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 중 아시아 역사 관련 정보를 정리한 문서.2.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2.1. 중화권
편의상 중국사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한 위치에 있었거나 중국사와 접촉한 적이 있던 민족 및 국가들도 기재한다. |
- 자금성의 최초 설계자: 현존하는 중국의 궁궐 중 가장 큰 규모인 자금성은 그 최초 설계자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데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 판첸 라마 11세의 행방과 생사 여부: 1959년에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고 지배하기 시작한 후 인도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 14대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판첸 라마 10세는 그대로 티베트에 남았는데 그가 입적한 후 게둔 최키 니마가 판첸 라마 11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에 중국공산당은 게둔 최키 니마를 납치해서 숨겨 버린 뒤 친중 성향의 기알첸 노르부를 11대 판첸 라마로 옹립했다.[1] 당연히 절대 다수의 티베트인들과 14대 달라이 라마, 전세계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기알첸 노르부의 판첸 라마 즉위를 부정하고 있으며 사라진 정통 판첸 라마인 게둔 최키 니마의 행방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하지만 중국공산당 측은 여전히 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 갈족: 오호십육국시대 당시 중국의 북부를 침공하여 후조를 세운 정체불명의 민족들이며, 후조가 멸망할 시에 염위를 세웠던 염민[2]에 의해 종족의 대부분이 학살당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역사학자들은 갈족의 정체를 코카소이드계나 튀르크계[3], 또는 예니세이계[4]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갈족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기록[5], 혹은 그들의 유골같은 것도 전혀 발견된 적이 없어서, 이들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 건문제: 사망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고,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 광서제의 죽음: 당시에는 병사로 발표되었지만 2008년 중국의 조사결과 비소가 발견되어서 독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의심가는 인물로는 서태후와 위안스카이가 있으나 확실치 않고 황위가 고작 3살인 푸이에게 넘어가고 서태후도 이틀 후 급사하였다. 그나마 개혁 의지가 있던 그의 죽음으로 청나라는 그대로 멸망하게 되었다.
- 노자: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잉태 후 81년 만에 출생했고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를 지낼 때 공자와 회견했으며, 주나라를 떠나는 길에 관윤을 만나 《도덕경》을 저술하여 전해 주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마천의 기록에 따른다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인물로 간주되지만 오늘날에는 노자가 공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지, 나아가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노자가 저술한 《도덕경》 역시 노자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인물이 노자의 이름으로 펴내거나 가탁(假託)한 것인지 알 수 없다.
- 당항족 - 서하를 세운 티베트계 유목민족으로 몽골에 의해 제노사이드를 당해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 이후에도 몇 년동안 그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으로[6] 단순히 몽골인에게 학살당해 망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이들의 최후에 대해서는 시간에 따라 차츰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어 흡수되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창족에게 동화되어 재흡수되었다는 설, 몽골 제국에 의한 제노사이드를 피해 각지로 흩어지면서 각자 현지의 민족들에게 동화되었다는 설[7], 한족에게 동화되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 대약진 운동의 실제 피해 규모: 국공내전 이후 중국의 최대 재앙 중 하나로 마오쩌둥의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망언으로도 유명한데, 사망자 수치가 엄청난 것과는 별개로 상황 종료 당시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지 않아서 실질적인 피해 규모를 특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중국 당국이 해외의 정보 수집을 막은게 원인[8]이었는데 처음에는 미국 반공학자들 조차 200만명 밖에 제시를 안했으나 이후 홍콩, 대만 등지에서 2000만명이라는 연구 결과를 낸 것을 시작으로 피해 수지가 증가하기 시작해 현대에는 대략 40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외에서 내린 결과라 확실하지 않은데다[9] 이후의 중국 당국 측 통계도 왔다 갔다 하는 등[10] 완벽하게 결론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기근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명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자연적 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어디까지가 마오쩌둥의 책임인지 물으려 하면 1500만에서 5500만까지 더 널뛰기한다.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협력했던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국민당의 원로 정치인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한 것지만, 정작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가 밝혀진 바가 없다.[11] 국민당 좌파가 이 사건으로 큰 이득을 봤으나 랴오중카이 본인이 좌파라는 점에서 이들이 배후일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또한 그의 죽음이 우파가 숙청당하는 빌미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우파도 배후일 가능성은 없는지라, 현재까지 이 사건의 진실은 베일에 싸인 상황이다.
- 마속의 최후: 《삼국지연의》및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통해 가정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삼국지》〈촉서〉9권 마량전에는 투옥 중에 사망한 걸로, 11권 상랑전에는 상랑이 마속의 탈주를 묵인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마속의 최후에 관한 의문점을 낳고 있다.
- 만력제의 폐정 원인: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30여 년간 황제로서의 소임을 방기하였고, 그 결과 명은 점차 쇠망을 향해 치닫게 되었는데, 만력제가 정무를 폐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만력제에게 등이 굽고 한쪽 다리가 짧은 기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므로[12] 이 때문에 그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국정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으리라는 추정이 주류 역사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 베이징 원인 해골의 행방: 1927년 베이징 근교 저우커우디엔(周口店)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北京猿人, Sinanthropus Pekinensis)의 해골이 중일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소실되었다면 어떻게 소실되었는지는 전쟁이 끝나고 70여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산해경: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거의 2000년 동안이나 계속 연구되었지만 지은이뿐만 아니라 그 내용 역시 오리무중이다. 책 자체만 남았다.
- 은-주 역성혁명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와 기원: 주나라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현대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와도 엮여 있는 떡밥이며, 나아가서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중들이 고대에 어떻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논쟁으로도 이어진다. 은주 역성혁명이 있던 시기의 주나라와 상나라의 구성 민족은 모두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민족이었음은 틀림없지만 주나라가 처음부터 화하족의 한 부류였는지, 아니면 본래 이민족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불분명하며[13] 다만 이들이 원래는 말 등의 가축을 길러서 살아가는 목축민들[14]이었다는 점에서 일단 당대에는 상나라와 얼마나 가까운 민족이었느냐와는 별개로 거의 이민족 취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15].
- 조위 황실과 관련된 미스터리
- 문소황후 견씨의 사망 경위: 조위의 초대 황제인 조비의 정실인 문소황후 견씨는 계후인 곽여왕이 총애를 받기 시작하자, 갑자기 황후에서 폐서인되고 끝내 조위의 옛 수도인 업의 궁궐에서 홀로 사망했다. 문제는 그녀가 사망에 이른 경위로, 정사인 문소견황후전에서는 곽여왕과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의 두 딸들이 각각 조비의 비빈이 되자, 이를 한스러워하는 말을 퍼붓다가 이를 듣고 분노한 조비의 명령으로 자결을 강요받았다고 쓰여있다. 그런데 위략에서는 이 과정에서 곽여왕이 문소황후 견씨를 참소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자치통감에서는 한술 더 떠서 곽여왕의 참소를 듣고 조비가 직접 사자를 보내서 견씨를 사사했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위서에서는 참소같은 건 없었고, 문소황후의 죽음을 병사라고만 서술하고 있어서, 각각의 기록이 크게 다르다. 이 중 위서의 내용은 조위 황실을 띄워주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가까워서 무시당하는 만큼, 나머지 기록을 토대로 실제로 문소황후를 참소한 자가 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문제는 그게 곽여왕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심지어 그녀의 등장 이전에도 견씨가 조비의 총애를 지속적으로 잃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여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 자세한 내막이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여기서부터는 검증할 수 있는 기록이 더 나오지않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지않다.
- 조예의 출생 논란: 상술한 친어머니 문소황후 견씨의 죽음과 연관된 내용이다. 삼국지집해를 저술한 청나라의 역사학자인 노필은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고의로 조작해서 기록했다는 가설을 제안했는데, 이 설에 의하면 정사인 명제기에서 조예가 36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한 내용을 신뢰할 경우, 그는 부황인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 견씨의 전 남편인 원희[16]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진수는 조예가 239년에 사망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생년을 역산하면 204년생이 되는데, 문제는 견씨가 조비의 부인이 된 것도 그 해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204년 8월 경에서야 조비의 아버지인 조조의 세력이 원희를 포함한 원씨 가문의 본거지인 업군을 함락시켰으므로, 당해에 태어난 조예가 조비의 아들일 리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송의 역사학자인 배송지는 진수의 기록이 왜곡되었다면서 조예가 205년생이라는 가설을 제안했다. 하지만, 진수의 기록을 다시 보면 본인이 쓴 명제기의 기록과 모순되는 기록이 속속들이 나오는데, 명제기에서는 조예가 15세에 무덕후에 봉해졌다고 서술되어있고, 문제기에서는 이때가 220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206년생이라는 설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란은 결국 진수의 기록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서 기인하는데, 본래 그는 조위나 서진 황실에게 있어서 불리한 내용은 직접 기록하지않고, 고의로 모순되는 내용을 집어서넣어서 후세인들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도록 서술한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17]. 결국 정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진짜로 조예가 조비의 친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적어도 당대에는 그런 풍문이 돌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조방, 조순의 출신 성분: 후사가 없었던 조예[18]는 아직 갓난아기였던 조방과 조순을 양자로 삼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는데, 문제는 이들이 누구의 아들인지가 알려져있지 않아서 당대에도 크게 논란이 되었다는 점이다. 일단 위씨춘추와 세설신어에서는 이 둘을 조조의 아들인 조창의 손자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를 교차검증할 수 있는 다른 사료도 없고, 무엇보다도 조예가 생전에 이들의 출신 성분을 전혀 밝히지않아서, 현전하는 기록으로는 둘의 출신 성분을 알아낼 방도가 없다. 때문에 조방, 조순이 생물학적으로는 조위의 황족이 아니었다고 보는 설도 제안되고 있다.
- 중국 최고(最古)의 활자 및 인쇄물의 행방: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의 경우에는 한중일 세 국가의 의견이 갈리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랜 금속활자 인쇄물은 고려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며,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는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다. 그러나 세계 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금속활자를 먼저 만들어 낸 국가는 중국이라 말하고 있으나, 아직 현존하는 것이 없어서 이를 입증하는데 난항이 많다. 국토가 좁아 별로 찍을 일이 없는 한반도에 비해 넓은 국토와, 엄청난 인구 때문에 수십만 권은 찍어내야 했던 중국에서는 활자를 조립해가며 찍어야 하는 활자인쇄보다 목판인쇄가 훨씬 효율적이었기에 중국의 활자 인쇄기술이 한국의 그것보다 더 먼저 나왔을 개연성은 크지만, 금속활자 자체를 별로 쓰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해도 활자로 인쇄한 인쇄물까지 없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다.[19]
- 짐새: 사서 기록만 보면 과거에 실존했던 동물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어려운 수준인데, 사람을 끔살시킬 맹독을 깃털에 품고 있는 새라는 게 현대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어려운 터라 실존 여부, 실존했다면 정말 사람을 죽일 만큼 강한 독성이 있었는지, 그리고 실존했다면 왜 사라졌는지 등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깃털 등에 닿는 다고 죽는 것까진 아니지만 충분히 위험한 독을 지닌 조류가 발견됨으로써 짐새의 실존 여부에 신빙성이 생기고 있다.[20] 유력한 설로는 과거 중국에서는 짐새가 나오면 산에 불을 질렀다고 하니, 실존했으나 일종의 해수구제사업으로 인해 멸종했다는 설, 공직의 중요자를 암살할 때 비소화합물의 증기를 깃털에 쐬어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역으로 독을 가진 깃털(실제로는 인공적으로 독을 넣은 깃털) - 그 깃털이 나온 깃털에 독이 있는 새 - 짐새 순서로 과거 혼란스러웠던 중국 정치 상황에서 탄생한 가상의 동물이라는 설, 대형 맹금류가 독충이나 뱀 등을 가볍게 사냥하는 것을 보고 독을 가진 생물을 쉽게 사냥한다 - 독을 가진 생물보다 강하다 - 더 강한 독을 가지고 있다 순으로 용의 사례처럼 당시 생물학에 무지하던 백성들의 이야기에서 구전되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 퉁구스 제족들의 기원지: 말갈-여진족-만주족의 조상이자 동북아시아의 주요 인족 집단인 퉁구스족들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는 2024년 현재에도 많은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일단은 시베리아 아무르강 중상류 지역과 바이칼 호 일대가 기원지라는 설과 만주 동부와 연해주 일대가 원래 고향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2021년에 벨기에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티너 로베이츠가 네이처지에 기고한 논문에 의하면, 퉁구스족은 몽골계 제족과 튀르크족, 한국인, 일본계 제족과 함께 9000년 전에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일대에서 기장을 기반으로 한 농업에 종사했던 고대 정주농경민의 후예임이 밝혀졌다. 해당 논문에서는 이에 따라 랴오닝성을 퉁구스족의 원향으로 지목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주류 학계에서부터 그 신빙성에 의심을 하는 상황이다[21].
- 하나라: 실존성이 분명히 입증된 상나라와는 달리 하나라는 갑골문에서도 언급되지 않아서[22] 그 실체가 오리무중이다. 다만 전설상의 나라라고 보기에는 하나라가 실존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상나라 이하의 역사서에서 꾸준히 등장하므로 실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23] 실제로 상나라와는 별개의 문화권에 속하는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지만[24], 이 당시 황하 문명에 속한 도시국가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융성하고 존속기간이 길어서 하나라의 실체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얼리터우 문화는 정작 타 도시국가들과의 교류가 매우 적은 폐쇄적인 문화였다는 점에서, 수많은 고고학자들은 과연 얼리터우가 하나라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25].
- 사구정변 내용의 출처: 진시황의 죽음을 은폐하고 유서를 조작해서 태자 부소 대신 호해를 차기 황제로 즉위시켰고, 이는 이후 진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해당 문서에 나오듯이 매우 비밀스러운 일을 사마천은 마치 바로 옆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매우 상세하게 묘사했다. 시간상으로도 한참 간격이 있고, 해당 인사들과의 연결고리도 전혀 없는 사마천이 어떻게 이 내용을 접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순한 창작으로 간주하기엔 사마천은 당시에도 까마득한 고대이던 상나라의 왕사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 고증의 대가이기 때문에 창작까지 해가며 기록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 포르바진: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에 위치한, 호수 한가운데에 세워진 정체불명의 대형 유적지로, 당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위치임에도 당나라 형식의 유적지여서 의문을 사고 있다[26]. 정확한 건설 시기와 왜 건설 되었고 왜 버려졌는지 알수 없으나 현재로써는 위구르 제국 당시 건설된 성 또는 마니교 사원으로 지진, 화재 등으로 폐허가 된 이후 보수하지 않아 현재 상태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2. 몽골
- 칭기즈 칸의 무덤: 철저하게 비밀로 숨겼기 때문에 8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감을 못 잡고 있다. 정확히는 칭기즈 칸 본인이 자신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을 꺼린 탓에[27], 몽골의 흔한 장례법에 따라 자신의 시신을 말에 묶어서 달리게 했다가, 그 말이 멈추는 곳에 대충 묻어버리게 했으므로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실체: 오랫동안 몽골 유일의 유럽인계 통치자였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치세에 대해서는 갖가지 도시전설이 돌았다. 그가 니슬렐 후레[28]의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죽일 사람을 물색했다거나,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칭기즈 칸의 환생이라는 망상에 빠졌다거나하는 이야기는 확실히 낭설로 밝혀졌고, 그가 정신병을 앓던 상태였거나 뇌손상이 있었다는 설도 남겨진 그의 부검 기록을 통해 부정되었다. 즉, 그의 악명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 사실이며, 최소한 현지의 몽골인들과 그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복드 칸에게는 매우 신사적으로 대하고, 몽골 고유의 문화를 존중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러시아 백군 계열 군벌이면서도 백군의 주류 세력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 행보를 보인 것은 사실이며, 이 와중에 이에 반대하는 부하들과 러시아 적군의 포로들을 학살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때문에 당대에도 '몽골의 미친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것이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불명이다. 당시의 몽골의 상황을 보면, 중화민국의 외몽골 출병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중국에 강제점령을 당하여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해 독립을 상실했다가,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이끄는 백군 세력이 몽골을 점령하면서 중화민국군이 축출되었을 때였다. 당연히 이로 인해 독립을 되찾은 몽골인들에게는 분명히 그가 해방자로 여겨졌을 테지만, 불과 1년 만에 그가 복드 칸의 밀서를 받은 담딘 수흐바타르의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 때문에 그와 관련된 여러 도시전설의 원형이 된 알려지지 않은 어떤 실정이 벌어지면서, 운게른의 세력이 몽골 내에서 급속도로 민심을 잃었다는 추정이 제기되지만,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정황을 알기는 어렵다[29].
- 원조비사의 저자: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을 다룬, 몽골 제국의 초기 역사를 다룬 원조비사는 유목민 스스로가 남긴 역사서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비사에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면모나[30], 정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화 등이 기록되었으므로, 저자는 오래 전부터 칭기즈 칸을 지켜본 최측근인 듯하다. 하지만, 원조비사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후보에 오르고는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저자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 흉노: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중국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유목 민족이다. 지속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흉노 문화의 상세한 모습이 밝혀지고 있으나, 아직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튀르크계라는 설과 몽골계라는 설, 인도유럽어족계 종족이라는 설이 난무하고 있다.[31] 위의 훈족과의 관계도 불분명하다.
2.3. 일본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을사의 변에서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소가노 이루카를 죽이고 소가씨의 몰락에 큰 기여를 한 동시에 다이카 개신의 주역이며 후지와라의 시조인 인물이지만, 일본서기에서의 기록만 보면 매우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그가 백제계 도래인임을 암시하는 정황 증거가 매우 많기에 도래인이라는 가설이 우세하며, 일본 사학계에서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행적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에 주목하여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부여풍이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32]
- 납북 일본인: 현재는 일본에서조차 진전도 없는데 정치공세로만 쓰인다며 비판 받고 있지만[33], 실제로 1977년에서 1980년까지 북한이 남한에 보낼 간첩을 육성할 목적으로 일본 내외에서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현재까지 12건의 사건으로 17명의 일본인이 납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은 북한과 일본의 의견이 다르고, 일부 납북자는 어떤 경우는 아직까지 생존 여부 및 근황도 알 수 없는데다, 실제로 북한에 납치된게 맞는가하는 의혹도 나와서 여전히 오리무중인 부분이 많다.
- 요코타 메구미의 행방: 위의 납북 일본인 사례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례로, 일단 북일 양국은 이 사람이 1977년 11월 15일에 납북되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도 논란이 되는 이유는 1997년에 북한 측에서 밝힌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측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람이 1986년에 한국인인 김영남[34]이라는 사람과 결혼하고, 이듬해 김은경이라는 딸을 출산한 뒤에 1994년에 병원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요코타의 유골을 일본에 보냈는데, 유골이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서[35] 이 사람의 행방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다만 향후 해외의 인권단체들의 조사를 통해 그녀의 딸로 알려진 김은경이라는 사람은 실존하며, DNA 검사 결과 메구미의 친딸이 맞다는 것이 밝혀졌다.
-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 寫樂): 일본의 천재적 풍속 화가로 1794년에 갑자기 등장하여 불과 10개월 동안 작품 145점을 남기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샤라쿠의 정체가 조선의 화가 김홍도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샤라쿠가 활동했던 1794~1795년에 김홍도는 조선에 있었음이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었다.[36]
- 만세일계: 일본 극우들의 주장과는 달리, 주류 역사학계는 일본 황실의 가계가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단일하게 내려왔을리는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왕조가 몇번이나 교체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황실 가문은 언제 등장한 가문인지가 불분명하다[37].
- 일본의 초대 천황 : 10대 스진 덴노 이전이 사실상 신화인 관계로 초대 덴노가 누구인지가 의문에 싸여 있다. 일단 역사서에서는 진무 덴노를 제1대 천황으로 보고 있지만, 20세기 이후[38] 현재의 역사학계에서 진무 덴노는 진구 황후처럼 사실상 후대가 만들어낸 가공인물로 결론을 내린 상태이며, 실질적인 일본의 초대 천황은 실존 여부가 확인된 10대 덴노인 스진 덴노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스진 본인도 생몰기간이 168년, 120년 등 터무니없이 길게 나오는 등 의문스러운 정보가 많아 아직까지 주류 해석일 뿐 명확하게 결론 난 것은 아니다.
- 제1 ~ 9대 천황 가계의 실체 : 위의 초대 덴노 문제와 이어지는 문제로 만약에 스진 덴노가 실질적인 초대 천황이라면 역사서에 나와 있는 초대 ~ 9대까지의 천황 가계가 무엇이었는지도 수수께끼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스진이 본인의 실제 조상을 가공의 조상으로 만들어 낸 허구라는 설과, 이전의 왕조가 스진 때부터 새로운 왕조로 교체되었다는 설, 어느 지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확실한 설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든 스진이 실존이 확인된 최초의 천황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가계는 스진이 시작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일본 황실의 한반도 기원 여부: 종종 공식 석상에서 아키히토 전 덴노가 자국 황실이 백제 왕실과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는 발언을 하거나, 반대로 한국 내 민족주의자들이 일본 황실은 백제 왕족이 일본을 지배하면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허나 일본 신화에서 한반도의 지명이 등장하거나[39], 아래에서 보듯이 실존 덴노나 전설 상의 황족들의 일부가 한반도계 도래인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실제로 일본의 황실이 한반도에서 기원한 가문이거나, 최소한 한국계 국가의 왕족과의 정략결혼으로 인해 고대 한국인의 혈통이 섞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이 일본 신화에서 진구 황후가 신라계 도래인인 천일창의 후예라고 전해진다는 점과 한국계 왕조들이 당대 일본에 끼친 강한 영향력을 근거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을 고대 일본을 통치한 한국계 군주로 비정하는 가설을 내놓으면서, 상기한 논란에 더욱 불을 붙였다.
-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진구 황후가 실존 인물이 아님을 명확하게 밝혀냈고, 따라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된 내용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설의 실제 모델이 된 어떤 실존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이메이 덴노[40]나 히미코와 같은 실존한 여성 천황이라는 설과[41], 야마토 왕권과 관련없는 일본계 부족의 여성 추장의 침략 기록이 와전됐다는 설[42], 신라계 도래인 출신의 실존한 여성 군주라는 설[43]이 있지만, 각각의 학설이 진구 황후 전설의 내용과 조금씩 어긋나기 때문에 확실한 해답이 없다.
- 히미코 즉위 후부터 고훈 시대까지의 천황들의 계보: 일본 역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전국시대다, 태평양 전쟁이다 하면서 갖은 전란에 시달린 까닭에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고[44],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들이 매우 부족한 상태다. 이에 따라서, 일본서기와 같이 임나일본부설 등의 역사왜곡에 쩔은 프로파간다조차도 일본의 고대사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일 만큼[45],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남아있는 사료들을 신빙성 여부와 관계없이 최대한 박박 긁어모아서 그중에서 사실인 부분만 추려나가는 식으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고훈 시대 직전까지의 역대 천황들의 계보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는 것. 일본 황실의 족보는 태평양 전쟁기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온갖 윤색을 다 해놓은 결과물이라서[46], 히미코 즉위 이후에 어떤 천황들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왜국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측 기록에서 왜왕(=일본의 천황)이 보낸 사신들이 조공을 바치고 돌아간 기록이 있지만, 정작 일본 사신들에 의해 중국 황실에 소개된 '왜왕'들 중에서 실제 당시의 천황이였다고 추정되는 이들이 매칭이 잘 되지않는다.
- 미와 와사부로의 최후: 미와 와사부로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심문하고 고문을 한 악질 형사로, 이 시기의 경성부 시민들이라면 다들 이름을 아는 네임드 경찰이었다. 그러나 8.15 광복 이후로 갑자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그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그의 최후가 어떠한지는 의문에 싸여 있다.[47] 자세한 건 항목 참조[48]
- 센고쿠 시대 : 어느 시점이 기점과 종점인지 현재도 여러 이설이 갈린다. 기점은 오닌의 난(1467)이라는 설과 메이오의 정변(1493)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고 또는 호조 가가 세워진 시점(1488)이 기점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종점의 경우 일본 학계에서는 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한 시점을 통설로 잡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어디에 넣을지에 대해 명확한 학설이 없어서 오다와라 전투, 임진왜란 종료, 세키가하라 전투, 에도 막부 성립, 오사카 전투, 겐나 엔부까지도 센고쿠 시대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49]
-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 왕권의 위치: 어느 나라건 간에 자국 최초의 국가의 영토나 수도의 위치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이게 크게 다루어지느냐 하면, 야마토 왕권이 위치한 곳을 추적해 봄으로서 일본인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민족인 야마토 민족의 기원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인류학적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에 대한 떡밥이 주류 역사학계와 비교언어학계의 오랜 떡밥인 만큼, 야마토의 위치가 어디였느냐가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많은 의문들이 대거 해소되리라고 보고 있다. 대체로 규슈에 있었다는 설과 지금의 교토 근교였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 도쿄 로즈의 정체: 총 방송 진행자가 14명이나 되지만 유일하게 신원이 알려진 아이바 토구리를 제외하면 다른 여성들의 정체나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는 80여년 가까이 지난 만큼 이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유명한 실종자인 어밀리아 에어하트가 도쿄 로즈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기도 했다.
- 츠지 마사노부의 마지막 행적: 1961년 4월 4일에 갑작스럽게 호치민을 만난다면서 동남아로 떠나버렸고 이후 라오스 북부 고원에서 불교 승려로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알아낼 수가 없어 마지막 최후에 대해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츠지의 실종 1년 뒤, 산케이 신문 기자인 노다 마모루가 동남아시아 현장에서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파테트라오군과 접촉하다 7월 경 하노이로 향한 뒤 실종되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한다. 노다는 직접 북베트남으로 들어가서 츠지 마사노부의 행방을 쫒으려고 했지만 입국 비자가 나지 않아 그 시점에서 취재를 끝냈다.
- 하시마 섬: 한국사와의 연관도 깊지만, 이 섬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있었던 데다[50], 결정적으로 하시마 섬 자체가 일본 영토이므로, 세계사 부분에서 다룬다. 일단,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일본의 주장대로 강제적인 노역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지만,[51] 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들 아는 대로 헬게이트의 공간으로 변모했다.[52]. 하시마 섬의 대부분이 일본 정부에 의해 관광객의 접근이 금지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진상을 알기 어렵다.[53]
- 혼노지의 변: 일국의 국가원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기가 의문에 싸여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10.26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54] 아케치 미츠히데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트롤링을 벌였다는 설과 배후가 있다는 설이 있으며, 배후가 있다는 설은 다시 그 배후가 조정이라는 설과[55]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설[56], 예수회가 배후라는 설도 있으나[57] 셋 다 분명한 증거는 없다.
3. 남아시아
- 드라비다인의 고유 종교 및 신화: 오늘날 드라비다인 대부분은 힌두교를 믿고 일부는 이슬람, 기독교 등을 믿고 있지만, 중동이 원산지인 이슬람과 기독교는 물론이고, 힌두교 역시 드라비다인의 고유 종교는 아니다. 힌두교는 아리아인의 종교인 브라만교가 불교 교리의 일부와 인도 각지의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형성되었는데, 아리아인이 드라비다인과 다른 계통의 민족이므로 드라비다인의 고유 종교는 오늘날의 힌두교와는 다른 종교였음이 확실하다. 물론 브라만교에 흡수되어 힌두교 형성에 기여한 인도 민간신앙 중에는 드라비다인의 종교 역시 포함되긴 했을 가능성이 높고, 힌두교의 일부 신격 역시 처음에는 드라비다인의 신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드라비다인의 고유 종교가 구체적으로 어떤 신들을 믿는 종교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 바수반두(Vasubandhu, 세친世親): 고대 인도 불교의 고승으로, 전승에 따르면 아상가(Asanga, 무착無着)의 아우로서 원래는 소승 불교에 속했으나 나중에 대승 불교로 전향하여 유식(唯識)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승의 바수반두와 대승의 바수반두가 진짜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대승 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과 일본의 불교학계에서는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인 소승불교의 바수반두와 《유식삼십론송》의 저자인 대승의 바수반두를 사실상 동일 인물로 간주하지만 서양의 인도학-불교학계에서는 소승의 바수반두와 대승의 바수반두를 다른 시대의 동명이인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58]
- 인더스 문명: 이 문명을 세운 이들이 누구인지도, 이들의 언어가 어떤 계통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 찬드라 보스: 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타이완 근교의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소련이 납치해서 굴라그에 수감했다는 설 또한 심도 있게 고려된다. 인도 현지에선 찬드라 보스의 정치 라이벌인 네루가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까지 있을 정도.
4. 동남아시아
- 라이 텍: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총서기로, 일제 패망 후에 그가 일본의 스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라이 텍이라는 이름부터 그가 사용한 50여개의 가명 중 하나로 생년월일, 출생지, 성장과정이 모두 미스테리다. 심지어 그의 최후도 말라야 공산당의 자금을 횡령하고 달아난 이후로는 알 수 없는 상태다[59]. 가장 유력한 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요청을 받은 베트남 독립당 당원들에 의해 태국의 방콕에서 살해된 후 메콩강에 수장됐다는 것이다.
- 람캄행 대왕의 실제 행적: 람캄행 대왕이란 태국 역사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수코타이 왕국의 명군으로, 오랫동안 태국인들의 민족 영웅으로서 추앙받아왔으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위조된 것일 가능성이 유력해지면서 람캄행의 실제 행적과 더불어 비문에 등장하는 수코타이 왕국의 발전상의 실체가 크게 의심받고 있다[60]. 만일 람캄행의 행적과 수코타이 역사가 이 비문을 통해 조작된 것이라면, 태국의 초기 역사 전체를 몽땅 수정해야 할 것이다.
-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미스터리
-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61]: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와중에 한국군이 베트남 현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으나, 이에 대한 물증이 없어서 논란이 야기되고 있다[62]. 학계는 이런 논란에 대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의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한국군의 소행으로 와전되었거나, 아예 이들이 한국군으로 위장해서 학살을 벌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며[63], 다만 태평양 전쟁이나 6.25 전쟁 당시에는 내내 전쟁 범죄의 피해자 입장이었던 대한민국이 거꾸로 가해자로 의심받는 상황에 대한 한국인들의 충격때문에 와전된 내용에 더욱 살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64]. 실제로 북베트남 측은 베트남의 고도인 후에를 점령하는 와중에 남베트남의 정치인과 관료, 학자와 언론인들을 체포해서 학살한 후에 대학살을 저질렀고, 현재까지도 그 규모는 알려진 것보다 크다는 추정만 있을 뿐,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2000년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가 자국이 저질렀다고 추정되는 학살에 대해 사과를 하는 한편, 베트남 정부에게 이 학살의 실체에 대해 공동으로 조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베트남 측에서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의 승전국이니 그런 비극을 굳이 들출 것은 없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했다[65]. 이런 사실이, 북베트남 측의 학살이 한국군의 소행으로 왜곡되었다는 학계의 추정에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의 현장을 발굴하여 조사하기 전까지는 이런 의혹을 해소할 길이 없다.
- 퐁니-퐁넛 학살의 실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학살이 벌어졌다고 언급된 최초의 사례다. 한국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미 해병대측의 목격자와 해당 학살의 생존자, 당시의 한국군 참전용사들 중 한 사람인 류진성의 증언을 근거로 이 학살의 주체가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상술했듯이 주류 역사학계[66]는 한국군이 학살을 벌였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사건의 실제 주체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지목되고 있으나, 이마저도 명확한 건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은 다른 이들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동맹국인 미국 측에서 직접 한국군이 학살을 벌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다, 학살을 목격한 이들이 꽤 많이 살아남아서 증언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 사건의 가담자임을 증언한 사람이 직접 나타났다는 점에서, 정말로 한국군이 벌인 전쟁 범죄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목되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2015년부터 간간이 해당 작전에 참여한 참전 군인들의 제보를 요청하는 공지를 띄웠지만 아직까지 유의미한 제보는 없는 듯하다.
- 소녀의 절규 사건의 실체: 소녀의 절규란 AP통신의 기자인 닉 웃이 1972년에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의 주인공인 판티낌푹을 포함한 아이들이 네이팜탄으로 인한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67]. 당시 이 폭격을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직 폭격기 조종사였던 존 플러머가 이 사진을 보고 크나큰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베트남 전쟁의 종전 이후에 캐나다로 이주해 살고 있던 낌푹을 찾아가서 사죄했고, 그녀가 이런 그를 용서해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미 공군 측은 당시 폭격기에 탑승해있던 사람은 존 플러머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 공군은 존 플러머가 PTSD에 시달리는 와중에 이 폭격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착각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많은 상황이다.
- 후에 대학살의 정확한 피해 규모: 상술했듯이, 후에 대학살은 북베트남군이 베트남 공산당에 반대하는 언론인과 학자, 정치인이나 민간인들을 대거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목격했던 네덜란드 태생의 캐나다인 의사인 알예 벤예마는 적어도 1,5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으리라고 보고 있고, 당시 남베트남 정부는 피해자의 수를 4,062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언론인인 오리아나 팔라치는 대략 8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고, 후대에 조사한 결과, 실제로도 벤예마의 추산을 가뿐히 뛰어넘는 수준으로 학살된 시신들이 발굴되고 있어서, 학살의 규모가 매우 컸으리라는 지적이 주류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68]. 그러나 2021년 현재로서는 베트남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전면 중단하고 은폐하고 있어서, 더 이상의 조사가 힘든 상황이다.
- 진 Z. 한나한: 말레이시아의 공산당 투쟁을 쓴 작가지만 본명 등 여러 가지 신원사항이 불명이다. 그의 저작들이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기밀문서들을 토대로 했으므로 아시아 문화에 정통한 CIA의 협력자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 쿠타이 왕국: 보르네오 동부에서 기원후 4~5세기에 '쿠타이'라는 고대 왕국이 있었다는 것은 5세기의 물라와르만 비문이 발굴되어 확인되었는데, 여기에는 쿠타이 왕국의 3대에 걸치는 왕사가 적혀 있다. 그렇지만 5세기 전반에 집권한 물라와르만(Mulavarman) 이후 이 쿠타이 왕국에 대한 기록은 14세기까지는 거의 완전히 공백 상태고, 고고학 조사에 따라 관련 유물만 극히 드물게 발굴되는 수준이다. 이 지역은 보르네오 동부, 도서부 동남아시아 교역로 외곽에 위치해서 외부 관찰자들의 관심이 그리 높은 지역도 아니어서 이렇다 할 외부 기록도 찾기 힘들다. 이런 위치에 어떻게 4~5세기라는 동남아시아 기준 매우 이른 시점에 기록 문화가 발달한 국가가 생겨났는지도 미스터리이다.
- 킬링필드의 희생자 수: 위의 대약진운동과 같은 맥락[69]으로 발생한 문제로, 당초 300만명으로 알려졌으나, 이건 태국이나 베트남 측이 조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어거지로 해서 대충 추산한 잘못된 값임이 밝혀졌고, 캄보디아 인구수로 계산하려고 해도 당시 캄보디아는 통계조차 제대로 못 내던 막장 상황이라 인구 수도 조사를 제대로 못해 인구 차이로도 명확하게는 밝히지 못한다. 현재는 미군 측의 170만명이 그나마 신빙성이 높은 걸로 보고 있고, 다른 조사를 조합해 봤을 때 170~19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명확하게 결론난 가설은 없다.
5. 서아시아
- 괴베클리 테페: 최근 들어서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을 집중하게 하고 있는 유적지. 수메르 문명의 건설 이전에 만들어진 유적지인데, 무려 기원전 11,000년경의 건축물이다. 일종의 종교적 성소였다고 추정되는 이 유적지 때문에 종교나 체계적인 건축물의 건설이 신석기 시대에 농업이 등장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고 여겨지던 기존의 학설을 크게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몰타의 타르신 신전이나, 역시 몰타에 있는 바퀴 자국 지형이 있다.
- 데린쿠유: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에 위치한 지하도시의 유적으로, 당대의 첨단 과학 기술들이 총동원되어 건설된 도시이다.[70] 문제는 이런 도시를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한때 학계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에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피해 숨어들어가느라고 세운 도시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으나, 도시의 건설 시기가 로마가 있기도 전인 기원전 900년경 프리기아 왕국 시기라는 게 밝혀지면서[71], 기독교인의 피난처로 세워졌다는 가설은 부정되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용도로 처음 만들어진 도시가 로마 제국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72]
- 엘리 코헨의 매장지: 엘리 코헨은 카말 아민 사베트라는 가명으로 시리아에 잠입한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스파이다. 바트당에 가입한 뒤, 시리아 국방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1965년에 정체가 발각되면서 시리아 정부에 의해 공개처형되었는데, 그 후에 그의 시신을 극비리에 알려지지않은 장소에 매장하면서[73], 2023년 현재까지 엘리 코헨이 매장된 곳은 불명인 상태다.
- 카데시 전투: 신왕국 시기의 이집트가 히타이트와 오늘날의 시리아의 홈스 지역에서 맞붙은 전투로, 이집트 측의 기록에서는 이집트군이 승리했다고 쓰여있으나, 당시에 히타이트가 이에 대해 전투 결과를 왜곡했다며 항의하는 내용의 편지가 현전하고 있으며, 이집트군 측이 얻은 전리품이 너무 빈약했다는 점, 그리고 이 전투 이후로 이집트의 중동 진출이 저지되었다는 점에서 실제 이 전투의 승전국은 히타이트로 추정된다. 하지만, 카데시 전투를 기록한 이집트의 부조에서는 당시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전투 도중에 신으로 변신해서 적들을 쓸어버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이 전투의 양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74]. 사람이 정말로 신으로 변신했을 리는 없으므로 람세스 2세가 전투 도중에 맹활약을 해서 무슨 성과를 낸 것을 과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활약이 무엇인지는 관련 사료가 부족해서 알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심지어 문제의 부조의 한켠에는 정체불명의 부대가 이집트 군대를 이끄는 람세스 2세를 보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는데, 이 부대가 어디서 동원된 부대인지도 의문이지만, 이들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도 부조의 내용 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카데시 전투가 실제로는 정말로 이집트 신왕국 측의 승리로 끝났으되, 결과적으로는 이 승리가 피로스의 승리가 되어버린 탓에 중동 지역의 패권이 히타이트에게로 넘어갔다고 보기도 한다.
5.1. 문명 관련
- 아카드: 아가데라고도 한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자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한 아카드 제국의 수도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요 도시 중 소재가 파악되지 못한 유일한 도시이며 아카드 도시 유적이 발견된다면 그동안 가려져 있던 인류 최초의 제국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큰 발견이 될 것이다.
5.2. 유대교, 기독교 관련
-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 10지파의 행방(잃어버린 10지파): 고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르호보암의 정책에 반발하여 여로보암을 따라 북이스라엘로 이탈한 10지파들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어디로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가 의문이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절멸되었는지, 정복자인 아시리아나 이집트, 페니키아, 아라비아 등등 주변 민족들에 흡수, 동화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민족으로 존속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 사해문서: 유대교 역사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인데, 발견 당시에는 사해 근처의 동굴에 봉인되어 있었다. 문제는 언제, 어떤 경위로 이 문서들을 봉인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바빌론 유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중요한 기록을 보존하고자 동굴 속에 매장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마사다 요새의 반란이 진압될 때 로마군에 의해 문서들이 반달리즘의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서 굴 속에 은닉했다는 설이 있다.
- 시바의 여왕: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솔로몬 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남방에서부터 찾아온 명철하고 부유한 여왕으로 묘사된다. 솔로몬에게 즉석에서 퀴즈를 냈으나 온갖 세상의 모든 학문에 청산유수처럼 통달한 모습을 보고 탄복하여 여왕이 가져온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나온다. 그에 더해 솔로몬 왕과의 염문설도 도는 인물. 일단 남방이라고는 하나 구체적으로 이 여왕의 정체가 불명인데, 에티오피아 등지에서는 여왕을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는 모양이다.[76]
-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이전 행적: 탄생부터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루가의 복음서[77] 2장 41절부터 52절까지의 기록뿐, 이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78]
- 유대교의 형성과정: 유대교는 특이하게도 처음 기록에 등장할 때부터 유일신교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특이한 부분이다. 그래서 유대교 신앙이 형성된 과정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예로부터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은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한때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인 아케나톤[79]이 추진한 유일신 운동과 뿌리가 같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둘 다 신이 하나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빼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서 부정되었다. 또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오히려 유대교가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유일신 교리의 보강이 이루어졌을 지언정, 없던 신앙이 새로 생겼다고 볼 수 없다.[80] 성경에 처음부터 야훼의 계시를 받았다고 나올 뿐이며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유일신교가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 출애굽기: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실존성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고고학적으로 지금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갑작스레 유·이민들의 이주가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적어도 출애굽기의 성립에 영향을 준 어떤 사건이 있었음은 확인되고 있다.
[1]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가 중국공산당의 당원이다.[2] 참고로 염민은 한족 출신이었다.[3] 여기서 다시 순수 튀르크계라는 설과 튀르크화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이라는 설로 나뉜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페르시아계 민족이라는 설과 토하라인이라는 설로 나뉜다. 어느 쪽이건 간에 분명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4] 시베리아 북부에서 기원한 이들이다.[5] 아예 발견이 안된 것은 아니나, 너무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라서 이걸로 갈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무리다.[6] 명나라 시기인 16세기에도 당항족의 고유 문자인 서하 문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은 당항족의 언어인 서하어로 된 최후의 기록이 이것이라서, 이 즈음을 전후해서 당항족이 소멸했다고 추정된다.[7] 기록에 의하면, 당항족의 일부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네팔까지 달아났다고 한다.[8] 이 당시의 중국은 현재의 북한을 생각하면 편하다.[9] 후술할 킬링캠프 희생자 수 논란도 이런 이유로 발생한 것이다.[10] 덩샤오핑 시절인 1979년에 5000~6000만명이라는 결과를 냈으나 이후 중국 공안부가 4300~4600만명으로 번복해버린 일도 있었다.[11] 랴오중카이의 암살범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12] 만력제의 유골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래서 그의 외양에 대한 연구는 오직 남겨진 기록으로만 할 수 있는 실정이다.[13] 중국티베트어족 계통의 다른 민족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완전히 다른 계통의 민족이 화하족에 동화되어 생겨난 민족일 수도 있다. 현재 주나라를 세운 민족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4] 유목민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리운 이들로, 이들은 무려 기원전 7세기 경에서야 연나라와 조나라의 기록에서 언급이 되는 이들이다. 주나라가 건국될 시기에 있었던 또다른 목축민으로 토하라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 거주하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로, 이들도 이 시기에는 아직 유목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15] 같거나 유사한 민족끼리 서로를 적대하거나, 이질적으로 여기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는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시대의 한국 왕조들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나뉘어서 피터지게 싸워댔고, 고려 시대까지 탐라 사람들을 외국인 취급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현대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국민들도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세르보크로아트인으로 분류되어서 언어도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같고 문화적으로도 전혀 차이가 없는 완전히 같은 민족이지만 그 말을 구 유고 사람들에게 하면 크게 욕먹을 가능성이 높다.[16] 조위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조예의 할아버지인 조조의 정적이자 친우였던 원소의 차남이다. 참고로 본래는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 견씨가 조비의 부인이 된 건, 조조가 원씨 토벌전 와중에 원희를 처형하고 홀로 된 그녀를 아들에게 넘겼기 때문이다.[17] 당연하지만, 진수가 사실 그대로 서술했다간 코로 탁주마시는 수준으로 끝날 리가 없으니 그런 것이다. 역사학자로서의 양심과 서슬퍼런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것이다.[18] 친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3살 이전에 죽었고, 막내딸인 제장공주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19] 물론 이건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20] 뉴기니 섬에 서식하는 두건피토휘(Hooded pitohui, Pitohui dichrous)라는 새로, 딱정벌레를 섭취해 호모바트라코톡신이라는 독을 축적한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 이 새의 깃털이 살갗에 닿으면 한동안 온몸에 스턴이 걸려버리고, 주사 등으로 혈관에 직접 주입하면 정말로 사망한다.[21] 당장 해당 논문에서 이를 근거로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 한국어, 일본어족이 모두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이라는 단일 언어군을 이룬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지만, 주류 언어학계에서 논문을 검증한 결과로는 이들 각각은 기초어휘 수준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동계어로 제시된 어휘들을 분석한 결과로는 차용어를 동계어라고 우기거나 시간에 따른 어형 변화를 무시한 채 대충 끼워맞추기로 동계어라고 억지를 쓴 것들이 절대다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서, 해당 가설은 주류 학계에 의해 논파되었다.[22] 흔히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진 탕왕에 대해서도 갑골문에선 그저 나라를 중흥시켰다는 기록만 있다. 참고로 갑골문에서 말하는 상나라의 건국자는 삼황오제라고 하는 제곡이다.[23]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하나라 왕실의 후손에게 기나라 제후의 작위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하나라의 실존을 확신하고 쓴 기록이 계속해서 보이므로 상나라와 별개의 민족으로서 하나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다.[24] 하나라나 상나라에 대한 연구 자체는 중국티베트어족과 한족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와도 연관이 깊다.[25] 유사한 사례로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실존 여부 문제가 있는데, 이쪽도 실존인물일 경우라면 황하 문명에 속한 여러 도시국가들 중 하나의 군주였다고 추정된다.[26] 물론 당나라가 당대 최강국이자 문화대국이었으므로, 이에 매료된 현지의 지배층이 당나라의 형식을 모방한 건축물을 지었을 가능성은 있다. 일본에도 백제 양식을 흉내내서 지은 백제궁의 사례가 있을 만큼, 동북아시아에서 선진국의 문화양식을 모방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27] 자신의 무덤이 성지화되는 것을 막을 목적이 컸다. 실제로 칭기즈 칸은 어린시절의 비참했던 성장사때문에 귀족 출신으로서의 선민의식이 없었고, 항상 다른 부족민들과 동일한 의식주 생활을 할 만큼 대단히 소탈한 성격이어서, 죽은 뒤에도 자신이 특별 대우 받을 것을 부담스러워했다.[28] 오늘날의 울란바토르[29] 이 당시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드 칸의 주치의로 채용되어 몽골로 이주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이태준(소설가 이태준과는 동명이인이다.)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통치가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지만, 이태준의 사망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30] 자신을 누르고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던 이복형 벡테르를 죽인 바람에 어머니 호엘룬의 분노를 산 일이나, 자기 아버지 예수게이를 비열하게 죽인 타타르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는 비정한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그의 숙적이자, 평생의 친우였던 자무카와의 감동적이고도 안타까운 우정 이야기 등, 학살자나 정복자로서의 냉정한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칭기즈 칸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기록이다.[31] 거기에 히말라야산맥의 토착어인 부루샤스키어를 쓰던 종족이라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원주민 중의 하나인 예니세이어족 계통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32] 만약 이 설이 맞다면, 부여풍이 족보를 위조했든, 나카토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든 방법은 많다.[33]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북한이라고 하면 조총련과 함께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며 국제 인권단체가 북한의 테러 및 인권 유린 행위를 지적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다. 그런데도 이게 일본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현재는 이미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지 적어도 40년 가까이가 된데다가 자민당 측이 이것을 피해자의 귀환은 뒷전으로 하고 공약 내지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풍으로 남용해왔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2020년 아베 신조가 사퇴할 당시 북한의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언급한 사례가 존재했었다.[34] 북한 정계의 2인자인 김영남과는 동명이인이다.[35] 1977년 즈음에 실종된 사람의 DNA를 어떻게 확인했느냐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제쳐두더라도 인도받은 유골함에는 한명이 아닌 다수의 사람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의 유골을 인위적으로 짜집기 했던 것.[36] 근데 사실 김홍도의 말년의 행적도 미스터리이다. 일단은 이미 언급했듯이, '김홍도=도슈사이 샤라쿠' 설은 부정된 상태이나, 1810년 이후로는 김홍도의 행적이 기록에 일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37] 현존하는 황실 가문은 고훈 시대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고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38] 사실 진무 덴노는 다이쇼 덴노 시기의 일본 황실에서도 그 존재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는 등으로 실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때문에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이에 대해 탐구한 것도 이때 쯤이었다. 이전에는 신성 불가침이랍시고 탐구가 금기시되었고, 이를 부정했다가는 학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39] 일본 신화에 의하면, 군신인 스사노오가 베를 짜던 누나 아마테라스를 다치게하여 그 벌로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곳으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의 학자들은 이 소시모리의 위치를 울산광역시나 경주시, 춘천시 중의 한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40]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를 돕고자 군대를 파병한 바 있어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41] 이 경우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과도 엮이는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진구 황후 전설은 히미코와 같은 여성 군주의 통치 하에 있던 야마타이국이 벌인 일본 열도 내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내용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42] 이 설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정복과 지배 목적이 아닌 약탈이 목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라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도 꽤 주목받는 설이다.[43]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이다.[44] 전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재 파괴 사례가 오다 노부나가가 벌인 히에이 산의 방화 사건이다. 당시에 히에이 산은 민중들을 수탈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군벌화한 파계승들의 부패의 온상이 된 곳이라서, 오다 군에 의해 히에이의 절들이 대거 불타버리자 당대의 민중들은 크게 환호했지만, 뒷날의 고고학자들에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된, 뒷목잡고 쓰러지는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45] 물론 주류 역사학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에 들어있는 의문스러운 부분을 걸러가면서 실제 고대 일본의 역사를 재구해보는 식인 거다. 일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삼한정벌 신화의 주인공인 진구황후에 대해서는 사이메이 덴노나, 히미코 및 그 손녀인 이요와 같은 실존하는 여성 통치자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고 주류 역사학계에서 결론이 지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모델이 정확히 누구냐는 논쟁을 통해 수시로 신라와 가야 등의 한반도계 국가들이 벌이는 군사적 충돌에 시달리던 당시 일본의 정세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46] 대표적인 경우가, 초대 천황인 진무 덴노. 일본사에서는 아직 문명조차 세워지지 않은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와 생몰년이 겹치는 지라, 실제의 역사와 매칭이 안된다. 그래서 황실 족보는 사료로 쓰기가 불가능하다.[47] 평소 미와 와사부로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두한이 그를 죽이고 암매장했다거나, 8.15 광복 당시에 모국의 패망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고,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자연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도시전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48] 참고로 SBS의 드라마인 야인시대에서는 8.15 광복 당시에 근무하던 경찰서에서 권총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는 미와에 대해 각색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기에, 이쪽은 창작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49] 이를 반론하는 학자들의 경우 1573년이 실질적인 종점은 맞고 이후에 있는 일련의 정치사적 사건 및 전쟁들은 진의 중국 통일 이후 머지 않아 발생한 초한전쟁처럼 일종의 또다른 난세의 발생이나 권력 암투라고 본다.[50] 당시에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8월 중순경에 모두가 잠든 사이에 갑자기 중국인 노동자들만 따로 소집되었는데, 이후 광산 쪽에서 의문의 폭발음이 들린 뒤에 두번 다시는 중국인들을 볼 수 없었고, 일본인 직원들도 모두 섬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의 가능성을 짐작케하는 중요한 기록이다.[51] 물론 사방이 막힌 폐쇄된 섬이었으니, 이런 작은 사회의 특성상 실제로 인권 유린 행위가 있었어도 쉬쉬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괜찮았던 건 사실이다.[52] 하시마 섬에서의 석탄 채굴이 처음 시작됐을 때만해도 꽤 괜찮은 수준의 월급이 지급되었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때문에, 각지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고한다. 당시에는 광부들을 위해 당대에는 매우 귀한 음식인 열대과일이 특식으로 지급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기준으로 쾌적한 구조의 숙소를 배정받을 정도로 복지 수준이 좋았고, 여기까지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갈수록 전황이 일본 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결국 1943년부터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던 복지가 크게 줄고 월급이 체불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지면서, 하시마 섬 광산으로 취직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이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 징발한 인력을 동원해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식으로 충당했고, 이때부터 세간에 알려진대로 하시마 섬 전체가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53] 일본 정부가 자세한 진상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 과거사 청산 문제에 일본 측이 협조적이었다고 해도 노후화로 인해 붕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다.[54] 그러나 10.26 사건의 범인인 김재규는 그나마 박정희를 암살한 직후 사실상 자수한데다 수사 당시의 진술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었음을 명시적으로나마 강조했었다. 다만 이것에 대해 역사학계가 "과연 그것만이 원인이었을까?"와 "유신정권 인권 탄압의 끝판왕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던 그가 단지 부마항쟁 때문에 박정희에게 반기를 품을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55] 이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의 지위를 노릴 것을 두려워해서 공경 및 황족들과 친분이 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오기마치 덴노가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5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노지의 변 이후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뒤에 오다 가문 전체를 토사구팽한데서 나온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한 뒤에, 정말로 반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그를 토벌하고는 입을 닦았다고 한다.[57] 이 설은 예수회를 통해 일본 정계에 포르투갈이 개입하려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58] 마찬가지로 《요가수트라》의 저자인 파탄잘리와 문법논리학자인 파탄잘리가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59] 다만 영어 위키피디아의 라이 텍 문서에 의하면, 그의 출생지는 베트남의 응에틴성 일대이고, 본명은 '호앙 아 낙' 또는 '팜 반 닥'이라고 나와있다. 이 서술이 사실이라면, 일단 라이 텍은 베트남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출생년도는 1901년이다.[60] 이 비문에 19세기에나 쓰이던 식의 문법이 나타나고 있고, 중도에 서술자의 시점이 바뀌거나, 문체가 바뀌는 부분도 있어서 비문 자체가 후대의 가작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게다가 발견자라는 사람이 당시 태국의 왕세자였던 라마 4세였기때문에, 태국 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을 들끓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고의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기는 커녕, 되려 이 문제를 조사하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마이클 라이트에게 태국에서 추방해버리겠다면서 자꾸만 그의 연구에 훼방을 놓고 있다.[61] 한국에 관한 얘기이긴 하지만 베트남이 깊숙히 관련되어 있고, 애초에 베트남의 역사와 관련된 사건인데다 발생 장소도 베트남이라서 여기에 서술한다.[62]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몇몇 주민들이 한국군에 의해 이웃이나 일가 친척들이 학살당했다는 증언을 한 건 있는데,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극히 드물어서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들이 저지른 학살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당장 당대나 지금이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베트남인을 서양 사람들은 커녕 동양 사람들도 잘 구분을 못하고 미국의 한인 타운에서의 인종차별도 (다는 아니지만) 이런 이유로 일어나는 판국에 멀리서 또는 몇 번밖에 목격이 안된 사람들을 한국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63] 한국 역사학계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견해는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것으로, 이미 주류 학계에서도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는 가설이다.[64]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논란에 대해 대한민국 내 여론은 대체로 베트남 측에 사과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 자신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학살 사건,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의 여러 학살 피해를 당했는데, 거꾸로 자기들이 가해자가 된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않으면 그야말로 내로남불이라는 생각때문에,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여론이 많은 것이다. 문제는 이 논란 자체가 실체가 불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전술한대로 학계에서 한국군의 소행일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을 내놓자, 이를 두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역사수정주의적인 발상으로 여겨서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65]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이 처음 제기된 문민정부 시기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상술한 논란과 관계없이 자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베트남 정부에게 사과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정계와 국민들의 여론이 이 문제에 대해 무조건 사과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서,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정작 피해국인 베트남 측이 자국의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고, 한국-베트남 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측의 사과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2018년에 있었던 한국-베트남 정상회담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이 쩐다이꽝 주석에게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에서의 전쟁 범죄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쩐 주석이 이를 거부하여 사과가 무산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위가 베트남 공산당 측에서 베트남군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려는 것과 무관하지않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는 원인으로 꼽힌다.[66] 다시 얘기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 역사학계의 입장이 아니다.[67] 사진 촬영 당시에 판티낌푹은 네이팜탄때문에 불이 붙은 옷을 찢어버리고 알몸인 상태로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등에 3도 화상을 입었을 만큼 중상을 입은 탓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실신해버렸다. 그녀는 해당 사진을 촬영한 닉 웃에게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다.[68] 가장 적은 수치를 제안한 알예 벤예마의 추산만으로도 이미 미군이 저지른 학살인 미라이 학살의 희생자 수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미라이 학살 당시에 죽임을 당했던 이들의 수는 150여 명으로 결코 적지않은 수인데, 후에 대학살은 이보다도 그 희생자 수가 매우 많다.[69] 해외 기자나 학자의 정보 수집을 차단했고, 정부가 통계를 조사하지 않았거나 못했다.[70] 물론 도시의 경영 방식이 당대 최첨단의 기술이 반영되었다는 것이고, 데린쿠유의 건설 과정은 의외로 단순했다. 데린쿠유가 부드러운 화산암 지대에 있어서 웬만한 도구로도 파내기가 쉬웠던 것이다. 훨씬 후대인 동로마 제국 시기에 데린쿠유와 가까운 곳에 세워진 도시인 카파도키아도 이런 식으로 화산암을 파내서 만든 인위적인 동굴에 집과 교회 등을 지어서 조성한 도시였다.[71] 정확히는 데린쿠유가 세워진 터널의 착공 시기가 이때다. 튀르키예의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기원전 8,9세기 쯤에 프리기아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거주지를 차리면서, 그때부터 도시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72] 도시 내부에 교회로 사용된 지역이 발견되었다.[73] 대한민국의 한 목사가 이 당시에 시리아 정부가 고인모독을 목적으로 엘리 코헨의 시신을 매장할 때, 유대교에서 금기시하는 돼지의 똥오줌으로 덮었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시리아 측에서 처형 직전의 코헨을 위해 자국 내 유대교 랍비를 불러주었으며,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의 시신에 양복을 입히고서는 히브리어가 새겨진 최고급 천으로 덮은 뒤에 유대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의 매장지가 비밀에 붙여진데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성지로 여겨질 것을 우려한 것도 있으나, 정반대로 자국민들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는 등의 고인모독을 당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도 있었다.[74] 이런 기록은 전근대시대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것도 없는데, 당시에는 전투 중에 우연한 행운을 맞았거나, 아군 측이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을 경우 내지는 갑작스레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전투에서 승리했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한 것을 두고 신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예리코 성을 7번 돌면서 야훼의 영광을 외치자 성벽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나오는 게 그 예다.[75] 후대에 수메르 문화가 부흥한 우르 제3왕조 시기의 기록과 유적이 제법 남아 있어서 역사 연구가 어느 정도는 되지만 기원과 인류학적 특징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76] 환빠와는 달리 이쪽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다. 일단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나, 그 조상 언어인 그으즈어는 모두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어파 계열 언어이고, 북쪽에 있는 이집트의 고대 이집트어는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긴 하지만 셈어파가 아닌 이집트어파에 속해있고, 당시에는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국들인 소말리아, 지부티, 에리트레아 정도에서만 셈어파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훨씬 뒤에 에티오피아에 세워진 악숨 왕국의 경우 바다 건너 예멘까지 원정을 나간 사례도 있었던 만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에티오피아인이 등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시바의 여왕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 자체는 셈어파 계열 언어가 전파된 과정을 밝히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77] 공동 번역 기준 제목. 가톨릭 역본은 루카 복음서, 개신교 역본은 누가복음.[78] 다만, 일부 성경학자들은 예수의 12세 당시 기록 이후로 아버지 요셉의 기록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점을 근거로,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장남인 예수가 요셉을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대신 했다고 추측한다.[79] 그 유명한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미인으로 유명했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남편이다.[80] 유대교가 유일신 종교로서 정체성이 정립된건 BC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때도 이미 사례가 있고, 이 시기는 신명기의 뼈대가 된 텍스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 즉 바빌론 유수는 유일신 신앙의 생성이 아닌 강화의 시기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