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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13:04:41

신분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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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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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정 위치3. 기리영 전투의 주체4. 멸망 시기

1. 개요

臣濆活國

마한 54개국 중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앞 부분에 나온 것으로 보아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의 형태가 비슷한 신분고국(臣濆沽國), 신분첨국(臣濆沾國), 신책첨한(臣幘沾韓), 신분고한(臣濆沽韓)[1]으로도 전해진다.

재구된 서주 시대의 상고한어에 따르면 '분'(濆)의 발음은 당대에 /*prals/ 또는 /*bɯl/이었기 때문에, '분'(濆)은 다른 소국명에서 나오는 '비리'(卑離)와 같이 ""을 뜻하는 어휘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상고한어 재구음은 《삼국지》 동이전의 연대인 서기 3세기와 시대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2. 비정 위치

처음 이병도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陽城)면의 고구려 시절 지명 '사복홀(沙伏忽)' 혹은 '사파을(沙巴乙)'이 '신분'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신분활국의 위치를 이곳으로 비정했다.[2] 그러나 신분의 신(臣)은 3세기 당시의 발음이 /*ɡin/으로 재구되므로[3] '사(沙)'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한편 천관우는 《삼국지》가 기록한 마한 소국들의 순서가 대체로 북에서 남 방향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6번째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강원도 춘천에 비정되고, 8번째인 백제국(伯濟國)이 서울특별시 강남에 비정되므로 7번째인 신분활국은 대체로 그 사이인 가평에 비정될 것이라고 추측했다.[4]

3. 기리영 전투의 주체

서기 246년에 일어났던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고려되는 유력 후보이다.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명나라 이후의 《삼국지》 판본에서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라고 되어 있는 구절이 남송의 서적 《통지(通志)》에 인용된 보다 오래된 판본에서는 "신분고한이 분노하여(臣濆沽韓忿)"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앞 문단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활국은 백제국보다도 북쪽인 경기도 북부 일대에 위치했으므로 황해도 지방의 대방군과 교전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해당 학설은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고이왕이 이끌던 백제국이었을 것이라는 기존 가설의 의문점을 해결하기에 현재 사학계에서 유력한 견해가 되었다.

신분활국이 삼한 일부를 주도할 만한 세력이었다고 볼 근거가 마땅치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에 신분활국을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보는 측에서는 《삼국지》에서 삼한의 신지(臣智)[5]에게 주어진 특별한 칭호의 예시인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 대목에서 '분신(濆臣)'은 '신분(臣濆)'의 잘못된 도치라는 논거를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신분활국의 신지는 '이아불례(離兒不例) 신지' 혹은 '아불례 신지'로 목지국의 진왕과 함께 삼한 연맹체를 주도하는 유력자였으며, 신분활국이 마한 북부에서 위나라낙랑군과 대방군 연합군에 맞설 만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던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신분활국 주체설을 지지하는 견해임에도 해당 대목을 '신분(臣濆)'의 도치로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6] 도치설에 기반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럼에도 판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한 반론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기리영 전투의 주체를 목지국이나 백제로 보는 최근의 견해들도 기리영 전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신분활국의 상당한 역할이 있었음을 대체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신분활국이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이미 온조왕 시대부터 마한 일대를 병합했다고 한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백제본기〉의 마한 병합 기록은 《삼국지》의 기년 및 고고학적 발굴 양상과 교차 검증한 결과 후대인들에 의해 연대가 앞당겨졌다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신빙성이 낮게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신분활국을 비롯한 마한 북중부의 소국들은 백제 고이왕 때 병합되었고, 침미다례를 비롯한 남부의 소국들은 근초고왕 때 복속되어 무령왕 때 직할령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4. 멸망 시기

대부분의 원삼국시대 소국들이 늘 그렇듯이 멸망 년도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신분활국은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추정되므로, 《삼국지》의 기록에 "한(韓)을 멸하였다"는 구절이 있기에 246년 이후에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설에 따르면 고이왕 시대 이후 백제가 갑자기 성장한 것은 백제가 이 시기 이후 한강 중·상류로 패권을 확대하며 대중국 무역 경로를 차지하고, 철기 문화를 확실히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

만일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신분활국은 경기도 지역의 국가이므로 3세기 중반 백제 고이왕에 의해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 때 복속된 소국들은 주로 전라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 삼한의 소국명 뒤에 국(國) 대신 한(韓)을 붙이는 용법은 당시에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위지〉 한전에서 '구야국(狗邪國)'으로 기록된 변한 금관국은 같은 문헌의 왜인전에서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었다.[2] 《삼한문제의 신고찰》, 1936.[3] Schuessler (2007)의 후한 시기 재구음에 의거한 것이다.[4] 《마한제국의 위치 시론》, 1979.[5] 《삼국지》에 따르면 진왕(辰王) 예하의 거수(渠帥)들 가운데 세력이 큰 자를 '신지'로 불렀다고 한다.[6] 尹龍九, 1999,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性格」, 『國史館論叢』 第85輯.[7] 한강 하구 및 서울/경기 지역은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철기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후진적인 곳이었다. 오히려 한강 상류 지역에서 기원전·후부터 철기 관련 고고학적 유물이 꾸준히 나타난다. 그리고 3세기 중반 고이왕 대 이후로 한강 하류에서 철기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4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제철 유적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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