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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22:04:15

쉬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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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결렬 이후 각 국민정부의 주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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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국민정부 난징 국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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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당 우파가 주축이었지만 우징헝, 리스쩡 등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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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국민정부 연석회의주석
한문 徐謙
한국식 독음 서겸
영문 Xu Qian
계룡(季龙)
출생 1871년 6월 15일
청나라 강서성 남창현
사망 1940년 9월 26일 (향년 69세)
영국령 홍콩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진사
사학관 법률정치과
직업 법관, 정치가
연석회의주석
재임 기간
초대 1926년 12월 13일 ~ 1927년 3월 20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호법운동2.3. 국민혁명기2.4. 몰락과 말년
3. 주요경력4.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청말민초의 정치인. 중국국민당의 대표적인 좌파 정치가로 국민혁명기에 국민정부 사법부장, 연석회의 의장을 지내며 장제스의 최대 정적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나 국공결렬 이후 용공분자로 몰려 몰락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1년 강서성 난창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안휘성이다. 1904년 제2갑 시험에 통과하여 8명의 진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사학관 법률정치과에 들어가 1907년 졸업, 한림원 편수가 됨으로 청말민초의 대표적인 사법 전문가가 되었다. 이후 법부참사로 임용되어 법률편사관에서 각급 심판총의 시판장정을 작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경사심판총장, 북경고등검찰총장 등을 역임했다. 헌정 실시의 일환으로 1910년까지 신형률 공포에 참여했고 1910년 워싱턴 8차 세계감옥대회에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설립되자 1911년 국민당에 가입했으며 1912년 초부터 왕정팅과 함께 쑨원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1912년 3월 탕사오이 내각의 사법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1912년 6월 탕사오이 내각이 퇴진하면서 동반 사퇴하였다. 이후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상하이에서 변호사일을 하였다.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4월 27일 민권보에 글을 발표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켜 위안스카이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단행하자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좌절하게 되었으나 1916년 위안스카이가 급사하자 이는 하늘에서 공화국을 돕는 증거라 여겨 기독교가 구국의 길이라 믿고 성공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1916년, 호국전쟁이 끝나고 리위안훙 총통이 취임하자 돤치루이 내각에서 사법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대중화민국국가>라는 노래를 지어 삼민주의를 지지했다.

2.2. 호법운동

1917년 쑨원제1차 호법운동을 주장하면서 광저우로 남하하자 그의 비서장에 임명되면서 그와 다시 동지가 되었는데 역시 기독교도인 쑨원과 친밀한 관계였다. 1918년 7월부터 상하이에서 기독교를 선전했으며 1918년 광동 군정부 사법총장에 임명되면서 광저우로 이동했다. 1918년 9월 9일, 쑨원이 대원수에서 쫓겨나 상하이로 떠날 때 쑨원의 개인대표로 임명되어 광저우에서 쑨원을 대표하게 되었다. 1918년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하고 정전령을 발표하자 광저우의 대표적인 유화론자로 정전령을 지지했다. 이에 쉬첸을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쑨원 역시 쉬첸의 유화적인 입장에 불만을 느껴 후한민으로 대표를 교체할 것을 고민하였으나 곧 쉬첸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쉬첸은 자신에 대한 공격에 환멸을 느껴 대표직을 사직하고 광저우를 떠나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남방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파리에서 귀국한 후 광저우로 가지 않고 톈진으로 가 <익세보>의 주편이 되었다. 1920년 1월 상하이 총회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920년 상하이에서 기독교구국회를 발족하고 <기독교구국회성립선언>을 발표하여 기독교 구국주의야 말로 모든 주의의 궁극적인 합일된 형태로 자부하면서 당대 국민당 요인들 중에서 드물게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내세우고 더 나아가 기독교 교리를 중국 혁명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기존 기독교는 개인을 구제하여 죽은 뒤의 천국만을 찾았다면서 이것을 오류로 규정하고 개인구제를 현재에서 실현하여 지상에서의 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4월 광저우에서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대리원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영일동맹의 갱신은 중국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뜻을 영국과 미국에 전달했다. 1921년 10월, 후한민이 <예수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반기독교 연설을 하자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기독교인들을 데리고 퇴장하면서 "광저우에 와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치욕을 겪었다."라고 크게 분개했다. 1922년 왕충후이의 호인내각이 설립되자 다시 사법총장에 지명되지만 참여하지 않았다. 1922년 3월 29일, 왕징웨이가 예수는 모든 과학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예수교의 세 가지 중요한 잘못>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자 즉각 <광동교육회장 왕징웨이군에 충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왕징웨이의 주장에 반박하는 등 기독교 운동을 열심히 진행했다. 천중밍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쑨원을 지지하며 상하이로 피신했다. 천중밍이 토벌되고 1923년 광저우 대본영이 조직되자 후한민, 왕징웨이와 함께 상하이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후 광저우로 돌아와 영남대학 문학계주임을 맡으며 잠시 정계와 떨어져 지내다가 이후 장쭤린, 돤치루이, 쑨원 삼각동맹을 추진하며 북양정부와 광동정부의 교섭관계를 보고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리스쩡, 장쥐 등과 함께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부추겼다. 하지만 국민당 개조 과정에서 위원제 정부를 주장하였다가 쑨원의 분노를 사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아무런 공직도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3. 국민혁명기

쑨원 사후 그가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고 추모하면서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냈다. 이후 펑위샹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국민당에서 주목받아 다시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 1925년 7월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계속 대리원장 겸 정부위원에 임명되었다. 1926년 1월, 중국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및 사법행정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다. 사법행정위원회가 사법부로 개편되면서 사법부장에 임명되었다. 사법행정위원회 주석으로 재직하면서 사법예계를 '혁명적으로 당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혁명에서 법률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26년 1월 14일, 국민대회 주석이 되어 펑위샹과 국민당의 합작을 촉구하였고 직봉풍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톈진에 개입하는 대고구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된 후 1926년 9월 9일, 정치회의에 <사법개조방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6년 8월, 펑위샹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으며 귀국 후 8월 24일 펑위샹의 입장과 펑위샹을 국민군 당총대표로 임명할 것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우한이 점령되자 1927년 1월에 설치된 우한 임시 연석회의의 주석이 되었다. 1927년 1월 1일부터 혁명사법예계를 실시하여 법률심리를 간편화하여 사법제도를 민중화하는 법칙을 실시하였고 이급이심제를 정착하였다. 또한 농협, 공회, 부녀회, 상회 등에서 참심원을 받아 농인, 공인, 부녀, 상인의 심리에 참여하게 하는 배심원제를 만들었다. 또한 인민재판위원회 주석, 혁명군사재판소장, 호북성 사법총장 등을 역임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파업권을 보장하고 향렬이 낮은 친족의 정당방위권을 인정하지 않던 기존의 제도를 폐지하는 등 과감한 사법 개혁을 행했다. 또한 <민약총론>, <형법총편> 등의 법률 저서를 작성하였다.

1927년, 천도논쟁에서 우한 천도를 주장하였으며 우한 임시연석회의 주석에 취임하여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등극했다. 외교부장 천유런과 함께 혁명외교를 주도하여 우한, 주장의 영국 조계지를 무력으로 회수하였고 북벌의 방향성을 놓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와 극심한 충돌을 빚었다. 결국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2.4. 몰락과 말년

국공결렬 이후 용공수괴로 몰려서 국민당 우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완전히 실각하였다. 그와 함께 밀려났던 왕징웨이장왕합작을 통해 다시 장제스와 손을 잡고 복귀할 수 있었으나 쉬첸은 체포령이 하달됨에 따라 11월,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일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항일연합회를 결성하여 항전을 주장했다.

1933년 복건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 중화공화국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나 곧바로 진압당하면서 다시 홍콩으로 도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반장파가 그러했듯 반장을 중지하고 난징으로 돌아와 장제스에 대한 협조노선을 취했으며 우한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38년 국민참정회가 조직되자 참정회원으로 참여했으며 1939년, 병환에 걸려 홍콩으로 돌아갔다. 1940년, 홍콩에서 병사했다.

3. 주요경력

우한 국민정부 역대 연석회의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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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천도 초대 상무위원제 실시
쉬첸
1926년 12월 13일 ~ 1927년 3월 20일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