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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3:18:09

솔 캠벨

솔 캠벨의 역임 직책
{{{#!folding ▼
토트넘 홋스퍼 FC 주장
게리 마버트
(1987~1998)
솔 캠벨
(1998~2001)
테디 셰링엄
(2001~2003)
}}} ||
솔 캠벨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98-99 · 2002-03 · 2003-04
파일: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심볼.svg
}}} ||
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파일:Sol Campbell.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솔 캠벨
Sol Campbell
본명 설제어 제레미아 캠벨
Sulzeer Jeremiah Campbell
출생 1974년 9월 18일 ([age(1974-09-18)]세)
잉글랜드 그레이터런던 런던시 뉴엄 프레스토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
[[자메이카|]][[틀:국기|]][[틀:국기|]]
신체 189cm / 체중 100kg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88~1989 / 유스)
토트넘 홋스퍼 FC (1989~1992 / 유스)
토트넘 홋스퍼 FC (1992~2001)
아스날 FC (2001~2006)
포츠머스 FC (2006~2009)
노츠 카운티 FC (2009)
아스날 FC (2010)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10~2011)
감독 트리니다드 대표팀 (2017~2018 / 수석 코치)
매클즈필드 타운 FC (2018~2019)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 (2019~2020)
국가대표 73경기 1골 (잉글랜드 / 1996~2007)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
5.1. 매클즈필드 타운5.2.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
7. 여담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포지션은 센터백.

잉글랜드 이적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이적의 주인공으로도 회자된다.

2. 클럽 경력

2.1. 토트넘 홋스퍼 FC

1989년 토트넘 유스에 입단한 후 1992년 1군에 콜업되면서 프로에 데뷔했다. 이후 9년 간 팀의 상징적인 선수이자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주장으로 활약했다. 토트넘의 팬들이 캠벨에게 쏟는 애정과 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캠벨 역시 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닥주전을 맡을 정도로 기량 또한 엄청난 수준이었으나, 캠벨의 급료는 팀 내에서도 높은 편이 아니었던 데다, 캠벨이 상대 클럽 경비원에게 폭행 혐의로 고소를 당했을 때 클럽이 미온적으로 대응한 탓에[1] 캠벨이 단단히 감정이 상했던지라 연장 계약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거기다가 당시는 팀 리더십이 앨런 슈가에서 조 루이스&다니엘 레비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던지라 보드진 내에서 협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보스만 룰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됐던 시기였던지라 기존 보드진들은 보스만 룰로 인한 자유계약의 가능성을 너무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팀 성적이나 스쿼드의 수준도 캠벨이라는 월드클래스 선수가 만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2] 결국 솔 캠벨이 토트넘 내 최고 수준의 급료를 주겠다는 제의조차 거절하며 계약 만료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왔고, 캠벨은 국내외 수많은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된다.

실제로 캠벨은 이탈리아의 여러 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기도 했는데, 차라리 그대로 이탈리아로 갔다면 팬들이 이해라도 해줄 수 있을 여지를 남겼을건만...

2.2. 아스날 FC

그렇게 계약이 만료된 캠벨에게 접근한 팀은 놀랍게도 북런던 라이벌 구단 아스날이었다. 제안 자체는 FC 바르셀로나가 더 높게 불렀고 인테르도 관심이 있었으나, 당시 아스날 부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데인[3]이 아스날과의 협상을 부담스러워하는 캠벨을 위해 새벽에 자기 집에서 만남을 주선하는 등 지극정성을 들였고, 결국 캠벨은 아스날 FC와 계약을 체결한다. 같은 리그, 같은 지역철천지 원수인 팀으로 이적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적료 땡전 한 푼 남겨주지 않는 자유계약이라는 형태로. 이후에도 주장으로서 팀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팬들의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특히 캠벨 영입 기자회견이 열렸을때 처음 이 이적이 공개되었고 그전까지 단 하나의 기사도 나오지 않고 완전 비공개였다고 한다. 기자들은 데이비드 시먼의 백업키퍼[4] 영입 발표인줄 알고 기자회견장에 왔다가 캠벨이 들어오자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축구 역사상 남을만한 충격적인 이적임에도 이적이 워낙 비밀리에 진행된 탓에 기자가 고작 2명만 왔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이스타 TV에서 정리한 캠벨 이적의 뒷이야기를 참고.

파일:솔 캠벨 토트넘 아스날.jpg
요약하자면 성골 유스 + 주장 + 최대 라이벌 팀 이적 + 자유계약이라는 통수계의 4관왕을 달성한 것이다.[5] 오죽하면 이런 사진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저 새낀 뭐야 니 미래야 원본

지금도 역대 최악의 이적 중에 하나로 화자되는 이 어처구니 없는 배신 행위는 토트넘 팬들에게 있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 중 하나이다. 당시 캠벨은 수많은 이적설에 휩쓸리면서도 침착하게 "내가 토트넘의 영원한 주장이다." 같은 식의 언플을 일삼았고, 팬들은 팀에 애정을 보여주는 그를 끝까지 믿고 있었다. 자유계약 신분 이후 아스날 이적 직전까지 절대 아스날로 이적하는 일은 없을꺼라고 얘기했고, 팬들은 "캠벨이 어디로 가든 우리는 그가 새로운 팀에서도 잘 되길 바란다."는 성명도 냈었다.

하지만 결국 캠벨은 최대의 라이벌 아스날로 이적하였고, 토트넘의 팬들은 그를 유다라고 불렀다. 루이스 피구 등과 함께 역대 최악의 배신자로 손꼽히는 남자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후 토트넘의 팬들은 캠벨의 유니폼을 불태워 버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였고, 이후 그의 유니폼과 함께 살해 위협이 담긴 편지까지 보내진 일이 있었을 정도로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었다.

가족들도 토트넘 팬이었는데, 동생조차 배신자라고 배너를 들 정도었다.

이후 캠벨은 맹활약하며 데니스 베르캄프, 티에리 앙리, 파트리크 비에이라, 로베르 피레스, 프레디 융베리, 콜로 투레 등과 함께 무패 우승의 주역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아스날의 팬들의 자부심은 갈수록 높아졌고, 지역 라이벌인 토트넘의 팬들을 조롱했다. "우리는 솔 캠벨을 얻었다. 레인[6]에서 솔 캠벨을 뺏어왔다. 솔 캠벨은 더블을 했다. 레인에 있는 녀석들 중 더블을 해 본 녀석이 있냐?[7] 솔 캠벨은 했다. 이봐 토트넘 친구들,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희 주장은 어디에 있지?" 당시 아스날 팬들이 토트넘의 팬들을 조롱하는 노래 가사 중의 일부이다.

2.3. 포츠머스 FC

아스널에서 5년 동안 활약한 이후 2006년에 여름에 포츠머스로 이적하였다. 포츠머스 이적도 약간의 뒤통수를 치는 듯한 이적인데 벵거 감독에게 국내 팀으로는 이적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후에 실행한 이적이다(...). 그래서 벵거는 이를 갖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구단주가 포츠머스를 외국에 팔아버렸나?" 라는 조크를 남겼다.

2.4. 노츠 카운티 FC, 아스날 FC 2기

포츠머스에서 3년간 뛴 후 캠벨은 2009년 4부 리그인 노츠 카운티 FC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데뷔전에서 4초만에 백패스 실수를 범해 팀의 패배에 기여했고(...) 그 직후 계약을 해지당했다. 2010년 겨울 이적시장에 이전에 그가 활약했던 아스널로 다시 재이적하여 리그에서 11경기를 뛰었다.

2.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10년 6월 아스널과의 계약이 만료된 캠벨은 7월 28일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여 리그 7경기에 출전했다. 2011년에 계약이 만료되었고 그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12년 5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선수 생활 내내 단 한번도 전 소속팀에 이적료를 안겨준 적이 없다.

3. 국가대표 경력

캠벨은 잉글랜드에선 유일하게 국제 대회에 6번 연속 출전한 선수이다[8]. 또한 바비 무어 다음으로 역대 2번째로 어린 대표팀 주장이기도 했다. 그는 2002년 스웨덴과의 첫 경기에서 득점을 하기도 했다.[9]

유로 2004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으나 이후 존 테리-리오 퍼디난드 조합에, 레들리 킹, 제이미 캐러거 등의 등장으로 국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3차전 스웨덴전 교체 출전이 전부였다.

유로 2008 예선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잉글랜드가 유로 2008 진출에 실패하자 캠벨은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캠벨의 최고 장점은 피지컬운동 능력. 몸싸움이 가장 거칠고 심한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캠벨을 피지컬로 이길 수 있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190cm에 육박하는 키와 근육질의 거대한 체격 덕에 마치 벽과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비단 체격뿐만 아니라 순발력, 주력, 점프력 등 모든 운동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특히 거대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주력을 보유했다. 100m를 10초대 중반에 주파하는 축구계 대표적인 스피드스타 팀동료 티에리 앙리와 같은 속도였다고 한다.[10] 프리미어 리그의 발 빠른 센터백의 대표격인 리오 퍼디난드, 버질 반 다이크 등 보다도 훨씬 빠른 수준이다. 일단 속력과 피지컬이 워낙 사기적이다 보니 수비진영에서 공을 뺏고 앞으로 좀 달리기만 해도 상대 진영이 맥을 못추는 상황이 많이 나왔으며, 이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센터백으로 알려져있는 오늘날의 이미지와는 달리 우측 풀백으로도 출전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는 최고의 수비수이자 최고의 공격수로서 상대방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애초에 유스 시절에는 헤딩 성공률도 낮고 공격적인 재능이 없다고 평가절하 당했을 정도로 득점 수가 그렇게 많진 않지만, 커리어가 진행되며 실력이 향상해 결국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헤더로 득점하며 그 정점을 찍었다.

사기적인 피지컬만 믿고 수비하는 스타일이었으면 절대 지금처럼 월드클래스로 평가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주장을 맡은 경력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리더십도 가지고 있고, 수비 조율 능력과 수비시 위치선정 역시 수준급이었으며, 알레산드로 네스타처럼 면도날같이 공을 뺏는 수비수는 아니었지만 속력과 몸싸움을 위시하며 순간적인 강력한 압박 투사로 공을 뺏는 스타일의 수비에 굉장히 능했다. 수비 시에는 골키퍼 다음으로 내려앉아 있는 편으로 팀의 최후방을 책임졌다. 다른 센터백 한 명이 뚫리면 득달같이 달려가 커버하는 스타일이었으며 특히나 멘탈이 엄청나게 강한 선수로 유명했는데, 비단 친정팀의 뒷통수를 치고 라이벌팀으로 이적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플레이 중에도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체력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자주 받았다. 최후방 위주로 플레이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체력을 사용한 플레이를 구사하고자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멘탈과는 별개로 패스 능력이 좋지 않아 간혹 가다 압박이 없는 상황에서도 어처구니없는 패스 실수를 저질러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5. 지도자 경력

5.1. 매클즈필드 타운

EFL 리그 2로 승격한 이후 팀은 2승만을 거두었고, 결국 마크 예이츠를 경질하고 매클즈필드 타운 FC은 대체자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캠벨로 낙점되었고, 11월 28일 감독에 부임했다.

매클즈필드 타운을 리그 2에서 잔류시키는 등 안정적인 지도력을 보였다. 2019년 8월 상호합의 하에 팀을 떠났다.

그러나 캠벨의 떠난 이후 다음 시즌에 매클즈필드 타운은 결국 임금 체불 사태로 내셔널 리그로 강등되었고 이후 해체되었다.

5.2.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이후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3부 승격~중위권 팀을 4부 리그로 강등시키며 지도자 커리어 강등의 쓴맛을 봤다. 토트넘 팬들은 '그 X끼'가 감독하는 팀이 강등당했다며 영원히 불꽃 길을 걷길 기대한다며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사우스엔드가 다음 시즌 백투백 강등을 당하고 선수단이 거의 붕괴 상태였다는 게 밝혀지며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엔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고 간간히 아스날 레전드라는 이름값으로 조언을 하는게 언론을 타고는 한다. 토트넘 팬들은 물론 이 인간이 입을 열때마다 저주를 퍼붓는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여담

8. 같이 보기

1 제임스 · 2 G. 네빌 · 3 A. 콜 · 4 제라드 · 5 테리 · 6 캠벨 · 7 베컴 · 8 스콜스 · 9 루니
10 오언 · 11 램파드 · 12 브리지 · 13 로빈슨 · 14 P. 네빌 · 15 · 16 캐러거 · 17 버트
18 하그리브스 · 19 J. 콜 · 20 다이어 · 21 헤스키 · 22 워커 · 23 바셀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벤예란 에릭손

1 로빈슨 · 2 G. 네빌 · 3 A. 콜 · 4 제라드 · 5 퍼디난드 · 6 테리 · 7 베컴 · 8 램파드 · 9 루니
10 오언 · 11 J. 콜 · 12 캠벨 · 13 제임스 · 14 브리지 · 15 캐러거 · 16 하그리브스 · 17 제나스
18 캐릭 · 19 레넌 · 20 다우닝 · 21 피터 크라우치 · 22 카슨 · 23 월콧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벤예란 에릭손


[1] 결과적으로 이 고소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2] 캠벨은 토트넘 시절 딱 두 번 유럽 대항전에 출전했다(95-96 인터토토컵, 00-01 UEFA컵).[3] 프리미어 리그 창설을 성사시키고 벵거 영입을 주도하는 등 현대 아스날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이다.[4] 당시 리처드 라이트와 링크가 있었으며, 이후 캠벨이 영입되고 이틀 뒤 오피셜이 발표되었다.[5] 구너들은 그 당시에 엄청나게 좋아했으며 토트넘을 조롱하였다. 토트넘 유스이며 에이스, 주장인 솔 캠벨이 우승하기 위해 배신도 주저하지 않았던 만큼 그 당시의 드림 클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스날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우승하기 위해, 아스날의 에이스이자 주장인 내 안의 작은 아이그 당시의 드림 클럽이자 자국 라이벌로 이적하면서 인과응보를 당했다.~그래도 최소한 이적료는 남겨주고 통수를 쳤다.~[6] 토트넘의 옛 홈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7] 참고로 토트넘은 더블을 달성한 적이 있긴 있다. 마지막 리그 우승을 했던 1961년 FA컵을 같이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문제는 그 이후 60년 넘게 리그 우승을 한 번도 못했고, 당연히 더블도 달성한 적 없다는 것. 그렇기에 당연히 당시 레인에 더블을 달성한 사람이 있을 턱도 없었다.[8] 1996, 2000, 2004 유로, 1998, 2002, 2006 월드컵[9]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A매치 득점이기도 하다.[10] 사실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스프린트는 키가 클수록 유리하다.키가 크면 다리도 길고 넓은 보폭으로 한 번에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기 때문.[11] 참고로 토트넘 지역 일대는 노동당 초강세 지역이다.[12] 캠벨 이후 아스날 센터백들, 코시엘니든 메르테자커든 누굴 데려와도 캠벨에 비길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솔 캠벨보다는 못한 통수 이적을 감행한 로빈 반 페르시는 가문의 원수마냥 씹어대는지라 캠벨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되어 팬들의 웃음을 사고는 한다. 박종윤 본인도 반페르시조차 켐벨에 비할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