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 전쟁은 에이브러헴 링컨의 북부 연합과 제퍼슨 데이비스의 통치하에 새로 형성된 미국 남부 주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일어났는데 이 전투에서 용맹과 용맹을 보여준 공로로 명예훈장이 수여된 사람은 무려 1,523명에 달한다. 대부분의 상은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 수여되었으며 특히나 2001년과 2014년에 앤드류 잭슨 스미스와 알론조 쿠싱에게는 두 번이 더 수여되기도 하였다.
1865년부터 1891년까지 벌어진 인디언 전쟁은 본래 정착민이 도착하기 전에 식민지 또는 연방 정부와 북미에 거주하는 아메리칸 인디언 인구 사이의 일련의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분쟁을 호칭하는 용어인데 이 분쟁 기간 동안 명예 훈장은 426명의 군인에게 수여가 되었으며 이 중 13명은 사후에 전투에서 용감함과 용맹함을 보여준 자들에게 수여되었다.
1871년에 벌어진 신미양요 당시에 수여되었던 인물들로 공적이 뛰어났던 15인에게 수여되었다. 미국의 조선 원정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미국의 군사 행동이었으며 주로 강화도와 그 주변에서 일어났다. 미군 원정군이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이유는 한국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파견된 미국 외교 사절단을 지원하고 제너럴 셔먼호 라는 상선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조선 정부의 고립주의적 성격과 미국인들의 주장은 양당 간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으며 결국 미국은 목표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1898년 4월에 시작된 스페인과 미국 사이의 군사 분쟁으로 전쟁도중인 8월에 모든 적대행위가 중단되었고 12월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을 막을 내렸다. 해당 전쟁은 당시 미국의 팽창주의적 정서가 정부가 스페인의 남은 해외 영토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캐롤라인 제도)를 목표로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지만 스페인의 독립을 위한 쿠바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미국의 요구가 거절된 후 시작되었다.
미국은 아바나에서 친 스페인 반군인 '보룬타리오스'의 폭동으로 군함 USS 메인호를 투입할 이유가 생겼는데 미국의 이러한 조치는 높은 국가적 관심을 나타냈다. 이때 미국 국민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된 것은 USS 메인호의 폭발과 스페인의 광범위한 만행을 폭로하는 선정주의적 보도인 "노란 저널리즘"이 미국 여론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 해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발발한 지 109일 만에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이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10명의 사람들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다.
미국-필리핀 전쟁은 미국과 제1 필리핀 공화국을 수립한 필리핀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무력충돌로 1899년에서 1902년 사이에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반대하는 필리핀의 정치적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1902년 7월 4일 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이 선언된 동안에 미군은 1913년까지 필리핀 육군의 잔당들과 다른 저항단체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을 계속했고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소탕 작전을 전쟁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이때 86명의 병사들이 해당 전쟁에서의 분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이때 육군에서 70명, 해군에서 10명, 해병대에서 6명이 수여되었는데 이 중에서 4개는 사후에 수여되었다. 수상자들 중에는 19대 대통령인 러더퍼드 B. 헤이스의 아들인 웹 헤이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헤이스와 두 명의 저명한 해병대 장교인 베어스 히람 1세, 데이비드 딕슨 포터가 받았다. 베어스는 적진 뒤에서 장거리 정찰 순찰을 이끌었으며 후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령으로 참전하여 부상을 입기도 했다. 포터는 뛰어난 군인 집안 출신이었고 후에 소장으로 예편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리핀 스카우트의 일원인 니스페로스는 아시아인 최초로 명예훈장을 수상했는데 미국을 도와서 부상 후에도 전투를 계속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사모아 내전은 19세기 후반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에서 발생했다. 사모아 내전은 독일, 영국, 미국 간의 일련의 갈등으로 1899년 섬내의 정당들의 분열로 끝이 막을 내렸다. 마지막 사건은 제2차 사모아 내전이었으며 특히나 제 1차 사모아 내전은 8년동안 지속되었다. 전쟁 중인 사모아 정당들은 독일, 영국, 미국에 의해 무기, 훈련 그리고 때로는 전투 병력을 공급받았으며 이들 3강의 서구 열강들은 사모아를 석탄 화력선의 급유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나라들은 유럽에서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1870년 이후부터 미청구 영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사모아를 원하기도 했다. 해당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기록한 단 4명에게 수여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니카라과 전역과 함께 명예 훈장을 받은 군인들이 제일 적은 전투이기도 하다.
1899년 11월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운동은 서양에서 복서 반란이라고도 부르는데 중국의 무역, 정치, 종교, 기술 등의 분야에서 외세에 대항한 중국 의화단들의 봉기로 일어났다. 이들은 자신들이 수련한 무예와 역술로 인해 서양인들에게는 권투선수라고 불렸으며 중국 북부에서 부터 외국인 혐오, 반외국인, 민족주의 농민 기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철도를 건설하고 풍수지리를 위반한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들과 중국에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기독교인들을 공격했으며 1900년 6월에 의화단들은 베이징을 침공했고 이때 230명의 비중국인들을 죽였다.
봉기의 일환으로 수만 명의 중국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산둥성과 산시성에서 살해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기독교인인 쑨원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때 청나라 정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외교관, 외국 민간인, 군인들과 일부 중국 기독교인들은 공사관 구역으로 후퇴하여 다국적 연합군이 2만 명의 병력들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급파할 때까지 55일 동안 버텼다. 중국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추가적으로 더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서기 1900년 이후의 개혁은 청나라 말기와 근대 중화민국 수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때의 반란 기간 동안 총 59명의 미국 군인들이 명예 훈장을 받았다. 이 중 4개는 육군 장병들이 받았으며 22개는 해군 장병들이 받았으며 나머지 33개는 해병대에게 수여되었다. 특히 해리 피셔 (Harry Fisher)는 이 전쟁으로 인해서 사후에 훈장을 받은 최초의 해병이자 유일한 사후 수상자였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일어난 필리핀 전쟁이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잔당들은 1906년에 모로인들을 이용해서 조직을 다시 재규합하는데 성공한후 무려 1911년까지 활동을 지속해왔는데 필리핀 중앙정부는 미국에게 파병을 요청하여 이에 육군과 해군은 1910년과 1911년에 걸쳐서 2천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한다. 특히 1911년 9월 24일에는 모로인들로 구성된 반군들은 미국에게 격렬하게 저항해왔는데 이로 인해서 미군은 큰 병력손실을 가져왔다. 이때 전투에서 큰 두각을 나타낸 6명에게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는데 특히 미군 정찰대 소속의 필리핀인인 호세 B. 니스페로스는 동남 아시아인 최초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여기서 부터 20세기로 넘어오는데 1914년 4월 9일 탐피코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베라크루즈 항구 점령은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이 사건은 당시 진행 중인 멕시코 혁명과 관련하여 멕시코와 미국의 외교 관계가 좋지 않은 가운데 발생했었다. 이때 조지프 다니엘스 해군 장관은 베라크루즈 점령전 참가자들에게 56개의 명예 훈장을 수여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그 이전 또는 이후의 단일 행동에 대해 가장 많은 수가 수여되었다. 이때 육군 1명, 미 해병대 9명, 해군 53명 등 총 63명의 군인들이 명예훈장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주로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적인 군사 분쟁으로 약 2천만 명의 군과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하여 4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6천만 명이 넘는 유럽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은 일련의 동맹을 활성화시켜 전쟁 선언의 연쇄반응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서 약 한달여 만에 유럽의 많은 지역이 공개전 상태에 빠졌다. 이 전쟁 동안에는 126명의 장병이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명예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 5명의 해병들이 육군과 해군 버전의 훈장을 받았다.
미국은 1916년부터 1924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을 점령했는데 특히 1917년 5월, 윌리엄 캐퍼턴 제독은 해군 폭격으로 도시를 위협함으로써 아리아스를 산토 도밍고를 떠나도록 강요했다. 이때 미 해병대가 두 달 만에 침공하여 국가를 장악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이 이곳에 군사 정부를 수립하였다. 해병대는 공화국 대부분의 지역 (동부 지역 제외)에서 질서를 회복했으며 이로 인해서 국가의 예산은 균형을 이루고 부채는 줄었으며 경제 성장은 재개하는 인프라 프로젝트를 열었다. 이로 인해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지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로를 만들었으며 특히 여기에서 결성된 전문 군사 조직인 도미니카 경찰 경비대는 권력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벌였던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여기에서 큰 공을 세운 3명이 명예 훈장을 받았다.
미국은 1909년부터 1933년까지 (실질적로는 1912년부터) 니카라과를 점령하고 그 전에 여러차례 이 나라에 개입했다.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을 제외한 어떤 국가에 의한 지협 운하의 건설을 막고 끝없는 내전을 멈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니카라과는 1916년 차모로-브라이언 조약에 따라 준보호국 지위를 차지했고 점령은 니카라과의 반란군인 아우구스토 시져 샌디노가 미군에 대항하는 게릴라 조직을 이끌면서 발생했다. 게다가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점령을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고 끝내 철수하였다. 이 기간 도중에 발생한 전쟁에서 단 2명에게 수상하였다.
니카라과 군과 함께 순찰 중 총류탄이 땅에 떨어져 격발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총류탄을 집어듬. 총류탄을 멀리 던지려 했지만 손 안에서 폭발해 오른손을 잃고 중상을 입음. 일행 중 트루스델 상병을 제외하면 중상자나 사망자는 없었음.
제2차 세계 대전은 세계적인 군사 분쟁으로 갈등은 두 개의 분리된 이념으로 촉발되었다. 첫 번째는 아시아에서 시작된 1937년 제2차 중일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1939년 유럽에서 시작된 독일과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세계적 갈등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을 연합국과 추축국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군사 동맹으로 분열시켰으며 무려 1억 명이 넘는 군 병력을 동원해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전쟁을 치렀고 참전자들을 '전적 전쟁' 상태로 만들어 민군 자원의 구분을 지웠다. 이것은 전쟁의 목적을 위해서 한 국가의 경제적, 산업적, 그리고 과학적 능력의 완전한 활성화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민간인만 해도 6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여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분쟁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재정적 비용은 1944년 1조 달러로 추산되고 있어서 이 전쟁은 자본 지출과 인명 손실 모두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이 되었다.
이 분쟁 기간 동안 총 472명의 미군 병사들이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그 중 273명이 사후에 훈장을 받았다. 특히 해병대에서는 총 42개의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수여된 전체 훈장의 9%에 해당한다. 이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의 15개, 이오지마 전투 때의 27개에 해당하는 수치로 또한 총 21개 (제2차 세계 대전 명예 훈장의 4.5%)의 경우에는 미국 제 100보병대대와 제 442연대 전투단원들에게 6개의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수여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의 활동으로 미국 해안경비대인 더글라스 앨버트 먼로는 유일하게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1948년 이후 공식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면서 촉발되었다. 그 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의 개입으로 분쟁이 확대 되었으며 주요 적대행위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한국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의 기간이었다. 전쟁 초기에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유엔의 대응을 '경찰의 조치'라고 불렀으며 이 전쟁은 이전에 일어났더 제 2차 세계대전과 이를 계승한 베트남 전쟁에 비해서 미국의 주목을 덜 받는 20세기의 큰 갈등이기 때문에 통칭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쟁 동안에 총 146개의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미국 전쟁이라고도 알려진 베트남 전쟁은 1959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발생했다. 베트남 분쟁이라는 용어는 1959년에서 1975년 4월 30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 되었으며 이 전쟁은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북베트남)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사이에 벌어졌다.
베트남 전쟁부터 그 후 12개월 동안 234개의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고 1978년부터 32개가 추가로 수여되었다. 총 268개의 상 중 174개는 미 육군, 15개는 미 해군, 57개는 미 해병대, 14개는 미 공군에 수여되었다. 전쟁의 첫 수상은 여러명의 부상당한 군인들을 구조하고 응급 처치한후 적군에 대항하는 그룹을 이끈 로저 돈론에게 주어졌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밀턴 L이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한후 자신을 희생한 올리브 3세, 소총 사격과 수류탄으로 적을 공격한 후 사망한 라일리 L. Pitts는 전쟁의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교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또한 토마스 베넷은 양심적인 병역거부자로서 의무병으로서의 행동으로 인해서 훈장을 받았다. 또한 군종병의 경우에는 빈센트 R을 포함하여 총 세명이 수여받기도 하였다.
USS 리버티 사건은 6일 전쟁 중이던 1967년 6월 8일 이스라엘 제트 전투기와 모터 어뢰정이 중립국인 미국 해군 첩보함 USS 리버티호를 공격한 사건으로 이 공습으로 34명이 숨지고 170여 명의 승무원이 다쳤으며 배는 심하게 파손된 사건이다. 이날 영웅적인 행동을 보인 단 1명인 윌리엄 L. 맥고나글이 수여받았다.
첫 번째 공습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다리가 큰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치료를 위해 자리를 떠나는 것을 거부하고 선박 방어를 지휘함.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공격을 계속할 때 그는 남아서 배를 방어를 지휘했으며 홍수와 화재의 통제를 감독하고 사상자들을 돌보았으며 그후에도 전장에 남아 17시간 이상 그의 배를 계속 지휘했음.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 알려진 전투로 해당 작전에서 큰 무공을 보인 저격수인 2명에게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1993년 10월 3일에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미군 레인저와 델타 포스 대원들은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측근들을 사로잡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날 아이디드를 위시로 한 민병대와의 전투에서 MH-60 블랙호크 헬기 2대가 격추된다. 마이클 듀란트 준위장이 조종하는 두 번째 블랙호크가 추락하자 게리 고든과 랜디 슈가트는 추락한 블랙호크 인근에 투입되었다.
이후 고든과 슈가트는 적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는 격추된 블랙호크에 도달한 후 기체에서 마이클 듀란트를 근처 가옥으로 옮기고 추락지를 방어하기 시작한다. 이후 약 1시간 동안 이어진 교전에서 게리 고든과 랜디 슈가트는 전사한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인 듀란트는 인질로 잡혔는데 듀란트의 증언에 따르면 소말리아인 25명이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2001년 10월 7일에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9.11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영국, NATO 동맹국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의 시작이었는데 침공 목적은 오사마 빈 라덴을 점령하고 알카에다를 파괴하며 알카에다에 지원과 안전을 제공한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 이래로 18명의 미국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활동으로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그 중 4명이 사후에 훈장을 받았다. 육군 하사 제러드 C. 몬티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부상당한 군인을 구출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훈장을 받았고 해군 중위 마이클 P. 머피는 본인의 부대보다 규모가 큰 반란군에 대항한 행동을 하다가 목숨을 희생한 것으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전쟁 이후로 11명의 생존자들이 명예 훈장을 받았고 미 육군에 12개, 미 해군에 3개, 미 해병대에 2개, 미 공군에 1개의 상이 수여됨으로 인해서 총 20명에게 수여되었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3월 20일부터 미국이 주도하고 호주, 폴란드의 소규모 파병부대의 지원을 받는 미국과 영국으로 구성된 다국적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분쟁으로 총 7명의 군인들이 이라크에서의 활동으로 인해서 명예훈장을 받았다. 5명은 육군에서 1명은 해병대에서 그리고 1명은 해군에서 받았다.
첫 수상자는 2003년 4월 4일 적군의 제지를 받고 다른 부상당한 군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한 행동을 보인 폴 레이 스미스 (Paul Ray Smith)이며 나머지 다섯명은 데이비드 벨라비아 하사, 트래비스 앳킨스 하사, 해병대의 제이슨 던햄 상병, 육군의 로스 A 맥기니스 병장과 해군의 마이클 A가 받았는데 데이비드 하사를 제외한 4명은 폭발물로 인해서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바쳐서 목숨을 잃은후에 추서되었다. 마지막 수상자인 알윈 카셰 병장은 2021년 12월 16일 이라크 전쟁에서의 영웅적 행위로 사후에 훈장을 받았다.
2014년 10월부터 일어난 작전으로 이라크에서의 작전과 시리아에서의 작전을 포함하여 리비아에서의 작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슬람 국가에 대한 국제전쟁 (IS 또는 ISIL)에 대한 미군의 작전명이다. 2018년 9월 18일까지 미 육군 제 3기갑군단은 합동 태스크 포스가 주도한 내재적 결의 작전 (CJTF-OIR)을 담당했으며 나중에는 제 18공수 군단으로 대체되었다. 이 작전은 주로 미군과 영국군이 현지 동맹국, 특히 이라크 보안군과 시리아 민주군 (SDF)을 지지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데 전투 지상군, 대부분 특수부대, 보병 및 포병도 참가하였다. 공습 중 70%는 미국 군대가 주도했으며 20%는 영국이, 나머지 10%는 프랑스, 튀르키예, 캐나다,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호주, 요르단이 수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전쟁인데 이 작전으로 인해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단 1명뿐이다.
이슬람 대테러 단체 쿠르드 CTG (Counter Terrorism Group)와의 공동 작전으로 이라크 포로 70명을 구출했으며 적의 포화를 받는 동안 모든 인질들이 밖으로 나와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미군 전사자인 델타 포스의 조슈아 휠러 상사와 함께 무너지는 건물에 무려 세 번이나 뛰어들어서 수여됨.[5]
[1] 현재는 없어진 해군 수병 계급. 훈련병과 이등병 사이에 있는 계급으로 직역하면 '땅인간'인데 이는 아직 군함을 타 본적이 없는 수병#을 의미한다. 군함 생활을 1년 하면 자동으로 이등병으로 진급했다.[2] 1921년 4월 15일에 악성 말라리아로 향년 25세로 사망했는데 아이티 전역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던 8인중에 제일 먼저 단명했다.[3] 1986년 8월 23일에 향년 93세로 사망함으로써 아이티 전쟁으로 명예훈장을 받은 8명중에서 제일 오래 장수했다.[4] 수여 당시 계급으로 현재는 원사로 근무하고 있다.[5] 1993년 모가디슈 전투에서 사망한 게리 고든 상사와 랜디 슈가트 상사에 이어 세 번째 델타포스 수상자인 그는 생존해 있는 델타포스 멤버로 2020년 9월 11일에 수여 받았으며 내재적 결의 작전이 실행되고 나서 처음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