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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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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항구에서의 차 파기(The Destruction of Tea at Boston Harbor)》
나다니엘 커리어(Nathaniel Currier), 1846, 캔버스에 유화
[1]

1. 개요2. 명칭3. 배경4. 전개
4.1. 전국적 확산4.2. 후폭풍4.3. 미국 독립 전쟁으로의 발전
5. 기타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보스턴 티 파티)은 조지 시대 영국이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에 시행했던 (茶, 홍차)[2]에 대한 과세 문제로, 1773년 12월 16일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 본토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적 선박을 습격, 당시 사치품이었던 차 상자들을 바다에 폐기한 사건이다. 대중적으로는 미국 독립 전쟁의 본격적인 불씨가 된 사건 중 하나로 유명하다.

물론, 이 사건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게 된 데에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과정, 식민지인들의 본토에 대한 반발심 등이 있었다. 과세 문제는 특히 식민지의 주권과 대표성 문제로 이어지는 민감한 사안이었으며, 이것이 차에 대한 과세를 결정한 홍차조례(Tea Act of 1773)에 의해 일거에 폭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차가 술처럼 시민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떼려야 뗄 수 없는 기호품이었던 것, 식민지의 사상가들이 차를 통해 활동자금을 얻었던 것 등의 이유도 있었다.(→ '배경' 및 '미국 독립 전쟁으로의 발전' 문단 참고)

2. 명칭

물고기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잔으로 차를 만들어 준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즐겁다.
참가 당시 16세였던 대장장이 조슈아 와이어스
'티 파티(tea party)'를 직역하면 '다회', '다과회'로, 한국어로 번역할 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는 차를 바닷물에 타 마신다는 미국식 특유의 위트를 없앤 심심한 표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티 파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0여 년 후인 1830년대이고, 당대에도 이 사건은 '홍차 파기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이라고 불렸다. #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번역 명칭 가운데에는 원어 그대로 티 파티를 사용하기도 하고, 해당 국가의 '다과회'란 표현으로 번안하거나, 혹은 '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ボストン茶会事件(보스턴 다회 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은 '보스턴에서 차를 쏟아버린 사건(波士頓傾茶事件)'이라고 하는데, 외국어여서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파사둔(= 보스턴) 경차 사건'이라는 표현은 당장 한국어와 비교해도 동사 하나가 더 붙은, 한국어로 치면 '보스턴 차 투척 사건' 내지 '보스턴 차 폐기 사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3. 배경

1755년에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전쟁에서 영국 정부가 전비로 많은 돈을 쓰다보니 그와 함께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3]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64년부터 설탕세,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과세가 부담이 되었던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했으며, 나중에가면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한다. 특히 13개 식민지인들은 이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고자,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을 갖기를 희망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4](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란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흉흉했다.

식민지인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워낙 영국 정부가 진 빚이 많다보니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 확대 차원에서 홍차조례(Tea Act of 1773)를 제정했는데, 이를 미국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청나라네덜란드-(밀수)→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되어 식민지와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이는 당시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반면 네덜란드는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 같은 가격에 수입된다면 관세를 물지 않는 쪽이 싸기 때문에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차 무역에서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는 와중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공세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자국 동인도 회사가 어려움을 겪자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청나라동인도 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은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영국법을 통해 동인도 회사가 직접 미국 식민지에 홍차를 납품하게 되었고, 이 덕에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의 홍차 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불만을 가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여기까지 보면 '도대체 왜 반발한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때 불만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의 홍차 소비자들이 아니라 식민지의 홍차 밀수 상인들이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 않았고 이를 통한 거래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차법이 통과가 되어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지게 생겼으니 당연히 분노가 치밀 수밖에.

그리고 홍차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에는 북미 대륙의 여러 영국 식민지들에는 각각 따로 총독이 파견됐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5] 이들 식민지들을 통솔할 본국 정부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식민지들은 서로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미국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좀 더 부여받았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책을 제정 및 실행할 때 각 식민지 총독과 협의 끝에 결정되었는데,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은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직접세를 부과한다는 것을 식민지 자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이었던 새뮤얼 애덤스.[6] 그는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

4. 전개

파일:external/images.fineartamerica.com/the-boston-tea-party-1773-granger.jpg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한 100여 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7] 그들은 손에는 도끼를 들고, 얼굴에는 석탄 가루를 바르고 있었는데 이는 어두운 저녁을 이용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을 방지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차가 잔뜩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이었다. 100여명이 총 3그룹으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은 배의 선장과 선원들을 도끼로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빼앗았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나무 상자들을 박살 낸 다음 그 안에 있던 우이옌(武夷巖)[8] 차들을 모두 바다에 쏟았다. 이렇게 뿌려진 우이옌 차의 총 가치는 9,000파운드로, 현재 한국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 원에 달한다.

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이걸 주워다 끓여 마신 사람도 있었다는데, 당시에는 차가 워낙 비싸서[9] 중산층이나 귀족들조차 한 번 달인 다음 도로 건져 건조시켰다가 찻물이 아예 안 나오고 맹물만 나올 때까지 우려먹는 귀하신 몸이던 시기였으니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이때 이걸 주워다 끓인 차의 조리법을 아예 상품화한 제품도 있다.

4.1. 전국적 확산

1773-1774년의 겨울 동안 보스턴 차 사건을 본뜬 소규모의 차 사건들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뉴저지의 그리니치에선 마을 광장에서 차를 불태웠고 필라델피아에선 차를 실은 선박들을 위협하여 돌려보냈다. 메릴랜드의 체스터타운도 보스턴의 예를 따랐고 뉴욕에서도 선장이 배 바닥에 숨겨두었던 차 상자가 발견되자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볼티모어 인근의 아나폴리스에선 차를 실은 배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선 시위대의 분노를 실감한 선장들이 자발적으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4.2. 후폭풍

영국은 당연히 이 사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정작 미국 내에서조차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식민지의 주요 인사인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도 "이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미치고 정신나간 짓거리다!"라며 대차게 깠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10]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꿔주자고 했고, 실제로 11억 원가량의 성금을 모으는데 성공하여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오히려 거절당했다.

이 사건으로 단단히 분기탱천한 영국은 식민지를 크게 단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으며, 실제로 13개 식민지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이전까지는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던 의원들도 모두 식민지인의 권리를 규제하는 법안에 대거 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774년, 영국은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통치 방식에서 영국 정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식민 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이는 식민지인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4.3. 미국 독립 전쟁으로의 발전

차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시작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이 사건 하나 때문에 독립 선언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미국 식민지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건국의 아버지'들이 최초에 했던 생각도 완전한 새 나라의 건국이 아닌,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다만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 라는 표현에 대해서 실제로 영국 본토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다 "그럼 아메리카 식민지 니네도 우리 영국한테 대표를 보내든가?" 라고 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주체가 되는 식민지만의 의회를 원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거부했다.[11]

즉, 최초 식민지 주민들의 생각은 아예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더 나은 대우, 나아가 자신들만의 의회를 꾸려서 조세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정도였다. 당시의 영국이나 지금의 영국이나, 영국의 정체성은 '연합 왕국'으로 영국 내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등의 구성원들이 의회도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가다. 이 때문에 미국의 입장은 "우리들을 식민지인으로 차별하지 말고,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왕국'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기네들을 연합 왕국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대우해 달라" 라는 정도에 더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독립하자는 의견이 불붙기 시작한 때는 전쟁 중에 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발간된 후, 군주제 자체의 모순과 저항권, 그리고 천부인권에 대한 고찰이 심화되면서였다. 결국 사건 자체는 프랑스 혁명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한 후대의 필요에 의해, 어느 정도 독립 전쟁과의 상징적인 관련성이 접목되며 윤색된 것이기도 하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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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챌린저광고
이 차(茶; 마시는 차)와 타는 차(車)의 발음이 같다는 것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일부러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포드 자동차가 포드 모델 T(Tea)를 개발해서 대량 생산으로 식민지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자, 영국이 롤스로이스로 대표되는 자국의 자동차 산업에 위협을 느껴서 포드 차량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이에 분개한 식민지인들이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실린 롤스로이스를 전부 바다에 밀어 버렸다는 것(...). 백괴사전에서는 대놓고 이 사건을 이렇게 꼬아 놓았다.
이 영상 속 영국군은 처음엔 미국 국가를 BGM으로 넣어놨다가 끝에 슬쩍 Rule Britannia로 BGM을 바꾸거나 영국 왕실과 싸워 이긴 것을 축하하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및 영국 왕실 굿즈 머그컵을 사용하는 등 소위 킹받는 느낌의 소소한 미국 디스를 잔뜩 하고 있다. #[13]
* 2021년 영국에 사는 미국인 유튜버가 물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우유를 부은 후 티백을 넣자, 영국인들이 이렇게 를 끓이는 게 아니라고 댓글[14]을 달았다. 이에 대해 카렌 피어스[15] 주미영국대사가 대사관 트위터 계정에 차를 올바르게 끓이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미영관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어스 대사는 "미영관계로 정의된다.[16]"를 읊은 후 영국 육군 - 영국 해군 - 영국 공군 순서대로 차 끓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17]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약 70년 후에 그려진 기록화이므로, 상상화이다.[2] 영어에서 'tea'는 별도의 수식이 없으면 홍차를 가리킨다. 이는 당연하게도 영어가 영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3] 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선 프랑스나 원주민 등 경쟁자를 싹 쓸어버리면서, 이제 본국에게 개겨도 OK라는 안보 환경을 얻었다.[4]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 라고도 쓰인다.[5] 그래서 당시 북미에는 '미국인(American)'이란 인식 자체가 없었다.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버지니아주 사람(Virginian)', '필라델피아 사람(Philadelphian)' 등으로 여겼다. 애초에 State는 주(province)라는 뜻도 있지만 국가(nation)의 뜻도 있다. 즉 버지니아 국가, 필라델피아 국가 등. 마키아벨리의 '국가론'에서도 국가를 Stato로 썼을 정도다.[6] 미국에서는 존 애덤스와 함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애국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맥주 덕후들에게 사랑받는 유명한 보스턴 라거의 이름이 바로 그에게서 따온 것.[7] 사건의 실행자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했지만, 퍼포먼스 의도 이상은 없다고 보인다. 애초에 백인이 옷만 바꿔 입는다고 그걸 인디언으로 착각할 리가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여론은 드물었다. 미국과 영국의 반응도 비슷했다.[8] 중국 푸젠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의 한 종류, 존 애덤스의 일기에 차 종류가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9] 당시는 인도 아대륙에서 차 플랜테이션이 시작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북미나 유럽에 유통되는 홍차는 모두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었다.[10]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은 식민지 의회의 대표 자격으로 영국 의회에 출석하기도 했다.[11] 이것도 영연방을 유지하면서 조세를 포함한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세금 안 내겠다는 소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식민지에 대한 조세 특권 주장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12] 이 말 자체는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가 한 말이다.[13] 실제 저 영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영국군의 주력 전차인 챌린저 2에 저렇게 물을 끓일 수 있는 간이 포트가 들어가 있다. VBE(Vessel Boiling Electric) 혹은 BV라고 한다.[14] 홍차는 캐나다메이플시럽처럼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핵심 품목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홍차 수급 문제가 영국의 주요 과제였고, 지금도 홍차 가격 인상은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15] Dame Karen Pierce[16] Anglo American Relation is defined by tea[17]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영국 정부의 과도한 차 관세로 인한 보스턴 차 사건인 걸 보면 공교롭다고 볼 수 있다.[18] 해당 사건의 배경이 된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모티브 중 하나가 영국인 만큼 나름대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다도부 차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