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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00:24:03

박승진(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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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북한의 前 축구선수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박승진
朴承振 | Pak Seung-Zin
생년월일 1941년 1월 11일[1]
사망 2011년 8월 5일(향년 70세)
최종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포지션 라이트 하프[2]
소속 선수 모란봉체육단(?~?)
국가대표 파일: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2경기 6골

1. 인물 소개2. 축구에 입문한 계기3.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활약상4. 잉글랜드 월드컵 그 이후

[clearfix]

1. 인물 소개

북한 출신 전직 축구선수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출전해 칠레, 포르투갈을 상대로 각각 1골씩 넣어 당시 북한 선수들 중에서는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지만[3] 어째 인지도 측면에서는 박두익에 살짝 밀리는 면이 있다. 아무래도 박두익이 득점한 경기는 북한이 승리한 경기였고 박승진이 득점한 경기는 비기거나 진 경기였기 때문에 임팩트가 다소 떨어져서 그런 듯하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박두익이 아니라 박승진이다.

2. 축구에 입문한 계기

대니얼 고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해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박승진은 어렸을 때 자신이 살았던 집 옆에 기관차체육단이 있었는데[4] 그 때 선수들이 축구를 하는 걸 보고 자신도 축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축구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20세라는 늦은 나이에야 축구를 배운 박두익에 비하면 다소 빨리 축구에 입문한 셈이다. 당시 동료 선수였던 한봉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박승진은 하체 힘을 단련하기 위하여 발목에 고무줄을 매고 그 고무줄을 손으로 잡고 매일 오른발 1,000번, 왼발 1,000번씩 차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박승진은 월드컵에서 시원시원한 중거리슛을 선보였다.

3.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박승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보였던 활약상 덕분이다.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4-2-4 포메이션을 주로 썼는데 그 때 박승진은 림승휘와 함께 미드필더로 활약했다.[5]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은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영국에서는 스포츠 도박이 합법이었는데 당시 도박사들의 예측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우승확률 50%였던 브라질이었고 그 다음은 우승확률 25%의 잉글랜드, 3번째가 20%의 이탈리아였다. 반면, 북한은 16개국 출전국 중 가장 낮은 1%에 불과했다. 즉, 당시 북한은 언더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것인 만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가서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합쳐 배분된 출전권이 1장이었고, 아프리카 팀들은 출전권 분배에 항의하여 보이콧했다. 북한은 호주를 꺾고 본선 진출. 그러니 김일성이 3개 대륙을 대표한다고 했던 것.

이를 위해 3년 동안 선수단 전원이 합숙 훈련을 하고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체력과 조직력을 다지고 같은 공산권 국가인 동유럽을 돌며 꾸준히 전력을 다졌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한 북한잉글랜드 북동부의 공업 도시 미들즈브러에서 우선 소련과 1차전을 치렀다. 북한이 왜소한 피지컬을 보완하기 위해 스피드, 체력 등을 활용한 경기를 펼친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소련은 우세한 피지컬과 완력을 앞세운 더티 플레이로 나섰고 결국 북한은 0 : 3으로 소련에 완패했다. 이때 영국 언론들은 무슨 짓이냐면서 많이도 질타했다고 한다.

그 다음 상대는 바로 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칠레였다. 칠레 역시 북한의 전력으로는 녹록지 않은 상대였으나 그나마 소련이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다소 해볼 만한 상대였다. 당시 북한이 1차전에서 소련에 0 : 3으로 패했듯이 칠레 또한 1차전에서 전통의 강호인 이탈리아에 0 : 2로 패한 상황이라 두 팀 모두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이 경기를 치렀던 미들즈브러는 연고 구단이 약체였기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껴서 같은 약팀인 북한을 마치 홈팀처럼 열심히 응원했다고 한다. 미들즈브러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북한은 초반부터 기동력을 앞세운 속도전으로 칠레를 상대로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좀처럼 칠레의 골문을 열지 못했고 오히려 전반 26분, 루벤 마르코스페널티 킥 선제골을 허용했다. 그렇게 0 : 1로 끌려가게 된 북한. 이 경기에서도 지면 이젠 탈락이었다. 후반전 들어 비가 많이 오는 영국답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북한은 계속해서 태엽인형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칠레를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칠레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지던 후반 43분, 프리킥 찬스에서 수비수 림중선이 전방으로 높이 띄운 볼을 칠레 수비수가 헤딩으로 걷어냈고 그 볼을 다시 림승휘가 받아 또 전방으로 질렀다. 그 볼은 다시 또 칠레 수비수가 한 발 먼저 헤딩으로 걷어냈는데 그 볼이 그만 박승진의 발 앞으로 가버렸다. 볼을 받은 박승진은 오른발 땅볼로 강한 중거리슛을 날렸고 마침내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것은 북한이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기록한 득점이자 아시아 출신 팀이 월드컵에서 기록한 첫 득점이었다.[6]

이렇게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나 첫 승점을 획득했고 북한은 3차전까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미들즈브러 출신 영국 해군 병사가 경기장에 난입해 북한 선수들의 손을 맞잡고 행운을 빌었다고 하며 미들즈브러 시장이 박승진을 불러 그의 플레이를 극찬하며 "오늘 같은 축구를 처음봤다. 한 쪽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아시아 축구를 보며 힘을 낸다."고 말했고 악수를 나눴다고 한다.

이제 운명의 3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열렸다. 다윗골리앗의 싸움인 경기에서 북한은 반드시 전통의 강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어야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또 김일성이 대회 전에 어쨌든 한 팀은 이기라고 명령했던 이상, 반드시 이탈리아를 꺾어 넘겨야 했다. 그렇게 치러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박승진은 비록 득점을 올리진 못했지만 간접적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전반 34분, 이탈리아의 주장 지아코모 불가렐리가 박승진을 상대로 태클을 걸었는데 박승진의 몸이 공중으로 뜨더니 불가렐리의 다리 위로 떨어졌다. 불가렐리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뛸 수 없게 되었다. 당시까지는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상을 당해서 뛰지 못하게 되면 그 선수가 빠진 상태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10명이서 뛰게 되는 수적열세에 놓이게 되었다.[7] 이는 곧 북한에 호재로 작용했고 특히 박두익의 전담 마크를 맡은 불가렐리가 아웃되면서 박두익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전반 41분, 센터서클 부근에서 림승휘가 전방으로 높이 띄운 볼을 이탈리아 수비수가 한 발 먼저 걷어냈고 그 볼은 다시 하프라인 쪽으로 날아갔다. 그 볼을 북한 수비수 하정원이 한발 먼저 헤딩으로 따내 페널티 박스 정면으로 떨구어주었고 그 볼을 박두익이 받아 오른발 논스톱 강슛을 날려 선제골을 터뜨렸다. 천리마축구단을 통해 나온 북한이탈리아의 경기 영상을 보면 박두익의 결승골이 터지고 난 뒤 이탈리아 골문에다 볼을 다시 한 번 되차고 네트를 잡고 방방 뛰는 선수가 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박승진이다. 천리마축구단에 나온 인터뷰를 통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차고 내 골대를 다시 넘어댔는데 그 누가 알간? 내가 두익 동포 골에 너무나도 기쁘고 기래서 이렇게 넣구나! 두익이가. 박두익 선수가 이렇게 넣구나! 나도 다시 한 번 차 넣어 봤다는 거.
천리마축구단에서 인터뷰 중

즉, 박두익의 기분을 자신도 느껴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귀엽다고 해야 할까? 좀 유치하다고 해야 할까?[8] 비록 그 경기에서 박승진은 직접적으로 공격 포인트를 올리진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주장 불가렐리의 퇴장을 이끌어내어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렇게 박두익의 결승골로 북한은 1 : 0으로 이탈리아를 꺾어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름도 모르는 약소국가에게 아주리 군단이 격침되었던 것이 매우 충격적이었는지[9] 지금도 이탈리아의 노인들은 당시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8강에 진출한 북한은 세계최강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격침시킨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과 맞붙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박승진은 시작한지 불과 23초 만에 페널티 박스 정면 외곽 지역에서 왼발 대포알 중거리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박승진의 선제골에 이어 전반 21분, 리동운의 추가골과 불과 1분 뒤 양성국의 쐐기골로 무려 3 : 0으로 크게 앞서갔다. 그러나 북한의 천하는 딱 거기까지였고 흑표범 에우제비우를 앞세운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반격에 밀리며 결국 3 : 5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고 박승진 개인의 월드컵 기록은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도 당시 북한의 저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4. 잉글랜드 월드컵 그 이후

폐쇄적인 북한 체제 탓에 월드컵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탈북자 출신 인권운동가 강철환은 저서 <수용소의 노래>에서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 선수들이 이탈리아를 꺾고 난 이후 술집에 들러 노닥거렸는데 북한 정권에서는 이를 "자본주의에 타락한 증거"라고 보고 박승진을 비롯한 선수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강철환은 자신이 직접 그 이름도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에서 박승진을 직접 만났으며 그는 20년 째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찌나 굶주렸던지, 그는 강철환에게 내가 여기 와서 먹어본 벌레들 중 바퀴벌레가 제일 맛있다.라는 말까지 했었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도 박승진이 간첩 혐의로 요덕수용소에 수감되어 12년 동안 강제 노동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했다. 박승진이 수감되어있었던 요덕수용소는 혁명화구역 즉 일정기간이 지나면 출소가 가능했던 구역이 있어서 박승진의 경우도 혁명화구역에서 수감되어있다가 출소된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들어서 북한의 돌풍을 그린 대니얼 고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술회하였고, 이후 한동안 근황이 나오지 않다가 2011년 8월 5일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1] 박승진의 생년월일은 모두 FIFA의 공식 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이 역시도 의문스럽다. 천리마축구단에 출연했을 때 박승진이 "이렇게 골을 넣누나! 두익이가...."라고 말한 대목이 있는데 이로 보아 박두익과 최소한 동갑이거나 이쪽이 더 연상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박두익은 1936년생이라고 하니 박승진의 나이도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라면 박두익의 호적 상 나이가 1942년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박승진이 박두익의 실제 나이를 몰라서 두익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 요즘 말로 하면 우측 수비형 미드필더를 말한다.[3]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4] 이 말을 고려하면 박승진의 고향은 신의주인 듯하다. 왜냐하면 기관차체육단의 연고지가 신의주이므로.[5] 측면의 양성국과 한봉진을 미드필더로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의 위치는 높이 올라가 있어 사실상 측면 공격수로 활약했다.[6] 참고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첫 득점자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박창선이다.[7] 이후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프란체스코 토티송종국과의 경합 후 페널티 박스 안에서 쓰러졌는데 주심은 이를 시뮬레이션으로 판단해 경고 누적으로 퇴장시켰다.[8] 그런데 천리마축구단에 나온 젊은 시절 영상을 보면 똘망똘망하게 생겨서 꽤 귀엽게 생긴 편이다. 인터뷰 당시의 모습은 다 늙어서 약간 박윤배 닮은 듯하지만....[9]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16강에서 대한민국에게 이탈리아가 격침당한 적이 있지만 당시 피파 랭킹은 북한이 더 낮았다. 지금도 피파랭킹 상위권 팀이 약소 팀에게 진 경우 중 가장 랭킹 차이가 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