성들을 노비로 쓴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한족이건 묘족이건 포로들을 총괄해서 다 묘노로 부르고 있다. 비단, 도자기, 기계공 등 기술자들을 주로 데려오려고 하고 있으며 기술이 없는 묘노들은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병사들에게 보수로 주어지거나 대남도와 구주, 부여주 등지로 보내졌다. - 오귀자
일본에 방문한 사신단이 흑인 야스케를 목격한 이야기로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37] 오다에게 고용되었다가 조선군에게 붙잡힌 해적 용병들 중에는 남만인들 외에 오귀자도 섞여 있다고 한다. 견서사가 귀환하면서 펠리페 2세가 보내준 무어인 병사 30여 명을 데려오며 재석은 이들이 말 사육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 강화도로 보내 안달루시아 말 육종에 쓰고 있다. 여기에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가 모카 항을 점령했을 때 모카 항 노예시장의 노예로 있던 노예들 372명을 천회사 함대 승무원으로 현지 징발(그리고 소수의 여성 노예들도 주상께 후궁으로 바치기 위해 데려가기로 결정)하면서 출신들도 조선에 눌러앉게 되며, 맥클로스키가 지휘하는 금군 숙호위 소속으로 편입된다. 이슬람권 출신인데도 비번일 때 술을 마시러 오는 나이롱 신자들이라고.[38] - 우데게족
연해주 거주 소수 민족. 순서로 보면 오도리 다음으로 조선에 복속되었지만, 외딴 지역에서 사냥과 어업을 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이들이라 북해도의 존재를 알려준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 과거에 발해에 복속돼 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조선이 고려의 후신이라고 하자 '우리도 옛날엔 고려 사람이었다.'[39]고 밝힌다. 큰 비중은 없지만, 조선의 지배에 저항하거나 반발하지도 않고, 고려의 후예라고 밝힌 점을 미루어 보면 조선 조정에서 평가나 대접이 나쁘진 않을 듯하다. 아예 본인들 스스로 관청에 찾아와 호적을 등록하고 씨감자를 얻어갈 정도로 유순하고 호의적이다.[40] 연해주 야인 인구가 3만이라는 것을 보면 우데게족의 수는 그 이하일 듯. - 대남도 토인
대남도의 원주민들. 외부인의 머리를 잘라 모으는 호전적인 풍습을 가져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선제공격하는 등 적대적 관계로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며 조선의 기술적 우월함과 강함을 깨닫고 아타얄 부족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조선에 충성을 맹세하는 부족이 생기고 있다. 1600년 시점에는 그 수가 크게 늘어나 양응룡의 난 정벌 원정에 3000명의 대남도 토인병이 동원되기도 한다. 동원된 토인병들은 적의 머리를 마음껏 잘라 모으는 것에 희열을 느껴 보너스로 포로 노예를 주는것도 마다할 정도. 용맹함을 치하 받아 재석이 남뢰군(南雷軍)이란 부대명을 하사했다. - 대미주 원주민
정문부가 이끄는 원동개척단과 만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 화포와 총기의 위력을 보여주고 철제 바늘이나 고급 천 같은 물건을 주며 환심을 샀다. 충성을 맹세하고 정계비에 제물을 바치고 있으면 돌아와 더 큰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원주민 부족 중 쉬눅, 스쿼미시, 올로내, 미웍, 파트윈 5개 부족 및 이누이트 2개 부족의 족장들이 귀국하는 정문부를 따라 조선에 입조해 재석에게 신하가 될 것을 청한다. 조선이 여진족이나 대남도 토인 등 여러 원주민들을 다뤄본 경험이 있고 원정단 수도 적어 아직은 무조건 무력으로 대하지 않고, 재석도 아들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대미주의 중요성을 설파할 때 반드시 원주민들을 잘 대해서 왕실의 충성스런 지지세력으로 만들라고 신신당부를 해 놨기에 그럭저럭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벌써부터 술맛을 알아버린 원주민들이 자기 부족 여자까지 팔아넘기고 언제나 강경파인 이괄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는 등 잠재적 불안요소가 있다. 그래도 치누크족 추장딸이 원사웅과 혼인하는 등 잘 풀리는 편. - 고려인
원나라 때부터 요동에 살던 고려인들의 후예. 본질적으론 한민족이다. 건주위와의 포로 교환 협정에서 포로들을 보내는 대신 이들을 얻었으며 그 수가 무려 5만에 달한다. 재석은 이들중 4만은 속말주, 1만은 평안도에 정착시켜 변방 지역 인구를 늘렸다.
2.1.4. 군사
- 군조직 - 경인왜란 이전
- 오위군
원 역사의 오위군은 임진왜란 시점에서 유명무실해진 상태였으나 1부 당시의 군제 개편의 영향으로 여전히 정예병으로 남아있다.[41] 도감군과 라이벌 격의 관계에 있으며, 도감군과 다르게 조선제 장비를 쓰지만 강선조총과 무종야포는 역시 사용하므로 장비의 질은 타국 군대보다 뛰어나다. 왜란 개전 시점에서 총원 약 53,000명이며 한양과 경기도 출신이 주를 이룬다. 니탕개의 난과 무자호란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경인왜란 발발 후 하남벌 전투에서 일본군과 회전을 벌여 대패, 53,000명 중 20,000여 명이 전사하고 9,0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재석은 오위를 재건하기보다는 이를 계기로 군제 개편을 하기로 해 하남벌을 끝으로 오위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2만여 명의 오위 패잔병들은 각 지역으로 도망치면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해당 지역 병영군이나 속오군에 합류했고 대마도로 끌려간 포로 9,000여 명 중 살아남은 8,000여 명은 수군이 대마도를 탈환하며 구출되어 등선군에 합류한다. - 족친위
오위군 중 종친들로 구성된 부대. 원 역사에서는 이름뿐인 군대였으나, 재석은 종친들이 한량으로 사는 꼴도 보기 싫고 종친 숫자가 너무 늘어서 권력을 가지는 것도 싫었던지라 차라리 전쟁 나가서 죽어버리라는 의도로(...) 종친들도 진짜 군 복무를 하도록 한다. 또 명문세족들이 군역을 기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다. 오위 내에서 가장 정예도가 떨어지는 부대로, 팔자 좋았던 종친들답게 활 솜씨 하나는 수준급이나 다른 면은 별로 뛰어나지 못하다. 신립은 무자호란에서 신분이고 뭐고 저질 군대인 족친위를 버림패로 써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개고생한 이들이 차라리 다른 데에서 복무하는 것이 낫겠다며 대부분 족친위를 나가서 진짜 일반인과 섞이면 곤란한 고위 종친들만 남았고, 이렇게 되자 신립도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이들을 함부로 굴리지 못한다. 2차 견서사를 통해 윙드 후사르들이 넘어오자 남부 기병들과 함께 윙드 후사르로 개조되며 갑옷은 두정갑을 입은 남부 기병들과 달리 이곳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진짜배기 윙드 후사르로 일본원정에 투입된다. 이제는 나름대로 이름값을 하는 정예 기병부대로 자리잡는다. 특히 을미동정에서 활약하는데, 일본군이 쓰는 장창보다 긴 창으로 적 보병 부대를 손쉽게 궤멸시킨다. - 도감군
남만별기와 왜별기를 교관으로 삼고 펠리페 2세가 보내준 기술자들이 만든 서양식 장비를 주무장으로 하는 신식 군대. 번상병인 오위군과 달리 순수 직업군인들이며 구성원들 중 대다수가 출신 성분이 낮은 이들이지만 보수를 많이 준다고 한다.[42] 오위군과 라이벌 격의 관계에 있으며, 열기구와 귀차 등 새로 개발된 신식 장비 대부분은 이곳에 맨 먼저 배치된다. 규모와 장비 및 훈련도 면에서 작중 시점 기준으로 세계 최강의 부대. 오위와 마찬가지로 한양과 경기도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왜란 개전 시점에서 약 37,000명이며, 신병을 대규모로 모집 중이다. 전쟁이 끝난 후 훈련도감은 기존처럼 연구 및 교육 기관으로 되돌리고 도감군은 분리하는 군제 개편을 할 계획. 이후 훈련도감은 순수한 교육기관 및 사관학교로 돌아갔고, 수만명의 도감군은 오위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군영으로 따로 편제된다. - 왜별기
도감군 휘하의 도왜들로 구성된 왜인 부대. 차차의 호위병 명목으로 사나다 부자와 200여 명의 가신들을 받아들인 것이 그 시초다. 이후 일본을 탈출한 시마즈 토시히사와 시마즈 가신들을 받아들여 규모가 커진다. 처음에는 남만별기와 함께 훈련교관 역을 맡았으나, 아무래도 스페인군보다는 밀리는 것이 현실이기에 교관 역은 온전히 남만별기로 넘어가고[43] 대신 아소씨 계열 도왜들 중 정예한 이들로 인원을 보충해 전투부대로 재편성된다. 왜란 개전 시점에서 약 3,000명. 단병접전에 특히 능한 최정예 전투부대. 일본식 장비를 사용하고 일본어를 쓰기에 왜군 진영에 잠입하여 사보타주를 벌이는 특수부대 역할도 하고 있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대부분이 조선령 규슈에 땅을 받아 둔전병이 된다. - 남만별기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군사고문단. 테르시오 전술, 로델레로 전술 등 동시대 세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군의 전술을 도감군에게 가르치고 있다. 처음 초청된 로드리고 대위 휘하 용병 14명에 올리비에라 백작이 놔두고 간 인원들 중 합류를 자청한 6명이 추가된 정도로 인원수는 매우 작으며 왜별기와 달리 순수하게 교관과 고문 역할만 맡는다. 무자호란에 동행하고 4명이 사망해 왜란 개전 시점에서 16명. 그러나 조선에 귀순한 왜별기와 달리 급료를 받으며 고용된 입장이기에 이들에게는 군사기밀 제공을 제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강선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다고 하며 열기구 등 조선의 문물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들이 조선에 파견될 때부터 조선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기에 계약이 끝나면 조선의 기술 일부가 유럽에 유출되는 결과로 이어질 듯하다. 하지만 조선에 오래 머무르면서 대부분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조선인이 되기로 했다. - 북병
함경도, 평안도, 부여주 등 북방 지역의 번상병들. 대부분이 농사꾼이고 싸움을 많이 겪지 못한 삼남 번상병과 달리 사냥, 야인의 습격 등으로 일상이 투쟁 그 자체인 이들도 오위군과 도감군 못지않은 정예병이다. 훈련으로 정예화되었기에 자기 보직의 무기만 잘 다루는 도감군과 달리 이들은 개개인이 모두 각종 무기들을 잘 다루며 기병도 대규모로 편제되어 있다. 장비는 오위군, 도감군만큼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활강조총도 왜조총보다는 뛰어나고 짧은 창은 투창술로 커버한다. 왜란 개전 시점에서 약 40,000명. 권율의 지휘에 따라 단밀현 전투에서 왜인여진과 함께 왜군 별동대를 궤멸시켰고 왕이 친정한 논산대첩에서도 왜군 8만을 궤멸시키는데 결정적 공로를 세운다. - 등선군
일종의 해병대. 일본군에 비하여 열세인 선상 백병전 부분을 전담하기 위해 창설됐다. 초기 창설 인원은 근접 전투에 능한 아소씨 계열 도왜들 중 왜별기로 차출될 만큼 신분이 높지 않은 이들로 구성되었는데 사실 이들도 근접 전투는 능해도 기본은 땅개라 선상생활에서는 고생 좀 했지만 그래도 훈련으로 극복해나가는 모양이다. 이후 임꺽정이 파총이 되어 등선군 훈련을 지도하는 모양인데 문제는 임꺽정도 땅개라 고생 좀 했다. 그래도 임꺽정과 등선군의 맹활약으로 이순신 함대의 첫 전투인 거제도 해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함대를 말 그대로 아작내 버렸다. 초기 인원 3,000명은 전원 도왜병 출신이었으나 이후 조선인 팽배수 3,000여 명을 증원하여 총 6,000여 명으로 편성된다. 흥양을 탈환하기 위해 임꺽정을 필두로 한 등선군이 사도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상륙전까지 펼치면서 진짜로 해병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쪽 세계에서 비승군이 현대 한국 공군의 기원이 된다면 현대 한국 해병대의 기원은 이 등선군이 될 듯. 등선군 내부에서 도왜 출신들과 조선인 출신들 사이에는 약간 미묘한 알력이 흘렀다고.[44] 현재는 임꺽정의 리더십으로 사기가 충천하고 도왜와 조선인들 간의 협력도 좋아진 상태다. 대마도 상륙작전에서 조선군 포로 12,000여 명을 구출한 후 그중 오위 출신 포로 8,000여 명을 등선군에 합류시키도록 하여 무려 14,000여 명의 대군이 되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도 도도 다카토라 함대를 궤멸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을미동정 때도 이순신이 등선군을 활용하여 섬을 공략하고 그곳에 있는 포대를 제압하는 등 활약하고 있다. 을미동정 이후 등선군의 주력이던 왜인 등선군들이 대부분 구주로 돌아가면서 전력공백이 심해졌다. - 승병
유교 신봉자 경성군이 불교를 싫어해서 승려들에게 성을 보수하는 일들을 맡겼는데, 이 때문에 승려들이 토목공사에 굉장히 익숙해지게 되었다. 재석은 1부 시점에도 전문 공병대를 창설할 계획이었는데 경성군의 은근한 불교 탄압 덕에 승병들을 전문 공병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승병을 전력 외라고 보고 승병 본인들도 살생을 해야 하는 전투 투입을 좋아하지 않기에 이들을 의무병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전투병력으로서 승병들이 맹활약했던 만큼 승병들이 의무병, 공병과 같은 비전투 임무만을 맡는 것은 아니며 실전에서도 전투부대로 심심찮게 투입되었다. - 속오군
일종의 예비군. 각 지역의 성인 남성들을 속오군으로 편제하고 지역의 명망 있는 사대부가 향군장을 맡아 이들을 이끌도록 한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잘 모르는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보다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유지의 명령을 더 잘 따를 수 있고 원 역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과 관군 장수들 사이에 있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병장으로 활동할 이들에게 공식적인 직책을 주기 위함이다. 성인 남자는 전부 속오군 징집 대상이기에 총동원할 경우 200만[45]을 동원 가능하다고 한다. 오도리 병력과 왜인여진 병력 또한 성인 남성들을 징병한 것이기에 원칙적으로 따지면 속오군이기는 하나 다른 속오군들과 달리 정예병들이므로 보통 따로 분류한다. 이들 속오군은 평시에는 관찰사의 휘하에 있지만, 전시에는 병마사의 휘하에 속한다. 왜란이 발발하자 몇 번의 정면대결에서 패배한 뒤에는 재석의 계획대로 왜군과의 유격전으로 왜군의 피로도를 크게 높이고 보급에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 게다가 하남벌 전투에서 패배한 오위군 잔존병들이 합류한 곳에서는 전력이 강화된 상태다. 다만 일부 왜장들은 이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속오군이라는 군영에 속한 군인들이니 죽여도 된다며 조선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이용한다.
- 경인왜란, 을미동정 이후의 군제개편
기존의 병영군이 1만명을 기준을 삼았던 것에서 훈련도감의 편제를 본받아 1개 위에 3천이 기준이 되었고, 지휘관을 견임한 수령 대신 전문 무관들이 편성된다. 경인왜란 도중 오위군이 궤멸되었고 교육부대로 시작했던 도감군과 번상병인 삼남 지방군이 여러 문제점을 보였기에 전면적인 군제개편을 한다. - 지방군
조선 8도를 13도로 나누는 행정개편과 더불어 각 도에 1개 위, 3,000명씩의 고립병을 두기로 한다. 야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북방 3주, 함경도, 평안도는 대규모 병력 동원이 더 중요하며 번상병 체제에서도 전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기존의 번상병 체제를 유지한다. 경상남도는 예외로 2개 위가 배치된다. 유극량과 신각의 초안은 1개 위는 팽배수 180, 장창수 1,020, 조총수 800, 경기병 300, 포수 200, 궁수 및 잡색군 500으로 구성되며 화포는 이동식 자모포 4문과 완구 4문, 황해도 이남의 지방군 고립병은 총 30,000명으로 구성하는 것. 이순신, 이항복, 권율은 유극량과 신각의 초안은 왜란에서 근접전 중 피해가 너무 컸던 탓에 지나치게 근접전에 치중했다며 장창수 500, 조총수 1,000, 궁수 500, 표하군 200, 경기병 300의 2,500명으로 편성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한다. 지방군에 강선조총을 지급할 계획은 아직도 없는데, 도감군 수준의 정예부대가 아닌 이상 강선조총을 줘봤자 유의미한 사정거리 증가가 없고 제작비 차이가 크며 유사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중앙군의 무력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을미동정 이후 당분간은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기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하에 대규모 병력 동원은 유사시 속오군 체제로 동원하는 정도로 유지하고 상비군을 줄이기로 결정한다. 최종적으로 13도는 각 도에 5천씩 해서 6만 5천, 북방 3주에는 3만, 구주에는 1만, 중앙에 경군 5만까지 해서 정규 상비군 15만 규모를 유지하기로 한다. - 계급
현대식의 교관급, 위관급, 영관급, 장관급에 각 급 내에 3단계씩의 계급이 존재하는 체제로 개편하였으며, 대한제국처럼 정, 참, 부로 편제하였다. - 병기창
기존의 병기창은 북한산성에 위치한 군기시 공장 하나뿐이었으나 새로 건설한 탕춘대성에 1개소, 평양과 대구에도 각각 1개소씩 총 4개소를 운영하기로 한다. 4개 병기창이 완공될 경우 매년 활강조총 15000정을 생산할 수 있다. - 기병
너무 복잡해진 기병 편재를 비호군, 강철군, 솔응군의 3동류로 단순화한다. 비호군[46]은 2차 견서사가 데려온 윙드 후사르들이며 유용성을 입증했기에 전통적인 조선 중기병은 비호군으로 전환되었다. 강철군은 오도리 기병으로 대표되는 총기를 사용하는 퀴레시어 기병들이다. 솔응군은 각궁으로 무장한 전통적인 조선 경기병들로 탐색, 정찰, 추격 등을 담당한다. 맹서군(장다르메)은 수도 워낙 적었고 가성비가 나빠서 폐지하고 겸사복에 편입시켰고 전통적인 조선 중기병은 비호군보다 충격력이 모자라 겸사복에만 남기고 비호군으로 편입시킨다. 이 외에도 각자 마음대로 무장하고 다니는 왜인여진 기병도 있는데 이들은 어차피 비정규군이고 편제상 속오군의 일종이다. - 별기대
을미동정까지 끝나 평화기가 온 후 이순신 등 군 수뇌부에서 일반 병사들은 강선조총의 유효사거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점을 깨달아, 일반 병사들에게는 강선이 없는 조총만 지급하고 명사수들로 구성된 별기대를 구성, 이들에게만 강선총을 지급해 나폴레옹 전쟁기 영국군의 라이플맨 부대처럼 특수부대로 활용하기로 한다. 대신 무강선 조총 포함해서 모든 조총을 화승식에서 플린트락으로 개량하였다. 초대 별기대장은 김충선이 맡고 그의 부하들인 사이카슈 출신자들을 창설요원으로 삼는다.
- 군사 제도
- 참모 제도
무종 시절 계획되었으나 이후 인종과 명종이 신경쓰지 않던 것을 재석이 강무관을 설립한 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부로 구성되어 이관은 인사와 대민 관리, 호관은 치중 관리, 예관은 정찰 및 적과의 교섭, 병관은 군사작전, 형관은 감찰 및 기강 관리, 공관은 진지구축과 도로 및 교량 건설을 맡고 참모장이 이들을 총지휘한다. - 남도수군통제사, 서도수군통제사
원 역사의 삼도수군통제사와 직급은 유사하나 권한은 범위가 조금 다르다. 남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전라도의 전 수군을 총지휘한다. 경상우수사가 겸직하며, 초대 남도수군통제사는 당연히 이순신이다. 경인왜란 종결 이후 이순신이 수군 제조로 승진하면서 후임은 정걸이 맡았다. 서도수군통제사는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수군을 모두 통제하며 경기수사가 겸직한다. 초대 서도수군통제사는 최호. - 강무관
사관학교. 무관 버전 성균관. 개인의 기량과 경험에 의존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조선 전체에서 모인 최고의 장수들이 교관을 맡아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무과 합격자는 의무적으로 3년간 다녀야 하며 졸업 성적에 맞춰 배속처가 달라지는 시스템. 도입 과정에서당연히문관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재석이 적당히 반박하면서 밀어붙였다. 이와 더불어 군사 박물관으로서의 역할도 하는데, 오다 노부나가를 포함하여[47] 경인왜란에서 죽은 왜장들의 수급, 미라화 된 히데요시, 원균[48]의 해골 등도 전시한다. 100여년이 지난 3부 시점에 잔혹하다는 이유로 폐기하자는 의견도 있으나 장조가 모은 수집품이라는 이유로 계속 보존 중이다. - 조병창
군기시에서 분리된 총포 생산을 전담하는 기구. - 육군 제조, 수군 제조
경인왜란 이후 새로 생긴 종1품의 벼슬. 오늘날의 참모총장에 해당되며, 육군과 수군에 1명씩 있다. 겸직이 아닌 비변사 내의 벼슬이지만 품계와 격은 병조판서보다 높은 임금 직속 관리로서 해당 분야에 대한 정책 수립과 관련 의견을 임금에게 올릴 수 있다. 초대 육군 제조는 권율, 초대 수군 제조는 이순신이 맡는다. - 향도
경인왜란 중 김류의 부친인 김여물이 전사하자 친구인 김상헌이 조문 온 성균관 유생들을 선동, 너무 어리거나 나이든 유생들을 빼고는 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참전한다. 재석은 학사장교라고 하는데, 이들은 정훈 교육을 하고, 문맹인 군사들의 편지를 읽어주거나 써주고, 전공을 집계하는 일들을 하는데 영락없는 정치장교 역할이다.[49] 작 중 묘사로 보면 하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덜 거만해지고, 좀 더 현실에 눈을 뜨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향후 대대당 한 명, 함선당 한 명씩 배치할 계획을 갖고 있다.
- 해상병기 및 선박
- 판옥선
1부에서 개발된 판옥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주력선이 되었으며 왜란 발발까지 총 300척을 목표로 건조되었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 총 285척. 왜란 발발 후에도 왜군의 공격으로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었으며[50] 1천척의 선박과 7만 명의 왜 수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무시무시한 전과를 올린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휘하의 수군과 구키 요시타카의 수군,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거의 궤멸시켰으며, 도도 다카도라와 한산도 대첩을 치를 때에도 수백척의 왜선을 격침시킨다. 전쟁 초반에 경상좌수군은 대부분의 수군 장졸이 이탈하여 경상좌수사 이운룡은 판옥선에 실려 있던 화포를 경주 및 울산 방어에 쓰라고 경상좌병사 배설에게 빌려주는데, 이 때 감포 쪽으로 오던 도도 다카도라의 수군은 빈 판옥선인 줄도 모르고 해안에 판옥선이 정박해 있자 퇴각하고, 이후 경상좌도에서 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판옥선이 얼마나 공포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는 지 알 수 있는 부분. 을미동정 때에는 본래 방패판도 없어서 취약한 후방에도 방패판을 세워 방어력을 높인다. 을미동정 종결 이후 왜 수군이 사실상 전멸해서 300척이나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120척을 민간에 어선, 상선용으로 불하한다. - 거북선
이순신이 부친상을 당한 사이 나대용이 개발한다. 재석은 이순신의 업적 중 하나를 뺏는 것 같아 좀 미안해하지만 굳이 이순신의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대용과 함께 만들게 시키는 것도 작위적이다 싶어서 그냥 만들게 한다. 실제 거북선보다 대형으로 판옥선보다 한 층 높으며 철로 된 지붕을 덮고 가시를 박았다. 대포를 많이 탑재했는데 서양제 대포도 탑재할 수 있을 거라 하며 3층에 4명의 후장조총을 든 지정사수가 탑승한다. 정면에는 24근포가 탑재되어 있고, 일반 판옥선에서는 방패판도 없는 후면에도 대포가 장착되어 있다. 나대용은 불화살 대책으로 프로토타입 배 전체에 옻칠을 하는 돈지랄을 벌여서 재석이 뒷목을 잡고, 양산형에는 옻칠 대신 얇은 철판을 대도록 한다. 용머리 부분은 실제 거북선은 최근엔 점점 더 포구 역할이 강조되며 몸체에서 바로 정면으로 나온 형상으로 복원되는 편인데, 이 작품 속 거북선의 용머리는 그와 반대로 수직으로 서서 견시병이 주변 상황을 관측하는 장갑망루로 만들어졌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 총 11척. 경인왜란 당시에 대활약하는데, 경기수영에 배속되어 있던 거북선은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함대와 전투하여 압승하며, 이후 이순신 휘하로 보내져 일본군 선단으로 돌입하여 적진을 휘저어 놓는 역할을 맡는다. 3층의 선방포수들이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들을 죽이고, 거북선은 화포를 쏘며 왜선과 좌충우돌하는 방식. 왜 소선 따위는 짓뭉개고, 왜 중선과 대선도 24근포 한 방이면 박살난다. 일본군의 텟코센과 니혼마루도 가볍게 씹어먹는 말그대로 바다의 지배자. 일본군의 화살과 불화살, 조총탄 모두를 무력화시키며 갈고리를 걸고 배 위에 올라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시뿐이라, 일본군은 메구라부네라고 부르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을미동정 때 다가오던 화공선을 보지 못하여 한 척이 손실되었다. 해당 거북선은 철갑이 벗겨지는 등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곧 다가온 다른 판옥선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판옥선과 줄을 연결하여 겨우 떠 있는 정도가 한계이기에 이순신이 어쩔 수 없이 파선을 명령하였다. 을미동정 종결 시점에 15척. - 대전선
대형 판옥선. 거북선과 동일한 크기에 뚜껑이 없고 철판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만이 다르다. 왜란 발발 시점에서 총 4척이며 경기수영에만 배치되어 있다.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함대와의 전투에 투입되어 승리한다. 이후 이순신 휘하로 보내진다. 이순신은 이 대전선을 좌선으로 쓰며 함대를 지휘한다. 아무래도 일반 판옥선보다 더 크기에 전황을 살피기 좋은 듯하다. 을미동정 종결 시점에 15척. - 당선
중국식 정크선. 만력제가 보내준 명 장인들이 벽란도에서 건조한다. 1부 무종 때에 명으로 가는 항로가 생겼으나 조선식 조운선으로는 해안선을 따라 빙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양항해에 적합한 당선이 생산되기 시작하며 서해를 가로질러 바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명과 감합무역이 시작될 때 오직 당선만 입항하도록 허가되어 명과의 외교, 무역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경인왜란이 발발하자 원양항해 능력 때문에 일부가 수군으로 징발되었고 왜군 본대의 접근을 목격하고 알리기도 한다.[51] 조선의 남만선 수량과 운용 역량이 갖춰진 뒤에도 명에서 남만선에 대해 가진 반감을 고려하여 명과의 교역은 오직 당선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 양선(남만선)(갈래선, 비류선)
갈레온과 플류트.[52] 펠리페 2세가 보내준 플랑드르 출신 조선공들이 건조 가능한 배들의 종류를 소개해줬고 조선 조정에서는 군용의 갈레온과 수송용의 플류트 두 종류를 집중적으로 생산하기로 하고 각각 갈래선과 비류선이라 명명한다. 도입 초창기에는 각각 대선, 중선이라고 칭했으나 너무 포괄적인 명칭이라 사장된 듯. 서양식 범선들은 싸잡아서 양선 혹은 남만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란 개전 시점 보유한 범선 전력은 갈래선 4척으로 마닐라에 주문해서 구입한 갈레온 2척과 조선에서 자체 생산한 갈래선 2척이 동해수영에서 훈련 중이다. 펠리페 2세가 보내준 제노바 출신 항해사의 지휘 아래에 조선인 선원들이 훈련 중이지만 아직 미숙하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가 고용한 포르투갈 용병 갈레온 6척이 벽란도 진입을 시도하던 중 경기수영 수군에 의해 격파되고 이 중 손상이 적은 4척이 나포되었다. 경험 많은 선원들도 함께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 중 협조적인 이들과 조선인 선원들을 합쳐 편성한 3척이 이순신 휘하로 보내지고 한산도 해전에서 처음 실전에 투입된다. 경인왜란 종결 시점의 범선은 총 10척으로 그 중 갈래선 5척, 비류선 2척이 대남도 개척에 투입된다. 또한 갈래선이 일기도와 대마도로 향하는 왜군 수송선을 상대로 통상파괴전을 벌이고, 일본 해안가를 약탈하고 있어 일본에서는 이들을 조선구라고 부른다. 경인왜란 후 5년간 동남아와 대남도를 왕복하고 일본 연안을 약탈하며 조선의 남만선 운용 역량이 크게 상승했고 꾸준히 생산하여 선박의 수량도 많아졌으며, 보복전인 을미동정 때 정발의 지휘 하에 왜군의 해상교통로를 끊고 조선군의 주공 방향을 기만하는 등 활약을 한다. 특히 이순신은 원양항해가 가능하다는 남만선의 장점을 적절히 활용하여 정발 휘하의 남만선 8척으로 나고야 성에 있는 일본군이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후 오사카 성 공격 전에 이들을 오사카 앞바다 키탄 해협으로 보내 해협 내에 있는 일본 수군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게 한다. 3차 견서사부터는 최초로 조선이 자체 제작한 갈레온을 타고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천회사가 소코트라에서 바가지를 쓰고 다우선의 일종인 바글라를 하나 구매해서 아랍식 범선도 도입되었다. - 왜선
고바야부네, 세키부네, 아타케부네 등 일본식 선박들. 당연히 전투용으로나 수송용으로나 조선제 선박들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으므로 조선에서 일부러 구매하거나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등선군 창설로 조선군도 선상 백병전을 적극적으로 치르게 되면서 왜선들을 상당수 나포하게 되었고, 잘 떠다니는 배를 버리긴 아까우니 수송용으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대마도 상륙작전에서는 무방비하게 정박해있던 수송용 왜선을 100여척이나 노획한다. 외수사 설립을 준비하면서 노획 왜선들을 송상들에게 불하하기로 결정한다. 동남아에 왜군 포로들을 노예병으로 팔아넘기고 쌀을 받아오는 데에 사용하였다. 왜란 종결 후 약 3년간 동남아를 왕복하자 대부분의 왜선이 상태가 나빠져서 폐선하고 이후 동남아 상행은 남만선이 전담하게 된다. - 화륜선
증기선. 1부에서부터 개발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계속 개발이 실패했고 결국 양응룡의 난이 토벌된 뒤에야 최초의 증기선이 등장한다. 최초의 증기선의 이름은 '광제호'. 거북선의 선체를 이용해 돛을 없애고 증기로 움직이는 수차를 설치했다. 3치 두께의 장갑판과 8문의 18근포로 무장해 화력과 방어력은 막강하지만 아직 기관의 출력도 낮고 소형화도 되지 않아 심각할 정도로 느리고 석탄을 최대로 탑재해도 3일밖에 운항하지 못한다. 원양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하며 경기수영에서 연안 방어용 이동식 요새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라서 실용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하면 발전이 있을 수 없으니 일단 첫 발을 내딛도록 하기 위해서 무리해서 제작한 것이다.
- 육상 병기
- 귀차(鬼車)
조선판 전차. 김지가 디자인했는데 미니버스만한 크기에 승자총통 40문을 회전포탑에 장착하고 바닥을 포함한 모든 면을 철갑으로 둘렀다. 일단은 황소로 운반하지만[53] 김지는 여기에 증기기관까지 장착할 생각인 모양. 너무 비현실적인 병기라 생각한 재석이 크기를 크게 축소시켜서 생산하도록 했고 무자호란에 크기를 줄인 유귀차(幼鬼車)가 일부 투입되어 도망가려고 하는 해서부 여진족을 궤멸시킨다. 경인왜란 때는 바퀴를 떼고 고정식 토치카로 만들어 조령 길목을 차단하는데 투입되나 왜군이 조령으로 오지 않으면서 실전 투입되지는 않았다. 이후 을미동정 때 규슈 지역에서 실전 투입되어 반란을 일으킨 일본인들을 격퇴하는 활약을 한다. - 척탄
손으로 던지거나 돌팔매로 쏘는 소형 비격진천뢰. 역시 김지가 디자인했다. 대충 어른주먹만한 크기이며 야포에도 넣어서 쏠 수 있도록 규격화되어 있다. 주로 도감군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경인왜란 발발 이후 전주성 인근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조선군이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보급로를 끊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석전꾼들이 돌팔매 하듯 던지면 40보나 날아간다고.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에서 무종야포에 넣어 쏘며 요긴하게 쓰고 있다. - 권총
재석이 처음에는 김지를 시켜 태엽식의 휠락 권총을 만들었다. 하지만 휠락 권총은 구조가 복잡하고 제작 단가가 비싸서인지, 재석이 사용하는 사냥총 정도로 제작되고 끝났다. 이후 김지가 죽기 전에 부싯돌 방식의 플린트락 권총을 만들어 도감군과 오도리 기병에게 보급하였다. 근거리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제했으므로 강선은 굳이 파지 않았고 인당 미리 장전해둔 권총 2정을 들고 돌격하며 발사한 뒤 보조무기를 사용하거나 혹은 권총 자체를 거꾸로 잡고 둔기로 사용할 수도 있게 했다. 재석은 이 권총을 오도리 기병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 때 재석이 "이들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는단 거야?"라고 말한다. 이 권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기병들은 한때 북방을 주름잡았던 몽골 철기들을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플린트락 방식은 비가 올 때에도 운이 좋다면 격발이 가능한데, 가토 기요마사는 도감군 기병이 비오는 날 마상에서 권총사격을 하는 걸 보고 조선에는 자신들에게 없는 무기가 너무 많다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남만갑을 입고 마상철포를 쏘며 달리는 오도리 기병을 일본군은 '전주 기병'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한다. - 후장식 조총
원 역사의 명나라에서 불랑기포 메커니즘으로 만든 조총을 김지가 만들어냈다. 명나라제보다 튼튼하고 뒤가 터지지 않게 만드느라 일반 강선조총보다 제작단가가 5배나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거북선 같이 좁고 장전하기 어려운 실내에서 저격병이 쓰려고 만든 것이다.(작가가 작성한 대략적 설명)[54] 특히 서림은 파도에 흔들리고 좁아터진 거북선 용머리 안에서도 저격을 할 정도. - 면제배갑
원 역사에선 대원군 시절에 나올 물건이 김지에 의해 이르게 등장했다. 재석이 덥고 불에 약하다는 실물의 문제를 알고 있기에 몸통 전면부만 총탄을 막는 현대의 방탄조끼 같은 양식으로 수정시켰다. 그래도 너무 덥다는 문제가 있어 일반 군사들은 겨울철을 제외하면 잘 착용하지 않으나 승병들이 애용한다. 두정갑은 무기 생산으로 철값이 올라, 지갑은 조보 배포로 종이값이 올라 구하기 어렵고 승려이기에 살생을 해서 가죽을 벗길 수도 없기 때문. 덥다는 것도 이들은 수행의 일부로 생각한다. - 열기구
일본군과 회전이 벌어질 때 정찰용 망루로 쓰기 위해 재석이 개발했다. 원리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양기는 올라가고 음기는 내려가기 마련이니 양기를 주머니에 가둬 공중에 뜨게 했다.’고 설명한다. 밧줄로 고정한 뒤 서너명이 천리경, 도시락, 물, 요강을 싸들고 올라가서 관측하며 석묵필로 지형을 그려 통에 담아 떨어트리고 상승, 하강 명령도 글자가 적힌 패를 떨어트려서 전달한다. 기낭은 비단으로 만드는데 열기로 인해 손상되어 정기적으로 비단을 교체해줘야 하니 운용비용이 꽤 많이 들 듯하다. 화재에 취약해 신기전은 쓰지 않고 비상경보는 발연통을 던져서 보낸다. 무자호란 때 해서부와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다. 실전배치된 열기구는 총 4기이며 열기구 담당 부대의 명칭은 비승군이다. 아마 이 세계관에서 훗날 조선이 이어져 공군을 창설하게 된다면 그 연원을 이 비승군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경인왜란 중 전주성에서 최초로 열기구를 목격한 일본인들은 열기구에 '전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일본어에서 열기구를 부르는 단어가 전주가 될 수도 있다. 히데요시는 열기구가 기계장치인지 날짐승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괴물이라고 여긴다. 전주 공략이 계속 실패하자 일본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주와 눈이 마주치면 벼락을 쏘아 죽인다는 소문이 퍼져 전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하며 살아남아 돌아간 병사들에 의해 일본에 전주라는 요괴에 대한 전설이 생길 수도 있다. 히데요시와 다르게 노부나가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 노부나가 사후, 일본 1인자가 된 뒤에도 히데요시는 열기구를 요괴로 여겨 두려워한다. 을미동정 때 최종결전인 아즈치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한다.[55] - 신기전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인도산 염초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화약 비축량이 증대된 덕분에 화약 소모량이 많은 신기전이 도태되지 않고 대량으로 실전에 사용될 수 있었고 대신기전의 경우 개량되어 더 강력한 살상력을 보유하게 된다.[56] 작중에서 대신기전은 미사일 또는 신호용 로켓, 중신기전은 다연장로켓처럼 사용된다. - 지뢰
무자호란 때 상당수가 사용된다. 촛불을 피워서 기름을 부운 그릇위에 올리고 거기에 도화선을 놔서 묻어두고 누군가 밟으면 촛불이 넘어지며 불이 붙는 원시적인 촛불신관을 사용하기 때문에 적이 오기 직전에 설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신관이 발동될 지 여부가 불확실하기에 신관을 6개 정도씩 묻어놔도 잘 터지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 터질지 몰라서 오히려 적이 지뢰지대 내로 깊게 진입한 다음에야 터진다는 점이 피해와 공포를 극대화시킨다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 군장
기존의 괴나리봇짐 대신 새로 배낭을 만들어 군장을 도입했다. 조선군의 모든 군장은 도입 시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흘 치 식량·단삽·모포·가죽신·놋쇠 반합·붕대·환복할 옷을 결속하며 여기에 더하여 조총수는 사격 60회 분량의 탄환과 화약·부싯돌·화승 한 뭉치를 군장에 결속하지만 백병전 인원은 갑옷을 입기 때문에 사격물품은 넣지 않는다. 군장을 지는 인원은 무겁다고 하지만 재석은 화생방보호의가 없으니 저들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장에서도 여기서 더 뺄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더 집어넣을 궁리를 하고 있다. 단독군장 역시 도입되었는데 대나무로 만든 한 되짜리 수통에 조총수들은 소켓식 총검과 환도 및 죽관을 장비한다. 한편 훈련도감군은 퀴레시어 아머를 입는 스페인식 군장을 한다.(명군세계 훈련도감군 군장 설정자료. 명군 설정담당 하는 사람이 올렸음.) - 남만갑
유럽식 판금 갑옷. 펠리페 2세가 보내준 유럽 장인들에 의해 생산되기 시작한다. 제식으로 채용한 곳은 도감군밖에 없으나 도감군이 아니더라도 이순신, 신립 등 최고위 지휘관들에게는 특별히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하며 황진처럼 자체적으로 남만갑을 구해서 입는 경우도 있다. 저위력의 왜조총탄 정도는 막아낼 수 있기에 이순신, 신립, 황진 모두 조총에 맞았었지만 남만갑에 총탄이 튕겨 나가서 다치지 않았다. 남만갑 덕에 목숨을 구한 장수가 많다는 것을 들은 재석이 경성군이 폐지했던 비융사를 부활시켜 남만갑을 양산하게 하고 유성룡, 김성일, 조경, 사마유, 사노부, 이항복 등 최고위 지휘관들에게 남만갑을 내린다. - 안달루시아 말, 한혈마
펠리페 2세가 선물로 보내준 안달루시아 종마들을 강화도에 위치한 왕실 목장에서 번식시켜 나온 말들. 일본은 물론 조선말들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 그 중 한 마리를 정기룡에게 하사했으며 견서사가 10마리를 더 데리고 와서 모두 강화도에 보낸다.
북원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위협을 느낀 오이라트가 조선과 조총 무역을 맺기 위해 교역품으로 한혈마로 제시하여 조선이 받아들여 많은 수의 한혈마가 들어오게 되었다. - 왜장창
경인왜란 도중 기존의 2단 분리식 장창이 전투 중 부러지는 등 문제점이 드러나자 왜란 도중 대량으로 노획한 왜장창을 그대로 채용하기로 한다. 다만 운반이 번거로우므로 행군 중에는 수레에 싣고 다니기로 한다. 을미동정 이후 노획한 왜장창은 무려 20만 개. 원래 적당히 쓰다가 유럽식 파이크로 교체할 계획이었는데 노획한 양이 너무 많아서 그냥 계속 쓰기로 한다. - 백간창, 등갑
사르후 전투에서 패전하고 조선으로 후퇴한 유정 휘하 사천병이 쓰는 장비. 백간창은 왜장창과 마찬가지로 길고 튼튼하지만 물푸레 나무로 만들어 훨씬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등갑도 튼튼하고 가벼우면서 물에 뜰 수 있어 수군에서 활용도가 높다고 평가된다. 다만 재료는 아직 사천에서 수입해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 기타
- 왜솥
왜군 병사들이 사용하던 철제 삿갓 진가사는 군용 솥으로 재활용하기로 한다. 원 역사에서도 왜병들이 야전 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가볍고 겹쳐서 운반하기도 편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어떻게 왜놈들이 머리에 쓰던 것에 밥을 지어먹냐는 반발도 있다. 재석은 현대 한국군에서 노르망디에서 사용되던 수통을 계속 쓰는 것을 생각하며 혹시 이 솥이 400년 후에도 쓰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석의 명으로 부대찌개를 끓일 때 수라상에서도 쓰였다. - 수석식 조총
플린트락 권총이 개발된 이후에도 제작기술의 문제와 주 발화장치인 부싯돌의 보급문제로 권총에만 사용되었다가 경인왜란 이후에 스페인으로부터 황철석을 수입하고 서양기술진의 도움으로 생산이 되는 중이다. 물론 가격 문제 때문에 기존의 화승식 조총을 개량하는 방법으로 늘리는 중이다. 발사시의 충격으로 인한 명중률 문제가 있지만,팔굽혀펴기와 도수체조로병사들의 체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중이다. 이후 모든 병사들의 조총을 화승식에서 수석식으로 교체하였고, 남은 화승총들은 속오군에게 돌렸다. - 창숟가락
포크숟가락. 왜국 보복원정 전에 군에 보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젓가락을 별도로 보급할 필요가 없고 일반 숟가락에 비해서도 철을 조금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병사들은 편하다며 좋아하지만 양반인 무장들의 평은 나쁘다. 3부 시점에서는 대유주에도 수출되어 아직 포크가 보급되지 않았던 불랑국 등지에 포크보다 먼저 자리잡게 된다. - 격술(擊術)
군용 격투술. 조선의 격투술인 택견(수박)과 일본의 격투술인 조타술을 섞어서 만든 무술. 축구 대련 중 병사들이 반칙을 할 때(...) 처음으로 언급된다.
2.1.5. 식생활
- 고래국밥
1부에서 시작된 포경산업의 영향으로 생긴 음식. 고래에서 기름을 짜내고 난 뒤 남은 비계를 이용해 만든다. 고기를 먹기 힘든 가난한 백성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며 부역을 나갔을 때 식사로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흔한 음식이 되어버린 데다가 지나치게 기름져서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 된 듯하다. 2부 후반기 들어서 중국에서 들여온 개량종 돼지가 널리 퍼지면서 돼지국밥의 인기에 밀려 점점 안 팔리게 되어 고래 비계는 돼지 사료로 용도가 변하게 된다. 저렴한 하류층 음식 혹은 해안 지방에서만 먹는 향토 음식으로 남거나 완전히 잊혀질 뻔했다. 하지만 원 역사처럼 경신대기근이 오면서 유훈으로 남긴 포경제한이 풀리며 고래국밥도 다시 늘어나는 등, 결국 잊혀지지는 않게 되었다.
- 돼지고기
2부에서 북방대전, 남방대전을 모두 마무리하고 평화기가 오면서, 스페인 돼지와 중국 돼지를 교잡한 개량종 돼지가 널리 퍼지고 재석도 농사에 유용한 소 대신 돼지고기를 장려하여 돼지고기 요리가 널리 퍼진다. 특히 돼지국밥은 고래국밥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서민들의 별미로 자리 잡았다.
- 옥수수, 담저, 감저
옥수수, 감자, 고구마.[57] 재석이 선교사 세스페데스에게 부탁해 들여와서 원 역사보다 200년 일찍 들어왔다. 척박한 북방 땅에서도 잘 자라니 북방 식량 사정 개선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물론, 현지에서 호주를 빚고도 남아 돼지 사료로도 쓴다. 달달한 고구마 맛에 신료들이 정신줄을 놓으면서 고구마 게이트라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터졌다. 사실 새로운 작물은 농사짓는 법이나 쓰임새를 잘 알 수 없기에 꺼려지기 마련인데, 재석은 농서를 배포하여 이런 문제를 줄였고, 덕분에 이른 기간에 여러 지역에서 재배하게 되었다. 실제로 옥수수는 지력 소모가 심해서 콩과 함께 심지 않으면 땅이 황폐해지는데, 재석은 농서를 통해 이런 문제를 사전에 방지했고 이것만 먹으면 병이 날 수 있다며[58] 개구리 등 단백질을 함께 섭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렸다. 이런 작물들이 기근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맛도 있기 때문에 민심이 좋아지고, 조정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졌다는 언급이 경인왜란 파트에서 나온다. 한편 현실 역사와 비슷하게 감자의 인기가 형편 없다는 묘사가 여러번 나온다. 고구마 게이트 때도 신료들이 담저는 거의 가져가지 않았다던가, 담저는 맛이 없어서 술을 빚는데 주로 쓴다던가, 풍년이 들자 술로도 안 빚고 돼지 사료로 쓰게 되었다는 묘사까지 있다.
- 땅콩, 남만박, 남만초
땅콩, 호박, 고추. 재석이 옥수수, 감자, 고구마를 요청하자 다른 작물들도 가져가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한 선교사들이 요청도 없었는데 들여왔다. 사실 요청하지 못한 이유는 스페인어로 이 작물들을 뭐라고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어서 재석은 크게 좋아한다. 땅콩은 옥수수로 황폐해진 지력을 회복 시켜 주기에 유용하고[59] 남만초는 조미료로 조금씩 사용되고 있고, 현대의 것과 같은 붉은색 김치도 탄생했는데, 시중에 퍼지면서 상한고기와 야채를 넣어 만든 장국에 남만초를 듬뿍 넣는 방식으로 부정을 저지르다가 적발된 사례가 나오고 있다.
- 담배
담배는 다른 작물들과 달리 민간에 나눠주는 대신 조정에서 독점적으로 재배해 수입을 올릴 계획이다. 재석도 담배가 몸에 나쁜 줄은 알지만 어차피 수십 년 내에 들어오니 기왕 들어올 거 독점으로 돈이나 벌어보자는 생각. 어린이의 흡연과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은 금지했다. 궐내와 관청 내 흡연을 금지하는 것은 건강 문제 외에도 화재 방지 목적이 있으며 실제로 민간에서 담뱃불로 인한 화재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조선에서 재배한 담배를 처음 피워 본 재석은 현대의 담배에 비해 맛도 없고 지금의 몸이 담배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번 생에는 직접 피우지는 않는다. 덕분에 자신 앞에서 신하들이 담배를 피는 것을 싫어하며, 이걸꼰대티를 팍팍 내는 바람에 윗사람 앞에서 허락 없이 담배를 피지 않는 게 예절로 정착된 것은 원 역사와 동일하다. 또, 내수사에서 종이 재질의 담배, 궐련을 새롭게 개발하여 군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건주위 국왕 누르하치도 조선에서 전파된 담배를 피워보고, 아예 담배링을 만드는 기술까지 익혔을 정도로 골초가 되었다.
- 김치
작중에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고추의 도입으로 현대의 것과 같이 고춧가루와 젓갈이 들어간 붉은색 김치가 탄생했다는 설정이 있다.
- 설고
카스텔라.[60]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선물로 가져왔으며 제조법도 전수해주었다. 초기에는 남만병으로 불렸으나 재석이 설고라는 이름을 내린다. 조선에서는 설탕이 귀하기에 구하기 쉬운 꿀을 대신 사용하도록[61] 레시피를 변경했지만 귀한 음식인 것은 여전하다. 재석이 이순신의 모친에게 선물로 보내 이순신이 크게 감동한다.[62] 상희가 개업한 반촌다점에서 설고도 팔기에 도성에서는 돈만 넉넉하면 언제나 맛볼 수 있게 되었으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귀한 음식.
- 포도주
와인. 이 또한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선물로 진상하며 처음 들어온다. 첫 등장 때는 대부분의 신료가 시큼털털한게 이상한 맛이라고 혹평한다.[63]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몇몇 신료들이 맛들렸는지 류성룡 등 고위층들이 즐겨 찾는 묘사가 나온다. 한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했으나 을미동정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포도밭으로 쓸 땅을 내주고 직접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한다. 팔라데스 주교는 이를 예수회가 영구적으로 조선에 정착하도록 허가받은 것으로 여기고 크게 기뻐한다. 사실 한반도는 습도가 높고 하계 일조량이 적으며 토질의 물빠짐도 좋지 않아 양조용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는 아니라서 오리지널에 비하면 별로 맛은 없을 것이다.[64] 한반도에서 그나마 괜찮은 곳을 꼽자면 경북 내륙과 황해도 정도.
- 스페인 요리
스페인 용병 군사고문 중 한 명인 산체스는 본래 요리사 출신이었고 이후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스페인 요리를 제공했다. 그러다 경인왜란이 끝난 이후 공식적으로 사옹원 소속의 숙수가 되어 조선 숙수들에게 스페인 요리를 전수하게 되었다.
- 호주
보드카. 북방 3주에서 남아도는 수수와 감자로 빚은 증류주. 북방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주로 북방 3주에서 음용되었으나, 다테와의 무역 개시 이후 쌀이 충분해진 연해주에서는 쌀로 빚은 증류식 소주나 청주보다 맛이 없기 때문에 기피된다. 을미동정 때는 막강한 가격 대비 취기와 적은 숙취로 인해 일반 병사들에게 포상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 부대탕
부대찌개. 두부, 김치, 돼지고기, 국수, 고춧가루 등을 넣어 왜솥에서 끓인 전골. 현대식 얼큰한 맛을 그리워하던 재석이 개발했다. 다만 보다시피 햄도 소시지도 없다. 말하자면 김치찌개에 더 가깝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배추김치도 없었던지라[65] 실제 부대찌개랑은 생판 다른 음식이다. 재석도 꽤 아쉬워하며 독일에서 육가공업자라도 초대해올까 생각한다. 원 역사에서는 1950년대 6.25 전쟁 후 가난한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짬밥으로 대충 끓인 데서 시작된 서민 음식이지만, 소설 세계에서는 역사가 350년은 더 길어지고 궁중 요리에서 기원하는 진귀하신 몸이 되었다. 전쟁 후 3년 만에 민간에도 이미 널리 퍼져서 도성에서는 크게 유행 중이고 지방으로도 퍼지고 있다. 다만 부대탕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재석과 상희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재료가 많아서 부대탕이 아닐까 하는 민간어원이 돌고 있다.
- 안남미
경인왜란 이후 식량난을 막기 위해 안남에 왜군 포로와 병장기를 넘기고 수입해온 쌀. 이게 들어온 덕분에 삼남의 농사가 망하고도 아사자가 발생한 곳은 없다. 다만 조선인 입맛에 맞지 않아 불평이 있다고 하며, 전후 바로 풍년이 연달아 들자 안남미는 가능하면 술이나 떡으로 만들어 먹기를 지시한다. 덕분에 맛보다는 가격 대비 취기가 중요한 군용 막걸리를 안남미로 빚는 묘사가 있다.
- 태국 요리
섬라와 교류가 시작된 뒤 나레수안 국왕이 보내준 대량의 향신료와 섬라 출신 요리사 6명의 솜씨로 조선에 태국 요리가 소개되었다. 아직은 궁에서밖에 맛볼 수 없는 고급 요리인 듯.
- 맥주(내달주)
아직 라거는 개발되지 않았고 람빅이다. 최초의 맥주는 부안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양조해서 팔기 시작한다. 탄산을 오래 유지할 방법이 없기에 아직은 부안 근처에서만 팔리지만 상당히 인기가 좋으며, 내달국 술이라 해서 내달주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다. 네덜란드인들은 맥주 양조법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고 조선인들에게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희가 반촌주점을 개업할 때 보헤미아계 이민자들도 맥주 양조법을 알지만 판매하지 않는다는 틈을 파고들어 체코식 맥주를 팔기로 한다. 이런 지역적 차이로 인해 전라도는 네덜란드식 맥주, 수도권은 체코식 맥주가 전통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한양에서 전국 축구대회가 열렸을 때 반촌주점에서 맥주통을 가져와 무종계와 함께 현장판매한 후로 한양에 맥주 애호가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취향은 차가운 술보다는 따뜻한 술을 즐기는 쪽이기에 재석이나 상희처럼 맥주를 차갑게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서 계피, 흑설탕과 함께 마시는 것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 초리소
소시지. 일본 보복원정에 앞서 군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량생산을 시작한다. 고기가 부족해서 돼지고기 외의 잡육을 섞어 만들었기에 맛은 별로인 듯. 네덜란드인들은 먹어보고 스페인식이라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촌주점에서 안주로도 판다.
- 가배
커피. 커피를 먹고 싶던 상희가 수입해 와서 궁중에 퍼트리고 중전 등도 이를 즐기게 된다.[67] 동의보감 개정판에는 자양강장제로 커피에 대한 내용이 들어갈 예정.[68] 상희는 성균관 인근 반촌에 '반촌다점'이라는 조선 최초의 카페[69]를 개업하여 커피, 녹차, 스페인식 빵과 과자 등을 판매한다.[70] 너무 잘 팔려서 수십 명씩 줄을 서서 대기할 정도.[71] 10번 방문하면 커피 1잔을 공짜로 주는 포인트제까지 도입했다. 재석 재석은 나중에 커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오늘날 공시족들처럼 선비들이 카페인에 찌들어가며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 아니냐 우려한다. '반촌다점'이 생긴지 3년이 지난 작중 시점에서는 커피는 2019년 대한민국이 그렇듯이 한양 백성들의 기호품으로 자리잡았으며, 가뭄이 4년째 계속되어서 눈치가 보임에도 주문까지 해서 마실 정도이다. 이항복은 매일 아침을 커피와 시작할 정도로 그 맛에 매료되어 있으며, 백성들이 해로운 술 대신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 전국에 가뭄이 들었는데 식량이 아닌 걸 수입한다고 마뜩치 않아하던 이순신도 신메뉴 '감저라태'를 맛보고 대만족했다고 한다. 조선의 개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상징이 되는데, 임금이 총애하는 상빈이 4년째 가뭄인데 기호품을 사온다고 규탄해야 할 사림의 아성인 삼사 간관들 조차도 맛을 들여서 커피를 빨며 야근을 버티고 있기 때문에 침묵 중일 정도이다.
커피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커피 산지에 상단을 파견하여 커피 종자를 입수해 대남도에서 직접 커피를 재배할 계획도 세우고 이를 위해 인도와 아라비아 항로를 개척할 천회사를 보냈으나, 당시 유일한 커피 취급지이던 아라비아 모카의 태수가 조선을 야만국이라며 모욕하고 커피 씨앗을 밀수하려 했다고 조선 사신을 매질하고 국서를 찢는 등 도발행위를 했다. 이에 천회사 수사 이기빈은 국서가 모욕당한 원한을 갚고 왕명을 이행하겠다며 천회사 함대 병력을 이끌고 모카를 공격하고 점령해서 조선과 오스만 제국의 분쟁으로 일이 커져 버린다.[72] 몰래 커피 씨앗만 빼돌리고 빠져나가려고 한 계획이 틀어지자 그냥 포로로 사로잡은 태수를 협박해 아예 인근 커피농장에서 태수의 비대한 몸무게만큼의 커피 생두, 커피나무 묘목 30그루, 커피 재배에 숙련된 농민 10명을 통째로 탈탈 털어오고, 추격대를 정리하기 위해서 아덴까지 약탈하고 귀국한다. 이후 대남도에서 재배를 시도하여 성공해서 조선에서 커피 자체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 차
1, 2부 사이 명종(이환) 대에 차 산업을 적극 육성해 자연 찻잎을 채취하는 데서 벗어나 지리산 산등성이에 차밭이 많이 생겨났으나, 깨끗한 물이 많아 굳이 차가 음료로 필요하지 않은 조선에서는 잘 소비되지 않고 북방에 교역품으로 많이 팔린다. 대남도가 조선의 영역으로 들어온 후 양응룡 반군 포로인 묘노들 중 차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는 노비들은 대남도로 보내 대규모 차 농장을 짓고 유럽에도 조선 차를 수출할 계획이며, 양응룡 난 진압군으로 중국에 파견된 조선 군사들이 중국의 안 좋은 물을 마시고 풍토병에 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를 끓여 마시는 데 익숙해지면서 조선에도 차 문화가 부흥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
- 설탕
원 역사에서는 전량 수입이었던 설탕을 대남도 개척을 통해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하여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초기단계인 흑설탕이고 여전히 감미료나 기호품보다는 귀한 약재 취급을 받고 있다.
- 우유
펠리페 2세가 보내주고 견서사가 가져온 젖소를 사육해 본격적으로 우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나, 유럽인 사육사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육이 어려워 많은 수를 육종하지 못하였고 유통 문제도 있기에 가공한 건락(치즈)과 유락(버터)이 아닌 생우유는 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궁궐에만 진상되는 사치품이다. 상희가 개점한 카페에서도 우유 대신 두유를 대체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 피자, 바게뜨
상희가 아들 진안군의 가업으로 삼아주기 위해 반촌다점, 극장에 이어 호프집까지 열기로 하면서 호프집에서 초리소와 함께 안주로 팔 생각. 프랑스에서 보내준 기술자들 중 제빵기술자들에게 피자를 굽게 하도록 할 예정이며, 바게뜨도 당연히 따라올 것으로 보인다.
- 어묵
내강상단에서 어선에 태우는 왜노들이 잡어를 이용해 어묵을 만들어 먹는다는 말을 들은 재석이 어묵을 가장 잘 만드는 왜노 하나를 숙수로 들이도록 한다.
2.1.6. 의학
- 의시
재석이 무종 시절 전국적인 의료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각 군현마다 향의원 설립을 의논했는데, 무종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죽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재석 왈 '돈이 들지 않아서 오히려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정책'이라는데, 의시에 합격하고 3년간 향의원으로 복무하면 평생의 역이 면제되지만 복무할 때 드는 비용은 의원이 자비로 부담해야 되기 때문이라고.[73] 이런 폐단이 있지만 의시 자체는 성공적으로 정착했는데, 법적으로는 의시를 치르지 않아도 의학지식이 있다면 의원 노릇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지만 의시를 통과하지 않은 의원은 일반 백성들도 돌팔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원 역사와 달리 서얼허통이 이루어지면서 과거 시험이 빡세지자, 사대부가 출신들도 의술을 익혀 의시를 치르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74]
- 의녀
원 역사에도 의녀는 있지만, 이 세계에선 역할이 증대되어서 왕비, 후궁, 공주 등 왕실뿐만 아니라 양반가 여인의 치료를 전담한다. 어의의 역할은 왕에게 보고하는 것뿐일 정도. 물론 의녀는 궁녀가 아니기에 결혼도 가능하다.예쁘고똑똑한 관비 중에서 뽑던 옛날과 달리 대부분 의원집 딸들이 의시를 치고 들어와서 대부분 나이가 30세를 넘는다.[75] 의사들이 레지던트 마치고 30세는 넘어야 제대로 환자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듯하다. 사실상 전근대 조선에서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다.
- 종두법
재석은 종두법 시행에 대한 생각은 전부터 있었지만 우두에 걸린 소를 구하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다.[76] 그러던 차에 누르하치가 사기를 쳐서 넘긴 병든 소들 중 우두에 걸린 소를 발견해서 시행할 수 있었다. 상희가 맡아서 진행했기에 역사에는 의녀 출신 후궁 이씨가 발명했다고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인 보건사업으로 시행하고자 하나 처음엔 소 고름을 몸에 넣는다고 반발도 많았고, 선비들이 농성을 벌이며 깽판을 벌였지만, 이렇게 몰려온 시위대에게 천연두가 퍼졌고, 이들을 종두로 고치면서 반발을 잠재움과 동시에강제임상실험을 하여 안전성을 입증했다. 그래도 여전히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 종두를 처음 맞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저화 1되를 주며 꼬시고 있다. 그런데도 지방에선 맞으러 오는 사람이 적어 실제 접종자는 조선 인구의 10% 정도라고.[77] 재석은 종두법의 도입으로 세균전 계획까지 생각하지만 전 인구 접종은 불가하기에 조선 백성들에게도 필연적으로 피해가 올 수 밖에 없고 또 아무리 기밀로 해도 언젠가는 밝혀질 텐데 그런 짓을 했다간 후세 사람들에게 막장 국가, 걸주로 영원히 까일 거라는 이항복의 충언으로 그만둔다.
- 동의보감
상희가 의녀 시절 허준을 부추겨서 원 역사보다 일찍 집필되기 시작한다. 상희가 집필에 참가했으니 개똥을 이용한 처방이나투명인간 되는 법,[78] 아들딸 가려 낳는 방법 등 엉터리 내용들은 전부 빠지게 될 듯. 동의보감에는 종두법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는데 이 때문에 재석은 동의보감이 유럽에 퍼지면 유럽의 인구가 원 역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조선의 상대적 국력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유럽에 유출을 금하려 한다. 그러나 어떻게 국력 우위를 유지하겠다고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죽게 놔두겠냐는 발상을 할 수 있냐며 상희가 분노하자 수긍하고 베네치아 상인이 동의보감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가한다. 그러나 막상 유럽에서 동의보감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인삼 때문에 동양 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처음에는 관심을 좀 받았으나 동의보감에서 소개하는 약재 중 인삼을 제외한 대부분은 유럽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는 동양에서만 나는 약재들이라서 대부분의 내용이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 종두법에 필요한 소의 고름은 유럽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당시 유럽 기준으로도 너무 급진적인 치료법이라 시도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받아들인 부분은 오직 유럽에서 구할 수도 있고 스페인 왕실 등을 통해 효능이 입증된 인삼에 대한 부분으로 동의보감 중 인삼에 관한 부분만 발췌한 번역본이 널리 팔리고 있다고 한다.
- 양매창
매독. 서양과 접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온 전염병. 유럽인 선원들이 개성의 기생들과 관계를 맺어 전파된 것과, 견서사 관원들이 유럽 창녀들과 관계를 맺어 전파된 두 가지 경로로 유입된다. 상희가 한의사라지만 페니실린 없이는 치료할 방법이 없는 심각한 전염병으로 당시 수준대로 수은으로 치료하는 엉터리 치료법이 최선인데, 그나마도 수은이 워낙 비싸서 쉽게 할 수 없다. 치료가 어렵고 전염성이 높기에 양매창에 걸린 것이 확인되면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매화 모양의 자궁문신을 강제로 새기게 하여 전염을 막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병 자체도 걸리면 상당히 위험한데 저런 일까지 당하니 조선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장 두려워하는 병 1순위.
- 의학교, 외과
경인왜란에 종군했던 의원 전유형[79]이 전쟁 중 외상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존 한의학이 해부학이나 외과학 분야를 등한시 한 것을 통탄하고 왜병 시체를 해부해보기도 했으나 체계적인 해부학 지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중 1차 견서사가 가져온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교과서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2차 견서사에 자원하여 파도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전유형이 귀국하기 전부터 2차 견서사와 함께 부안에 정착한 유럽인들 가운데 의학을 아는 이들이 외과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파도바 대학교를 졸업한 전유형이 3차 견서사와 함께 돌아온 이후 새로 설립된 의학교의 교장이 된다. 의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치는데, 조선 정서상 사람을 해부하기는 어려워 아직은 닭으로 실습하고 있다.
2.1.7. 학문
- 무종수
아라비아 숫자. 재석이 저화 일련번호로 쓰기 시작한 아라비아 숫자는 2부 시점에서 무종수라는 별명을 얻는다. 상희가 수학강사 노릇을 시작하며 산관들은 한자 대신 무종수로 계산하기 시작한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국문과 섞어서 무종수를 쓰고 있다. 이슬람권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100년이 지났다지만 회회인들에게까지 무종수가 퍼지다니 신기하다'라는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어쩌면 한동안 무종수 한국기원설을 밀다가, 인도기원설이 입증된 후에는 15세기 사람인 무종이 대체 어디서 인도 숫자를 봤을까가 미스터리가 될 듯 하다.
- 수학
과외 경험이 많아 고등학교 이과 수학 정도는 통달한 상희가 산관들에게 가르친다.[80] 삼각함수·로그·미적분 등이 생겨 유럽 수학보다도 앞서 나가게 된다. 삼각함수는 이미 기원전부터 있던 개념[81]이니 논외로 치고, 로그는 약 10년, 미적분은 약 80년 일찍 발견한 것.[82] 이를 바탕으로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거나 렌즈를 제작하는 등 큰 도움이 된다. 왜란 후에는 과거 시험 정식 과목으로 채택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제로 산술은 사대부가 배워야 할 여섯 가지 교양[83]에도 들어가 있으니 명분도 충분할 거라고. 성균관을 종합대학화해 수학과를 만드는 것 외에도 수학교사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도 만들 계획이다.[84] 상희와 재석 본인들이 보기에 더 편하기도 하고 장차 서양과 교류할 때 더 편할 것이라는 이유로 한자가 아닌 무종수(아라비아 숫자)로 계산하도록 하며 기호나 문자도 알파벳을 사용한다. 다만 이 시기에 서양과 최초로 접촉이 이루어진 만큼 후대에 어디서 갑자기 알파벳이 튀어나왔나 하는 것이 미스터리로 여겨지지는 않을 듯하다.[85] 상희 왈, 십수년에 걸쳐 자신이 아는 현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은 죄다 가르쳤기에 다음 생에는 영재는 될 수 있어도 더 이상 수학천재 행세는 불가능해졌다고.
- 서양 철학
재석이 세자의 사고를 넓혀줄 목적으로 선교사들에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반발했으나, 재석이 "공맹과 동시대의 서양 현인들이었다."며 알려주는 한편, 정작 선교사들에게 서양 철학 강론을 듣고 나선 잠잠해졌다고. 재석은 복잡한 철학 같은 거 모르겠다며 대충 넘어갔다.[86]
- 사전 편찬
맞춤법을 통일하기 위해 국어대사전 편찬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사전 편찬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본격적인 작업은 왜란 이후 진행할 예정이지만 자료 수집은 미리 시작했다. 전가사변당했다가 돌아온 정철을 사전청 도제조로 임명하여 이 작업을 총괄시켰다. 국어사전 외에도 일본어사전·중국어사전·여진어사전·스페인어사전 등도 만든다.
- 서양 서적
세스페데스의 선교와 함께 성서가 조선에 유입되었고, 이항복은 라틴어 습득을 위해 갈리아 전기를 탐독하기도 했다. 권율은 사위에게 받은 플루타크 영웅전에 꽤 심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여기에 1차 견서사가 4987권에 달하는 서양 서적을 가지고 왔다. 그 중 하나가 데카메론.[87] 정철이 사전청에서 번역을 시작했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반하는 잡서로 취급 받을 수도 있지만, 먼 나라의 풍습과 문화, 역사를 소개하고 있기에 호기심 있는 관료나 선비들에게 인기를 끌 듯하다.[88] 정철은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에 빠지는데, 재석은 괜히 공화정 로마 시절을 파다가 조선에 공화주의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2차 견서사는 좀 더 체계적으로 베네치아 상인들의 도움으로 책을 사들이고 있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이 조선 서적을 구매하기 위해 조선으로 방문할 예정이다. 서양 서적들이 퍼지면서 조회에서 동양 고사만이 아닌 트로이 전쟁 등 서양 고사를 인용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 양명학
조정에서 사림파들이 축출되고 관학파가 주류가 되자, 정권에서 소외된 지방 사림들 가운데 성리학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 양명학이나 서양의 학문을 익히는 사대부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영향으로 지방 서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 관련 서적이 외국에서 다수 수입되고 있다.
- 금석문
명나라와 건주위의 전쟁이 발발하고 거기에 명에 요청을 받은 조선도 참전한 사이 재석의 지시에 의해 황성평에 있는 비석을 조사해 비문을 탁본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금나라 시대 것으로 알려져 왔던 비석이 사실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였고 황성평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 그 동안 알려진 전국의 비석들을 재 조사해 분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금석문학이 일찍 대두될 조짐을 보인다.
2.1.8. 경제
- 상공업
무종 시절에 애쓴 덕에 실제 조선과 비교도 안 되게 발전했다고 재석이 감탄할 정도. 조정에서 교역품 개발 논의나 금은 시세 차익을 스스럼없이 논의할 정도로 상공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89][90]덕분에 수년간 가뭄을 겪었음에도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대동법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부 당시 가뭄 한 번에 나라가 휘청거린 걸 생각하면 대단한 발전. 특히 사행길이 육로에서 해로로 바뀌며 사무역 중심지가 의주에서 개성이 되었고 이에 따라 개성을 중심으로 한 송상의 세력이 더 커졌다. 서양과의 교역은 호조와 내수사가 전담하지만, 요동과 교역하는 의주와 일본과 교역하는 동래를 포함한 대부분의 상인들이 송상의 자본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실상 조선 경제의 대부분이 송상의 지배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인왜란 당시 송상이 조정에 은자를 헌납한 공으로 외수사가 설립되어 동남아 등 외국까지 교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2차 견서사를 따라온 스코틀랜드 상인 제임스 앨런비가 조선 최초의 은행업을 시작한다. 이와 별도로 강경 상인들이 송상에 대응하여 연합해 네덜란드인들과의 협력으로 간척과 땅콩, 목화 농사와 포목 생산 등에 투자를 하고 있다.
- 개항장
벽란도, 동래, 해삼위, 무릉도에 하나씩 있다. 1부 때부터 서양과 접선을 기다리던 재석이 고려시대 번성했던 벽란도를 다시 개항장으로 연다. 서양과의 교류를 위해 갈레온선도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만큼 크게 지었으며 증기기관 거중기도 설치됐다. 이에 스페인 무역선이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인도산 염초와 후추, 설탕 같은 상품을 내리고 있다. 만력제에게서 해상 무역 허가와 명나라 조선공들을 얻어낸 후에는 대양항해에 조선식 평저선보다 더 적합한 중국식 정크선을 건조하고 산둥반도에 드나들면서 인삼과 세랍, 고래 기름 등을 거래하고 있다. 명나라 쪽 무역상 오공충은 조선에 밀무역선을 보내기도 하는데, 재석은 명나라에서 지정한 금제물품(염초·물소뿔)이 아닌 이상 묵인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 덕분에 중국산 쌀이 대량으로 들어와 가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벽란도에 번화가와 홍등가도 생기는데, 이 때문에 매독도 들어왔다. 개항장은 연해주의 해삼위에 하나 더 열 생각이고, 울릉도를 중간 보급항으로 쓸 계획도 세웠다.
- 역관
원 역사의 조선에서는 중국어·일본어(규슈, 쓰시마 억양)·여진어·몽골어 역관만 양성했지만, 작중의 조선은 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역관의 수와 통역 가능 언어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1부에서의 유담년의 북해도 탐사 이후로 아이누어와 일본 도호쿠 방언의 역관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2부에서 스페인과 접촉한 후 스페인어를 시작으로 각종 유럽 언어 역관을 대량으로 양성한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어지간한 유럽 주요 언어의 역관은 모두 확보한 듯 한데 아직 이슬람권과는 교류가 없어서 페르시아어, 아랍어 역관은 없다. 또한 인도와의 교류를 위해 범어(산스크리트어) 통역은 승려들에게 맡기려 했으나 인도식 범어와 조선식 범어가 전혀 달라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개방정책 효과로 세스페데스, 고니시 유키나가, 누르하치 등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 산양삼, 가양삼
장뇌삼, 재배삼.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인삼은 그동안 모두 산에서 캔 산삼이었다. 현대에 인삼이라 하면 재배한 삼을 보통 가리키나 당시에는 산삼을 인삼이라고 불렀다. 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하여 장뇌삼과 재배삼을 키우도록 하며 각각 산양삼과 가양삼이라고 부르도록 한다.
- 외수사
명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될 기구. 모든 명나라와의 수입, 수출은 외수사에서 관리한다. 경인왜란 중 송상들이 은 10만냥을 헌납하자 이를 밑천으로 호조와 내수사 자금을 더해 설립하기로 한다. 운영은 송방에 전적으로 위탁할 계획.
- 금, 은
대외 교역이 늘어나면서 저화 대신 은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시중에 유통되는 은은 대부분 외수사가 명에서 벌어온 것이며 조선에서 캔 것은 아니다. 본격적인 은화는 아니고 그냥 은 부스러기이고 개성에서 서양 은화가 쓰이는 정도. 금은 부여주 등에서 사금으로 채취하여 서양인과의 교역에 지불용으로 주로 사용하며, 1600년경에는 1년에 1톤 정도의 금을 채취할 정도. 캘리포니아에서도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어, 안위가 '금도끼로 나무를 베고, 금솥으로 밥을 지어야 하나?'라고 말했을 정도.[91]
- 조면기
내강상단에서 발명한 목화씨를 빼내는 기계로 기존의 씨아보다 30배 정도 더 효율적이다. 재석이나 상희가 미래지식으로 개입하지도 않았고 유럽에서 들어오지도 않은, 순전히 이 세계 조선 사람들의 지식만으로 원 역사보다 거의 200년이나 일찍 개발된 것. 조면기는 개발 후 30년간 오직 내강상인만 사용하도록 특허를 내줘서 조선 특허 1호가 된다.
- 서양식 마차
부안에 있는 네덜란드인들이 유럽식으로 만들었으며 호남대로, 영남대로 등 대로에서 사용되고 있다.
- 제철소
동래에 터를 잡은 잉글랜드인 제철공들이 서양식 고로를 짓고, 규슈에서 제조한 코크스를 이용해 강철 대포 제조를 시도하고 있으나 잉글랜드 철광석과 조선 철광석의 성분이 달라 아직까지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재석은 소뼈를 갈아 용광로에 넣으면 인 성분이 첨가되어 강철 제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 중. 코크스 제조 부산물로 나오는 콜타르는 함선들의 바닥에 칠해 목재 부식과 따개비 부착을 막는데 쓴다. 그리고 장조가 승하한지 2년 후 시점인 외전 6부에서 드디어 강철 대량 생산에 성공하고 강철제 대포도 성공했다고 나온다.
- 원양 항해
서양에서 범선을 구매하고, 또 만드는 법을 배워 온 이래로 이제는 조선인 만으로도 어느정도 위도를 측정하고 대륙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된듯하다.
2.1.9. 정치
- 붕당
원 역사와 같이 자연스럽게 붕당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동인 서인에 관계없이 일단은 사림이었던 원 역사와 달리 동인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관학파, 서인은 서원 등에서 수학한 사림파이다. 동인은 일단 임금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존중하지만 서인은 성리학적 가르침에 중점을 두고 정치활동을 한다. 그래서 경성군 시절에는 서인이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성리학과는 한참 먼 개혁 및 팽창정책을 시행하는 재석은 동인을 좋아하고 서인의 반대에 짜증이 나자 정철의 불손한 발언을 빌미로 기축옥사 축소판을 일으켜서 서인을 숙청해버린다. 단 멀쩡히 일 잘하던 서인들도 이걸로 같이 숙청 돼서 북방으로 보내져 버렸다.[92] 이후 진짜 능력 있는 이들은 무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재기에 성공한다.[93]
- 서원 특혜 약화
바뀐 역사에서도 최초의 서원은 소수서원. 재석이 빙의하기 전까지는 성리학 신봉자인 경성군의 비호 아래에 세금도 면제받고 때로는 정부에서 서원을 세웠다 하면 땅과 노비를 주니 무작정 밑천도 없이 서원부터 세워 놓고 보는 등 서원의 폐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석은 서원의 세금면제 혜택을 크게 축소하고 지원도 줄여 이를 제한한다.
- 종친사환금지법 폐지
위에서 설명한 족친위의 배경으로서 종친들은 원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되어있던 제한을 해제하여 종친들도 청운의 꿈을 품게 해...주진 않고 무과에만 응시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어 종친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한계점을 설정해 놓는다. 또한 진짜 목적은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종친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 종친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대가 끊긴 종친들의 재산을 회수해 국고를 채워놓는 것.[94] 그 결과 임해군이 무관으로 나설 수 있게 되어 차차의 헛꿈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리고 종친들로 구성된 부대인 족친위는 무자호란에 출전하지만 실전경험이 부족한 데다[95] 신립이 버리는 패로 써버린 고로 많은 종친들이 전사한다. 이순신이 족친위 부대를 인수한 후로는 전투능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송화강 함대의 노잡이로 부렸다. 대부분 전력으로는 최하급 부대 취급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활은 잘 쏜다고. 무자호란에서 큰 인명손실을 겪은 후 재편되어 왜란 시점에서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죄다 빠져나갔고 진짜로 백성들과 섞이면 곤란한 가까운 종친들만 입대하는 부대로 변했으며, 이렇게 되자 신립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해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 대동법
재석이 세금제도를 단순화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원 역사보다 빨리 시행했다. 마침 4년 연속 가뭄이 들어 세금을 감면해줘야 할 필요성도 있었고, 재석이 1부에서 무종일 때 상업 진흥을 위해 벌인 정책으로 상업도 원 역사보다 더 발전해 있어서 빠른 시행이 가능했다. 재석이 해서부 정벌에 나간 사이 사림파 관료들이 대리청정 중인 세자 성에게 대동법 폐지를 주청하나 재석에게 교육을 잘 받아 현실주의자가 된 세자도 대동법 유지를 확고히 한다. 서양종자 도입과 함께 백성들이 재석에게 지지와 충성을 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서양 기술, 종자 도입
이쪽은 조선이 주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의 선물. 선교사를 자청해서 받아들이고 보화 대신 작물을 요구한 재석에게 감격한 펠리페 2세가 개인적인 호의로 사절단과 함께 보냈다. 안달루시아산 종마, 이베리아 돼지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우수한 가축들과 아마를 비롯한 유럽 작물들의 종자, 그리고 항해, 인쇄술, 주조기술 등을 위시로 한 전문 기술자들로 이뤄져있다. 특히 유럽 밀 종자 획득은 추후 파급력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한국 토종 품종인 앉은뱅이 밀과 유럽 품종을 교잡하면 생산량이 훨씬 뛰어난 현대의 밀 품종인 소노라 64호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재석은 이에 심히 감격해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이 대패한다는 걸 미리 대비하게 귀띔해줄까 고민했을 정도. 스페인 기술자들이 만든 퀴레시어 아머로 오도리 족 기병대가 퀴레시어 부대로 편성되고 도감군 보병대도 스페인식 흉갑과 파이크로 무장하게 된다.[96] 인쇄술의 경우 기존 금속활자는 서양 기술자들이 가져온 구텐베르크 인쇄기에 사용할 수 없어서 활자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97] 기존 활자는 금속이 아까워서 녹일까 하다가 후대에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될 것을 알기에 보존시켜 두었다.
- 조보 배포
조정에서 조보를 전국에 배포,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인종 때 시행하다 경성군이 중단시킨 걸 재석이 세상 소식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한글 맞춤법 통일을 위해 다시 부활시킨다. 중앙에서 조보의 판본을 각 감영에 배송하면 다시 각 감영에서 이를 찍어서 각 군현에 배포하는 형태다. 원래 중앙에서 죄다 찍어서 보내려고 했으나 비용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변경된 것으로, 그 대신 지역별로 인쇄의 품질이 매우 조악한 곳도 있다고. 조보는 부여주 각 군현과 대마도에도 들어가지만 일기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북방의 오지에는 한 달에 한 번 한 달 치가 몰아서 오기도 하는 듯. 조보를 전하는 파발은 전국의 주요 간선을 이용하는데 이를 통해서 간선을 점검하는 임무도 갖고 있다. 간혹 조보를 전달하다 도로 정비가 소홀한 고을은 바로 보고해서 그 곳 수령이 경을 치는 구조. 왜란이 터졌을 때 남쪽의 소식들이 조보를 통해 북쪽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일본군의 만행을 알게 된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에 맞서 응징에 나서야 한다고 외치는 긍정적 효과를 냈다. 다만 강릉에 상륙한 우에스기의 언급을 비롯해 조선의 정보가 외국에 유출되는 단점도 있으며 시대의 한계로 기승전임금찬양의 어용언론이다. 지역별로 돈을 받고 광고를 싣기도 한다. 시중에는 민간 자본으로 배포되는 '시보'도 나왔다. 을미동정이 끝난 뒤 국경이 안정되며 재미있는 기사거리가 없어지자 조보 판매량이 감소한다. 그래서 홍희동전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허균은 연재료로 회당 저화 1섬을 받는다.
- 과거 제도 개선
영토 확장과 외국과의 교역 등으로 필요한 관리의 수가 부족해지자 원래는 대과 기준으로 3년마다 33명을 뽑던 과거 시험을 매년 100명씩 뽑는 것으로 개편해 기존보다 약 9배 이상 많은 인재들이 등용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인구증가와 서얼허통 등으로 오히려 경쟁률은 더 커져서 대과 대신 의과나 잡과를 보는 양반도 나온다. 또 상공업의 발전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겨 과거 시험에 도전하는 상민 출신자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이제는 성리학적 지식만 묻던 문제에서 수학 등 실용적인 내용의 문제도 출제하는걸로 보인다.
- 연좌제 범위 축소
시대의 한계로 완전히 폐지하는 못했지만 범위를 축소해 분가한 형제, 이혼한 부인 등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 덕분에 임해군이 역적이 되었음에도 차차, 광해군은 처벌받지 않았다.
- 규장각
원 역사에서는 세조가 사망한 후 곧 폐지되었고 정조 대에나 복원된 규장각이 재석이 빙의하기 전의 경성군에 의해 200년이나 일찍 복원되었다. 재석도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경성군이 그나마 딱 하나 잘한 거라고 칭찬할 정도. 물론 경성군이 규장각을 재설치한 이유는 선대왕들의 업적을 모으는 것뿐이었으며 이마저도 무종을 혐오하는 경성군의 성격을 볼 때 무종의 업적을 일부러 축소하거나 왜곡, 은폐하고도 남았겠지만, 어쨌거나 규장각이 재설치되어 견서사가 가져온 서양 서적 보관이 용이해졌다.
- 개선문
을미동정이 끝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숭례문 밖에 건설한다. 본래 을미동정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려 했으나 반발을 우려하여 태조, 세종, 무종을 끌어들여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 건국 이래로 왜국과 싸운 모든 전쟁을 기념하려 세웠다. 예수회의 이탈리아 신부 아돌포 파누치가 설계하고 베네치아 화가 안토니오 살바네티가 조각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내부는 벽돌로 만들고 외부만 대리석으로 포장한다. 훗날 손자인 선조도 숙정문 앞에 두번째 개선문을 지었는데 이거는 여진족들과 싸운 모든 전쟁을 새겼다고 한다.
- 가희
왕실 악단 장악원 소속으로 궁중 연회에서 기생을 대신해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는 전문 여성들.[98] 1부에서 임숭재가 체제를 확립한 이래, 공노비와 자원한 빈민 여성들을 모아 가무를 가르쳐 궁중 연회에 내보내는 구조다. 이러한 여성들을 전문적으로 스카우트하여 데려오는 일은 장악원 소속의 채홍사들이 담당한다. 원 역사에서는 이미 결혼한 여성, 임산부, 승려 등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강제로 여자들을 납치해 오는 등 연산군의 막장성을 상징하였지만, 여기서는 강제 차출은 공노비만 한다. 그 외에는 자원자의 동의를 확인한 뒤 제대로 돈을 주고 데려오며, 일단 장악원에 들어오면 의식주가 공짜에 봉급도 정기적으로 나가는데다 연회에 나가면 보너스까지 지급되기에 빈민들에게는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다. 게다가 가희는 의녀처럼 궁녀가 아니기에 결혼도 할 수 있어 부유한 사대부 가문의 첩으로 들어가 인생역전을 노리는 가희들도 여럿 있는데 경성군의 후궁 중 한 사람인 순빈 박씨도 본래 장악원 출신이라고 하고, 반촌극장에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연극 공연이 이뤄지면서 가희 출신 이매창이 인기 스타로 떠오른다.
- 금화사
소방서. 담배 도입과 함께 화재 위험이 높아져서 설치했다. 높은 망루 위에서 도성을 살피다가 연기가 보이면 말 4마리가 끄는 금화차가 출동한다. 금화군들이 물을 뿌려 화재를 진화하고 인명을 구조하고 재산 피해를 최소화한다. 전투는 하지 않지만 만만찮게 위험하기에 금화군은 도감군 급료병만큼이나 봉급이 많다고 한다. 3부 시점에도 유지 중인데, 금화차는 멸화차라는 이름으로 변했고 인원수는 대략 2400명.
- 사림파 축출
'정철의 난'과 '사간원의 난'을 계기로 조정 내에서 성리학밖에 모르는 골수 사림파들 다수가 숙청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물갈이를 진행해 1599년을 기점으로 조정 내에서 실권과 직접 관련된 주요 보직들은 현실적 해결을 중시하는 성균관-집현전 라인의 경학파가 장악했다. 다만 사헌부와 사간원에는 아직까지 사림파가 다수인데, 이 두 기관은 남의 흠집을 찾아내고 끌어내리는 데 도가 튼 프로불편러 씹선비 투성이인 사림파들의 적성과 딱 맞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큰 실권이 없기에 사림들이 관직에 나서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숨구멍으로서 남겨뒀다. 상황이 이러니 지방의 사림파 선비들도 보다 실용적인 양명학에 관심을 보이는 등, 긍정적인 변화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재석은 이들의 불만을 적당히 풀어줄 목적에서 국가 주도로 명망있는 학자들의 문집을 발간해 주는 사업을 진행해 가고 있다. 현재 조선 조정에서 사림파의 역할이란, 조선이 원래 성리학 국가라는 점을 잊지 않게 해주고 새로운 정책에 대해 자문 하거나 조정의 지나친 폭주를 막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야당 수준으로 자릴 잡았다.
- 청요직 권한 약화
사헌부와 사간원 간관(청요직)들은 그동안 풍문거핵(風聞擧劾: 소문을 들은 것만으로도 관료를 탄핵할 수 있다.)과 불문언근(不問言根: 자신이 한 말에 근거를 대지 않아도 된다.)이라는 과도한 특권을 가지고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인종 시절에 이 두 특권이 폐지되어 고위 관료를 탄핵하려면 반드시 증거를 가지고 탄핵해야 한다. 청요직의 권한이 약화되면서 재석의 개혁에 동참하는 조정 중신들의 입지는 커지고, 신입 관료들은 청요직보다는 실제로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관직을 노리게 되었다.
- 익문사
중국, 일본, 서양 등 외국과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외국의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할 기관이 필요해서 창설되었다. 초대 총관은 정여립이 맡아 직접 명나라 북경에 주재하고 있고 정보원들이 중국, 일본, 유구 등에 나가 있다.
- 법관의 독립
을미동정까지 마무리된 후, 그동안 지방 수령들의 권한이었던 재판권을 수령들에게서 빼앗아 재판만 전담하는 판관들에게 재판권을 넘겼다. 근대 영국처럼 1심은 각 고을을 순회하는 순회판관이, 2심은 각 도 감영 소재지에 있는 감영판관이 맡고 3심은 예전처럼 조정에서 맡는다. 명분은 지방 수령들의 업무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실제로는 지방 수령과 지방 토호들이 결탁해 부정한 재판으로 백성들을 등쳐먹지 못하도록 지역 연고가 없는 순회판관이 재판을 하도록 한 것. 덕분에 지방 수령과 토호의 횡포가 많이 줄어들어 백성들은 기뻐한다. 순회판관 직은 성균관을 갓 졸업한 청년 유생들이 맡게 된다.
- 정종 추존
원 역사에서 숙종 대까지 공정왕이라고 불린 이방과를 왜란 종결 후 태조를 따라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묘호를 올리고 묘도 능으로 올렸다. 그러나 실셈은 개성에 도착한 견서사를 맞이할 목적으로 정종께 올릴 참배라는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 환구단 재설치 및 천제(天祭) 거행
2부 결말에서 3년간 가뭄이 들자 신하들이 "만력제가 덕이 없어 하늘이 노했으니 우리가 환구단을 재설치해 스스로 우리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자."고 주청을 올린다. 재석은 기우제가 과학적으로 의미 없다는 것은 알지만 차제에 중국과는 다른 조선만의 천하관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용산에 환구단을 세우고 친히 기우제를 올리는데, 늙어 쇠약한 몸에 음력 11월의 추운 날씨를 견디며 기우제를 올린 덕분에 재석은 폐렴에 걸려 죽게 되었지만 기우제를 지내자마자 비가 내리는 일이 생겼다.
2.1.10. 외교
- 견서사
조선에 방문한 스페인과 교황청 사절단의 방문에 답하기 위해 파견되었다.[99] 주요 방문국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청.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서 방문하지 않았고 정발은 잉글랜드도 방문하고 싶어했으나 잉글랜드는 스페인, 교황청 등 가톨릭권과 적대 관계라서 갈 수 없었다.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는 원 역사에서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업무를 맡았던 정곤수. 하지만 실무는 젊은 이덕형이 많이 하고 있으며, 귀족이나 고위층과 사교 소통은 왕실의 먼 일가인 이수광이 맡고 있다.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유럽은 하멜보다 훨씬 앞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고, 인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인다. 교황청은 이들을 통해 재석이 제시한 제사 허용 문제를 두고 논의에 들어가는 한편, 돌아가는 견서사 일행에게 몰타 기사단원들을 일부 군사 고문단 겸 호위로 파견한다. 이들 견서사는 주로 유럽에서 기술과 철학, 군사 분야를 망라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수집했는데, 그 수가 무려 5,000권에 달한다. 이 중에 1,000권 정도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서라고 하는데, 이쪽 업무를 맡은 허균의 취향이 꽤 반영된 듯하다. 이외에도 조선에 데려갈 화가를 고용하고, 유리나 금은 장식 등 일부 유럽산 공예품을 수집했다.라오콘 상은 달라고 해볼까 생각하다 무거운데다 임금이 돌덩이를 좋아할 리 없다 판단해 포기했다깨알같은 디테일로 아시아에서 미리 접촉한 스페인은 서반아라고 한문으로 표기하는 반면 잉글랜드처럼 유럽에 가서야 알게 된 국가들은 국문으로 발음 그대로 쓰고 있다. 왜란발발 상황에서 엄청난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후임 마닐라 총독이 조선 지지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00] 음력 1590년 7월 5일 드디어 3년 3개월 만에 세계일주를 하여 조선으로 귀환한다. 귀국하는 견서사와 함께 들어온 교황 특사 코르나로 추기경의 출국과 동시에 2차 견서사가 유럽으로 출발했다. 재석은 유럽의 합리주의 사상을 조선에 이식하려면 교류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소 5~10년 간격으로 견서사를 계속 보내기로 한다. 2차까지는 조선의 양선으로는 유럽에 직접 가기 어려웠으나 경험이 쌓여 3차부터는 유럽 배를 빌려 타지 않고 직접 조선에서 건조한 갈레온으로 유럽에 다녀왔다.
- 외교 관계의 확장
본래의 조선은 명나라 황제의 사신과 조공 바치는 여진족 정도를 제외하면 외교 관계가 없었으나 유럽·동남아 국가들과 접촉하며 의전의 격을 어찌할지 논란이 생기기도 한다. 교황의 경우 일개 승려에게 황제라는 호칭을 붙일 수는 없어 '법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승려인 것과 별개로 세속국가 교황령의 국왕이므로 다른 유럽 국왕들과 동격으로 대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경우 일부 젊은 신하들은 황제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황제는 중화의 천자 하나뿐이라며 반대하여 황제라 부르지는 않되, 다른 왕들보다 격이 높은 것은 사실이므로 독일어 그대로 음차해 카이저라고 부른다. 오스만 투르크의 경우 과거 아시아에 있던 돌궐의 후예라 간주하고, 이전의 돌궐과 구별하기 위해 현돌궐이라고 부른다. 원 역사와 달리 중국, 일본을 통하지 않고 유럽과 조선이 직접 교류를 시작했기에 각국의 음차한 명칭도 원어 발음에 더 가깝게 달라졌다. 잉글랜드는 잉글국, 스코틀랜드는 수코국, 네덜란드는 내달국, 프랑스는 불랑국, 베네치아는 배내국 등.
- 태극기
원 역사에서는 1800년대 후반 고종 대에 와서야 국기의 필요성을 느껴 만들어진 태극기가 여기서는 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200년 넘게 앞서 제작되어 사용하게 된다. 도안은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변형한 거라 현실의 태극기와 조금 다른데,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중앙에 적청의 태극문양이 들어간 건 현실의 태극기와 비슷하지만 건곤감리만 있는 오늘날의 태극기와 달리 팔괘가 모두 들어가 있다.
- 사대주의 쇠퇴
조선이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 없이도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남아와 유럽과 직접 교류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이 많이 쇠퇴했다. 조정에서 만력제의 태업과 군사력의 약화를 비웃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고 김류처럼 일부 젊은 사대부들 사이에선 조선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할 정도로 사대의식이 흐려진 것.[101] 원 역사와 달리 전쟁에서 자금 지원만 받아 명에 대한 고마움이 옅고, 거기에 만력제의 태업까지 겹치니 안 좋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천자를 도와 반란을 진압한단 대의에 불타서 양응룡의 난 진압에 의군으로 자원해 참전한 사대부들이 민생은 내팽개치고 치부에만 열중하는 만력제의 천자라곤 믿기지 않는 추태 + 몇몇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에게 받는 오랑캐 번병 취급에 매우 크게 실망하면서 명나라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었던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중이라 양응룡의 난 진압이 끝난 뒤 이들이 돌아오면 사대주의 쇠퇴 풍조가 더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조선보다는 대국이므로 대외적으론 깍듯한 종주국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세자가 다이샨에게 훗날 건주위가 산해관을 넘으려고 하면 조선이 지원해주겠다고 말할 정도니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다가 만력제가 기어이 전쟁놀이에 미쳤는지 조선더러 출병해 건주위를 치라는 막장 무리수 명령을 내리자, 중추원에 속한 사대부 계층을 시작으로 사대주의 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식의 의견이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양응룡의 난 때 의군으로 자원 참전해 명나라 자체와 만력제의 작태를 목격한 사대부들이 귀국한 뒤 줄줄이 중추원에 들어갔고, 그 필두가 바로 중추원 동지사가 되어 반명 분위기를 주도하는 곽재우이기 때문. 곽재우는 강직했던 실제 성격 그대로 만력제의 한심한 꼴을 보고 가루가 되도록 까댔고, 같이 참전했던 남명학파 계열 사대부들 역시 중추원 내에서 이런 의견에 동의하면서 사실상 중추원의 주류 의견은 사대주의와 거리가 영영 멀어졌다. 곽재우의 친구이자 전우인 정인홍은 아예 "만력제는 아비는 아비이되 노망이 들고 주색잡기에 골몰한 무도한 아비이니 관습대로 기본적인 조공만 바치고 그 외의 모든 요구는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도리에 맞다." 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다이샨이 희정옹주와 혼인했다는 풍문이 퍼져 명 조정에서 조선 사신단을 추궁하자 조선 사신단은 헛소문이라고 황제 앞에서 대놓고 사기를 치는 지경까지 왔다.[102] 게다가 정치 항목에 나온 것처럼 신하들이 먼저 만력제가 덕이 없어 하늘이 노해 가뭄이 온 거라며 환구단을 세우고 독자적인 천제를 올리자고 하는 등, 명나라가 조금이라도 조선보다 약해지면 즉시 칭제건원할 사회적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 패권주의
사림 세력의 약화, 잇따른 전쟁, 서양과의 외교 등으로 인해 원래의 조선에서였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정은 실리주의적이고 패도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조회에서 대놓고 명색이 일본 국왕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로를 암살할 것을 논의한다던가, 같은 명의 조공국인 유구에 대놓고 남만선을 보내 포함외교를 하는 등.
- 서양식 국왕 칭호
유럽과 교류하게 되면서 유럽 국왕들과 대등한 국왕임을 어필하기 위해 4차 견서사부터 유구왕국의 보호자이시며 야인들의 자애로운 어버이시고 대남도의 지배자시며 구주 왜인들의 심판자이자 대명천하의 굳센 수호자[103]이신 조선왕국 국왕 이라고 국왕의 칭호를 정하여 사용한다. 북아메리카 탐사대가 돌아오면 여기에 '대미주의 지배자'라는 칭호도 추가될 듯. 여기에 조선에서 서양의 군주에 대해 황제라고 하기 껄끄러워 '카이저'라고 했던 것처럼, 조선의 군주에 대한 대외적인 칭호도 '임금'이라고 불릴 듯 하다.
- 상설 외교공관 설치
천회사 이기빈이 무굴 황제 미르자 살림과 의형제의 연을 맺고 무굴 제국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자, 인도와의 무역, 특히 전략물자인 초석의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최초로 상설 외교공관인 주천사가 인도에 설치되고 초대 주천사로 이기빈이 부임한다.
2.1.11. 사회 · 문화
- 남만절
일요일. 원래 조선에는 요일 개념이 없었다. 남만별기가 창설된 뒤 남만별기 교관인 스페인 용병들이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자 자연스럽게 도감군 전체가 일요일에 쉬게 되었고 이를 남만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직은 도감군 내에서만의 휴일이지만 돈벌이가 좋은 도감군이 남만절마다 술을 마시거나 하는 묘사가 있는 만큼 소비시장에 영향이 있을 듯. 도감군이 오군영으로 재편된 뒤에도 6일간 훈련하고 남만절에 쉬는 건 그대로다.
- 미적 기준의 변화
1부만 해도 미인의 기준은 전통적인 조선 시대 풍조였지만, 2부에서는 현대와 같아졌다. 이 점은 무종 시절 재석이 영향을 주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실제 임숭재는 재석의 취향을 철저히 알아내고 현대적인 미모를 가진 무희들을 뽑아 재석에게 선보여 주기도 했다.[104] 또 재석의 아들 인종(이황)은 부친을 닮아 후궁을 별로 들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재석의 미적 취향을 따랐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렇게 임금 혼자의 취향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전하께서 저게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보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원 역사를 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때 임금이 허리가 가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니 온 나라의 여자들이 굶거나 허리를 조여댔다고 하고,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자, 당대 여성들은 그녀의 옷차림이나 화장법을 연구했으며 아예 양귀비 시절부터 글래머를 선호하는 풍조가 중국에 퍼졌다는 말도 있다.[105] 근대 서양에서 그랬듯 궁정 문화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 괜히 조선시대 관료들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임금에게 잔소리 한 게 아니다.[106]
- 국제결혼
1부 시절만 해도 재석이 종성가를 장가보내려 했을 때 중신들이 누구도 딸을 내주려 하지 않아 정호찬이 총대를 매야 했다. 2부에서는 다소 양상이 달라졌는데, 차차가 조선에 와서 반려를 찾는다니 젊은 종친들이 너도나도 나섰을 정도.[107]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옛날에 비해 조선인들의 생각이 상당히 현실적으로 바뀐 영향이 있는 거라고. 더군다나 이후에 차차의 내조로 임해군이 사람이 되었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일부 종친들 사이에서 일본 여자들이 내조를 잘 한다 생각해 일본인 며느리를 들일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나왔으며, 윤두수의 경우에는 김충선에게 서녀를 시집보냈다.[108] 재석은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첫째 옹주를 하가시켰으며, 심지어 누르하치와도 혼인동맹을 맺을까 고려중. 누르하치의 장자는 좀 부담되니 다른 아들에게 딸을 주거나 아예 본인이 누르하치와 의형제를 맺는 걸 고려중인데.... 문제는 홍타이지도 장남이 아니다. 즉 홍타이지가 사위가 될 수도 있단 거... 여기에 스페인 용병들 중에서도 몇몇이 조선 여자들과 썸타는 묘사가 있다.[109] 허균의 경우는 이것을 소재로 한 소설 홍희동전을 집필 중이다.[110] 긍정적인 변화지만 이로 인해 3부에서 허균이 쓴 소설대로 인종차별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아직은 국제결혼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긍정적으로 변한 것만은 아니라서 도왜에게 옹주를 시집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관료들이 왕실이 국제결혼을 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하거나, 옹주의 친모인 후궁이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 바람에 상희가 직접 가 위로를 해줘야 했을 정도.[111] 2부 후반에 가서는 부마부터 왜인 하나에 만주인 둘, 일반인들의 국제결혼은 사례를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화된다.
- 제모
원래 조선엔 제모 풍습이 없었으나 후궁이 된 상희가 현대에서 하던 대로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을 제모하기 시작했다. 가장 총애 받는 후궁이 제모를 시작하자 제모가 총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다른 후궁들과 승은을 입고 싶어 하는 모든 젊은 궁녀들이 털을 밀어 궁궐에서 털이 남아있는 사람 중 젊은 여성은 중전 하나뿐이라고 한다. 정작 재석은 원래는 제모 취향이 맞지만 조선에 와서는 변태 취급받을까봐 포기하고 적응했다고. 궁궐의 풍습이 여염에서 유행하게 되며 여염의 여인들도 털을 제모하게 되었고 덕분에 민간에 비누 유통이 늘어나게 되었다.
- 팔굽혀펴기
상희 앞에서 재석이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을 본 권율이 군사들의 팔 힘을 기르기 위해 군사훈련으로 도입한다.
- 축구
원래 재석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일본 원정을 앞두고 병사들의 단결력을 올릴 만한 것들 중 축구만큼 준비하기 쉬운 게 없다고 생각해 만든다. 한 팀은 19명이며, 오프사이드 같은 복잡한 규칙은 다 빼버리고 단순하게 만들었다. 경고를 3번 받으면 퇴장. 공은 돼지 오줌보는 너무 잘 망가져서 가죽 씌운 등나무를 사용한다.[112] 추후 인기가 많아지면 스포츠 도박도 시작될 것이다. 군영 대항 축구대회는 한양의 큰 이벤트가 되었는데, 유럽인들이 조선에 이주해오면서 내금위 소속 스코틀랜드인들과 경상좌수영 소속 잉글랜드인들이 축구로 한판 붙은 것도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 서양식 교수형
원래 조선에는 서양처럼 높은 교수대에 죄인을 매달아 죽이고 전시해놓는 교수형은 없었으나, 을미동정 중에 남만선 함대를 이끌던 정발이 스페인 해군이 사라센 해적을 처형할 때 쓰던 방법대로, 붙잡은 왜병들을 갈레온 돛대에 줄줄이 교수형시키고 시체가 썩을 때까지 전시해 놓는 형벌을 조선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 복식 문화
서양식 드레스는 이덕형의 첩 롤리타 히메네스가 중전과 상희에게 선물했다. 중전은 받기만 하고 입지 않았으나 상희가 한 번 입은 뒤 유행하기 시작한다. 롤리타가 데려온 하녀들이 드레스를 만들어서 파는 듯. 서양식 장화도 참전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착용자들이 늘어나는 중이다. 도감군을 중심으로 남만갑이나 버프 코트 같은 서양식 갑옷도 많이 도입된 편. 또 한양에 주둔하는 오도리 기병이나 여진인들이 많아서 호복이 그리 드물게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 반촌 프랜차이즈
상희가 확장 중인 사업체들. 진안군과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돈 걱정 없이 살라고 사업 확장에 열중하고 있다. - 반촌다점
반촌 프랜차이즈 첫번째. 조선 최초의 카페. 커피는 아직 고급 수입품인지라 현대식 카페보다는 유럽의 커피하우스와 비슷하다. 커피 외에도 논카페인 음료도 판매하며 유럽식 빵과 과자도 팔고 있다. 종업원들은 조선인 외에도 롤리타가 데려온 유럽 여인들을 고용하여 이들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한량들도 많은 듯. 그러나 성추행을 막기 위해 종업원과의 합석은 금지되며 공간이 개방적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인 조선시대 정서에 맞춰 여성용 별실도 있다. - 반촌극장
반촌 프랜차이즈 두번째. 조선 최초의 상설 극장. 상희가 직접 추진한 것으로, 반촌다점 옆 부지에 잉글랜드 건축가들을 고용해 지었다. 도성에서 금화사 감시탑 다음으로 높은 건물인데, 선비들은 광대놀음 하는 건물이 궁궐을 내려다보다니 세상 말세라고 한탄할 정도로 높다. 궁궐을 내려다보는 구도상 저격수가 숨어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창문은 없으며, 높은 높이 덕에 금화사 감시탑을 겸하고 있다. 상영작은 홍희동전, 노 공자와 주 공녀, 고다지전, 당극 등. 3층 구조에 관객 정원은 무려 900명이며, 꼭대기인 3층은 여성 전용 관람석이다. 임금이 직접 관람하러 올 때에는 2층, 3층을 싹 비우고 공연하나 중전과 비빈들이 올 때는 3층의 특별석에서 관람한다. 화재 예방을 위해 겨울철 3개월은 휴관하고 그동안 반촌극단은 지방 순회공연을 나간다. 한동안 상희의 반촌극단만이 공연했으나 중전이 정도극단을 만들어 백면나인을 배우로 투입하고 반촌극단 간판스타 이매창까지 영입해가자 반촌극단이 인기를 크게 잃었고 극장 공연 대신 군부대 위문공연 위주로 전환한다. - 반촌주점
반촌 프랜차이즈 세번째. 네덜란드인들이 맥주의 양조법을 철저히 숨기고 독점하고 있었는데, 만드는 법을 알지만 팔지 않는 체코인들의 존재를 파고들어서 이들을 동원해 체코식 맥주를 팔기로 한다. 안주로는 무종계, 초리소, 족발, 피자 같은 것들을 팔 계획. 군영대항 축구대회에 맥주와 무종계를 갖고 와 현장판매를 하여 큰 매출을 올린 뒤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회에는 판매원들이 꼭 나타난다.
- 외래 동물
양응룡의 난 토벌 후 토벌군이 판다, 금계, 황금원숭이, 대왕자라, 양쯔강악어, 구름표범 등 사천지방의 동물을 전리품으로 잡아와서 재석에게 진상한다. 판다는 흑백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609년까지 살다 죽은 후 살과 뼈는 약재가 되고 가죽은 선조 대에 옥좌의 깔개로 쓰이다가 열조 대에 낡아서 궁궐 창고로 돌아갔다. 이외에도 베트남과 인도에서 코끼리가, 대만에서는 타이완구름표범이 잡혀 응방으로 보내졌다. - 코끼리
경인왜란 당시 쌀 수급 및 동남아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파견된 이수광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다. 당시 나레수안 국왕 밑에 있으면서 전투 코끼리에 깊은 인상을 느꼈는지 물소와 함께 언급했으며 김명원도 일본은 코끼리를 처음 볼 테니 사기 충격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전투용으로 도입을 주장하나 재석은 코끼리도 결국은 살짝 강화된 기병으로 포 맞으면 죽는 것도 똑같다며 고사한다. 그 이후 베트남 완씨 정권에서 조선에서 공급하는 철의 대금으로 코끼리를 지급하겠다며 다시 언급되고 이에 대신들은 반대하지만 재석은 전투용으로 도입하는데 회의적이었지 경운기이자 위엄 과시용으로 쓰기에 유용하다 판단, 5마리를 들이기로 하며 2마리는 대남도에 보내고 3마리를 한양으로 데려와 기르며 1마리는 권율이 일본 원정을 갈 때 줄 생각이다. 한니발 바르카 빠가 된 권율은 자기가 받은 코끼리에게 한니발의 코끼리 이름인 '수루사'라는 이름을 주고 일본 원정 때 타고 간다. 그냥 위압용으로만 탄 것은 아니고 코끼리 등 위에서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피면 시야가 탁 트여 훨씬 멀리까지 관측이 가능하다는 실용성도 있다. 한양에 있는 코끼리들은 재석이 거동을 할 때나 큰 공사를 할 때 부려지는데 백성들에게 평이 좋다고 한다. 대남도에서는 사실상 대남도 개척의 1등 공신이자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취급받는데, 전투에도 능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하는데다 초목이 널린 대남도 특성상 먹이 문제도 크지 않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가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남에서 코끼리를 꾸준히 구해 오다 보니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아 15마리나 기르게 될 정도.
- 도량형 개편
4년 연속 가뭄이 든 것을 기회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적게 걷어 애민하겠다는 명분으로 도량형을 개편했다.
1자는 30cm, 1치는 2.5cm, 1근은 600g, 1냥은 50g으로 확정하여 미래에 국제단위계가 조선에 들어올 때 쉽게 맞출 수 있도록 한다. 해외 교역에 쓰는 금, 은의 무게단위만 중국, 일본과 맞추기 위해 예전처럼 37.5g으로 남겨두고 구냥(舊兩)이라 하려 했으나, 혼란이 너무 커서 냥의 단위만 다시 37.5g로 돌아간다.
- 기계식 시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세스페데스가 재석에게 선물로 바치면서 도입되었으나, 조선 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인들이 이주한 이후. 네덜란드 장인들이 서양식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서양식 24시간, 60분 개념이 조선 사회에도 점차 퍼지게 되자 아예 경복궁 흠경각에 시계탑을 세워 자명종이라 이름하고 국가 표준시계로 삼는다. 시계탑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기술자들이 건설하고. 큰 종을 달아 도성 전체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소음이 심하다는 백성들의 불만도 없진 않아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종소리를 내지 않는다.
- 트럼프 카드
견서사를 다녀온 이덕형이 현지화했다. 2~10과 J, Q, K는 십이지, 스페이드, 하트, 클로버, 다이아몬드와 A는 사신수, 조커는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로 완벽하게 대치시켜놨다. 선원들에게 많이 유행한다. 포커를 현지화한 사패놀이, 세븐 포커를 현지화한 칠매패, 도둑잡기를 현지화한 탐상제 등이 있다.
- 타로 카드 : 견서사를 다녀온 허균이 타로 카드로 점 치는 법을 배워왔다.
- 문화재
전란의 피해가 적은 만큼 원 역사에서는 소실되어 버렸던 건축물들 상당수가 살아남아 후대까지 온전히 전달될 가능성이 커질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과 불국사. 서적에 있어서도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무사하고, 조선 전기 승정원일기나 역사서적, 전쟁기록 등 각종 기록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이 현대까지 소실되지 않고 보존될 경우 문화재로서의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국내 문화재 말고도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필사본이 들어왔으며, 라오콘 상 복사본도 선물받았다. 원래 역사에는 없는 별궁이나 마포 성당, 서양식 초상화 등도 후대에 사적과 보물로 지정될 것으로 보인다. 노획한 왜장들의 도검이나 갑옷 등도 지정 문화재 정도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경인왜란에서 한양이 점령당하지 않았으니 성종의 왕릉도 도굴당하지 않고 무사할것이며,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아 현실의 일본 도자기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도자기 제작 기술이 유출되지 않았다. 아울러 진안군이 명에서 속아서 사온 가짜 장팔사모도 훗날에는 진안군의 일화와 함께 조선 왕실의 중요 문화재로 전해질 것이다.
2.1.12. 문학
- 홍희동전(해 뜨는 동방의 나라에서 태어난 용맹하고 현명하며 자애로운 기사 돈 디에고의 세 대륙과 세 바다에 걸친 모험)
1차 견서사로 스페인에 다녀오면서 허균이 집필 중인 소설. 원 역사와 달리 딱히 사회 문제가 아닌 서얼 차별 대신 다양한 인종과 접촉하면서 생긴 혼혈아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제 도적 홍길동은 의적으로 미화되지 않았기에 재석 이름으로 쓰이지 못했다.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에게 검수를 받으며 한글과 스페인어로 동시 집필한다.[줄거리] 허균은 원고를 일단 탈고한 후 스페인어본을 다시 세르반테스와 상의하기 위해 2차 견서사에도 지원했으나 사전청 도제조 정철이 여기에 번역 일이 많은데 어딜 가냐고 붙잡는 바람에 원고만 이덕형에게 맡겨 세르반테스에게 전달해 주기를 부탁한다. 조선어판본과 서반아어판본의 결말이 다른데 아메리카로 떠나는 것은 같으나, 조선어판은 사실 남장여자였던 동료 산도발과 이어지며 서반아어판은 자신의 이복여동생과 이어지는 근친물이다. 세르반테스의 주도로 유럽에서 출판되었고 그럭저럭 많이 팔려서 견서사를 통해 수익금을 전해준다. 을미동정 이후 조보 구독자 수 감소를 막기 위해 조보에 연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홍희동이 아메리카로 떠난 뒤 스페인인, 인디오, 무어인, 흑인이 종교와 인종을 떠나 모두 함께 평등하게 산다는 내용의 3부가 스페인 정서와 너무 동떨어졌고 여동생 비올레타와의 러브라인이 질질 끌다가 결국 이어지지 않았기에 스페인에서는 폭망해버렸다. 망하긴 했지만 100여년이 지난 3부 시점에서도 서반아 내에서 유통이 되고 있는 듯하며 성친왕의 사생아인 디에고가 이 책을 읽고 대한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로마제도 낙성기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다룬 이탈리아 학자의 서사시를 정철이 자신의 필력을 더해 번역, 번안해 출판한 서사시.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제국이 강대한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황제 본인이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하며 비장하게 멸망하는 모습은 애산 전투를 끝으로 멸망한 남송의 비장한 최후가 오버랩되었기에 유학자들에게 좋은 평을 얻고 크게 유행한다. 아직 조선인들은 멸망 전의 동로마가 얼마나 막장 국가였는진 모르는 듯. 실제로 정철이 로마제도 낙성기를 쓸 때 동로마의 멸망 부분을 진짜로 애산 전투 서술하듯 애잔한 어조로 써 놔서, 로마제도 낙성기를 읽어보고 색안경이 씌인 조선 사대부들과 이기빈이 이끄는 천회사 함대 대원들 등의 조선인들은 어림잡아 주나라 평왕 때부터 이어져온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현돌궐(오스만 투르크)을 견융(犬戎)과 견줄만한 개놈들의 나라로 생각하고 경멸하는 감정을 갖게 됐다. - 경인란록
151일간의 경인왜란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 명에도 전해져 널리 퍼졌고 이 책 덕분에 이순신의 명성이 명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을미동정 후 포로로 잡혀온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일본측의 정보를 얻어 보완한 '증보경인란록'도 나온다. - 을미동정록
정철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책. 을미동정의 내용을 상세히 다룬다. 경인란록을 읽고 조선군 마니아가 된 만력제가 을미동정록을 집필되는 대로 1일 연재로 보고 싶다는 무리한 명령을 내려서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직항로가 개설되기도 한다. - 왜국도지
정철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책. 일본의 전반적인 사회와 문화를 다룬 책인 듯하다. - 신장록
정철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책. 오다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 수길록
정철이 고니시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책. 하시바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 행장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자서전. 고니시가 집필한 마지막 책이다. - 십일야화
데카메론. 사전청 도제조 정철은 이딴 잡기를 번역할 생각 없다며 번역을 거부하지만 이항복이 개인적으로 창업한 한달서관에서 조선에 맞게 번안해 한문판과 국문판으로 출시하여 큰 인기를 끈다. 현대 기준으로도 야설에 가까운 내용인지라 이항복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쏟아졌지만 재석은 무시했고, 이항복을 처벌하라던 그 간관들도 몰래 사다가 읽을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한다. - 반촌극장 상영작
- 홍희동전 연극판
허균의 홍희동전을 극본으로 개작한 것. 그러나 조보에 1500회에 걸쳐서 연재할 정도의 초장편 소설을 1시진짜리 연극으로 압축한 탓에 진행이 지나치게 빠르고 구멍이 많아서 평이 좋지 않았다. 이후 중전 김씨의 글솜씨로[114] 원작에 지나치게 많던 군더더기를 쳐내고 3부의 내용을 홍희동이 캘리포니아에 나라를 세운 뒤 조선에 신종해 번왕이 되는 결말로 각색하고 백면나인들을 서양인 역으로 출연시키자 인기가 급상승한다. 재미뿐 아니라 미주 개척에 참가하라는 프로파간다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 노 공자와 주 공녀
로미오와 줄리엣 번안판. 배경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명나라 항주로 바꿨다. 하찮은 남녀 애정 이야기라고 사대부들은 별 관심이 없지만 여성 관객들, 특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한 양반집 마님들에게 인기가 많다. - 고다지전
1부 당시 활약한 고다지의 일대기. 반촌극장 상영작 중 최고 인기작이다. 중전이 제안한 소재로, 극본도 중전이 거의 다 썼고 허균은 손질만 했다고 한다. 이매창이라는 미모의 장악원 가희가 고다지 역을 맡아 엄청난 인기인이 되었으며 그녀가 극장을 나갈 때는 포도청에서 가마를 호송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불경죄를 피하기 위해 1부의 재석이었던 무종은 스토리상 주요 인물이지만 직접 등장 없이 상황으로만 묘사된다. 재석 고다지는 배우지도 못한 백정 신분이면서도 충성, 효도, 겸손, 용맹 등 조선 사회가 요구하는 덕목을 모두 갖췄고 결국 신분상승과 사랑을 이뤄내기에 성리학 프로파간다로서도 유용한 듯. - 당극
주산군도를 통해 유입된 중국 전통 곤극. 내용은 대부분 중국 고사에 대한 것이며 주산군도 출신 중국인들이 공연한다. 대사가 전부 중국어, 그것도 강소성 방언으로 진행되는 탓에 영화 자막처럼 대사를 적은 족자를 무대 옆에 걸고 넘겨준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보기 어렵지만, 한문과 중국사에 빠삭한 사대부들은 대사집은 슬쩍 훑어만 봐도 이해되고, '대국의 악극'이라며 사대부라면 꼭 봐야 하는 교양처럼 여겨지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고다지전 다음으로 인기가 많다. 노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반촌극장에 방문했던 오다 나가마스의 제안으로 일본식 연극 상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대국의 악극인 당극과 달리 어찌 왜놈들의 연극을 하냐는 반대가 심해서 무산된다.- 진안군 집필작
진안군은 평생 40권의 소설을 집필했다. - 박생서정록
진안군의 첫 작품. 파주 출병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재석도 읽어보고 좋게 평했다. - 논산대전기
경인왜란의 논산대첩을 소재로 한 소설. - 대유주로망스
가상의 견서사를 소재로 한 소설. - 상군동유기
권율의 코끼리 시점에서 을미동정을 관찰하며 인간의 무도함을 비웃는 풍자 소설. 사대부들 사이에서 좋게 평가받았다. - 임진록
무종이 영토를 넓히고 무기를 개발하는 업적을 세우지 않은 세계에서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와 조선이 크나큰 피해를 입는 대체역사소설.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하는 수사도 등장한다고 한다. 진안군이 처음 써서 상희에게 보여준 버전에서는 왕이 함흥으로 몽진하는데, 아무리 소설이라도 왕이 몽진하는 내용을 썼다가는 불경죄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서인지 출판본에서는 왕이 한양을 지키다가 간신히 한양에서 왜군을 저지한 뒤 탄금대 전투에서 섬멸했지만 전쟁 대비가 부족했고 피해가 너무 커서 일본으로 역공은 가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출시되었다. 국방을 등한시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는 소설. - 왜지일록
원균이 일기도주 시절 쓴 자서전.[115] 자신이 조선을 배신하고 왜장이 된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자기 변명이 담긴 책이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
장조 사후 경조 제위 기간에 출간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통해 조선에 알려져 당시는 물론 4부 시점에서도 백성들을 혹사시켜 무덤을 지었다고 쿠푸를 비롯한 파라오에 대한 인식이 안좋아졌다.
2.1.13. 주요 사건
연도별 정리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 1차 니탕개의 난 - 1583년
니탕개와 우을지가 북방에서 계속 이어진 신립의 압제를 견디다 못해 난을 일으킨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우을지를 사로잡아 정4품으로 복귀. 이일과 원균은 공적을 조작하다가 이일은 백의종군당하고 원균은 삭탈관직당해 북방에서 눈을 쓸게 된다.
- 2차 니탕개의 난 - 1585년
니탕개가 복수에 눈이 멀어 다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온 니탕개는 복수심에 조선군을 죽이고 복수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조선군에게 쫓기다가 포기한 부하들에게 죽는다. 신립은 여기서 큰 활약을 하고 이일은 신립을 보좌해서 다시 복귀한다. 강무관이 열리고 참모제도가 돌아간 후의 첫번째 전투로 이 전투에서 이억기 정기룡이 좋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 정철의 난 - 1586년
갑작스레 성향이 변해버린 왕에게 불만을 품은 정철과 그 일당들이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다가 금위사에게 걸려 전가사변을 당한다.
- 감저사화 - 1586년
일명 고구마게이트. 백성들을 위해 농서를 쓰고 널리 퍼뜨리라고 준 고구마를 대신들이 죄다 삶아 먹어버려서 생긴 어이없는 사건이다. 정철의 난이 전가사변으로 끝난 걸 보고 아쉬움을 느낀 정여립이 건수를 올리려고 기군망상으로 고발해서 공론화됐다. 사화라고 명명되긴 했지만 피바람이 불진 않았고, 각자 구휼미 10섬씩을 내게 하는 것으로 불문에 부쳤다.
- 1차 견서사 - 1587년
펠리페 2세가 보여준 호의에 감격한 재석이 자신들도 사신을 보내겠다고 하여 최초로 서양에 사절단을 보낸다. 인원은 정곤수, 이수광, 이덕형, 허균, 정발 등. 여기서 허균은 가는 길에 홍희동전을 쓰고 이덕형은 여러 가지 서양문물을 견식한 뒤 수많은 책을 사가지고 돌아온다. 주요 방문국은 스페인, 교황령, 신성로마제국.
- 무자호란 - 1588년
해서부 야인들의 조선에 대한 불만이 조선인 감독관이 여진족에게 모욕을 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여 부여주 침공으로 이어진다. 그 숫자가 무려 15만. 해서부의 목표는 영토 점령이 아닌 인구 납치와 약탈. 오위군과 도감군을 포함한 각종 정병들이 출동하고 재석도 직접 친정하여 압살해버린다. 특별히 고전은 하지 않는다. 여기서 권율이 삼성부를 잘 막아 크게 활약하고 이순신 또한 연달아 굉장한 활약을 한다. 결국 눈에 띄지 못한 신립이 전투가 모두 끝난 뒤 누르하치를 끌고 북원으로 역공을 가서 전과를 올리고 온다. 이 전쟁으로 해서여진은 멸망하고 속말주가 조선 영토로 편입된다.
이 사건은 원 역사와 같은 이순신의 9단 승진, 신립, 권율, 김시민 등 다른 주요 장수들의 성격 묘사, 왜란 때 싸울 조선군의 숙련도 향상, 그리고 경인왜란까지의 공백을 메우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무자호란을 통해 오위군보다 도감군의 전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표현하여 왜란 후 군제 개편의 밑밥을 깔았다. - 삼성부 포위전
해서부 야인들이 목단강을 건너 들어오는데, 그 때 최북단인 삼성부와 비교적 남쪽에 있는 북평이 공격받는다. 북평 근처에는 봉수대가 많고 왜인여진군도 있어서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지만, 삼성부에는 주변에 구원을 받을 데가 없어 고전한다. 당시 삼성부에 있는 인원은 정철의 난으로 귀양 온 정철, 윤두수 등과 권율, 김시민, 김충선, 사마유 등이 활약한다. 수만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원군도 없는데 오랜 기간을 혼자 버텼다. - 무자지역
재석이 빙의하기 전 경성군이 뽑은 젊은 사간원 대간들이 재석 주도의 실용주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며 작당, 대리청정 중인 세자에게 지금의 왕은 미쳤으니 세자께서 보위에 오르셔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가 전원 의금부에 하옥된 뒤, 친정을 끝내고 돌아온 재석의 어명에 의해 처형된 사건. 원래는 역모죄를 적용해 구족을 멸할 수도 있었지만 연좌제에 반감이 큰 재석이 주동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 일가족은 노비로 만드는 선에서 끝냈다. - 신북성 전투
울라부장 만타이는 조선군이 평소처럼 조금 있다가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선군이 목단강 이서에 5개의 성을 쌓기 시작하자, 궁지에 몰려 항복하는 척하다가 조선 국왕을 사로잡을 계획을 세운다. 만타이는 조선군의 성을 함락시키고 조선 국왕이 있는 곳을 향해 진격하지만, 사실 그것은 함정이었고 울라부 병사들은 도감군, 오위군, 귀차, 지뢰 등에게 둘러싸여 섬멸당한다. - 코르친 대회전
조선군은 시버 족을 쫓으며 소탕하고 있었는데, 코리친이 보낸 대군과 맞닥뜨린다. 조선군의 장창진과 조총부대의 공격이 강력하자 코르친군은 철기를 우회시켜 뒤를 습격하지만, 오도리 쿼레시어 기병에게 철기병은 녹아버린다. 이에 코르친군은 후퇴한다.
- 2차 견서사 - 1591년
경인왜란이 끝나고 제도를 한창 정비하는 중에 2차 견서사를 보낸다. 주요 인원은 이항복, 이덕형, 광해군, 황진, 이억기, 정충신, 문성군부인 등. 주요 방문국은 스페인, 교황령,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 등. 교황청에서 제사를 허락받고 윙드 후사르와 장다르메를 데려오고 네덜란드와 보헤미안 기술자들을 이민시킨다. 이덕형은 롤리타 히메네스라는 자신에게 반한 여인을 데려오고 광해군은 유럽에 남아서 교단에 귀의하기로 마음먹는다.
계갑대기근 - 1593년, 1594년
계사년과 갑오년의 대기근은, 작중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불명. 작중 두 해 모두 풍년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지나갔다. 작중 날씨를 자료를 철저하게 고증하는 작가답지 않다. 을미동정을 위해서 고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116]
- 을미동정 - 1595년
해당 문서 참조.
- 3차 견서사 - 1596년
을미동정이 끝나고 상설화된 3차 견서사가 간다. 주요 인원은 이덕형, 허균, 권익경, 안위, 롤리타 히메네스 등. 주요 방문국은 스페인, 교황령,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 2차에 이어 추가로 이민자들을 모집하고 한호를 포함한 사전청 관료들이 베네치아에 남아 한문 서적 번역과 한학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 양응룡의 난 - 1600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이 명나라 내에서 발발한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러 간 사건. 조선 중앙군 일부에 일본 용병[117], 대남도 토병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양응룡의 반란군을 압살했고, 막대한 전리품과 영토(조선은 주산군도를 획득)를 챙긴 성공적인 원정이 되었다.
- 목가사변 - 1604년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가 커피 종자 구입을 위해 모카 항에 들렀는데, 태수가 조선 국왕 친서를 상급자인 총독에게 전하지도 않고 찢어버리고 조선 사절을 매질하며 조선을 야만국이라고 욕하는 등 모욕행위를 하면서[118] 천회사 함대가 보복으로 모카와 함께 아덴, 소코트라 등을 습격, 약탈한 사건. 단군 이래 최초로 다른 대륙에 조선군이 군사원정을 한 사건이 되었다. 유럽에는 조선 함대가 모카와 아덴, 소코트라 등을 더해서 메카까지 불태웠다는 것으로 와전되어 가톨릭 세계에서 조선의 이미지가 크게 좋아진다. 펠리페 3세의 변덕으로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악화됐던 스페인과의 관계가 단숨에 호전될 정도. 다만 이 사건으로 당초 천회사의 목적 중 하나였던 오스만과의 수교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3부 건흥제 말 대한괴 오스만이 모카사변 당시 서로의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수교할 때까지 (거리가 너무 멀고 양국의 관심사도 달라서 전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100년 넘게 적대관계가 이어진다.
- 탐동사 귀환 - 1604년
북아메리카 탐사 임무를 받고 1602년 7월에 출발한 탐동사 일행이 1604년 10월에 무사히 귀환하였으며, 캘리포니아의 황금, 북극해의 해달 및 북극곰 모피, 바다코끼리 상아 등 수많은 자원과 조선에 복속하기로 한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 대표들을 데리고 한양에서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북미주가 자원의 보고라는 것을 직접 본 백성들이 북미주 이주를 앞다투어 자원할 것으로 보인다.
- 건주위 정벌전 - 1605년
만력제가 북원을 정벌하기 전에 우환이 될 수 있는 건주위를 먼저 친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분하에 원 역사보다 14년 일찍 명나라와 건주위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조선도 명의 요구로 일단 참전은 하지만, 원 역사와 달리 명나라에게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을 유지한 상태로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시하여 건주위와의 적극적인 전투는 지양하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명군은 사로병진을 전개했다가 일방적으로 건주위에게 각개격파당하지만, 조선군은 여러 실전경험과 강력한 화력과 기병전력을 바탕으로 크게 고전하지 않고 조선군 견제용으로 누르하치가 보낸 팔기 2만을 궤멸시키고 누르하치의 장남 추옌과 동생 야르하치까지 전사시킨다.근데 신기한 게 명군 지휘관들이 실제 사르후 전투 지휘관들이랑 같다다른 장수들은 이여송이 북원 정벌에 끌고 가서 같이 죽었다 카더라결과적으로 명은 정예군과 요동반도 최남단 금주위를 제외한 모든 요동 땅을 잃는 대패와 함께 누르하치를 건주군왕으로 인정해주는 굴욕을 당하고, 건주는 요동을 손에 넣어 더욱 세력과 위상을 키우게 된다. 한 때 10만 철기를 지랑하던 요동군은 2만 보병으로 줄었는데 그마저도 모두 잃었으며, 유정 휘하 정예군 사천병은 태반이 전사하고 유정과 진양옥은 조선으로 귀순한다. 조선도 그 사이에 건주를 견제할 명분과 전쟁 기간 중 조사한 광개토대왕비를 근거로 황성평 일대를 손에 넣으며 숨은 승자가 된다.
2.2. 명
만력제가 장거정의 부정부패를 눈치를 챈 것이 재석의 고발로 조금 앞당겨졌으며 이를 통해 종계변무 문제를 더 일찍 해결해주었고 조선에서 요청한 벽돌공과 정크선 조선공 등의 기술자도 파견한다. 또 니탕개의 난 당시 조선에 비협조적으로 군 이성량에 대한 보복으로 재석이 이성량의 비리를 고발하여 역사보다 일찍 이성량이 탄핵되는데, 이 덤터기를 조선이 덮어썼다(...) 원 역사에서 이성량은 야인들의 대규모 반란에 시달리고 이를 진압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것이 소설에서는 좀 더 훗날인 무자년에 대규모로 벌어졌고, 야인들의 공격 대상도 명나라 요동부가 아닌 조선의 부여주가 되었다.무자호란 이후 조선이 부여주와 연해주를 맡은 뒤 80여 년간 무난하게 관리해온 것을 높게 평하며 또한 조선의 명 고관들에 대한 뇌물 공세로 조선에게 속말주를 추가로 양도하게 된다. 조선으로부터 일본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였으며, 이에 따라 추가로 사신을 파견한 조선에 대해 지원을 약속한다.
조총 제조 기술에도 수십 년 만들다 보니 나름 노하우가 쌓여 이제 몇 발 쏘고 터질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황제 때문에 골치를 겪고 있으며[119] 일본, 건주여진, 유럽에게 노려지고 있는 막장 상태다. 가장 우호국인 조선도 재석의 개방정책의 영향으로 (심지어 사림조차) 조정 신료들이 왜란 발발에도 천병(명군) 지원을 거부하는 등 원 역사보다는 마냥 호의적이지 않으며 재석은 사냥게로 누르하치를 키워줘서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뉴르하치를 중원으로 보내고 대신 만주를 취할 계획인데 현재 국력으로는, 스페인과 함께 세계 최강임에도 만력제 때문에 난감한 상태다.
참고로 조선의 견서사가 알려주기 전까지 유럽인들에게는 병력 2만이면 정복할 수 있는 나라로 취급받았다.[120]
하지만 경인왜란이 별 피해 없이 끝나버렸고[121][122], 요동 지방 기병들도 꽤 남아서 원 역사보단 양호하다.[123] 더군다나 명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북원도 조선이 무자호란 중에 꽤 두들겨서 힘이 빠졌고, 무엇보다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병력과 돈이 줄줄 세는 만주 지방도 조선과 누르하치가 나눠서 태세를 정비했기에 이쪽 세계의 명나라는 충분히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누르하치가 원 역사보다 훨씬 힘을 일찍 키웠다지만 현재 이쪽 세계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을 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124][125]
하지만 만력제가 조선의 일본 보복 원정인 을미동정 때에도 많은 은을 지원해주고, 조선에서 보내는 전쟁 보고서가 재미있다며 매일 조선에 배를 띄워 일일보고를 받으라고 하는 등 막장 짓을 벌이면서 재정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에는 만력제가 조선에서 바친 축소형 판옥선, 왜선들을 호수에 띄우고 조선이 바친 왜병 포로들을 그 왜선에 태운 후 실제 사격을 가해 격침시키는 막장 해전 놀음에 빠져버리고 자신이 죽은 뒤 묻힐 황릉을 조성하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재정이 점차 파탄 나고, 월급을 체불당한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건주위로 망명하고 각지에서 농민 반란의 조짐이 보이는 등 결국 원 역사처럼 멸망할 운명을 향해 가고 있다. [126]
조선이 을미동정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만력제는 자신도 조선처럼 무리한 북원 원정을 추진했다가 10만 원정군의 절반이 전사하고 이여송도 전사하는 등 완벽히 실패하며 몰락의 신호탄이 터졌다. 결국 양응룡의 난도 스스로 진압을 못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으며, 그 대가로 주산군도를 조선에 할양하고 조선군이 잡은 포로는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한다. 만력제의 막장 짓과 명나라의 허약함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들이 숭명 사상을 버리게 된 것은 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력제가 조선이 '북원 원정에 군대를 보낼 수 있게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으로 건주위를 칠 뜻을 내비치면서 사실상 멸망의 낭떠러지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고 있다.[127] 건주위와의 전쟁에서 그야말로 처절하게 발리고[128] 이 전쟁에서 명나라군의 주력은 사실상 소멸했으며[129] 북원 원정, 양응룡의 난, 건주 원정으로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누르하치를 만주 국왕으로 책봉하고 요동을 할양하면서 요동 방어선이 무너졌고, 원래 역사에서 태창제가 되는 황태자 주상락이 독살당하고 인간쓰레기인 복왕 주상순이 황태자에 책봉되며, 책봉식에만 은 1000만 냥[130]을 써버리는 등 계속되는 엄청난 지출과 증세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현실의 명나라보다 약 40여 년 빨리 국가 막장 테크를 하이패스로 타는 중이다.
사실 재석은 장거정의 부패를 알리고 만력제가 원 역사보다 더 빨리 정치에 손을 떼면 건주와 협력하여 손쉽게 명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명색이 통일 중화 왕조라고 재석이 죽을 때까지 버티기는 했다. 3부에서 언급되기로는 만력제 사후 주상순이 태창제로 즉위해 신나게 말아먹다가 재석의 손자인 선조 대에 고영상의 반란군에 의해 나라가 멸망, 태창제는 조선으로 도망치려다 붙잡혀 원 역사와 똑같이 고깃국 신세가 되었으며, 전국의 주씨 일족은 조선으로 망명한 주상학의 아들 주유교 일가를 제외하면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모조리 멸족, 원 역사보다 더 일찍, 더 비참하게 멸망하였다.
2.3. 일본
원 역사와 다르게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했다. 그러나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조선을 공격했다가 자멸하고 다음에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도 반조선 정책을 펼치다가 보복전쟁으로 자멸. 현재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도쿠가와의 천하가 되었다. 잇따른 전쟁 참패로 영토가 축소되고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해 국가의 역량 자체는 원 역사보다 확연하게 뒤떨어졌으나, 세력 집권 자체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이루어져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은 도쿠가와의 천하 아래 나름 조선과는 무난하게 보내는 시기가 될 듯하다. 단, 아직 확실하게 도쿠가와가 일본을 통일한 것은 아니며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시카가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의 승인 아래 세력을 조금 남겨두었으니 차후 불씨는 남아있다.원나라 침공 때와 달리 신주 불침의 원칙이 깨졌으니 그로 인한 쇼크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일본인들은 66개의 주로 구성된 일본 열도를 신주라 하여 하나의 천하이자 신이 천황에게 하사한 땅으로 여겼는데, 그 신주를 외국의 군주가 전쟁으로 뜯어갔으니 일반인들이나 무사들의 충격이 클 것이다.
- 해안포
경인왜란 발발과 함께 히데요시가 이끄는 제1군을 위해 전라도 흥양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을 당할 수가 없으니 내놓은 계책. 단순히 해안에서 포격하는 정도가 아니라 노획한 조선군 대포를 흥양 주변 섬들의 고지대에 설치해 상호 엄호하며 십자포화를 퍼부어 조선 수군이 흥양 교두보를 탈환하러 올 수 없게 방어하며, 그 사이에 육군이 조선 수군 기지들을 배후에서 습격 점령해 조선 수군을 내쫓는다는, 조선 수군에 대한 가장 유효한 파훼법을 내놓았으며, 현대적인 해안포 시스템을 창안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조선에서도 이항복이 거북선을 앞에 세워 해안포 포격을 일부러 유도하는 탱커 역할을 하는 사이 판옥선들이 고각 사격이 가능한 비격진천뢰와 신기전을 해안포대에 다각도로 동시에 퍼붓는 포격으로 해안포를 무력화시킨다는 역 파훼법을 내놓았다. 해안포대 대다수가 파괴되어 노획한 화포가 부족해지자 대포 모양으로 깎고 검게 칠한 통나무를 세워놓는 낚시를 했는데 천리경으로 관측한 조선군에게 들통나버린다.
- 남만포
1부에서 재석의 규슈 정벌 영향 때문인지 일본은 원 역사에서 보다 화포 무장에 신경을 쓰게 된다. 조선 정벌을 나서기 전에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 화포들을 사 모으고 남만인 용병을 고용하는 한편, 오오츠츠 같은 대조총도 많이 도입했다. 하지만 조선군을 상대로 그다지 재미는 보지 못했는데, 조선군의 포병 숙련도가 일본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 거기다 남만인 용병들도 몸을 사리는 등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여기에 화포를 주로 수군에 보급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자연재해급이라... 하지만 왜선의 화포 무장이 올라갔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 조선 수군의 인명 피해도 더 늘었다. 조선군의 화포에 맞서 일본군 내에서도 자체적으로 화포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노부나가의 지시로 일본 본토에서 화포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렇게 생산한 화포 중 일부가 철수하는 일본 수군을 호위하는 전선들에 탑재되어 실전에 투입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생산 물량은 대마도를 요새화하는데 사용된다.
- 대형선박
조선 수군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엄청나게 많은 배를 찍어냈다. 여기에 덩치가 판옥선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안택선을 제작하고 스페인 갤리온 선단까지 고용한다. 하지만 포병 숙련도가 부족한 문제와 선박 운용을 지혜롭게 하지 못해서 대형 안택선들은 죄다 격파당하고,[131] 갤리온 선단은 벽란도를 기습하려다 경기 수군에 격파당하거나 나포된다.
- 순왜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이 건재함에도 국경인 등 하성군 계열의 순왜가 대량으로 발생한다. 노부나가의 회유에 넘어간 임해군이 일본 측에 붙어버리며 일본에 남아있던 하성군의 가솔들과 조선에 있던 하성군 집안의 외거노비들 다수가 길 안내와 각 지역 내부로 잠입해 문을 열어줘 손쉽게 지역들을 점령하게 만드는 등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왜란 초반부 왜군이 선전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하지만 충직한 하성군의 서기가 목숨을 걸고 조선에 하성군 집안 노비들이 순왜임을 알려서 출가한 광해군을 제외한 하성군 집안 사람을 모두 체포한다. 진실이 알려지고 하성군의 노비 일부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원래는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하지만 사태가 사태여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이후 거듭된 패전에 광기에 휩싸인 노부나가가 패배를 내부 간자 탓으로 돌리자 하시바 히데요시는 일단 쓸모없어진 순왜들을 모두 간자 혐의로 죽여 노부나가의 분노를 달래고 조선과 협상해 철수하도록 간언, 그때까지 왜군 진영에 남아있던 순왜들은 도망친 임해군과 국경인, 그 외에 따로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왜군의 손에 참수되었다. 재석은 자발적으로 귀순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처형할 계획이며 국경인은 원 역사의 행적과 죄질도 나쁘지만 임해군을 데려온 공이 있어서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다 결국 죽였고, 임해군은 명나라에서 초빙한 능지형 기술자에게 1천 조각으로 회를 떠 죽인 다음 시신으로 젓갈을 담가 전국에 조리돌림 했다. 원균은 순왜들이 죄다 처형될 때 후방에 있어서 참수를 면했고, 이후 히데요시가 원균이 자신을 노린 시마즈 토시히사의 화살에 맞아줬던 은혜를 기억해서 원균만은 빼내 살려준데다 일기도주로 봉하기까지 했다.
- 조선 토란
감자(담저), 고구마(감저). 왜군이 식량 확보를 위해 약탈하면서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미 옥수수는 일본에서도 남만인들을 통해 수입해서 재배 중이나 감자와 고구마는 조선에서 처음 목격했다. 길쭉하고 단맛 나는 종류와 둥글고 심심한 맛이 나는 종류로 구분한다. 고니시도 먹어보고 괜찮은 작물이라고 생각하며 나중에 본국에 가져다 심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을미동정 이후 조선에서 가뭄이 4년 동안 이어졌을 때[132] 식량 확보를 위해 일본에서 쌀을 많이 수입해 갔으나,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옥수수 덕분에 대량으로 굶어 죽는 사태는 피했다고 한다. "감자와 고구마를 손에 넣은 게 아마 지난 전쟁(을미동정)에서 일본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고 재석이 독백하는 걸 보면 을미동정 때 조선군이 현지에서 식량으로 쓰려고 심었던 감자와 고구마가 퍼져 나갔다.
- 온돌
연해주에서 겨울을 난 다테 마사무네가 온돌의 따뜻함을 몸소 느끼고 자신의 영지에도 도입하려 한다. 그래서 조선에 온돌 기술자를 요청하고 이 틈에 도자기를 조금이라도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끼워 넣으려 했지만 재석이 그냥 일본 기술자에게 온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지시하여 이건 실패. 그래도 다테의 영지를 중심으로 일본에도 온돌이 퍼지게 되었다.[133]
- 북방인 기병
무자호란 이후 울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건주위에 흡수되었다. 조선에 가장 적대적인 부족으로 2부에서는 정여립이 사실상 울라부 총독이자 파병된 울라부 기병들을 감시하는 정치장교로 활동했다. 경인왜란에도 참전했으며, 경인왜란이 끝난 후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은 다테 마사무네에게 용병으로 울라부 기병 1천을 파견하기로 하자 부장 부잔타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건주위로 도주했다. 그러나 건주위의 누르하치는 아직까지는 조선과 우호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잔타이와 울라부를 몰살시켜 버린다. 성인 남자들은 조선에 보내고 여자와 아이들은 건주위의 노예가 되어 울라부는 다른 해서 부족들의 뒤를 따라 멸망한다. 조선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2천 명의 울라 기병을 보냈으나 그중 1천 명은 도망가고 1천 명은 다테 휘하 왜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을 확보한 다테는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대규모로 기병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개중에는 다테 가에서 탈영하여 다른 영주 아래로 들어가 용병 일을 하는 무리도 생겼다. 시간이 지나자 다테쪽도 2백기 가량으로 줄어든 상황. 다테 스스로도 여진인들 자리잡게 해주고 말 품종 개량도 나선 모양인데 한 것에 비해 성과는 부족했던 모양.
이후 슈르하치가 숙청되고 그의 아들 아민이 기병 1천기를 끌고 조선에 귀순하자 나중에 건주와 분쟁거리가 될 걸 우려한 재석이 조선이나 건주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본에 보내기로 하며, 누르하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지라 그 대신 누르하치 본인이 부릴 수 있는 왜병들을 받아가는 것으로 거래가 성립, 아민과 휘하 여진 기병들이 일본에 정식으로 눌러앉게 된다. 그런데 아민이 다이묘로 임명되면서 하사 받은 영지가 하필이면 사나다 씨의 영지였던 곳, 현대의 군마현에 해당하는 곳이었기에 그 소식을 들은 재석은 아민과 여진인 기병들이 눌러앉은 지역이 현대 일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떠올리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도쿠가와가 정권을 잡았지만 영주들 전부가 진심으로 복종하는 건 아니라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는 상황에서 정예 기병 1천기는 기병 전력 자체가 부족한 일본에서 강력한 전력이 된다. 나중에 조선과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말 키우기 어려운 건 둘째치고 어차피 조선군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한다.
2.4. 유구국
경인왜란 도중 오다가 무력시위로 조선 침공에 협조할 것을 협박하고 여기에 굴복해서 오다에게 군량을 일부 상납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본의 참패로 끝나자 조선이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저자세를 취한다.을미동정이 끝난 후 조선의 힘을 목도한 유구 왕국이 조선에 화친을 청하자 재석은 유구 수도에 조선 상관을 세우고, 일본의 유구 침략을 사전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유구에 조선 수군 갈레온을 상시 주둔시켜 사실상 유구를 조선의 보호국으로 만든다. 명나라에도 명나라가 나설 필요 없이 조선이 일본을 단단히 막아드리겠다고 하여 명나라의 허락도 받는다.
2.5. 대유주[134]
유럽은 대유주라는 명칭으로 불린다.조선이 직접 예수회에 요청해 선교사 세스페데스를 초청했고 세스페데스가 조선이 프레스터 존의 나라라는 보고를 유럽에 보내며 조선은 유럽의 관심을 받게 된다. 스페인과 교황청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선물로 여러 산업 분야의 기술자와 각종 작물 및 가축의 종자들을 보낸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조선에서도 대규모 사신단 견서사를 파견하며 스페인 제국·신성 로마 제국·베네치아 공화국·교황청 등을 방문하고 인삼·모피·도자기 등 다양한 조선산 무역품의 샘플을 선물로 보낸다. 이에 조선과 조선에서 나는 진귀한 약초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널리 퍼지고 조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신단은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조선인 천주교도들에게 제사를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한다. 교황은 허가해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나 확실히 못박기 위해 이에 관련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한다. 세계사에 중대한 변화가 될 수 있는 부분으로, 천주교도의 제사가 허용된다면 조선뿐 아니라 유교 문화권 전체에 천주교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 사신단의 방문 덕분에 아시아에 대한 정보가 넓어졌다. 실제로 16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은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몰랐고,[주의] 차이나와 키타이를 별개의 국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세계에서는 중국 정복=포교의 망상에 젖어 있는 유럽인들이 한심하게 보였거나 스페인과의 우호를 위해서인지 사신단이 중국, 조선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와 특징 등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했다.[136] 거기다, 이 세계에서는 개방적인 군주가 다스리는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 무기, 초석 장사와 용병 등으로 유럽인들이 중간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다. 신임 마닐라 총독은 경인왜란 때 조선을 지원해 이익을 얻어낼 계획을 세운다.
여기에 조선에 간 유럽인들에 의해 천리경[137]이나, 열기구·수학 지식·종두 같은 물건이나 기술들이 유출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파견된 스페인 고문단의 임무 중 하나가 조선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38][139]
펠리페 2세와 식스투스 5세 등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군주들이 최고급 인삼을 대량으로 받았기에 이들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3부에서 스페인과 가톨릭권이 쇠락하지 않고 유럽의 판도가 변하는 나비효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별로 가능성이 높진 않다. 스페인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140]은 명군 한두 명이 몇 년 더 산다고 뒤집어지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 게다가 펠리페 2세와 식스투스 5세는 원래 역사에서도 각각 71세, 68세로 살만큼 살았다. 둘 다 결국 원 역사와 같은 시기에 죽었다.
유럽에 간 견서사가 현지에서 만난 유대인 상인들에게 꽤 시달렸던 건지, 매정하고 깐깐하게 구는 서양 상인을 보곤 '저놈은 유대인이 틀림없다!'며 욕을 하기도. 유럽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조선에도 퍼질지 모를 일이다.
조선의 제사 문제를 조사하러 온 코르나로 추기경이 돌아가는 길에 광해군을 대표로 한 제2차 견서사를 유럽에 보냈고, 스페인과의 관계가 나빠질 경우를 대비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교류를 맺고 있다.
스페인에 새 왕 펠리페 3세가 등극하면서 조선 왕이 왜 천주교로 개종해 펠리페 2세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사절을 보낸 것 때문에 스페인과의 관계가 깨질 뻔했으나, 조선 천회사 이기빈이 아랍에서 약탈로 깽판을 친 것이 스페인에 메카까지 불태웠다고 와전되면서 펠리페 3세가 사과하고 우호관계가 유지된다.
- 호랑이
1차 견서사와 함께 펠리페 2세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살아있는 수컷 호랑이 한 마리와 호피 몇 장을 선물로 보냈다. 수컷 호랑이는 펠리페 2세의 애완동물이 되어 탄끄레도란 이름을 받았다. 배 안에서 호랑이를 관리하는 것은 고역이었지만[141] 어찌어찌 살아서 유럽에 도착했고 호랑이에 대한 반응이 좋았음을 들은 재석은 2차 견서사에게 3마리의[142] 호랑이를 선물로 보내도록 한다. 한 마디로 현대 중국의 외교 전략 중 하나인 팬더 외교의 조선판. 원래 프랑스 국왕에게 보내려던 한 마리가 인도양에서 죽어서 가죽만 벗기고 호랑이탕이 되었다.
- 인삼
조선에 사신으로 온 올리베이라 백작을 시작으로 펠리페 2세, 식스투스 5세, 코로나르 추기경, 루돌프 2세 등 많은 유럽 고위층들이 인삼을 복용했고 그 효험을 체험했다. 이후 십수년간 조선과 유럽이 교역하며 인삼의 효능이 널리 알려져 조선을 대표하는 값비싼 약재로 고가에 유통되며 그 명성은 회회국에까지 퍼진다. 적어도 이후 수백년간 조선의 주력 수출품으로 유통될 듯 하다. 2부 외전에서도 동의보감에 수록된 처방전들 대부분은 유효성이 의심된다고 외면할 때 유일하게 인삼 관련 부분만 받아들일 정도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 괴혈병 치료법
재석이 스페인에 대한 고마움과 견서사들의 안전을 위해 채소와 과일을 먹으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줬으며 김치와 곶감, 말린 대추까지 챙겨주었다. 문제는 이것들이 너무 맛있다는 것. 죄다 고위 인사들 간식으로 소모되었고, 유럽에서는 선원들을 소모품에 가깝게 취급했기에 치료법을 알려줬지만 딱히 치료를 시도해 보지 않았다.[143] 이덕형은 3차 견서사에서 곶감과 대추가 떨어져 괴혈병으로 고생했는데 이 와중에 따뜻한 녹차는 효과가 없지만 찬 물로 우려낸 녹차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144] 월터 롤리가 조선인이 괴혈병에 잘 걸리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단정하는것을 봐서는 유럽인들의 시각에서는 음식의 문제가 아닌 체질로 판단하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외전에서도 유럽인들이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고 괴혈병 치료법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걸로 나온다.
- 종두법
결정적인 역사의 분기점 [145]. 원래 재석은 유럽에 동의보감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동의보감에 적힌 종두법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여 역사가 뒤틀리면 미래에 조선에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해서. 하지만 이에 분노한 상희의 일갈[146]을 듣고 변화하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유럽에 동의보감을 전파하기로 마음먹고 한의학 지식을 가진 역관까지 딸려 보낸다. 이것에 다양한 추측이 돌았으나[147] 외전 5부에 의하면 종두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효성이 의심되고 무엇보다 "소의 고름을 사람 몸에 넣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서양 의사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결국 원 역사 즈음에 누군가가 재발굴할 때까지 천연두로 고생하는 역사는 바뀌지 않게 될 공산이 크다.
- 허 경의 콩 치즈[148]
두부. 허균이 유럽에 소개한 두부는 치즈와 비슷하게 생겨서 '허 경의 콩 치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149] 기존의 유럽 음식에서는 볼 수 없던 이색적인 식감과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사순절, 금요일에도 먹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허균이 조리법을 알려줬기에 3부에서 유럽에 3부에서 퍼졌다
2.6. 여진
1부와 2부에 걸쳐 연해주, 부여주, 속말주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고 해서여진은 완전히 멸망하는 등 외형상은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조선의 발전으로 인한 콩고물을 받아먹으며 동시기 원 역사의 누르하치에 비해 훨씬 인구가 많고 내실을 다졌다. 하지만 조선의 막강한 군사력 강화와 막장 군주로 만주지역을 조선에 일부 넘겨서 소비부담이 덜어지고, 왜란을 가볍게 끝내서 원 역사보다는 군병 소모가 덜한 명나라로 인해 현재로써 원 역사대로의 청나라 건국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애당초 이것보다 조건이 더 좋았던 원 역사에서도 천운이 따라줘서 가능했다.[150] 한데 을미동정에서 조선군을 지원하러 참전했던 슈르하치가 건주위가 가장 필요로 했던 철광석 제련 기술자와 조총 제조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려오며 미래의 군사력이 올라갔다.[151]국력만은 원 역사 건주위를 앞질렀지만 누르하치는 조선은 건드리면 반드시 멸망하는 강대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고[152] 명은 요동군 자체는 허접하지만 전쟁을 시작했다간 끝없는 영토에서 나오는 인간의 파도에 깔려 죽게 될 나라로 인식하고 있기에 조선이나 명을 공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명이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자멸할 때 이득을 취하거나 북원 쪽으로 확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 건주위가 현재 살아있는 건 재석의 대중원 분열 전략과 혹시 모를 명나라와의 전쟁 위험에 대한 안전지대 역할을 위해서다. 만력제 사후 중원이 분열되었을 때 중원의 혼란과 분열에 개입해 최소 남북조 체제를 이뤄주고 그 틈에 자신들이 안전하게 비어있는 요동[153] 및 다른 북방을 접수한다는 게 재석의 전략이다.[154] 세자 이성도 누르하치의 아들 다이샨과 이 전략에 대해 상호 지원해주기로 밀약을 맺은 만큼 재석이 죽은 후에 이 전략이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해지는 부분.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한 뒤, 인구가 무려 120만까지 늘어났으며 요동까지 할양받아 정식으로 왕국이 된다. 이후 요동지방을 안정시키는 한편, 삼정승 육조 등등 조선식 정치제도를 도입해 나날히 발전하고 있다.
- 건주군왕 책봉
만력제의 무리한 건주 토벌 명령이 원 역사의 사르후 전투와 같은 대참사로 끝났으며 그 결과로 요동 전역을 장악하여 영토가 크게 넓어지고 공식적으로 건주군왕으로 봉해진다. 다만 같은 번국이라도 오조룡이 아닌 사조룡이 들어간 검은색 배경의 흉배의 적색 곤룡포를 입는 등 조선보다는 격이 낮다. 이후 삼정승, 육조 등 조선의 정부 조직을 모방하는 등 개혁을 시작한다.
- 옥수수, 담저, 감저
건주위의 야인들은 조선 농부들이 이 신작물들을 농사짓는 모습을 이미 목격했고 외형상 맛있어 보이는 옥수수는 이미 훔쳐와서 재배하기 시작했으나 겉보기엔 그냥 풀처럼 보이는 감저와 담저는 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무자호란 도중 평안병사가 별생각 없이 건주위에 감저와 담저를 넘겨버린다. 재석은 뒤늦게 이를 알고 탄식하나 이미 남어간 것은 돌려받을 수 없기에 자신이 내린 것이라며 은혜를 알라고 생색을 낸다. 북방에서도 잘 자라고 인구 부양력이 높은 이 작물들을 얻은 건주위가 크게 성장할 바탕이 될 듯. 10여 년이 지난 을미동정 후에 건주위의 인구가 60만 명까지 성장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 왜조총
조선은 경인왜란 도중 노획한 왜 조총들을 건주위에 팔아넘기기로 한다. 왜 조총은 조선 지방 군이나 민간 포수들이 쓰는 활강 조총보다도 성능이 낮아서 조선에서는 포수들에게 싸게 불하하는 정도 외에는 도저히 쓸모가 없지만 조총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난 건주위는 왜 조총이라도 매우 비싸게 구매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 재석은 건주위를 어느 정도 키워줘서 명과 서로 싸워 서로 힘을 빼게 만들고 그 틈에 다칭유전이 있는 요동을 확보한다는 장기구상에 따라 성능이 조선 총보다 낮은 노획한 왜 조총을 건주위에 파는 것을 허락한 것이고, 건주위는 화약을 자체 생산 못하니까 조선에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이런 명을 내린 것. 넘기는 양은 왜 조총 2000정에 탄환 10만 발로 별로 많은 양은 아니다. 그리고 을미동정에서 돌아온 슈르하치가 그동안 건주위에 없었던 제련 기술자와 조총 기술자를 데려와 조총의 자체 생산이 가능해졌다.[155][156]
- 만주문자
누르하치는 자신의 세력을 온전하게 하나로 묶고 조선과 친밀감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에 만주문자를 만들 수 있게 학자들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금나라 시절 만든 여진문자는 너무 쓰기 어렵고 이제부터 자신들을 문수보살을 따서 만주로 명명하고, 새로운 쉬운 문자를 만드는데 조선의 국문을 이용하고 싶다고 부탁해서 재석은 도움을 줄 테니 사람을 도성으로 부르라고 했다. 독자들은 북원을 정벌해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조선과 적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런 행동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157] 또한 재석은 만주문자를 만드는 것을 돕고, 교재를 제공해서 만주를 더욱 친조선 세력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서양에 종두법을 전한 것 다음으로 역사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만주어를 체계적인 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면서 만주인들이 만주어를 더 쉽게 습득하고, 독자적인 학문과 문화를 더 발전시키면서 만주인들의 정체성이 강화되고, 만주인들이 한족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계관에서 만주문자는 원 역사와 달리 아비루 문자처럼 한글의 파생 문자가 된다.
- 왜인팔기
누르하치가 전군을 팔기군으로 개편하고 을미동정 때 슈르하치가 데려온 왜군 포로 4,000명을 왜인팔기라는 이름으로 팔기에 편입시켰다. 누르하치는 조선의 왜인여진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조선이 왜인여진을 만든 것처럼 왜군 포로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대신 자유민 신분을 준 뒤 아내로 맞이할 여인들을 주어 정착시켰고, 비록 소수의 왜인들이 탈주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누르하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덕분에 건주위는 조총 사격술과 공성전 기술을 도입하는 등 전술 분야에서 더욱 발전을 이루었다. 다만 슈르하치가 직접 데려온 인원이라 아무래도 누르하치 본인의 입김이 제대로 닿지 않다고 느껴 사자로 온 정여립 편에 왜인 병력을 별도로 조달할 방법을 찾고 있다. 슈르하치 숙청 후 조선으로 도망간 슈르하치 아들 아민의 기병 1천기를 선심 쓰듯 넘겨주는 척하면서 내 조카의 부대는 최정예라서 1인당 보병 20명 노릇은 한다며 노골적인 왜병 욕심을 낸다.
- 한군팔기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고 노획한 명군의 화포와 포로로 잡은 명군 병사들로 한군 팔기를 편성했다. 아직 화포는 30문 가량 밖에 안되고 조선군 같은 대구경 화포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성은 공략할만한 위력에 왜인팔기와 시너지를 이루어 공성전 능력을 한껏 높였다. 포병이 되지 않은 나머지 한군은 왜인별기만으로는 모자란 보병 전력을 충당해 공성전의 선두에 내세운다. 명군에 다시 돌아가는 문제는 창칼을 맞댄 상황에서 변발하고 여진족 복장한 놈들이 투항해봤자 바로 칼 맞을테니 어차피 죽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싸우는 수 밖에 없다는 식. 상황이 이 모양이라 기를 쓰고 조선으로 도망쳐오는 한족 포로도 심심찮게 있는 모양.
2.7. 북원
원 역사에선 조선과 엮일 일이 없었지만, 무자호란이 끝날쯤에 조선의 영토확장에 불안을 느껴 조선과 전투를 벌인다. 무종 시절 명이 수입해 쓰는 조총을 명군에게서 노획하여 총기병을 쓸 수 있게 됐고, [158] 그 당시 북원은 다얀 칸의 치세였으며, 정덕제 이후 명이 북방에 관심이 적어져 위세를 회복했다. 몽골의 대칸 자사그트 칸은 조선을 얕보고 어서 돌아가라고 사신을 보내 으름장을 놓지만, 누르하치에게 얻은 정보로 많은 군세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재석은 조소로 답한다.결국 전쟁에 코르친 부 10만 기병(총기병+철갑기병 포함)이 동원됐지만, 종국에는 신립과 오도리 부족의 퀴레시안 기병들에게 대패한다. 후에 누르하치를 길잡이로 내세운 신립에게 역으로 침공당해 1만이 넘게 죽은 데다, 포로와 가축·물품도 많이 뺏겼다고 한다.
조선과 건주위에게 큰 피해를 입어 한동안 이를 갈았으나, 어차피 이길 힘도 없고 그냥 조선과 교역을 하는 게 더 이득이 되기에 은근슬쩍 다시 교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몰락하는 듯했으나 조선의 을미동정에 감명 받은 만력제의 명령으로 명군이 무리해서 10만 병력으로 카라코룸 원정을 갔다가 북원의 게릴라전에 당해 병력 반 이상을 잃고 이여송도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이 원정을 막아내면서 대량의 화약무기를 노획하는 등 국력을 회복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와라부가 조선과 밀무역을 개시한다.
그러나 결국 3부에서 몽골 초원을 차지하기 위해 건주와 와라부가 몽골을 협공하면서 멸망한다.
2.8. 와라부
북원이 명의 원정을 막아낸 후 다시 강대해지자 조선에서 왜조총을 밀수해 이들의 통수를 칠 계획을 세운다. 대금은 한혈마와 낙타로 치를 계획. 결국 한혈마 5백 여필, 쌍봉낙타 천 여필, 서역 융단 2천 여필, 그리고 무려 2천근에 달하는 청금석을 대금으로 지불하고 수많은 화기를 구입한다.2.9. 안남, 섬라
원래 고려 시대 이후로 조선 초를 제외하면 거의 교류가 없었으나 송상 신호영이 쌀을 매입하기 위해 동남아 지역까지 내려오면서 교류가 재개되었다. 철이 부족한 안남에는 철을 넘기고 쌀을 받아올 것으로 보이며 버마와 전쟁 중이라 병사가 부족한 섬라에는 왜군 포로들 중 아시가루 3만 여명을 노예로 넘기고 쌀을 받아오기로 한다. 노예병 외에 일본도와 일본 갑옷도 직접 사용할 수량만 남기고 모조리 동남아에 팔아치울 계획.섬라는 마침 명군 나레수안 대왕의 치세기이니만큼 교류가 잘 이어질 경우 이후 동남아 역사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 나레수안 대왕은 조선과 외교를 맺은 것을 크게 기뻐하며 조선에 태국 요리사까지 보내주었다. 섬라에서는 물소를 대량으로 구매해 대남도에서 키우기로 하면서 조선의 물소뿔 자체 공급이 가능해졌다. 섬라에 팔려간 왜군 노예병들은 미얀마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워 섬라에서 왜군 노예병 추가 구매 의사를 전했으며 소문을 들은 안남에서도 왜군 노예병 구입 의사를 밝히는 등 왜군 노예병이 큰 인기를 끈다.
안남에서는 막씨 정권에 맞서 완(응우옌)씨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재석이 긴가민가하지만 20세기의 베트남 왕조가 응우옌 왕조였으니 아마도 완씨가 이기는 것이리라고 추측하여 명에서 책봉받은 막씨 대신 완씨 쪽과 거래하도록 지시한다.(원 역사에서 막씨 왕조는 고작 2년 후인 1593년 멸망하고 베트남 전역을 지배하는 통일 응우옌 왕조는 200여 년 후인 1802년에야 세워진다)
2.10. 아모국
홋카이도는 한동안 북해도라고 불리다가 오다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동안에는 일본의 눈치를 봐서 일본식 명칭인 에조치라고 불렸으며 이후 일본과 전쟁이 난 뒤 아이누인들이 직접 부르는 호칭인 아이누모시르에서 앞 글자를 따 아모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모가미군의 에조치 정벌로 많은 아이누인들이 사망했으나 석탈왜(아이누어식으로 아푸카스카무이)가 아이누인들의 수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조선에서 받아온 왜조총 300정을 포함한 물자들로 조선의 일본 원정에 맞춰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큰 피해를 입힌다.
을미동정이 끝난 후 조선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역으로 인정되었고 조선과 일본 모두 아이누와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의 적인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자 통합되는 듯 했던 아이누 부족들은 다시 흩어진다. 석탈왜는 이 상황에서 세습 전제군주제 도입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성 로마 제국 식의 선거군주제 연맹국가로 아이누를 재편할 계획을 세운다.
2.11. 회회국
최초의 등장은 1차 견서사가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을 받아 전투를 벌인 것이지만 본격적인 접촉은 1604년 천회사를 통해 이루어진다.이슬람권의 맹주 오스만 제국을 조선인들은 옛 돌궐의 후예라고 여겨 역사상의 돌궐과 구분하기 위해 '현돌궐'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룬 정철의 책 '로마제도 낙성기'가 사대부들에게 유행하며 동로마와 오스만의 관계가 애산 전투 당시의 송나라와 원나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해서 사대부들 사이에서 현돌궐에 대해 원나라와 같은 야만적인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한편 스페인 교관들에게 훈련받은 무관들은 스페인인들이 가진 오스만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주입받았고, 조선에 퍼지기 시작한 천주교 신자들 또한 선교사들을 통해 회회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던 차에 1604년 이기빈이 지휘하는 천회사가 모카를 방문하며 첫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이기빈의 커피콩 밀수 시도가 적발되었고 무능하고 오만한 모카 베이가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국왕 친서를 찢어버리면서 처음부터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천회사가 모카, 아덴, 소코트라를 모두 기습으로 불태우고 약탈하게 되어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당시 파디샤인 아흐메트 1세는 조선이 무슨 나라인지 몰랐지만 모카 사건 이후 유럽인들을 통해 조선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한편 유럽에는 조선군이 모카, 아덴, 소코트라 뿐만 아니라 메카까지 불태웠다고 와전되어 가톨릭 세계에서 조선의 이미지가 크게 좋아진다.
2.12. 천축국
이기빈의 천회사 함대가 콜카타에 상관을 열기 위해 무굴 제국과 접촉했으나 무굴 측에서 처음에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빈이 아랍 항구들을 털고 돌아가다가 만나 토벌한 해적들 소굴에 마침 메카 순례를 가다가 해적에게 잡혀있던 무굴 귀족들이 있어 그들을 인도에 돌려보내주자 무굴 측에서도 황태자 미르자 살림이 직접 이기빈과 만나 의기투합하고 조선이 콜카타에 상관을 개설하고 정기 무역을 시행하는 것을 합의한다. 거기에 각종 재보와 인도산 전투코끼리 3마리와 운영병력까지 보내주는데 기존의 동남아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한다.[1]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2] 화폐제도는 억지로 유지하고 있지만 조세 역시 화폐로 수취해 민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았고, 대동세를 거둬 전세부담을 높였지만 대신 공납을 폐지했다.[3] 은행 설립 준비, 동아시아 물류업 참여, 조면기 등 기술혁신 등에서 이러한 발전상이 묘사된다.[4] 양응룡의 난 당시 파병된 조명군과 반란군의 교환비는 무려 수십 대 일로, 근대 열강의 군대와 전근대의 군대간의 교환비에 가까운 수준이다.[5] 하지만 그렇다고 불탄 사찰을 나라에서 딱히 복구해 주진 않는다.[6] 원 역사에서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1784년 혹은 1779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있으므로 공식 전파가 빨라졌을 뿐 최초의 신자가 생긴 시점은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7] 세스페데스 신부가 프로이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귀족들은 그리스 철학자 같은 마인드로 사후세계 따위 인정 안 하는 데다, 학문으로 보는 경우가 가장 우호적인 시선, 그나마 천주교를 믿는 하층민 신자들도 천주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이해하질 못해서 예수를 석가모니, 성모 마리아를 관세음보살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등 유사 불교로 착각하고 있다"고 푸념한다.[8] 사실 2번째 성당은 재석의 허가 없이 은근슬쩍 만든 뒤 허가받은 것이다.[9] 더구나 이 노예병 출신 신자들도 밤마다 주점에 드나드는(이슬람교는 일체의 음주를 금한다) 나이롱 신자들이다. 제례에 술이 필수인 유교 특성상 술을 터부시하는 이슬람 교리와 궁합도 좋지 않다.[10] 그런데 재석이 회회교도들을 국내에 들임으로써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회회교의 극락에까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11] 大我州. 우리가 사는 땅이라는 뜻.[12] 유자광이 관례대로 일가족을 노비로 삼지 않고 식솔과 노비까지 유배지(그것도 나름 비옥한 동네)에 같이 보내주는 것은 너무 편안한 벌이 아니냐며 이유를 묻자, 자기는 원래 무릉도에 사민을 할 생각이 있었으며 사대부가 인생 최대 목표인 과거도 못 보고 언제 왜구가 공격할지 모르는 외딴 섬에 갇히니 큰 벌 아니냐고 했다. 실제 이유는 울릉도에 사람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왜적이 침범하기 힘들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일가족, 특히 죄 없는 여자들을 노비로 만들어 예전에 같이 관리 생활하던 동료들의 노리개로 나눠주는 관습에 환멸을 느껴서기도 했다.[13]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천인들과 피를 섞을 수 없다'고 노총각으로 늙어죽을 기세로 혼인을 않고 버티던 양반들이 있었고, 후에 사면령이 내렸을 때 섬을 나온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재석은 참 멍청하고 고집불통들인 사람들이라 까내린다.[14] 이순신은 여기선 무릉도 출신인 홍가신이 사돈 맺자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홍가신의 아들이 한번 결혼했다가 사별 후 이순신의 딸과 재혼하여 장모인 방씨의 눈총을 받았는데, 이 세계에선 바로 이순신의 딸과 결혼할 것 같다. 여기선 초혼이지만 대신 무릉도 출신이라고 장모가 싫어할 것 같다[15] 물론 조세 혜택은 원 거주자에게만 주어지며 외부인은 바로 체포 후 전가사변이다.[16] 원 역사에선 조선에서 서적을 털어가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약탈 행위는 일절 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백성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했다.[17] 사실 위기가 있었는데, 재석의 암살범이 종성순인 것이 밝혀졌다면 대마도 주민들은 분노로 눈 돌아간 조선군에게 대학살을 당했을 것이다. 왕실 위신의 추락을 막고자 사실을 숨긴 신수근이 여러 사람 살린 셈.[18] 종성장은 외할아버지인 정호찬의 집, 즉 한양에서 자랐다. 종성장에게 고향은 한양이었던 셈이고 실제로 정호찬은 외손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은근히 향수를 자극하는 문구를 넣는 공작을 했다고 언급된다.[19] 일기도 쪽이 훨씬 기름지고 농사짓기 좋기도 하다.[20] 주력함 90여 척과 등선군 6,000명을 비롯하여 병력 1만 8,000명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였다.[21]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24명과 부상 186명에 불과한 반면, 일본군은 주둔군 사령관이자 오다의 사위였던 나카가와 히데마스를 비롯해 2,000명이 전사하고 1,000여 명이 포로가 된다.[22] 화약만도 경상 우수군의 1년치 사용량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보급은 적에게 취하는 거다! 원래는 전부 파괴할 예정이었으나 모든 보급품이 선박에 실려 있었기에 철수에 쓸 선박도 확보할 겸 노획했다.[23] 초기에는 토착 여진족들처럼 그냥 산 곳도 있었지만 해서여진들이 그렇게 목책 없는 곳만 골라서 턴다는 것을 안 뒤로는 모든 고을이 방벽을 두르게 되었다고 한다.[24] 다테 마사무네가 해삼위 이북 약 600km 지역에 상륙했을 때에는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조선인은커녕 야인 하나 보이지 않는 황야 그 자체였다.[25] 이 때 황성평의 새 명칭을 정하는 과정은 독자 참여 이벤트로 진행되었는데 고길동, 분당 같은 개그성 이름도 많이 제출되었다.[26] 빙산도, 빙조도라는 이름은, 팬덤에서 1부 재석을 빙산, 2부 재석을 빙조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한 작가의 말장난으로 보인다.[27] 大美州.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28]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줄인 말이다.[29] 왜인여진이 어째서 조선에 충성하는가를 고찰해 보자면, 일본 전국시대 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힌 포로의 대우가 어땠는지를 보면 짐작 가능하다. 전국시대 때 포로라 하면 인신매매상의 좋은 자금 공급원,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상품 취급받는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다. 당장 1부의 규슈 정벌 파트에서도 조선군이 규슈에서 쇼니 군을 개박살낸 이후, 일본 현지의 상인들이 조선군에게 쇼니 군 포로들도 다 사겠다고 제안했으나, 조선군은 재석의 어명 때문에 노획한 갑옷과 무기만 팔아치우고 포로는 부상이 심해 바다를 건너기 힘들어 보이는 자들만 팔았다는 묘사가 있다. 그런데 이때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된 쇼니 군 포로들은 자기 나라에서 포로들이 받는 대우가 으레 그렇듯 누군가의 노예로 팔려가 고달프게 살긴커녕, 오히려 좀 추운 지방이지만 살 땅도 주고 가정을 이루고 정착할 수 있게 여진족 과부들까지 줬다. 당시 쇼니 군 포로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포로인데도 이런 특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고, 조선에 정착한 뒤 본인의 자식들이나 손주들에게도 조선이 어떤 은혜를 내려주었는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머리에 심었다고 한다면, 왜인여진이 어째서 조선에 충성하는 민족이 되었는지 대충 이해가 된다.[30] 더군다나 왜인여진은 부계가 일본이니 봉건제 사회에서 오래 살아왔을 것이고, 이 쇼니 군 포로들은 중앙에서 일일이 지방관을 파견하는 조선식 관료제에 익숙하지 않았을 테니 자기 위로 사또-감사-그 외 고위관리-왕 등이 줄줄이 있는 체제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공산이 높다. 영주가 대대로 다스리는 지방에서 영주에게만 충성하며 평생 살다가 몇 년 주기로 지방관을 갈아치우는 동네로 이사 왔으니 뭐... 게다가 오랫동안 통일국가였으며 중앙집권이 잘 된 나라에서 살던 조선인들과 달리, 이들은 수백 년간 지방별로 쪼개진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로 국가에 충성한다는 개념이 희박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익숙하다. 아버지인 왜인들도 이런데 어머니들은 아예 부족사회 출신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부모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은데다 수백 년 동안 조선 땅에 사는 외국인 취급을 받아 조선 체제에 섞여들기보다 외인부대로 대접받았으니 중앙집권 체계 하의 조선식 사고가 익숙지 않을 만도 하다. 따라서 알기 쉽게 대충 '영주님 대신 제일 높으신 나으리'에게 충성하면 되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조선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1] 왜군들이 회의 중에 조선 수군에 도왜와 다른 투항자들이 있음이 언급되었다. 또 이순신은 포로로 잡힌 왜선의 수부들은 전후 석방과 귀국을 약속하며 노군으로 부리고 있다.[32] 그 중 하나가 왜노로 위장한 원균.[33] 부친은 야인(여진족) 오도리 부족의 귀족이고 모친은 조선인인 혼혈인. 오도리 부족 내에서도 세력이 큰 귀족이며 조선에 충성하는 친 조선파 야인(여진족)의 대표 격인 실존 인물이다. 원 역사에서는 중종반정 때 능지처참을 당해 죽었다.[34] 이 때 재석이 '왜 오도리에게 총을 주냐고? 내가 이들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라는 독백이 있다.[35] 서림과 임꺽정이 출세한 건 그냥 본인들의 재능이 워낙 뛰어난 덕.[36] 참고로 이 시점에서 여진족 출신 경군 군사들은 혈통만 여진족이지 조선 사람이 다 되었기 때문에, 빡친 사천병들에게 공격을 받으면 맞서 싸우는 대신 군기대를 부르는 것으로 대응했다. 조선인화 이전이었으면 진작에 사천병들한테 주먹 날라갔다 조선군에 복무하는 여진인 전체수는 사천병보다 많지만 이들은 각기 다른 부족끼리 섞인 터라 같은 여진인이 구타 당해도 부족이 다르면 남 보듯 넘어가는 통에 맞싸움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37] 사실 조선에 흑인이 들어왔던 기록은 태조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금방 잊힌 것.[38] 사실 현대의 이슬람교도도 대부분 이렇다. 음주가 위법인 나라에 살면서도 옆나라 가서 술마시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39] 발해는 내부적으로는 고구려 혹은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썼다.[40] 세금으론 가죽과 어포를 받는다고 하는데, 조선이 연해주 전체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세금 안 내고 그냥저냥 사는 부락들도 꽤 많을 것이다.[41] 다만 재석이 빙의하기 이전의 경성군 시기에는 원 역사대로 약화되고 있었고 이에 재석이 신립을 불러들여 오위군 훈련을 지시해 다시금 정예화 시키는데 성공한다.[42] 도감군 한 명의 월급이 평범한 농가의 일 년 수입과 맞먹는다.[43] 사나다 부자는 남만인들에게 실력에서 밀려버렸다며 자존심이 상했다.[44] 사도진 상륙 때도 임꺽정이 그것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도왜병을 실수로 죽이거나 먼저 공격받았다고 조선병을 죽이지도 말라"며 유감은 칼로 푸는 게 아니라 술로 푸는 거라고 타이르기도 했다.[45] 재석은 이 중 100만 정도를 전력으로 보고 있다.[46] 飛虎軍. 즉 하늘을 나는 호랑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재석이 윙드 후사르로 개편된 족친위에게 호랑이 가죽 옷을 입히고, 등에 깃털을 달아 마치 하늘을 나는 호랑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족친위는 이 멋진 부대 이름을 듣고 사기가 올라간다고.[47] 다른 왜장들과 달리 오다의 시신은 가짜다. 오다가 폭사해서 시신조차 남지 않았기에 적당히 아무 시신이나 가져다가 오다의 시신이라고 선언했다.[48] 사실은 원균의 카게무샤였던 슌스케의 시신. 하지만 오다와 달리 조선에서도 가짜인 줄 모른다.[49] 다만 작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 걸 보면 독소전쟁 중후반의 정치장교에 가까워 보이는데, 작 중 언급이 없지만 작가도 이를 의식하고 설정을 짠 것으로 보인다.[50] 자침은 됐다. 박홍섭이 자침시킨 3척, 실수로 뻘에 올라앉아 자침한 이억기 휘하 10척으로 13척.[51] 이 때 배 위에서 불을 피워 알릴 수 없기에, 사후선으로 선원들은 모두 탈출하고 배 자체에 불을 지른다.[52] 갈래선과 비류선. 말갈에서 온 배라는 뜻과 버들잎처럼 빠른 배라는 뜻이다.[53] 뻥카다. 수십 톤이 넘는 물건이라 황소 수백 마리는 필요하다.[54] 단가만큼이나 무게가 무거워 질 가능성도 많지만, 대물저격총처럼 거치해서 쏘는 용도라면 큰 문제는 안 된다.[55] 히데요시 왈, 전주가 뜨니 적의 화포가 더 아군에게 더 정확히 퍼부어지는군.[56] 작중 묘사를 보면 사실상 미사일이나 로켓포 수준이나 다름없다.[57] 옥수수는 그대로 옥수수로 썼는데 고구마는 일본어라서 이름을 새로 붙인다.[58] 펠라그라병. 나이아신 부족으로 생기는 병이며 옥수수만 주식으로 하는 경우 걸릴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옥수수 항목 참조.[59] 뿐만 아니라 땅콩은 기름을 짜서 등불이나 윤활유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60] 설고라는 이름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일본을 통해 카스텔라를 접했던 당시 조선인들이 카스텔라를 부른 이름이다. 혹은 단순 음차해서 가수저라라고도 불렀다.[61] 실제로도 벌꿀카스테라라는 이름으로 요즘 베이커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62] 실은 우여곡절 끝에 왕실 내 설탕을 다 써서 만든 걸 낼름 이순신 모친에게 줘버려서 다른 사람들이 먹을 게 없자 꿀을 사용해 만든 거다. 이 당시 설탕은 약용으로 소량만 수입되는 귀한 재료였다.[63] 의외로 원 역사에서는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그들의 신병을 확보한 지방관과 병사들에게 와인을 건네자 매우 즐겨서 병을 다 비웠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마시는 조선인 입맛에도 맞았던 듯. 와인에 대한 기록은 하멜 표류기에만 있고 실록에는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 여겼거나 아랫사람끼리만 다 마시고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64] 포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당도 높은 과일은 일조량이 많고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실제로 이름난 와인 산지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칠레, 캘리포니아 등이며, 그나마 그 중에서도 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는 사실 양조용 포도 재배의 측면에선 북방한계선에 가깝다. 유독 프랑스 와인들이 빈티지에 따라 품질이 오락가락하는 이유도 서안 해양성 기후에 걸쳐 있어 비가 조금만 많이 왔다 하면 당도가 폭락하기 때문.[65] 현재 우리가 아는 배추김치용 통배추는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으로 만들어진 품종으로, 북한, 조선족, 고려인 등 남한에서 품종개량한 통배추가 등장하기 이전에 갈라져 나간 다른 한민족 문화권은 배추가 아니라 무를 이용해 만든 김치가 보편적이다.[66] 사실 원 역사에서도 빙수 비슷한 건 있었다. 얼음을 갈 방도가 없었기에 대충 썰어서 꿀과 과일에 넣고 먹었다. 이게 화채의 기원.[67] 기존의 녹차와 같은 차 종류는 불교 승려들이 주로 마시는 거라는 인식 때문이 양반들이 기피하였지만 커피는 왕실의 높으신 분들도 즐기는 음료라는 입소문도 있고, 외국에서는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검은 색도 조선 사람들 기준에서는 그냥 달인 약 색이기에 괴리감도 적었다.[68] 녹차 외에는 카페인 음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카페인에 대한 내성이 없다시피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커피는 녹차와 비교할 수도 없는 고카페인 함량의 음료였고, 당연히 강한 각성 효과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니 기력을 회복시키는 걸로 인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69] 현재의 카페보다는 16~17세기 유럽의 커피 하우스와 비슷한 분위기. 다방은 이미 궁궐에 차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관청 명칭으로 존재하기에 다점이란 명칭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70] 여성인 상희가 카페로서 기획했기에 주류는 일절 팔지 않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방들을 개방식으로 설계하고 종업원들은 손님들과 동석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추가로 남녀칠세부동석인 조선시대 실정에 맞춰 여성전용 별실도 따로 마련해놨다.[71] 커피가 쌀 다섯 되 값이 될 정도로 비싸고 술을 안 파는데도 이렇게 몰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하는 유럽인 여성들을 보려는 사람들의 호기심도 작용했다.[72] 물론 재석의 의도는 "팔지 않으면 훔치거나 뇌물을 써라" 정도였지 "모카를 뒤집어서라도 가져와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기빈은 태수에게 받은 무례한 대접에 분노한 상태였고, 국서가 모욕당하고 부하들이 폭행당했으니 눈이 돌아가서 무력으로 커피를 확보하기로 한 것.[73] 그럼 그 의원들은 뭘 먹고사나 할 수 있는데, 진료는 무료지만 약이나 뜸은 돈을 받을 수 있다. 단 군현마다 내주는 수준이 달라서 문제라고.[74] 이렇게 의시라도 치려는 이유는 최소한 4대에 한 번 이상은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75] 2부에서 상희는 한의학 지식과 20년의 임상경험 덕에 신체나이 17세에 손쉽게 통과한다. 고작 17살에 의녀가 됐다고 주변 사람들은 천재 취급. 덕분에 견제도 꽤 많이 받았으며, 후궁까지 되자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고 있다.[76] 우두는 유럽, 특히 영국에서 자주 발병하는 병이다. 종두법이 영국에서 처음 나온 것도 이 때문.[77] 그래도 예방약이 있기 때문인지 두창이 퍼져도 금방 제압하고 있다.[78] 상희 말로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대로 된 처방이며, 한자를 직역해 이상하게 알려진 것뿐이지 말 그대로 눈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눈병약이라고 한다.[79] 실존인물로 임진왜란 때 시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80] 처음에는 여자에 후궁이라는 이유로 반발이 심했으나 재석배 수학대결에서 상희는 산관들을 탈탈 털어버리며 실력을 입증한다. 과외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역대 최악의 불수능으로 악명 높은 1997년 수능을 쳐도 5프로 안에 들 거라고 한다![81] 재밌는 건 피타고라스 학파가 무리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82]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동방의 고급 수학으로 미적분을 배워서 발전시키게 될 것으로 보이며 만일 지식의 전달이 늦어 원 역사처럼 원조논쟁이 벌어진다면 80년이나 앞선 원조를 놔두고 하는 특대형 뻘짓이 될 것이다.[83] 예의범절·음악·활쏘기·승마술 내지 마차몰기·서예·산술.[84] 2부에서 상희의 환생체 이수현의 업적은 인류 최고의 여성 과학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인 천연두의 백신을 개발했고, 동양 의학을 집대성한 의서 편찬에 참가했으며, 유럽에서 수많은 수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룬 업적을 혼자 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을 이뤘을 때 고작 10대 후반~20대 초반이었다.[85] 일상 언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문자라는 것은 수학기호로 사용될 최적의 조건이다.[86] 사실 고작해야 1500년대 수준의 선교사 몇 명이 교양 수준으로 익혀 놓은 서양 철학을 성리학자들이 한 방에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걸 세자에게 가르치겠다고 하고 동의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마테오 리치는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를 배우는 데 2년, 그리고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3년 공부하는데 일단 플라톤은 잘 공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3년 익힌 철학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겨내고 세자를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이 세계의 조선이 개방적이래도 세자에게 가르칠 학문이라는 건 나라의 장래를 좌우할 중대사다. 그리고 어지간한 경제력 차이, 문화력 차이가 없는 이상 이질적인 사상은 그렇게 쉽게 전파될 수 없다. 불교가 중국 전파될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만 알아도 세자에게 한 방에 서양 철학을 가르치는 걸 조선인들이 받아들인다는 얘기는 못한다. 당장 플라톤 대표적인 대화편인 국가만 봐도 마지막은 천국을 방불케 하는 저승에 올라가서 얻을 영광과 함께 그리스 신들을 칭송하면서 끝난다. 게다가 혼의 윤회니 상기설이니 착하게 살면 신의 세상에서 태어나니 이딴 얘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결국 불교가 온갖 잡신 섬기듯 얘네는 갖은 그리스 잡신 섬기는 거냐는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논리학도 이미 중국의 명가·묵가·일부 도가·순자 계열이 좀 파고들었지만 결국 주류 유교에게 백마가 말인지 아닌지 그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냐고 논파당한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경우 아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거나 제 1실체가 현실에 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한지 공감해 줄 가능성 자체가 없고 끽해야 그래서 제 1실체라고 할 수 있는 너네 신이 최고라는 거냐?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윤리학은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 위주인데 딱히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넘어설 만한 구석이 없다. 현지 엘리트가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 레벨이 고작해야 3년 공부로 조선 성리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논쟁에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쪽 철학도 그쪽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수준이라면 조선 성리학자들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교사들의 공부가 깊지 않다면 그 만큼 세자에게 가르칠 만한 것도 적기에 유학 공부에 방해될 것도 없을 테고.[87] 내용을 본 사람들은 알지만 이거 야설이다. 잘 하면 조선의 출판업이 어둠의 루트로 탄력을 받을지도 모를 일. 실제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에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야설이 히트를 치면서 출판업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한국도 2000년대 무렵에 초고속 인터넷과 IT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X양 비디오'를 꼽는다.[88] 실제 조선 후기에도 실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서양 서적 번역본들이 수입되었고, 궁궐의 서고에도 수 백 여권 비치 될 정도였다.[89] 중간에 재석이 빙의하기 전 경성군이 얼치기로 익힌 성리학을 논리로 상공업을 억누르며 농업을 장려해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재석이 빙의하며 다시 상공업에 숨이 트일 수 있었다.[90] 다만 "인식이 바뀌었다"는 설정은 다소 고증오류에 가깝다. 명도 무역에 뜨뜻미지근했고 채굴이 적어 금은이 부족했던 역사를 감안하면, 원 역사 조선도 쌀값 등 상공업에 관여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은 거리낌없이 관여한 편이다. 태종 대의 쌀값 관련 논의 기사.[91] 정작 금보다 훨씬 흔하고 실용적인 철광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 서부에는 철광석이 희한하리만치 적다.[92] 예외로 김명원은 서인이지만 병조판서로서 능력이 좋다 보니 여기에 연루시키지 말라고 재석이 언질을 줘서 무사했다.[93] 실제로 전가사변 갔다가 공을 세워 돌아온 윤두수는 바로 호조판서 자리까지 올라간다.[94] 여기에 이항복과 이덕형은 왕실의 일원도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관직도 없는 이들이 징집을 피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며 속오군에 대한 향반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노림수도 섞여 있다고 평가한다.[95] 일본에서 건너온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왜별기에서는 족친위를 공경군(公卿軍)이라고 부른다. 명문대가와 얽혀있지만 실질적인 전력은 못 되는 게 마치 일본의 공경(쿠교)들을 생각나게 한다고...[96] 단 당시 테르시오는 파이크가 주고 머스킷이 보조였지만 조선군은 강선조총이 주다. 일본식 장창술의 대응으로 로델레로 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로델레로 검보병들이 장창병을 대응하는 정식 전술로, 돌격대 검보병들이 장창병의 다리를 공격하여 쓰러뜨리고 장창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이다. 장창병이 이에 대응하려면 장창을 버리고 검을 빼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결국 장창 대열이 무너지게 된다. 파이크만큼 긴 창으로 후려치는 일본군 방진에는 불가능한 전술이라고 하지만, 일본군 장창병들이 후려칠 상대는 조선군 장창병이지 검보병이 아니다. 조선군 장창병을 후려치려다간 잽싸게 파고드는 검보병을 놓치고, 검보병을 막으려다간 조선군 장창병에게 찔린다. 찔리는 걸 감수하고 검보병을 공격하는 것도 힘든 게, 투창으로도 쓸 수 있는 단창이 아닌 이상 창은 조준사격하듯 찔러야 하는데 신속하게 지향하고 조준하는 것도 일인데다 명중률도 그리 좋진 않다. 특히 그 대상이 장창인 경우에는 더더욱. 휘두르고 싶어도 방진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도 문제인 게 검을 든 상대도 창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이기는지 알고 있다. 그야말로 딜레마. 괜히 테르시오 시절에 검보병을 쥐새끼라고 폄하하거나 골치 아프게 여긴 게 아니다. 다만 검 특성상 양성이 오래 걸리고 전업으로 칼질을 하는 것보다는 머스킷질하다가 칼질하는 게 효과적이라 초창기 테르시오에서 가장 먼저 사장된 병과다. 다음으로 사장된 건 마찬가지 이유로 사장된 아퀘버스.[97] 금속활자 만드는 방식은 동양과 서양이 완전히 다르고 규격 역시 다르다.[98] 음식을 나르고 술을 따르는 건 내관과 궁녀들이 담당한다. 궁녀는 왕의 여자이지 기생이 아니기 때문.[99] 이 견서사는 원 역사에서 다테 마사무네가 유럽에 파견한 사절단과 꽤 흡사한 면이 있다. 다테의 사절단에도 귀국하지 않고 유럽에 남은 이가 있으며, 현재도 그 후손이 스페인에 살고 있다고 한다.[100] 조선 사절단과의 연회 자리에 이 인물이 있었고, 조선인들이 우호를 위해 동아시아의 정보를 알려줘서 일본을 도와 중국을 치는건 불가능하며 조선이 특성상 일본보다 선교 등 이익을 얻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전임 총독은 아시아에 대해 잘 모르고 친일성향이 강해 2만 군사로 일본과 합세해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놈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잘못했으면 일본군에 스페인군까지 상대하게 될 뻔했다.[101] 재석은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고려천자 드립을 친 적도 있으며(...), 을미동정 전에는 무려 천자의 국서를 위조해서 이간계를 쓰자는 제안이 조정에서 나오기까지 한다. 원 역사 같으면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바로 삭탈관직당하고 귀양 갈 주장이 나오는데 단 한 명만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의 의견만 제시하며, 그마저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좀 더 신중하게 하자"이다. 재석은 이걸 보면서 조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내심 감탄한다.[102] 물론 만력제가 사리분별을 못해서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한번 조사해 보고 결론 내려도 될 일을 '조선에서 그렇다고 했으니 그런 줄 알아라!'라고 황명을 홀랑 내려버려서 명 조정은 더 이상 사실을 추궁할 수 없게 되었다.[103] 조선 내부적으로는 명나라를 돕는 제1번국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고 유럽에 대해서는 세상의 빛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104] 덕분에 임숭재의 무희들은 외모가 그닥 별로라는 소문이 돌았다.[105] 중국은 풍만한 여성도 좋아하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가녀리고 나붓한 여성을 높게 쳤다.[106] 거기다 원 역사만 봐도 성리학이나 궁중 법도에서 따지는 미인상과 당대 남성들이 좋아하던 미인상은 차이가 있다. 실제 영조의 경우 모친을 닮아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고 하지만, 성리학 기준에서는 좋지 않은 외모였다고 한다.[107] 차차가 예쁘기도 하지만 돈도 많아서 그랬다. 재석이 무종일 때 대가 지나면 종친들의 재산을 회수하도록 법을 제정해놨기 때문에 자식 또는 손자 대에 땅 뺏기는 종친들이 많다. 그전에 돈을 벌어 놔야 하는 판국에 돈 왕창 가진 차차가 떨어진 것. 아무튼 지원자가 많긴 많아서 재석은 내심 이렇게 바뀔 정도라니 하며 혀를 내둘렀다.[108] 전가사변 갔을 적에 서녀와 김충선이 눈이 맞자 서녀라도 이 추운 동네에서 해방시켜 남쪽으로 보내줄 핑계가 생겼다는 생각에 콜 한 거 아닌가 재석은 추측했다. 사실 나중에는 전가사변도 풀려 일가족이 한양으로 돌아오고 윤두수도 호조판서까지 올라가니 그냥 입 싹 닦고 더 좋은 혼처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서녀라도 저 정도 집안이면 혼사 치르자고 할 데가 널렸다고.), 윤두수는 김충선의 인물됨을 보고 전가사변이 풀린 뒤에도 혼약을 깨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서 결혼하자고 한 것도 있고.[109] 재석도 그걸 보고 저런 식으로 알아서 귀화하는 놈들이 나올 거라 봤다. 한편으로 용병들이 강선조총이나 미니에 탄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비밀이 새지 않게 적당히 황금을 찔러주고 귀화시켜 눌러앉힐까 생각도 하는 중.[110] 소설에 언급은 안 돼 있지만, 작가가 조선 사절단이 유럽 가서 창관에서 회포를 풀었다(...)고 한 걸 보아 귀국할 때 몇몇은 서양인 처나 첩을 데려올지도 모른다.(...)[111] 이후, 상희의 딸이 다이샨에게 시집가면서 다이샨이 조선의 부마가 된다.[112] 실제로 세팍타크로 경기에 사용되는 공은 등나무로 만든다.[줄거리] 홍 판서의 외동딸 홍춘심은 스페인인 교관 알바레스와 하룻밤 관계하여 아들을 갖는다. 그러나 후작 가문 삼남인 알바레스는 두 형이 모두 사망했으니 영지를 계승하러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스페인으로 떠난다. 이 아들 홍희동(서반아판에서는 디에고)은 홍 판서가 자신의 서자로 위장해 키우게 된다. 아버지와 누나가 실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였다는 충격적 출생의 비밀을 안 홍희동은 부친을 찾이 스페인으로 떠나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인 산도발, 조선인 말동이, 일본인 사스케, 아프리카인 흑손이 등의 동료들을 얻으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 스페인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버지 비얄바 후작 알바레스는 상속권 문제 때문에 홍희동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허균은 원래 홍희동의 이복자매와 홍희동이 사랑에 빠지는 전개로 가려고 했으나 그 또한 조선 선비였던지라 차마 근친물은 쓰지 못해 포기한다), 그러자 홍희동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스페인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이단자라고 영국 사략선을 마구잡이로 처단하는 스페인군의 모습에도 회의를 느끼고 결국 아버지가 인정해주지 않자 포기하고 미주로 떠나 모든 인종과 종교가 평등하게 사는 자신만의 나라를 세운다.[114] 허균의 허락 없이 홍희동전을 개작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했기에 이는 저작권법을 위반한 해적판이다. 허균은 유럽에서 저작권 개념을 배우긴 했지만 상대가 중전이라 찍소리도 못 냈고, 이후 재석이 중전에게 저작권 개념을 설명해줘서 허균은 늦게나마 로열티를 받았다.[115] 작중에서는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내용이 소설에서 묘사된 원균의 행적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위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116] 계갑대기근의 경우 날씨의 문제보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전란으로 인해 벌어진 사태일 것이라는 추측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년으로 묘사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긴 하다.[117] 조선에서 노역 중이었던 왜노병들과 규슈에서 모집한 의용병들로 구성. 아이러니하게도 오다의 대륙 출병 꿈을 그의 사후 10년 만에 조선이 이뤄주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원 역사에서 중일전쟁때도 밟아보지 못 한 사천 지방까지 가게 되었다.[118] 그런데 매질한 건 안 팔겠다고 거부한 커피 묘목을 밀수하려던, 즉 산업스파이 짓을 하다 현행범으로 잡혀서다. 그냥 목을 따버리고 "그런 사람 몰라"해도 되는 일인데 굳이 매질하고 친서를 찢어버려서 일이 커졌다.[119] 사실 장거정의 부패가 알려지면서 만력제가 정치에 진절머리가 난 것도 있다.[120] 그런데 유럽인들은 멋도 모르고 그렇게 판단했지만, 실제 명나라 군대는 문제가 많다. 명나라 항목의 군대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동시대 조선과 다를 거 없는 동원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말기로 가면 갈수록 재정 악화로 그나마 있는 병사들의 급료도 지불하지 못해 기강은 바닥에 떨어졌고, 전쟁이 났을 때도 상비군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였고, 이 문제는 실제 명나라 멸망에 치명타가 되었다.[121] 사실 총체적인 지출은 큰 차이가 없을 듯하다. 원 역사와 비교하면 군사 파견비용을 대신하여 대략 은화만 1,400만 냥(첫 지원 300만 냥 + 종전 지원 300만 냥 + 보고 지원 300만 냥 + 5년간 100만 냥)이 나가고 그 대가로 포로와 몇 가지 물품들 정도나 받았다. 그리고 무자호란 발발로 은 300만 냥 어치의 지원(절반은 미곡)도 있었다. 즉, 지금까지만 쳐도 1,700만 냥에 달하는 거액을 퍼준 셈이다.[122] 물론 원 역사 임진왜란처럼 명나라가 직접 피를 흘린 것도 아니고 돈만으로 일본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으니 이득이라 볼 수도 있지만, 국고 소모로 인한 군병들에 대한 월급 지체가 더 심화될 것을 감안한다면 '별 피해 없다'치부할 상황은 아니다.[123] 하지만 이성량 실각 이후 요동도사가 바뀌고 나서 2년 만에 요동군 규모가 절반으로 준 것을 보아 미래는 밝지 않다.[124] 이것보다 조건이 나았던 원 역사에서도 청 건국까지는 기적 같은 천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25] 하지만 이 만력 시대의 평화는 상서들이 우려하듯 전적으로 조선의 강성함에 의존하는 데다 국방력 약화가 진행 중인지라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126] 그럼에도 재석은 만력제가 죽은 뒤에 정신 차리는 황제가 나올 수도 있고 중간에 누군가 찬탈할지도 모른다며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127] 조선은 건주위와 우호적이고, 명나라와는 갈수록 사이가 나빠지고 있고, 재석 입장에서도 현실보다 몇 배는 빨리 망해가는 명나라와, 원 역사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국력을 지닌 건주위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특히 재석의 계략(건주위와 명나라가 싸운다면, 그 틈에 다칭유전이 있는 요동을 확보하는 것)에 따라 건주위를 지원할 것이 확실하다.[128] 허투알라로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는 대신 양호의 건의로 사로병진을 전개했다가 일방적으로 각개 격파당한다.[129] 새로 징집한 병사들 중 1선급과 상비군들 중 정예부대, 척가군, 사천 장창병, 요동군 등 거의 명군 전체를 동원했으나 일반병들은 전멸, 사천병 5천은 겨우 조선으로 도주했으며 요동군 2만은 지휘관을 프래깅 한 뒤 단체로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지휘관급만 하더라도 형개, 마천승, 이여백 등등 주요 장수진들이 전사, 처형되었고 진양옥과 유정은 조선으로 망명했다.[130] 참고로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때 조선에게 지원해준 돈 총액이 1700만 냥이다.[131] 사실 원 역사에서 일본 수군이 포를 많이 쓰지 못한 건 첨저형 디자인과 그놈의 삼나무 재질 때문이라서, 물리학적으로 포를 쓸 수 없는 저주를 받아(...) 배를 암만 크게 만들어봐야 의미없다.[132] 그래서 이 시기 동안은 본의 아니게 노동력이 남아돌아서 잉여 노동력을 산성이나 대성당 등을 쌓는 토목공사에 돌렸다.[133] 여담으로, 실제 온돌은 한 번 공기를 데운 다음 그 공기로 다시 바닥을 데우는 것이라 열 효율 자체는 화로보다 나쁜 난방방식이다. 온돌의 장점은 요리할 때 쓰는 폐열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난방에 전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난방효율이 나쁘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산림이 빠르게 파괴된 걸 보면, 아마 일본도 빨리 석탄 테크로 넘어가지 못하면 땔감 부족으로 고생깨나 할 것이다.[134] 大遺州. 조상이 남긴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땅.[주의] 절대로 중국이 큰 나라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설마 프랑스 인구의 10배에 육박하는 거대제국일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덩치가 크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136] 소설에서도 마닐라 총독이 스페인군 2만+왜군의 전력으로 중국을 침략할 망상에 부풀어 있었는데, 신임 총독이 조선 사신단에게 들은 정보를 들먹이며 핀잔을 주는 장면이 있다.[137] 이 당시엔 아직 유럽에서도 망원경이 개발되지 않았다.[138] 일부 독자들이 강선 조총과 미니에 탄의 유출을 크게 걱정하는데, 사실 이건 별 문제가 안 된다. 유럽에서도 강선을 파면 명중률이나 사거리가 높아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작 단가가 비싸지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어 19세기까지도 군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군대의 제식 소총보다 '캔터키 라이플'처럼 민간의 엽총이 강선식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니에 탄의 경우도 강선 총신이 아니면 탄이 엉뚱하게 회전하며 위력이나 명중률이 형편없어진다.[139] 증기기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에 헤론이 발명해서 신전 문을 '신기하게' 여는 정도 용도지만 아무튼 쓰이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도 외국 사절에게 보여주는 신기한 물건 정도로 사용되었고,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에도 일부에서 실험적인 과학 도구로 제작되긴 했지만 실제 산업적 용도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노예의 노동력이 증기기관 제작비나 연료비보다 훨씬 쌌고, 산업혁명을 할만큼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140] 카알 5세 때부터 펠리페 2세 때까지 누적된 후로(스페인 국채) 총액은 1억(!) 두카트에 이른다. 1두카트는 순금 3.5g 금화이니 모두 녹여서 금괴를 만들면 자그마치 350톤이나 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141] 말린 고기나 염장 고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다행히 바다 생선은 먹었지만 그만한 양을 잡아대느라 고생했다고.[142] 이 시점에 조선에서 잡아둔 살아있는 호랑이는 총 3마리였는데 재석은 빨리 2마리를 더 잡아서 5마리를 보내자고 하나, 정곤수가 1마리도 관리하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5마리를 보내겠냐고 해서 결국 3마리로 타협했다. 원래 4마리를 로마 법왕, 신성로마제국 카이저, 프랑스 국왕, 잉글랜드 여왕에게 보내고 예비용 한 마리까지 총 5마리를 보낼 생각이었다. 관리상의 문제로 새끼 호랑이를 보낼까도 했는데 코로나르 추기경 일행은 귀국 준비를 마친 마당에 호랑이가 새끼 낳을 철까지 기다리자니 시간이 너무 걸렸다.[143] 실제로 원 역사에서 1700년대 중반에 오렌지, 라임 등이 괴혈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비용 문제로 도입되지 않았다. 이런 과일의 효능이 밝혀지기 이전에는 날고기를 먹어서 치료했는데 당연히 이건 훨씬 더 비쌌다.[144] 비타민C가 고온에서는 파괴되기 때문. 재석은 당대 수준에 맞는 한의학적 해석을 끼워맞춰 말한다.[145] 그동안 보내준 인삼이나 호랑이 정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많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만한 지식의 전파다.[146] 조선에 피해가 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종두법이 살릴 수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놔둔다는 것은 매우 비인도적인 발상이고 조선의 국력 우위는 정치와 외교로 유지하라는 말. 상희가 본래 의료인이었고 현대에서 뿐 아니라 조선에서 천민으로 지낼 때나 후궁이 되었을 때나 상당히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연재 당시 이로 인한 논란이 좀 있었다.[147] 대표적으로 천연두로 요절한 메리 2세가 장수한다던가. 메리 2세가 요절하고 살아남은 자손이 없었기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이 끊겼지만 메리 2세가 생존해서 장성한 자손을 남긴다면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이 유지될 수도 있었다.[148] "Sir Heo's bean cheese"[149] 강릉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으로 알려져 있다. 초당은 허엽의 호.[150] 지금 조선의 군사력이면 북방군 중 일부만 투입해도 건주위 따위는 순삭이다.[151] 나중에 이는 조선의 묵인이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는 게 밝혀진다.[152] 올바른 인식이다. 건주위가 아무리 국력이 강해져도 지금의 조선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작금의 조선은 상비군만 15만 이상이고 그 대다수가 실전 경험이 빵빵하고 최신식 무기와 전술로 단련된 정예들이다. 게다가 북방은 속오군도 모조리 강병이라서 건주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원 역사보다 강해진 것도 조선이 실 역사보다 훨씬 강해진 것 때문에 붉은 여왕 효과 덕을 본 정도뿐이다.[153] 특히 미래에 유용하게 쓸 다칭유전 지역[154] 현재 재석의 이 대전략은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다. 전략 자체는 좋은데 전개 과정에서 개연성에 문제가 생길 만큼 억지로 청나라 만들어서 억지 병자호란 만드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 부분.[155] 당장에는 화약도 없고 고작 10명의 대장장이에 불과하며 대량생산 체제로 가기에는 무리가 많지만 장기적으로는 상당히 유용하다.[156] 물론 그래 봐야 조선이랑은 화력이 넘사벽 차이다. 그리고 왜조총 자체가 활강조총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다.[157] 재석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와 조선이 같은 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158] 1부에 나오는 이여송의 선조 이춘미도 부친을 몽골군 총에 잃었다고 나온다. 덕분에 이춘미는 조선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