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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6:04:01

사사키 코지로

파일:Sasaki-Ganryu-(Kojiro)-by-Utagawa-Kuniyoshi-1845.png
에도 시대에 그려진 상상화.
이름 佐々木 小次郎
출생 1585년
사망 1612년 4월 13일 (향년 26 ~ 27세)

1. 개요
1.1. 유파1.2. 실존 여부1.3. 간류지마(巖流島)
2. 대중문화 속의 사사키 코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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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일본검호.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대결로 유명하다.

미야모토 무사시라이벌로서 모노호시자오(物干し竿;빨래너는 장대)라는 3척에 달하는 노다치[1]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사키 가문은 원래 전국시대 이즈모 슈고[2]였던 아마고 집안의 원류이자 무가에서는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집안이다. 다만 사사키 코지로가 이 가문의 사람인지, 아니면 성을 사칭하거나 우연히 성씨가 같았을 뿐인지는 알 수 없다.

1.1. 유파

간류(岩流 또는 巖流)라는 유파를 창시하여 간류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 그의 호가 간류우(岩龍 또는 岸柳)인 관계로 이를 유파로 착각했다는 설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사사키 코지로는 츄죠 나가마사가 창시한 츄죠류(中条流)를 배웠다고 하니[3] 기본적으로는 츄죠류의 아류였을 것이다.

참고로 에도 시대에 돗토리 현에는 실제로 '간류'라는 검술 유파가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사사키 코지로와 이 실제 간류와의 관계는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 지금은 실전되어 어떻게 알아볼 방법도 없다.

성명절기는 츠바메가에시인 듯하며 전해지는 묘사를 보면 강하게 내려벤 직후 그대로 베었던 방향으로 올려치는 기술로 보인다. 이름의 유래는 제비를 잡으려고 만든 기술이라든가 제비의 모습을 본뜬 기술이라든가 혹은 나룻배에서 강 위를 날라가던 제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베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이와 관련되어 코세츠(虎切)이라는 것이 유명하다. 사실 츠바메가에시 자체가 수수께끼의 기술인데 그 기술이 어떤 것인지 추측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여러가지의 기술 중 하나가 코세츠이며, 돗토리 현 지방에서 내려오는 고류 검술인 간류우(岩流 혹은 巖流)의 오의이다. 이 기술이 츠바메가에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은 이유는 코세츠가 크게 횡베기를 해 상대방의 칼을 흔들리게 한 뒤 그 방어하는 칼이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역으로 다시 횡베기를 해서 상대의 칼을 날려버리고, 가사베기로 적을 참살하는 기술이어서 츠바메가에시처럼 빠르게 3번 베고, 막을 수 없다는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사자와 사호의 소설에서는 코세츠가 바닥을 쓸듯이 한바퀴 돈 검이 갑자기 위에서부터 원베기를 시전한다고 나와있다. 이 또한 츠바메가에시의 유력한 추측 중 하나로서 제비'뒤집기'라는 이름에 착안한 것. 내려친 후 날을 뒤집어서 빈틈을 노려 들어오는 적의 손목을 올려베는 필살의 반격 기술로서 별도의 명칭이 있으나 코세츠는 아니다.

1.2. 실존 여부

'사사키 코지로'라는 풀네임이 맞는지가 논란인 것이지 후나지마에서 무사시와 결투해 패한 간류라는 자가 실존했다는 건 사실로 여겨진다. 무사시 측의 기록 뿐만이 아니라, 제3자의 기록인 누마타가기 등 교차검증이 가능한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사키 코지로라는 풀네임이 분명히 등장하는 이천기(二天記)의 기록 자체는 확실하지 않다. 관계자들이 전부 죽고 난 다음에 쓰여진 책인데다가 사사키 코지로가 18세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대결하였다는 기술 역시, 1755년 이천일류의 사범인 도요타 세이슈(豊田正脩)가 저술한 무사시의 전기인 무공전(武公伝)에서 '간류가 18세에 일파를 일으켰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꾸며낸 것이다. 이러한 '이천기'의 창작은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대결에서도 나타나는데, 실제 요시오카의 세이주로나 덴시치로라는 인물 역시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나오츠나와 나오시게라는 인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간류 코지로' 등으로 불렸는데, 사후 130년이 지나 쓰여진 이천기에서야 비로소 뜬금없이 '사사키'라는 성이 갑자기 붙어서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무송전에도 '코지로'라고밖에 안 적혀 있는데. 그 이후 이 의문의 검사의 풀네임이 '사사키 코지로'가 된 것은 바로 이 이천기에 근거한 것이다. 때문에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은 후세의 창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간류가 유파의 이름이냐 아니면 해당 인물의 호냐 하는 논란도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사사키 코지로는 츄죠류(中条流)의 토다 세이겐(富田勢源)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들의 활동 연대를 기반으로 역추산을 해보면 흔히 매체에서 젊은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나이가 많은 노검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토다 세이겐 스승설을 채택한다면 간류섬 결투 당시의 나이는 아무리 낮춰 잡아도 50대가 된다. 만화 시구루이에서도 노년에 시력을 잃었던 토다 세이겐이 장도를 사용할 수 없어서 단도로 장도를 제압하는 기술을 연마하였는데[4] 이를 상대해 주었던 제자인 사사키 코지로는 자연스럽게 장도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 때문에 사사키 코지로가 실제로는 노인이었다는 루머가 퍼지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썰이라 현실성이 없고 그보다는 카네마키 지사이(鐘捲自斎)의 제자라는 설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역시 미야모토 무사시보다는 나이가 많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최근에는 이토 잇토사이의 제자라는 설도 있는 듯.[5]

1.3. 간류지마(巖流島)

'간류(岩流)'는 3척의 칼을 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만났으며, 무사시는 목도의 일격으로 이를 격파했고 코지로는 즉사했다.
- 최초의 기록에 해당하는 1654년(무사시 사후 9년 후)의 코쿠라 비문(小倉碑文) -
코쿠라 비문이 최초다보니, 이를 근거로 무사시는 지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고 일갈하고는 간류를 죽였다고 한다.
- 무공전(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 '이천기'의 원사료) 中 -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쪽의 병법이 최고인가?라는 논쟁을 벌이다 그렇다면, 사부끼리 싸워서 이긴 쪽의 병법이 더 강할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서 무사시와 간류 코지로가 맞붙게 되었다.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코쿠라한(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대리인 누마타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 中 -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巖流島) 결투와 간류, 즉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검사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인 셈이다.
다만 만약 이 기록을 올바르다 본다면 의문스러운 점이 몇 가지 남는데, 엄연히 일대일 결투였던 만큼 간류는 혼자 나타났는데도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巌流島)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巌流島)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간류가 무사시와 약속을 해, 이자키로부터 후나지마(후일의 간류지마)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어부가 간류를 말렸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라고 말하며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

이와 관련한 음모론도 존재하는데 사실 사사키 코지로는 카쿠레키리시탄이었고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결투는 사실 결투가 아니라 코지로를 끌어내 암살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누마타카기의 기록을 염두에 보면 결투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사시의 제자들이 코지로를 죽였다는 부분이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카쿠레키리시탄인 코지로를 부담스러워한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사주해 결투를 빙자해 코지로를 암살했다고 본다. 그럴싸한 주장이긴 하나 역시나 근거가 있는지는 의문. 그저 흥미로운 한가지 주장으로 보면 될듯.

2. 대중문화 속의 사사키 코지로

파일:佐々木小次郎1.jpg 파일:佐々木小次郎.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묘하게 어디서 나오든 대부분 미소년 기믹을 자랑한다. 미소년이 아니더라도 미남계가 대부분.
이것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에서의 묘사를 따른 것으로, 이 작품에서는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은 전형적인 미남형으로 등장.


[1] 도신 약 1m. 별로 안 길어보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일본도의 날 길이가 70cm 정도이고, 당시 일본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50cm대였음을 감안하면 굉장히 긴 칼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오오타치(=노다치)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한다. 애초에 오오타치의 기준이 3척 이상인 검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보다 더 길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2] 슈고다이묘(守護大名)이라 하며, 무로마치 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영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3] 카네마키 지사이가 만든 카네마키류(鐘捲流)를 배웠다는 설도 있지만 카네마키리 지자이가 츄죠류를 배워 만든 일파이기 때문에 츄죠류의 아류인 것은 매한가지다.[4] 실제로 토다 세이겐은 1척2촌, 즉 36cm쯤 되는 몽둥이로 신도류의 달인을 한방에 처치한 이야기가 유명하다.[5]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창작물 중 국내에서 잘 알려진 축에 들어가는 만화 배가본드에서는 두가지 설을 모두 차용하여 버려진 아기 코지로를 카네마키 지사이가 거두어 기르다가 이토 잇토사이가 데려간다는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6] 건담 X와 데스티니 건담을 믹스 커스텀한 기체다.[7] 블리치이치마루 긴이 사용하는 참백도 신창이 이와 같은 능력.[8] 작가는 야마네 카즈토시(山根和俊), 원제는 간류(ガンリュウ).[9] 이 악령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깃들어있다가 그를 암살한 핫토리 한조, 야규 쥬베이 순으로 옮겨가며, 최후에는 무사시의 몸을 노리다 사망.[10] 이는 무사시도 마찬가지다. 검술계 칭호를 다는데는 유명한 검호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가장 빠른데도 검호들과 싸울 수 없어 매우 곤란하다. 이로 인한 이점도 있는데, 천람시합에 나가면 검호들이 안나와서 그대로 우승해버리고 바로 검성을 달 수 있다. 다만 적어도 좋은 무기를 구해가지 않으면 창쟁이들에게 참교육당할 수 있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11] 코지로만이 아니라 우호도가 제일 높은 검사의 검을 소지하는건데, 코지로에게 도전하는 선택지가 나올때쯤이면 코지로 호감도가 그 수준이 돼서 그렇다.[12] 이도류를 쓰고 외모가 비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