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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0:53:51

보스턴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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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ton Massacre / 보스턴 학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stonMassacre_byAlonzoChappel1878.png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1. 개요2. 명칭에 대한 논란
2.1. 한국어 번역
3. 대중매체
3.1. 게임
4. 관련 문서

1. 개요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는 무료한 날이었다.
- 토마스 프레스턴. 1770년 3월 5일의 일기에서
영국에선 킹 거리 사건(incident on King street)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7년 전쟁으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조세를 강화하는 법안을 여러번 상정했고 이는 인지세, 타운센드법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은 본국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던 1770년 3월 5일, 보스턴 시에 주둔한 영국 육군 제29 보병연대 병력들과 주둔지 앞에 모여있던 시민과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보스턴 시에서 인부 9명과 영국군 사이에 우발적인 분쟁이 일어나고 일부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소년이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 모습을 보고 "꼭 랍스터[1] 같구나."라고 비웃으며 놀려댔는데, 이렇게 조롱을 당해 분노한 영국군 병사들이 소년을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이 아이를 때린다며 항의하자 곧 보스턴 시민들과 군인들 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위협을 느낀 육군 병사들이 장교의 명령이 없음에도 머스킷을 쏘면서 시민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로 확대된다. 이미 영국 정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이미 소규모 폭력 사건이 몇 차례 벌어지는 등, 긴장관계가 점점 더 고조되어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었으나, 식민지 총독이 시민들이 해산하면 정당한 재판을 할 것을 약속하면서 사건 자체는 일단락된다.

약속대로 발포한 병사 8명과 당일 당직사관으로 이들에 대한 지휘책임을 지고 있던 토마스 프레스턴 육군 보병대위가 군사재판에 회부되면서 반영측(병사들이 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는 측)과 영국 충성파 세력(식민지인들이 먼저 법을 위반하며 위협을 가했다는 측)간의 치열한 여론몰이가 일었고,[2]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아래 항목에서도 언급되는 폴 리비어의 판화이다. 이런 긴장 상태 속에서 기소된 영국군 병력들 측의 변호사가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자 국부중 한명으로 존경받는 존 애덤스[3]가 선임되었다. 자칫 군중심리에 의해 좌우될 뻔한 재판이었으나 재판 자체는 다수의 증인의 증언을 통해 꽤나 합리적으로 진행되었다.

재판에서 확인된 것은 다수의 군중이 꽤 심한 협박이나 위협적 행동을 보이거나 실제로 눈덩이나 날카로운 물체를 던지는 등의 행위를 했다는 점과 프레스턴 대위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배심원들이 이에 동의하면서 대부분이 무죄판결을 받고, 병사 두 명이 과실치사 등으로 자그마한 벌[4][5]을 받는 선에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보스턴 학살 사건 자체는 마무리 되었으나, 이미 반영 심리는 크게 확산된 상태로, 식민지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으며 긴장관계는 오히려 심해졌으며, 후에 일어나는 보스턴 차 사건에 영향을 주게 되면서 미국 독립 전쟁 시발점이 된다.

2. 명칭에 대한 논란

파일:masscre_really_.png
보스턴, 매사추세츠 운디드니, 사우스 다코타
1770년 3월 5일 1890년 12월 29일
5명 사망, 6명 부상 300명 사망, 50명 부상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미국 개척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들은 대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데 비해 이 사건에는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다소 비판이 있다. 사실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기엔 사상자들의 수가 매우 적으며 미국이 이 사건을 계기로 반 영국심리를 고조시키기 위해 붙인 단어였다는 논란도 있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단어선택은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더군다나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영국군이 먼저 총을 쐈다는 의견과 미국인들이 눈뭉치를 던지는 등 먼저 위협적으로 나가고 총까지 쐈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사건. 사실 이 사건이 알려진 건 폴 리비어의 판화(위의 밈에 묘사된, 영국군들이 일방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하는 판화) 때문인데, 이 판화가 위의 위키피디아판 그림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장면으로 묘사해서 여론몰이를 했다는 의견이 대다수. 실제로 리비어가 그런 성향이기도 했고.

《책 속의 책》이라는 책을 90년대에 쓴 폴 임이란 재미교포는 지들이 수백만 단위로 벌인 미국 원주민 학살은 서부개척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넘어간 주제에 고작 5명 죽은 게 학살이라며 비웃는 글을 쓰기도 했다.

2.1. 한국어 번역

미국에서 명칭때문에 논란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명칭의 어감은 한국에서 민간인 학살을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용어인 '학살'과 다르지 않다. 즉 한국과 다른 문화 때문에 'Massacre'라는 명칭이 붙은 경우가 아니므로 한국의 학계에서도 당연히 보스턴 학살이라고 번역한다. 오히려 학살이라고 번역하지 않는다면 사건의 평가를 떠나 번역으로서는 오역이다.
보스턴 학살

타운센드 관세가 폐지되었다는 소식이 식민지에 도착하기 전에, 매사추세츠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식민지의 여론을 자극했다. 영국 정부는 보스턴에서 관세 감독관을 괴롭히는 일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 도시에 영국 정규군 4개 연대를 주둔시켰다. 보수가 매우 적었던 영국 군인은 비번일 때에는 부업을 갖기를 희망했고, 이에 식민지 노동자와 경쟁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 군인과 식민지 노동자 간에 충돌이 매우 잦았다.
1770년 3월 5일밤, '자유 소년(liberty boys)'이라는 일군의 부두 노동자가 다른 사람들과 합세해 관세청 보초에게 돌과 눈뭉치를 던지기 시작했다. 영국군 연대의 포머스 프레스턴 대위(Captain Thomas Preston)는 이를 막기 위해 급히 사병을 건물 앞에 일렬로 배치했다. 격투가 벌어졌고 영국군 1명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 와중에 명백하게 몇 명의 영국군 병사가 사람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5명이 사망했다.
분명히 분명히 혼돈과 당황스러움이 빚어낸 이 우울한 사건 은, 반항적 지도자들에 의해 곧 '보스턴 학살 (Boston Massacre)'이라고 전해졌다. 이 사건은 〈보스턴 거리에 서 신에게 호소하는 무고한 피의 외침(Innocent Blood Crying to Godfrom the Streets of Boston)>이라는 널리 유포된 팸플릿처럼 으시시한-그리고 정확하지 않은-기사의 주제가 되었다. 폴 리비어(Paul Revere)의 유명한 판화는 이 사건을 평화로운 군중을 향한 계산된 공격과 같은 학살로 묘사했다. 보스턴 사람으로 구성된 배심원 앞에서 재판 받은 영국 군인들은 단지 과실치사로 유죄 판결을 받고 명목상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발행된 팸플릿과 신문은 그들이 공인된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확언했다.

앨런 브링클리 ,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 1 , 미국의 탄생: 식민지 시기부터 남북전쟁 전까지, 황혜성 ; 조지형 ; 이영효 ; 손세호 ; 김연진 ; 김덕호 공역, 서울 : 휴머니스트 (2011), 구글 미리보기:https://books.google.co.kr/books?id=XjoIDAAAQBAJ&pg=PT283&dq=%EB%B3%B4%EC%8A%A4%ED%84%B4+%ED%95%99%EC%82%B4&hl=ko&sa=X&ved=2ahUKEwiK-8ePnMn1AhWdTWwGHUUYBskQ6AF6BAgFEAI
미국인 역사학자인 앨런 브링클리의 서적에서도 보스턴 학살이라는 명칭이 "반항적 지도자들에 의해" 전해진 호칭이며 '학살'을 묘사하는 그림을 "정확하지 않은" 그림이라고 서술한다. 한국의 미국사 역사학자들이 맡은 번역에서도 학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음은 KCI 등재 논문들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현재의 역사 교과서가 다문화주의의 전파수단이 되었다고 여기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교과서 속에서 보스턴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애턱스에 대한 언급이 과중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물라토 청년을 중요인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건국 초의 교과서들이다.

김정욱. 납치된 “진실”의 역사와 “진실”을 납치한 역사: 1차 대전 이전 미국 역사교과서 속의 건국사 서술과 국민주의 역사들의 부침. 역사와경계, 86집. (2013) p.172.
잘 알려진 대로, 보스턴학살 사건도 아메리카 식민지의 노동자들이 영국군대와 충돌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희생된 노동자들의 장례식에서 보스턴 인구 약16,000명 가운데 10,000명 이상이 행진을 했다....보스턴 학살은 ‘자유의 소년들(liberty boys)’이라는 일군의 부두 노동자들이 다른 사 람들과 합세해 영국군에게 돌과 눈뭉치를 던지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丁慶姬. 세계사 텍스트 속의 미국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 역사교육, 99 (2006) p.74.
애턱스는 1770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에서 숨진 5명 중 1명이었다. 영국군 장교들을 공격한 ‘흑인, 뮬라토, 아일랜드인 등으로 구성된 폭도들의 도발’에서 “애턱스는 깃발을 들고 무리들을 이끌며 행진에 앞장섰다

이영효. 미국 흑인 건국세대의 이념과 활동. 역사교육, 117, (2011) p.170.
마침내 식민지인들의 분노는 1770년 3월 보스턴 세관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이 시위대에게 발포한 소위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이것은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보스턴 학살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식민지 미국인들의 무장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손영호. 미국 연방헌법 수정 제2조 - 무기소지권의 역사적 기원과 의미를 중심으로 -. 역사와 담론, 59, (2011) p.235.
Boston Massacre라는 명칭에서 미국인이 느끼는 어감은 한국인이 보스턴 학살이라는 명칭에서 느끼는 어감과 차이가 없으므로 명칭의 적절성을 떠나서 한국의 미국사학자들도 일관되게 '보스턴 학살'이라고 호칭한다.

3. 대중매체

3.1. 게임

4. 관련 문서



[1] 당시 영국군 병사들은 붉은 제복을 입어 레드 코트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영국군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영국군 병사들의 붉은 제복을 두고 꼭 삶으면 붉게 변하는 랍스터 같다며 놀리는 풍습이 있었다.[2] 긴장도가 계속 높아지면서, 재판도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연기되고 문제가 된 제29 보병연대는 결국 보스턴에서 모두 철수하기까지 이른다.[3] 존 애덤스 본인은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고, 실제로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의 상대측의 변호를 담당하기에는 큰 부담이 있었으나 법치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이를 승낙했다고 알려져 있다.[4] 엄지손가락에 H자 낙인이 찍히는 벌. 지금 생각해보면 후덜덜한 벌이지만, 당시는 이 정도는 '가벼운 처벌'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5] 사실 이건 영국법의 전통 중 하나인 성직자 혜택(Benefit of clergy)이라는 면책권을 사용했다는 뜻으로 평생 한번만 허용되는 권리라 다시 쓸 수 없음을 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