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 멕시코 제국 막시밀리아노 1세의 황후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 Princesse Charlotte de Belgique | ||
이름 | 프랑스어 | 마리 샤를로트 아멜리 오귀스틴 빅투아르 클레망틴 레오폴딘 (Marie Charlotte Amélie Augustine Victoire Clémentine Léopoldine) |
스페인어 | 마리아 카를로타 아멜리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클레멘티나 레오폴디나 (María Carlota Amelia Augusta Victoria Clementina Leopoldina) | |
출생 | 1840년 6월 7일 | |
벨기에 브뤼셀 라켄 | ||
사망 | 1927년 1월 19일 (향년 86세) | |
벨기에 메이서 | ||
배우자 | 막시밀리아노 1세 (1857년 결혼 / 1867년 사망) | |
아버지 | 레오폴드 1세 | |
어머니 | 루이즈 도를레앙 | |
형제 | 루이 필리프, 레오폴드 2세, 필리프 | |
종교 | 가톨릭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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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의 공주이자, 멕시코 제2제국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의 황후.2. 생애
2.1. 벨기에 공주
어린 시절 |
샤를로트가 10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루이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헐스트 백작부인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몇 주 뒤 영국 서리에서 망명 중이던 외할머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2] 및 외가 식구들과 지내게 된다.
샤를로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빼어났고, 벨기에의 유일한 공주로서 촉망받는 신붓감이었다. 1857년 7월 27일, 그녀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남동생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3]과 결혼했다. 시어머니 조피 공주는 맏며느리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는 다르게 둘째 며느리였던 샤를로트를 마음에 들어했는데, 이 때문에 샤를로트는 손윗동서였던 엘리자베트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막시밀리안과 친밀한 사이였고, 또 그녀가 뛰어난 미모로 명성이 자자했던 것 또한 그녀를 싫어한 이유였다.
샤를로트와 막시밀리안
2.2. 멕시코 제국 황후
막시밀리안 대공이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부왕으로 부임하면서 샤를로트는 이탈리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후 멕시코를 프랑스의 위성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내전에 개입하면서 막시밀리안을 멕시코의 황제로 추대했고, 이후 막시밀리안 부부는 멕시코 시티에 거주하게 된다. 황후가 된 샤를로트는 이름을 스페인식인 카를로타로 바꾸었다.1865년의 카를로타
그러나 황제가 된 지 몇 달 만에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아노 1세를 버릴 기미를 보이며 멕시코에서 프랑스 군대를 빼기 시작했다. 이는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으며, 카를로타는 남편의 황위를 지키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도움을 호소했다. 그녀는 파리, 빈, 그리고 로마의 비오 9세 교황까지 찾아갔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편집증 증상이 나타났으며 이후 멕시코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남편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67년 총살당하고 말았다.
금실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로타와 막시밀리안은 결혼 기간 동안 적법한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다.[4] 대신 멕시코 황제와 황후로 등극하면서 1865년에 아구스틴과 살바도르[5]를 입양했다. 입양된 아이들에게 몇몇 작위를 수여하긴 했지만 그들은 황실의 혈통이 아니었기에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후계자는 막시밀리아노 1세의 남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었으나 현재는 아구스틴의 후손들이 멕시코 황위 계승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1867년 1월 21일 카를로타와 벨기에의 대령 알프레드 반 데르 스미슨 사이에서 사생아 아들 막심 베이강이 태어났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6] 막심 베이강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2.3. 남편의 죽음 이후와 말년
카를로타는 이후 편집증이 점점 심해져 자신이 독살될 것이라고 믿고, 음식을 거부하는가 하면 로마에 있는 분수의 물을 마시기도 했다. 하루는 교황은 독살을 당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비오 9세에게 가서 그가 마실 코코아를 냅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고 멕시코에 대해 한창 떠들어 댔으며 교황과 같은 식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둘째 오빠 레오폴드 2세는 이러한 여동생의 상태에 충격을 받아 그녀를 트리에스테의 미라마레 성에 보낸다.[7] 이후 카를로타는 시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레오폴드 2세는 아내 마리 헨리에테를 빈으로 보내, 아내의 5촌이자 카를로타의 남편 막시밀리안의 큰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카를로타를 부탁하기도 했다.막시밀리안이 총살된 당시 카를로타의 정신병은 너무 심해서 차마 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의료진의 승인을 받아 그녀의 올케 마리 헨리에테는 막시밀리안이 브뤼셀에 온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고, 카를로타는 미라마레 성을 떠나 친정 벨기에로 돌아갔다.
벨기에에 돌아온 카를로타는 메이서의 부슈 성에 유폐됐다. 성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오빠 레오폴드 2세와 조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카를로타의 벨기에 영지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카를로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공비였기 때문에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카를로타는 나이가 들어 병이 점점 심해졌지만 역으로 편집증은 약해졌다.[8]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사랑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남편과의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했다. 막시밀리안이 총살된 지 60년 후인 1927년 1월 19일, 카를로타는 폐렴 증세가 불러온 인플루엔자로 부슈 성에서 눈을 감았다.
3.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벨기에의 샤를로트 (Charlotte de Belgique) | 레오폴드 1세 (Léopold Ier)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Herzogs Franz Friedrich von Sachsen-Coburg-Saalfeld)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Herzog Ernst Friedrich von Sachsen-Coburg-Saalfeld)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안토니아 공녀 (Prinzessin Sophie Antonia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Gräfin Auguste Reuß zu Ebersdorf) | |||
로이스에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Graf Heinrich XXIV. Reuß zu Ebersdorf ) | |||
에어바흐쇤베르크의 카롤리나 에르네스틴 여백작 (Karoline Ernestine zu Erbach-Schönberg) | |||
루이즈 도를레앙 (Louise d'Orléans) | |||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er) | |||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Louis-Philippe II d’Orléans, duc d'Orléans) | |||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Louise-Marie-Adélaïde de Bourbon)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 (Maria Amalia, principessa di Napoli e di Sicilia) | |||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Karolina von Österreich)[9] |
[1] 1817년 아이를 낳다 사망했다.[2] 루이필리프 1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의 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다. 프랑스 식으로는 마리 아멜리.[3] 샤를로트의 어머니 루이즈 도를레앙과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 이종사촌으로 둘은 6촌 친척이기도 했다.[4] 막시밀리안이 혼전에 매독 때문에 수은으로 치료를 받는 바람에 불임이 됐기 때문이라는 설, 막시밀리안이 성병을 앓았고 이를 결혼 후에 카를로타에게까지 전염시켜 둘 다 불임이 됐다는 설이 있다.[5] 멕시코 제1제국의 황제 아구스틴 1세의 손자들이다.[6] 현재까지도 막심의 부모는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와 폴란드 출신 정부의 사생아이며 레오폴드 2세가 추문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친구에게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7] 막시밀리안이 1860년에 지은 성으로, 멕시코의 황제가 되기 전 행복한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8] 사실 건강이 나빠지면 편집증을 부릴 수 있는 힘이 없어지기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신질환자들도 건강이 나쁘면 더 이상 발광하지 못한다.[9]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