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사고 요약도 | ||
일어난 날짜 | 1945년 1월 30일 | |
유형 | 운항 중 소련 잠수함 미사일 공격으로 침몰 | |
일어난 위치 | 폴란드 해상 | |
탑승인원 |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 10,582명 |
벡터 호 | 13명 | |
사망자 |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 9400명 |
벡터 호 | 11명 | |
구조자 |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 0명 |
벡터 호 | 2명 | |
선종 | 여객선 |
1. 개요
위의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기념하기 위해 히틀러가 명명한 나치 선전용 크루즈 선박.1937년 출항한 구스틀로프호는 당시 최대 규모의 유람선으로 길이 208m, 폭 24m, 배의 수심이 7m로 선원 426명과 승객 1463명을 여유 있게 수용할 수 있었다. 배 안에는 ‘기쁨(혹은 즐거움)을 통한 힘’이라는 히틀러의 모토에 손색 없게 식당 2개, 강당 3개, 극장, 뮤직살롱, 체육관과 수영장 시설 그리고 분만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호화 유람선은 계급 없는 사회를 상징하며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구스틀로프호는 카데에프[1] 선단에 소속된 25,000t급 크루즈선이었다. 카데에프는 이 배를 독일인 노동자와 농민들을 위해 만든 ‘계급차별 없는 휴가선’이라 선전했다. 정부의 보조를 받아 아주 싼 승선비로 수영장과 레스토랑 등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고, 처음 얼마 동안은 선실 위치와 상관없이 비용이 똑같았다. 때문에 독일 나치당 정권 복리후생 정책의 대표적 성과로써 선전되었고,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이후로는 병력 수송선, 병원선, 훈련선 등으로 쓰였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발트해에서 발생한 사상 최대의 선박 참사의 주인공이 되었다.[2] 9,000명이 넘는 독일 민간인 희생자의 대부분(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하지만 전후 독일주류사회에서는 이‘히틀러의 타이타닉’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것이 터부시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가해국인 독일이 일으킨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고 자국민들이 입은 참사를 공론화하면 극우파가 성장할 빌미를 줄까봐 전후 독일 당국에서도 침묵하였다.
1936년 8월 1일 제3제국은 함부르크의 블롬&보스 조선소에서 여객선을 건조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독일이 이러한 여객선을 건조하기로 한 배경은 다름 아닌 독일노동전선 때문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정기선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건조에 착수한 것이며, 또한 독일은 KdF(Kraft durch Freude : 즐거움을 통한 힘)이라는 노동자 복지 정책의 일환과 동시에 당시에는 여객선이 한 나라의 국력의 상징이었기에 독일도 그러한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조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건조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으며, 마침내 1937년 5월 5일에 진수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에리히 레더 제독 등 중요 요인들이 참석하였고, 히틀러는 원래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돌프 히틀러호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하였으나, 이름이 너무 어그로를 끈다는 지적을 받고 대신 위에서 언급한 스위스 나치당 간부인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이름을 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라고 명명하였다. 이후의 건조도 잘 진행되어 갔으며, 마침내 1938년 3월 15일 완성되어 여객선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 제원
- 총 톤수: 25,484t
- 전장: 208.5m
- 전폭: 23.59m
- 길이(흘수/마스터 키): 6m(이물)~7m(고물)/56m
- 층수: 8층
- 엔진 출력: 9,500 hp (7,100 kW)
- 엔진: 8실린더 MAN 디젤엔진 4개
- 추진: 4엽 스크류 2기, 2축 추진
- 속도: 15.5노트(28.7km/h)
- 항속거리: 15노트시 12,000 nmi (22,000 km)
- 승객: 1,465명
- 방 489개
- 2인승 침대 248개
- 4인승 침대 241개
- 승무원 417명, 수병 173명.
- 무장(1945년): 105mm 대공포 3정과 20mm 기관포 8문.
- 제작비: 2,500만 제국마르크.
3. 시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내부 모습.
제3제국의 선전용 여객선인 만큼 상당히 신경을 썼다. 객실은 매우 깨끗하였고 음악 카페와 수영장, 운동시설 등 다양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공짜로 술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4. 활동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1939년 여름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 파견되어 있던 콘도르 군단을 독일로 귀향시키기 위해 에스파냐로 항해하는 등 그저 평범한 여객선으로 사용되어왔으며, 노동전선 소속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휴가를 위한 함부르크-남아메리카 행의 정기 여객선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9년 9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크릭스마리네에 징발되어 병원선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 11월 20일에는 병원선처럼 보이기 위해 다시 도색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발트 해로 이동하여 고텐하펜 항으로 다시 이동하여 거기서 1945년 1월까지 단 한 번도 출항하지도 않은 채 해군 장병들을 위한 숙소 및 복지시설로 사용되었다.
5. 비극적인 최후
해상사고 요약도 | ||
일어난 날짜 | 1945년 1월 30일 오후 9시 | |
유형 | 피난민 운송 중 소련 측 잠수함 공격에 의해 3발의 어뢰에 명중, 격침. | |
일어난 위치 | 발트해 | |
좌표 | 55°7' 0" N, 17°41' 0" E | |
탑승인원 | 공식 | 6,050명 |
비공식 | 10,582명 | |
사망자 | 비공식 | 9,343명 |
실종자 | 미상 | |
구조자 | 1216명[3] | |
선종 | 여객선 |
1945년,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패하여 후퇴하면서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해왔다. 이에 칼 되니츠 제독은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 작전(Operation Hannibal)"으로 당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해군 및 민간 선박을 동원하여 동프로이센의 민간인들과 장병들을 철수시키려 했다.[4] 동프로이센의 그디니아에 위치한 고텐하펜에 정박 중이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도 즉각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탑승자들은 공식적으로 서부에서 유보트 승조원으로 활동하게 될 제2잠수함훈련전대 소속 해군 장병 918명, 배 승조원 173명, 해군 여성 보조요원 373명, 부상병 162명, 피난민 4,426명으로 총 6,050명이다. 그러나 군인들의 제지에도 항만으로, 작은 보트를 통해 끊임없이 피난민들이 몰려왔다. 당시 18살의 출납책임계 임용지원자였고, 2004년에 출간된 <SOS 빌헬름 구스틀로프 - 역사상 가장 큰 선박재난 SOS Wilheim Gustloff - Die größte Schiffekatastrophe der Geschden>의 저자인 하인츠 쇤(Heinz Schön)의 증언에 따르면 7,956명부터는 모든 종이가 바닥이 나 적지를 못했다고 하였다. 결국 추가로 승선하여 총 10,582명이 탑승하여 1월 30일에 동부 잠수함 사령부로부터 활동 중이던 3척의 소련 잠수함이 철수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뒤, 크릭스마리네의 어뢰정(E-Boat)들 중 1척인 뢰베 정의 호위를 받으며 항구를 떠나 서부의 킬 항구로 이동을 한다.
위에서부터 빌헬름 찬 소령, 프레드리히 패터슨 선장.
그러나 당시 배에 탑승하고 있던 4명의 간부들 중 해군소령 빌헬름 찬과 배에서 최선임 상선사관인 프레드리히 패터슨 선장이 항로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대서양 전투에서 유보트 함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던 빌헬름 찬 소령은[5] 발트해의 항만시설들을 복구하여 활동 중인 소련 해군의 잠수함들과 소련 공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육지를 따라 후퇴하는 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패터슨은 소련 육군 기갑부대의 진격속도와 이를 지원하는 소련 해/공군기에 발각되어 공격받을 것을 우려하여 깊은 바다를 통해 최대한 빨리 항해하여 거리를 단축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패터슨의 결정이 받아들여졌고,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 슈비네뮌데(Swinemünde) 부근 레바 북동쪽 28마일 부근, 즉 슈톨페방크(Stolpebank)라는 해안구역을 출항한 지 5시간 후에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기뢰부설함 1척이 지원을 한다는 연락을 받은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시각이 밤인 관계로 아군 선박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배의 빨강과 초록의 항해등을 켰다.
소련 잠수함 S-13과 함장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 소령
그러나 발트 해에는 아직 소련 해군의 S급 잠수함 S-13이 남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잠수함은 독일과 소련의 군사교류를 위해 만들어져 제공된 잠수함들 중 하나였다. 상부로부터 귀환을 명령받았으나, 마리네스코 소령은 한 명의 독일인이라도 죽이는 것이 조국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거부하였지만, 그동안의 성과가 없었기에 위로부터 한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작은 전과라도 올릴 기회를 벼르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S-13은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를 포착, 2시간에 걸친 공격 준비 끝에 밤 9시에 4발의 어뢰를 발사, 3발을 명중시켰다. 각 어뢰에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 동지를 위해>, <레닌그라드를 위해>, <소비에트 인민들을 위해> 등의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어뢰 공격을 받은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어뢰의 직접 공격으로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수영장에서 팔이 잘린 여성이 바닷물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갑판으로 몰려들면서 혼란이 생겼고, 이에 수천 명의 민간인들을 106m에 이르는 온실에 가두고 장교들이 권총을 들고 지켰다. 그러나 배는 급속히 침몰하기 시작하였고, 1시간 10분 이후인 10시 10분에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빌헬름 구스틀로프에는 구명 조끼나 구명 보트가 넉넉하게 수납되지 못한 상태였고, 이 시기의 발트 해의 수온 또한 4℃에서 영하 16℃까지 내려가서 바다에는 얼음이 떠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조원들은 군인들과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태웠고, 결국 무려 9,400여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어뢰 공격 후 퇴각하던 S-13을 추격하던 뢰베는 즉시 구조요청을 하였고, 이에 근교에 있던 순양함 아드미랄 히퍼가 1시 30분에 먼저 도착한 데 이어 어뢰정 T-36, TF-19, TS-2, M-341, 초계정 VP-1703, M-387, M-375, 피난민을 수송하던 독일 Kdf 소속이었던 화물 증기선 괴팅겐(Göttingen) 호가 도착하였다. T-36은 564명, 어뢰정 뢰베는 472명, 기뢰부설함 M-387은 98명, 기뢰부설함 M-375는 43명, 기뢰부설함 M-341은 37명, 괴팅겐 호는 28명, TF-19는 7명, 나중에 도착한 고텐란트 호는 2명을 구출하여 총 1,216명(독일의 기록에서는 1,252명)의 생존자들은 콜베르크나 슈비네뮌데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때 구스틀로프의 임시병원에서 태어난 1살짜리 아기는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11일 후인 1945년 2월 11일에도 S-13은 독일 여객선 SS 게네랄 폰 슈토이벤(General von Steuben) 호를 격침시켜 타고 있던 피난민 및 부상병 4,300여명 중 4,000명이 발트해의 얼음장 속으로 사라졌다. 히틀러가 이 보고를 듣고 마리네스코 소령을 독일 국민의 적(personal enemy)이라고 부를 정도였다.[6] 이후 마리네스코는 근무태만으로 시베리아로 보내졌다가, 스탈린 사후 복직되어 해군에서 다시 복무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1990년에 소련 최고 훈장인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위가 추서되었으며, 현재 그의 고향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타이타닉의 무려 6배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최대의 참사였으니 비극이긴 하지만, 피난민 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타고 있었기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국제법 위반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고, 이런 걸로 피해자 행세를 하기엔 나치가 한 짓이 너무 심했던지라 독일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독일은 전쟁 초기에 소련 해군 병원선 아르메니아(병원선) 호를 격침시켜 최소한 5,000명 이상을 죽인 적이 있는지라,[7] 소련보고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역사상 병원선에 대한 공격으로는 가장 피해가 크기도 했고 아르메니아호의 사망자 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와 고야 호[8]에 이은 3위다.
6. 다시 세상에 드러나다
2002년, 귄터 그라스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사건을 다룬 소설 "게 걸음으로 가다(Im Krebsgang)"를 출간하여 사건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인양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현창.
그리고 폴란드 조사팀이 북위 55도 7분 동경 17도 42분 60m 바다 속에서 잔해를 발견하였다.
다음은 해양 탐사가인 울리히 레스테마이어(Ulrich Restemeier)가 최초로 발견했던, 고텐하펜 28.8km에서 떨어진 수심 23m 쯤에 있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같은 운명에 처해졌던 슈토이펜 호를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폴란드 해양 탐사가가 직접 들어가 촬영하고 남긴 글. 내셔널 지오그래픽 2월 19일 호를 자체 영어 번역으로 의거하여 요약한 것이다.
The Baltic Sea was as gray as storm clouds when the four of us jumped into the water. We each had several tanks filled with different mixtures of gases for breathing at depths up to 235 feet (71 meters)—more than twice as deep as conventional scuba diving. The waves kicked us around as we swam, so when we reached the marker buoy, we submerged as quickly as possible, and the weight of our equipment seemed to lighten.
폭풍이 불고 마치 짙은 구름처럼 어두운 발트해에 우리 4명은 발트해로 뛰어 들어갔었다. 각자 235피트(71m, 통상 스쿠버 다이빙 수심의 2배) 깊이에서도 숨을 쉴 수 있도록 고안된 혼합 기체가 실린 산소통을 여럿 들고 내려갔다. 헤엄쳐 들어갈 때 파도가 심해지는 것을 본 우리 일행은 위치 지정 부표에 도달하자마자 재빨리 잠수하였다. 지고 있던 장비가 가벼워진 듯 했다.
We were on our way to examine the recently discovered remains of Steuben, a German ship sunk during World War II with the loss of perhaps 4,500 lives—three times the death toll of Titanic. A private Swedish team and later the Polish Navy had both scanned the ghostly wreck with sonar. But only a handful of divers had seen it since it was hit by two torpedoes from a Soviet submarine on February 10, 1945.
우리는 최근에 발견된 슈토이펜 호의 잔해를 탐사하기 위해 내려갔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침몰하여 타이타닉 침몰 사건 당시 사망자의 3배가 넘는, 4,500명이 목숨을 잃은 배였다. 처음에는 민간인 스웨덴 팀, 그리고 나중에는 폴란드 해군이 음파탐지기(소나)를 이용해 난파된 유령선을 조사했다. 그러나 1945년 2월 10일 소련 잠수함(S-13)의 어뢰 두 발에 맞아 격침된 배를 본 사람은 오직 손을 꼽을 정도였을 뿐이다.
By the time we reached 70 feet (20 meters), the sea was as dark as night: Even with our powerful underwater lights we could see nothing but the dive line from the buoy going down. The deeper we went, the gloomier it felt. Finally at 150 feet (45 meters) a huge shape emerged from the darkness—difficult to recognize at first because it was resting on its side. But as we swam closer, I made out the outline of the gracious ship's hull, crowned with an elegant railing and straight rows of portholes.
우리가 20m까지 도달했을 때, 바다는 밤처럼 어두워졌다. 강한 수중 조명등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표에서 물 밑으로 내려간 잠수선밖에 볼 수 없었다. 깊게 내려갈수록 음울한 느낌이 더해져갔다. 마침내 45m에 이르자 암흑 속에서 거대한 형상이 드러났다. 옆으로 누워있었기에 배의 잔해라고 인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헤엄쳐 갈수록, 나는 우아한 난간과 한 줄로 반듯한 현창(뱃전에 낸 창문을 뜻하는 말)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배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Thoughts of the terrible scenes from 60 years ago rushed through my head as I swam past the promenade deck. I imagined the crowd of people squeezed into the narrow passageways, struggling to reach the stern deck in time to find a raft or a boat. When I peeked inside through the large, smashed windows, what surprised me most was the complete emptiness: no ship equipment, no baggage thrown around, nothing. The power of the water surging through the decks must have been so tremendous that it swept away everything, leaving just naked walls.
산책 갑판을 헤엄쳐 지나갈 때 60년 전에 벌어졌을 끔찍한 상황들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갔다. 나는 뜰 것과 보트를 찾아 폭이 좁은 갑판으로 몰려들었을 것 같은 절규에 빠진 승객들을 상상했다. 내가 박살난 창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완전하게 텅 빈 것을 보고 놀랐다. 배 장비도, 둥둥 떠다니는 수하물조차 모두 없었다. 갑판을 통해 밀어 들려오는 강력한 물의 힘이 모든 것을 쓸어 가서, 적나라한 선체만 남은 것이다.
Past the promenade deck I saw the entrance to the concert halls that had been packed with wounded German soldiers, and I knew that inside there must be the remains of thousands of them. I remembered what Polish Navy officers had told me after they'd investigated the wreck in late May 2004. They'd taken a good look at the sea bottom with a remotely operated vehicle and found the entire area around the wreck "covered with human remains, skulls, and bones."
산책 갑판을 통과한 나는 독일군 부상병으로 가득했고, 아직도 수천 명의 유골이 남아있을 콘서트 룸의 입구를 보았다. 2004년 5월에 잔해를 탐색한 폴란드 해군 잠수사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났다. 원격 조종 장비로 바다 밑까지 샅샅이 탐색했던 그들이 잔해의 주변 바닥이 "인간의 사체, 두개골, 그리고 뼈로 가득했다"고 말하였다.
We didn't swim into the ship. Not only because it was dangerous—we might get entangled and run out of air before we could get free—but also because we believed this underwater tomb deserved respect. It was easy to imagine the dramas that had taken place here, having heard the stories myself from some of the last living survivors. Despite what the Nazis had done to my country, I had tears in my eyes as I listened.
우리는 배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지 않았다. 배 안에 갇히거나 걸려서 빠져나오기 전에 산소가 고갈될 위험이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장된 이들의 영면을 존중하려는 마음에서였다. 마지막에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지라, 이 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나치가 나의 조국에 한 짓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눈물이 났다.
폭풍이 불고 마치 짙은 구름처럼 어두운 발트해에 우리 4명은 발트해로 뛰어 들어갔었다. 각자 235피트(71m, 통상 스쿠버 다이빙 수심의 2배) 깊이에서도 숨을 쉴 수 있도록 고안된 혼합 기체가 실린 산소통을 여럿 들고 내려갔다. 헤엄쳐 들어갈 때 파도가 심해지는 것을 본 우리 일행은 위치 지정 부표에 도달하자마자 재빨리 잠수하였다. 지고 있던 장비가 가벼워진 듯 했다.
We were on our way to examine the recently discovered remains of Steuben, a German ship sunk during World War II with the loss of perhaps 4,500 lives—three times the death toll of Titanic. A private Swedish team and later the Polish Navy had both scanned the ghostly wreck with sonar. But only a handful of divers had seen it since it was hit by two torpedoes from a Soviet submarine on February 10, 1945.
우리는 최근에 발견된 슈토이펜 호의 잔해를 탐사하기 위해 내려갔다. 제 2차 세계대전에 침몰하여 타이타닉 침몰 사건 당시 사망자의 3배가 넘는, 4,500명이 목숨을 잃은 배였다. 처음에는 민간인 스웨덴 팀, 그리고 나중에는 폴란드 해군이 음파탐지기(소나)를 이용해 난파된 유령선을 조사했다. 그러나 1945년 2월 10일 소련 잠수함(S-13)의 어뢰 두 발에 맞아 격침된 배를 본 사람은 오직 손을 꼽을 정도였을 뿐이다.
By the time we reached 70 feet (20 meters), the sea was as dark as night: Even with our powerful underwater lights we could see nothing but the dive line from the buoy going down. The deeper we went, the gloomier it felt. Finally at 150 feet (45 meters) a huge shape emerged from the darkness—difficult to recognize at first because it was resting on its side. But as we swam closer, I made out the outline of the gracious ship's hull, crowned with an elegant railing and straight rows of portholes.
우리가 20m까지 도달했을 때, 바다는 밤처럼 어두워졌다. 강한 수중 조명등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표에서 물 밑으로 내려간 잠수선밖에 볼 수 없었다. 깊게 내려갈수록 음울한 느낌이 더해져갔다. 마침내 45m에 이르자 암흑 속에서 거대한 형상이 드러났다. 옆으로 누워있었기에 배의 잔해라고 인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헤엄쳐 갈수록, 나는 우아한 난간과 한 줄로 반듯한 현창(뱃전에 낸 창문을 뜻하는 말)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배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Thoughts of the terrible scenes from 60 years ago rushed through my head as I swam past the promenade deck. I imagined the crowd of people squeezed into the narrow passageways, struggling to reach the stern deck in time to find a raft or a boat. When I peeked inside through the large, smashed windows, what surprised me most was the complete emptiness: no ship equipment, no baggage thrown around, nothing. The power of the water surging through the decks must have been so tremendous that it swept away everything, leaving just naked walls.
산책 갑판을 헤엄쳐 지나갈 때 60년 전에 벌어졌을 끔찍한 상황들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갔다. 나는 뜰 것과 보트를 찾아 폭이 좁은 갑판으로 몰려들었을 것 같은 절규에 빠진 승객들을 상상했다. 내가 박살난 창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완전하게 텅 빈 것을 보고 놀랐다. 배 장비도, 둥둥 떠다니는 수하물조차 모두 없었다. 갑판을 통해 밀어 들려오는 강력한 물의 힘이 모든 것을 쓸어 가서, 적나라한 선체만 남은 것이다.
Past the promenade deck I saw the entrance to the concert halls that had been packed with wounded German soldiers, and I knew that inside there must be the remains of thousands of them. I remembered what Polish Navy officers had told me after they'd investigated the wreck in late May 2004. They'd taken a good look at the sea bottom with a remotely operated vehicle and found the entire area around the wreck "covered with human remains, skulls, and bones."
산책 갑판을 통과한 나는 독일군 부상병으로 가득했고, 아직도 수천 명의 유골이 남아있을 콘서트 룸의 입구를 보았다. 2004년 5월에 잔해를 탐색한 폴란드 해군 잠수사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났다. 원격 조종 장비로 바다 밑까지 샅샅이 탐색했던 그들이 잔해의 주변 바닥이 "인간의 사체, 두개골, 그리고 뼈로 가득했다"고 말하였다.
We didn't swim into the ship. Not only because it was dangerous—we might get entangled and run out of air before we could get free—but also because we believed this underwater tomb deserved respect. It was easy to imagine the dramas that had taken place here, having heard the stories myself from some of the last living survivors. Despite what the Nazis had done to my country, I had tears in my eyes as I listened.
우리는 배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지 않았다. 배 안에 갇히거나 걸려서 빠져나오기 전에 산소가 고갈될 위험이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장된 이들의 영면을 존중하려는 마음에서였다. 마지막에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지라, 이 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나치가 나의 조국에 한 짓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눈물이 났다.
글은 직접 탐사했던 대원 중 한 명인 마르친 얌코브스키(Marcin Jamkowski)가 제공.
탐사가 끝날 무렵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찾아온 독일 대사관 외교관인 하인츠 페터스(Heinz Peters)가 8월 마지막 주에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화환을 던지며,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했습니다. 꽃들은 마치 산 역사를 증인하는 듯 잠시 떠 있다가 곧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그는 화환을 던진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May the people along the shores of the Baltic Sea never again witness war," says Peters. "It was the war started by Germany, which as a last and tragic consequence claimed the lives of those whom we today remember."
"발트 해안 주변의 주민들이 다시 전쟁의 목격자(증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독일이 시작한 이 전쟁은, 우리가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 결과로 종전을 맞았습니다."
"May the people along the shores of the Baltic Sea never again witness war," says Peters. "It was the war started by Germany, which as a last and tragic consequence claimed the lives of those whom we today remember."
"발트 해안 주변의 주민들이 다시 전쟁의 목격자(증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독일이 시작한 이 전쟁은, 우리가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 결과로 종전을 맞았습니다."
7. 등장 매체
사실 첫 언급은 <고텐하펜에 밤이 내리다>이란 서독 영화에서부터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미국과 영국의 방해를 받았고, 상영 당시에 서독 정부를 통해 상영 제지를 요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거기다 사건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 기록보관소에 묻혀야 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 사건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다시 그 빛을 보여 재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1:23:17 시점부터 들리는 어뢰 피격으로 인한 수중 폭발음이 1959년 제작에 1960년 개봉된 영화 치고는 상당히 리얼하다.
이러한 관심에 힘을 얻어 독일에서 TV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에서 독일인들을 미화하고, 소련군의 잔인함을 너무 강조했다며 항의를 하기도 했으나 곧 취소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두 매체는 빌헬름 구스틀로프가 어떻게 침몰하고 민간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루츠 붕크의 <역사와 배>에서 소개되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보기.
[1] Kraft durch Freude; KdF. 독일 노동자와 농어민 등에게 선박 여행을 시켜줌으로써 나치체제를 선전하려는 계획의 하나로 조직된 나치의 하부 조직중 하나이며 뜻은 '즐거움을 통한 힘'이다.[2]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보다 사망자 수가 무려 6배이다.[3] 독일측 기록에는 1,252명[4] 이는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북아프리카 본국이 습격당하자,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북아프리카로 최대한 배를 긁어모아 탈출한 사건을 따와 작전명으로 쓴 것이다.[5] 이 사람은 은근 경력이 무시무시한데 U-56을 지휘하던 시절 수많은 호위함대를 뚫고 윈스턴 처칠이 승선한 HMS 넬슨을 뇌격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처칠이 넬슨에 승선해 있는지는 몰랐다고.) 다만 뇌격 자체는 발사한 어뢰 3발중 2발은 명중했으나 불발, 1발은 중도 폭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6] 참고로 소련에서도 스탈린이 직접 명명한 소련 인민의 적이 있었다. 루델의 경우는 아예 목에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렸으나 끝내 살아남았다.[7] 대충 집계라도 난 구스틀로프 쪽과 달리, 이쪽은 정확한 집계도 존재하지 않는다.[8] Goya. 1940년 4월 4일 노르웨이에서 건조된 배수량 5230톤의 화물선으로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한 이후 독일군에 징발되어 독일군 U보트의 해상보급기지로 이용되다가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마찬가지로 한니발 작전에 투입되어 7천여 명이 넘는 피난민 및 부상병들을 태우고 항해하던 도중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잠수함 L-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생존자는 겨우 182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