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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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文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천시인 고울부(高鬱府)의 장군이었다.정사 기록에서는 성씨가 생략돼 있지만, 후대 기록에 나오는 금강성 장군 황보능장(皇甫能長)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쪽에선 당대의 금석문에서 사찰 건립에 참여한 호족으로서 능장(能丈)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바 능문(能文)을 능장(能丈)의 오기로 보고, 황보능장(皇甫能長)이라는 이름은 능장(能丈)을 동일한 발음을 다른 글자로 음차한 것으로 본다.
2. 생애
삼국사기 및 고려사에서 그의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가까운 영천 지방의 호족이었다. 경애왕은 신라군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연합해 후백제와 싸우게 했는데, 경주에서 서부 전선으로 신라군을 보내려면 영천을 반드시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신라 군대의 통과를 허락할 정도로 그는 신라 조정에 상당히 협조적인 호족으로 추정된다.그러나 결국 대세가 고려에 있다고 판단했는지 925년 겨울 10월, 능문은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뜻을 밝혔으나, 신라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왕건은 고울부가 신라 왕도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타일러 돌려보냈다. 대신 능문의 부하인 시랑(侍郞) 관직의 배근(盃近)이란 자와 대감(大監) 관직의 명재(明才), 상술(相術), 궁식(弓式) 등만 고려에 머물게 했다.
2년 뒤 견훤이 서라벌을 기습할 때 지나가는 길에 있는 고울부를 습격했는데, 능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견훤의 목적이 서라벌 기습에 있었으므로 고울부는 빠르게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경애왕은 고울부가 공격당했다는 속보를 듣고 뒤늦게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피살당했다.
황보능장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을 따른다면 이후 고려 정부에서 그의 공을 인정해 좌승(左丞) 관직을 내렸다고 하며, 지금도 황보능장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