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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의 르네

레나토(나폴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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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DEFF><colcolor=#000> 앙주 공작
르네 1세
René I d'Anjou
파일:레나토 1세.jpg
Renato
가문 발루아 앙주 왕조
출생 1409년 1월 8일
앙주 공국 앙제 성
사망 1480년 7월 10일 (향년 71세)
프랑스 왕국 엑상프로방스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35년 - 1442년
앙주 공작 1434년 - 1480년
배우자 로렌 여공작 이자벨 (1419년 결혼 / 1453년 사망)
잔 드 라발 (1454년 결혼)
자녀 장 2세, 루이, 니콜라스, 욜랑드, 마르그리트, 샤를, 이자벨, 르네, 루이, 안, 장(사생아), 잔 블랑슈(사생아), 마들렌(사생아)
아버지 루이지 2세
어머니 아라곤의 욜란다
형제 루이 3세, 샤를, 마리, 욜랑드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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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리 왕국 10대 국왕, 앙주 공작로렌 공작. 아라곤 왕국 국왕 알리폰소 5세와 나폴리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프랑스어 이름은 '르네', 이탈리아어 이름은 '레나토'. 별명은 선량왕. 발루아-앙주 가문 출신이라 르네 당주라고도 한다.

2. 생애

1409년 1월 8일 앙주 공국 앙제 성에서 앙주 공작이자 전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아라곤 왕국 국왕 추안 1세의 딸 욜란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루이 3세, 샤를, 마리[1], 욜랑드가 있었다. 141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형 루이가 공작으로 즉위했고,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앙제 성에 계속 머물다가 1419년 3월 20일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장녀 이자벨과 약혼한 뒤 그해 8월 10일에 로렌으로 이주했다. 1420년 10월 24일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 계약서에는 로렌 가문이 바르와 퐁타무손을 상속받고, 두 사람의 자식이 그들의 모든 영토를 상속받는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르네는 어렸을 때 부르고뉴파였던 바르의 추기경 루이의 가르침을 받았고, 장인 샤를 2세 역시 부르고뉴파였다. 그러나 그는 1422년 10월 시농에서 프랑스 국왕을 자처하며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파에 맞서 싸운 샤를 7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정세는 샤를 7세에게 극도로 불리해 프랑스 영토 대부분이 잉글랜드와 샤를을 대적하는 부르고뉴 가문에 넘어갔고 많은 귀족들이 샤를을 배신했지만, 그는 끝까지 샤를을 지지했다. 이후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가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석했다. 1429년 8월 15일에는 몽테필로이(Montépilloy)에서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1430년 바르의 루이 추기경이 사망하자 바르 공국을 상속받았고, 1431년 장인이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로렌 공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 해 7월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은 앙투안 드 보데몽이 로렌으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에 맞섰지만 볼뉴빌(Bulgneville)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프랑슈콩테의 돌(Dole) 성채에 감금되었다. 이에 아내 이자벨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앙투안을 상대로 분전했다. 1432년 2월 16일, 필리프 3세는 르네가 갇힌 성채를 찾아와서 5월 1일에 석방시켜주겠지만 그 대신 르네의 아들 과 루이를 인질로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르네는 이를 받아들이고 가석방되었다.

1434년 4월 24일, 르네는 바젤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명목상 로렌 공국의 주권자인 지기스문트로부터 로렌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로렌 공국을 노리고 있었던 필리프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르네의 가석방을 취소하고 소환령을 내렸다. 르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부르고뉴 공작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돌 성채로 돌아가 2년간 장남 장과 함께 재감금되었다.[2]

1434년 11월 앙주 공작이자 칼라브리아의 공작으로서 장차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그는 옥중에서 형의 지위를 상속받았으며, 곧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435년 2월 조반나 2세가 사망하면서 나폴리 왕위를 승계했지만, 필리프 3세가 석방을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돌 성채에 여전히 갇혀지냈다.

그러다가 1437년 2월 7일 여러 영지를 필리프 3세에게 넘겨주고 배상금 납부를 지속하며, 자신의 아들 장과 필리프 3세의 조카인 부르봉의 마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풀려났다. 르네는 석방된 직후 로렌으로 돌아간 뒤 로렌과 바르의 관리를 두 명의 주교에게 맡겼으며, 장남 장을 칼라브리아의 지도자로 세웠다. 이후 1437년 7월에 샤를 7세가 거주하던 기옌의 여름 별궁으로 가서 왕을 알현했고, 앙투안 드 보데몽과 화해했다. 그해 11월에 장과 며느리 마리아와 함께 앙주 공국으로 돌아가 1437년 12월 7일 앙제 성에 입성했다.

한편, 르네의 아내 이자벨은 둘째 아들 루이와 함께 나폴리로 간 뒤 남편을 대신해서 왕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르네가 나폴리에 오지 못한 틈을 타 나폴리 왕위를 가로채려는 아라곤-시칠리아 국왕 알폰소 5세의 공세에 직면했다. 이자벨은 앙주-로렌에서 데려온 병사들과 이탈리아에서 고용한 용병대와 함께 알폰소 5세에 맞서 싸웠다. 여기에 바리 공작 자코포 칼도라도 이자벨의 편에 서서 아라곤 왕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1436년 2월 카푸아가 알폰소 5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자벨은 남편에게 한시바삐 나폴리로 와서 알폰소 5세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르네는 병력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출발을 미뤘다. 1438년 4월 15일, 르네는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7척의 함선을 고용한 뒤 그곳에 자기가 모집한 병력을 싣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1438년 5월 19일 나폴리에 도착한 르네는 나폴리의 레나토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레나토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1439년 11월 콜레 산니타 시를 포위 공격하던 자코모 칼도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칼도라의 아들 안토니오가 알폰소 5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레나토의 군세는 급격히 약해졌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르네는 앙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나폴리에서 쫓겨나고 앙주로 귀환한 르네는 1444년 5월 22일 잉글랜드 대표 헨리 보퍼트와 협의한 끝에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자신의 딸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프랑스 왕국이 앙주와 메인 일대를 잉글랜드로부터 지참금으로 받아냈다. 한편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데 박대한 비용이 소모되면서 상당한 빚을 지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도시 및 영주들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그가 돈을 좀처럼 갚지 못하자, 그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급기야 아내인 로렌 여공작 이자벨이 딸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보석과 수화물을 메츠 시민들이 앙주 공작의 빚을 회수한다는 명복으로 압수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르네는 샤를 7세를 설득해 1444년 9월 메츠 시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4개월간 공방전이 이어진 끝에, 1445년 3월 3일 메츠 시민들이 항복하고 빼앗았던 보물을 돌려줬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평화 협약은 오래 가지 않았다. 헨리 6세가 약속과는 달리 앙주와 메인 양도를 차일피일 미루자, 샤를 7세는 무력으로 회수하기 위해 1447년 군대를 일으켜 북상했다. 1448년 3월 두 영지를 모조리 공략한 뒤, 샤를 7세는 르네에게 양도했다. 르네는 영지 관리에 주력하는 한편 1448년 8월 초승달 기사단을 설립해 무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1449년 10월부터 장남 장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군과 교전했고, 1450년 7월 6일 카돔 공략과 1451년 8월 기옌 공략에 기여했다. 1453년 아내 이자벨이 사망하면서 로렌 관리를 맡고 있었던 아들 장이 정식으로 로렌 공작이 되었다.

이 무렵, 나폴리 왕국의 알폰소 5세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갈수록 세력을 키우면서 북부 이탈리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르네에게 군대를 이끌고 제노바로 가라고 지시했다. 르네는 1453년 7월 엑상프로방스에서 시스테롱을 거쳐 가프까지 진군한 뒤 알프스산맥을 넘으려 했지만, 프랑스 왕국의 의도를 의심한 사보이아 공국루도비코가 산맥 통과를 거부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마르세유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마르세유에서 바다를 건너가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폼페이, 알렉산드리아, 파비아, 크레모나 등지를 돌며 동맹군과 합세했다.

그들은 한때 밀라노의 지배를 받았지만 최근 베네치아 공화국에 점령되었던 브레시아를 포위 공격해 함락에 성공했지만, 겨울비가 세차게 내리자 더 이상 군사 작전을 벌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피렌체인들이 약속과는 달리 알폰소 5세와 화해하기 위해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르네는 이러다가 이탈리아에서 고립되겠다고 여기고 철수를 결심했다. 그는 1454년 2월 9일 사보이아 공국의 허락을 받고 알프스 산맥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갔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가 겨울에 알프스를 넘다가 얼어죽거나 실종되었다.

앙주로 돌아온 뒤 라발 백작 기 14세 드 라발의 딸 잔과 재혼한 르네는 정치에 손을 떼고 앙주와 프로방스 일대에서 예술과 문학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기사도마상창시합에 관한 저서 <토너먼트 북(Le Livre de tournois)>을 저술했고,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바르텔레미 데익(Barthélémy d’Eyck)이 이 책에 화려한 삽화들을 실었다. 또한 <한가한 쾌락의 고행(The Mortification of Idle Pleasure)>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영혼과 방탕과 허영심으로 가득찬 마음의 괴리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는 방안을 모색했다.

르네의 세번째 저서이자 가장 긴 작품인 <사랑에 빠진 심장의 책(The Book of The Love-Smitten Heart)>은 르네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우화적인 탐구를 제시했다. 르네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르네의 삼장은 '욕망'으로부터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스위트 머시(Sweet Mercy)'를 찾으라는 권고를 따르기로 하고, 흑인 기사들, 오두막에 사는 마녀들, 사악한 난쟁이들의 훼방을 돌파하며 모험을 떠난다. 네번째 작품인 <Regnault et Jehanneton>은 르네와 아내 잔의 이름과 매우 유사한 두 연인이 누가 상대방을 더 사랑하는지를 논쟁하는 내용의 서정시다.

르네는 추리극과 중세 희극 작가들에게 막대한 후원을 해줬으며, 화가 발레 드 샹브레와 베르텔레미 데 에크를 총애해 프로방스와 앙주 일대에서 상당수의 풍경화, 인물화 등 여러 작품을 그리도록 해줬다. 1462년에는 사우무르에서 '예수의 수난' 연극 공연을 후원하면서, 사우무르 마을에 4년간 거둬들였던 세금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공연에서 유대인들에게 좀더 동정적인 쪽으로 연극이 진행되도록 해, 반 유대 폭동이 자기 영지에서 일어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르네는 이탈리아의 예술인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탁월한 조각가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는 알폰소 5세를 위해 누오보 성 개선문을 제작했다. 1458년 알폰소 5세가 사망한 후, 라우라나는 르네의 부름을 받아 앙주로 가서 여러 위인들의 청동 조각상들을 제작했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 문인들을 대거 초빙해 고전 작품들을 프랑스어 산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겼다. 이 덕분에 소실될 위기에 몰렸던 많은 고전 작품들이 생존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엔 스트라본의 <지리지>와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가 있었다.

이렇듯 문학 및 예술 활동에 전념하던 1466년, 아라곤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인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다. 르네는 아들 장을 카탈루냐로 보내 자신을 대신해 그곳을 다스리게 했지만, 장은 1470년 12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장의 외아들이자 르네의 손자인 니콜라오스도 1473년 독살로 의심되는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여기에 헨리 6세와 결혼했던 르네의 딸 마르그리트는 장미 전쟁에서 남편과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요크 왕조를 상대로 투쟁했으나 결국 1471년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요크 왕조에 사로잡혔다. 마르그리트의 남편 헨리 6세와 아들은 살해되었고, 그녀 본인은 147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몸값을 지불해서 석방될 때까지 런던 탑에 연금되었다.

르네는 엑상프로방스로 은퇴한 뒤 1474년 외손자 르네 2세 드 로렌에게 바르를, 조카 샤를 4세에게는 앙주와 프로방스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루이 11세가 앙주와 바르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르네에게 거액의 돈을 줄 테니 두 영지를 프랑스 국왕의 직할지로 삼는 것에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르네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루이 11세의 거센 압박에 끝내 굴복했다. 그 대신 앙주 공작들은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인정받았고, 프로방스 합병은 르네가 사망할 때까지 연기되었다. 르네는 1480년 7월 10일 엑상프로방스에서 사망했고, 앙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르네의 조카 샤를 4세가 앙주 공작을 이어받았으나 자식을 보지 못한 채 1481년 사망했고, 앙주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지가 되었다.

3. 가족



[1]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왕비이자 루이 11세의 모친[2] 다만 차남 루이는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