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별 미스터리 역사 관련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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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세계사의 미스터리의 아프리카 부분을 서술한 문서.1.1. 북아프리카
- 관체족: 오늘날의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 살던 토착민들로, 베르베르인과 동계의 민족이라는 것을 빼면, 이들의 전반적인 문화나 생활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17세기 이후로 관체족은 모두 절멸했지만, 현대 카나리아 제도 주민들의 혈통에 관체족의 피가 섞여있다. 특이하게도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지 않았던 몇 안되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 중의 하나이다.[1]
- 귀마르의 피라미드: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들인 관체족이 세운 피라미드형의 건축물로, 원래 고고학계에서는 관체인들이 해풍을 막기 위해 조성한 바람막이 벽이나,[2] 농사짓다가 골라져 나온 돌들을 버린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토르 헤이에르달이 귀마르의 피라미드들의 서쪽 계단은 동짓날 아침의 일출 방향을 따라 조성되었음을 밝혀내어, 이 피라미드가 당대의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지었음을 밝혀내면서, 관체족들이 이를 어떻게 지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관체족이 체계적인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중앙집권제 국가를 세운 것도 아니라서[3] 피라미드의 건축 배경이나 건설 방식은 상당한 의문을 낳고 있다.
- 바다 민족 : 람세스 2세부터 그의 아들 메렌프타(Merenptah), 그의 손자 람세스 3세에 이르기까지 3대, 약 120년에 걸쳐 이집트를 공격해왔던 해상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후의 기록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되며 이전에는 단순 해적과 비슷한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들이 상당한 육지적 기반도 있는 해양국가들의 연맹체라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람세스 2세 때 기록에서는 셰르덴(Sherden), 셰클레시(Sheklesh), 루카(Lukka), 투르샤(Tursha) 등이라고 그들의 국가 이름이 명시돼 있고 람세스 3세 때의 기록에는 더 많은 종족 이름이 나오는 것 이들의 세력이 더 커졌다는 걸 시사한다. 문제는 이들의 국가와 민족이 어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의 선진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사람 혹은 그리스 반도에서 온 도리아인들에 의해 크레타 섬에서 쫓겨난 사람들일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바다 민족 중 하나인 셰르덴이 사르디니아 사람이라는 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며 지중해 서쪽, 당시까지는 후진지역으로 간주됐던 서남부 유럽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집트 제18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네페르티티의 최후: 네페르티티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인 아케나톤의 왕비인데, 남편의 사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의문이다. 한때는 아케나톤이 사망하기 직전에 궁을 나왔다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그녀가 투탕카멘 왕의 장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있어서 이 설은 부정되고 있고, 현재는 스스로 파라오로 즉위하고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녀의 바뀐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고[4], 그녀의 미라도 발견되지 않았다[5]. 일단 주류 학계는 그녀가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 투탕카멘의 사인: 이집트 제18왕조의 왕인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가 사망한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무수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는 그의 미라의 두개골에서 갈라진 흔적이 발견되어서 그가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후속 연구에서 투탕카멘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두개골의 갈라진 부분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단순한 오해로 결론났다[6]. 그래서 오늘날에는 미라의 모습을 토대로 그의 생전 모습을 복원한 결과, 오랜 근친혼으로 인한 선천적인 장애가 있음이 밝혀져서, 현재 주류 학계에서는 이것이 그의 사인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고 있다. 진짜 미스터리인 부분은 투탕카멘의 죽음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게 그의 장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가 불편한 몸으로도 꽤 능동적으로 통치를 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7], 알려지지 않은 어떤 대외 활동 중에 당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8]과, 선술한 장애때문에 생긴 합병증으로 급사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확실한 해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이집트 선왕조와 관련된 미스터리
- 선왕조 시기의 파라오들의 이름: 이집트 선왕조 시기의 기록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해당 기록들이 새겨진 석판이 마모되거나 풍화되는 등으로 손상이 극심해진 탓에 제대로 판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더군다나 그나마 이름을 식별할 수 있는 이들도 이 당시에 쓰였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표의문자였기 때문에, 이름의 발음은 대략적으로도 알려져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파라오의 이름을 해당 문자의 모양을 따서 전갈왕 2세나 크로커다일, 핑거 스네일 등으로 칭하거나, 판독이 가능한 부분의 발음만 따서 아, 우 등으로 부르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각 파라오들의 정체나 왕조의 계보같은 것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 탓에, 고대 이집트의 초기 역사를 분석하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생겼다.
- 전갈왕 2세: 영화 스콜피온 킹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고왕국 시대 이전의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그저 전갈 기호로만 묘사되고 있다. 일단 이집트가 통일된 초창기에 전갈왕 2세 - 나르메르 - 메네스 - 호르아하 순으로 통일 이집트를 통치한 군주들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동일 인물로 유력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나머지도 같은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 팔레르모 석에서 언급되는 파라오들: 팔레르모 석은 이집트 선왕조 시기에 하이집트에서 제작된 비석이며, 오랜 세월로 인해 비석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서 여기에 기록된 파라오의 이름들 중에서는 3대 파라오인 우에서 12대 파라오인 아까지만 확인되고 있다. 헌데, 이들 파라오들의 치세를 기록한 부분이 발견되지 않아서 이들의 상당수, 혹은 전원이 실존 인물이 아닌 전설상의 군주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들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소실되어서 알 수 없을 뿐이라는 반론도 제기되어 있다. 실제로 이집트 선왕조 시기의 파라오들은 이집트 상형문자를 잘못 해독해서 실존 인물로 와전되었거나, 전설 상의 군주일 뿐이라는 추정이 제기된 이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다.
- 하와라의 미궁: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가 자신의 장제전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의 거대한 미궁. 헤로도투스뿐만 아니라 스트라보 등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과연 실존하는 유적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 중이다. 미궁이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집트 하와라 지역을 유력한 장소로 본다.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로 유적이 있을 만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까지 찾아냈지만 이집트 정부가 조사를 불허하여 지금까지도 고고학적 조사가 없었던 탓에 실존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 티니스: 이집트 초기왕조의 수도로서 도시의 존재 자체는 고대 기록에서 검증이 되지만 아직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전갈왕 2세를 비롯하여 수수께기 투성이인 이집트 초기 왕조의 의문을 풀 열쇠로 추정되고 있기에 수많은 학자들이 티니스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말라가시인의 마다가스카르 이주: 언어학, 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말라가시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 널리 분포된 말레이-폴리네시아인들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는데, 이들이 어떻게 바닷길이 개척되기 훨씬 이전에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의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마다가스카르 섬에 상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밝혀지지 않았다. 말레이인은 전근대 시기부터 이미 캐터머런이라는 전통 배[9]를 이용해 태평양을 항해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이미 11세기에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적도 있으므로, 마다가스카르도 이런 배를 타고 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배로도 당시에 동남아시아에서 동아프리카 방향으로 인도양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0]. 무역풍이라고도 불리는 인도양의 편서풍 때문에 서기 7, 8세기 경에서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인도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가 만들어졌는데, 기원전의 말레이인들이 이게 가능했을지가 의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말레이인의 진출도 태평양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 중세 이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 동시대의 이집트가 이집트 상형문자와 여기서 파생된 신관 문자 및 민중 문자를 개발하여 대대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아서 그 역사를 소상히 알 수 있는 데 반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역사는 자체 문자가 없어서 알려진 바가 많이 없다. 심지어는 13세기까지 존재한 와가두 제국[11]의 역사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고,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던 누비아 문명에 대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으며, 짐바브웨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한 그레이트 짐바브웨 또한 토착민 문명이 세웠다는 것 말고는 관련 정보가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12] 여기에 더해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민족들의 대부분의 조상격인 반투족들이 어떻게 발전한 농업 기술을 보유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이 중앙아프리카, 서아프리카에서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까지 도달했을 때 이들의 숫자가 기본이 수천 명은 된 것으로 보이고, 목축만으로 부양하기 힘든 이 정도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수준 높은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전해지나, 이런 기술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사막화되기 이전의 사하라 지역도 농사가 불가능한 사바나 지역이었는데 발달된 농업 기술을 얻게 된 경위로, 학자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농업 기술을 얻었다는 설과 동쪽의 이집트인들이랑 접촉해서 농업 기술을 배워갔다는 설이 있다.[13] 역사학자들에게 아프리카는 아직도 미지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다.
- 노크 문명 : 아프리카 서부 나이지리아 니제르 강과 베누에 강 사이 15만㎢에 이르는 지역의 고대 문명으로, 이집트 문명만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던 아프리카의 고대사를 수정하게 한 문명이다. 노크 일대에서 다량의 철 찌꺼기와 송풍구, 항아리, 조각상, 붉은 황토, 석영으로 만든 망치, 숯 덩어리, 압연 한 흔적이 있는 철그릇들 및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곡류의 하나인 진주 기장(pearl millet)이 탄화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로 추정했을때 노크 문명은 철기 시대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농경민 문화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료가 없어 어떤 민족이 세웠는지, 얼마나 존속되었고 어떻게 멸망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1]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몰타인이나 에티오피아인, 에리트레아인, 레바논의 아랍인은 기독교를 믿는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계열 민족들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을 지언정, 일단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 이들이긴 했다. 그러나 관체족은 그것도 아니고, 절멸 직전까지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고수했다.[2]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의 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한국의 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3] 관체족이 전멸할 때까지 카나리아 제도는 계속 부족 사회를 유지했으며, 거대 규모의 피라미드의 건축을 명령할 정도의 강력한 지배자가 나온 적도 없었다.[4] 아케나톤 사후의 기록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의 유사성말고는 이 사람이 네페르티티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다.[5] 네페르티티 본인 또는 그 친족으로 추정되는 미라는 발견되었다.[6] 애초에 투탕카멘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긴 했으나, 그 배경에서 자신의 장모이자 계모인 네페르티티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즉위했다는 점과 더불어, 즉위 후에 그가 능동적인 통치를 했다는 점, 그의 파라오위를 노릴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인 아이가 그의 사후에나 투탕카멘의 이복누나이자 왕비인 안케센나멘과 결혼하면서 즉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살아생전의 투탕카멘은 생각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적도 없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면서, 그가 살해당했다는 설은 힘을 잃었다.[7] 투탕카멘의 치세 중에 누비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노예나 기타 진귀한 야생동물 등의 물품을 조공으로 받은 기록이 있고, 그가 궁궐 내에서 무예를 익힌 기록도 확인되었다.[8] 투탕카멘의 미라에서 심장이 제거되어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이다. 이는 심장이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미라 제작 시에도 심장을 남겨두던 당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으로, 당시 미라 제작자들이 그의 심장을 보존하는데 실패하여 그들의 내세관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심장이 손상될 정도의 사인으로 사고사를 거론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 중에는 투탕카멘이 전차 경기를 하던 중에 전차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사고사했다는 가설들의 공통점은 투탕카멘이 가지고 있던 선천적 기형때문에, 통상의 비장애인들이 당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다.[9]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그것이다.[10] 현재의 추정에 따르면, 말라가시인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일대에서 발원한 민족으로, 중도에 아라비아 반도나, 인도, 몰디브 등에 상륙한 바 없이 인도양을 서쪽으로 직접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기술로 인도양의 편서풍을 어떻게 뚫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11] 흔히 가나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이다.[12] 11세기 경의 아랍인 상인들이 오늘날의 짐바브웨까지 내려가서 관련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갔던 바이킹 탐험가들 수준으로 일회성 방문에 그친 터라, 문화적으로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로는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인되었다.[13] 일단 주류 학계에서는 서아프리카가 이집트에서 너무 멀다는 점을 들어 반투족들 스스로가 농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