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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 1세

아흐메트 조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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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델리 마이코 파토스 나노 살리 베리샤 에디 라마 }}}}}}}}}

<colbgcolor=#cd0900><colcolor=#000>
파일:King_Zog_I.jpg
출생 1895년 10월 8일
오스만 제국 마나스트르 빌라예트 데브레 산자크 부렐 부르가예트 성
(現 알바니아 디버르주 마트현 부렐)
사망 1961년 4월 9일 (향년 65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센주 쉬렌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주 쉬렌)
재임기간 제11대 총리 (1기)
1922년 12월 26일 ~ 1924년 2월 25일
제11대 총리 (2기)
1925년 1월 6일 ~ 1928년 9월 1일
초대 알바니아 제1공화국 대통령
1925년 1월 31일 ~ 1928년 9월 1일
재위기간 알바니아 국왕
1928년 9월 1일 ~ 1939년 4월 9일
서명
파일:조구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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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900><colcolor=#000> 가문 조구 가문
이름 아흐메트 조구(Ahmet Zogu)[1]
부모 아버지 제말 파셔 조구
어머니 사디예 톱타니
형제자매 이복형 젤랄
동복누나 아딜레
동복여동생 나피예, 세니예, 뮈제옌, 루히예, 마지데
배우자 알바니아의 제랄딘
자녀 아들 레카 조구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정계 입문과 권력 장악2.3. 대통령 재임 시절2.4. 국왕 즉위2.5. 국왕 재위시절2.6. 이탈리아의 침공과 영국으로의 망명2.7. 사망
3. 평가4. 가족5. 여담

[clearfix]

1. 개요

알바니아의 정치인.

알바니아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으며, 친위 쿠데타로 수립한 알바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이었다.

2. 생애

2.1. 초기

1895년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알바니아 부렐(Burrel) 근처 부르가예트 성에서 지방 영주였던 제말 파셔 조골리(Xhemal Pashë Zogolli)와 사디예 톱타니(Sadije Toptani)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코스탄티니예에서 교육받았으며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복형이자 장남인 젤랄 베이 조골리(Xhelal bej Zogolli)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장자 권리 상속을 거부하자 아흐메트 조구가 대신 집안을 이끌게 된다. 17살이 되던 이듬해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아흐메트 조구는 지방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조구는 자원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후 5년 동안 서유럽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아흐메트 조구는 서유럽의 생활 양식에 익숙해지게 되고 이는 이후 아흐메트 조구의 정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흐메트 조구는 종전 이후인 1919년 알바니아로 돌아온다.

2.2. 정계 입문과 권력 장악

본격적으로 아흐메트 조구가 정계에 입문하던 시기 알바니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방마다 토착 영주들의 입김이 강해 사실상 수백개의 지역으로 쪼개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알바니아는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정치 체제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이러한 후진성은 알바니아의 정치 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불안정은 극심해서 1921년 7월부터 12월까지 불과 다섯 달 동안 다섯 번이나 내각이 바뀔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중재를 맡아야 할 인물인 빌헬름 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일에 체류 중인 상황이었다.

한편 아흐메트 조구는 이때 북부 지지층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키우고 있었고 1920년부터 1년 동안 슈코더르(Shkodër) 주지사, 1921년부터 1924년까지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내무부 장관 시절인 1923년 총선이 실시되고[2] 조구파가 자유주의 세력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흐메트 조구는 본격적으로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주된 경쟁자는 저명한 학자이자 알바니아 정교회를 재조직한 판 놀리(Fan Noli, 1882–1965)였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놀리와 달리 북부 출신 무슬림 지주들을 대변하던 조구는 토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놀리와 극심한 충돌을 빚는다. 여기에 더해 조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지배하던 코소보 지방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권리 보호를 제대로 부르짖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었다. 결국 1924년 2월 23일 의사당 앞에서 급진파였던 아브니 루스테미(Avni Rustemi, 1895–1924)의 주도로 아흐메트 조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조구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넉달 후인 6월 10일 아브니 루스테미가 조구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판 놀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익 쿠데타가 일어나 조구는 유고슬라비아로 쫓겨난다.

이렇게 조구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듯 했으나 판 놀리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원 아래 조구는 불과 반년 후인 12월 13일 유고슬라비아군과 러시아 백군 잔류 세력을 데리고 다시 알바니아 본토로 들어온다. 결국 12월 24일 조구가 다시 수도 티라나를 장악함으로서 판 놀리 정권은 붕괴되고 판 놀리 세력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다시 권력을 장악한 조구는 이듬해 비트 대공을 몰아낸다.[3] 이후 알바니아를 공화정으로 전환시켰고 1월에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된다.

2.3. 대통령 재임 시절

보수적인 무슬림 지주층이 주요 지지 기반인 조구였지만 그의 정부는 서유럽식 국가 모델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로 사회 개혁이 추구 되었는데 이 시기 주요 업적이라면 1926년 2월 알바니아 최초의 근대적 지폐인 레크(lek)화[4]가 도입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조구는 정치적으로 권위주의를 추구했고 남은 정적들을 탄압하면서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한편 조구는 국경 지방의 마을 일부를 교환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고 거기에 더불어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티라나의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티라나 중심부에 이탈리아 양식의 근대식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관계 강화는 국왕 즉위 이후 더욱더 강화되는데 무솔리니는 10여년 후 알바니아를 병합함으로서 조구의 뒤통수를 친다.

2.4. 국왕 즉위

1인 권력을 확립해나가고 있던 아흐메트 조구는 대통령 타이틀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바로 국왕이었다. 물론 1925년에 비트 대공의 군주직을 박탈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대통령보다는 국왕이 더 매력적인 직책이었던 것이었다 마침내 1928년 9월 1일 아흐메트 조구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알바니아 왕국을 세우고 '알바니아인의 왕 조구 1세(Zogu I, Mbreti i Shqiptarëve)'라는 이름으로 국왕으로 즉위한다. 동시에 그는 알바니아 왕국군(Ushtria Mbretërore Shqiptare)[5]의 최고 원수 칭호를 수여받는다. 조구 1세는 자신이 스컨데르베우의 후손[6]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컨데르베우 3세[7]라는 즉위명도 역시 사용하게 된다.

국왕 즉위 이후 그는 절대 권력을 강화하면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영국과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국가는 일개 지방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혈통을 문제시하여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폴란드 제2공화국, 그리스 제2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상당수의 유럽 국가는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다. 특히 조구 1세의 알바니아 왕국은 역시 같은 알바니아계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왕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2.5. 국왕 재위시절

국왕 재위 시절 조구 1세의 주요 정책은 세속주의정교분리[8]의 강화로 요약될 수 있다.

즉위 선서식 당시 조구 1세는 국가 통합을 위해 쿠란과 성서에 동시에 손을 얹고 즉위 선서를 하여 자신은 알바니아 최대의 소수 종교인 기독교 또한 알바니아 최대 종교이자 자신의 종교인 이슬람 못지않게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게다가 조구 1세는 유럽 국가들과의 종교적 괴리감을 줄이고 자신의 종교적 색채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아흐메트 1세 대신 자신의 성을 딴 조구 1세를 즉위명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행보는 실제 정책에도 반영되어 조구 1세는 1928년 샤리아를 폐지하고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체계에 기초한 민법 시스템을 도입한다. 경제적으로도 조구 1세는 경공업 육성을 꾀했고[9]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도로, 교량 등 인프라 건설 사업[10]과 전화 등 통신망 연결 사업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 발달은 매우 지지부진했고 아직도 알바니아의 주력 산업은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농업이었다. 게다가 전국적인 야학 설립 등 교육 진흥 정책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의 문맹률은 80%에 육박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 들어서서 전세계적인 대공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알바니아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당시 알바니아의 외채 대부분은 이탈리아가 갖고 있었고 인프라 확충 및 여러 건설 사업은 이탈리아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에 알바니아는 더욱더 이탈리아에 예속되어 가고 있었다. 조구 1세는 이탈리아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해야 했고 이제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등의 추축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monarquiaconfidencial.com/Zog-reina-Geraldine-Albania-boda_ECDIMA20160111_0009_20.jpg
이러한 알바니아와 추축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1938년 4월 27일 열린 조구 1세와 헝가리의 귀족인 어포니 제랄딘(Apponyi Géraldine)의 결혼식[11]에서도 제대로 드러났다. 우선 제랄딘 왕비부터가 추축국인 헝가리의 귀족이었으며 당시 결혼식에는 갈레아초 치아노[12]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는 조구 1세에게 메르세데스-벤츠 540K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알바니아와 추축국들의 우호적인 관계와 달리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자극받아 알바니아를 병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2.6. 이탈리아의 침공과 영국으로의 망명

파일:external/juliapgelardi.files.wordpress.com/leka3.jpg
영국 망명 시절 제랄딘 왕비와 레카 왕자와 함께.

마침내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이에 반발한 조구 1세는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이 언론에 나가지 않게 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최후통첩이 언론에 보도되어 버렸고, 군대로 저항하자니 이미 군대까지 이탈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조구 1세는 티라나와 두러스(Durrës)의 국립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빼낸 다음 제랄딘 왕비와 생후 이틀 된 레카 왕자를 데리고 왕족들과 함께 알바니아를 빠져나온다. 조구 1세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왕이 사라진 알바니아 왕국은 그대로 이탈리아에 접수되어 버렸다.[1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자 조구 1세는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오려 했으나 알바니아는 이미 엔베르 호자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한 뒤였기에 왕위 복귀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1946년 파루크 1세의 도움으로 이집트 왕국에 정착하게 된 조구 1세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왕당파 게릴라를 여러 차례 알바니아 본토에 침투시켜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14] 1950년대에 들어서면 냉전이 완전히 고착화되면서 서방의 도움도 더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전복시키면서 조구 1세와 그의 가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고 그들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다.

2.7. 사망

조구 1세는 평소에 애연가였고 왕위 복귀 좌절에 따른 실망감도 겹쳤기에 건강을 해치게 된다. 결국 조구 1세는 1961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 근교 쉬렌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 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망명 알바니아인 단체는 그의 아들 레카 왕자를 알바니아의 왕 레카 1세로 선포한다.[15]

공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조구 1세의 가족은 스페인, 남아공 등지를 떠돌아다녀야 했고 2002년이 되어서야 알바니아에 돌아온다.

게럴디네 왕비는 2002년 티라나의 한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타계했고 레카 왕자는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알바니아가 엉망이 되자 이 틈을 타서 왕정복고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추방당했다. 그나마 코소보 전쟁을 지지하고 도왔음이 인정되어 알바니아로 돌아와 살게 되어 조국에서나마 2011년 타계한다. 하지만, 레카 생전에 아버지 조구 1세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가, 그가 죽고 1년 뒤인 사후 51년 만인 2012년 11월 17일 알바니아 독립 100주년에 맞춰서 알바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행사는 알바니아 정부 주관으로 진행되었으며 조구 1세의 유해와 다른 왕족들의 유해는 티라나에 위치한 왕족 영묘에 안장된다.

3. 평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Mbreti_Zog_statue_Tirana.jpg
티라나 중심부에 자리잡은 조구 1세의 동상.[16]

알바니아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확립하는데에 기여했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 붕괴 이후 알바니아 내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가 확립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의 경우 알바니아가 유럽 사회에 제대로 편입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기에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17]

물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독재자였지만, 사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도 하고 조구 1세의 뒤를 이은 엔베르 호자 공산 정권의 독재가 조구 1세의 그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무자비했기에[18] 상대적으로 조구 1세의 독재에 대한 기억이 희석되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상을 건립하고 주요 거리와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등 조구 1세에 대한 기념 사업들을 알바니아 구 왕실과 협력하여 실시하고 있다.

4. 가족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64507fb606158df9e07276b4dd75840.jpg 헝가리 귀족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7년 12월 조구 1세에게 소개되어 알바니아를 방문했고 4개월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남편, 생후 이틀 된 레카 왕자와 함께 알바니아를 떠나야 했다. 조구 1세의 사망 이후 지속적으로 스페인을 거쳐 남아공에 정착했고 2002년 6월 알바니아로 귀국했다. 같은해 10월 22일 티라나의 군 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생을 마감했다.

자녀: 1명
파일:external/static.guim.co.uk/Leka-Zogu-005.jpg조구 1세의 외아들. 생후 이틀만에 알바니아를 떠나 실질적으로 알바니아를 방문한 건 공산 정권이 붕괴된 이후인 1993년(54세)이 처음이다. 1961년 조구 1세의 사망 직후 망명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고 이후 계속 자신의 왕위 계승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975년 호주 출신의 수잔 컬렌워드(Susan Cullen-Ward, 1941~2004)와 결혼해 1982년 레카 2세를 낳았다. 공산 정권 붕괴 이후 두차례 알바니아를 방문했는데 당시 극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레카 왕자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은 것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에 의해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kingleka_2071404b.jpg
[20]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당시 알바니아를 다시 방문해 수도 한복판에서 지지자들과 왕정 복고를 주장하며 무력 시위를 벌여 알바니아 정부에 의해 폭동 교사죄로 기소되자 다시 남아공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2002년 사면되어 알바니아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정계에서 활동하다[21], 2011년 티라나에서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손자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b033bf1d7ba702d18e6ce657932f581.jpg레카 왕자의 외아들. 아버지의 타계 이후 뒤를 이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알바니아 외무부에서 일했으며 2012년 이후 알바니아 대통령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10월 8일 여배우 엘리아 자하리아(Elia Zaharia)와 결혼했다.

5. 여담


* 파일:King Zog(Hearts of Iron IV).jpg
Hearts of Iron IV에서는 알바니아의 역사적인 지도자로 등장한다. 소속국인 알바니아가 아무런 컨텐츠가 부여되지 않아 1939년 이탈리아의 중점을 통해 합병당하는 역할. 해당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알바니아가 여전히 공화국이기에 왕으로 등장하지 않고 사회보수주의 정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1] 본명은 아흐메드 무흐타르 조골리(Ahmed Muhtar Zogolli)이며 1922년에 아흐메트 조구로 개명하였다. 이후 모든 가족들은 조구라는 성을 쓰게 되었으며 사망한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소급하여 붙이게 된다. 영어권에서는 조그(Zog)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구(Zogu)의 알바니아어 부정형(indefinite form) 표현을 따른 것이다.[2] 1923년 이후 알바니아에서 자유 선거는 무려 68년 간이나 시행되지 않는다. 조구가 1인 권력을 장악하고 알바니아 왕국을 설립한데 이어 이탈리아의 침공, 엔베르 호자의 공산 정권 수립 등의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 그래서 알바니아에서 자유 선거는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진 1991년에야 다시 실시된다.[3] 사실 실제 통치는 알바니아의 독립이 승인된 1912년부터 1914년까지만 행했고, 1914년에 이탈리아를 걸쳐서 독일군에 합류했는데 독일이 패전했고, 당연히 군주 지위의 박탈이 예상되었지만 알바니아의 정국이 위낙 혼란했기 때문에 일단 명목상의 지위는 어찌어찌 유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세가 혼란했기에 독일에 남아 있었고, 이 때문에 실상 서류상으로만 군주이지 실제로는 허수아비 군주였다.[4] 알바니아는 이전만 해도 유럽 국가라면서 독자적인 화폐가 없었다. 1912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기초적인 발전도 제대로 이루지 못해 극도의 후진성에 시달리면서 알바니아는 제대로 된 근대적 경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서 이탈리아 리라 등 외국의 화폐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던 것. 당연히 화폐 정리 없이는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구의 근대적 화폐 도입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5] 알바니아 왕국군이 창립되면서 조구 1세가 고안한 경례 방식은 조구식 경례로 불린다.[6] 조구 1세의 어머니이자 제말 파셔 조구의 두 번째 부인인 사디예 톱타니(Sadije Toptani)가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나 불확실하다. 일단 자신이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이라는 조구 1세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7] 스컨데르베우 2세는 스컨데르베우의 아들이자 존 카스트리오티 1세(스컨데르베우의 아버지)의 손자인 존 카스트리오티 2세이다. 그는 스칸데르베우 사후 이탈리아로 망명갔다가 1481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하자 다시 알바니아로 복귀하여 반(反)오스만 봉기를 일으켜 3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실패하여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말았다.[8] 조구 1세의 시대에 이르러 알바니아는 체제에 있어서는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이루게 되나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완전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알바니아라는 조구 1세의 꿈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성립한 체제를 뒤엎어버리고 뒤이어 공산주의 체제를 세운 엔베르 호자에 의해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실현된다.[9] 엔베르 호자 항목의 각주 마지막 부분에 보면 20세기 초 알바니아의 공업은 벽돌, 담배, 통조림 공장 정도가 전부였다고 나오는데 사실 이것도 조구 1세 재임 시절에 겨우겨우 이뤄낸 거다. 그 전까지 알바니아의 산업은 사실상 농업이 전부라고 해도 무방했다.[10] 알바니아에서 철도는 1차 대전 기간 중 부설된 협궤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며 이 당시에도 자금 부족으로 인해 철도 부설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알바니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깔린 시기는 공산 정권 시절인 1949년이다.[11] 사실 왕이 되기 이전 조구 1세는 알바니아 전 총리 셰프체트 버를라치의 딸과 약혼하였으나 즉위하자마자 파혼을 했다. 당대 알바니아의 악습인 카눈에 따르면 버를라치는 조구 1세를 살해할 권리가 있었고 이로 인해 조구 1세는 국왕 재임 기간 내내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12] 당시 이탈리아의 외무장관이자 무솔리니의 사위. 훗날 무솔리니가 몰락할 때 축출에 찬성했으나, 축출 후 연금되었던 무솔리니가 독일군에게 구출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13] 당시 알바니아의 유력 인사들 또한 이탈리아의 침공이 임박할 때 미리 망명하거나,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아들였다.[14] 이 실패가 바로 악명높았던 MI6 출신이자 케임브리지 5인조 중 하나인 소련의 간첩 킴 필비가 벌인 공작 중의 하나이다.[15] 사실 알바니아의 대공이었던 독일인 비트 대공도 자식을 두었기에 왕위 계승에 문제가 될 여지가 생길 법 했지만 비트 대공의 아들인 카를 빅토어(Karl Viktor)가 50대 들어서 결혼한 탓에 자손을 두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대가 끊겨 분쟁의 여지가 사라져 버리기는 했다. 어차피 허울 뿐인 직책이기는 했지만 말이다.[16] 주변 도로는 공산주의 시절 스탈린 대로로 불렸으나 공산주의 붕괴 이후 조구 1세 대로로 이름이 바뀌었다.[17] 사실 알바니아는 보스니아와 함께 유럽의 몇 안되는 이슬람 국가다. 그나마 여기는 보스니아에 비하면 원리주의는 약하며 정교분리 덕에 주민들은 사실상 무교인 경우도 많아 저런 파국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호자의 무신론 강제로 인해 공산정권 붕괴 후 종교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원리주의가 유입되기도 했다.[18] 사실 호자의 독재는 과장 좀 보태면 어느 면에서는 북한마저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9] 헝가리인의 작명 순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성-이름 순이다.[20] 가운데에 군복 입은 남자가 레카 1세이다.[21] 왕이 되고 싶어서 쇼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2011년에 당시 알바니아의 대통령이었던 살리 베리샤가 왕정복고를 위한 국민투표가 조작된 것임을 폭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왕위에 집착하는 것도 일리는 있었다. 실제로 국민투표 당시에는 왕정복고 여론이 지배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투표 결과 부결로 나와서 당시부터 논란이 잦았다.[22] 1926년 즉위한 이란의 레자 샤 팔라비는 당초 공화정을 원했지만 기득권층과 영국의 반발로 군주에 오른 케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