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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조선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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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박연
朴延 | 朴燕
파일:attachment/박연/Weltevree.jpg
네덜란드 알크마르의 한 마을이자 그의 고향인 더레이프(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이의 동상.[1]
네덜란드명 Jan Janse de Weltevree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
출생 1595년
네덜란드 공화국 노르트홀란트주 알크마르
(現 네덜란드 왕국 노르트홀란트주)
사망 1668년 이후 추정[2]
조선
(現 대한민국)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3. 돌아가지 않은 까닭4. 대중 매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 본명은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 귀화 후 하사받은 조선 이름은 박연이다.

화란[3] 출생으로 조선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다.[4] 박연이라는 이름은 '벨테브레이', '얀'과 비슷한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2. 생애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5]인 드레이프(De Rijp) 출신으로 추정된다. 어느 시점에서 선원이 되어, 1626년에는 홀란디아(Holandia)호의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30대 초반인 1627년 바타비아으로 항해하다가 표류해 제주도에 상륙했으나 곧바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탑승한 아우베르케르크호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 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6]로 몰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중국 상선에 옮겨 탔다가 태풍을 만나 아우베르케르크호와 헤어지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침 가까이 보이던 제주도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때 중국 상선의 원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환해 도주해 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당시 네덜란드에 조선(고려)은 식인 풍습이 있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어서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먹는다고 들었다며 처음 제주에 상륙했을 때 마침 밤이라 병졸들이 횃불을 켜고 다가오자 선원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줄 알고 하늘이 사무치게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전반의 관례로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는 나라 중에 접경국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조건 명나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서로 싸우는 등 정세가 좋지 않았기에 부산의 일본 왜관에 의뢰해서 일본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려 했으나, 일본은 박연의 일행이 절리지단(切利支丹 - 크리스천)[7]이란 이유로 거절했다.[8] 그러자 조선 조정은 곧바로 송환을 포기했다. 결국, 그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해서 귀화했다. 외국 귀화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본관을 하사받은 기록이 없다. 조선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하나,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 문파도 현재는 없는 상태다. 한국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라는 기사를 냈으나 원산 박씨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에 전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등 가족이 있었고, 그렇게 후손이 이어져 소르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후손 한 명이 1991년경에 한국에 있는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한국에 입국, 학계와 치안본부(경찰청)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을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어 출국했다고 한다. 김충선과는 정반대인 경우다. 후손이 있더라도 본관이 없거나 여계 후손[9]만 남으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등 족보를 통해서는 후속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2014년 한국 쪽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네덜란드 쪽 후손과 만나 유전자 감식을 받아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후속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면 후손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한 듯하다.

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동료 2명[10]과 함께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았고 동료들은 전사했다. 그 후 항복해 온 일본인청나라 사람들을 감시하는 일,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 자리, 대포를 개량하는 일 등을 맡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헨드릭 하멜조선으로 표류했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 그것도 같은 나라 출신이 와서 하멜과 동료들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6년이나 지나서 조선에 적응이 다 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어를 같이 나눌 사람들도 병자호란 때 죽어서 도통 말을 나누지 못해서 통역을 꽤 낯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네덜란드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다만 며칠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고 한다.[11][12] 하멜에게 벨테브레이를 가리키며 "이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하멜이 "이분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13]이 틀림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자는 조선 사람[14]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을 보아 조선인들에게는 인종은 달라도 같은 조선인으로 대우받은 모양이다.

사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화이관과 덕치주의에 입각한 덕화 사상하에서는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통치에 감화되어 전향하는 경우 오랑캐가 아닌 향화인(向化人)이라 해 특별히 우대했다. 고조선과 삼국 시대 당시에 스키타이인이나 소그드인 내지는 토하라인들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남북국 시대에도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신라로 귀화하고[15] 발해에서도 소그드인과 토하라인들이 무역을 했으며, 고려 말기에 유라시안[16] 민족인 위구르[17]이 고려로 귀화하기도 했으니, 백인계 이민족이 한민족계 국가에 귀화한 것 자체는 벨테브레이가 처음이 아니었다. 단지 유럽계로서는 최초였을 뿐이다. 벨테브레이를 처음 본 토착 조선인들의 심정은 중앙아시아 백인 민족(스키타이인, 소그드인, 토하라인)을 처음 본 고조선인들과 삼국 시대 사람들 그리고 발해인들, 아랍계 귀화인이나 페르시아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신라인들, 위구르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고려인들의 심정과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오로지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윤행임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하멜로서는 표류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서 만난 이역만리에 사는 네덜란드 사람 정도였겠지만 벨테브레이로서는 수십 년 만에 만난 동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당연히 혼혈이라 네덜란드 얼굴과 조선 얼굴이 반반 섞여 있다고 놀랍다는 기록이 있다.[18] 하멜은 자신이 탈출하던 1668년까지만 해도 벨테브레이가 살아 있었다고 했는데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시점이면 이미 일흔 살이 넘은 나이로 고령이었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3. 돌아가지 않은 까닭

일단 박연의 정착에는 그의 입장이 딱히 반영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는 명-청 교체기로 정세가 불안정했고, 일본 측에서도 키리시탄 박해로 인해 그의 송환을 거부했으니 박연은 사실상 돌아갈 방법이 없어 조선에 반강제로 정착한 케이스다. 그래도 정말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면 후대의 하멜처럼 억지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었을텐데,[19]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체념이든 뭐든 눌러앉을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 기록을 추적한 결과,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호의 간부급 선원이었다.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혹은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된다. 후일의 행보로 봐서 무장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추측대로 해적에 가까웠던 셈이다. 고향이 현대에도 4,000명 정도만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상경한 뒤 동인도 회사에 입사해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선원은 대표적인 막장 인생 중 하나였고[20]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그중에서도 극동 원양 항해까지 다닐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선상의 위생과 안전이 많이 발달해 웬만해선 안전하게 돌아오는 현대에도 원양 항해는 매우 힘든 직업이라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데, 그 당시 원양항해는 살아 돌아올 확률보다 죽어서 시체도 못 찾을 확률이 훨씬 컸다. 동인도 회사 출신 선원 중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은 1/3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살이었다. 마이크 대시의 '미친 항해'에 의하면,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네덜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하는 회사이기에 생환율도 극도로 낮아서, 기록이 나쁜 사람들이나 범죄자 출신도 자주 뽑아 썼다. 안 그러면 선원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 선원 출신이라고 하면 뭐 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갔냐며 다른 뱃사람들조차 채용을 꺼렸다고 한다. 하물며 정규 상선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흉악범 취급사략선의 간부라면 안정된 직업이라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21]

당시 조선은 박연이든 하멜이든 일단 서양인이면 서양식 무기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 무기 관련 직책을 맡기려 했다. 박연은 여기에 굉장히 해박했으며, 사략선에서도 무기나 화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직책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조정에서도 계속해서 중용했다.[22] 또한, 박연은 네덜란드 본국에서 입지가 없었던 인물이며, 먹고살기 위해 거의 해적선인 사략선에 몸담아야 할 정도로 거친 생활을 보냈다. 이처럼 조선 귀화 전에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시골 흙수저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다가 바다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고, 어쩌다 이세계도착하니 거기선 나름대로 가진 기술을 인정해 줘서 고향에선 꿈도 못 꿀 벼슬에 후한 대접까지 내려주니[23] 눌러살기로 마음먹을 동기가 충분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하멜은 300굴덴이나 하는 집을 살 수 있는 부유한 건축가 집안 출신이고, 시장(mayor)의 대자(대부-대자 관계)에, 사략선 출신이었던 박연과 달리 정식 선원이었다. 그러니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 남기보다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게다가 하멜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24] 무기 쪽은 아는 바가 없었고, 조선에서도 원하는 기술을 얻을 수 없으니 하멜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부려먹히며 인질처럼 살아가던 하멜은 본국이 그리웠을 것이며 결국 조선을 떠나 귀환한 것이다. 이래저래 하멜과 벨테브레이는 처지가 많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하멜의 기록을 살펴보면 벨테브레이는 최소 73살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환갑을 크게 축하하던 17세기 기준으로는 대단히 장수한 삶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위험한 원양 사략선 선원 생활을 계속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나머지 선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을 것이다. 반면 조선에 정착하게 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신분에서 벗어나 나름 요직에 등용되고 결혼도 하는 등 큰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니, 조선에 정착한 것은 박연 본인에게도 상당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영영 고향을 볼 수 없게 된 그리움은 컸던 모양인지,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인조에게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조선 입장에서도 수십 년간 조선에서 일하며 훈련도감의 핵심 인물이자 조선의 군사 정보에 대해 깊숙히 관여하게 된 사람을 마음대로 돌려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 대중 매체

5. 관련 문서



[1] 제작자는 엘리 발튀스(Elly Baltus). 공식 홈페이지 조선에서 무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융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왼쪽 허리에는 머스킷, 왼쪽 가슴 부위에는 카메라 3대가 오른발은 자동차, 왼발은 가 조각되어 있다. 항해자의 물품과 조선의 복식, 그가 만들었던 화약 무기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 산업으로 박연의 복잡한 인생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서울어린이대공원에도 복제품이 있다.[2]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68년까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고 하니 사망 당시 나이는 최소 73세 이상이다. 하멜을 만나고 2~3년 뒤에 조선 전국에 경신대기근이라는 헬게이트가 발생했는데, 이때도 살아있었는지는 불명이다.[3] 네덜란드는 '홀란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는 홀란트를 한자로 치환한 화란으로 불렀다. 일본에선 포르투갈어 '올랑다(Holanda)'를 옮긴 '오란다'로 읽는다.[4] 정착이 아닌 서양인의 최초 조선 상륙 기록은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이는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리녜이루(Marinheiro)의 음차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그는 명나라 사행길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5] 2005년 기준으로 4,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파주시나 연천군에 속한 면읍 같은 곳이다.[6] 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7] 일본식 표현으로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다.[8]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가톨릭 탄압 정책을 취했고 결국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류한 지 10여 년 뒤엔 시마바라의 난을 겪으며 가톨릭과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국이라 가톨릭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에도 막부 사이에 분쟁이 있던 시기여서 네덜란드인에게도 적대적이었다.[9] 딸이나 손녀 등 여성 직계 자손의 후손이다.[10]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 얀 피르터르즈(Jan Pierterz).[11] 유년기에 도미하여 20대 중반에야 귀국한 유일한 박사도 유년기를 미국에서 지낸 탓에 귀국 당시에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하고 한국어 말하기가 서툴러졌으나, 그래도 한국어가 모국어였다 보니 금방 감을 되찾고 나중에는 한국어 대화는 물론 연설도 멀쩡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재필 박사 역시 미국 귀화 후 잠시 방한하여 고종 황제를 알현했을 때에는 한국어를 다 잊었다고 영어만 썼으나 이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가족 숙청에 대한 원한 때문이고, 실제로는 한국어를 온전히 기억하여 해방 후 방한에서는 서투른 부분 전혀 없이 멀쩡하게 한국어 연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영친왕 역시 유년기에 일본에 끌려가 노년에 뇌출혈 후유증으로 1963년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귀국할 정도로 오랫동안 일본 왕공족으로 살았으나 수시로 한국어를 중얼거리고 한국어로 영어 교재도 집필하는 등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쓰던 사람이 해방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멀쩡히 한국어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고 전해진다.[12] 마찬가지로 현대 귀화인들도 모국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 거의 까먹다가도 며칠 계속 쓰면 금방 능숙해지고 감을 되찾는 경우가 많다. 미국계 한국인 변호사 하일이 하도 영어를 안 써서 가끔씩 영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적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미국계 한국인 의사인 인요한도 자신은 외국인 학교와 미국 의대를 다녀서 영어도 하지만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익숙(실제로 완벽한 호남 방언을 구사한다.)하며, 형들은 영어를 까먹은 것 같다고 농담을 했었다. 물론 실제로는 하일 변호사도, 인요한 교수도, 그리고 인 교수의 형들도 모두 영어를 잘 쓰고 있으니 예능용 멘트라고 보면 된다.[13] 실록 기록에는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나와 있다.[14] 하멜 표류기에는 '코레시안(Coresi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15] 처용이 아랍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슬람 측의 기록에도 신라(알 실라)를 두고 "그 땅은 물이 맑고 땅이 좋아서 거기 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 그대로 눌러살았다"고 하고 있을 정도였다.[16] 위구르 제국의 고대 위구르족은 순혈 동북아인이었지만 한국사의 여말선초, 중국의 원말명초 시점에서 위구르족은 토하라인, 스키타이족 등 백인 민족들과의 지속적인 혼혈 때문에 유라시안화가 완료된 상태였다. 물론 현대 위구르족도 한족,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 카자흐족 등 동북아 계통 민족들과의 혼혈에 따른 영향으로 동북아 계통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존재한다.[17]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인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던 설장수의 아버지 설손이 바로 위구르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고려로 도망쳤다가 눌러살았다고 한다. 설장수는 이민 2세대에 해당한다. 설손 말고도 임천 이씨의 시조가 된 이현(李玄)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위구르 출신이다. 덕수 장씨 역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18] 물론 이들이 혼혈이더라도 한국인들과 오랜 통혼 때문에 이들의 후손들의 얼굴은 한국인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위구르계인 덕수 장씨의 후손들도 현대의 시점에서도 뜯어 보면 왠지 아랍이나 중앙아시아 느낌이 나는 사람이 있는 등 전형적인 한국인 얼굴과 조금 다른 사람은 있을 것이다.[19] 하멜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동료들과 꾸역꾸역 돈을 모아 동네 어부의 어선을 구입했고, 이 배로 일본에 건너가 탈출했다.[20]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으로 접했다면 항해가 낭만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냉장고에 싱싱한 식재료를 가득 싣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는 현대의 항해와는 달리 그 당시는 물은 변질이 쉽기 때문에 물 대신 실은 원액 수준의 독주로 목을 축이며 소금친 고무 타이어 같은 염장고기와 돌덩이 같은 십스 비스킷(ship's biscuit)을 씹어 먹어야 했고, 괴혈병각기병은 기본 소양이었다. 거기에 배 내부에 물이 고였다가는 목재가 부식되고, 균이 증식해 질병이 생길 수 있으니 허구한날 걸레질을 하고 청소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불만을 막기 위해 구타도 심했다. 19세기 미국 포경선에서 일하다 보트를 타고 도망친 선원들이 조선에 표착했다가 베이징을 통해 송환된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사람대접을 해 줬다"고 증언할 정도로, 근대까지 선상 업무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사실 현대에도 선원은 상당히 고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 여느 노동 집약 산업과 마찬가지로 가끔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국적 원양 어선에서 생기는 사고들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개도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 분야다.[21] 실제로 헤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선원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던 포르투갈 해군에 잡혀서 전부 마카오로 끌려가 교수형을 당했다.[22]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한족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삼는 동시에 병장기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이때 조선에 플린트락이 전래되었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제작에 필요한 부싯돌이 조선에선 희귀해서 양산되지는 못했다.[23] 현대로 치면 국방부 육본 정책과장(중령급) 정도로 특채한 후, 추가로 사령부 직할대 특임대장 / 외인부대 대대장 직책으로 지휘 보직까지 역임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략 중령, 5급 공무원 정도 되는 위치다. 조선의 기준으로나 현대의 기준으로나 자국민에게도 결코 낮은 벼슬, 계급이 아니며 외국인 망명자의 입장에서 매우 파격적인 인사이다.[24] 조선 측의 기록에서는 하멜도 무기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하멜은 선원 시절 회계 담당이었으므로, 총기를 다루는 법 정도는 알아도 제작하는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밝혔다.[25] Frederik Vossenaar. 현재 검색해 보면 현재 네덜란드 농림축산식품부 특사로 활동 중이다.[26] 원작에서는 주인공 윌리엄에게 조선을 탈출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조선에 정착해서 살아볼 것을 권유하는데 아예 훈련도감에 자리까지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원작과 드라마 둘 다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하는데 심지어 인물 소개 항목을 보면 "지는 마 원래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예. 인자는 마 조선 사람 다 됐다 아인교? 인자는 네덜란드 말도 다 잊아뿌고 우리 조선말이 더 편합니더. 지는 마 조선이 너무 좋심더."라고 소개되어 있다.[27] 하멜은 네덜란드 소속이다.[28] 언어 레벨이 다소 논란이 되는데, 네덜란드어 2레벨에 조선어 1레벨이다. 너무 조선에 오래 살아서 네덜란드어가 매우 어색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로 적어놨다. 참고로 하멜은 네덜란드어 4레벨 조선어 2레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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