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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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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대 국방부장
白崇禧
바이충시 | Bái Chóngx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Bai_Chongxi.jpg
건생(健生)
한국어 독음 백숭희
출생 1893년 3월 18일
청나라 광서성 임계현
사망 1966년 12월 2일 (향년 73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제국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민족 후이족
종교 이슬람
1. 개요2. 일생3. 가족4. 여담5. 주요경력6. 매체에서7. 참고문헌8. 관련문서
8.1. 인물8.2.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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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쭝런과 더불어 중화민국 광서파벌, 그 중에서도 신 계계군벌이다. 군사적 능력이 매우 뛰어나 중국인들을 멸시한 조지프 스틸웰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일전쟁 중에 크게 활약해 별명이 작은 제갈량이었다. 특이 사항으로는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인 후이족 출신이다.

2. 일생

2.1. 유년 시절

파일:external/img.dwnews.com/2013081908205411280905.jpg
젊은 바이충시

1893년 광서성 임계현에서 이란에서 중국으로 귀화해 온 후이족 집안의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성인 백은 원래 성인 바하두룻딘(Bahadur Ad-din; بہادر الدّين)을 음차한 것이다. 아명은 젠성(健生)이며 이슬람식 이름은 오마르(عمر)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다가 회선소학에 다녔는데 1907년, 차이어가 운영하던 계림의 광서육군소학당 2기 생도 모집에 나이를 14세에서 15세로 속이고 6등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재학 3개월 만에 학질이 걸려 육군소학을 중퇴하고 광서초급사범학당으로 전학하여 법과 정치를 배웠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바이충시는 황샤오훙의 지휘 아래에 혁명에 동참, 다시 군문에 들어 1914년 우창 예비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6월 바오딩군관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마쳤다. 바오딩군관학교 졸업 이후 1916년 광서육군모범영 1사단에 배치되어 구계계의 수령 루룽팅의 수하가 되었다. 이후 연장, 영장, 단장을 거치며 승진했으며 1920년 루룽팅이 쑨원과 합작한 월계군벌 천중밍에 의해 광동에서 축출된 이후, 1921년 북양정부의 지시로 광동을 재침공했다가 오히려 역으로 광서에서 축출되어 상하이로 달아난 이후 1923년 황샤오훙, 리쭝런 등과 합작하여 신계계 파벌을 수립했다.

1923년 11월, 구계계의 심홍영과 연합하여 루룽팅의 광서 복귀를 격퇴했으며 이후 중국국민당에 가입, 국민당과 합작하여 심홍영 역시 축출하고 1924년에 광서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전계군벌 탕지야오가 광서를 침공하자 이 역시 격퇴하였다. 1924년 11월, 리쭝런이 후한민으로부터 광서전성수정독판에 임명된 이후 국민당에 복속되었으며 1925년 7월 국민정부 수립 이후 광서성 성정부를 수립하여 국민정부의 관할 아래에 들었다. 1926년 3월, 광서군이 국민혁명군 7군으로 편성되자 7군 참모장 겸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

파일:이장백.jpg
1938년의 리쭝런, 장제스, 바이충시.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당정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였다. 신계계의 7군도 이에 호응, 북벌에 참여하였고 바이충시는 북벌군 총참모차장에 임명, 호남, 호북의 우페이푸 부대, 강서성의 쑨촨팡 부대를 격파한 후 절강으로의 진격을 준비했다. 1927년 1월 1일 난창 군무선후회의에 참석했던 바이충시는 허잉친의 동로군 전적총지휘관에 임명, 장제스의 직계군을 지휘하여 상하이, 난징으로 진격했다. 2월 18일 항저우를 점령한 바이충시는 상하이 남부 방어선을 돌파, 3월 19일 오송, 3월 21일 상하이 외곽의 용화를 점령하여 3월 22일에 저우언라이가 주도한 폭동으로 무방비 상태에 가까웠던 상하이에 입성했고 3월 25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때 장제스와 중국공산당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바이충시는 장제스와 의논하여 난징과 상하이의 공인규찰대와 총공회 해산을 의논, 3일이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후 바이충시는 상하이 계엄사령관에 취임,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청방과 협력하여 규찰대를 해산하고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이때 서방언론은 바이충시를 공산당원 참수꾼이라고 불렀으며 저우언라이도 바이충시에게 잡혀서 참수당할 뻔 했으나 불분명한 과정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1]

이후 바이충시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7월에 이르러 국공결렬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가 공산당과 결렬하면서 난징 측이 가지고 있던 반공 명분의 우월성이 퇴색되자 난징 국민정부 내부에서 장제스의 지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2] 8월에 쑨촨팡이 산동에서 반격하여 쉬저우를 점령하고 탕성즈, 장파쿠이 등 우한 측의 공격이 시작되자 바이충시와 리쭝런은 우한을 공격하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장제스에게 하야를 종용했다. 결국 장제스는 8월 12일 하야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8월 30일에 쑨촨팡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이후 우한과 협상, 9월에 영한합작을 이루어냈다. 이어 새로이 성립된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참가를 거부하던 탕성즈의 군세를 당계전쟁을 통해 섬멸하면서 양호 지역을 장악, 탕성즈 휘하의 많은 부대를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허나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쑹씨 일가와 정치적인 동맹을 이루었고 후한민을 비롯한 우익 당권파와 광동파,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1928년 1월에 복직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바이충시는 1월 7일 장제스 복직에 대해 축하전문을 발표한 리쭝런과 달리 1월 9일 장황사변광저우 폭동의 주모자 및 연루자 처벌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복직을 비난하는 등 광서파에서 장제스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장제스가 휘하 장령들을 포섭하고 리쭝런이 지나친 강경론에 동조하지 않아 곧 장제스의 복귀에 순응했다.

1928년 4월 펑위샹, 옌시산까지도 합세한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바이충시는 다시 활약하여 장쭝창의 군대를 박살내고 베이징까지 진격했으며 제4 집단군 전적 총지휘, 4집단군 부사령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동북군벌의 양위팅과 협력하여 산동성에서 장쭝창, 저옥박의 직로연군을 토벌했으며 이후 장쭤린의 사망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전문을 보내는 등 동북역치에도 나름 기여를 했다.[3] 북벌 완성 이후 평진 지역에 주둔하였다.

2.3. 반장전쟁

1929년 편견회의가 개최되면서 수백만에 달하는 군대에 대한 감축이 시작되었으며 각 지방의 정치분회가 모두 폐지되기로 결의했다. 이때 바이충시는 정치위원 겸 편견위원, 제4 편견구 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어 편견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국민혁명 시기의 군비 배분 문제, 장황사변의 처리를 놓고 장제스와 악감정을 주고받은 광서파는 장제스의 중앙집권화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1929년 2월, 바이충시의 맹우인 군사참의원장 겸 우한 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이 1929년 2월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파면하고 35군장 허젠을 신임 주석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을 일으켜 중앙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바이충시는 처음에 이를 두고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지만 곧 반장으로 돌아서 1차 장계전쟁에 참여했다. 이에 장제스는 3월 26일 리쭝런, 리지천과 함께 바이충시를 면직시키고 광서파에 대한 토벌령을 발표했다.

장제스는 신속하게 탕성즈를 다시 불러와 호북에서 바이충시 휘하에 있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포섭해 기반을 확보하게 하는 한편 월계군벌 천지탕, 위한머우 등을 포섭하여 리쭝런 세력을 꺾었다. 장제스는 리쭝런이 펑위샹옌시산과 손잡을 가능성을 차단한 다음에 바이충시 휘하의 지휘관들을 대거 매수하여 반격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곧 패하여 4월에 우한을 도로 내주어야 했고 이에 궁여지책으로 서산회의파와 합작, 5월에 호당구국군을 창설, 광둥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베트남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후 1930년 3월,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이 터졌지만 장제스는 장쉐량과 합작하여 여기서도 승리했다. 펑위샹 세력은 와해되었으나 광서파나 옌시산은 그런대로 건재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도 광시로 돌아와서 세력을 재건했다.

2.4. 양광사변

1931년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그간 장제스에게 우호적이었던 광동파들이 대거 반발, 난징 국민 정부를 이탈하여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서파와 힘을 합쳐 1931년 5월 27일 광저우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난징에 대한 토벌을 외치며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제3차 초공작전에 힘쓰는 장제스와의 무력 충돌을 잠시 피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곧 호남성을 중심으로 광저우와 난징의 무력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 싸움에 속도가 붙으려는 순간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일단 난징 국민 정부와 도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1월 1일 쑨커행정원장에 취임하면서 광동파를 중심으로 한 신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리쭝런, 바이충시는 서남 정무 위원회, 군사 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여 광서성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했을 때 지지를 요구받았으나 거절했고 제5차 초공작전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멸망하고 홍군이 대장정 길에 오르자 홍군 토벌에 협조하였다.[4] 그러나 1935년 장제스가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각 지방의 화폐를 모두 중앙에서 발행한 법폐로 교환하고 각 지방의 은을 중앙으로 송금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광서파의 주요 수입원인 아편을 단속하고 광서 지방을 군사적, 재정적으로 포위하여 압박하면서 광서파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6년 양광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한민이 급사하면서 광서파는 곧 장제스가 초공을 빌미로 자신들을 무력 토벌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광동 군벌 천지탕과 합세, 항일을 구실로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호남으로 출병하여 장제스에 대해 다시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다이리를 파견, 위한머우, 리한훈 등을 초섭하여 천지탕을 하야하게 하여 순식간에 광동을 제압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각각 광서 수정 주임과 광서 수정 부주임에 임명하여 회유했고 광서파는 반장을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군사 위원회 상무 위원을, 바이충시에게 절강성 정부 주석을, 황샤오훙에게 광서성 수정 주임 자리를 내주어 광서파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한편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자신들의 기반인 광서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하자 광서파는 다시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다행으로 장제스 역시 항일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무리하게 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고 광서파도 무력으로 장제스를 타도하는 것까지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광서성 수정 주임을, 바이충시에게 군사 위원회 상무 위원 자리와 매달 200만원의 자금 지원, 광서성을 통치할 권한을 보장하자 광서파는 다시 장제스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하지만 악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강경하게 장쉐량, 양후청 토벌을 주장하며 장제스가 죽기를 바랬다.

2.5. 중일전쟁

파일:external/www.epochtimes.com/1205010858582068_1--ss.jpg
1945년 6월 13일 쓰촨에서 장제스와 함께 201사단을 사열하는 바이충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충시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부참모장 겸 군훈부장(軍訓部長)에 임명되었다. 이후 루산 회의에 참석, 일본에 맞서 온 중국이 결연히 떨쳐 일어나 맞설 것을 천명하는 루산성명의 발표에 일조했다.

일본군은 베이핑, 톈진, 상하이, 항저우가 함락된 이후 만주국을 승인하고 화북을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해왔다. 일본군의 강력함을 목도한 국민당의 모든 파벌들이 일본에게 굴복하는 것 말고 도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고, 바이충시도 그 중 하나였지만 장제스는 이를 결연히 거부, 일본과의 결전을 선포했다.

이에 일본군은 장제스의 반성을 끌어내겠답시고 더 이상 진격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 수도 난징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탕성즈가 사령관이 되어 난징을 수비하려 했지만 난징도 곧 함락되었고 수십만의 중국군 패잔병, 난징 시민, 피난민들이 일본군에게 도륙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리쭝런이 수비하던 산둥과 장쑤의 5전구를 점령하기 위해 쉬저우를 쳤다. 이에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5전구 참모장으로 급파했다. 바이충시와 리쭝런을 위무하기 위해 장제스가 직접 그들을 찾아와 격려했다.

바이충시의 부하들이 장제스가 탄 비행기를 적기로 오해하고 격추시킬 뻔 한 해프닝이 있었고 장제스는 이에 격노하여 병사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바이충시가 총사령관을 위한 특별한 환영식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자 그들을 용서해주었다. 장제스는 리쭝런과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우한으로 돌아갔고 바이충시는 장제스가 붙여준 지원군들까지 합쳐 총 60만 대군을 지휘, 타이얼좡에서 일본군 2만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너무도 강력했고 중국군의 준비는 너무 부족했다. 타이얼좡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던 우한을 공격했고 중국군은 일본군 6만명을 사살하는 치열한 저항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우한도 내주어야 했다. 얼마 후 최후의 대도시인 광저우까지 잃음으로 중국의 대도시들은 일본군에게 모두 빼앗겼다.

1938년 11월 25일 난웨 회의가 열리자 바이충시도 참석했다. 장제스는 여기서 게릴라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고 바이충시는 일본군은 러시아를 침략했던 나폴레옹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외쳤다. 바이충시는 계림 행영주임으로 임명되어 후난, 광시, 광둥 지역을 관할했다. 또한 바이충시는 전국이슬람구국동맹을 조직, 중국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중일전쟁을 이교도 일본에 맞선 지하드로 선포함으로 이슬람 교도들과 화교들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 서북부의 마씨 군벌들과 연계하는 임무도 맡았다.

1939년 1월 22일 바이충시는 국방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9년 9월 일본군 11군이 쉐웨가 지키던 후난 성의 9전구를 노리고 쳐들어오자 쉐웨를 도와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11월 6일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직접 바이충시와 그 어머니를 만나 치하하기도 했다. 1939년 11월 일본군이 중불 국경의 요충지인 난닝을 점령하자 바이충시는 난닝 탈환 작전을 총지휘하였고 22개 사단 15만 대군과 100여대의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작전에 나섰다. 바이충시는 쿤룬관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일본군 1만명을 사살했으나 일본군 5사단장 이마무라 히토시가 퇴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 막대한 항공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난닝을 탈환하진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후 난닝은 1940년 11월에 중국군에게 탈환된다. 이후 바이충시는 군훈부장까지 승진했으며 충칭과 구이린을 오가며 전쟁을 지휘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쑹메이링과 같이 케이크를 먹으며 승전을 축하했다고 한다.

2.6.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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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장제스와 함께 린뱌오의 군세를 치기 전에 병사들을 둘러보는 총참모장 바이충시

1946년 제헌국민대회가 개최되자 바이충시는 11월 22일 장제스, 쑨커, 위유런, 후스, 리쭝런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바이충시는 동북 초비 사령관에 임명되어 만주로 진공, 린뱌오의 공산군을 크게 밀어붙혀 하얼빈 함락을 코앞에 두었으며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공산당은 큰 위기에 몰렸다. 이에 공산당은 미국의 특사인 조지 C. 마셜에게 장제스가 정전 협정을 깼다고 호소하여 국민당 정부의 공격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고 매우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정전 명령에 바이충시는 지금이야말로 공산당의 씨를 말릴 절호의 기회라고 난징으로 날아와 장제스에게 공격 재개를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미국의 눈치를 살펴 이를 거부하며 강경한 주전파인 바이충시를 중화민국의 초대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만주를 떠나게 했다. 이후 바이충시는 1947년 3월 17일 타이완 지역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2.28 사건의 수습을 맡았고 바이충시의 부임 이후에 겉잡을 수 없던 학살이 진정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8_Incident_l.jpg
2.28 사건 발생 이후 타이완을 찾아 민심을 수습하는 바이충시

만주에서 장제스는 전략적 우위를 잃었고 100만에 달하는 최정예 부대도 잃었으며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절호의 기회도 잃어버렸다. 엄청나게 전력을 강화한 공산당이 자신을 인민해방군으로 선포하고 남하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게다가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영토와 부대에 집착이 강한 장제스는 각 부대들에게 무리한 사수 명령을 남발하고 일선 지휘관들을 무시한 직접 개입을 일삼아서 현장의 유연한 지휘를 방해함으로 패배에 일조했다. 국민당 정부는 만주를 완전히 잃었고 우한 근처에 대별산 해방구가 생김으로 난징도 위험해졌다. 바이충시는 33개 사단으로 대별산을 점령하고 했으나 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의 1947년 하반기 공세로 장제스는 다시 80만 대군을 잃었다. 국부군의 사기는 땅을 쳤고 앞을 다퉈서 공산당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요심 전역의 패배로 중화민국 초대 내각이었던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 쑨커가 새로운 행정원장에 취임했지만 회해 전역까지 패배하면서 국민당 정부의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고 정부 내부에서는 정부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광서파가 장제스 하야를 종용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24일, 화중 초비 총사령관이었던 바이충시는 호남성 정부 주석 청첸과 연명으로 장제스 하야와 공산당과의 평화 협상을 요구했고 1949년 1월 21일 장제스가 총통에서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이 대리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광서계는 공산당과 협상하여 장강을 경계로 중국 천하를 양분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공산당은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이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가혹한 요구를 강요했다. 이에 바이충시 등의 군부는 크게 반발하여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끝까지 공산당과 싸울 것을 결의하면서 협상은 결렬, 공산군이 4월 20일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을 점령해버렸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어지자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4월 22일 장제스를 찾아가 총통에 복직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거부했다.

바이충시는 호남으로 퇴각하여 우한 수비를 맡았다. 마오쩌둥은 바이충시에게 항복한다면 광서 파벌 소속 군대 30만 명을 그대로 거느리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바이충시는 거부했다.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바이충시는 포위 섬멸의 위기를 직감하고 창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청첸, 탕성즈를 비롯한 상계군벌들이 창사기의를 일으켜 중공에 투항함에 따라 다시 헝양으로 후퇴했다. 바이충시는 타이완의 지원을 받아가며 자신의 기반인 광시를 바탕으로 장기전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린뱌오가 헝양을 공격하자 바이충시는 린뱌오 군대를 크게 무찔러서 국공내전에서 보기 드물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쑹시리옌 등은 장제스의 총애를 믿고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했으며 광둥을 지키던 위한머우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광둥도 함락되고 임시 수도 광저우도 함락되어 수도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갔다. 결국 바이충시도 호남과 귀주를 포기하고 구이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데 쑹시리옌이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충칭으로 달아남으로 큰 구멍이 생겼고 린뱌오가 기습을 가해왔다. 바이충시는 4개 사단을 잃었고 구이린도 내주어야 했다. 바이충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결국 부하들을 나누어 일부는 난닝으로 일부는 하이난으로 달아났는데 2만명만 탈출에 성공했다.

충칭이 함락되고 대륙에서의 최후의 수도인 청두까지 밀린 후 중화민국 정부는 12월에 국부천대를 단행했다. 바이충시는 하이난으로 퇴각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에게 총통부 전략 고문 위원회 부주임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며 그에게 대만으로 가자고 했다. 리쭝런이 바이충시에게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부추겼지만 바이충시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대만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대만에서 한직에 머물게 된다.

2.7.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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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충시의 70회 생일.[5]

국부천대 이후 국민당 군사고문위원회 부주임, 국민당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타이완에서 국민당을 개편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대륙 시절에 워낙 쟁쟁했던 장제스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배척을 당했다. 한번은 바이충시의 부인이 영국령 홍콩으로 여행갈 일이 있었는데 검사요원들이 편지가 있는지를 물으면서 만약 있다면 직접 부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바이충시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며 특별한 내용이 없으니 부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후 중국 이슬람교 협회 이사장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맞선 이슬람의 지하드를 선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54년 리쭝런 부총통 탄핵에 두 손을 들고 찬성하며 자신이 더 이상 장제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 했지만 장징궈의 견제를 받아 요원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와 마당까지 모조리 다 파보면서 그를 엄중히 감시하는 등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후 당국이 리쭝런을 욕할 때마다 바이충시도 동원되어 리쭝런 비판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대만 사람들에게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와 같이 보인다면서 동정을 샀다.

1962년 12월 4일 아내와 사별했고 아들 바이센융(백선용)은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1964년 3월에 리쭝런이 망명을 권유하자 전보를 보내 거절했다. 이후 196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3. 가족

청나라 때 현장이었고 이후에는 광시은행 이사였던 마젠칭의 딸 마페이장은 1925년 10살연상의 바이충시와 결혼하여 7남 3녀를 낳았다.

5남이 저명한 작가인 바이셴융(白先勇)[6]이다. 또한 아내의 사후 젊은 간호사와 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4. 여담

광시를 다스릴 때나 북벌 때 훼불 행위를 자주 저지르고 승려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다 한다. 이건 펑위샹도 했던 일.

이슬람교도지만 돼지고기와 포도주를 좋아하였다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대단히 독실하여 1959년, 요르단 국왕 후세인의 대만 방문에 맞춰 외교부에 요청하여 타이베이에 모스크 건립을 이룩해냈고, 매우 기뻐하며 자주 예배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개혁을 주장하며 히잡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바이셴융의 회고)

무슨 원인인지 대만도 아닌 중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팬카페까지 있을 정도이며 전신(戦神), 소제갈 등으로 칭송하며 이를 의심하는 순간 무참한 공격을 받을 정도.

5. 주요경력

중화민국 역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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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신설 초대 2대
바이충시
(1946년 5월 23일 ~ 1948년 6월 3일)
허잉친

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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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서의 바이충시.

세계 정복자 3에서 3성 포병 지휘관으로 등장한다.기동력을 살리는 능력도 거의 탑이다. 3성 포병 지휘관치고는 공력력도 높은편이고 계급도 매우 높긴 하지만 가성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많이는 안쓰인다.

호이4에서 중화민국 참모진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해군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그가 속해 있던 광서 파벌이 따로 독립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민정부 소속이다. 그의 동지였던 리쭝런은 육군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역시나 국민정부 참모진 소속. 그런데 광서 파벌의 지도자는 이미 리쭝런이다.

7. 참고문헌

8. 관련문서

8.1. 인물

8.2. 사건



[1] 저우언라이가 체포되었다는 것까지는 기록이 일치하지만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4.12 상하이 쿠데타, 저우언라이/생애 문서 참조.[2] 예컨대 8월 8일 영한합작을 촉구하던 난징 국민정부의 연명 전문에서 리쭝런이 첫번째로, 바이충시가 두번째로 서명했고 장제스는 4번째로 서명했다.[3] 계계군벌 자체가 봉천군벌과 큰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관대한 입장을 취했지만 바이충시 본인은 그 중에서도 봉천군벌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장제스의 주장에 따르면, 양위팅과 접촉하여 장쉐량 제거를 기도하기도 했다.[4] 하지만 장제스가 대장정 중인 공산당을 잡겠답시고 지방 군벌들을 너무 약화시켜 룽윈을 비롯한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개입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산당과 비밀리에 협상했고 바이충시도 그 중 하나였다.[5] 옆에 앉은 사람은 당시 부총통이던 천청.[6] 대만 현대문학(바이셴융의 동인들이 낸 잡지 이름이기도 함)의 기수로 통한다. 대표작 <불효자(孽子)>는 타이베이의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소설인데, 실제로 바이셴융 본인도 동성애자. 본인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알았다 해도 이해해 줬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