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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69대 재무장관 로이드 밀러드 벤슨 주니어 Lloyd Millard Bentsen Jr. | |||
<colbgcolor=#025091><colcolor=#E2D14F> 출생 | 1921년 2월 11일 | ||
미국 텍사스 주 미션 | |||
사망 | 2006년 5월 23일 (향년 85세) | ||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 | |||
재임기간 | 제69대 재무장관 | ||
1993년 1월 20일 ~ 1994년 12월 22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5091><colcolor=#E2D14F> 부모 | 아버지 로이드 벤슨 시니어 어머니 에드나 벤슨 | |
배우자 | 베릴 앤 벤슨 (1943년 결혼) | ||
자녀 | 슬하 3명 | ||
학력 |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법학 / LL.B.)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
의원 선수 | 4 (하원) 4 (상원) | ||
의원 대수 | 80, 81, 82, 83 (하원)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2] (상원) | ||
지역구 | 텍사스 제15구 (하원) 텍사스 클래스 1 | ||
소속 정당 | |||
약력 | 연방 하원의원 (1948~1955 / 텍사스 15구) 연방 상원의원 (1971~1992 / 텍사스 클래스 1) 1976년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1988년 미국 대선 민주당 부통령 후보 제69대 재무장관 (1993~1994) | ||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육군[3] | ||
1942년 ~ 1947년 | |||
최종 계급 | 대령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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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제69대 미합중국 재무장관직, 미국 연방상원의원직을 지냈다.2. 생애
2.1. 청년기
1921년 텍사스 주 미션 출신. 아버지는 덴마크계 미국인으로 원래 다코타 지역에 살았지만 텍사스 주에서 크게 성공했다. 집안이 큰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로이드 벤슨은 아버지 사업의 성공으로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법학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1942년, 불과 21세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2차 대전 동안에는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B-24 폭격기를 조종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4] 총 35회동안 성공적인 폭격 임무를 수행해 우수 비행 훈장을 4번이나 수여받았다.
제대 후 고향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1948년 하원의원에 출마해 정계에 입문했다. 총 4번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샘 레이번 하원의장에게 직접 정치를 배운 레이번의 수제자였고 린든 B. 존슨의 영향도 간접적으로 받았다. 1955년 4선 임기 만료 이후에는 다시 민간으로 돌아가 로펌 활동과 사업 경영[5]을 통해 부를 쌓다가, 1970년 상원의원 출마로 정계에 복귀한다.
2.2. 상원의원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주요 상대는 같은 당의 랄프 야버러와, 6년만에 절치부심해 출마한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였다. 랄프 야버러는 현직 상원의원이었는데 여러모로 인기가 없는 정책을 추진해 인망이 없었던데다 아버지 부시를 의식해 본선전략에 치중하고 있었고, 예비선거에서 벤슨은 야버러를 "전당대회 폭력의 후보" "버싱 정책[6]의 지지자"로 묘사해 53% 대 47%로 야버러를 경선에서 밀어낸다. 본선에서 야버러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벤슨에게 비호감을 가졌지만 54% 대 46%로 부시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때도 부시를 북부[7]에서 남부로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 진보파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로이드 벤슨은 보수주의 민주당원, 남부 민주당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원이 되었고 1976년 대선에서도 대권 주자로 주목받았다. 로이드 벤슨은 진지하게 출마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남부 대의원을 통제해 부통령 후보가 되길 더 원했다. 그러나 지미 카터가 남부 대의원을 휩쓸면서 로이드 벤슨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에도 욕심은 있었는지 1984년 대선에서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유력하게 고려되었지만 결국 부통령 후보직은 제럴딘 페라로에게 넘어갔다.
2.3. 부통령 후보 출마와 그 이후
1988년 대선에서는 마침내 기회를 부여잡았다. 마이클 두카키스가 벤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낙점하며 진보적이고 젊은 북부 대통령 후보와 중도적이고 노련한 남부 부통령 후보의 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상대 대선 후보는 18년 전 자신이 낙선시킨 조지 H. W. 부시였다. 로이드 벤슨은 마이클 두카키스에 비해 훨씬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고,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는 댄 퀘일에게 상원의원님, 당신은 케네디가 아닙니다!라는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8]하지만 두카키스의 무능한 캠페인 때문에 두카키스-벤슨 조는 부시-퀘일 조에게 53 대 45로 참패한다. 심지어 로이드 벤슨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텍사스 주에서도 56 대 43으로 두카키스가 밀렸기 때문에 홈스테이트 효과도 거의 얻지 못했다. 다만, 같은 날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로이드 벤슨 자신은 압도적인 격차로 4선에 성공했다.[9][10]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은 가장 존경받는 남부 정치가였던 로이드 벤슨을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로이드 벤슨은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NAFTA 조약을 체결하는 등의 굵직한 업적을 남겼고, 클린턴의 제3의 길 노선을 충실하게 구현해 1990년대의 경제 호황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재무장관을 할 수는 없었고[11] 2년만인 1994년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클린턴은 아쉬웠는지 로이드 벤슨을 국방장관으로도 임명하려 했으나 로이드 벤슨이 스스로 이를 고사했다.
이후 로이드 벤슨은 텍사스 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2006년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rowcolor=#E2D14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미국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 | 텍사스 15구 | | 2,396 (99.99%)[12] | 당선 (1위) | 초선[13]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27,402 (100.00%) | 재선[단독] | ||||
1950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18,524 (100.00%) | 3선[단독] | |||
1952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63,767 (100.00%) | 4선[단독] | |||
1970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텍사스 | 1,194,069 (53.50%) | 초선 | ||
1976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2,199,956 (56.80%) | 재선 | |||
1982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818,223 (58.39%) | 3선 | |||
1988 | 미국 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1,809,074 (45.65%, 111명) | 낙선 (2위) | [17][18] |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텍사스 | 3,149,806 (59.20%) | 당선 (1위) | 4선[19] |
4. 여담
- 마거릿 대처는 총리직 은퇴 후 한 토크쇼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국 민주당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때 로이드 벤슨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다. 대처 입장에서는 민주당원이었는데도 신자유주의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제3의 길 노선 주창에 앞장선 로이드 벤슨에 호감이 간 모양.
- 그가 하원의원을 지냈던 선거구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히스패닉 인구가 많기 때문에(전체 인구의 약 82%가 히스패닉) 오랫동안 민주당의 텃밭이었지만[20],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텍사스 주 언론도 이를 크게 다루며 히스패닉의 정치적 보수화가 일어난 상징적 결과라고 평했다.
5. 둘러보기
[1] 로이드 벤슨 재무장관 취임으로 인해 텍사스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2] 제103대 의회 임기 도중 재무장관 취임을 위해 사임.[3] 미국 공군의 전신인 미국 육군 항공대로 복무하였다.[4] 조지 맥거번도 정확히 같은 보직(이탈리아 전선 B-24 폭격기 조종)이었지만 소속 부대가 달랐다. 맥거번은 제445포격단, 벤슨은 제449포격단 소속.[5] 동시대 텍사스 주의 정치인인 LBJ와 돌프 브리스코 주지사 등도 이런 사업들을 통해 정치 자금 밑천을 마련했을만큼 정석적인 루트였다. 아니면 존 코널리처럼 석유 재벌(Oil Barron)들과 친교를 쌓으며 후원을 받던가.[6] 흑백 학군 통합을 위해 흑인 학군의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백인 학군으로 통학시킨 강제적 인종통합 정책을 의미한다. 백인 중산층들에게 무척 인기가 없었던 정책이었다.[7] 조지 부시의 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가 코네티컷을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조지 H. W. 부시 자신도 코네티컷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석유 사업을 하게 되어 텍사스 주로 이주했다. 여담으로 그 아들 조지 W. 부시도 1978년 하원의원 캠페인 당시 상대 민주당 후보에게 공격받았다.[8] 자세한건 댄 퀘일 문서 참조. 댄 퀘일이 자신을 케네디에 빗대면서 나온 말이다.[9] 텍사스 주나 일부 주들은 주법에 따라 부통령과 상원의원으로 동시에 출마하는게 가능하다. 조 리버만, 조 바이든이 대표적 예시이다. 참고로 텍사스 주의 해당 주법 제정은 LBJ가 JFK의 러닝메이트로 나설 때 제정되었다.[10] 참고로, 이 선거는 현재까지 민주당이 텍사스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이다. 로이드 벤슨의 사임으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케이 베일리 허친슨(Kay Bailey Hutchison)이 압승했다.[11] 로이드 벤슨 자신도 클린턴의 재무장관직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4년 임기를 채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리 말해두었다.[12] 반대표가 1표 나왔다.[13] 전임자 밀턴 H. 웨스트 사망[단독] 단독 입후보[단독] [단독] [17] 대통령 후보는 마이클 두카키스[18] 두카키스를 부통령으로, 벤슨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웨스트버지니아의 불충실한 선거인단 마거릿 리치(Margarette Leach)가 대통령 선거에서 벤슨에 투표했다.[19] 1993 1.20 사임(재무장관 취임)[20] 존 낸스 가너의 지역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