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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관련 정보/역사 관련 정보/세계사/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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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2.1. 중화권2.2. 몽골2.3. 일본
3. 남아시아4. 동남아시아5. 서아시아
5.1. 문명 관련5.2. 유대교, 기독교 관련

1. 개요

미스터리 관련 정보아시아 역사 관련 정보를 정리한 문서.

2.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2.1. 중화권

편의상 중국사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한 위치에 있었거나 중국사와 접촉한 적이 있던 민족 및 국가들도 기재한다.

2.2. 몽골

2.3. 일본

3. 남아시아

4. 동남아시아

5. 서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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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문명 관련

5.2. 유대교, 기독교 관련



[1]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가 중국공산당의 당원이다.[2] 참고로 염민한족 출신이었다.[3] 여기서 다시 순수 튀르크계라는 설과 튀르크화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이라는 설로 나뉜다.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설도 페르시아계 민족이라는 설과 토하라인이라는 설로 나뉜다. 어느 쪽이건 간에 분명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4] 시베리아 북부에서 기원한 이들이다.[5] 아예 발견이 안된 것은 아니나, 너무 단편적인 기록들 뿐이라서 이걸로 갈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무리다.[6] 명나라 시기인 16세기에도 당항족의 고유 문자인 서하 문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은 당항족의 언어인 서하어로 된 최후의 기록이 이것이라서, 이 즈음을 전후해서 당항족이 소멸했다고 추정된다.[7] 기록에 의하면, 당항족의 일부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네팔까지 달아났다고 한다.[8] 이 당시의 중국은 현재의 북한을 생각하면 편하다.[9] 후술할 킬링캠프 희생자 수 논란도 이런 이유로 발생한 것이다.[10] 덩샤오핑 시절인 1979년에 5000~6000만명이라는 결과를 냈으나 이후 중국 공안부가 4300~4600만명으로 번복해버린 일도 있었다.[11] 랴오중카이의 암살범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12] 만력제의 유골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래서 그의 외양에 대한 연구는 오직 남겨진 기록으로만 할 수 있는 실정이다.[13] 중국티베트어족 계통의 다른 민족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예 완전히 다른 계통의 민족이 화하족에 동화되어 생겨난 민족일 수도 있다. 현재 주나라를 세운 민족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4] 유목민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유목민은 (胡)라고 불리운 이들로, 이들은 무려 기원전 7세기 경에서야 연나라조나라의 기록에서 언급이 되는 이들이다. 주나라가 건국될 시기에 있었던 또다른 목축민으로 토하라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 거주하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로, 이들도 이 시기에는 아직 유목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15] 같거나 유사한 민족끼리 서로를 적대하거나, 이질적으로 여기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는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시대한국 왕조들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나뉘어서 피터지게 싸워댔고, 고려 시대까지 탐라 사람들을 외국인 취급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현대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국민들도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세르보크로아트인으로 분류되어서 언어도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같고 문화적으로도 전혀 차이가 없는 완전히 같은 민족이지만 그 말을 구 유고 사람들에게 하면 크게 욕먹을 가능성이 높다.[16] 조위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조예의 할아버지인 조조의 정적이자 친우였던 원소의 차남이다. 참고로 본래는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 견씨조비의 부인이 된 건, 조조가 원씨 토벌전 와중에 원희를 처형하고 홀로 된 그녀를 아들에게 넘겼기 때문이다.[17] 당연하지만, 진수가 사실 그대로 서술했다간 코로 탁주마시는 수준으로 끝날 리가 없으니 그런 것이다. 역사학자로서의 양심과 서슬퍼런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것이다.[18] 친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3살 이전에 죽었고, 막내딸인 제장공주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19] 물론 이건 문화대혁명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20] 뉴기니 섬에 서식하는 두건피토휘(Hooded pitohui, Pitohui dichrous)라는 새로, 딱정벌레를 섭취해 호모바트라코톡신이라는 독을 축적한다고 한다. 사람의 경우 이 새의 깃털이 살갗에 닿으면 한동안 온몸에 스턴이 걸려버리고, 주사 등으로 혈관에 직접 주입하면 정말로 사망한다.[21] 당장 해당 논문에서 이를 근거로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튀르크어족, 한국어, 일본어족이 모두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이라는 단일 언어군을 이룬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지만, 주류 언어학계에서 논문을 검증한 결과로는 이들 각각은 기초어휘 수준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동계어로 제시된 어휘들을 분석한 결과로는 차용어를 동계어라고 우기거나 시간에 따른 어형 변화를 무시한 채 대충 끼워맞추기로 동계어라고 억지를 쓴 것들이 절대다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서, 해당 가설은 주류 학계에 의해 논파되었다.[22] 흔히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진 탕왕에 대해서도 갑골문에선 그저 나라를 중흥시켰다는 기록만 있다. 참고로 갑골문에서 말하는 상나라의 건국자는 삼황오제라고 하는 제곡이다.[23]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하나라 왕실의 후손에게 기나라 제후의 작위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하나라의 실존을 확신하고 쓴 기록이 계속해서 보이므로 상나라와 별개의 민족으로서 하나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된다.[24] 하나라상나라에 대한 연구 자체는 중국티베트어족한족의 기원을 밝히는 연구와도 연관이 깊다.[25] 유사한 사례로 요 임금순 임금의 실존 여부 문제가 있는데, 이쪽도 실존인물일 경우라면 황하 문명에 속한 여러 도시국가들 중 하나의 군주였다고 추정된다.[26] 물론 당나라가 당대 최강국이자 문화대국이었으므로, 이에 매료된 현지의 지배층이 당나라의 형식을 모방한 건축물을 지었을 가능성은 있다. 일본에도 백제 양식을 흉내내서 지은 백제궁의 사례가 있을 만큼, 동북아시아에서 선진국의 문화양식을 모방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27] 자신의 무덤이 성지화되는 것을 막을 목적이 컸다. 실제로 칭기즈 칸은 어린시절의 비참했던 성장사때문에 귀족 출신으로서의 선민의식이 없었고, 항상 다른 부족민들과 동일한 의식주 생활을 할 만큼 대단히 소탈한 성격이어서, 죽은 뒤에도 자신이 특별 대우 받을 것을 부담스러워했다.[28] 오늘날의 울란바토르[29] 이 당시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드 칸의 주치의로 채용되어 몽골로 이주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이태준(소설가 이태준과는 동명이인이다.)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통치가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지만, 이태준의 사망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30] 자신을 누르고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던 이복형 벡테르를 죽인 바람에 어머니 호엘룬의 분노를 산 일이나, 자기 아버지 예수게이를 비열하게 죽인 타타르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는 비정한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그의 숙적이자, 평생의 친우였던 자무카와의 감동적이고도 안타까운 우정 이야기 등, 학살자나 정복자로서의 냉정한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칭기즈 칸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기록이다.[31] 거기에 히말라야산맥의 토착어인 부루샤스키어를 쓰던 종족이라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원주민 중의 하나인 예니세이어족 계통 민족이라는 설도 있다.[32] 만약 이 설이 맞다면, 부여풍이 족보를 위조했든, 나카토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든 방법은 많다.[33]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북한이라고 하면 조총련과 함께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며 국제 인권단체가 북한의 테러 및 인권 유린 행위를 지적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다. 그런데도 이게 일본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현재는 이미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지 적어도 40년 가까이가 된데다가 자민당 측이 이것을 피해자의 귀환은 뒷전으로 하고 공약 내지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풍으로 남용해왔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2020년 아베 신조가 사퇴할 당시 북한의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언급한 사례가 존재했었다.[34] 북한 정계의 2인자인 김영남과는 동명이인이다.[35] 1977년 즈음에 실종된 사람의 DNA를 어떻게 확인했느냐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제쳐두더라도 인도받은 유골함에는 한명이 아닌 다수의 사람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의 유골을 인위적으로 짜집기 했던 것.[36] 근데 사실 김홍도의 말년의 행적도 미스터리이다. 일단은 이미 언급했듯이, '김홍도=도슈사이 샤라쿠' 설은 부정된 상태이나, 1810년 이후로는 김홍도의 행적이 기록에 일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37] 현존하는 황실 가문은 고훈 시대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고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38] 사실 진무 덴노다이쇼 덴노 시기의 일본 황실에서도 그 존재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는 등으로 실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때문에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이에 대해 탐구한 것도 이때 쯤이었다. 이전에는 신성 불가침이랍시고 탐구가 금기시되었고, 이를 부정했다가는 학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39] 일본 신화에 의하면, 군신인 스사노오가 베를 짜던 누나 아마테라스를 다치게하여 그 벌로 신라의 '소시모리'라는 곳으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일본 양국의 학자들은 이 소시모리의 위치를 울산광역시경주시, 춘천시 중의 한 곳으로 비정하고 있다.[40]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를 돕고자 군대를 파병한 바 있어서, 진구 황후의 실제 모델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41] 이 경우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과도 엮이는데,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진구 황후 전설은 히미코와 같은 여성 군주의 통치 하에 있던 야마타이국이 벌인 일본 열도 내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내용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42] 이 설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정복과 지배 목적이 아닌 약탈이 목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신라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도 꽤 주목받는 설이다.[43] 언어학자알렉산더 보빈의 주장이다.[44] 전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재 파괴 사례가 오다 노부나가가 벌인 히에이 산의 방화 사건이다. 당시에 히에이 산은 민중들을 수탈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군벌화한 파계승들의 부패의 온상이 된 곳이라서, 오다 군에 의해 히에이의 절들이 대거 불타버리자 당대의 민중들은 크게 환호했지만, 뒷날의 고고학자들에게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된, 뒷목잡고 쓰러지는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45] 물론 주류 역사학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에 들어있는 의문스러운 부분을 걸러가면서 실제 고대 일본의 역사를 재구해보는 식인 거다. 일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는 삼한정벌 신화의 주인공인 진구황후에 대해서는 사이메이 덴노나, 히미코 및 그 손녀인 이요와 같은 실존하는 여성 통치자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라고 주류 역사학계에서 결론이 지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모델이 정확히 누구냐는 논쟁을 통해 수시로 신라가야 등의 한반도계 국가들이 벌이는 군사적 충돌에 시달리던 당시 일본의 정세를 분석하는 것이 있다.[46] 대표적인 경우가, 초대 천황진무 덴노. 일본사에서는 아직 문명조차 세워지지 않은 신석기 시대조몬 시대와 생몰년이 겹치는 지라, 실제의 역사와 매칭이 안된다. 그래서 황실 족보는 사료로 쓰기가 불가능하다.[47] 평소 미와 와사부로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두한이 그를 죽이고 암매장했다거나, 8.15 광복 당시에 모국의 패망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고,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자연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도시전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48] 참고로 SBS의 드라마인 야인시대에서는 8.15 광복 당시에 근무하던 경찰서에서 권총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는 미와에 대해 각색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기에, 이쪽은 창작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49] 이를 반론하는 학자들의 경우 1573년이 실질적인 종점은 맞고 이후에 있는 일련의 정치사적 사건 및 전쟁들은 진의 중국 통일 이후 머지 않아 발생한 초한전쟁처럼 일종의 또다른 난세의 발생이나 권력 암투라고 본다.[50] 당시에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8월 중순경에 모두가 잠든 사이에 갑자기 중국인 노동자들만 따로 소집되었는데, 이후 광산 쪽에서 의문의 폭발음이 들린 뒤에 두번 다시는 중국인들을 볼 수 없었고, 일본인 직원들도 모두 섬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의 가능성을 짐작케하는 중요한 기록이다.[51] 물론 사방이 막힌 폐쇄된 섬이었으니, 이런 작은 사회의 특성상 실제로 인권 유린 행위가 있었어도 쉬쉬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괜찮았던 건 사실이다.[52] 하시마 섬에서의 석탄 채굴이 처음 시작됐을 때만해도 꽤 괜찮은 수준의 월급이 지급되었고, 일본인한국인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때문에, 각지에서 일꾼들이 몰려들었다고한다. 당시에는 광부들을 위해 당대에는 매우 귀한 음식인 열대과일이 특식으로 지급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기준으로 쾌적한 구조의 숙소를 배정받을 정도로 복지 수준이 좋았고, 여기까지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갈수록 전황이 일본 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결국 1943년부터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던 복지가 크게 줄고 월급이 체불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지면서, 하시마 섬 광산으로 취직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이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 징발한 인력을 동원해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식으로 충당했고, 이때부터 세간에 알려진대로 하시마 섬 전체가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53] 일본 정부가 자세한 진상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못 들어가게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 과거사 청산 문제에 일본 측이 협조적이었다고 해도 노후화로 인해 붕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다.[54] 그러나 10.26 사건의 범인인 김재규는 그나마 박정희를 암살한 직후 사실상 자수한데다 수사 당시의 진술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었음을 명시적으로나마 강조했었다. 다만 이것에 대해 역사학계가 "과연 그것만이 원인이었을까?"와 "유신정권 인권 탄압의 끝판왕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던 그가 단지 부마항쟁 때문에 박정희에게 반기를 품을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55] 이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천황의 지위를 노릴 것을 두려워해서 공경 및 황족들과 친분이 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오기마치 덴노가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56] 도요토미 히데요시혼노지의 변 이후에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뒤에 오다 가문 전체를 토사구팽한데서 나온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한 뒤에, 정말로 반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그를 토벌하고는 입을 닦았다고 한다.[57] 이 설은 예수회를 통해 일본 정계에 포르투갈이 개입하려했다는 설과도 이어진다.[58] 마찬가지로 《요가수트라》의 저자인 파탄잘리와 문법논리학자인 파탄잘리가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59] 다만 영어 위키피디아라이 텍 문서에 의하면, 그의 출생지는 베트남응에틴성 일대이고, 본명은 '호앙 아 낙' 또는 '팜 반 닥'이라고 나와있다. 이 서술이 사실이라면, 일단 라이 텍은 베트남인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출생년도는 1901년이다.[60] 이 비문에 19세기에나 쓰이던 식의 문법이 나타나고 있고, 중도에 서술자의 시점이 바뀌거나, 문체가 바뀌는 부분도 있어서 비문 자체가 후대의 가작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게다가 발견자라는 사람이 당시 태국의 왕세자였던 라마 4세였기때문에, 태국 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을 들끓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고의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태국 왕실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기는 커녕, 되려 이 문제를 조사하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마이클 라이트에게 태국에서 추방해버리겠다면서 자꾸만 그의 연구에 훼방을 놓고 있다.[61] 한국에 관한 얘기이긴 하지만 베트남이 깊숙히 관련되어 있고, 애초에 베트남의 역사와 관련된 사건인데다 발생 장소도 베트남이라서 여기에 서술한다.[62]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몇몇 주민들이 한국군에 의해 이웃이나 일가 친척들이 학살당했다는 증언을 한 건 있는데,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극히 드물어서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들이 저지른 학살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당장 당대나 지금이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베트남인을 서양 사람들은 커녕 동양 사람들도 잘 구분을 못하고 미국의 한인 타운에서의 인종차별도 (다는 아니지만) 이런 이유로 일어나는 판국에 멀리서 또는 몇 번밖에 목격이 안된 사람들을 한국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63] 한국 역사학계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견해는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것으로, 이미 주류 학계에서도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는 가설이다.[64]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논란에 대해 대한민국 내 여론은 대체로 베트남 측에 사과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그 자신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학살 사건,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의 여러 학살 피해를 당했는데, 거꾸로 자기들이 가해자가 된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않으면 그야말로 내로남불이라는 생각때문에,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여론이 많은 것이다. 문제는 이 논란 자체가 실체가 불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전술한대로 학계에서 한국군의 소행일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을 내놓자, 이를 두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역사수정주의적인 발상으로 여겨서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65]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이 처음 제기된 문민정부 시기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상술한 논란과 관계없이 자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베트남 정부에게 사과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정계와 국민들의 여론이 이 문제에 대해 무조건 사과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서,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정작 피해국인 베트남 측이 자국의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고, 한국-베트남 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측의 사과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2018년에 있었던 한국-베트남 정상회담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이 쩐다이꽝 주석에게 한국군베트남 전쟁에서의 전쟁 범죄를 공식적으로 사과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쩐 주석이 이를 거부하여 사과가 무산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행위가 베트남 공산당 측에서 베트남군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려는 것과 무관하지않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는 원인으로 꼽힌다.[66] 다시 얘기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 역사학계의 입장이 아니다.[67] 사진 촬영 당시에 판티낌푹네이팜탄때문에 불이 붙은 옷을 찢어버리고 알몸인 상태로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등에 3도 화상을 입었을 만큼 중상을 입은 탓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실신해버렸다. 그녀는 해당 사진을 촬영한 닉 웃에게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다.[68] 가장 적은 수치를 제안한 알예 벤예마의 추산만으로도 이미 미군이 저지른 학살인 미라이 학살의 희생자 수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미라이 학살 당시에 죽임을 당했던 이들의 수는 150여 명으로 결코 적지않은 수인데, 후에 대학살은 이보다도 그 희생자 수가 매우 많다.[69] 해외 기자나 학자의 정보 수집을 차단했고, 정부가 통계를 조사하지 않았거나 못했다.[70] 물론 도시의 경영 방식이 당대 최첨단의 기술이 반영되었다는 것이고, 데린쿠유의 건설 과정은 의외로 단순했다. 데린쿠유가 부드러운 화산암 지대에 있어서 웬만한 도구로도 파내기가 쉬웠던 것이다. 훨씬 후대인 동로마 제국 시기에 데린쿠유와 가까운 곳에 세워진 도시인 카파도키아도 이런 식으로 화산암을 파내서 만든 인위적인 동굴에 교회 등을 지어서 조성한 도시였다.[71] 정확히는 데린쿠유가 세워진 터널의 착공 시기가 이때다. 튀르키예고고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기원전 8,9세기 쯤에 프리기아인들이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거주지를 차리면서, 그때부터 도시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72] 도시 내부에 교회로 사용된 지역이 발견되었다.[73] 대한민국의 한 목사가 이 당시에 시리아 정부가 고인모독을 목적으로 엘리 코헨의 시신을 매장할 때, 유대교에서 금기시하는 돼지의 똥오줌으로 덮었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시리아 측에서 처형 직전의 코헨을 위해 자국 내 유대교 랍비를 불러주었으며,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의 시신에 양복을 입히고서는 히브리어가 새겨진 최고급 천으로 덮은 뒤에 유대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의 매장지가 비밀에 붙여진데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성지로 여겨질 것을 우려한 것도 있으나, 정반대로 자국민들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는 등의 고인모독을 당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도 있었다.[74] 이런 기록은 전근대시대의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것도 없는데, 당시에는 전투 중에 우연한 행운을 맞았거나, 아군 측이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을 경우 내지는 갑작스레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전투에서 승리했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한 것을 두고 신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예리코 성을 7번 돌면서 야훼의 영광을 외치자 성벽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나오는 게 그 예다.[75] 후대에 수메르 문화가 부흥한 우르 제3왕조 시기의 기록과 유적이 제법 남아 있어서 역사 연구가 어느 정도는 되지만 기원과 인류학적 특징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76] 환빠와는 달리 이쪽은 허황된 얘기가 아니다. 일단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나, 그 조상 언어인 그으즈어는 모두 아프리카아시아어족셈어파 계열 언어이고, 북쪽에 있는 이집트고대 이집트어는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긴 하지만 셈어파가 아닌 이집트어파에 속해있고, 당시에는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국들인 소말리아, 지부티, 에리트레아 정도에서만 셈어파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훨씬 뒤에 에티오피아에 세워진 악숨 왕국의 경우 바다 건너 예멘까지 원정을 나간 사례도 있었던 만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에티오피아인이 등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시바의 여왕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 자체는 셈어파 계열 언어가 전파된 과정을 밝히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77] 공동 번역 기준 제목. 가톨릭 역본은 루카 복음서, 개신교 역본은 누가복음.[78] 다만, 일부 성경학자들은 예수의 12세 당시 기록 이후로 아버지 요셉의 기록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점을 근거로,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장남인 예수가 요셉을 대신하여 가장의 역할을 대신 했다고 추측한다.[79] 그 유명한 파라오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미인으로 유명했던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남편이다.[80] 유대교가 유일신 종교로서 정체성이 정립된건 BC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때도 이미 사례가 있고, 이 시기는 신명기의 뼈대가 된 텍스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다. 즉 바빌론 유수는 유일신 신앙의 생성이 아닌 강화의 시기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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