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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5:34:40

사방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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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方將軍

1. 개요2. 사례3. 관련 문서

1. 개요

사방장군은 후한의 관직인 좌(左)장군, 우(右)장군, 전(前)장군, 후(後)장군을 일컫는 말이다. 일선에서 종군하는 무장들이 군사적 공헌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이 위부터는 능력과 공적 이전에 윗선에서 정치적인 고려가 필히 들어간다. 사실 거기장군직이 황실 외척들에게 주어지던 관례나 조위의 대장군직에 군사적 공적이 희미한 하후돈이 제수된 점 등에서 알 수 있듯 대장군, 표기장군, 거기장군, 위장군은 국정 운영의 러닝메이트 역할을 하는 자리지 일반적인 군사령관직이 아니다. 사정·사진 장군은 후한 말 군벌의 난립이 심화되면서 지방 군벌들 달래는 감투로 쓰이며 역시 정치적인 면이 강했다.

형식상으로는 위아래가 없는 동등한 직위지만 국가와 시대에 따라 서열이 나뉘기도 하였다. 고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보통 좌장군이 1위가 되었고 후장군은 4위 고정이었다.

다만 조위와 촉한이 건국할 당시엔 전장군이 좌장군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조조와 유비가 사방장군을 임명할 당시 전장군에 각각 하후돈과 관우를 임명하고, 좌장군엔 우금과 마초를 임명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후돈의 경우 조조가 위왕에 오를 당시 다른 신하들은 모두 (제후국인) 위의 관직을 받았는데, 어쨌든 황제국인 한의 관직을 혼자 받을 정도로 특별대접이었다.[1] 이를 그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자 전장군에 임명된 것이다. 사방장군 임명 전에 하후돈과 우금은 잡호장군이었지만 하후돈이 더 높았는데, 관도대전 당시 하후돈이 건무장군→복무장군으로 오르는 동안 우금은 비장군→편장군으로 벼슬이 올랐다. 또한 조위가 황제국이 된 이후 초대 대장군이 바로 하후돈으로, 당시 거기장군이었다가 하후돈이 죽고 나서야 대장군에 오른 조인보다도 더 높은 직위였다. 권한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뭘로 봐도 하후돈이 우금보다 명확히 높은데, 그런 하후돈이 전장군, 우금이 좌장군이었다는 것이다.만약 좌장군>전장군이라고 친다면, 원래부터 우금보다 벼슬이 높고 조조가 친형제 수준으로 총애하면서 개인침실까지 출입하는게 가능했던 하후돈이 사방장군 임명 때만 갑자기 우금보다 관직이 낮아졌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된다.

관우의 경우 하후돈>우금처럼 전후 벼슬로 명확해지진 않은데 마초는 유비 휘하에 오기 전에 독립군벌이라 공식적인 직위는 관우보다 높았고, 관우는 촉한이 황제국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비가 사방장군을 임명할 당시 마초에겐 가절을, 관우에겐 가절월을 내렸다는 점을 보면 명확하다. 가절이란 전시에 신하를 처벌할 권한이고, 가절의 권한을 포함해 가절을 받은 신하까지도 처벌할 권한을 가진게 바로 가절월이다. 즉 가절월은 가절의 명확한 상위호환이다. 그런데 가절을 받은 마초가 가절월을 받은 관우보다 높은 직위라면 '하급자가 상급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모순이 생겨버린다.
또한 간접적으로 당시 관우는 형주 측 총사령관으로 마초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볼 수 있다.

관우와 하후돈 두 경우 모두 군주의 오른팔이자 형제같이 친밀한 사이였고, 거병 이후부터 공식 벼슬과 상관없이 많은 권한을 지녔었으며[2],나라가 기반을 잡고나서 교통정리를 할 때쯤 군주가 사방장군을 임명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세력의 2인자가 전장군에 올랐다는 것은, 최소한 조조와 유비는 사방장군 중 전장군을 으뜸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2. 사례

동탁은 정권을 잡은 후 원술에게 회유할 목적으로 후장군 직위를 줬으나 원술은 달아나 반동탁 연합에 합류했다.

유비조조를 따라 허도에 가서 좌장군의 벼슬을 받았는데 유비는 얼마 있지 않아 원술 토벌을 구실로 허도를 떠나 반조조의 기치를 올렸고, 황실에서 정식으로 내려준 좌장군 인수는 협천자로 다른 군벌들에게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던 조조를 엿먹이는 좋은 수단이 돼버린다.

유비가 한중왕에 된 후에 관우를 전장군, 장비를 우장군, 마초를 좌장군, 황충을 후장군에 봉했다.[3] 관우와 황충은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함으로써 마지막 관직이 되었으나 유선의 장인인 장비는 유비의 칭제 이후 거기장군에 임명되었고, 군웅 출신으로 객장 대우를 받은 마초도 최종적으로 표기장군까지 역임했다.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사방장군 4인과 같은 전으로 묶인 조운을 더하여 오호대장군이라는 가공의 관직을 만들었고, 이후 이에 자극 받은 위와 오의 팬들이 역시 같은 전으로 묶인 인물들을 오자양장이나 강동십이호신으로 칭하는 계기가 되었다.[4]

위나라의 오자양장커리어 하이이기도 하다. 전장군에 장료. 우장군에 악진, 서황. 좌장군에 우금, 장합이 각각 역임하였다. 우금은 관우에게 패하고 투항했다가 오에 의해 위로 돌려보내진 뒤 안원장군으로 관직이 떨어졌고, 장합은 최종관직은 정서거기장군[5]이지만 이는 명예직으로 보는 게 옳다. 거기장군은 요동의 공손연이었고, 정서장군은 하후연 사후 공석이었으며, 장합이 그만한 권한을 누린 적이 없기에 명목상의 직위였다. 애초에 위나라는 조조의 친족들이 군부의 최상위를 독점하고 있었다.

오자양장, 오호대장군을 제외한 유명인물로는 전장군에 이엄, 주환. 우장군에 반장. 후장군에 문빙, 주령 등이 있다. 이외에도 전장군을 거쳐간 하후돈이나 후장군을 거쳐간 조홍 등이 있으나 이들의 경우 사방장군이 최종관직이 아니기에 이들 직위로는 불리지 않는다.

3. 관련 문서



[1] 제후국 위나라의 왕 조조는 순전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한나라의 신하이다. 즉 한나라의 관직을 받은 하후돈은 (당연히 위왕보다는 아래지만) 형식상으로나마 조조와 같은 반열인 한나라의 제후가 되는 셈이다. 이때 하후돈의 사양하는 상소에 조조는 "가장 좋은 것이 스승 같은 신하요, 다음이 벗 같은 신하라 했소. 구차하게 위의 관직일 필요가 있겠소. 신하는 몸을 굽혀 주군을 섬기면 충분하오."라고 만류하는 등 노골적으로 특별대접을 해주었다. 조조가 하후씨란 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며, 조조와 친척이 확실한 조씨 집안 조인과 조홍도 이런 대접을 받진 못했다.[2] 하후돈은 잡호장군인 복파장군으로서 대규모 군단의 도독이었고,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익주공방전 당시 후방인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탕구장군에 불과했다.[3] 여기서는 유일하게 가절월을 받은 관우가 당연히 으뜸이고, 마초, 장비, 황충 순이다. 마초는 개국공신 장비보다 유비를 위해 세운 공이 훨씬 적지만, 당시 그의 입지와 명성 때문에 높은 직위를 받은 것.[4] 장악우장서전은 '태조의 양장으로 군공으로 으뜸',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은 '강동의 호랑이 같은 신하들'로 전원을 수식하는 반면 계기가 된 관장마황조전은 5인 전원을 수식한는 말이 없다. 관장을 만인지적으로, 마초를 오랑캐의 용맹에 의지했다고 하고, 황조를 고제의 충신들과 비교하며 유비의 조아였다 평하는데 전부 따로 놀고 있어 연의 창작인 오호대장군 외의 호칭을 만들기도 어렵다.[5] 진서에 따르면 최종관직은 거기장군이지만 여기선 정사 삼국지의 명제기와 장합전의 기록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