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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8:10:20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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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y_Celeste_engraving.jpg
발견될 당시의 메리 셀러스트호를 묘사한 판화

1. 개요2. 사건의 전조3. 사건 발생
3.1. 배의 발견3.2. 배의 상태와 의문점3.3. 진상조사
4. 사건 이후5. 가설6. 미디어에서
6.1. 소설6.2. 만화6.3. 드라마6.4. 영화6.5. 방송6.6.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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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선 미스터리 사건. [age(1872-12-0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많은 창작물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배의 이름은 Mary Celeste[1]인데 1980년대 일본 서적을 번역한 서적에선 '마리 세레스트'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나왔다. 브리건틴 형식의 범선이며 지금도 메리 셀레스트, 메리 셀레스테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사건의 전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y_Celeste_as_Amazon_in_1861.jpg

배에 단 깃발은 유니언 잭 문서에 서술된 영국의 민간 상선기(Red Ensign)다. 캐나다 식민지의 깃발로 사용되었고 캐나다/국기 제정 이전까지 캐나다 국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메리 셀러스트호의 초기 이름은 '아마존호'였으며 군함이나 어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역선으로 건조된 범선이었다.

이 배는 1861년에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의 스펜서 섬에서 조슈아 듀이스(Joshua Dewis)에 의해 건조되었다. 첫 번째 선장 로버트 맥렐런은 소유주 중 한 명의 아들이었는데 임명된 지 9일 만에 폐렴에 걸리고 첫 항해에 나서자마자 죽었다.[2] 다음 선장인 존 너팅 파커는 어선을 들이받았고 수리를 위해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수리 중 배 가운데에서 화재까지 일어났다. 캐나다에서 유럽으로 가는 첫 대서양 횡단 항해도 재앙 그 자체였는데 영국의 도버 해협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고 결국 새 선장은 해임되었다.

시작은 좀 불길했지만 아마존호는 노바스코샤의 소유주들 하에 6년간 이윤을 남기면서 순탄한 항해를 했고 그동안 서인도 제도, 중앙 아메리카남아메리카를 왕래하며 다양한 종류의 화물을 운반했다. 1867년 폭풍으로 좌초되었다가 구조받은 후 뉴욕의 리차드 하인즈가 1,750달러에 사서 8,825달러를 들여 수리하였다.

1868년 미국 선박으로 등록되었고 그 다음 해에 '메리 셀러스트'로 개명되었다. 소유권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은 J.H.윈체스터[3]였는데 배에 관련된 저주를 의식해서인지 이름을 바꿨으며 배의 밑 부분 일부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뱃바닥 부분에 구리판을 깔고 갑판의 선실을 길게 하는 등 배를 튼튼하게 개조했다. 이로 인해 배는 마스트 2개, 길이 103피트, 폭 25피트, 288톤의 대형 선박이 되었다.

이렇게 아마존호는 메리 셀러스트호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벤자민 브리그즈(1835~1872?)가 선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리 셀러스트호는 알코올 원액을 잔뜩 싣고 제노바까지 갈 계획이었다. 1872년 11월 7일 브리그즈 선장의 지휘 아래 메리 셀러스트호는 뉴욕을 출항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메리 셀러스트호는 제노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메리 셀러스트호가 재난으로 침몰했거나 해적에 나포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3. 사건 발생

3.1. 배의 발견

메리 셀러스트호가 출항한 지 1개월이 지난 1872년 12월 4일[4] 대략 오후 1시경 영국 상선 디 그라티아호[5]조타수 존 존슨은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사이의 북대서양에서 마스트 2개를 단 수상쩍은 범선 1척을 발견했다.

디 그라티아호의 위치는 대략 북위 38°20', 서경 17°15', 포르투갈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그 배는 8km 정도 디 그라티아 호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배는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뱃머리의 삼각돛대와 앞 돛대의 스테이 세일만 펼친 기이한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다. 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 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배는 바로 메리 셀러스트호였다.

디 그라티아호의 선장 데이비드 모어하우스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알고 브리그즈 선장과 개인적으로 술도 마신 적이 있었다. 때문에 모어하우스 선장은 자기 배보다 앞서서 출발한 메리 셀러스트호가 어째서 아직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선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366m 정도까지 접근하여 2시간 동안 배를 세심히 관찰했다고 한다. 배는 항해 중이었지만 우현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항해하고 있었고 천천히 지브롤터 해협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조타석이나 갑판에 아무도 없었고 선원들은 배가 표류 중이라고 결론지었다.

디 그라티아호의 일등항해사 올리버 데보(Oliver Deveau)는 선원 몇몇을 이끌고 메리 셀러스트호에 올라탔다. 데보는 "배에 아무도 없으며, 배 전체가 완전히 젖어 엉망인 상태"라고 보고하였다. 갑판들 사이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화물칸에는 물이 1.1m 높이로 차 있었다. 작동 가능한 물 펌프가 하나 있었고 다른 2개는 분해되어 있었다. 구명정 1척이 사라져 있었으며 선원들이 매우 급하게 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배는 가라앉고 있지 않았으며 항해가 가능한 상태였다.

3.2. 배의 상태와 의문점

배 안에는 상당한 양의 물이 차 있었지만 여전히 항해에는 문제가 없었다. 물 펌프 3개가 꺼내어져 있었는데 2개는 분해된 상태었고 하나는 발견된 순간까지도 작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선장의 항해일지를 제외하면 모든 서류가 사라져 있었고 항해일지는 11월 25일까지만 기록되어 있었다. 배의 시계는 고장나 있었고 나침반은 부서져 있었으며 육분의경선의가 사라져 있었고 배의 유일한 구명정도 사라져 있었다. 배의 주 돛을 올리고 내리는 밧줄(peak halyard #)도 없었고 밧줄 하나[6]가 배에 아주 단단하게 묶여 있었는데 반대쪽은 물에 드리내려져 배 뒤쪽을 따라오고 있었으며 그 끝이 매우 해져 있었다.

화물인 알코올 통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중 9통은 비어 있었다.[7]

선원들의 개인용품들이 그대로 남았으므로 해적들이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어 보였다. 싸움이나 폭력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음식과 물도 항해하기 충분한 양이 모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어쨌든 메리 셀러스트호는 11월 25일 이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진 채 열흘 넘게 유령처럼 표류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njamin_Briggs_captain_of_Mary_Celest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rah_Briggs_wife_of_Benjami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phia_Briggs_daughter_of_Benjamin.jpg
벤자민 스푸너 브리그즈 선장 아내 사라 엘리자베스 콥 딸 소피아 마틸다[8]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브리그즈 선장과 선원 7명 외에 선장의 아내 사라와 2살 된 딸 소피아 마틸다도 타고 있었다. 모어하우스는 그들이 배를 포기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난감했다. 데보 일등항해사는 디 그라티아호에 두 선원을 파견하여 메리 셀러스트호를 지브롤터로 인도할 것을 제안했다. 모어하우스는 아무래도 기분이 불쾌해서 메리 셀러스트호를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데보가 "조난당했어도 멀쩡한 배를 예인해오면 최대 5천 파운드[9]라는 큰 돈을 보상금으로 받을 수 있고, 이 배를 그냥 놔두고 가면 나중에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모어하우스 선장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에 동의하여 배를 예인했고 6일 후 지브롤터에 입항했다. 영국의 관료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억류했고 즉시 수사에 들어갔다.

3.3. 진상조사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가 배에 걸린 보험금을 노리고 한 자작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혐의는 곧 풀렸다. 그렇게 자작극을 한다고 하더라도 배를 팔아서 오는 이득보다 못했기 때문이며 아무리 자작극이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귀신처럼 없어질 수는 없었다. 미국영국의 항구에 브리그즈 선장 일행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조사관 중 한 사람은 "메리 셀러스트호의 선원들은 디 그라티아호와 만나서 가볍게 술자리를 나누다가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으며, 디 그라티아호 선원들이 시체들을 바다에 처넣고 우연히 만난 것으로 위장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물론 디 그라티아호 측은 분노했고 "증거를 제시하라"고 반발했다. 그 어디에도 격렬하게 싸운 흔적은 없었고 모어하우스에 대한 수사에서도 돈이 그리 급하지 않았으며 빚도 없다는 게 드러났다. 결국 디 그라티아호 선원들이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결론났지만 디 그라티아호를 의심하던 조사관은 죽을 때까지 그 의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디 그라티아호 승무원들은 그를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다국적으로 이뤄진 선원들이 각자 국적에 따라 다툼이 벌어져 반란이 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선원들은 독일인 4명, 덴마크인 1명, 미국인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수가 많은 독일인들이 의심받았지만 조사 결과 선원들의 반란 가능성은 없었다. 발견 당시 도끼 자국과 더럽혀진 칼, 약간의 혈흔이 발견되었지만 혈흔은 정말 약간이라 반란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었고 특히 내부가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그 어떤 반란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브리그즈 선장은 선원들을 매우 엄격하게 선발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로만 골라 뽑았다. 1등 항해사 알버트 G. 리차드슨은 소유주 중 한 명인 J.H.윈체스터의 조카와 결혼했으며 오랫동안 브리그즈의 부하였다. 2등 항해사 앤드류 길링(1847~1872?)[10]은 뉴욕에서 태어난 덴마크인이다. 평선원 4명은 모두 프리지아 제도에서 온 독일인이며 볼케르트 & 보츠 로렌젠 형제, 알리안 마르텐스, 구티에브 구스찰이다. 선원들은 모두 베테랑이며 하나같이 성격도 유하고 범죄 전과도 없었다고 한다.

몇 달간의 수사 끝에 결론이 나왔는데 불명, 즉 '도저히 알 수 없음'이었다. 이렇게 원인 불명의 미제사건이 선상사고로 일어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한편 선주 측은 보험사를 통하여 모어하우스 선장 일행에게 구조비 5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4. 사건 이후

사건 이후 메리 셀러스트호에 탔던 선장과 선원, 선장의 가족들은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J.H.윈체스터는 사건 이후 배의 처분에 대해 고민했는데 메리 셀러스트호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윈체스터 빈터즈가 미국 보스턴에서 사고로 죽는 것을 본 뒤 그냥 처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배를 엄청난 헐값에 넘겼다. 이후 13년 동안 선주는 무려 17번이나 바뀌었고 그 때쯤 되어서는 배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메리 셀러스트호의 마지막 선장 길먼 C. 파커는 '메리 셀러스트호를 운항해서는 도저히 이득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이 저주받은 배를 보험사기의 희생물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메리 셀러스트호의 저주는 아직 계속되었으니...

파커 선장은 부츠나 고양이 사료 같은 잡동사니에 과도한 보험을 붙여 배에 가득 싣고 고의로 암초에 부딪히게 했지만 결국 침몰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애매하게 부서져서 항해만 곤란하게 되자 이번에는 불을 질러 보았지만 타고 남은 잔해마저도 꿋꿋하게 물에 떠 있었다.

결국 파커 선장은 있지도 않은 화물을 더 추가해서 터무니없는 보험을 신청했는데 그만 덜미가 잡혔다. 파커는 500달러에 인양권을 팔았고 "다른 여타 물건들과 함께 술 125통, 청어 957통, 1천 달러 상당의 식기류가 적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배와 적하는 보험회사 5곳에서 34,000달러 상당의 보험에 들었다. 당시 외양에서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면 교수형이었고 증거가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파커 선장의 재판은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배심원단 12명 중 5명은 사람을 사형대에 올려 죽이기를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배심원단은 일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점 때문에 인명사고도 없이 단순히 폐선을 침몰시킨 것만으로 사람을 사형시킨 자들이라는 시선을 받기 부담스러워했으며 스스로도 그런 일로 사형이라는 중형을 내리기 꺼렸다. 때문에 당시 이런 사기 범죄에 대해서는 배심원단이 유죄를 선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파커 선장도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3개월 후에 사망했다.

이후 메리 셀러스트호는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고 사고가 발생한 지 51년이 지난 1923년 바다에서 스스로 침몰할 수 있도록 해안에서 떠내려 보냈다.

미국에서는 메리 셀러스트호가 아이티 앞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추정한다.

5. 가설

이 사건을 두고 상당히 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나무위키에 서술된 가설들은 그 중 일부다.

그 외에도 식량으로 실었던 빵에 핀 곰팡이가 선원들의 환각을 유발시켰다는 설,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설[15]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나 물을 죄다 두고 사라졌으니 외계인이 납치했다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SF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다. 외계인 입장에서도 인간을 납치하려고 지구에 왔으면 인간이 존재하는 게 확실한 육지로 가지 바다를 뒤지고 다닐 이유가 없다. 굳이 찾자면 심심해서 지구에 놀러왔다가 바다에 배가 보이길래 낚시하듯 납치했다는 설 정도가 있는데 역시 SF에서 많이 보이는 클리셰이다. 딴 인간들은 땅에서 사는데 얘네는 바다를 떠다니니 육지에 있는 애들이랑 다른 애들인가 하는 의문에 잡아갔다는 괴담도 있다.

1980~1990년대 일본 책자를 중역한 괴담집에서는 이야기가 더 덧붙여진다.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조리하다가 주방 담당이 뭔가 급한 일이 있어 조리하던 도중에 갑자기 놔두고 사라진 것인지, 조리하고 있던 음식이 그대로 주방에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면도하다가 급한 일이 있어 나간 듯이 수염이 엉겨붙은 채로 남은 면도날도 욕실에 있었고 항해일지에는 브리그즈 선장이 급하게 갈겨 쓴 "아내 사라가..."라는 부분이 마지막이었다는 내용이 있기도 했다.

6. 미디어에서

6.1. 소설

6.2. 만화

6.3. 드라마

영국의 유명 SF 드라마 닥터후에서 1965년 6월 5일 방영된 "Flight Through Eternity"에서는 닥터 일행을 쫓아온 달렉들을 본 선원들이 겁을 먹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나온다.

6.4. 영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arlords_of_Atlantis.jpg

1978년에 만들어진 영국 괴수영화 워로즈 오브 아틀란티스(Warlords of Atlantis)에선 1890년대가 배경으로 나오는데 메리 셀러스트호의 선원들이 바다 밑에 있는 아틀란티스 제국에 납치되어 노예로 일하는 게 나온다. 한국에서는 〈환상의 섬 아트란티스〉란 제목으로 비디오가 나왔다. 연기나 줄거리는 허접하지만 수공업으로 만든 괴수들의 퀄리티가 상당하며 다양한 괴수들이 나오기 때문에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는 평가가 좋다.

6.5. 방송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12월 23일 방영분에서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는데 여기선 보험사기와 위의 가설들을 깡그리 씹어먹고 "억울하게 죽은 흑인 노예가 배에 저주를 걸어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서 코난 도일이 <콘힐>이라는 잡지에 '제이 하버쿡 젭슨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사실로 믿어 백인을 증오하던 흑인이 배를 탈취한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진 것에서 따 온 듯하다.

서프라이즈는 2002년 9월 15일 역시 관련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위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당시 방송에 의하면 메리 셀러스트호에는 한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위의 사고설을 차용했는데, 다른 점은 역시 딸을 위해 전용 갑판을 만들었고 선원 2명이 수영 시합을 벌이는 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상어떼가 나타났고, 당황한 사람들이 전용 갑판으로 모였다가 갑판이 부서져 떨어져서 상어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살아남아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이 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나온 세계상식백과라는 책에서 제기되었는데 그 책에서는 '이 설은 아벨 포스디크라는 알려지지 않은 생존자의 증언이다'라고 한다. 책에 의하면 1913년에 런던에서 제기되었다고 한다. 앞에 나온 또 다른 생존자의 증언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다만 책에서는 증언에 오류가 있음을 들며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즉, 같은 방송이 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원래 이런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이니 과신은 하지 말자.

6.6. 게임


[1] 건조 당시에는 아마존호라 불렸다.[2] 배에 올라탔다가 죽은 선장이 총 3명이나 된다.[3] 오늘날에도 뉴욕에서 해운업을 하고 있는 회사의 창업주다.[4] 몇몇 기록에서는 5일, 해양시로 따지면 4일과 동일하고 애니메이션 김전일 시리즈인 유령선 살인사건에서는 1873년으로 잘못 표기되었다.[5] 데이 그라티아(Dei Gratia) #[6] 앞서 말한 peak halyard일 수도 있다.[7] 이 9통은 붉은 오크 나무제였고 나머지는 흰 오크 나무제였는데 붉은 오크로 만든 통들은 투과성이 강하기에 알코올이 휘발하여 가스가 밖으로 나오기 쉽다.[8] 소피아(1870~1872?)는 형제로는 오빠 아서(1865~?)가 있다. 오빠 아서는 할머니가 데리고 있게 되었고 소피아만 이 배에 탑승했다#.[9] 2018년 5월 한국 돈 값어치는 3,460만 원 정도지만 1872년 기준으로는 10억 원 이상이다. 물론 5천 파운드를 무조건 주는 건 아니었고 배의 손상 유무에 따라 보험회사에서 내주는 돈의 차이가 있는데 메리 셀러스트호는 배가 조금만 고치면 될 정도로 멀쩡한 수준이라 5천 파운드를 받았다고 한다.[10] 사건 당시 25살이었다.[11] 이전 화물에서 흘려져 나와있던 연탄 가루나 공사 후 남은 나무 조각 등. 바로 이전에 연탄을 싣고 있었고 최근에 배를 완전히 뜯어고친 적이 있었다.[12] 2022년 기준으로 한국 돈으로 약 2392억원이니 150년 전에는 그야말로 2조원은 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13] '그냥 금괴만 가지고 오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겠지만 메리 셀러스트호는 선주가 따로 있다. 항구에 오면 화물조사를 하니 금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렇게 엄청난 금괴라면 정밀 조사를 받거나 더 많은 금괴를 숨기지 않았냐는 소리도 나올 만하다.[14] 만약 메리 셀러스트호의 식량을 난파선으로 옮겼다면 당연히 보험회사에서 식량을 챙긴 뒤 배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추측할 수 있기에 현명한 행동이었다.[15] 그러나 바르바리 해적 자체는 19세기 초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대대적인 공세와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으로 거의 사라진 상태였으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선박 상태가 상당히 깨끗한 편이라 신빙성은 낮다.[16] 중국에서 생산된 차를 영국으로 나르는 전문 화물선. 특히 작중 시점은 그 해 첫 나온 차를 가장 먼저 영국에 도착시키기 위해 모든 선장들이 혈안이 되있던 상황이었다. 역시 홍차[17] 작중에서도 선실에 사람은 없고 토스트와 계란이 막 조리된 상태로 발견되자 메리 셀러스트호와 똑같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 사건보다는 일본에 흔히 알려진 괴담을 재현한 것이다.[18] 단 메리 셀러스트호와 달리 시체 몇 구 정도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