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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04 21:46:44

삼성 라이온즈/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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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넌트레이스
전기리그 성적
순위 승률
5 21 3 26 0.447
페넌트레이스
후기리그 성적
순위 승률
2 25 1 24 0.510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1.2. 선수 이동1.3. 신인 선수
2. 전지훈련3. 정규 시즌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4.2. 타자
5. 수상 및 기록

1. 스토브리그

1982년 8월에 미국 선진야구를 소개하고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홈런왕 출신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부사장 행크 아론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팀을 초청했다. 행크 아론은 정규시즌이 끝난 후인 10월에 브레이브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 선수들을 데리고 와서 16일부터 27일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삼성을 비롯해 MBC 청룡, OB 베어스 등과도 경기를 가졌다.

더불어 1982년 10월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도 방한해, 삼성 구단과 기술 제휴를 맺었다.

1.1. 코칭스태프 이동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음에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그치자, 구단에서는 1982년 11월 임신근 코치를 미국으로 연수 간다면서 실질적으로 해임했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수비코치를 맡고 있던 재일 한국인 이충남조감독이란 직책으로 영입했다. 말로는 서영무 감독을 보좌하고자 함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꼬투리를 잡아 서영무를 감독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속셈이었다. 서영무도 이에 맞서 이충남의 현역 시절 팀 선배였던 김호중 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투수코치였던 임신근이 떠나고 이충남은 내야수 출신이기에 투수코치가 따로 필요하다는 게 그 명목이었지만.

1.2. 선수 이동

1982년 12월 7일에 서정환해태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KBO 사상 첫 트레이드. 당시에는 프로야구에 지역성이 강할 때라서, 타 구단으로 트레이드된다는 건 선수 개인에게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서정환은 자신보다 어린 오대석에게 주전을 뺏겼기 때문에 서영무 감독 앞에서 '제발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서영무도 선수이기 전에 제자였던 서정환을 보내야 했던 슬픔에 트레이드가 성사된 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83년 1월 10일에는 정구왕삼미 슈퍼스타즈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1.3. 신인 선수


프로야구 출범 전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위해 군에 입대했던 김시진과 1982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위해 프로 입단을 미뤘던 장효조 등이 입단했다.

한편 대구상고, 영남대 출신인 제일은행의 조규식을 지명했는데 조규식은 제일은행에 잔류했다. 앞서 1982년 2월 2차 지명에서도 조규식을 지명했었고 이후 1984년과 1985년 지명에서도 3년 연속 조규식을 지명하면서 총 4번을 지명했지만, 조규식은 끝내 제일은행에 남아 1988년에 은퇴했다. 조규식은 역대 신인 지명 중 가장 많은 지명을 받은 선수가 됐는데, 당시에는 지명권이 1년간 유효했고 실업야구 선수도 프로선수 못지 않게 선수 생활이 보장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 전지훈련

일본통인 이충남을 영입한 만큼, 보다 야구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은 히로시마후쿠야마 근처 미루노사토에 있는 신쇼지 구장으로 건너갔다. 이충남 조감독의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을 진행했는데, 프로그램 자체는 기존 한국야구에서는 없었던 선진적인 방식이었지만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으로 사전조사 없이 갔는데, 신쇼지 구장 시설 여건이나 현지 날씨가 국내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결국 기존의 국내 전지훈련과 별 다를 것 없는 성과를 낸 채 귀국했다.

3. 정규 시즌

전년도 15승 트리오김시진이 가세한 투수진과 장효조가 가세한 타선으로 개막 전부터 단연 1위로 꼽혔다. 김시진은 17승에 2.55의 평균자책점을, 장효조는 0.369의 타율에 출루율과 장타율 부문 1위를 했는데 둘 다 이렇게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당시 언론에서는 부진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투타에서 막강한 선수가 추가됐음에도 구단과 감독의 갈등으로 팀이 삐걱대자[1], 정규시즌이 시작한지 보름만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구단에서는 김호중 코치를 해임시키고[2], 한 달 후에는 서영무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진시키면서 명목상 대우해주는 척하며 감독 권한을 뺏고, 계획대로 이충남을 감독대행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이충남은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라서 선수들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일본의 선진야구를 알고 있으나 한국야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를 적용하지 못했다. 결국 이 때문에 전년도의 전력에 김시진, 장효조가 가세했음에도 전기리그 21승 3무 26패로 5위, 후기리그 25승 1무 24패로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총 46승 4무 50패로 현재 같은 승률제 방식이라면 4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이렇게 성적이 하락한 것은 감독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타선의 부진도 있었다. 선배 서정환을 해태로 보내버린 오대석과 전년도 3할대의 타율로 팀내 수위타자였던 장태수 모두 2할 초반대로 타율이 추락했고, 배대웅은 부상을 당했고, 함학수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실업야구 시절 타격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거기다 투수진에서도 김시진을 빼면 기존의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 트리오가 각각 5승, 6승, 6승에 머물며 제 역할을 못 해주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반면 이만수는 홈런, 타점 1위를 기록하면서 400이닝을 넘게 소화하고 한국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단일시즌 30승의 기록을 세운 장명부를 제치고 시즌 MVP를 수상했다. 장명부가 밀린 건 경기에서의 매너[3]와 재일교포[4]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이만수도 시즌 MVP를 수상했지만 당시 KBO에서 뽑았던 베스트 10에는 해태의 김무종에게 밀렸다. OB의 신경식에게 밀려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 해태의 김성한도 베스트 10에서는 1루수 부문에 선정된 걸 보면 베스트 10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팀 프리미엄이 적용된 듯하다. 결국 베스트 10은 이 해를 끝으로 폐지됐다. 장효조도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도 실업야구에서의 활약상 때문에 신인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9 김시진 37
(6위)
25 229⅓
(3위)
17
(3위)
12 1 2.55
(7위)
189 109 154
(3위)
9 양일환 32 21 176⅓
(9위)
9
(10위)
7 1 3.22 155 74 63
1 황규봉 30 14 130 6 4 3
(10위)
3.67 136 46 45
14 성낙수 19 3 55 3 2 0 4.91 63 18 21
17 송진호 10 2 24⅓ 0 1 0 7.40 31 18 7
19 박동경 12 1 22⅓ 0 1 0 4.03 24 8 4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7 권영호 32 15 135 6 10 7
(2위)
3.20 113 54 49
26 이선희 29 19 127 5 13 0 3.76 122 66 56

4.2. 타자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2 이만수 98 357 .294
(8위)
105
(7위)
12 0 27
(1위)
74
(1위)
53
(4위)
0
2 손상득 18 19 .263 5 0 1 0 2 4 1
34 우용득[5] 14 18 .111 2 0 0 0 1 0 0
23 박정환 14 15 .200 3 0 0 0 1 1 0
8 손상대 10 8 .125 1 1 0 0 0 0 0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2 함학수 93 295 .261 77 10 2 5 32 40 8
15 김근석 89 284 .271 77 12 0 4 28 35 2
21 박승호 83 241 .237 57 9 0 7 39 26 0
3 배대웅 78 228 .285 65 10 2 2 22 27 6
16 오대석 82 227 .203 46 8 1 4 31 27 1
24 김한근 71 223 .283 63 11 1 4 16 30 4
7 천보성 71 174 .247 43 8 1 6 25 23 3
6 정진호 41 65 .215 14 3 0 1 6 6 2
25 김동재 17 14 .071 1 0 0 0 1 2 1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0 장효조 92 317 .369
(1위)
117
(공동 1위)
29
(8위)
3
(9위)
18
(3위)
62
(3위)
61
(2위)
22
(4위)
20 정현발 86 255 .231 59 11 0 6 25 30 2
4 장태수 82 245 .208 51 4 1 4 21 36 10
44 박찬 52 130 .292 38 10 0 1 12 20 2
33 허규옥 63 112 .223 25 5 0 1 8 7 3
28 홍승규 51 92 .261 24 4 0 0 3 12 3
18 황병일 39 64 .250 16 6 2 0 12 8 0

5. 수상 및 기록


[1] 개막전에서 팀이 졸전 끝에 겨우 무승부로 패전만 면하자 그날 밤 숙소에서 김삼용 단장이 서영무 감독 앞에서 대놓고 '그것도 야구라고 합니까?'고 말했다고 당시 코치였던 우용득이 회고했다. 김삼용은 1960년대 해운공사와 농협에서 활동한 좌완투수였는데, 서영무보다 11살이나 더 어렸다. 야구계에서는 후배였지만 직책상으로는 윗사람이다 보니 서영무 감독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개졌다고. 이 일화말고도 김삼용 단장은 늘 서영무 감독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서영무 감독이 물러남과 동시에 프런트도 물갈이되면서 김삼용 본인도 단장직에서 물러났다.[2] 후임 투수코치로 유백만 前 MBC 감독대행을 6월 27일에 영입하기 전까지 약 2달 가량 투수코치 자리가 공석이었다.[3] 몸쪽 위협구나 빈볼를 던지고도 상대 타자를 보곤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5월 12일 해태전과 6월 7일 해태전에서는 빈볼 시비로 벤치 클리어링까지 벌어졌다. 다만 이 해 장명부가 427⅓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허용한 몸에 맞는 공은 겨우 16개에 불과했다. 위협구를 던지면서도 철저한 제구력 덕분에 맞지는 않게 조절이 됐던 것.[4]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까지는 반일 감정이 강해 일본하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경향이 많았고, 이 때문에 재일교포들에 대한 이미지도 안 좋았다.[5] 코치 겸 선수로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