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신영록 辛泳錄 / Shin Young-Rok |
출생 | 1987년 3월 27일 ([age(1987-03-27)]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82cm, 72kg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은퇴) |
학력 | 대동초 - 세일중 (중퇴) |
병역 | 전시근로역[1] |
소속 구단 |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3~2009) 부르사스포르 (2009~201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0~2011) 제주 유나이티드 FC (2011~2012)[2] |
국가대표 | 3경기 (대한민국 /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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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별명은 디디에 드록바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하여 영록바, 저돌적인 플레이타입이라 하여 탱크였다.
2. 플레이 스타일
182cm에 70kg가 넘는 체격으로 몸싸움에 쉽게 밀리지 않고 스피드도 느리지 않으며 포스트플레이도 괜찮다. 다만 발기술이 좋은편은 아니어서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하는 해결사 능력은 아니다. 특출난 골 감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확실히 해결하는 타입.어떻게 보면 포처 스타일에 가까웠던 유형으로 수원 시절 많은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선수였으나, 후술할 심정지 사고로 인해 불운하게 선수 생활을 접어야해서 많은 축구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세일중학교를 중퇴하고 김호 감독이 이끄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과 프로 계약을 맺었다. 2003년 10월 29일 스원 홈구장인 빅버드에서 열린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경기 전반 41분 부상당한 고창현을 대신해 교체 투입되며 K-리그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인 만 16세 7개월 2일라는 기록, 당시 기준 K리그 역대 최연소 출장 3위이자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사상 최연소 출장 기록을 쓰게 됐다.[3] 이후 차범근 감독 아래 큰 기회를 받지 못하다가, 프로 데뷔 3년차인 2005년 10월 30일 부천 SK와의 K-리그 후기리그 경기에서 0:2로 뒤지던 후반 8분에 만회골을 터트리며 프로 데뷔 골을 기록. 그러나 팀은 졌다. 득점 당시 나이가 18세 7개월 3일로, 당시 기준 K리그 역대 최연소 득점 4위이자, 고종수에 이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최연소 득점 2위 기록을 세웠다.2008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으로 나서며 18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고, 이를 눈여겨본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의 부르사스포르로 이적, 첫 시즌 16경기에 나가 4골 4도움이라는 상당한 활약(팀은 리그 6위)을 하며 서포터 선정 최고 용병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엔 벤치를 지키는 게 많아서 2골 3도움에 그치면서 감독 및 구단 측과 갈등을 빚었는데 무엇보다도 부르사스포르가 계약금을 그때까지도 주지 않아 구단을 떠나기로 했다. 이후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톰 톰스크로 이적하려고 했으나 이적동의서가 발급되지 않아 이적에 실패,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부르사스포르 서포터들은 구단 측이 사실 신영록을 대충 땜질 선수로 데려온 것이라는 비난을 하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나온 그 2009-10 시즌에 부르사스포르는 처음으로 쉬페르리그를 우승하였다. 하지만, 부르사스포르는 이후 부진에 빠져 2부리그로 강등당하더니만 21-22시즌에는 3부리그까지 강등당하고 만다.
이후 2011 시즌에는 공격력 강화를 노리던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하지만 후술할 심정지 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그라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3.2. 국가대표 경력
2003 FIFA U-17 월드컵, 2005, 2007 FIFA U-20 월드컵, 2008 베이징 올림픽 등 각 연령별 대표팀이 출전하는 세계 대회에 모두 선발되어 해당 대표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약했다.[4] 2005년 대회에서는 1골[5], 2007년 대회에서는 2골을 기록했는데 U-20 월드컵에서 2개 대회 연속으로 골을 넣은 유일한 한국인 선수. 그런데 한국은 두 대회 모두 예선 탈락했다.유독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가끔 A매치 데이에 발탁되어 출장한 적은 있지만 해외파가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월드컵 및 월드컵 예선에 대비하는 국대에는 명함을 내밀기 힘든 편. 즉, 뛰어난 공격수긴 하지만 국내 최정상급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다.[6]다만 베어벡호 당시에 만 19세로 선발되어(부상당한 조재진 대신) 당시 뛰지는 못했지만 대표팀 막내였고 상당히 어린 나이여서 언론에게 주목도 많이 받았다. 유소년 시기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초빙된 유소년팀 감독 아브라함 브람으로부터 최고의 유망주 공격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4. 심정지 사고
2011년 5월 8일, 대구 FC와의 홈경기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사유는 부정맥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 최근 몇 년간 경기 도중 이렇게 픽 쓰러져 제대로 조치받지 못하고 숨지는 선수들의 사례가 있어서[7] 지인 및 관계자, 수많은 축구팬들이 걱정했다. 더군다나 종목은 다르지만 한국에는 11년 전에 비슷한 일을 겪고 결국 1년 전에 사망한 선수가 있어서...천만 다행히도 경기장의 응급의료체계가 즉시 가동하여[8], 쓰러진 직후 상대팀인 대구 FC의 안재훈 선수가 기도를 확보하였고 의료진에 의해 심폐소생술 및 제세동도 3분 안에 실시되었으며 병원 이송도 신속히 이루어졌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의식 회복 관찰단계에 있다가 6월 27일, 50여일 만에 극적으로 (가족을 알아볼 정도로) 의식을 회복하였다. 이 모든 게 경기장 내외에서의 기적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구급치료 덕분이었다. 신영록 선수의 경우 쓰러진 직후 기도확보가 이루어졌고, 심폐소생술 및 제세동이 3분 만에 이루어졌다. 이후 9분 만에 병원으로 이동해서 총 12분 만에 병원 수술대로 이동하였다. 이후 안재훈 선수와 제주 김장열 트레이너는 이때의 빠른 응급처치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하였다.
더 기적적인 건 당시 경기장 주변 환경이었다. 원래 제주 유나이티드는 서귀포시에 위치한 제주월드컵경기장을 홈경기장으로 쓰지만 이 날은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종합경기장에서 경기를 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심장병 관련 시설이 있는 병원은 제주시 연동에 있는 한라병원이 유일했고, 여기서 경기장까지는 빠르면 10분 정도 주파가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서귀포에서 경기했을 경우라면[9]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한라병원까지는 40km가 넘는다. 도로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이송시간이 40분~50분은 들게 된다. 심장 관련 위급상황은 시간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에 언급한 모든 상황이 걸렸을 경우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나마 제주시에서 홈경기가 치러진 게 천운이었다.
일반적으로 급심정지로 쓰러질 때 가장 중요한 시간이 발생 직후 최초 4분 30초라고 하며, 이후 1분이 지날 때마다 소생 확률이 7~10% 정도 떨어지며, 4분 30초가 지나면 뇌사가 진행되고, 상태가 지속될 경우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즉, 최대한 빠른 조치가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수단인데 신영록 선수의 경우 말 그대로 기적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신영록 선수의 사례는 우수 응급 구조 사례로서 학계에도 발표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 스포츠계에서 야구 임수혁 선수나 권투 최요삼 선수 경우와 같이 현장에서 응급처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결국 안타까운 사망 사례를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영록 선수의 사례는 향후 좋은 선례가 되었다. 이후 K리그 전 경기장에 의료진 3명과 자동심장충격기가 의무화되었으며, 경기 때마다 특수구급차가 와서 대기하게 하였다. 3분 30초간 15단계로 이뤄진 응급상황 대처 메뉴얼도 제작했다. 신영록 선수의 사례는 대한선수트레이너협회 세미나 등을 통해서 연구되었고, 이후 2013년 당시 전북 현대 모터스 소속이던 박희도 선수와 FC 서울의 몰리나 선수가 경기장에서 쓰러졌을 때에도 빠른 대처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10]
K리그의 영향을 받아 프로야구와 프로농구도 경기 중 의사와 자동심장충격기를 의무 배치하도록 규정을 수정하였다. 하지만 비인기 종목이나 아마추어 대회는 열악한 재정 탓에 안전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안타깝게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은 재활의지가 컸지만 일상 생활은 곧 가능해지겠지만 선수 복귀는 쉽지 않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후 이후 지속적인 재활 운동을 통해 일상생활로 복귀하려는 노력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현재 신영록은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5. 사고 이후
2011년 9월 16일, 병원을 퇴원하고 통원치료와 재활을 병행한다고 밝혔다.2013년 현재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데 한 달에 수백만 원이 든다고 한다.
2014년 12월 축구 발전 기금 전달 행사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하루 다섯 시간씩 재활치료 중이라고 한다.
2015년 5월 재활치료 취재기가 떴다. 한 번에 윗몸 일으키기를 200회를 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고 한다. 다만 여전히 재활치료비가 비싸서 취재를 갔던 기자의 뉴스펀딩을 통해 치료비 모금을 하고 있다. 그리고 5월 21일 넥슨이 3,000만 원을 기부하고 피파 온라인 3 카드로 추가가 되었다고 한다. #
2015년 9월 19일, 자신의 친정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최대의 라이벌 FC 서울과의 K리그 클래식 홈경기 시작 전에 센터 서클에서 시축을 했다. 아직은 휠체어에 의지하는 몸인지라 걷는 것도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고 킥도 힘겹게 해냈으나, 홈팬 원정팬 가릴것없이 모든 관중과 선수들이 그를 향해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그런데 전 소속팀인 수원이 0:3으로 졌다...해당 영상
2016년 7월 10일, 친정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과 수원 FC 간에 열린 수원 더비를 찾은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2017년 7월 30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 VS 롯데 자이언츠 경기의 시구자로 참석했다. # 아직까지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일생생활이 힘들어 보이지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11월에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나서서 부산광역시의 200m 구간을 무사히 봉송했다. 차두리가 함께 성화 주자로 나서서 몸이 불편한 신영록을 도왔으며, 가도에 구경하러 나온 부산 시민들은 신영록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해주는 훈훈한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2020년 2월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에서 얼굴을 비췄다. 이때 소리소문 없이 은퇴한 김주영도 모습을 비췄다. 그리고, 많이 회복이 되었는지 부축 없이 혼자 서 있었고 간단한 인사말도 가능하다. 다만 아직도 동작이 조금 어색하긴 하다.
2022년 5월 4일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했다. 수중 치료를 포함한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으며, 문장 단위로 말하는 것이 다소 힘들어 보였던 예전과는 달리 발음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되돌아왔고, 스스로 수저를 사용해서 식사까지 할 정도로[11] 많이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축구 팬들에게 다시금 감동을 안겨주었다. 2008년 슈퍼매치에서 중거리슛으로 골 넣었던 걸 기억하냐는 제작진의 질문에는 기억한다고 답 했으며 자신이 과거 청소년대표팀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오버헤드킥 골을 넣은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 하나라는 언급까지 했다.[12] 영상
2024년 7월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팀 K리그 VS 토트넘 홋스퍼 FC 경기에서 유연수와 함께 시축을 진행했다.[13] 해당 영상
6. 관련 문서
[1] 학력 미달[2] 2012년까지는 선수로 등록되어 있었다.[3] 이 기록은 2021년 6월 기준으로 여전히 구단 역대 최연소 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4] 연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U-17, U-20, U-23 대표팀 모두 월반해서 선발되었다. 연령별 대표팀에서 나이 제한보다 2살 정도 어린 선수가 선발됐다면 그 선수는 엄청난 유망주라는 이야기다.[5] 이 당시엔 턱 부상으로 인해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6] 허정무호 당시 몇 번 발탁되어 뛴 경기가 영 신통찮은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당시 서동현, 하태균 등과 함께 차범근 감독이 과거에 인정했듯 먼 훗날 국가대표팀 주전 공격수,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통할 공격수로 발돋움할 신체조건이나 멘탈의 잠재성은 충분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영록 선수의 기량이 제대로 만개하기 전에 너무 일찍 져버렸다고 봐야할 것이다.[7] 심지어 응급의료체계가 잘 된 A매치 중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비비앙 푀[8] 이러한 스포츠 경기장 의료체계도 전술된 임수혁 선수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9] 서귀포에는 대처가능한 수준의 의료기관이나 전문의가 없다.[10] 2015년 제주 유나이티드 정영총 선수 역시 의료진의 빠른 대응으로 금방 일으킬 수 있었고, 본인도 이상없다는 진단을 받았다.[11] 젓가락을 사용해서 자장면을 먹었는데, 젓가락질은 섬세한 손동작을 요구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12] 촬영 당시 이 인터뷰를 보고있던 신영록 선수의 부모님이 놀라워했는데, 당시의 골을 어머니는 아예 기억도 못했고 아버지는 골 자체는 기억하나 상대팀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났다고 했다. 부모님도 기억 못하던 경기를 뇌손상이 심한 신영록이 정확히 기억했던 것이다.[13] 유연수는 교통 사고로 인해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