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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6:20:14

서울대학교 야구부

서울대 야구부에서 넘어옴
파일:서울대학교 로고.svg파일:서울대학교 로고(화이트).svg 서울대학교의 운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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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운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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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야구부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bgcolor=#d4cd99,#665f2a> 창단 1977년 3월
고문 이광환[1]
감독
우승 기록 0회[2]
소개 홈페이지 공식 페이스북

파일:attachment/seouluniversbaseballteam33.jpg

1. 개요2. 실적
2.1. 백전 백패의 팀2.2. 2004년, 감격의 첫 승2.3. 그 후2.4. 2024년, 두번째 승리이자 첫 콜드 승
3.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
3.1. 여담
4. 출신인물
4.1. 서울대 야구부 출신 프로 선수4.2. 프런트4.3. 아마야구 지도자
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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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에 이긴 적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이란 힘을 다해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과 맞서세요.
그것이 바로 패기입니다. "
서울대 야구부를 배경으로 만들어 졌던 SK그룹광고##. MBC 장학퀴즈에 나왔었다.
백전 백패의 신화로 유명한 서울대학교의 대학 야구부.

2. 실적

2.1. 백전 백패의 팀

1977년에 서울대학교 동아리 야구부로 창단되었다. 그러나 다른 야구부들과 달리 아마추어 동아리로 대회에 참가 하면 프로지망생들이 모인 다른 대학팀들에게 깨지기 일수였다.

결국 183전 183패를 기록하던 1997년, 대학야구연맹은 서울대 야구부의 기록자체를 공식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서울대 야구부를 아예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려서 국내 대학리그에 출전이 불가능했다. 사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1997년에 개막된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 가입비 3백만 원이 없어서 출전을 못 했던 거다(...) 학교 지원이 매 학기 50만 원에 불과한 데다 무리하게 돈을 구해서까지 출전할 필요가 없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출전 포기했다고. 애초에 프로 지망생들이 모이는 타 대학 야구부와 달리 이쪽은 야구가 좋아 모인 단순 동아리라 대회 출전 여부에 일희일비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이후 베이징대학과의 친선경기에서 첫 승리를 기록하긴 했지만, 비공식경기라 전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걸 전적에 포함시키면 이 시점에서 190전 1승 189패였다.

이후 KBO 고문이자 야구광인 정운찬[3] 총장을 찾아가 간청한 끝에 대학야구연맹에 복귀하였다.[4]

2.2. 2004년, 감격의 첫 승


파일:서울대1승주역.jpg

파일:탁정근감독.jpg

2004년 무보수로 감독직을 수행하던 탁정근 감독이 이끌던 서울대 야구부는 2004년 한일장신대전에서 처음으로 패가 아닌 무를 기록한 뒤 9월 1일 신생팀인 송원대와의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B조 예선리그 경기에서 2-0으로 이겼다. 서울대는 투수 박진수가 송원대 타선을 9이닝 동안 산발 4안타와 볼넷 8개로 막는 역투 속에 2-0으로 승리했다. 박진수 선발투수 박진수[5]는 서울대 역사상 최초의 완봉승의 주인공이 됐다. 서울대는 2회 용민의 1타점 중전 적시타와 4회 상대 수비실책으로 1점을 더 달아나 승리를 낚았다.## 이 시점에서 전적은 201전 1승 1무 199패. 2011년 3월까지 통산전적은 267전 1승 1무 265패.
2004년 12월 31일 현재 통산성적 205전 1승 1무 203패
2024년 04월 24일 현재 통산성적 410전 2승 2무 406패

2.3. 그 후

2019년 서울대학교 공식 유튜브 영상.
누군가, 우리에게 이기지도 못하면서 그 힘든 야구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미를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지지 않더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울대학교 야구부니까요.
공식 유튜브
2년제 대학팀들과 신생팀들이 주로 속해있는 대학야구 2부리그에 속해 있으면서도 연전연패중. 일본인 용병(?)교환학생을 쓰기도 했다. 요즘도 대학야구 기록을 순위로 낼 때는 서울대전은 빼고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2군까지 참여하던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6]에서는 주최측의 배려인지 항상 프로팀과의 대결은 피했다.

2011년 대학야구 하계리그에서는 2번이나 승리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역전패했다. 그것도 모두 1점차로.

참고로 2015년 9월 15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가진 개장 기념 특별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는데, 8 : 4의 스코어로 승리했다...서울대 야구부는 1명 제외하고는 전원 남성이었다. 그 1명이 서울대 9번 타자이자 야구부 매니저인 전혁주가 나왔다.[7]

2.4. 2024년, 두번째 승리이자 첫 콜드 승

파일:20년.jpg

탁정근 감독이후 정석(야구선수) 임시감독 대행을 거쳐 이광환 감독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였고 탁정근, 이광환 감독 밑에서 역시 무보수직으로 감독대행과 코치직을 수행하였던 정석(야구선수) 감독이 2020년부터 정식 감독직을 이어받아 16년간 서울대 야구부를 지도하던 중 2024년 4월 18일 대학야구 U리그 한국골프대 상대로 3:3의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어 2024년 4월 19일 서울대는 KUBF U리그 B조 경민대학교 야구부와의 경기에서 9:2로 7170일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심지어 7회 콜드 승으로 창단 이후 첫 콜드 승을 기록하는 쾌재를 불렀다.

이는 2004년 탁정근 감독 시절의 송원대학교 야구부 경기 이후 20년 만에 16년간 지도하여온 정석 감독의 지휘하에 얻어낸 값진 승리이다.

파일:정석감독.jpg

경민대를 상대로 2회 1점을 먼저 내준 서울대는 곧바로 이어진 2회 공격에서 정승원의 우전 적시타를 시작으로 대거 4점을 뽑은 뒤 3회에도 4점을 추가해 승기를 잡았다. 이어 6회 1점을 더했고, 7회 수비를 1실점으로 막아 9-2 콜드게임 승리를 가져갔다. 이서준은 2번 유격수로 나와 3타수 1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고, 3회부터는 마운드로 올라 3이닝 2피안타 1볼넷 3탈삼진 무실점 호투해 승리투수도 됐다.

'예선경기 1승이 뭐 그리 대수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대학야구팀들과 달리 동아리 개념의 팀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모여 이루어낸 정규리그 결과이기에 팀에게는 큰 동기부여이자 새로운 역사로 자리잡을 듯하다.
통산 2승째 이며 408전 2승 2무 404패 기록중

3.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오히려 야구하면서 성적이 떨어질까봐 더 걱정이죠. 그래서 전 팀 선수들 중에 학점이 3.5 이하로 떨어진 선수한테는 야구 안 시킵니다. 서울대 야구부에선 첫째가 야구가 아닌 공부예요. 두 번째도 야구가 아닌 과외이고요. 세 번째가 야구입니다. 과외는 학생들의 생업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야구는 안 해도 되지만 생업을 포기하면 학교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에 과외를 위해서 야구를 잠시 접을 수도 있는 게 이곳 특징입니다.
이광환 전 감독 인터뷰.##

한마디로 말하자면 프로지망생들의 팀과 아마추어 동아리의 차이다.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야구부 출신들과 취미로 야구하는 사람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사실 서울대 야구부는 연습시간이 짧다. 하루에 많아봐야 2~3시간 정도 연습하기 때문에 애당초 다른 대학과 승부 자체를 내기가 어렵다.[8] 더군다나 서울대학교에는 체육대학이 없다. 흔히 체대라고 불리는 곳은 사범대 체육교육과. 이 쪽도 체육특기생은 없다. 즉 야구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전공 공부를 하면서 야구취미에 가깝게 연습하기 때문에 프로선수 전향을 목표로 하는 대학 야구부와 붙으면 깨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로를 지향하는' 대학 선수가 거의 없는 분야인 복싱, 미식축구 등에서 서울대가 심심찮게 우승을 차지한다는 점은 생각해 볼 거리가 된다. 근데 사실 그럴 수 있는 건 둘 다 국내에서 프로나 엘리트체육이 없거나 거의 망한 종목이라서 그렇다. 미식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복싱도 프로복서들도 알바 뛰며 훈련하는 판국이니.... 비슷하게 핀수영에서 카이스트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9].

특히 스테미너 문제가 심각한데, 공개된 경기 기록들을 뒤지면 3회에서 4회부터 슬슬 힘이 빠져 5~6회 때 대량실점하는 패턴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초중고 12년 동안 공부만 하게 되어 체력적으로 기초가 부실한 선수들이 공부야구를 병행하고 있음이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원래 공부를 많이 하는 이들은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하다.

다른 학교의 일반 학생들도 그러한데 서울대는 특히 이 체력 부실이 심하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체력은 전반적으로 다른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 국정감사에서도 수차례 지적받은 사항으로 서울대생의 체력이 50대 아저씨 수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서울대에 정석으로 입학해서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 일반 야구 동아리보다는 확실히 잘하며 사회인야구보다는 확실히 못한다.[10]

3.1. 여담

대학 야구부들에게는 강호들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운 상대라고 한다. 이유인즉슨 "쟤들한테 지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냐(...)". 실제로 서울대 야구부에게 패한 송원대 야구팀은 한동안 타학교에게 망신당하고 조롱받았다고 하며, 김갑중 감독은 이틀 동안 전화기를 꺼 놓아야 했다. 다만 그 해 이후 야구부 연습장이 생기고 예산이 대폭 늘어났다고(...). 1994년 춘계리그에서 계명대 야구부가 서울대 야구부를 상대로 겨우 5대1으로 이겼다고 경기 후 감독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었다. 그래서인지 그해 추계리그에서 서울대 야구부와 다시 붙었을 때는 무려 35점을 내고 이겼다고 한다.[11] 연세대 야구부는 당시의 국가대표 선수 4명을 투입하고도 8회까지 끌려가다 9회에 간신히 역전, 6대5, 1점차로 신승하고는 경기후 줄빠따에 1개월 외출금지 크리를 먹었으며 다음날 경기에서 전원 삭발한 채로 경기에 나섰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대 출신인 박동희는 재학시절 서울대전까지 선발로 나와서 시속 150km의 광속구를 시전, 빈축을 샀다는 얘기가 있다.[12]

축구로 예를 들면, 비록 적은 점수차로 승리했어도 대한민국브라질 같은 팀을 상대로 1:0으로 이기면 아주 잘 했다고 칭찬을 듣지만, 같은 팀을 상대로 2:0으로 이기면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하냐고 온갖 욕을 들어먹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울대 선수들은 경기에 나설 때 1차 목표가 무조건 9회까지 끌고 나간다는 거다. 콜드게임 기준[13][14]인 7회까지 7점차 이하면 상대팀의 1차 망신은 확정되는 거고 9회까지 끌고가면 2차 망신이 더해지니까. 그리고 만약 이긴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서울대 야구부는 도쿄대학 야구부와 항상 쌍으로 묶여서 비교를 당한다. 도쿄대 야구부도 서울대 야구부처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풍문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도쿄대의 경우는 도쿄 6대학 리그에 속해있으며 아주 가끔씩 승리를 거둔다. 물론 우승 경력은 없지만 2015년 기준으로 245승 55무 1천560패를 기록 중이며[15] 도쿄대 야구부 출신 중에서 프로야구에 드래프트 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통산 6명)[16] 실력은 도쿄대 야구부가 약간 좋은 듯.[17]

사실 도쿄대학을 포함한 일본구제국대학 야구부는 죄다 공부만 하던 범생이 출신이라 야구 실력은 다 서울대 야구부 수준(...)이다. 또 다른 구제국대학인 나고야대학의 야구부는 2019년 드래프트에서 마츠다 히로아키[18]가 육성선수로 주니치에 입단한 것이 창단 이래 최초 프로 선수이다. 비슷하게는 교토대학 야구부가 있으며 이쪽은 2014년에 다나카 에이스케치바 롯데 마린즈에 지명되며 첫 프로지명자를 배출했다. 홋카이도대학에서도 2024년에 미야자와 타이세이를 배출한 것이 역사상 최초이다. 나머지 3개의 구제국대학[19] 야구부는 프로를 배출하지도 못했다. 즉 구제국대학 출신 야구선수는 도쿄대 6명, 교토대 1명, 나고야대 1명, 홋카이도대 1명이 전부라는 것.

공교롭게도 서울대 야구부와 도쿄대 야구부는 2005년부터 정기교류전을 가지는 사이라고 한다. 서울대 05학번들이 코칭스태프에게 먼저 제안을 하면서 도쿄대 코칭스태프에게까지 이야기가 됐고, 비슷한 취지로 운영되는 것에 공감하면서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참고로 전적은 2023년까지 9전 전패... 그리고 후술할 24년도 친선전의 패전 기록도 합쳐 10전 10패가 되었다.

번외로, 일본에는 의사 야구선수도 있는데 쿠후 하야테 벤처스 시즈오카[20] 소속의 타케우치 케이토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타케우치는 군마대학 의대에 다니면서 야구를 병행했고 2024년 쿠후 하야테 입단, 의사 면허 취득이라는 겹경사를 누렸다. 이외에도 현역은 아니지만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출신 테라다 코키가 방출 이후 야구를 그만두고 토카이대학 의대에 진학한 사례가 있다.

4. 출신인물

4.1. 서울대 야구부 출신 프로 선수

서울대 출신으로 아직까지 한국프로야구에 드래프트 된 사례는 없다. 다만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도를 도입하면서 점점 고교야구 선수 출신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며 야구부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져서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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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프런트

프로 선수가 아니라 프로 야구단 프런트에도 서울대학교 야구부 출신들이 몇몇 있다.

4.3. 아마야구 지도자

고교 야구계에서도, 탁정근 전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이 세현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다.[29]

5. 기타

6. 관련 문서



[1] 서울대 야구부 감독 이광환 인터뷰. 2010년 5월에 서울대학교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원장을 맡게 되면서 서울대 야구부의 고문 겸 감독을 10년 동안 맡았다. 참고로 이광환의 모교는 고려대. 한편 2020년 2월, 고령으로 인한 폐 건강 악화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 사실 1940년대에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1번 우승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야구부와 지금 야구부는 같은 야구부가 아니기 때문에 0회로 쓴 것 같다.[3] 서울대학교 학부 출신이며, KBO 총재로 재직 했었다.[4] 이때문에 타대학 야구부들의 반발이 있다.[5]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현 상계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6] 본래 명칭은 백호기. 성인 아마야구 최고 권위의 대회로 과거에는 실업팀들이 우승을 독차지했으나 프로야구 출범 후 실업야구가 약화되면서 대학 팀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2008년을 마지막으로 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대신 KBO 총재기가 신설되었다.[7] NC 다이노스 코치인 전민수의 여동생. kt 전민수 여동생 전혁주 “역사적 경기 신나요”.[8] 운동부로 야구부를 보유하고 있는 중고등학교의 경우 기본 연습시간만 5시간을 훌쩍 넘기며 시즌 때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하루종일 훈련에만 몰두한다.[9] 카이스트 출신이 아시아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과학'이 아닌 '체육'으로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10] 야구 동아리 < 사회인야구실업야구야구선수 순으로 실력 순위가 나타난다.[11] 계명대학교 35:3 서울대학교.[12] 박동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부산고 시절부터 당대 최고로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는 1988년 춘계대회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적도 있으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다승 1위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대회 준우승까지 끌고 올라간 당시 최고의 유망주였다. 이런 투수가 서울대 야구부 상대로 전력투구를 했다고 하니 욕을 먹을 수밖에.[13] 5, 6회 10점(전국대회에서만 적용), 7, 8회 7점[14] 말 공격 팀이 예를 들어 전국대회에서 5회 혹은 6회에서 자기팀 공격으로 10점차 이상으로 벌렸다면 거기서 경기 종료[15] 기사[16] 2017년에 열린 KBO 드래프트에서는 서울대에서 당연히 아무도 지명되지 않았으나, 도쿄대에서는 법학부 4학년 미야다이 코헤이 선수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7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미야다이는 1군 1경기 등판에 그치고 방출됐으나 2021년 야쿠르트에서 영입하면서 현역을 연장한다.[17] 도쿄대가 이전에 프로선수를 통산 6명을 배출하긴 했지만 한 명 빼고 다 한국프로야구가 생기기도 전(...) 시절 선수이고 프로야구 수준이 올라간 이후 35년 만에 새롭게 드래프티를 배출하는 수준인 만큼 두 학교의 야구부 수준은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양새. 뭐 정확한 건 친선전이라도 한번 붙어 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사실 동경대 야구부와 격년제로 교류전을 펼치나, 전적은 동경대 야구부의 확실한 우세인 듯.[18] 경제학부 출신. 참고로 이 선수는 아예 비선출이다.(연식야구 경력은 있지만 중학교 시절이 끝이었고 경식야구 경력은 대학가서 처음 한 케이스.) 도쿄대학 미야다이 코헤이나 교토대학타나카 에이스케는 고교 시절까지는 일반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선출.[19] 도호쿠대학, 오사카대학, 규슈대학[20] 2군 웨스턴리그에서만 활동하는 팀이다.[21] 서울대학교 1984학번. 현 춘천교육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 제1회 한국야구학회 학술발표때 참석하기도 했다.##[22] 은퇴 후에도 롯데그룹 사원 자격을 주겠다고 했다. 엄연히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프로 운동 선수 특성상 은퇴후 보장 따위는 없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파격적.[23]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이 프로에 갈 수 있을지 등의 고민으로 방황하다가 결국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역 직전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프로를 노리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24] 주 포지션은 중견, 1루지만 유격수, 3루수, 포수를 본 적도 있다.[25] 다른 해는 2할 후반에서 3할대의 괜찮은 타율을 보였는데 2학년 때 1할 타율로 말아 먹은 게 크다.[26] 여기에는 이견도 있다. 선수 본인이 육성선수로라도 프로로 가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불발로 돌아갔고 뒤늦게 발을 돌렸을 때는 이미 각 대학들의 스카웃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는 것.[27] 당시 팀 주장이었다. 이후 한화 이글스 입단 테스트도 보았지만 아쉽게 떨어졌고 이후 서울대학교 체육학과 석사과정 종료 후 미국에서 운동생리학 박사 학위 취득, 투수코치 자격증 등도 땃다고.[28] 청주 세광고에서 활동했으며 졸업 후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그 다음해에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했으나 입학하지 않았다. 1년 더 준비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동생인 신동천은 세광고에서 뛰다가 중앙고로 전학하여 1년 유급 후 김재호(두산 베어스)와 함께 봉황대기 준우승을 이끌고 고려대에 진학했으나 프로에 지명되진 못했다.[29] 감독이라고 하기엔 선수경력도 없는 데다가 연습과 더불어 연습게임도 아닌 오직 공식전만 감독으로 동행한다. 그러니 감독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고 벤치 구경꾼이라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단순히 야구부 감독(?)만이 아닌 학교교사까지 담당하고있다.[30] SBS 라디오 PD이자 작가. 영화 원더풀 라디오의 원작자이며, 이재익의 시사특공대를 진행중이다. 초창기 두시탈출 컬투쇼의 PD를 맡기도 했다.[31] 우리 히어로즈 시절부터 강정호를 전문 유격수로 전환한 후, 밀어준 감독이 바로 이광환이었다.[32] 서울대 야구부 유니폼을 입고 내레이션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