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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0:08:32

사지 케이조


파일:사지 케이조.jpg
1. 개요2. 생애

1. 개요

佐治敬三
(1919년 11월 1일~1999년 11월 3일)
일본기업인. 산토리의 2대 CEO였다. 산토리의 CEO였던 경력보다 후술한 지역비하 사건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19년 11월 1일, 오사카부 히가시구에서 산토리 창업자인 토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2년경에 외가에서 입양을 하여 성이 '토리이(鳥井)'에서 '사지(佐治)'로 바뀌었지만, 자신은 오사카의 친부모 밑에서 계속 살았다.

1940년 9월 23일에 친형 도리이 기치타로가 향년 31세로 사망했다.

그는 오사카부 이케다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42년 4월에는 오사카 제국대학 이학부 화학과 졸업한다. 재학 중에는 유기화학의 권위자인 코타케 나지오 교수를 사사[1]했다.

1945년 10월에는 산토리의 전신인 '고토부키야'에 입사했다. 1946년 2월에 고토부키야(현 산토리 홀딩스 주식회사)의 투자로 재단법인 식품화학 연구소(현 산토리 생명과학 재단)가 설립되었으며 그는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다. 이 무렵부터 효고현 카와베군 카와니시쵸(현·카와니시시)에 살게 되어, 그는 사망할 때까지 계속 카와니시시에서 살았다.

1961년에 그는 고토부키야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1963년 3월 사명을 고토부키야에서 산토리로 변경했다. 1969년에는 도리이 음악 재단(현·산토리 음악 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한다. 1971년에는 칸사이 공공 광고 기구(현재의 AC 재팬)를 설립했으며, 1979년에는 식품화학연구소를 재단법인 산토리생물유기과학연구소로 개칭하고 같은 해에 산토리 문화 재단을 새롭게 설립해, 「지역 문화상」 「학예상」을 창설했다.

1980년 생물유기과학연구소 이사장으로 부임해 일본 최초의 박사후연구원이 되었다. 1985년에 오사카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했다. 1987년 오사카 바이오사이언스 연구소 설립에 자문위원으로 관여했다.

그러다가 그와 산토리에게 두고두고 남을 흑역사가 생긴다.

2.1. 도호쿠 지역비하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지 케이조 도호쿠 지역비하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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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1988년 2월 28일 TBS 테레비 계열의 보도 프로그램 'JNN 보도특집'에서 도쿄의 수도 기능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 방송에서 사지 케이조 회장이 오사카 상공회의소장 자격으로 출연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것이다.
仙台遷都など阿呆なことを考えてる人がおるそうやけど、(中略)東北は熊襲の産地。文化的程度も極めて低い。
"센다이시 천도니 뭐니 하는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중략) 도호쿠구마소의 산지다. 문화적으로도 엄청나게 수준이 낮은 동네다."
원래 구마소고대 일본에서 규슈 남부 지방의 이민족, 즉 하야토을 일컫는 말로 당시 야마토 조정에서 붙인 멸칭이다. 북부 지방의 이민족은 에미시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현재의 아이누 족이다. 이러한 이민족을 가리키는 멸칭들이 이후 문명 수준이 낮은 미개인,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멸칭을 도호쿠 사람들에게 썼으니 명백하게 도호쿠 지방을 비하하는 표현이 된 것이다. 더구나 사석에서 한 발언도 아니고 방송으로 나갔으니 후술하듯 일파만파 난리가 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실 도호쿠 지방은 매체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며 시골동네 이미지로 통하는 등의 편견이 있었던 곳이라 '쿠마소'가 아니라도 이미 '문화적 수준이 낮은 동네'라고 말한 것부터 상당한 지역 비하성 발언이다. 그런데 상기했다시피 북부는 차라리 에미시라고 불렸으면 불렸지 구마소라고 불리진 않았다. 물론 구마소의 의미가 확장적으로 야만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긴 하지만 애초에 위치부터가 틀린 것이다(…). 이거 규슈 사람들도 화내야 할 일 아닌가?[2]

이 사건 때문에 산토리는 도호쿠 지방에서는 단단히 찍혀서 시장 점유율이 꼴찌로 전락했다. 게다가 사지 케이조가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지역이 하필이면 센다이였는데 이게 대상을 정말로 단단히 잘못 잡은 것이, 도호쿠에서도 최대 시장인 센다이 시민들은 센다이를 세운 다테 마사무네를 닮아서 일본에서 가장 프라이드가 강한 데다 일본의 1인당 위스키 소비 1위 지역이 미야기현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도호쿠 전역에서는 산토리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도호쿠의 모든 가게, 특히 센다이시에서 산토리 제품이 아예 증발되었다. 이 때 산토리가 CM을 내리고 AC 재팬(당시 공공광고기구) CM이 방영되기도 하였으나 AC도 산토리가 설립에 관여했기 때문에 대체된 AC 재팬의 광고도 자체 프로그램 선전으로 다시 대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가 국회까지 갈 지경에 이르고 산토리가 도호쿠 시장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3] 결국 장본인이었던 사지 케이조 자신이 직접 도호쿠 6개 현청에 가서 도게자를 하며 사과했어야 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부사장을 대리로 내세워서 대응하려고 했으나 당시 나카무라 타다시 이와테현 지사가 "이게 고개 좀 숙인다고 끝날 일이냐"며 사죄를 거부했고, 키타무라 마사야 아오모리현 지사도 "도호쿠 사람들은 (이 발언 때문에) 극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며 쓴소리를 하는 등 차가운 반응이 돌아와서 해당 발언을 한 사지 케이조가 직접 각 현에 사죄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변경해, 1988년 3월 16일에 공식적으로 사죄를 표명했다

2.2. 이후

해당 사건이 일어난 이후인 1990년에 그는 산토리의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다. 1991년에는 산토리 생물 유기 과학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1999년 11월 3일 오사카부 스이타시의 오사카대학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0세.
[1] 스승으로 삼다.[2] 웃기게도 규슈 쪽에서는 되려 산토리 공장 유치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오이타현아오모리현과 공장 유치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오이타현의 지역 경제인 연합회에서는 사지를 응원하는 강연회까지 열었다고(…). 그리고 당시 오이타현과 아오모리현이랑 동시에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던 구마모토현호소카와 모리히로 당시 구마모토현 지사(훗날 총리가 된다.)는 해당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3] 그의 발언은 오사카 상공회의소 회장의 지위로서 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CEO인 산토리에도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