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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7:42:03

애치슨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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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애치슨 라인.jpg
<nopad> 애치슨 라인의 대략적인 모습[1]
1. 개요2. 애치슨의 연설 내용3. 애치슨 선언의 배경4. 전개5. 영향
5.1.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5.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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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1950년 1월 12일에 미국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 미국 신문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2. 애치슨의 연설 내용

다음은 애치슨의 <아시아의 위기> 연설중에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는 부분이다.
So far as the military security of other areas in the Pacific is concerned, it must be clear that no person can guarantee these areas against military attack. But it must also be clear that such a guarantee is hardly sensible or necessary within the realm of practical relationship.

Should such an attack occur… the initial reliance must be on the people attacked to resist it, and then upon the commitments of the entire civilised world under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which so far has not proved a weak reed to lean on by any people who are determined to protect their independence against outside aggression. But it is a mistake, I think, in considering Pacific and Far Eastern problems to become obsessed with military considerations. Important as they are, there are other problems that press, and these other problems are not capable of solution through military means. These other problems arise out of the susceptibility of many areas, and many countries in the Pacific area, to subversion and penetration. That cannot be stopped by military means…
태평양의 다른 지역들의 군사 안보에 관련되어 있는 한, 그 누구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관계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보장이 타당하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공격이 발생한다면... 초기에는 공격받은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도록 의지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외부의 침략에 맞서서 독립성을 지키기로 결심한 그 어떤 사람도 의지할 수 있는 약한 갈대가 입증되지 않은 NU 헌장에 따른 문명 세계 전체의 헌신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태평양과 극동 문제를 고려할 때 군사적인 고려에 집착하게 되는 건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이지만, 압박을 가하는 다른 문제들도 있고, 이러한 다른 문제들은 군사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다른 문제들은 많은 지역과 태평양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체제 전복과 침투에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것은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멈출 수 없습니다...
딘 애치슨, National Press Club, 1950. 1. 12
위 연설에서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 바깥 지역에 대한 침공이 발생하면 먼저 침공을 당한 국가가 스스로 저항해야 하고, 유엔 아래 문명세계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며, 태평양과 극동지역에서의 문제에 군사적 해결책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Speech on the Far East - CIA CIA 정보공개법 전자자료실, 연설 전문은 PDF 3페이지 분량이다.
DEAN ACHESON’S ‘PERIMETER SPEECH’ ON ASIA (1950) 조금 요약한 버전.
ACHESON'S SPEECH TO THE NATIONAL PRESS CLUB 많이 축약한 버전.
해리 트루먼 도서관, Remarks by Dean Acheson Before the National Press Club.

3. 애치슨 선언의 배경

1949년 8월, 미국중국학자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 교수는 미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제출한 남한 정책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a]
남한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정도 지속될 것인가는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의견서는 1950년 4월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래티모어는 수일 후 상원에 출석하여 한국에 대한 원조 중지를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12월 결의에서 "만약에 공산군이 남한에 대하여 무력 침입을 행하더라도 미국은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 의견을 밝혔다.[a] 이처럼 당대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얻을 지정학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4],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도래한 냉전의 긴장 속에서 소련이 태평양 방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염려하여 대한민국에 충분한 무기도 제공하기를 꺼렸다.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선언은 이러한 미국 조야와 국무부의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섬, 인도차이나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 라기보다는, 침공받은 국가가 일차적으로 방어하고 유엔이 사후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연설문 원본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애치슨이 소위 '애치슨 라인'을 가리키며 쓴 단어는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이는 만약 이 나라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지원해준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국내여론도 이렇게 인식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 씨는 지난 12일 기자단 클럽에서 미국의 대극동정책을 발표했다. 본 장관[인용자주1]은 이번 애치슨 씨의 발표에 대하여 미국이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여러 민주국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박력있는 정책을 확고히 고집하고 있는데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아시아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고 악독한 공산주의 침략의 전선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이제 애치슨 국무장관이 발표한 바에 공동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국 국민은 더욱 공고하고도 단결된 힘으로써 그들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궐기하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결의를 가진 자유국가 인민에 대한 책임감을 이제 명확히 발표한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메어진 사명과 책임은 또한 한미양국의 유대성을 굳게하는 것이며 미국이 아시아에 있어서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공동의 책임을 가진다는 것은 한국민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키는 것이다. 이에 이 대통령[인용자주2]을 비롯하여 본 장관은 이 한국민의 뜻을 트루먼 씨 그리고 애치슨 씨에게 전하는 바이다.
"일강화참가기약 미의 대한원조책에 감사" 경향신문 1950. 01. 15 보도#
당시 애치슨 선언에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조속히 애치슨과 접촉하도록 했으나, 애치슨이 의회 출석으로 부재중이라서, 윌리엄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대신 만났다. 이승만은 한국을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서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한국의 방위를 포기하는게 아니라면서 원조를 약속했다. 이후 1950년 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0년 2월 10일, 미국 의회에서 한국 원조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한국도 안심하게 된다.

또한 애치슨 라인 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었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다.[7][8] 일본은 국권회복 이전으로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인데다 자국의 군대도 있었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되었다면 오히려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이었던 타이완 역시 애치슨 라인에서 빠졌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렀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9][10][11]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 주둔이 없어도 방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전략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12]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13]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되어 서구 열강에 맞먹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전략적 실수를 연발한 끝에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14] 1948년 앨버트 웨드마이어의 보고서가 제출될 당시 남한의 전력은 경찰 28,000명, 경비대 16,000명 수준이었으나 1950년 전쟁 직전에는 경찰 25,000명, 국군 10만명 규모로 증강되었고 미국은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이 북한을 압도할 전력을 구비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이 정도면 미군 증원 전까지 서울 방위는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 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4. 전개

애치슨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포기를 주장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것은 물론, 자국인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도 6.25 전쟁과 공산 진영 확대의 주범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46년에만 해도 한반도에는 미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M7 프리스트M18 헬캣 같이 T-34에 유효타를 줄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빼버리는 바람에 한국은 부산 앞까지 밀려버리고, 나중에 투입된 미군의 피해 또한 커졌다. 이는 전후 국군이 소유중인 구 일본군 장비[15]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과 합쳐져 6.25 발발 시점 국군의 무기 부족에 일조했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군비를 썼고 3만 6천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외교전략을 수정해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 이 전쟁과 전후처리 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덤으로 애치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회생을 앞당긴 구원투수로 지목받았다. 그가 야기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군수품 생산을 하청해 벌어들인 달러가 일본의 전후복구에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는데 유럽 주둔 미군까지 한반도로 차출돼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추축국이었던 독일은 1955년, 정식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본에도 상당한 수준의 재무장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일부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일본의 재무장재벌 부활이 이미 계획중이었다며 애치슨 라인의 영향을 축소하려 들지만, 이는 애치슨 라인을 한국에만 국한해서 본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위 지도에서 보듯 당시 1세계 진영이던 국민당의 중국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 빠져있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6] 이렇게 유럽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 일본 및 남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나마 한국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6.25 전쟁 이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 미국의 패권정책을 기반을 다져놓은 게 이 사람이고, 오히려 한국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당시 국무부가 NSC-68을 제안했으나, 트루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6.25로 인해서 공산권의 전쟁의욕을 직접적으로 느끼자 통과돼 2차 대전 종전부터 군축을 하던 미국은 이 때를 기점으로 군비 확장을 시작했다.

2006년 동북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을 때 "애치슨 라인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을 미국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이라고 해서 북한의 오판을 가져왔다"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에 아미티지 전 부장관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잘못됐다며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밝혔다.기사

최근에는 중국이 부상하고 대한민국과 대만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의 중요 동맹국이 되자 미국정계는 하마터면 애치슨 때문에 중요 동맹국이 날아갈 뻔 했다고 보기도 한다.[17]

5. 영향

애치슨 라인 선언은 김일성의 남침 결정에 파란불을 켜주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박명림, 션즈화, 매트레이 등 한국전쟁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애치슨 라인 선언이 북한의 남침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다. 애치슨의 선언이 파란불을 켜줬다는 주장을 처음 제기한 곳이 당시 야당인 미국 공화당이라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즉 애치슨 라인은 전쟁 자체보단 전쟁 중 그리고 전후에 제기된 해석에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애치슨 라인이 남침 결행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이것이 발전하여 북한의 남침을 미국이 유도했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 자체가 우연이나 정황근거에만 바탕을 두었고, 이것을 반박하는 자료들은 모조리 무시하거나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일련의 확증편향을 거치며 발전했다.

5.1.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대통령에게 94년6월 전달한 2백건의 구소련 한국전관련 문서를 면밀히 검토한 위더스비교수등 많은 학자들은 김일성이 빠르면 49년5월 소련방문때 자신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에게 승인해줄 것을 졸랐으며, 50년4월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주장을 근거로 미국은 북한이 한국을 정복하는 것을 저지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매트레이교수(뉴멕시코대) 미 참전비 제막기념 세미나서 주장(서울신문, 기사작성일자 1995.07.26 00:00)#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 6월 26일 철수했다. 미국 군부는 한반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는데, 미국 국무부는 한반도에서의 조기 철수에 반대했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의 맥아더 파벌이 한반도의 수호를 주장했다.

참고로 남침유도설을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 또한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은 정작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남침을 위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물자와 병력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충하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문제는 이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18]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19]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 발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전후 미국의 대(對)남한 정책과 실제 김일성 및 스탈린의 반응 및 의도, 선언 이후 한반도 정세 변화의 추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계없이 이전부터 남침을 추진했으며, 애치슨 라인의 진의를 파악했다. 애치슨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인해 남침을 추진하고 결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과 상관없이, 선언 전후로 남침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제임스 I. 매트레이(James I. Matray) 교수에 따르면, 김일성은 북한이 건국된 지(1948년 9월 9일) 몇 달 만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49년 3월 5일 스탈린과의 회담 자리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의지를 재확인하고 군사원조를 촉구했다. 즉, 김일성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애치슨 라인 선언 12개월 전부터 남침을 추진했으며, 이것은 애치슨 라인이 김일성의 남침 추진 및 결행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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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Kim Il Sung, within months after the creation of the DPRK, had begun to press Stalin for approval of an attack on South Korea. Preparatory to an invasion, Kim Il Sung proposed in January 1949 signing a Soviet-North Korean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 Stalin rejected the idea, arguing that it would receive world condemnation for perpetuating Korea's division. But he no doubt also was refusing an obligation to defend the DPRK if Kim initiated a war and the United States intervened. When Soviet Ambassador in Pyongyang, Terentii F. Shtykov, informed Kim Il Sung and Foreign Minister Pak Hon-yong that "to conclude a friendship treaty is not timely," the two "embarrassed" North Korean leaders suggested a "secret treaty" for Soviet military assistance as an alternative.[20]
그러나 북한(DPRK)이 건국된지 몇 개월만에 김일성(Kim Il Sung)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승인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준비의 일환으로 김일성은 1949년 1월 북소우호동맹조약(Soviet-North Korean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제안했다. 이에 스탈린은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 영구분단을 초래한다는 비난을 살 것이라며 거부한다. 이것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개시하고 미국이 개입할 경우 북한을 방어할 의무를 지는 것을 거부한 것이기도 하다. 주북 소련대사 테렌티 시티코프(Terentii F. Shtykov)는 김일성과 외무상 박헌영(Pak Hon-yong)에게 "성급하게 우호조약을 맺으려 한다"고 일렀고 이에 "당황한" 두 북한 지도자들은 그 대신 소련의 군사원조에 관한 "비밀 조약"을 제안했다.

Shtykov played a key role in causing Stalin to be cautious and skeptical in how he reacted to Kim Il Sung's lobbying for an invasion. Starting early in 1949, he began reporting a growing number of military clashes at the 38th parallel, complaining bitterly that North Korea "did not have enough trained personnel, adequate weapons and sufficient numbers of bullets to rebuff intensifying incursions from the South." When Kim Il Sung headed a delegation that visited Moscow to secure expanded economic assistance, Stalin made it clear that he would not sanction the DPRK provoking a war in Korea. In their meeting on 5 March, Stalin agreed to provide North Korea with Soviet technical trainers and between $40 and 50 million in credit to buy imports, as well as promising cultural exchanges. But he then issued a blunt warning to Kim Il Sung: "The 38th parallel must be peaceful. It is very important."[21] Nevertheless, Kim pressed for an invasion, telling Stalin that military means would be necessary to liberate all of Korea because "reactionary forces of the South will never agree on a peaceful reunification and will perpetuate the division of the country until they feel themselves strong enough to attack the North." It was the right time to attack because the Korean People's Army (KPA) was stronger than South Korea's army, guerrilla forces would support the invasion, and the southern people hated the Rhee regime.[22]
시티코프는 김일성의 남침 로비에 대해 스탈린이 인색해지고 회의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9년 초 시티코프는 38선 인근에서 증가하는 군사충돌을 보고하고 북한이 "남측의 증가하는 습격(incursion)을 물리칠 만큼 충분히 훈련된 병력도, 적절한 무기도, 충분한 탄약도 없다"고 강한 어조로 호소했다.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대표단이 경제원조 확대를 목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스탈린은 북한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3월 5일 회담 자리에서 스탈린은 북한에게 소련 기술고문 파견, 물자 수입을 위한 4,000~5,000만 달러의 신용차관, 문화 교류 제공을 약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김일성에게는 직설적으로 주의를 당부했다. "38선은 평화로워야만 합니다. 이것은 중대사항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한반도 전역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수단이 필수적이라며 스탈린을 압박했다. 그에 따르면 "남측의 반동세력은 결코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북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해졌다고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분단을 영속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인민군(KPA)이 남한군보다 강력하고, 남한의 빨치산(guerrilla)들이 남침을 지원할 것이며, 남한 주민들이 이승만 정권(Rhee regime)을 증오하므로 지금이야말로 남침의 적기였다.

Stalin firmly rejected Kim Il Sung's request, explaining that the United States likely would intervene because it would view an attack on the south as violating its agreement with the Soviet Union establishing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thereby igniting a major war. Moreover, US troops still were deployed in the south and the KPA was weaker than its adversary in South Korea. Stalin said that Kim could not invade until he gained "overwhelming superiority." "Does it mean that there is no chance to reunify Korea in the near future?," Kim Il Sung persisted. "Our people are very anxious to be together again and to cast off the yoke of the reactionary regime and their American masters." Stalin, according to Kim, then predicted that a North Korean invasion was "not necessary" because South Korea would strike first, thus allowing Pyongyang to portray its offensive as a counterattack. "Then your move will be understood and supported by everyone," the Soviet leader explained. (후략)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을 확고히 거절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미국은 남침을 소련과 체결한 38선 분계에 관한 협정을 위반하는 것으로 여겨 개입할 것이며, 이는 대전쟁(major war)을 촉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미군이 여전히 남한에 주둔하고 있으며 조선인민군은 남한의 적대세력에 비해 약하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압도적인 우세"를 얻지 않는 한 남침은 안된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들러붙으며 말했다. "근시일에 한반도를 통일할 기회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인민은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며 반동 정권과 그들의 미국인 주인들의 멍에를 떨쳐버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김일성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그 이유는 남한이 먼저 공격해올 것이므로 평양은 자신의 공세를 반공(反攻, counterattack)으로 포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모두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오"라고 설명했다. (후략)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9년 8월 12일에도 시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다시 남침 승인을 촉구했다. 이 요청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완범 교수의 논문을 통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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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한 김일성의 8월 12일자 개전 요청에 대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차원에서 심각하게 검토했다.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현시점에서의 남침을 승낙하지 않으면서 북한인민군을 강화시킬 것을 지시했다.[23] 이에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는 10월 4일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면적 대남결정의 불가를 통보했으며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24]

이완범. (2006).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돌베개, 2006)-. 역사와 현실, no.62, p.377-397

매트레이의 논문에 따르면 9월 12일 소련 대사관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두 사람은 제한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심지어 애치슨 라인 선언 닷새 후인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이 다시 남침 승인을 요청했을 때도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he was not ready to approve an invasion)."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교수가 발굴한 소련 외무부 문서고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북한의 남침 승인 요청은 48회나 거절당한 후에야 받아들여졌다. 그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추진한 냉전국제사 프로젝트(CWIHP)에 참여하여 이러한 정보들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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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st important information in this document comes from the citations to telegrams held in the Soviet Foreign Ministry archive. Such citations are of course not as definitive as the telegrams themselves, but in the case of citations that present information that directly contradicts the official Soviet position on the Korean War’s outbreak, one may confidently infer that this information is accurate. It would simply have been impossible for the writers of this survey baldly to contradict the often repeated Soviet on this highly sensitive subject unless these statements were true.[25]
이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들은 소련 외무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된 전보를 인용한 것들이다. 물론 그러한 인용이 전보 자체만큼 확고한(definitive) 것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소련의 공식적인 입장과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정보를 제시한 경우는 이것이 정확하다고 자신있게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들이 사실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이 조사[역자주1]의 작성자들이 한국전쟁 발발과 같은 지극히 민감한 주제에 대해 소련이 되풀이해온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략)

This document thus refutes part of the revisionist interpretation. However, it supports the revisionist argument that the impetus for the war came from Pyongyang, not Moscow.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27] The Truman administration’s assumption in June 1950, and of many scholars writing since then, that the Korean War was Stalin’s initiative, is therefore also false.[28]
이 문서는 그러므로 수정주의자들의 해석 중 일부를 반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을 주도한 것이 모스크바가 아니라 평양이라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그가 여러 차례(전보로 48번이나!) 호소한 후에야 마지못해 허락했다.
Kathryn Weathersby. (Fall 1993).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no.3, p.1, p.14-18

1999년 웨더스비는 ‘다시 본 한국전쟁’이라는 글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49년 초부터 50년 초까지 ‘남조선 적화’를 자신하며 남침 승인을 무려 48차례나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애치슨 라인 선언과 상관없이 김일성은 꾸준히 남침을 추진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김일성의 남침 결행에 영향을 미쳤을리는 만무하다. 션즈화 또한 애치슨 라인 선언이 남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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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서방에서 가장 유행했던 관점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발발에 동의한 것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일본, 류큐와 필리핀을 연결하면서 이것이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방어선이라 한 것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한반도와 대만은 모두 미국의 보호범위 안에 있지 않았다. 그 뒤 반년이 지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애치슨이 김일성에게 "파란불"을 켜주었다고 지적했다. 이 관점은 성립되기 어렵다.

우선 애치슨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극동방어선은 애치슨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그가 처음 선포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1949년 3월 맥아더는 동경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방어선은 아시아 해안과 일련의 섬들을 이은 것이다. 이 방어선은 필리핀에서 시작하여 류큐 군도의 오키나와를 포함하고 있다. 다음 일본으로 꺾어져 알류산열도와 알래스카에 이른다"고 했다. 애치슨 연설이 주목을 끌었다고 해도 스탈린은 이러한 공개적인 선언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9월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 발발 이전 우리 정보기관이 해독한 적들의 전보에 따르면 맥아더가 남북이 군사충돌 발생시에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음"이 워싱턴에 보고되었다고 했다. 이로부터 스탈린의 미국이 간섭하지 않거나 간섭할 틈이 없었을 것이라 믿었던 주요 원인은 애치슨의 연설이라기보다는 해독한 미국 전보와 김일성이 "전격전"에 대한 보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 저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스탈린의 동기를 미국입장에 대한 반응이라 보는 것은 목표 자체와 목표를 실현하는 조건을 뒤섞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략) 꼭 보아야 하는 점은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간섭할지 여부는 스탈린이 정책을 바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의 조건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애치슨이 연설에서 똑같이 대만도 미국의 방어선에 있지 않다고 했지만 스탈린은 왜 중공에 원조를 강화하지 않고 반대로 원조의 속도를 줄였을까? (중략)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파란 불을 켜준 배후에 북한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션즈화(김국헌 譯). (2023). 아시아에서의 냉전. 소명출판, p.78-80

이완범 교수는 남한을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이 북한 수뇌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애치슨 라인을 통한 남침유도론의 근거는 즉각적 개입밖에 없다면서 확실한 증거 없이 추론에만 의존하는 음모론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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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주의자들은 1949년의 철군, 1950년 1월 12일 애치슨(Dean Acheson) 미 국무장관의 한반도를 제외한 극동방위선(Acheson Line) 설정 등과 1950년 6·25 직후 미국의 즉각적 개입(rollback)의 비일관성 사이에 심상치 않은 계산이 개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힘의 공백이 생긴 것처럼 북한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남침을 유도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미국의 고의적 음모라는 설명이다. 거짓된 진술에 기초하여 북한·소련의 오판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모의 증거는 미국의 개입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것 외에는 거의 없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은 모든 상황을 확실한 증거에 의해 분석하지 않은 채 추론에 의해 분석하고 있으며 반증하기 어려운 결론들을 추론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즉각적인 개입이 어떻게 음모의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의 즉각개입은 단순한 정책전환이거나(전통주의자), 신중한 계산에 입각한 일관성 있는 예견된 행동(매트레이)으로 볼 수 있다.

이완범. (2006).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돌베개, 2006)-. 역사와 현실, no.62, p.377-397

김일성과 함께 남침을 결정한 스탈린도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심이 없었다. 다시 매트레이의 논문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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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ate, only one released Soviet document records a discussion among Communist leaders of Acheson's Press Club speech. On 17 January 1950, Soviet leaders Vyacheslav M. Molotov and Andrei Y. Vyshinsky met with Mao during the latter's visit to Moscow to negotiate the 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 Significantly, their discussion of Acheson's speech focused on US China policy, without any reference to Korea. (후략)
현재까지 공개된 소련 문서 중 공산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 토론에서 애치슨의 연설을 언급한 것은 단 1건이다. 그것은 1950년 1월 17일 소련 지도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와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i Y. Vyshinsky)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협상 문제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Mao)과 가진 회담 자리에서 있었다. 중요한 점은 애치슨의 연설에 대한 세 사람의 논의가 오직 미국의 대중(對中) 정책에 초점을 맞춰졌으며 한반도는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략)

(중략)

On 2 February, Stalin dispatched new instructions to Shtykov reflecting his continuing concerns about the dangers involved in launching an invasion of South Korea. Stalin ordered his ambassador to
2월 2일 스탈린은 시티코프에게, 남침을 둘러싼 위험에 대한 그의 우려가 반영된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스탈린은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explain to Comrade Kim Il Sung that at this point the question he wants to discuss with me must be completely confidential. It should not be shared with anyone even in the North Korean leadership, as well as with the Chinese comrades. This is dictated by the preoccupation with keeping the topic unknown to the adversary.
김일성 동지에게 현 시점에서 나와 논의하고 싶은 문제는 완전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할 것. 북한의 다른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동지들에게도 그 문제를 공유해선 안 됨. 이는 적대세력에게 문제를 비밀로 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임.

If Stalin had paid any attention to Acheson's speech, apparently it did not eliminate his anticipation of US intervention to block Communist conquest of Korea. Shtykov reported to Stalin on 7 February the issues discussed in his meeting three days earlier with Kim Il Sung. North Korea's leader asked if the Soviet government would grant the DPRK a loan and proposed sending to Moscow representatives with draft bonds valued at 2 billion won. He also wanted Stalin's permission to arm, equip, and train three more divisions to bring the total KPA strength to ten. Shtykov replied that the "question is large and serious" because approval would require large amounts of material resources. Kim Il Sung then explained that during 1950 he wanted to use the credit the Soviet government had promised to North Korea under the 17 April 1949 agreement for 1951, so that Pyongyang could fund this military expansion. Stalin wrote in response to these three requests in the margin "it is possible" and at the top of the cable to "give an answer today."[29]
스탈린이 애치슨의 연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미국이 공산측의 남한 정복을 막기 위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예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월 7일 시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이 문제에 대해 사흘 전 논의했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소련 정부가 북한에 신용대출을 제공할 수 있는지 질문했고, 모스크바로 20억 원의 차관을 요청했다. 그는 또한 조선인민군의 총 병력을 10개 사단으로 증강하기 위해 3개 보병사단 신설과 무장 및 훈련에 대한 스탈린의 허가를 요청했다. 시티코프는 소요될 물질적 자원이 막대하므로 "요청한 것이 거대하고 중대한 사안"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평양의 군대 증강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1949년 4월 17일자 협정에 따라 소련이 1951년 몫으로 배정해 둔 차관을 1950년 내로 쓰고 싶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이 3가지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전보 여백에 "가능함"이라고 썼고, 상단에는 "오늘 내로 대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매트레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군대 증강을 지원한 요인을 따로 짚는데, 이것은 후술할 것이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을 근거로 스탈린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48번이나 간청한 후에야 남침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김일성에게 애치슨 라인이 남침시 미국의 불개입을 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면, 반드시 스탈린을 상대로 군사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단 한번도 스탈린에게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적이 없다. 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나, 또는 시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나 똑같았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의 방소는 공식적으로 1949년 2월 말부터 보름 간, 1949년 말,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1952년 9월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사이에 비공식적인 방문이 몇 차례 더 있었다. 스탈린의 남침 승인은 3번째 공식 방소인 1950년 4월 10일에 이루어졌는데, 방소 당시 대화록에서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증거이다. 매트레이의 논문도 스탈린과 김일성은 단 한번도 애치슨 선언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오히려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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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s leaders were in Moscow for almost the entire month of April, meeting with Stalin three times. Stalin gave tentative approval for an invasion, outlining his views on preparations for the war. No minutes of the conversations have surfaced, but recollections of those present and foreign ministry reports provide information on what transpired. Stalin confirmed to Kim Il Sung that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has sufficiently changed to permit a more active stance on the unification of Korea." He pointed to the Communist victory in China as having "improved the environment for actions in Korea" because Beijing was no longer distracted and "can devote attention and energy to the assistance of Korea." This included the possible use of Chinese troops. Mao's triumph, Stalin elaborated,
북한 지도자들은 4월 내내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회담을 가졌다. 스탈린은 전쟁 준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남침을 잠정적으로 승인했다. 드러난 대화 내용은 몇 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당시 참석자들의 회고와 소련 외무부 보고서를 참고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수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한반도 통일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을만큼 국제 환경이 충분히 변했다"고 확인했다. 그는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거둔 것이 "한반도에서의 행동의 환경을 개선했다"고 지적했으며 그 이유로 중국의 혼란이 가라앉아 베이징이 "북한을 지원하는데 관심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중공군이 지원될 가능성을 포함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거둔 승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is also important psychologically. It has proved the strength of Asian revolutionaries, and shown the weakness of Asian reactionaries and their mentors in the West, in America. Americans left China and did not dare to challenge the new Chinese authorities militarily.
(마오쩌둥의 승리는) 심리적으로도 중요하다. 이는 아시아 혁명세력의 강력함을 입증했고, 아시아 반동세력과 그들의 서구 및 미국 멘토들의 무력함을 입증했다. 미국인들은 중국을 떠났고, 새로운 중국 정권에 감히 군사적으로 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A second factor was the signing of the 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 "According to information coming from the United States," Stalin explained, this agreement had made the United States much "more hesitant to challenge the Communists in Asia." "The prevailing [U.S.] mood is not to interfere" because the Soviets now had the atomic bomb and "our positions are solidified in Pyongyang.[30] But he did not mention Acheson's speech.
두 번째 요인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의 체결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이 조약이 미국으로 하여금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훨씬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소련이 이제 원자폭탄을 갖고 있으며 "평양에서 우리의 자리가 굳건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치슨의 연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Despite his decision to authorize planning for an invasion, Stalin still was fearful of US military intervention. In preparation for this contingency, he declared that North Korea could stage an offensive only if the PRC approved. (후략)
침공 계획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린 후로도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는 중국이 승인할 경우에만 북한이 남침을 개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후략)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만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애치슨 라인 선언을 눈여겨보았다면, 북한의 남침 시 미국의 향후 대응을 논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애치슨 라인 선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회담 자리에서 애치슨 라인이 언급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스탈린과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선언 이후로도 미국의 개입을 예상했다. 1950년 3월 5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두 차례 스탈린을 면담하고 남침 승인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시기상조라면서 승인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전쟁이 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직접 말한 대목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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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스탈린 동지, 이제 상황이 무르익어 전 국토를 무력으로 해방할 수 있게 됐다. 우리 군대는 강하고 남조선에는 강력한 빨치산 부대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다.
스탈린: 남침은 불가능하다. 첫째 북조선 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고 수적(數的)으로도 열세다. 둘째 남조선에는 아직 미군이 있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개입한다. 셋째 소련과 미국 사이에 아직도 38도선 분할협정이 유효함을 기억해야 한다.
김일성: 남조선 인민들은 하루빨리 통일을 해 반동 정부와 미 제국주의자들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스탈린: 적들이 만약 침략 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러면 절호의 반격기회가 생긴다.
1950년 3월 7일 스탈린-김일성 면담 기록. 스탈린, 김일성의 남침전쟁 승인하다(미래한국, 기사작성일자 2015.04.10 10:53)에서 재인용.#

만일 스탈린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의 남한 불개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어야 한다. 또한 김일성은 스탈린이 우려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 애치슨 라인 등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했어야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애치슨 선언을 오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3번째 공식 방소 자리에서 스탈린의 발언, 그리고 1950년 4월 마오쩌둥과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발언에서도 직접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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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4월 10일 남침을 허가했다. 스탈린은 바실리예프 중장을 평양 주재 소련 군사고문단장으로 보내 북한의 남침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을 작성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전쟁 구상을 밝혔다.

“북한의 공세 작전을 위해 엘리트 사단을 창설해야 하며, 기동 및 전투 장비는 기계화하고 무기는 완전히 보충되어야 한다. 그리고 3단계 공격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제1단계로 전투력을 38선 일대에 집중 배치하고, 제2단계로 북한은 평화 통일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 제3단계로 한국이 평화 통일 제안을 거부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누가 침공했는지의 문제를 감추기 위해 먼저 옹진반도를 점령하는 것에 동의한다. 한국과 미국이 체계적으로 저항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동원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이 전쟁은 기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소련은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아시아 문제’에 정통하니 그에게 맡겨야 한다.”

1950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우리는 2~3주 안에 남한 점령을 끝낼 것이므로 미군이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비하여 3개 군 병력을 중·북 경계선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남침을 이용해 미군을 끌어들이고, 중공군마저 한반도로 불러내 미국과 싸우게 만들려는 스탈린의 책략이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스탈린, 김일성의 남침전쟁 승인하다(미래한국, 기사작성일자 2015.04.10 10:53)#

만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의 남한 불개입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미국의 체계적 저항 및 국제사회의 지원 동원 우려는 없어야 하며, 단시일 내로 남한 점령을 끝낼 것이니 미국의 개입을 걱정 안해도 된다는 발언도 없어야 한다. 특히 김일성의 발언을 주목할 만 하다. 김일성은 애치슨 선언이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을 너무 얕보았던 것이다.

이제 1950년 이후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가 이루어진 원인을 알아보자.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한 것이며, 소련의 대북 군사원조의 원인은 다른 것이다. 1949년 중순만 해도 남한은 군사적으로 명백히 북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1949년 초중반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은 7만명이었고 북한군의 병력은 5만명이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북한이 북침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1949년 6월 미국이 남한에 주둔한 4만 5천명을 철수하고 500명 규모의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만 남겨놓자, 이들의 불안감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들은 남한 내 미군의 존재가 이승만의 북침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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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iet intelligence reports during April of American preparations to withdraw further raised Stalin's level of anxiety. After US forces departed, the
미군의 (남한) 철수 준비에 관한 (1949년) 4월 소련 정보기관 보고서는 스탈린의 우려를 깊게 했다. 스탈린에 따르면, 미군 철수 후

UN commission will also leave Korea. In April-May the Southerners will concentrate their troops near the 38th parallel. In June the Southerners will start a sudden attack on the North in order to finish the total destruction of the Northern army by August.
UN 한국 위원회도 한반도를 떠날 것이다. 4월에서 5월 중으로 남측은 38선 인근에 병력을 집중할 것이다. 6월에 남측은 8월까지 북한의 군대를 박멸하기 위해 기습 북침을 개시할 것이다.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이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확대하기로 결정한다. 매트레이의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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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ating Stalin's decision to expand North Korea's military capabilities was more a desire to ensure the DPRK's survival than to promote aggressive expansion. Regardless of the reasons, Shtykov reported on 10 February that predictably Kim Il Sung received word of the decision "enthusiastically and several times asked me to communicate to Comrade Stalin his gratitude for his assistance." Shtykov informed Kim Il Sung on 12 March that the Soviet government would approve his request to use the 1951 credit during 1950. Three days earlier, Shtykov had transmitted to Moscow a note from Kim Il Sung requesting that the Soviet government send military-technical equipment to North Korea in the amount of 120 to 150 million rubles. This was pursuant to Stalin's approval of his previous request for help in providing an enlarged KPA with arms, ammunition, and technical equipment. In return, the DPRK would send the Soviet Union 9 tons of gold, 40 tons silver, and 15,000 tons in monazite concentrate, worth a total of 133,050,500 rubles. Kim Il Sung asked that the Soviets dispatch the requested military supplies as soon as possible. On 16 March, Shtykov sent Moscow another note from Kim with an attached seven-page list that itemized the KPA's needs in the categories of artillery armaments, ammunition, engineering supplies, military-medical equipment, and military aviation supplies. Kim Il Sung stated his hope that the needs of the "young republic" could be met in the "shortest period."[31]
스탈린이 북한의 군대를 증강하기로 한 결정을 내린 동기는 침략적인 확장을 유도하기보단 오히려 북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이유에 관계없이, 2월 10일 시티코프는 예상대로 김일성이 "이 결정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스탈린 동지에게 원조에 대한 감사를 전해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3월 12일 시티코프는 김일성에게 소련 정부가 1951년 몫으로 배정해 둔 차관을 1950년 내로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그 사흘 전에는 모스크바로 북한에 1억 2,000만~1억 5,000만 루블에 해당하는 군사기술 장비를 소련 정부가 보내달라는 김일성의 요청이 담긴 메모를 전문으로 보냈다. 이는 스탈린이 이전에 인민군에 무장, 탄약 및 기술장비를 대폭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그 댓가로 북한은 소련에 금 9톤, 은 40톤, 모나즈석 정광 1만 5천톤을 보내기로 했으며 그 총액은 1억 3,305만 500루블에 해당했다. 김일성은 소련에게 가능한 빨리 군수물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3월 16일 시티코프는 김일성의 또다른 메모를 모스크바로 전했다. 해당 메모는 조선인민군에 필요한 물품을 포병 장비, 탄약, 공병 물자, 군사의료 장비, 군사항공 물자 별로 범주를 나누어 7쪽에 걸쳐 작성한 목록을 첨부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신생 공화국"의 요구 사항이 "최대한 빨리" 충족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즉 애치슨 선언보단 남한의 '북침' 위협(소련과 북한이 가정하던)으로부터 북한의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원조를 보냈다는 것이 매트레이의 결론이다. 사실 1950년 2월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 결정 이전에도 이미 1948년 12월(애치슨 선언 1년 1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만난 북중소 3개국 군사대표단이 신생 북한군을 위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시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 내용은 북한군의 6개 보병사단을 돌격사단으로 개편하고, 여기에 8개 전투사단과 8개 예비사단을 추가로 편성하며, 중국은 조선족 병사 2만~2만 5천명을 입북시켜 인민군의 기간요원으로 제공하며[32], 기갑부대는 소련이 제공하는 500대 전차로 2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하기로 되어있었다. 합의안이 원안대로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33] 남침을 결행하기는 충분한 전력이었고, 합의에 들어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공군 전력도 1949년 3월 Il-10 지상공격기, Yak-9 전투기 등으로 먼저 30대를 배송했다. 이게 전부 애치슨 선언 전의 일이다. 즉 소련과 중국의 군사원조는 애치슨 선언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미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트레이의 논문은 다음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맺는다.
(전략) Ironically, the Korean War began not because Stalin knew the United States would not intervene, but rather because he feared it would do so before North Korea eliminated the gravest threat to its survival.
(전략)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생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역자주2]을 제거하기 전에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었다.
James I. Matray. (Spring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22, no.1, p.28-55
애치슨 라인 선언 전후로, 미국은 지속적으로 남한 군사원조 및 유사시 군사개입을 천명했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선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사시 미국의 군사원조 및 개입을 명문화하고 수차례 공표했다. 박명림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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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에 하원에서 대한원조법안이 부결되자 1월 20일 장면 대사가 애치슨을 직접 만나려고 하였다. 이것은 애치슨을 직접 만나 의사를 확인해보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애치슨의 의회 출석 관계로 그를 만나지 못하자 장면은 미국무성 동북아시아담당 차관보 버터워스(W. W. Butterworth)를 만났다. 버터워스를 만나서 장면을 전날 대한원조법안이 하원에서 한국에 유리하게 처리되지 못한 데 대해 한국의 우려를 전달하고,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방위경계선에서 제외되고 또 전날 하원에서 대한원조 잔액분이 부결된 조치가 겹쳐 미국은 이제 과연 한국을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버터워스는 "그와 같은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한국의 위치는 어떠한 방향으로 방위선이 구획되더라도 그 선에 의한 이익의 정의를 초월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곧 애치슨의 인식 및 전술과 동일한 것이었다.

박명림. (1996).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나남, p.564
1월 26일에는 남한정부와 미국정부는 비공산국가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위해 1949년에 제정된 미국의 <상호방위원조법>(Mutual Defence Assistance Act)에 의거하여, 남한에 대한 미국의 방위원조를 명문화한 <대한민국정부와 미합중국정부 간의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내용의 온건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1월 12일의 '연설'보다는 더 항구적이고 법제화된 관계의 제정이자 지원규정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한켠에 작게 끼워진 1월 12일의 연설보다 결코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월 29일 애치슨은 "대한원조의 계속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이승만에게 발송하였다.* 결국 2월 9일에는 미국하원에서 대한원조법안이 가결되었고 2월 10일에는 이 법안이 상원을 통과하였다. 이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1월 12일의 연설에 대한 반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한은 환호하였고 북한은 더욱 비난의 논조를 강화하였다.
박명림. (1996).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나남, p.565
수정주의자들은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에 미혹되어 남침을 실행했다고 주장하나, 정작 이들은 미국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원조를 공언한 다른 선언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결국 애치슨 라인 선언이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다. 박명림 교수는 아래와 같은 말로 애치슨 선언이 남침을 낳았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만이, 북한을 고의적으로 유도하려는 애치슨의 의도를 알고, 또 자신도 유도하려고 미리 감사를 표시했다는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최악의 이중 악마적 논리로서나 가능한 상상일 것이다.
박명림. (1996).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나남, p.567

애치슨 라인 선언 이후 한국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1950년 초의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직전 미군이 국군 포병대 창설을 도우면서 포탄 낭비가 심하다며 대전차포탄 보급을 통제할 정도로 국군의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국군 포병대의 탄약 낭비가 상상 이상으로 심한 것이 현실이었다. 1949년 후반기 벌어진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4,700여 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T-34는 57mm 대전차포로 320m 이내에서 격파할 수 있고 실제로 철갑탄을 사용해서 격파했다는 증언, 기록이 있다. 물론 코앞에서 쏴서 맞췄는데도 튕겨나갔다는 증언 및 기록[35]도 있다.

게다가 당시 미국 자체가 한창 군축중이라 당장 24사단 전체에 대전차 고폭탄이 고작 18발에 불과했으니# 한국군에게 포탄이며 장비를 펑펑 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36] 여기에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북 강경론은 미국은 물론이고 UN 한국소위원회조차 우려를 표하며 한국군의 탄약 불출에 제동을 걸 지경이었다. 당시엔 중국이 무너진 상태였고,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핵 우위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 정부나 서로서로 고강도 도발 발언을 쏟아내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조마조마한 것도 당연. 이는 처음부터 미국이 한반도에 설사 무력충돌이 나더라도 48~50년 상황같은 저강도 국지전이 지속되리라고 보고 있었고, 한반도 전쟁 특유의 화력전 양상은 미국은 여태껏 듣도보도 못한 방식이라 그런게 가능하리라 생각도 못하고 한반도 지형이면 산악전이나 얼마 안되는 좁은 공간에서 기동전하면 되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5.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나는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I believe that we must assist free peoples to work out their own destinies in their own way). 47년 3월 미 의회, 트루먼 출처#
트루먼 독트린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해리 S.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원조 개시를 역설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조지 C. 마셜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마셜은 이제 소련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미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국무차관은 딘 애치슨이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또 하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상원의원들은 경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극동(Far East)전쟁에 개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마셜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 달러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 달러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6. 대중매체

대체역사소설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37]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6.25 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사후에도 비난받는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38]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1] 쿠릴 열도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비록 소련이 서명을 하지 않았으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이 포기한다고 서명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자연스럽게 점유하기는 했으나, 이후 미국은 1953년경 소련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곡해하여 수용하지 말라' 면서 그 예시로 일본의 북방 영토를 들기도 했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09-310[a] [4] 만약 소련이나 미국이나 한반도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애초에 분단이 될리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에게 한반도가 중요했으면 미국의 저항에도 38선 이북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대전>대구>부산을 밀고 기어코 제주도, 울릉도독도까지 점령 했을 것이며, 미국 또한 오키나와하지가 아닌 북지의 웨드마이어 장군을 곧장 한반도로 투입시켜 압록강두만강, 백두산, 평양 인근으로 상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강대국 모두 소련은 만주를 미국은 일본 열도를 중요하게 여겼지 한반도는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결국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인용자주1] 당시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소죽 임병직(1893~1976)을 가리킨다.[인용자주2]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 가리킨다.[7] 이 때문에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까진 미군 소속 필리핀군 고문직이었다.[8] 또한 독립 직후부터 맺은 몇차례의 조약을 통해 상당수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확고한 친미국가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가장 먼저 맺은 상호방위조약이 미비상호방위조약인 것은 이유가 있다.[9]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10] 심지어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M26 퍼싱 전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군축 탓에 보급이 시원찮아서 극동군에서 오키나와 등에 유기물자를 회수하여 부품으로 이용할 정도로 열악했던 것. 그 얼마 안 되던 퍼싱조차 일본 내 공장에서 급조하여 만든 저질 부속품 때문에 한국에 상륙한 뒤 얼마 안 가서 퍼져나가 전차병들이 환장했다고...[11] 미국은 아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유엔 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 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 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6.25 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12] 미 공군은 핵무기와 폭격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므로 해군이 퍼먹는 예산이나 좀 줄이고 자기들 잘 봐달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었으나 해군은 이에 반발하여 제독들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미군 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13] 뉴욕이나 워싱턴 D.C.같은 미국의 심장부가 동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은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대서양만 건너면 도착하는, 태평양 너머의 아시아보다 지리적으로 소련의 위협에 가끼이 노출된 상태다. 더구나 미국의 다수이자 주류를 이루는 미국 백인들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계 사람들이다.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위협을 보다 심각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때 당시 미국의 최대 위협은 소련이지 중국이 아니였다.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고 최대 위협이 돼 집중 견제를 받는 건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국을 다른 국가로 비유하면 지금의 인도와 비슷하다. 지금 2024년 현재 인도를 견제한답시고 인도 주변국에 미군을 대거 주둔시키면 이상하게 볼 것 아닌가?[14] 6.25 전쟁 초기에 백선엽, 김종오 등 좋은 성과를 거둔 명장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도 미군 고문과의 원활한 소통이었다.[15] 소총은 물론 적지만 Ki-84 하야테치하, 하고 등 중장비도 있었다. 6.25 시점 개발된지 5년이 넘어가는 구형이었지만 지상지원이나 대보병전투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16] 사실 애치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미국 정부나 미국 의회, 미국 정보부에서도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지금이야 들 때문에 백악관 내에서도 아시아 전문 자문관들이 배치되어있지만 당시는 현재 21세기같은 동아시아 정세가 형성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17] 물론 이는 결과론이긴 하다만 만일 대한민국과 대만이 공산화되었다면 미국은 그야말로 일본과 필리핀 둘로 미국의 최후 방어선을 삼아야 하는 악몽과 같은 시츄에이션에 처해졌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몇년 후엔 이 사건마저 터지고 말았으니 필리핀도 위태로왔기는 마찬가지였을지도 알 수 없다. 동남아까지 공산화할 위급한 상황에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된 이후였으면 결국 남은 건 일본 뿐이었을 텐데 그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만큼 미국에게 악몽이 될 일은 없다.[18] 가령 이승만은 미국에게 북한이 해주에서 서울까지 포격이 가능한 대포 4문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거리는 70km가 넘는다. 미국 또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19] 북진통일을 고집한 것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한국민의 정치/정신적 결집을 강화하고 사기와 전의를 북돋워주기 위해서”라는 주장과,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선전도구”로서, 그리고 “미군 철수가 감행되는 시점에서 그것을 늦추거나 철군에 따른 보상과 보장을 받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높일 필요”라는 등의 여러 분석이 있다. 물론 진실은 이승만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만.[20] Kim Chull Baum, "A Triangle of Kim, Stalin, and Mao in the Korean War," Conference on "The Korean War: An Assessment of the Historical Record," Georgetown University, 24-25 July 1995, pp. 2-3; Kim Hakjoon, "Russian Foreign Ministry Documents on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Conference on "The Korean War: An Assessment of the Historical Record," Georgetown University, 24-25 July 1995, p. 7.[21] Notes on Conversation, 5 March 1949, in "Cold War Crises," CWIHPB, Issue 5 (Spring 1995), pp. 5-6; Evgueni Bajanov, "Assessing the Politics of the Korean War," p. 54.[22] Terentii F. Shtykov to Andrei Y. Vyshinsky, 19 January 1950, in "Cold War Crises," CWIHPB, p. 8; Kathryn Weathersby, "'Should We Fear This?': Stalin and the Korean War," Conference on "Stalin and the Cold War," Yale University, 23-26 September 1999, p. 5.[23]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의사록 No. 71/191, 정치국 의사록 71호 191 항목에 대한 조선주재 소련대사에 대한 훈령,” 1949년 9월 24일, 한국전쟁(1950. 6. 25) 관련 러시아문서: 기본문헌, 1949~53 (서울: 대한민국 외무부, n. d.), pp.74~76; “Politburo Decision to Confirm the Following Directive to the Soviet Ambassador in Korea,” 24 September 1949, Archive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 Fond 059a, Opis 5a, Delo 3, Papka 11, listy 75~77, in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5 (Spring 1995), pp. 7~8 ; 이완범, 2000 앞의 책, 69쪽[24]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1949년 10월 4일, 한국전쟁(1950. 6. 25) 관련 러시아 문서: 기본문헌, 1949~53 (서울: 대한민국 외무부, n. d.), p. 53[25] 4. With regard to the survey as a whole, similar internal histories that I, as well as other scholars working on the postwar period, have seen in recent months have been accurate in their factual details, though limited in their analysis and scope.[역자주1] 이 글이 실린 프로젝트(CWIHP)의 3차 회보(Bulletin No. 3)를 일컬음[27] This agrees with the account in Khrushchev’s memoir, which emphasizes that “the war wasn’t Stalin’s idea, but Kim Il Sung’s.” Strobe Talbott, ed., Khrushchev Remembers (Boston: Little, Brown, 1970), 367-8.[28] A recent statement of this interpretation is in Adam Ulam, The Communists: The Story of Power and Lost Illusions: 1948-1991 (New York and Toronto: Charles Scribner's Sons, 1992), 81-82.[29] Weathersby, "Should We Fear This?'," p. 11; Shtykov to Vyshinsky, 7 February 1950, in "The Cold War in Asia," CWIHPB, p. 36.[30] Central Committee report on the Visit of Kim Il Sung, in Weathersby, "'Should We Fear This?'," p. 12; Bajanov, "Assessing the Politics of the Korean War," p. 87; Denisov, "Korean War of 1950-1953," pp. 13-14.[31] Shtykov to Vyshinsky, 10 February 1950, Vyshinsky to Shtykov, 12 March 1950, and Shtykov to Vyshinsky, 9, 16 March 1950, in "The Cold War In Asia," CWIHPB, pp. 36-37.[32] 이들 조선족 정예병사들은 한국 전쟁에서 정예병력으로 활동했으나 격전에 휘말려 해가 지나기 전에 거의 소모되었다.[33] 전차 500대를 배송하기로 했지만 실제로 개전 직전 북한이 보유한 전차는 242대였다.[역자주2] 남한[35] 수원 등 여러 곳에서 전과를 냈는데, 아예 청주 전투에서 한 문으로 3대나 잡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36] 그럼 북한에게 전차를 수백 대씩 대준 소련은 뭐냐?고 묻겠지만 소련 역시 공짜로 대준 건 아니라 북한은 각종 지하자원 등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37]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38] 물론 앞서 서술했듯이 이는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