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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대한민국의 정당 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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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계 정당 | 보수정당 (초기, 군정기, 민자당계) |
극좌 | 진보 | 중도 | 중도보수 | 극우 | 민족 | 대중 | 자유 |
1. 개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전까지의 보수정당 중 민주당계 정당을 제외한 정당들을 서술한 문서이다.이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과 대립한 주류 정당은 자유당으로 대표되는 친이승만 성향 정당들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주류 민주당계 정당, 즉 더불어민주당의 라이벌인 국민의힘이 자유당을 계승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흔히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자유당을 계승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역시 민주당계 정당의 라이벌이었다 뿐이지 오히려 자유당 세력은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민주당계 정당과 함께 범야권으로 활동했다.
참고로 국민의힘은 민주자유당에서 이어져 오는 정당이고, 민주자유당의 뿌리가 되는 세 세력[1] 중 자유당과 계보적으로 연결되었던 세력은 없다. 그나마 신민주공화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이 창당될 당시 자유당 출신 인사들이 일부 참여한 사실이 있으나, 그렇게 치면 민주당계 정당으로 간 자유당 출신 인사들도 많고[2], 민주당(1955년) 출신 인사들 중에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한 경우가 꽤 있으며 나중에 신민당 당적을 유지하다가 민주공화당으로 합류한 경우도 있다.
2. 역사
광복 초기 여러 보수 정당이 난립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서 소련군이 진입한 북한 지역에서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유력한 우익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진입한 남한 지역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이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미승인국인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했으나 사실상 우익을 배제한 좌익만의 정부였기 때문에 남한의 유력한 우익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났다.그래서 한민당은 자신들의 뒤떨어진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임정봉대론을 내세우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익인사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정치적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미국에서 외교독립노선을 주장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와 광복 당시 임정을 이끌던 김구 주석이 남한 지역의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렇게 1946년 이승만은 김구와 손을 잡고 같이 우익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어갔고 김구는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면서 임정 시기의 한독당을 합당을 통해서 한국독립당(1940년)으로 재편성하며 세력을 불리길 시도했다. 지금은 반대로 생각되지만 실제 이때까지 이승만은 중도우익, 김구는 강경우익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인 신탁통치와 관련해서 논쟁이 이어지다가 남북에 각기 다른 나라에 군정통치가 이뤄진 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이 여기에 참여한 상황에서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민족자주연맹으로 중도세력을 재편성한 상황에서 분단이 현실화되어가자 김구가 이들과 손을 잡았다가 결정적으로 우익 내 헤게모니를 이승만에게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좌익은 좌익대로 좌우합작을 비판했으며 우익은 우익대로 좌우합작을 비판하면서 중도는 고립되었고 중도적인 제스처를 취한 정치인들의 인기는 떨어져 몰락했다.
그렇게 우익은 이승만의 독촉을 중심으로 한민당에서 한독당까지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재정렬이 이뤄졌고 심지어 월남한 조선민주당 세력까지 분열이 일어나서 독촉에 합류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이자 강경우익이었던 김구는 민족유일정부를 외치며 당차원에서는 제헌 총선을 보이콧하였다. 이후 김구가 피살당하자 한독당은 완전히 몰락해서 사라졌다.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승만과 한민당은 제헌헌법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지향하는 정치적인 목표의 차이로 인해서 분열되었고 농지개혁을 정점으로 정치적인 적이 되었다. 이런 한민당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승만은 여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한국민당(1949년)을 창당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한민당의 후신으로 민주국민당이 탄생하면서 정치적 경쟁자만 커졌다. 이후 1951년까지 이승만은 스스로를 초당파적 정치지도자로 규정했다. 다만 1949년 이승만은 독촉을 비롯한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을 뭉쳐서 다시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해서 민주국민당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치적 갈등은 수면 아래로 잠재워졌지만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에게 입법부 내에서 여당의 필요성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이승만의 세계관 속 양반당인 한민당계(지금의 민주당의 시초)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인 통일노농당을 창당하려고 하다가 반발을 얻자 자유당(1951년)이라는 당명으로 창당했다. 이후 정국은 1952년 대선에서 이승만이 승리해서 재선에 성공한 뒤에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재편되기 시작하면서 자유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양당제로 정리되었다.[3] 이후 1954년 총선, 1958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이기기도 했고 1956년 대선 때도 이승만이 3선에 성공을 한다.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후로 사실상 붕괴했으며, 당에 잔류한 얼마 안 되는 이들은 그 해 총선에서 궤멸하다시피 하였다. 이후 장면 내각 재임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자유당은 5.16으로 군사 정부에 의해 아예 강제 해산된 뒤로도 좀처럼 재기하지 못하며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다만 상당수의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민주당계 정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등에 들어가서 정치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3. 주요 정당
3.1.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6년 2월 8일에 창당한 범우익 포괄정당이자 정치단체이다. 흔히 부르는 약칭은 독촉이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사회운동단체이자 정치단체로서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이 총재이고 김구가 부총재였다. 이후 김구는 미군정의 의도 하에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남북협상파가 되면서 떨어져 나갔고 이후 사실상 이승만의 자유당 전신격으로서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과정,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제헌헌법 제정 등에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일반적으로 제헌 총선과 2대 총선 때 친이승만 성향의 독촉 계열의 정당 및 정치단체를 포괄하는 의미다.[4]
3.2. 대한국민당(1949년)
1948년 11월 13일에 창당된 정당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제헌국회 이후로 정계개편이 이뤄지면서 여러 정치단체와 정당으로 분당이 되면서 무력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한국민주당 및 소장파 무소속 진영에 맞서 자신을 지지해 줄 여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만들게 된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그러나 1949년 2월 10일 당내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신익희, 지청천 등이 한국민주당에 합류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자 힘을 잃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태도를 180도로 바꾸어 정당 자체를 파당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정당과는 무관한 초국민적 지도자로 규정하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될 때까지 이어졌다.
1949년 11월 12일 명목만 남은 대한국민당을 일민구락부, 신정회[5], 대한노농당[6], 등의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하였다. 재창당한 대한국민당은 71석으로 원내 제 1 당이 되었다. 1950년 2월 2대 총선에서 24석을 차지하였는데 이후 소속 의원들이 자유당으로 이탈함으로써 점차 야당화되었다. 명목만 남아있다가 1958년 7월 해산하였다.
3.3. 자유당(1951년)
1951년 스스로를 초국민적 지도자로 규정하며 정부를 이끌어오던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인 한계를 느껴 창당한 당이다. 창당과정이 복잡한데 쉽게 말해서 이승만 대통령 산하의 여러 계파들이 내분을 겪으며 1951년 12월 17일에는 원외 자유당이 창당되었고 1951년 12월 23일에는 원내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참고로 이승만이 정식으로 인정했던 자유당은 원외 자유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1951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후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신당은 대부분이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하여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원외 자유당의 본래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통일노농당이었다. 이러한 당명의 시비가 결국 두개의 자유당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1953년 5월 30일 두개의 자유당이 하나의 자유당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후로 사실상 붕괴했으며, 당에 잔류한 얼마 안 되는 이들은 그 해 총선에서 궤멸하다시피 하였다.[7] 이후 장면 내각 재임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자유당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부에 의해 아예 강제 해산된 뒤로도 좀처럼 재기하지 못하며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3년에 출간한 대한민국 정당사 제1집에 따르면 1963년 초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몇 차례 회합을 갖고 자유당 재창당을 논의하였으나, 배종덕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 재건파, 김법린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참여파, 이활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당 참여파,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1963년) 참여파 등으로 나뉘어 있던 그들은 의견을 한데로 모으지 못하고 결국 재창당 논의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당 출신 인사들 중 일부만이 모여 1963년 장택상을 당수로 자유당이 재창당 되었으나, 속칭 재건 자유당이라 불린 이들은 이후 치러진 선거들에서 단 한 번도 당선자를 내지 못해 군소 정당화 되었다. 결국 7대 대선을 1년여 앞둔 1970년 1월 24일, 재건 자유당은 재야 민주 세력을 총집결하여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강력한 단일 야당을 형성해야 한다는 유진산 당시 신민당 당수의 보수 야당 대통합 제의를 받아들여 민주당계 정당의 적통인 신민당에 흡수합당 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당의 법통은 민주당계 정당들이 이어받은 것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상술했다시피 자유당은 이미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강제해산 당한데다, 1963년 후계를 자처하는 정당들 마저 너무 여러개로 찢어져서 자유당의 단일 법통을 주장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고 봐야 한다.
1963년 자유당 출신 인사들 중 변영태 전 총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정민회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4. 기타 정당
4.1. 대한여자국민당
자세한 내용은 대한여자국민당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자세한 내용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문서 참고하십시오.4.3.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자세한 내용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문서 참고하십시오.4.4. 대성회
자세한 내용은 대성회 문서 참고하십시오.4.5. 민족통일본부
자세한 내용은 민족통일본부 문서 참고하십시오.4.6. 조선공화당
자세한 내용은 조선공화당 문서 참고하십시오.4.7. 단민당
자세한 내용은 단민당 문서 참고하십시오.4.8. 교육협회
자세한 내용은 교육협회 문서 참고하십시오.4.9. 부산15구락부
자세한 내용은 부산15구락부 문서 참고하십시오.4.10. 대한민국제헌국회의원동지회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제헌국회의원동지회 문서 참고하십시오.4.11. 헌정동지회
자세한 내용은 헌정동지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 혼합 정당
5.1. 진보
5.1.1. 노농당
한국노농당 출신이자 초대 사회부장관이며 친이승만 성향의 전진한은 1951년 12월 부산의 조선방직 쟁의를 계기로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1954년 1월 족청계 숙청을 계기로 이승만의 자유당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3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5년 2월 15일 노동자·농민·소시민층을 기반으로 하여 노농당을 창당했다. 어떻게 본다면 통일노농당의 진정한 후계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전진한의 자유협동주의 이념이 당의 강령에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전진한의 노동운동적인 노선과 관계가 있는데 그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인 노동운동에 맞서 협동조합운동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했다. 즉, 전진한의 자유협동주의 이념은 코포라티즘의 일종이다.
5.1.2. 민족주의민주사회당
자세한 내용은 민족주의민주사회당 문서 참고하십시오.5.1.3. 한국사회당(1960년)
자세한 내용은 한국사회당(196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5.2. 민주당계
5.2.1. 서북청년회
자세한 내용은 서북청년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2.2. 대동청년단
자세한 내용은 대동청년단 문서 참고하십시오.5.2.3. 대한국민당(1948년)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민당(194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5.2.4. 대한청년단
자세한 내용은 대한청년단 문서 참고하십시오.5.3. 종교
5.3.1. 중앙불교위원회
자세한 내용은 중앙불교위원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4. 민족주의
5.4.1. 한국독립당(1940년)
실질적 전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 그 자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1940년 5월 8일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 합당해서 창당된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정부 시절 중화혁명당-국민당의 영향을 받아서 당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한독당의 당군이 한국 광복군의 전신이다.그러나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1945년 11월 국내에 당으로 공식 등록하고 활동했다. 1946년 3월 한독당은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는데 한국민주당,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이갑성의 신한민족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의 연합은 실패하고 4월 18일 한국독립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의 3당 합당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정 계열의 독주로 인해서 불만을 품은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는 반발했고 김규식을 비롯한 몇몇 요인들이 이탈했다.
이후로도 김구의 좌우합작운동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당 밖의 우익인사는 물론 당 내의 우익인사들도 반발하여서 당세가 쇠퇴하였고 김구의 암살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몰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옹진군 당위원장이었던 오택관이 출마하여서 제도권에 진입하였다. 오택관은 이후 1949년 9월 12일 대한노농당에 합류했다가 1950년 1월 27일 대한국민당에 합류하였으며 6.25 전쟁이 터지고 납북되었다.
5.4.2. 조선민족청년단
자세한 내용은 조선민족청년단 문서 참고하십시오.5.4.3.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자세한 내용은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문서 참고하십시오.5.4.4. 대한애국부인회
자세한 내용은 대한애국부인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4.5. 일민구락부
자세한 내용은 일민구락부 문서 참고하십시오.5.5. 진보·민족주의
5.5.1. 대한노동총연맹
자세한 내용은 대한노동총연맹 문서 참고하십시오.5.5.2. 민족자주연맹
자세한 내용은 민족자주연맹 문서 참고하십시오.5.6. 기독교·민족주의
5.6.1. 조선민주당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을 당수로 이윤영을 부당수로 소련군정기 치하의 평양에서 창당되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해당 항목 참조.소련군정은 다른 우파정당들의 창당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북한 내 민족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았을 땐 당원 기반은 주로 북한내의 개신교인, 중농, 소상공인이었다. 창당 3개월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당 기관지로는 주간 신문 《조선민보》를 발행했다.
한편 조선민주당이 신탁통치에 반대하자 당수인 조만식을 연금하면서 최용건이 강제로 당권을 잡고 어용정당화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부당수인 이윤영을 포함해서 많은 당내 우파 당원들이 소련군정과 북한 정권에 협조를 거부하고 월남하여 서울에서 같은 이름의 당을 창당했다. 이에 따라 조선민주당은 북쪽의 남은 조선민주당은 구색정당화되어서 조선사회민주당이 되고 남쪽의 새로운 조선민주당이 1961년 해체될 때까지 남북으로 갈라졌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주당 부당수였으며 남한 내의 당수가 된 이윤영만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1석을 얻어 원내에 진입하였다.
6. 소속 정치인
6.1.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법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1 | 이승만 (1875 ~ 1965) | 1 |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 1948년 대선 간선 92.3%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 ~ 51) 자유당 (1951 ~ 60) |
2 |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 1952년 대선 직선 74.6% | |||
3 |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 1956년 대선 직선 70.0% |
6.2. 부통령
대한민국 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법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1 | 이시영 (1868 ~ 1953) | 1 | 1948년 7월 24일 | 1951년 5월 14일 | 1948년 대선 간선 67.51%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 ~ 51) |
6.3. 국회의원
6.3.1. 제헌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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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해 | 이성우 | 김장열 | 박준 | 정우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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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당 대표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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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대 전진한 |
한국독립당 대표 ▶ |
7. 역대 선거 결과
7.1. 대통령 선거
후보자 | 연도 | 대수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결과 |
김구 | 1948년 | 1대 | 한국독립당(1940년) | 13표 | 6.7% | 2위 |
이승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80표 | 91.84% | 당선 | ||
1952년 | 2대 | 자유당(1951년) | 5,238,769표 | 74.61% | 당선 | |
1956년 | 3대 | 5,046,437표 | 69.98% | 당선 |
7.2. 부통령 선거
후보자 | 연도 | 대수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결과 |
이시영 | 1948년 | 1대 1차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13표 | 57.36% | 1위 |
김구 | 한국독립당(1940년) | 65표 | 57.36% | 2위 | ||
1대 2차 | 62표 | 31.47% | 2위 | |||
이시영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33표 | 67.51% | 당선 | ||
이범석 | 1952년 | 3대 | 자유당(1951년) | 1,815,692표 | 25.45% | 2위 |
이갑성 | 500,972표 | 7.02% | 4위 | |||
전진한 | 대한노동총연맹 | 302,471표 | 4.24% | 6위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90,211표 | 2.66% | 7위 | ||
이윤영 | 조선민주당 | 458,583표 | 6.42% | 5위 | ||
1956년 | 4대 | 34,926표 | 0.40% | 6위 | ||
이기붕 | 자유당(1951년) | 3,805,502표 | 44.03% | 2위 | ||
윤치영 | 대한국민당(1949년) | 241,278표 | 2.79% | 4위 |
7.3. 국회의원 선거
연도 | 국회 | 정당 | 전체 의석수 | 지역구 | 비례 | 결과 |
1948년 | 1대 | 대동청년단 | 12 / 200 | 12 / 200 | - | 원내 3당 |
조선민족청년단 | 6 / 200 | 6 / 200 | 원내 4당 | |||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2 / 200 | 2 / 200 | 원내 5당 |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1 / 200 | 1 / 200 | 원내 6당 | |||
조선민주당 | 1 / 200 | 1 / 200 | 원내 7당 | |||
교육협회 | 1 / 200 | 1 / 200 | 원내 8당 | |||
대성회 | 1 / 200 | 1 / 200 | 원내 9당 | |||
조선공화당 | 1 / 200 | 1 / 200 | 원내 10당 | |||
부산15구락부 | 1 / 200 | 1 / 200 | 원내 11당 | |||
단민당 | 1 / 200 | 1 / 200 | 원내 12당 | |||
민족통일본부 | 1 / 200 | 1 / 200 | 원내 13당 | |||
대한청년단 | 1 / 200 | 1 / 200 | 원내 14당 | |||
한국독립당(1940년) | 1 / 200 | 1 / 200 | 원내 15당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55 / 200 | 55 / 200 | 원내 1당 | |||
1950년 | 2대 | 14 / 210 | 14 / 210 | 원내 3당 | ||
대한청년단 | 10 / 210 | 10 / 210 | 원내 4당 | |||
대한노동총연맹 | 3 / 210 | 3 / 210 | 원내 5당 | |||
일민구락부 | 3 / 210 | 3 / 210 | 원내 6당 | |||
민족자주연맹 | 1 / 210 | 1 / 210 | 원내 8당 | |||
대한부인회 | 1 / 210 | 1 / 210 | 원내 9당 | |||
대한여자국민당 | 1 / 210 | 1 / 210 | 원내 9당 | |||
중앙불교위원회 | 1 / 210 | 1 / 210 | 원내 9당 | |||
대한국민당 | 24 / 210 | 24 / 210 | 원내 2당 | |||
1954년 | 3대 | 3 / 203 | 3 / 203 | 원내 3당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3 / 203 | 3 / 203 | 원내 4당 | |||
제헌국회의원동지회 | 1 / 203 | 1 / 203 | 원내 5당 | |||
자유당(1951년) | 114 / 203 | 114 / 203 | 원내 1당 | |||
1958년 | 4대 | 127 / 233 | 127 / 233 | |||
1960년 | 5대 | 2 / 233 | 2 / 233 | 원내 3당 | ||
헌정동지회 | 1 / 233 | 1 / 233 | 원내 6당 | |||
한국사회당(1960년) | 1 / 233 | 1 / 233 | 원내 4당 | |||
참의원 | 1 / 58 | 1 / 58 | ||||
자유당(1951년) | 4 / 58 | 4 / 58 | 원내 2당 |
7.4. 지방선거
연도 | 횟수 | 정당 | 시장 | 읍장 | 면장 | 도의회의원 | 시의회의원 | 읍의회의원 | 면의회의원 |
1952년 | 1차 | 대한청년단 | - | - | - | 34 / 306 | 40 / 378 | 229 / 1,115 | 2,574 / 16,051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32 / 306 | 29 / 378 | 155 / 1,115 | 2,437 / 16,051 |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 2 / 306 | 5 / 378 | 6 / 1,115 | 12 / 16,051 | |||||
대한국민당(1949년) | - | 2 / 378 | - | 16 / 16,051 | |||||
자유당(1951년) | 147 / 306 | 114 / 378 | 274 / 1,115 | 4056 / 16,501 | |||||
1956년 | 2차 | 2 / 6 | 8 / 30 | 282 / 544 | 249 / 437 | 157 / 416 | 510 / 990 | 10,823 / 16,051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 1 / 30 | 6 / 544 | 6 / 437 | 17 / 416 | 28 / 990 | 161 / 16,051 | ||
농민회 | - | 3 / 544 | 1 / 437 | 1 / 416 | 3 / 990 | 16 / 16,051 |
[1]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2] 물론 민주당이나 제3지대로 간 자유당 인사들도 나중에는 민주공화당 쪽으로 합류한 경우도 많다.[3] 다만 이 시기의 민주당계 정당은 자유당과 이념 및 정책 노선이 거의 다르지 않은 보수 우파 정당이었다. 그러므로 보수 양당제다. 1956년 잠시 조봉암의 진보당이 제3당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 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조봉암은 사형당하고 진보당은 해체되었다. 여담이지만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주역 중 하나인 통일민주당도 민주당의 정치이념을 계승한 보수정당이다.[4] 충격적이겠지만. 초창기 민주당계 보수정당들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익 진영이 분화하게 된 것은 1951년 창당된 자유당(1951년)과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보수양당제를 구성하게 되면서부터다.[5] 족청계 원내교섭단체다.[6] 대한노총과 대한농총의 주도로 대한노농당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일부 원내 무소속 구락부 소속 의원들이 합쳐서 만들려고 하다가 이견차로 인해서 노총과 농총이 한국노농당으로 이탈하고 난 다음에 그대로 창당한 정당이다.[7] 탈당한 이들 중에서는 자유연맹이라고 해서 자유당 출신의 무소속 의원들끼리 연대를 만들었다. 18대 총선의 친박 무소속 연대를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