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트 슈스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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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C 바르셀로나 역대 주장 | ||||||||||||||||||||||||||||||||||||||||||||||||||||||||||||||||||||||||||||||||||
호세 비센테 산체스 (1983~1984) | → | 베른트 슈스터 (1984~1986) | → | 호세 라몬 알렉상코 (1986~1993) |
베른트 슈스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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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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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Ballond'or | ||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2위 베른트 슈스터 | 3위 미셸 플라티니 |
1981 Ballond'or | ||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2위 파울 브라이트너 | 3위 베른트 슈스터 |
1985 Ballond'or | ||
수상 미셸 플라티니 | 2위 프레벤 엘케어 | 3위 베른트 슈스터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
1980 |
베른트 슈스터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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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 감독 | ||
이름 | 베른트 슈스터 Bernd Schuster | |
본명 | 베른하르트 슈스터 Bernhard Schuster[1] | |
출생 | 1959년 12월 22일 ([age(1959-12-22)]세) | |
서독 바이에른주 슈바벤현 아우크스부르크시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신장 181cm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SV 함머슈미데 아우크스부르크 (1971~1976 / 유스) FC 아우크스부르크 (1976~1978 / 유스) 1. FC 쾰른 (1978~1980) FC 바르셀로나 (1980~1988) 레알 마드리드 CF (1988~199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0~1993) 바이어 레버쿠젠 (1993~1996) UNAM (1996~1997) |
감독 | SC 포르투나 쾰른 (1996~1998) 1. FC 쾰른 (1998~1999) 헤레스 CD (2001~2003) FC 샤흐타르 도네츠크 (2003~2004) 레반테 UD (2004~2005) 헤타페 CF (2005~2007) 레알 마드리드 CF (2007~2008) 베식타스 JK (2010~2011) 말라가 CF (2013~2014) 다롄 이팡 (2018) | |
국가대표 | 21경기 4골 (서독 / 1979~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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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특유의 금발머리에다 수려한 외모로 '금발의 천사[2]'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별명과는 정반대로 성깔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 뛰었으니 바르사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사비 에르난데스의 중간 정도 유형의 선수라고 대강 정리할 수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서독 출신으로 라리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미드필더이다.금발 미남 바르셀로나 시절 |
1978년에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에 의해 1. FC 쾰른에서 데뷔하여 쾰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8시즌을 뛰며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88년 팀에 새로 부임한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바르셀로나를 자신이 추구하는 네덜란드식 축구를 하는 팀으로 개조하겠다고 선언했고, 바르셀로나 주전 선수들 중 에이스 게리 리네커 단 단 한 명만 남기고 전부 방출했고, 라우드루프, 쿠만, 바스크 4인방 등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팀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했다. 참고로 크루이프는 기존 바르셀로나 주전 중 유일하게 리네커만 살려두었으나 윙어로 강제 포변시켰고 이에 열받은 리네커도 1시즌 후 이적한다.
슈스터는 바르셀로나 시절 큰 부상을 입었는데, 클럽에서 제대로 조치를 해주지 않아서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토사구팽당하게 되자 라이벌 팀인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로 이적한 루이스 미야, 미카엘 라우드럽과 공통점은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의 푸대접에 열받아서 굳이 레알로 이적했다는 점이다.
슈스터의 이 이적은 크루이프가 선수단을 완전히 물갈히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러한 사정과 관계없이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은 분개했고 바르셀로나에서 슈스터는 금지어 수준이 된다.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도 라이벌 팀에서 왔다는 이유로 탐탁지 않아했으나. 슈스터는 클럽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레알도 훗날 슈스터를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대접해 주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생활을 접고 더비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팀의 주축으로 경기를 조율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독일로 돌아와 3시즌을 뛰었고, 다시 멕시코 리가 MX로 이적하여 거기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선수 평가에 있어서 위상에 비해 크게 언급이 되지 않거나 평가가 짠 유형이 있는데 바로 이렇게 저니맨 생활을 이어간 선수들이 그렇다.
2.2. 국가대표
슈스터는 겨우 20세의 나이로 유로 1980에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같이 서독이 우승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활약으로 루메니게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 2위에까지 올랐다.하지만 둘째 아들 출산 문제로 국가대표 경기에 불참하는 걸로 시작해서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인 유프 데어발, 국가대표팀에 다시 돌아온 서독의 주축 선수이자 고참인 파울 브라이트너, 독일축구협회 등과 갈등을 빚다 84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해 버린다.
자세히 말하면 1980년대 초반 서독의 주축선수는 누가 뭐래도 브라이트너와 루메니게였다. 둘을 묶어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렀을 정도. 슈스터는 브라이트너와 팀의 코어가 되기 위한 경쟁을 해야 했는데 데어발 감독의 선호는 이미 브라이트너쪽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적은 기회에서 슈스터는 나름 대표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슈스터의 활약이 브라이트너의 그것보다 낫다고 여길만한 경기력도 종종 선보였다. 하지만 결국 슈스터는 브라이트너의 벽을 넘지 못했고 그러다 1981년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명 페널티 키커로 이름 높았던 브라이트너가 페널티 킥을 실축,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에 슈스터는 "저 꼰대가 기량이 더 나은 나는 팽개쳐두고 브라이트너 같은 노땅이나 쓰니 이런 꼴이 나지"라는 식으로 데어발 감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문제는 데어발 역시 슈스터 못지않게 한성격하는 캐릭터였다는 것이었다. 데어발은 유소년 선수가 실수로 자신을 공으로 맞혔다고 그 아이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차버릴 정도의 일화가 있을 정도였던 사람이었고 그 성격에 걸맞게 이런 슈스터를 대표팀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슈스터를 대표팀에서 잘라버렸고 브라이트너는 이런 데어발보다도 더 심한 성격을 가진 선수였으니 문서를 더 작성하기엔 손가락만 아픈 상황. 슈스터는 이 사건으로 1981년 5월부터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집어던져버렸고 스페인 월드컵이 끝나고 브라이트너가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에야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다. 그러다 1984년 이후로는 프란츠 베켄바워로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대표팀에 다시는 복귀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그 뛰어난 실력에도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서독 국가대표팀으로 그가 참가한 메이저 대회는 유로 1980 겨우 하나다. 그리 좋지 못한 성격이 큰 원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서독 역시 1982년 월드컵과 1986년 월드컵에서 2번 연속으로 월드컵 콩라인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1982년 월드컵에선 상술했던 브라이트너의 존재와 독일의 아주리 징크스 때문에 슈스터가 있었어도 큰 변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란 시각도 있으나, 1986년에라도 슈스터가 서독 대표팀에 있었으면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는 클래식 축구 매니아들의 상상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사실 위에는 슈스터가 유로 1980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것처럼 나오지만 당시 슈스터는 서독 대표팀의 풀 주전이 아니었다. 물론 슈스터는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결승에서도 선발로 나왔지만, 예선에서는 벤치에 앉아 있었을 때가 더 많았다.
3. 지도자 경력
3.1. 유럽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
감독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는 헤타페 CF의 지휘봉을 잡았던 시기이다. 2006-07 시즌 라리가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7위를 차지했고 코파 델 레이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며,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등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친정 팀 레알 마드리드 CF의 지휘봉을 잡아 2007-08 라리가 우승을 기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엘 클라시코 더블을 달성하고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 파시요까지 받았다. 그러나 감독 2년차인 2008-09 시즌에는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치며 시즌 도중에 경질된다. 이후 베식타스 JK와 말라가 CF의 지휘봉을 잡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해임되었다.
3.2. 중국
한동안 놀다가 2018년 중국 슈퍼 리그의 다롄 이팡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다롄은 개막전을 8-0으로 참패하는 등, 여러모로 암담했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빅 리그 출신 용병들이 실력을 발휘함에 따라 강등권(16, 15위)을 간신히 벗어났다.선수 시절과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그리고 현재 모습을 보면 역변 중의 역변이다. 같은 시대에 라리가에서 뛴 독일인 울리 슈틸리케는 5살이나 위인데도 중후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조된다.
2018년 리그를 11위로 마쳤으나, 황사머니 구단인 다롄이 돈 쓴 만큼의 성적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 FC 바르셀로나 (1980~1988)
- 라리가: 1984-85
- 코파 델 레이: 1980-81, 1982-83, 1987-88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1-82
- 코파 데 라 리가: 1983
- 레알 마드리드 CF (1988~1990)
- 라리가: 1988-89, 1989-90
- 코파 델 레이: 1988-89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9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0~1993)
- 코파 델 레이: 1990-91, 1991-92
4.1.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80; 3위: 1981, 1985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DM 16위)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0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3]: 1984-85, 1990-91
- 키커 올해의 팀: 1993-94
- 독일 올해의 골: 1994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22
4.2. 감독
4.2.1. 대회 기록
- 레알 마드리드 CF (2007~2008)
- 라리가: 2007-0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8
4.2.2. 개인 수상
- 트로페오 미겔 무뇨스: 2006
5. 여담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2위에 이름을 올렸다.
5.1. 슈틸리케의 구세주
2018년 7월 28일 경기 전 슈틸리케와 이야기를 나누는 슈스터. |
슈틸리케와 슈스터는 서독 국대 동문이고 같은 시기에 라리가에서 뛰었다. 슈틸리케는 3연패를 하고 있었고, 모두 어이없이 점유율을 강조하다 패했기 때문에, 이 경기마저 졌으면 경질 각이었으나, 3-2로 승리하여 생명 연장을 했다.
2018년 슈퍼 리그에서는 슈틸리케의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다. 슈틸리케의 톈진 터다는 월드컵 브레이크 이후 졸렬한 전술로 3연패를 하면서 경질 압력에 시달렸으나 7월 28일 다롄 이팡전에서 3-2로 승리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고, 이후에도 11연속 무승으로 팀을 강등권까지 추락시켰으나, 또다시 11월 4일 29라운드에서 슈스터가 지휘하는 다롄 이팡을 3-1로 격파하여 간신히 강등권 확정을 모면했다.
30라운드를 앞두고 16위 구이저우가 강등 확정된 가운데, 톈진 터다, 다롄 이팡, 창춘 야타이, 충칭 리판이 모두 32점으로 12위를 기록하여 강등권 한 자리를 두고 11위의 톈진 취안젠(승점 33점)까지 5팀이 경쟁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인 30라운드에서 슈틸리케는 강팀 광저우 헝다에게 1-5로 참패해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슈스터의 다롄 이팡이 창춘 야타이를 잡아주고, 구이저우가 충칭 리판을 잡아서 세 팀(터다, 충칭, 창춘)이 승점 32점으로 강등권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승자승 원칙에 따라서 창춘이 강등되고 슈틸리케는 살아남았다. 만약 다롄이 창춘과 비겼으면 충징은 터다에 승자승으로 앞섰기 때문에 터다가 강등이 될 뻔했으니, 결국 잔류하고 1년 재계약까지 성공한 슈틸리케는 강등 전도사라는 오명을 피하게 해준 슈스터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슈스터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1] 울리히에서 히를 빼고 울리라고 한 슈틸리케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뛰면서 베른하르트라는 어려운 이름 대신 Bernd라는 짧은 애칭을 쓰기 시작했다.[2] 독일어로는 der blonde Engel.[3] 돈 발롱 어워드
분류
- 1959년 출생
- 1978년 데뷔
- 1997년 은퇴
-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인물
- 독일의 남자 축구 선수
- 독일의 남자 축구 감독
- 1. FC 쾰른/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
- 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퇴, 이적
- 바이어 04 레버쿠젠/은퇴, 이적
- 독일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 1. FC 쾰른/역대 감독
- 헤레스 CD/역대 감독
-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역대 감독
- 레반테 UD/역대 감독
- 헤타페 CF/역대 감독
- 레알 마드리드 CF/역대 감독
- 베식타스 JK/역대 감독
- 말라가 CF/역대 감독
- 다롄 프로/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